posted by RushAm 2015. 6. 2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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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아이들에게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누군가를 때리는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들에게 되갚아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라요. 


- 대체 내가 뭘 잘못했을까 - 하고요.


대체 왜 그들은 저를 때리는걸까요 제가 뭘 잘못한걸까요? 그리고 왜 선생님과 반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들도 제가 맞는 이유가 당연하다고 하는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만 맞을 수 있을까요?



<!>


넌 잘못한게 없어', '힘내, 괜찮아질거야' 

같은 원론적인 얘기는 집어치울게요. 이 코너는 '실용교과서'지 구역질나는 멘토서적이 아니거든요.


인간사회가 동물사회와 다른 점을 한번 말씀(http://rusham.tistory.com/235) 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해당 내용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그냥 사람들은 동물이 아닌 척 흉내만 내고 있는거지 사실 늑대소년 영화처럼 마냥 본성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살아가는 존재들일 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게 인류에게 있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합의'를 했을 뿐이지 그 합의가 도출된 순간 인간이 동물이 아니게 된 게 아니에요. 강력한 규율에 의해 그 본능이 드러나는 즉 마음가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큰 손해'와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집단의 힘이 있기 때문에 굴복하는것 뿐이죠.


그런데 그 본능이 가장 활발하게 에너지화하는 시기인 1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를 인류는 어처구니없게도 오랜 기간 '치외법권'으로 다스려왔어요. 청소년보호법, 청소년 면책 특권 등으로 말이죠. 물론 그 법은 청소년이 어떤 법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데에 따른 보상 차원임과 동시에 미성년자라는 타이틀을 통해 법적 지위를 가진 성년들이 그들의 갖은 권리를 응당 침해할 수 있다는 편리성때문에 이어져오고 있는거죠. 참정권을 포함해서 많은 권리를 제약당하고 있는 청소년을 통치하고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이끌어내고 싶어했던 국가가 그런 일방적인 권리행사가 헌법의 자유평등권에 침해되는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청소년의 범죄를 '치외법'으로 빼놓은 거에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딜'을 한거죠.



청소년들이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보상으로 치외법을 얻었다면 어른들은 청소년을 통치하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그 통치하는 청소년을 보호하고 그들의 범죄를 컨트롤하며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자세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어른들은 어떤가요? 과연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얼마나 책임을 지려 하고 있나요? 선생님, 사법부 그리고 그들이 반 강제적으로 할당한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의 '부모'들은 과연 얼마나 이에 대해 이해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요? 아마 안하고 있을거에요 그러니까 이지경이지...


그런데 요즘 뭐가 공론화되고 있는 줄 아세요? '청소년을 처벌하자'에요. 청소년의 범죄 처벌 연령대를 대폭 낮추자는 움직임이 공론화되고 있어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죠. 아니 법적으로 누리는 게 거의 없는데 처벌은 하겠다? 이게 무슨 개 풀뜯어먹는 소리입니까? 에초 쇼당이 안맞는 이야기잖아요. 청소년들에게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대신에 법적으로 처벌도 면제해줬던 걸 다시 빼앗겠다면 청소년들에게 참정권도 주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 지위도 부여해줘야 하는게 응당 맞지 않나요? 전 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와 열손가락 지문을 채취해가면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만드는 몇 안되는 희귀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말입니다.






당면한 현실을 되짚어볼게요.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사는 것은 향후에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히고 뭐 이딴건 다 집어치우고 진짜 손해가 막심한 거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 수 있어요. 그건 미성년자로서 제약을 받는 관련법에도 나와있지 않은 그냥 대한민국 국민이 태어나면서 탯줄 끊음과 동시에 부여받는 국민 기본권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은 굳이 친구들을 많이 만들 필요도 없고, 소심하게 찌질하게 살아도 되요. 혼자 교실에서 책만 읽어도 되고 친구들 화제가 굳이 흥미가 없어도 무리해서 의무적으로 끼어들지 않아도 되요. 즉 내가 하고 싶지 않은것, 내가 잘하지 않는 것을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할 필요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왕따'라는 단어를 굉장히 싫어해요. 왕따라는 단어는 그냥 '따돌린다'라는 거거든요.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각종 범죄들이 그냥 뭉뚱그려서 너무나도 소프트한 '왕따'라는 표현으로 치완되요. 그 속에 묻힌 '폭력', '성폭력', '쓰레기무단투기', '오물투척' ...심지어 '고문'까지 정말 구역질나는 액션들이 그냥 '왕따' 딱 한마디로 묻혀버리는거죠. 그리고 이 왕따라는 단어가 지극히 가해자 중심에서 만들어진 단어라는 점도 큰 문제에요. 왕따...즉 따돌린다는 건데, 피해자는 정말 아무런 액션이 없이. 가해자의 액션을 표현한 단어인데 정작 그 단어적 낙인은 피해자에게 붙여진다는거 참 웃긴 세상이죠.


'낙오 공포' 에 미쳐있는 사회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요. 어떤 사람은 매우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호탕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두루두루 사귀게 되죠. 그런 반면 어떤 사람은 별로 그런 걸 좋아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딱히 정답은 없어요. 어떻게 살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걸로 사회적 합의는 끝난거니까, 그런데 이노무 사회는 답을 정해놓은 모양이에요. 이미 기득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서 그들을 맹목적으로 팔로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내면과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하급화시키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있어요.


당연히 그 답은 사람들과 아무런 교류가 되고 있지 않은 소수보다 사람들과 교류를 많이 하는 소수쪽으로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 교류가 비폭력적이던 폭력적이던 일단 장악하면 그쪽이 갑이고 선이며 진리라는 사고방식이 다수결의 원칙처럼 굳어지게 되는거죠. 비폭력적이라면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편, 폭력이 수반되었다면 그 사람 편이 되는 쪽이 내게 있어 더 안전하고 안심이 되니까 그 사람 편이 되는 것, 그렇게 소수는 지지받지 못하고 다수에 의해 다수에 합류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는 게 이 사회에요. 제발 여기에서 끝나면 참 좋겠지만...





문제는 그 합류하지 않은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거에요. '다수가 진리다', '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라는 오지랖과 간섭을 끊임없이 부리죠. 그게 왜 그러냐면 그들 역시 자신들의 선택에 확신이 없는 한심한 사람들이라서 어떻게든 하나로 일원화시키고 싶어하는거에요. 소수 의견이 남아있으면 내가 정말 이게 맞기 때문에 선택한건지, 아니면 권력이나 대세에 휩쓸린 한심한 사람인지 헛갈리거든요. 그것조차 싫으니까, 소수를 어떻게든 내가 있는 다수에 합류시켜서 합리화시키고 싶어하는거에요.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거 잘 알죠?

만약 이런 대세적 움직임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슬슬 폭력을 가하기 시작해요. 그리고 그 작은 폭력은 곧 그들의 동의를 받고 있는 하나의 소수가 또다른 소수인 당신을 탄압하는 것을 방치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방점을 찍게 되죠. 그 소수가 당신을 강력하게 교화시키던, 혹은 그들이 늘 하던 대로 강력한 권력 혹은 폭력으로 당신을 탄압하던 그들을 따르는 대다수는 침묵해요. 그들도 알아요 그게 잘못되었다는걸, 하지만 그들은 이기적이게도 그것이 잘못된 것보다 자기 자신의 선택, 즉 인지부조화가 깨지지 않는 걸 더 많이 바라기 때문에 침묵하는거에요.





정말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성장한 사람 절반 이상이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러분들같은 청소년을 낳고 살고 있는 어른들이에요. 경찰도, 학부모도, 선생님도 말이에요.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뭘 잘못생각했는지조차 모른 채 똑같이 방관자로 살아가고 있어요. 난 노동자가 아니니까, 난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니까, 난 성 소수자가 아니니까, 난 극빈곤층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높게 성공한 사람 (대부분 돈이겠지만)을 비추어 추앙할 뿐 자기 삶이 없죠. 교실 안의 방관자들이 그냥 머리만 커지고 얼굴만 좀 늙었을뿐이지 텅텅 빈 가치관은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여러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그들은 피해자를 '찌질하다, 실패한 인생이다'라고 정의해버리고 있어요. 가해자에 이미 빙의하고 있으니까 가해자의 시점으로 보면 '나같아도 그랬을거야'라는 어처구니없는 공감대를 펼치고 있는거죠. 내가 너라도 진짜 패고싶었을거야, 내가 그 사람이었더라도 진짜 강간하고 싶었을거야 같은...그런 것들, 그런 결론을 도출하고 싶어하니까 그렇게 피해자의 인적사항에 관심이 많은거에요. 가해자에 공감하기 위해서, 피해자 여성은 얼마나 이뻤는지, 피해자 학생은 얼마나 사회부적응 찌질남이었는지를....



가해자에 대한 검증 노력은 조금도 없는거죠.




...해법을 이야기할 시간인데 마음이 좀 갑갑해집니다. 그래도 뭔가 이야기는 해드려야겠죠


현행법상 청소년이 절대보호를 받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선생님이 대신 뭘 하던 그런거 없고요. 부모도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알잖아요. 위에 적은 인생을 살아온 그 방관자들이 당신을 위해 뭘 해줄 수 있는 건 조금도 없어요. 여러분은 누군가를 때리고 싶지 않은 인생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너도 한대 때려!'같은 무식한 소리에는 일단 귀를 닫으시고요. 때리면 즉시 '신고'하세요. 혹시 신고할 여력이 없으신 분들이나 신고하면 더 큰 보복이 될까봐 두려워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고 그 기분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인생관을 가장 덜 깎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주먹보다 법이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아요. 


자기가 손해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교사들이 당신에게 이런 저런 회유책이나 자기만 믿으라는 식의 헛된 개소리를 지껄이거나, 학교에 먹칠하거나 풍파를 일으키지 말라는 협박을 하더라도 결코 굴하지 마세요. 방관자들은 사실 무섭지 않아요. 당신보다 더한 겁쟁이거든요.


만약 경찰조차 방관자로 자라온 꼰대라면 다른 경찰에게 사건을 재배정해달라고 하시면 되요. 꼰대검찰이 '이깟 애들 장난'이라고 던져버리거나 혹은 가해자 부모님이 금수저라서 대충 봐주고 사건을 덮어버리거나 하면 다른 검사에게 사건 재배정을 요청하고 해당 경찰과 검찰을 업무 태만으로 공무원윤리강령 위반 신고를 해두세요. 방관자들은 진짜 어리석은게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게 뭐든 날아와야 그제서야 이쪽을 바라보는 속물들이라서 일단은 당신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빼고서라도 조금 덜 하기 싫어하는 수단을 총동원해서 그 방관자들이 당신을 괴롭히는 소수에게 칼을 겨누도록 해야 하는거죠.


...



미안합니다.

사실 정말 답이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여러분은 잘못되지 않았어요.



절대!


posted by RushAm 2013. 11. 9.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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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를 정해야 할 때라고 다들 말해요. 어떤 대학 어떤 전공을 들어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겠고, 저는 학교에서 지금까지 내신 관리하라면 관리했고, 수능 공부하라면 맞게 수능 공부를 해왔거든요. 다 끝나니까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진로 상담을 해도 그냥 점수 맞춰서 가라거나 취업율 높은 대학이나 학과를 권하고 있어요. 그냥 선생님이나 부모님 말씀 계속 들어도 되는 걸까요? 그러면 정말 세상에 필요한 인재가 될 수 있을까요?


<!>

네 그러면 세상에 필요한 인재가 될 수 있어요...끝



...은 농담이고 질문의 주객이 전도되었네요. 친구의 질문은 마치 '내가 지금 뭘 하고 싶은지 맞춰볼래요?'라고 묻고 있는 것 같거든요, 친구가 잘못했다고 탓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사회교과서잖아요. 어쩌면 친구에게 제일 필요한 이야기를 오늘 해드리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기 위해서 쓰고 있는 교과서거든요.


친구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진로를 대신 정해주고 그 뒤를 따라가고 싶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이유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지금까지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죠. 선생님과 학부모들의 대표적인 수험생 달래는 패턴 '그런 건 수능 끝나고 생각해' 라는 말은 술 마시기나 다른 유흥에는 충분히 통용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친구의 진로에는 통용되지 않을수도 있어요. 내가 뭘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건 잉여시간 6개월만에 확립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10년도 걸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깨닫지 못하기도 하는데, 하루이틀 조차 자기 시간을 갖지 못했던 수험생들에게 이제부터 1,2개월간의 다시오지않을 시한부 휴식기간동안 머리 싸매고 진로를 생각해보라고 세상에 던져놓는다고 해서 그게 가능할 턱이 없어요.


태풍따위 부러워하지 말고


다시 말하지만 사회교과서에서는 그런 여러분들에게 '무능하다'라고 책망할 생각이 없어요. 어쩌겠어요.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지금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짧게는 1개월 안에 여러분들이 가능한 더 많이 생각해보고 진로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뿐일거에요. 수능 대비 지문 읽는 연습으로 인해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우리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즐거운 생활이었나 바른 생활이었나 교과서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아무튼 그 시간에 선생님은 이제 막 자라나서 12년동안 학교에 정 붙이고 살아야 할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던졌어요.


여러부~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1.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 2. 있으나 마나 한 사람, 3. 세상에 필요가 없는 사람, 자 어린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요?


아이들은 모두 손을 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있고 칭찬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선생님에게 '네 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라며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데 여념이 없었어요.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한 부흥회는 결국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의 간증을 끝내고 선생님의 얼굴에서 만족감이 흘러 넘쳐 뚝뚝 떨어져야 비로소 끝나곤 했죠. 그런데 그 와중에 분위기를 깨는 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네 선생님 저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어요. 그리고 애써 쓴웃음이라도 보이며 아이에게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얼마나 안좋은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어요. 차마 손발이 사라질 것 같아서 그녀의 말투를 묘사하지 못하는 점은 양해를 바랄게요. 아무튼 그녀의 노력은 결국 마지못해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시늉을 한 아이의 입장 정정이 있고 나서야 겨우 끝났죠.


...


그 아이의 대답은 결코 철부지의 그것이 아니었어요. 그 아이는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수동적 타의성'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죠. 사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도 결국 누군가에 의한 상대평가일 뿐이지 자기 자신이나 그 외의 사람들에 의한 절대평가가 아니라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내가 꼭 필요한 일을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어요. 적어도 내가 뭘 하는지에 대해 오지랖 간섭질은 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을거라는 이미지가 그 8살 아이의 머릿속에 떠오른거죠.


학교 교육 12년동안 여러분들은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 하에 육성되어왔어요. 사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냐면 사회가 잘 되기만 한다면 꼭 필요한 사람만이 육성되어야 하고 필요없는 사람은 응당 도태되어야 한다는 이분법을 내포하고 있거든요. 이미 교육 단계에서 낙오자에 대한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는 거에요. 이런 분위기는 고스란히 교육 현장의 압박감을 조성해서 꼭 필요한 사람, 반드시 타의적으로 평가받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며 길라잡이로 하여금 인정받을 수 있는 그들의 마음에 들 수 있는 길을 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전파시켜요. 지금 막 수능을 본 여러분들은 그 압박의 터널을 끝까지 완주한거에요. 여러분들에게 축하를 건네고 한편으로는 위로를 건네며 또 한편으로는 측은지심을 보이는 이 모든 시선들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달려온 길이 오롯이 여러분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거에요.


1등급++이네요 '소'가 참 기뻐하겠죠?


12년만에 햇빛을 본 여러분들에게 눈부셔죽겠는데 이제 빛을 줬으니 얼른 눈앞에 있는 수많은 옷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입으라고 해요. 여러분들은 단 한번도 옷을 입어본적도 없는것은 물론 옷 자체가 있는줄도 몰랐는데 그냥 밝아졌으니까 이제 눈이 보이기 시작하게 해줬으니까 서둘러 입고 가라고 재촉해요. 여러분들은 우왕좌왕하는게 당연하고 옷을 잘 못입는 주변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스스로 옷을 고르는 데에 실패하고 누군가가 골라주길 원하게 되죠. 자신의 선택에 대한 두려움과 남이 내 선택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공포심이 함께하고 있는거에요. 뒤에서는 빨리 입고 가라며 재촉하고 미처 옷을 챙겨입지 못한 사람들은 부랴부랴 그 중 많이 선택하는 옷을 입거나 많이 남아있는 옷을 고르거나 둘 중 하나에요. 미처 옷을 입지 못한 채로 알몸으로 우두커니 서서 고민만 계속하는 사람들은 이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죠.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알몸이야?'



...


우울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한다거나 어떤 현실을 미화하려는 생각은 없어요. 다만 여기에서 이제 막 수능을 끝낸 여러분이 하셔야 할 첫번째는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탈출하셔야 해요. 이거 굉장히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관념인데다 12년동안 새뇌까지 당한 여러분들에게 단박에 벗으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주어진 시간에서 가장 빠르게 진로를 선택하려면 적어도 누군가에게 내가 인정받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부터 나오셔야 할 거에요. 물론 여러분들 대부분이 회사에 들어가서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일을 하는 피고용인이 된다면 제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 하셔도 늦지 않는다는 거에요. 적어도 자신의 진로를 생각할때까지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진 자기 인생은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게 될 지도 모르거든요.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회에서도 여러분들을 신경쓰지 않고 여러분들도 주변 사람들이 뭘 하는지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마세요. 그리고 다시 한번 가야할 길을 보시는 겁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에게 들리는 조롱에는 귀를 닫으세요. 적어도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특별히 간섭을 하려 들지는 않을테지만 나처럼 살라며 얼른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새뇌시키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니까 조심하시고요. 핵심은 여러분들이 영원히 있으나 마나 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시기부터 '꼭 필요한 사람'을 목표로 인생을 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에요. (몇 번을 강조해서 미안하지만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라 그래요)


기업 성패를 남탓으로 돌리고 싶은 사장님들이 많이들 읽는 책이에요.


...


있으나 마나인 분들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서 탈출하신 분들이에요. 적어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될 위험은 조금 덜게 된 거죠. 이것만으로 절반 이상은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제가 하는 이야기도 약간은 모순된 것일지도 몰라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따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면서 저 자신은 교과서에다가 제가 말하는 대로 하라고 또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다만 가능한 지금 주어진 여러분들의 환경은 지금 당장 바뀔 수도 없고 바뀐다고 해도 여러분들에게 바로 소급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저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여러분들에게 지금 할 수 있는 한의 최대한이 될 수도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쓰고 있으니까요.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평가할 시간입니다. 물론 공부만 똑같이 열심히 하던 사람들에게 어떤 개성이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고 그 개성을 스스로 찾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뭐하지만 아무튼 본인의 능력치나 스펙 뭐 이딴 게 아닌 리트머스 종이를 입에 물고 색깔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듯 성분분석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거에요.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오래 해도 질리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좋아요. 아주 추상적이어도 상관없어요. 가령 난 세계 최강이 될꺼야라는 결론이 나왔다고 치면 사슬이 돌고 돌아 결국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세계 최강이 되는 길이 보이게 되거든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거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질거야, 뭐 이런 것도 마찬가지일거에요. 꿈이라는 건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꿈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마치 인생이 재미없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말동무같은 존재가 되어주어야해요. 많은 자기계발자들이 꿈이라는 존재에 대한 강박관념때문에 자신을 채찍질하고 결국 몸이 골아버리는 경우를 너무 흔하게 봐왔는데, 꿈이라는 존재조차 남에게 보여지는 악세서리 취급 가치관의 세상에 살고 있어서 그래요. 굳이 꿈을 너무 갖는 것 자체에 집중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인생은 꿈조차도 간섭할 권리가 없어요.



방향이 정해졌으면 이제 세상과 타협할 시간이에요. 내가 어떤 걸 이 세상에 지불하고 내가 생각한 그것을 따낼 수 있는지 진지하게 포커 게임을 해보는 거에요. 흔하게 대학등록금이 들어갈수도 있고 어떤 스쿨의 수강비용이 될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긴 시간이 필요할수도 있어요.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무지무지 많이 만나러 다니며 자신을 알려야 하는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할수도 있는거고요. 제각각 지불해야 하는 것들의 형태도 다르고 그 결과도 천차만별이에요. 그렇게 주판을 튕겨보는거죠.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떤 것도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된다는거에요. 돈이 많이 들어가면 진로를 바꾸지 말고 우회로를 찾으시고, 담금질의 시간 동안 주류에서 멀어진 것에 대한 소외감이 걱정된다면 굳이 담금질을 계룡산에 처박혀서 도닦듯 할 필요는 없으니 대학 들어가서 대학생 생활 해보면서 준비해도 괜찮다는 거에요. 


수능 보고 오신 분들에게 너무 길고 지루하면 안될텐데 이미 길어졌지만 아무튼 이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거에요. 젊어서 바싹 벌어서 노후가 초라하지 않게 대비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지금 당장 반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진짜 오싹하겠지만 우리 중 누군가의 인생은 그 열심히 준비했던 노후라는 것을 겪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그게 인생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나중을 즐기라는 식으로는 절대 접근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인생은 종착역에 가는 과정 1년 1개월 1시간 1분 1초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야 후회가 없거든요. 준비가 고통이면 완성되었을때의 쾌감은 완성 그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고통에서의 해방에 따른 것이라는 걸 여러분들은 수능으로 충분히 아셨으리라 믿어요.



가는 길이 굳이 고통일 필요가 없어요.


...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여러분들의 인생은 컨티뉴, 리벤지는 있어도 리셋은 없다는 거에요. 어떤 길을 가더라도 돌아오는 길은 반드시 잊지 마시길 바래요. 되돌릴 수 없는 일은 하는 데에 정말 많은 생각을 하시고 시간을 들이세요. 혹자는 주저없이 순간 미친사람처럼 내지를 수 있어야 인생에 진정 미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한 사람들은 리셋이 이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일 뿐이잖아요. 인생 언제든 어느순간에든 실패할 수 있어요. 당장 수능도 그렇잖아요. 수능에서 실패했다고 벌써 어떤 여학생이 또 올해도 이번에도 어김없이 죽었어요. 리셋 버튼이 필요한데 리셋 버튼이 없으니 그게 너무 좌절스러웠던 거죠. 길을 오는 데 돌아오는 길을 봐 두지 않았으니 막다른 낭떠러지에 다다르니까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뒤에서 몽둥이 들고 쫒아오는 선생님 부모님이 무서워 뒷걸음질치다 저도 모르게 떨어진 타살과 뭐가 다른가요? 


여러분들은 수능이 참 무서웠을거에요. 뒤에서 여러분들을 위해 기대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이 벼랑 끝에서 여러분들에게 극딜을 남발하고 여러분들은 뛰어내리느냐 마느냐만 남긴 채 이판사판인 심정으로 시험을 봤을 거에요.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부칠 필요가 없어요. 항상 가던 길은 뛰어가더라도 젊은 헐기로 대쉬하느라 주변 풍경이 흐려지더라도 언제든 뒤로 돌아갈 수 있다라고 스스로에게 믿음을 줄 수 있도록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외워두자구요. 그렇다고 무슨 저축이나 보험 같은 걸 들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언제든 넘어졌을때는 컨티뉴, 막다른 길에 부딪히면 언제든 리벤지 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에게 믿음을 주라는 거에요.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지 내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지킬 수 있을 거에요. 이제 그걸 스스로 해나가야 하는, 롤러코스터에 타고 올라가는 딸깍소리를 들으며 언제 끝나는지 얼마나 크게 떨어질지에 대한 불안과 환희가 동시에 함께하는 바로 그 시기인거에요. 아무리 무서운 롤러코스터라고 해도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 분명히 있잖아요. 불안하다고 무섭다고 중간에 뛰어내리지 말라는 거죠.



여러분들에게 참 쉴 틈을 안 주는 세상이에요. 수능 끝났더니 진로 정해라, 면접 준비해라, 대학 눈치싸움 해라, 재수할지 안할지 결정해라, 여태 하라는 대로 다 했더니 이제와서 이런식이라니 참 힘빠지고 지치는 일이에요. 뭐 그리 하라는 게 많은지 모르겠죠? 지금은 그냥 ㅗㅗ 날려주시고 조용히 자신의 입에 리트머스 종이를 하나 물고 며칠이든 몇주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잊고 '내가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네요. 내가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면 인생을 후회없이 살고 쓰러져도 일어날 수 있으며 떨어져도 절벽에 매달릴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거에요. 어쩌면 수많은 돈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그럴싸한 회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노후대비 방법일수도 있어요. 


...


꿈은 포기해도 되요.

근데 인생은 포기하지 마세요.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여러분이라면....충분히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7장 - 수능도 끝났는데 이제 뭘 해야 하죠 를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3. 10. 2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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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교다닐때는 말이죠.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진 자유민주주의평등국가라고 제일 처음에 배운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제가 정작 사회에 나와 살아보고 주변 친구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지켜보자면 그때 배운 게 맞나 싶기도 해요. 우리는 정말 직업에 귀천이 없는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게 맞나요? 왜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굽실거려야 하고 그 화풀이를 꼭 누군가에게 해야 하는 폭탄돌리기를 하며 살아야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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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이 거짓말한게 그것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공화국 사회교과서 1장에 보시면 학교가 절대 정직한 집단이 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너무 순진하셨어요. 하기야 그때 순진하지 않으면 언제 또 순진해봅니까? 꼭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걸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세대들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여지 자체를 주지 않는다는 건 좀 우리만의 문제이긴 해요.




흔히 대통령이 국민 아래에 있고 모든 권력 국민에게서 나온다 뭐 이런 이야기가 헌법에 쓰여있잖아요. 근데 그걸 체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이고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자신들의 사유재산을 챙겨먹기도 하죠. 그럼 왜 이 헌법이 존재하느냐, 명목상인거에요. 사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에초에 과거 봉건주의 사회와 관료주의 사회의 모델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모양새거든요. 당연히 시행 초반에만 반짝 컨벤션 효과를 냈었겠지만 고무줄 돌아오듯 금새 사람 사는 사회는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채로 회귀하고 있는 거에요. 


왜 이 사회는 평등하지 못할까요? 그리고 앞으로 정말 평등한 사회란 올 수가 있을까요? 당장은 해답을 드리지 못하겠지만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


나랏님 탓


흔히 하는 착각중에 하나가 지금의 공화정에 비해 절대왕권봉건주의 사회에서는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며 백성들은 결코 이 권력에 저항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는 거에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봉건주의 사회는 그만큼 계급화가 명확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각 벼슬이나 왕권이 지금의 공화정제 관료들보다는 훨씬 공고하고 표면적으로는 영구집권과 세속이 가능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요. 근데 진짜 그랬을까요? 그리고 지금 공화정이 영구집권과 세속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긴 한가요? 


공화정 하에서 정권을 잡은 자들


대통령과 일개 시민이 평등하다고 교과서에서 늘 배우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죠? 대통령이 가진 국가 권한은 너무나도 막강해서 국가를 개인 사적 감정으로 패망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과거 조선의 왕들이 군사를 일으킬 때 백성들 중 건장한 청년들을 차출하는 것처럼 대통령 산하 국가조직 역시 젊은이들에게 명목상으로는 '자율적'이지만 헌법상의 의무라고 못을 박아둔 채 병사를 차출하고 또 이용하는 모습은 전혀 다를바가 없잖아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서 몸 아픈사람 빼주고 부양가족 있는 사람 빼주고 그런다고요? 조선시대라고 그런 거 없었던 게 아니에요. 조선시대에는 심지어 '결혼'만 하면 애를 생산해야한다는 의무를 지기 때문에 전쟁에 차출되지 않기까지 했어요. 다친 사람이나 지병 있는 사람은 말할것도 없죠. 지금 병역 면제 기준 한번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마 면제를 받는 것이 조선시대에 비해서 과히 민주적이고 간단하지 않다는 건 징병대상자가 되어본 남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지금은 민주주의라서 대통령이 뭐 잘못하면 국민들이 힘을 모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왕권주의보다 낫다고 보는 분들도 있어요? 근데 그게 반드시 공화정이 되고 나서야 겨우 생겨난 특권일까요? 정말 왕권주의때에는 그런 일이 없었을까요? 적어도 우리나라에 한해서는 그게 아니었어요.


조선왕조 500년 실록을 보면 우리나라 왕 중에는 종이나 조로 끝나는 사람도 있는데 드물게 '군(君)'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어요.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대표적이죠. 그들이 폭군이라서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알고 있는게 일반적이에요. 그런데 이상하죠? 왕권이 절대적인 왕권주의국가에서 폭군이었다고 해서 한낱 서기관따위가 임금 역사를 그따위로 기록한다니 말이에요. 그리고 에초에 폭군이라고 평가를 한 주체가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기본적으로 왕이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 하나 좌지우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쉬운 걸 왜 못해?


...


연산군의 기록을 보면 이런 얘기가 있어요.


- 조선 연산군은 매사냥을 경기도 청계산으로 다녔는데 매번 한강에 부교를 설치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 


매사냥이 뭐냐, 당시 동시대 유럽 귀족들의 필수 교양이라고 할 만큼 가진 자들의 평범한 취미 정도였단 말이죠. 왕이 문제가 아니라 흔히 부르는 공작 백작 남작, 우리로 말하면 고을 원님들도 흔히 즐기던 수준이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왕이 그거 좀 한다고 백성들이 무려 '원성'씩이나 냈다라는거죠. 이건 당시 왕권이 약하고 강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 조선의 봉건주의가 일반적인 유럽의 봉건주의와는 그 궤를 달리했다는 이야기가 되요. 



우리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봉건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유럽의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강한 왕권과 정복자, 지배자, 피지배자로 나뉘어지는 복잡한 유럽의 역사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그 봉건주의 말이죠. 그런데 역사 교과서 주장대로라면 침략을 수도 없이 당하기만 했을 뿐 어디 하나 침략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순둥이 국가 대한민국의 봉건주의가 이들과 성격이 같다는 건 분명 모순일 거에요. 한마디로 지금 현대의 많은 국가들은 봉건주의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는 역사의 수순을 밟고는 있지만 그 공화정 자체의 성격이 어떤 나라에서 만들어진 획일화된 기준으로 모든 나라에 적용시키기에는 그 한계가 분명 있다는 거죠.


유럽의 봉건주의는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데. 기본적으로 지배와 피지배, 타민족과의 경쟁, 그리고 전쟁 수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몇십배에 달해요. 전쟁이 많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만큼 체재 전복에 대한 위협을 왕이 깊숙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지배와 피지배 타민족과의 경쟁이 반복된다는 것은 전혀 뜻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은 민족들과 국경 속에서 합의 하에 같이 살아가야만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단일 민족이었고 삼국 시대 뒤엔 고려가 생기고 그 뒤엔 조선이 생기고 그 뒤엔 일제침략기를 거쳐서 대한민국이 생기는 사슬 구조의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는 거에요. 


이런 환경에서 왕이 과연 백성들을 믿고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펼칠 수나 있을까요? 내일 당장 전쟁이 벌어져 순식간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외부 민족들이 공존하는 백성들 중 그들이 진정 우리 편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불투명한데 그들을 모두 백성으로 인정하고 나라의 안정을 꾀할 틈이냐 있었겠냐는거에요. 게다가 공작, 백작, 남작 이런 단어에서 알 수 있겠지만 당시의 왕 제도는 중앙집권체계가 아니라 암묵적으로 군소 국가들이 연합해서 연방을 구성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각 지역 영주들의 권력은 그 지역 내에서는 왕에 필적했어요. 유럽 중세 소설을 보면 사실 왕이 와서 행패를 부리는 모습은 별로 없고 백작이나 남작, 후작 같은 사람들이 악역으로 많이 등장하잖아요. 그만큼 그들의 권력이 그 지역 내에서는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사정이 이런데 과연 왕이라는 존재가 온 백성을 아우르는 성군이 될 수나 있었을까요? 당연히 각 영주들보다 더 위에 있으려면 더 많은 권력과 권세를 누리지 않으면 안되었던거죠. 왕은 일반 백성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각 지역 영주들이 사실상 그들의 왕이나 다름없었어요. 각 지역 영주는 이변이 없는 한 대물림되며 세습되었고 왕이 특별히 문제를 삼지 않는 한 세습을 트집잡을 수도 없었던거죠. 우리나라는 어땠나요? 부패한 관리가 있다는 탄원이 중앙정부로 접수되면 암행어사가 떠서 싹 쓸어버리는 장면 익숙하시죠? 유럽에서 이 장면을 보면 눈이 휘동그래질거에요. '아니 어떻게 감히 영주한테 개길수가 있지?'



우리나라는 이미 조선시대때부터 영주는 물론이고 왕조차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면 폭군으로 기록되며 유럽에서는 남작 나부랭이도 하는 매사냥조차 백성들 눈치를 봐야하는 그런 봉건주의를 가진 나라였어요. 물론 왕권이 강력하다는 것은 이견이 없지만, 그 왕권자체의 강력함과는 별개로 백성들이 느끼는 삶의 질과 정치적 참여에 대한 권리는 유럽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는거죠. 대부분의 민란들도 결국 범국민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한건 조선 후기의 그 악명높은 허수아비 선조 시대 안동 김씨 세력들이 득세할 때 본격적이었지 실제로 중국의 통일국가 역사에 비추어보아도 이렇게까지 반란에 대한 기록이 적은 나라가 또 없어요.


이런 백성친화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가 왜 민주주의 국가에 이르러 이모양이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하실거에요. 그 해답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일본을 공격해야 해요.


...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뿌리를 찾기가 참 애매해요. 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 국가가 아니라 대통령제 국가이기 때문에 굳이 가져오자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표방해야 하죠. 그런데 미국처럼 연방제국가가 아니기때문에 단일국가의 민주주의 모델로 개량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이 개량 작업을 해야 할 시기에 딱 일제강점기가 겹치게 되요. 뼈대는 미국식 민주주의인데 속살은 일본식 민주주의라는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감이 안오시겠지만 일단 들어보세요.


일본은 입헌군주제국가이므로 당연히 왕이 있어요. 따라서 일본의 민주주의 하의 정치적 최고권력자는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런데 이 왕의 존재 자체가 일본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신'과 같은 위치에 있거든요. 일본 여행을 하다보면 신사(神社)가 있고 데라(寺)가 따로 있다는 것에 의야해보신 분들이 있으시겠지만, 일본은 그 동네, 혹은 그 지방의 큰 어르신이나 그 지방을 개척한 토호를 신으로 모시는 데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어요. 이런 문화는 중국에도 있는데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나 조자룡이 출생지역 상산 등지에서 신격화되고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물론 일본쪽이 훨씬 더 맹목적인 구석이 있지만요.



이런 문화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섬나라이다보니 불교 문화가 태동되기 전까지는 이렇다할 종교가 침투될 여지가 없었고 그렇다보니 토착 종교 즉 토템이 발전을 거듭하여 된 모양새가 조상신을 넘어선 그 마을, 더 넓게는 나라의 국왕을 신으로 모시는 풍토가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겠죠. 이건 사회교과서 5장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예전 이집트에서나 볼 수 있는 굉장히 원시적인 종교 문화에요. 그만큼 교류 자체가 적을 수밖에 없었던 섬나라의 폐쇄성이 만들어낸 특이점이라고 보는 게 맞을거에요.


이런 토착 종교 문화는 국가 문화를 극도의 보수성으로 옭아묶게 되요. 일본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통일을 하기 전까지는 4개 국가에 수십개의 크고 작은 통치 지역으로 나뉘어져서 통치되었는데, 중앙정부가 존재했고 일왕도 계속 명맥을 잇고 있었지면 아무도 그들의 권력에 별로 관심을 보이진 않았고, 일왕 역시 각 지역 구석구석까지 자신의 힘이 닿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시대였죠. 대부분 각 통치 지역에 있는 영주 (일본으로 치면 쇼군) 들이 자신들의 통치 영역만을 얌전히 통치하면서 지냈어요.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 시대인데 일본의 사극 대부분은 이 시대부터 시작하고 있어요. 그만큼 일본 역사는 그 이전 역사가 제대로 갖춰진 역사라고 보기에는 너무 원시적이었다는거죠.



그렇게 다 제각각 나라를 갈라먹고 평화롭게 오랫동안 살다 보니 나라가 굉장히 오래 갔고, 각 지역별로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할아버지'급의 인물들이 한 명씩은 존재했어요. 물론 우리의 천도교처럼 하나의 종교로서 고착되었음은 물론이고요. 특징이 있다면 그들은 그 혈통을 보존해서 계속 왕으로 모셔 오고 있다는 거에요. 한마디로 한번 지도자로 모신 혈통은 계속 세습하여 지도자로 모신다는 북한의 3대 세습은 울고갈 유구한 역사의 세습문화가 일본에 정말 상상도 못할 기간동안 오래 지속되었다는 거에요. 그러다보니 죽은지 너무 오래 되어 그 위대함을 해아릴수없는 지경이 되면 그 지도자 혈통의 시조급은 이른바 '신격화'가 될 수밖에 없죠.



일본 대기업의 역사는 수백년을 아우르는 곳도 있는데 대부분 이런 명문 가문이 기업화된 곳들이 많다. 미쯔비시그룹의 마크도 원래 가문의 상징을 회사 심볼화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의 카스트는 정치계뿐만 아니라 경제계에도 이처럼 깊숙히 박혀있다.



이런 나라가 통일이 되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상상만해도 끔찍한것이 각 지역별로 신이 있는데 그 두 지역이 싸워서 이긴 지역이 진 지역을 흡수해버리면 사실상 그 지역의 토호 혈통이 끊어진다는 건데, 이미 그 혈통이 깊숙히 신격화되어있는 국민들이 이를 가만 둘리가 있었을까요? 이미 다른 지역의 토호로 갈아탄다는 차원을 뛰어넘는 더 뼛속 깊은 트러블이 예고될 수밖에 없었어요. 일본은 그만큼 통일이 쉽지 않은 나라인거죠.


아무튼 통일은 통일임


그러던 와중에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시키는데 성공했으니 실제 그 내부 진통은 어느정도였는지 예상이 되시나요? 물론 도요토미는 이를 타파하고 일본을 결속시키기 위해 전쟁 카드를 꺼내서 우리나라를 괴롭혔는데, 실제로 우리 나라를 먹겠다는 목적보다는 일본 각 지역, 특히 시코쿠와 큐슈 지역의 토호 세력들의 '전투력 소모'의 목적이 더 컸어요. 중앙 정부가 있는 혼슈와는 다르게 바다 건너 있는 시코쿠와 큐슈에까지 단기간에 통치력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빨이 다 하기 전에 그들의 전력을 소비시킬 필요성이 있었던거죠. 한마디로 그는 통일은 했지만 각 지역의 토호들을 모두 잠재웠다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여전히 도요토미는 물론이고 중앙정부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국민들이 대다수였을정도니까요. 도요토미 사후에 즉위한 도쿠가와 역시 중앙집중안정책을 취하긴 하지만 토호들의 권력을 완전히 빼앗는게 아닌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충성을 유도하는 유화책으로 평화를 이끌어내는 선에 그쳤어요. 한마디로 어느 쪽도 완전한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일본은 공화국이 되어서야 지금의 일본이라고 불릴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이때 일본의 입헌군주제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것이 왜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했는데, 새로운 왕이 탄생하지 않고 제국이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이 있었는데요.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지역 토호 위주의 '신'을 모시는 문화를 모두 타파하고 통일된 하나의 신을 모시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혈통만 존재할 뿐 어떤 권력도 없었던 일왕 혈통을 이용하기 시작하는데, 막부 시대에는 궁핍하여 즉위식은 커녕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했던 일개 몰락 귀족 혈통에 불과했던 일왕은 그 유구한 역사와 정통성으로 인해 일본에서 가장 오랜 가문으로 모셔지기에 충분했어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일본 제국을 세운 자들은 이를 일본 전국에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일본 유신을 완성한 자들의 스스로의 권력다툼으로 인한 죽음을 걱정한 나머지 누구 하나 1인 권력을 쥐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로 이들은 일왕 가문을 내세워 일왕 가문을 보호하는 내각총리 체계를 완성하게 되요. 이런 내각총리 체계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고 패전의 쓴맛을 보며 입헌군주제로 변할 지언정 그 체계는 지금까지 무너뜨리지 않고 이어오고 있죠.



일본의 초대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일왕의 직할 통치론을 최초로 주장하며 일본의 제국화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때부터 일본의 정치인은 국민이 뽑은 봉사자가 아닌 완전한 각료, 관료, 벼슬아치가 되었으며 이는 지금의 일본 사회가 가진 신 카스트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일본 제국이 일왕을 얼마나 신격화하는데 성공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모습, 일본 제국군인들은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일왕처럼 신으로 받들여 모셔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살폭탄공격을 기꺼이 수행했다. 그리고 일본은 놀랍게도 그 약속을 아직도 지켜나가고 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일본 건국 이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


일본 이야기는 저도 많이 하기 싫으니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할 것 같군요.


왜 이렇게 싫은 얘기를 길게 했는지에 대해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일본의 전국시대부터 일본 제국, 입헌군주까지의 역사가 지금의 일본 내에 미친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에요. 일본은 그 나라 크기에 비해 각 지방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경제권과 자치권이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 높고, 표준어 구사율이 경제규모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며, 지방분권이 어느 나라보다 잘 되어있는 나라가 되어있죠. 그들에게 있어 일왕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일본의 신이며 그들의 통치를 받는 것은 응당 당연한것이죠. 각 지방에서 선출되는 국회의원들이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3대 세습은 우스울정도로 세습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도 전국시대부터 이어져온 토호 세력의 제왕적 봉건주의가 뼛속까지 스며 제대로 된 자발적 민주주의가 꽃필 토양 자체가 아예 생길 여지가 없는 한계가 있고, 총리대신을 국민이 아닌 각 지역 토호들이 선발하는 문화 역시 에도시대와 일본 제국을 거치면서 생긴 중앙집권화의 잔재인 것이죠. 한마디로 일본은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거에요. 그들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아직도 너무 먼 이야기일 뿐이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문제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토호 세력들이 공포정치를 펼친 적도 없고 왕은 일찌기 중앙집중화를 이룩해내어 중앙 임명식 봉건제를 완성시켜 지역 토착 세력이 자리잡을 여지 자체가 없었으며,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의 건국과 멸망은 결국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민심이 등을 돌리면서부터 시작되었을 만큼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백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던 나라에요.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태동된 민주주의가 지금의 이 모양이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죠. 바로 일본 탓이에요.



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가 아닌데도 정치인들은 어떻게해서든 정치권력을 자식들에게 세습화하고 놀랍게도 국민들은 이를 당연하다는 듯 문제인식 없이 용인하죠. 지역 출신 대통령을 신처럼 모시는 의식이 각 지역별로 횡횡하고 있고, 중앙집중체계가 잘 이루어졌던 조선으로부터 이어진 나라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역주의가 팽배한 나라가 되고 말았어요. 민주주의 하에서의 관료들은 마치 봉건주의의 그들처럼 권위의식이 높아져만 가고 놀랍게도 그런 권위의식에 대해 마치 봉건주의 귀족들을 보듯 당연시어기는 국민들이 아직도 많아요. 심지어 이런 계급사회의 체계는 굳이 정치판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회사 내 심지어는 우리가 사는 이웃의 소득 격차에서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를 좀 더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요. 민주주의는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오는 체계인데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못한 국민권력을 가지고도 지금의 민주주의 권력이 오히려 과잉이라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꽃을 피워야 할 때 하필 그 뿌리를 다져야 할 때 일제강점기가 있었어요. 그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왕을 섬기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이른바 제국주의 계급사회 체계를 뿌리박았어요. 해방 후 우리나라는 그 잔재를 청소하는 데 실패했고 그 계급주의의 혜택을 듬뿍 입은 자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 초대 정권을 잡으면서 그들에게는 한없이 유리하고 행복하며 영원불멸할 수 있는 일본의 입헌군주제식 민주주의를 뿌리박는데 성공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헌법 제 1조가 존재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체감권력은 한없이 약하게 느껴지는 기형적인 나라로 지금에 와 있는 거에요.


이같은 패배의식이 남아있고 입헌군주제식 민주주의 잔재가 남아있는 한 아무리 1인 1표제, 직선제 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민주주의에 의한 정치적 결실을 얻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봐요. 토호 세력이 신을 섬기듯, 우리나라는 자기 지역 출신 정치인을 섬기고, 그가 임기를 마치고 나서도 그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영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반쪽 이하의 민주주의는 그들이 지금 당장 부패한 거와는 관계없이 우리 어르신들 세대에서부터 뿌리박혀 있는 이상 진정한 민주주의 하에서 나올 수 있는 사회체제가 확립될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을 정도에요.



....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언제 평등할 수 있나?


우리나라 현대사를 완전히 망가뜨렸다고 봐도 무방할 일본의 입헌군주제가 정치체계적으로 전혀 호환되지 않은 우리나라에 녹아들었다는 점이 사뭇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두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태생부터 사상까지 분명한 대척점에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사실 민주주의가 정말 봉건주의 사회와 완벽한 대척점을 지니는 정치 혁명이었다면 지금처럼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국가가 나올 수가 없지 않겠어요? 아무리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공화정 혁명이 왕권이랑 호환성을 보이는 것 자체가 원론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거겠죠. 다시말해 지금의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쓴 봉건사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양새만 다르게 한 채로 결정적 투표권을 줬다는 것 하나로 헌법 제 1조를 만들어 국민들을 착각하게 만들고 있어요. 입헌군주제냐 완전한 민주주의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사상만으로 모든 국민들을 민주주의에 최적화시키도록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거에요.


일본의 근현대사를 소개해드린 부분을 읽으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결국 뿌리깊은 봉건주의로 인해 자리잡아 있는 카스트 제도는 그 형태만 달리했을 뿐 이른바 일본식 민주주의로 그 색깔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굳건히 자리잡고 있어요. 이들은 결코 낮은 카스트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생각이 없어요. 행여 그런 정책을 취한다고 해도 국민들은 그 부분이 자신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일 바에야 그냥 예전 영주들처럼 국민들 피나 왕창 빨아먹자는 게 일본의 관료주의 하에 놓여있는 상위 카스트들의 생각인거에요. 



일본인들은 대체로 이런 정치판에 큰 불만이 없어요. 그들은 민주주의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들은 정치판이 내게 뭘 해줄지를 기대하기보다 그저 황국 신민으로서 내 위치에서 묵묵히 열심히 회사를 위해 나라를 위해 일왕을 위해 내 위치에서 내 역할 내 일을 열심히만 하다가 죽는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죠. 일본인들의 이런 특성은 외부에서는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비추어지지만 실은 오랜 카스트에 익숙해진 뼈에 사무친 패배감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다는 F1레이싱이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는 점, 각종 헐리우드 스타들이 폭넓게 인기가 있는 이유 그들이 특별히 범세계적인 문화 소비 성향에 눈을 떴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유명하니까 의무감으로 봐야 한다'라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유럽 여행에서 에펠탑을 반드시 봐야 하듯이 그들은 일본에 온 유명인이라면 별 관심이 없어도 콘서트의 자리를 꽉꽉 채우곤 한다




그들은 어느 정점에 다다른 연예인을 '신'이라 부른다. 그들에 대한 대우가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이 F1경기장에 몰리고, 우리나라에선 생소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예인이 일본을 방문하면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그들이 진짜 좋아서라기보다 그들을 이미 '신'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종교적 행위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우리나라는 이미 그렇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일본의 그런 모습이 점점 보이고 있다는 거에요. 정치인을 신격화하고, 무언가 나라를 위해 직접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권력에 기가 눌려 묵묵히 살다가 죽는 것을 택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자신들을 위한 정책이라곤 눈꼽만큼도 내지 않은 자들에게 표를 던지고 그들에 의해 온갖 불이익을 받아도 묵묵히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요. 회사 면접에서 인격적인 조롱을 당해도, 회사 내의 봉건주의 잔재에 변화를 요구하기보다 그에 순응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단순히 일본 탓만 할수도 있지만, 그것을 뿌리뽑을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책임도 분명하다는 점이 이 나라를 사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결국 민주주의는 그 자체만으로 결코 만능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에요. 그것이 입헌군주제에 의해 더럽혀지건 더럽혀지지 않건 결국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생각이 오염되지 않아야 본격적으로 자유로우며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토대로 제 역할을 해줄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무엇부터 어떻게 얼만큼 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할 시기를 이미 지나쳐버린 지 오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요.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겠지만 말이죠.




...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릴 차례네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평등해질 수 없어요. 그것은 입헌군주제의 영향을 받았던 받지 않았던 그 사상은 말 그대로 법이든 뭐든 '최소한'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군락을 이루고 그들이 함께 세력으로서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합의체가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사회적 형태를 단박에 특정 나라가 발전시키고 만들어온 이론울 바로 적용시킬 수 있을 만큼 녹록할리가 없을테니까요.


우리나라는 애석하게도 일본의 입헌군주제에 의해 오염되어 버린 민주주의를 갖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굽실거려야하고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뒷목에 힘이 들어가는 먹이사슬같은 귀천체계 공화국 카스트 제도가 자리잡고 말았죠. 우리 민족은 왕한테도 개기던 자존감이 강한 민족이라 누구한테 당하면 꼭 그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누군가에게 갚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탓에 갑을관계가 생기고 또한 사회문제가 되며 직장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는 자기보다 낮은 카스트라고 생각하는 서비스업종에게 풀어내는 보기 안좋은 사회문제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어요.



우리는 늘 직장상사보다 낮은 등급의 차를 사야만 해요. 우리 회사가 처우가 좋지 않은건 갑의 회사보다 나은 처우나 직원복지를 하면 갑의 회사가 불쾌해하기 때문이죠. 을의 회사가 더 나은 처우를 하고 싶어도 갑의 회사가 그 처우에 미치지 못하면 항상 그보다 낮은 처우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은 전혀 민주적이지도 자유경제주의적이지도 않은 악습에 지나지 않는데도 아무도 이것을 고치려 들지 않아요. 


임대아파드 사는 주민이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게 싫어서 바리케이트를 쳐요. 그리고 어떻게든 정말 어렵게 모으고 그 가치를 더 많이 인정받는 돈이라는 물건으로 자신의 카스트를 증명하려 애쓰죠. TV에는 더 좋은 옷,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집이 늘 부각되고 카스트를 상징하는 지표로서 광고하고 사람들은 어떻게든 가짜로라도 자신의 카스트를 돋보이게 하려 애써요.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이나 내적인 아름다움은 고리타분한 선비들이나 하는 얘기로 핀잔을 듣기 일쑤에요.



돈으로 카스트를 과시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다보니 그 밖의 가치들은 모두 하대를 당해요. 문화 공연은 그 내용보다 얼마나 제목이나 작품 자체가 돋보이고 역사가 깊느냐가 중요해요. 작품 내용을 하나도 이해를 못하면서도 그 작품을 봤다는 상징 자체에 집착하죠. 해외여행, 자동차, 명품백, 처음 들어가는 직장, 부모들의 직장 ....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라 불리는 대한민국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어요. 민주주의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사회인데도 말이에요.


이건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부터 직시해야 해요. 다행이 우리나라가 아직 일본보다 나은 점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그 끊임없는 개김성으로 인해 결코 독재나 봉건식 민주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가 큰일이 날 때마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나라를 바로세워온 결과 우리 손에는 적어도 투표용지 한 장씩은 아직 골고루 갖고 있게 되었잖아요. 총리대신 하나 스스로 못 뽑는 옆나라가 결국 그 봉건주의로 파국을 맞는 걸 보면 아직 가능성이 있는 거죠.



...


자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다른 건 다 필요없고 이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지금에 만족하는 사람은

결코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살 수 없어요.


왕족, 재벌, 현직 정치인, 셀레브레이트, 고액 재산가들...

모두 지금에 만족하고 지금의 카스트를 누리는 데 거리낌이 없어요

이들이 진정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


당신이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지세요.


만족하지 않는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더라도


단 하나라도 만족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칠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지시는 것


그리고 지금의 민주주의가 뭐가 잘못되었으며

진짜 우리 몸에 맞는 우리 민족이 해왔던 우리들만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행동하고 깨달아가는 것...


저는 그것이 민주주의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6장-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정말 평등한가요 편을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3. 4. 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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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교가 없는데요.

요즘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개독'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만행들이 자주 보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과격행동이나 여행 금지된 국가에 가서 납치당하고, 과도한 전도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요. 왜 이들은 이렇게 광신도가 된 걸까요? 종교는 정말 실체가 있고 믿을만 한 것인가요?


<!>

 

글쎄요.


광신도라는 건 굳이 종교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죠? 뭔가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하거나 무분별하게 특정 사실을 신봉하고 추종하는 데에도 쓰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종교와는 관계가 없어요. 그럼 여기에서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요. 과연 저 종교인이 아님에도 광신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추종하는 그것도 종교인건가? 아니면 더 포괄적으로 종교라는 것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 말이죠.



한마디로 말하면 종교는 실체가 없는 것을 믿는 것에 기반해요. 모든 종교는 현재 실존하지 않는 것을 책이나 유물 등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어요. 따라서 종교는 굉장히 희미하면서도 또렷해야만 하죠. 실체가 없는 걸 믿어줄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언제나 이 종교라는 것은 '사물'이나 '서적', '음악' 등 뭔가 실체화된 것들에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이 강한데요.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셨겠지만, 결국 종교라는 것은 토템, 흔히 말하는 국지적 미신이나 우상 숭배라 불리우는 것들을 포괄할수밖에 없고 토템을 포함한다는 의미만으로 이미 종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권력'화 되고 '정치'화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광신도들이 생기는 이유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요? 일단 한번 들어보세요.


...


종교는 왜 필요했을까요? 인류는 태초부터 먹고 살기 바빴고 이미 지금도 먹고 사는 문제에서 크게 자유로운 나라는 몇 안되는데도, 오히려 종교는 못사는 나라일수록 더 굳건한 신앙심을 보이고 있다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해요 그렇다면 결국 답은 인류가 '못살기 때문에' 종교가 생겨났다고 보는 편이 좋을거에요. 인류는 태초부터 지구최강생물이 아니었고, 늘 생존의 문제와 싸워야 했던 생태계의 중간 이하급 약자였거든요. 근데 인류는 태초부터 다른 포유류보다 좀 더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어요. 바로 생존을 위해 다른 생물을 이용하는 '사육'의 능력과 무엇이든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해낼 수 있는 '상상력'이 그것이에요.



그래서 초기 종교는 중하위권 수준의 열악함을 인정하고 생태계의 강자를 숭배하는 이른바 '동물'이나 채집의 대상이 되는 산이나 강 등의 자연환경에 대한 토템 형태가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굉장히 원시적이고 주류 종교들에게 '우상 숭배'라며 비웃음을 당하고 있지만, 사실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은 주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결국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절대 강자를 숭배함으로서 자신의 신변과 인생을 구제받으려는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니까요. 뭐 딱히 실체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종교가 토템의 형태에서 지금의 주류 종교 형태로 진화하게 된 계기는 인류가 사냥과 채집에서 '경작'과 '사육'으로 삶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에요. 자연이 주는 선물을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자연을 이용해먹기 시작하면서 삶의 문제를 좌우하는 주체가 '인간 스스로'가 되어버리니 더 이상 '맹수'나 '자연'을 숭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거죠. 대신 새롭게 숭배해야 할 대상이 생긴 것이 바로 '날씨'였어요.



태양이 한껏 내리쬐면 날이 가물어버리고 경작물은 말라죽어버리죠. 고스란히 한해 농사를 망치게 되면 인류는 1년간 식량난의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강이 범람해서 농작물을 쓸어가버리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에는 뭐 말이 필요없을거고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식량 문제가 좌우될 '날씨'문제에 대해서는 인류가 스스로 개척하지 못할 것으로 어기고 절대적인 숭배를 하기 시작해요. 전 세계 모든 종교의 기초가 되는 이른바 '하늘'숭배의 시작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하늘'숭배의 문제점이 있었어요. 숭배할 대상이 없다는거에요. 하늘은 가본 사람도 없고 날씨가 왜 그렇게 변하는지, 날은 왜 갑자기 가물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홍수가 나버리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원인도 이유도 모르다보니 숭배를 한다고 해서 뭔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숭배를 하면서도 뭔가 아리송하단말이죠. 바로 이때부터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서 숭배하는 형태 즉 지금의 주류 종교가 태동하기 시작해요.


태양의 신 호루스


하늘 숭배 이전의 종교 역시 강이나, 산 혹은 큰 동물들을 숭배하던 것이었기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얻기보다는 자기만족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면 숭배 대상이 하늘이 되고 이 하늘이 인류의 생존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도록 바뀜으로서 종교의 역할도 크게 바뀌기 시작해요. 예전에는 종교를 관장하는 제사장의 역할이 단지 어떤 숭배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정한 룰에 따라 숭배하는 것에 그쳤다면 이제는 그 숭배한 것에 대한 결과를 내야 하는 '책임론'이 대두되기 시작한거죠. 만일 제사장이 말한 대로 열심히 했는데 날씨가 안좋고 태풍이 몰아쳐서 결국 흉년이 들면 제사장은 그 책임을 져야만 했어요. 제사장은 '정성이 부족했다'는 식의 인지부조화적인 변명을 몇 차례 할 기회를 얻긴 하지만 아무런 바탕 지식이 없이 대자연을 예측하고 컨트롤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거에요.


제사장들에게 닥친 일대 위기는 그들을 스스로 진화시켰어요. 그들 스스로 신뢰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을테니까요. 하늘을 공부하고 날씨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언제 비가 내리고 언제 태풍이 몰아치며 언제 가뭄이 드는 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고스란히 문명화되기 시작하죠.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예측해낼 수 있을 정도까지 발전하고 나니 어느 정도 그들의 말이 적중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신뢰도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어요. 


그런데 당시 제사장들이 얻은 이 지식의 파급력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쏠쏠했다는것이, 결국 제사장의 말 대로 날씨가 예측되기 시작하면 하늘을 숭배하던 당시 종교 문화에 비추어볼 때 제사장은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굉장한 계급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거든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 부분인지라 제사장의 말이라면 껌뻑 죽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처지에 놓인 이상 제사장이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거죠. 제사장의 위치는 빠르게 권력화되어갔고 그들의 말은 곧 신의 전언이 되어 사람들을 컨트롤하기 시작해요. 그들에게 곡물을 비롯한 수많은 공물이 쌓이는 것은 당연했겠죠. 그렇게 쌓인 불로소득은 곧 부의 권력화를 낳게 되고 결국 제사장의 권력은 국가 통치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이 냥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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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독점할 수 없어요. 필연적으로 투쟁을 낳게 되죠. 그 투쟁의 형태는 다른 나라의 침략일수도 있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봉기일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봉기를 일으키는데에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기존 왕권이 이미 종교 그 자체였고 사람들이 그 종교의 교리를 따르고 있는데, 다른 나라의 침략이건 내부에서 일어나는 봉기였던 간에 결국 왕에게 도전한다는 건 '신에 대한 반항'이 될 수 밖에 없었던거에요. 아니 그렇다고 아예 규정해버리는 편이 나았죠. 적어도 왕의 입장에서는 말이에요. 이른바 '대의론'이 시작된거에요.


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 종교를 더 복잡하고 숭고하게 만드는데에 최선을 다해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신격화하죠. 이에 왕들은 한술 더 떠서 아예 신은 없고 내가 바로 신이며 내가 죽어서까지 늬들을 통치할 것을 엄명하기까지 해요. 한번 깨진 힘의 균형은 좀처럼 회복될 조짐이 없이 계속 격차를 벌리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왕족들은 자신들을 보다 신격화시키기 위해 화장을 했으며 그들의 신화적 사상을 대중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여 구전시키기 시작해요. 물론 이 소설 내용은 터무니없고 비과학적이었지만, 당시 대중들의 우매한 지식 수준으로는 반박하기 힘들었을거에요.



절대적인 숭배와 충성을 다짐하고 그에 굴복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부당함을 설파하고 봉기를 이끌어내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이미 봉기는 '신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되어 버린 이상 봉기를 필요로 하는 쪽이든 침략을 하는 쪽이든 필연적으로 해야 했던 것은 '새로운 종교'의 주창이었어요. 구 종교와 신 종교의 충돌은 이렇게 침략과 침략사, 봉기와 국가 분열 등 여러 가지 역사를 낳게 되죠.


날씨를 종교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집트는 결국 나일강변의 이상기후로 인한 가뭄으로 인한 종교적 갈등으로 멸망했고 종교를 배척한 힘의 정복활동을 펼쳤던 로마 제국의 '로마 국교'정책도 결국 392년 로마 카톨릭을 국교로 개종하면서 멸망의 시작을 알렸는데요. 이 사이에 낀 인물 한 명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종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물이자 종교의 체계 자체를 송두리째 바꾼 인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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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의 아들'이며 자신을 '신이 보낸 사람'으로 소개했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까지 숭배되던 모든 교리를 비판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교리가 옳다고 설파했어요.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행동이 종교 국가관에서는 결국 '반역' 행위였고 그를 반역자로 몰아가는데에 사회적 저항은 아무것도 없었죠. 저도 그와 같은 세대를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도를 새로운 교리로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시대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인류가 점차 학문에 눈을 뜨게 되면서 기존 종교가 가지고 있던 이른바 '독점적 지식'의 영역이 위협받기 시작했던 시기와 예수의 등장은 거의 정확히 맞물려요 신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대한 문제보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는 '철학'의 발전은 그 정점이었고 이 철학은 단지 철학으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고대 과학을 수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었어요. 특히 천문학의 발전은 고대 종교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죠.


그동안 그들에 의해 날씨가 조절된다고 믿었던 이집트는 공교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어요. 하지만 정말 수많은 사람들에게 뿌리가 박혀 버린 종교의 색깔을 빼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과 진통을 수반해야만 했죠. 과학적인 입증으로 종교의 허상이 발가벗겨지긴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숭배의 대상이 필요했고, 그 뒤로는 왕권의 연립 없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치하게 되는 역사가 시작되는거에요.


그렇게 인류에게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모양새'가 상식화되어 굳어지게 된 거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가 어떤 '모양'과 '철학'이 대단히 고착화되어있는것처럼 지금 보기에는 구교가 매우 비과학적이고 구태의연해보이지만 당시에는 그 철학이 지금의 종교 철학과 같은 수준으로 고착화되어 있었다는 거에요. 다시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의 종교에 대한 '관념'과 동떨어진 종교를 칭하는 '사이비'나 '이단'이라는 말로 배척하지만 정작 우리가 지금 상식화되어있는 종교 개념이 당시에는 '사이비'나 '이단'취급을 받았다는 거에요. 


한마디로 예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단'이었죠. 그는 그동안 실체가 없었던 하늘 숭배에서 실존 인물의 숭배로 종교의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 인물이었어요 이른바 '메시아론'은 지금도 그로 인해 만들어진 수많은 이단과 교주들이 자신들이 혹시라도 있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하게 되죠. 신약은 해석하기에 따라 예수 생존 당시 받았던 핍박이나 지금 사이비 교주들이 받는 핍박이나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예수의 전략은 '복고'전략이었어요. 예수는 뿌리박힌 '이집트'종교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종교의 뿌리를 자극하는 식으로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이집트의 멸망과 팔레스타인지역의 로마 수복으로 이렇다할 종교를 모두 배척당했던 그들에게 있어 이런 잠재된 원론적인 부분을 설파하는 예수는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진리였던거죠. 


그런데 그가 주창하는 종교는 이미 과학으로 부정당한 '날씨'얘기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집트의 종교가 완성되었을때에 주창되던 '사후 세계'를 좀 더 각색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죠. 한마디로 당시 과학은 물론이고 향후 어떤 과학으로도 증명하기 힘든 부분을 교리의 핵심으로 만들었던 최초의 인물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문제, 이른바 '개인주의'를 교리로서 융합시킨 종교를 만든 사람이 되는 거에요. 이 두 가지가 융합하면 결국 '사후 세계를 위해 지금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귀결되는데, 결국 이 한 마디로 축약될 수 있는 논리가 많은 사람들을 지금까지도 매료시키고 있는 거죠.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해 지금까지 나오는 모든 종교는 '사후 세계'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아요. 이는 결국 종교 이외에 어떤 과학으로도 사후 세계 즉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마치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신의 등장이 '날씨'에 대해 알지 못하는 지식을 독점하여 민중을 선동하는 식으로 종교를 이용했다면 기원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종교의 대한 철학이나 개념은 결국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과학적으로 아직 증명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논하고 있는 유일한 '가설'이라는 점을 '떡밥'으로 내세우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의 종교는 생명공학, 그리고 진화론과 대척점에 있을 수 밖에 없어요. 날씨의 비밀이 까발려지면서 망했던것처럼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죽는지가 교리 설득의 최후의 보루일수밖에 없는 종교계는 이를 적대시하는 것이 당연할수밖에요. 종교계는 언제나 자신들의 논리가 인류의 발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지식을 배척해오면서 살아남아왔던 것이 실존하고 있는 역사이며 지금은 그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삶과 죽음과 관련된 연구를 종교적인 이름으로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존립성을 지켜나가고 있는거에요.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제 진짜 광신도 얘기


종교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종교 전쟁의 맥락은 무엇이었을까요? 결국 말이 '성전'이지 결국 모양새는 침략전쟁이거든요. 종교는 어느 나라에서나 그 나라의 존엄성을 가늠하는 절대적 위치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21세기가 와서도 인도에서 관광객조차 먹으면 안될 음식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대부분의 종교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포교에 목적을 두고 있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타락한 십자군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권과 정복사업을 정당화하는 추악한 모습이 대부분이에요. 특히 이런 모습은 전혀 문명이 발전되지 않은 원주민 인디언들의 대륙을 구 대륙 사람들이 침략해서 정복할 때 주로 신격화되곤 하죠.


이따위 신화도 있어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한창 남미와 북미를 털어먹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로마 교황청으로 쫄래쫄래 달려가서 '우리가 저 땅 먹었으니까 우리 영토라고 선언해줘'라고 떼를 쓴 거였어요. 로마 교황청은 어이없게도 잔혹한 학살과 문화 말살의 참혹한 정복전쟁을 거친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그들의 식민지로 선언해주죠.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카톨릭'이 정작 보편적 가치인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자들의 손을 들어줬다는거에요. 


그들은 식민지를 미개의 세계로부터 구원한 '메시아'라는 주장을 펼쳤어요. 누가 봐도 그 나라의 문화를 말살하고 영토를 늘리기 위한 확장 사업에 불과한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서 말이죠. 사실 이는 포장 그 자체가 아니라 아직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에게 정복자들인 자신을 '신'으로 포장시키기 위한 부분도 포함되요. 토템 신앙조차 가지지 못했거나 그 문명의 학술적 발전이 더딘 자들에게 카톨릭 같이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류가 수정되고 다듬어지며 새로 쓰여진 빈틈이 비교적 적은 완벽한 소설을 읽어주면 훨씬 설득이 쉬웠을 테니까요. 마치 이집트 파라오가 그랬던것처럼 정복자 그들 스스로가 신이 됨으로서 정복활동과 식민지 노예화를 손쉽게 거둘 수 있는 그들로서는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었을거에요.


교황 옆에 앉은 사람은 무솔리니라는 사람이에요. 우와 교황이 상대할 정도면 참 훌륭한 사람이겠죠?


너무 먼 얘기라 잘 이해가 안간다고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역사는 얼마든지 있어요. 민족의 시조 단군 할아버지를 보세요. 탄생 신화가 환인이라는 신이 곰이 사람이 된 여자 환웅과 결혼해서 낳은 사람이 단군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이게 진짜냐 거짓이냐는 집어치우고 왜 이런 얘기가 생겼을까요? 우리나라 대한민국 반도에는 단군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요? 아니었을거에요. 우리 할아버지는 단군보다 훨씬 더 오래 전 사람이었을수도 있어요.


단군은 외지인이었어요. 외지인은 아무래도 원주민들보다 문명도 더 앞서있었고 원주민들이 보기에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그들을 우러러볼 수 밖에 없는 위치적 한계도 있었죠. 그런데 이 원주민들이 본능적으로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한 개김성만큼은 투철했을거거든요. 뜬금없이 족장도 있고 부족 체계로 잘 돌아가고 있는 곳에 외지인 불청객이 떡 하니 와서 '이제부터 내가 늬들 지도자다'라고 선언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바보가 있을라고요.


우와 우리는 하늘의 자손이었어!


단군이 만약 여기에서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하고 점령했다면 아마 실패했거나 성공했더라도 수많은 반란에 시달려 결국 터를 잡기가 어려웠을거에요 (단군할아버지는 일단 터를 잡긴 성공했잖아요. 노래가사에도 있듯이) 사실 역사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 단군이 친화정책을 먼저 쓴 다음 자신을 신격화해서 스스로 왕이 되는 철학 정책을 취했는지, 강력한 문명으로 압도하여 무력으로 공포정치를 취한 다음 이를 미화시키기 위해 신화를 써서 역사를 왜곡시켰는지는 말이에요. 확실한 건 그들은 '신화'를 남겼고 그들은 '종교'를 이용해서 외지인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한반도를 정복했고 최초의 왕으로 기록하게끔 만들었다는거에요. 참 훌륭한 사람이네요


이런 역사는 단군에서 끝나지 않아요.. 단군이 먹었던 땅은 엄밀히 말하면 요동 반도지 지금의 남한 지역은 아니거든요. 남쪽으로 가보면 그 뒤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기죠, 삼국 시대 여기에서 시작되는 고구려의 동명왕 신화도 환인이 등장했던 단군 신화랑 크게 차이가 없이 어쨌든 하늘의 사람이 낳은 아들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죠. 인물만 조금 바뀌어있고 그들이 활동하던 활동 무대가 요동 반도가 아니라 도읍지인 압록강을 낀 국내성 일원이라는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죠. 과연 이런 말도 안되는 신화를 대체 왜 만들었을까요? 그냥 1대 왕이 되었다. 라고 기록하기엔 뭔가 역사적으로 앞뒤가 안맞았거나, 뭔가 감추고 싶은 역사가 있었을수도 있겠죠? 혹은 자신들을 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했어야 할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던가요.


백제의 건국은 사람이 거의 없는 땅에 나라를 세운 셈이니 신화가 없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박혁거세 역시 아무런 지역 배경이 없는 외지인이었으니까 이런 신화가 필요했는지도 몰라요.


건국 신화는 결국 침략 전쟁을 미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에요. 콜럼버스의 달걀은 유명하지만 그가 아메리카를 정복하느라 수많은 인디언들이 학살되었다는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종교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끌 수 있어요. 다만 그들 자체가 국가를 세우려 들지 않아요. 이집트의 교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그들은 왕권과 연합하여 그들이 '왕을 임명'하는 역할을 하게 되죠. 신이 그를 왕으로 만들었으므로 국민들은 이 왕을 따르는 것으로서 신을 추앙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의 논리를 설파하는 것인데 지금으로 보면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보이는 이런 의식이 국민들에게 너무나도 잘 먹혔고 그 순간 왕은 곧 '신'이 만들어주는 것이며 이 나라는 신을 위해 지켜야 하는 나라가 되는 거에요. 


그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이기는 것은 왕(신)을 위한 것이요. 그들이 다른 민족에 의해 침략당하는 것은 우리의 신을 모독당하는 것이므로 신을 위해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상은 왕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안정적인 권력을 선사했어요. 종교는 그때부터 이미 정치화되었고 권력에 빌붙어왔으며 이를 결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죠. 심지어 지금까지도 말이에요...





...


가난한 나라일수록 종교에 대한 신념이 두터운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가난하기 때문'이에요. 가난하면 할수록 먹고 사는 문제에 더 민감해지고 그럴수록 돈을 주고 배워야 하는 지식보다는 돈을 주지 않고 배울 수 있는 지식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많은 종교들이 세운 미션스쿨들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죠. 왜냐, 사람은 가난하면 할수록 생명공학이니 뭐니 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보다 단지 '농사' 즉 먹고 사는 문제에 더 집중할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결국 고대 이집트처럼 숭배 대상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데에 주저함이 없게 되니까요.


그들이 종교에 빠지게 되는 또 하나는 '현생'에 대한 비관이에요. 지금의 종교는 모두 '사후 세계'와 '좋은 환생'을 미끼로 걸고 있어요. 현생이 어렵고 비관적인 사람은 육체적인 자살을 선택하거나 종교에 귀의하므로서 사상적인 자살을 택하는거죠. 물론 이런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일수록 압도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고 가난한 나라에서 종교가 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거에요.



많은 나라들이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지면서 종교의 영향력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개독이니 뭐니 하며 기독교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들은 그럴수록 절박해지게 되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안된다고, 마치 나라를 빼앗기는 듯한 위기감을 갖게 되죠. 특히 그 종교에서 충분한 지분 (나라로 치면 벼슬) 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그 위기감은 더욱 팽배해질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더욱 종교를 폐쇄적이고 광신적으로 만들어 결속력을 다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죠. 종교가 이단이면 이단일수록 사이비면 사이비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극심해져요. 


다른 의미로는 봉건주의 국가를 소망하는 자들의 욕구 충족에 이용되기도 하지만요.


결국 지금의 종교는 예수가 만들어낸 소설 '신약'에 기반을 두고 그 신약에 별 시덥잖은 메시지에 의미를 두고 그것을 해석한 자들을 지도자로 한 수많은 교파들이 서로 자신의 해석이 맞

다며 싸우고 있는 형국이거든요. 그런데 정작 그 소설은 빠르게 발전하는 생명과학에 의해 속속 거짓임이 까발려지고 있고, 사람들은 점차 먹고 살기 좋아지면서 종교에 관심이 멀어지고 있어요. 그들의 해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원전이 워낙 비과학적이고 부실한지라 정작 형체가 분명했던 종교가 점차 신기루적이고 뜬구름잡는 교리로 변질되고 있어 믿는 사람만 믿을 수 있는 억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고요. 


예수님의 친구.jyp


그래서 그들은 다른 종교를 공격해요. 적어도 '종교를 믿을 가능성'만큼은 있는 자들을 자신들의 종교로 끌어들이는게 종교를 아예 안 믿는 사람들을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쉽거든요.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불교에 대한 테러나 불교 비방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죠. 종교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서로 뺏고 빼앗는 와중에 신도는 점점 줄어들고 마치 졸아붙는 냄비 물마냥 최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게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종교에요.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을 엄한 교리로 옭아매고 광신도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말이죠.


그들은 그나마도 모자랐는지 '국가적으로 종교를 잘 믿는' 국가를 골라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해요. 여행 제한 국가도 아량곳하지 않고 말이죠.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들은 그렇게 해야 하며 성서에 그렇게 하라고 쓰여있다고 나와 있다며 말이에요. 또 한편으로는 특정 목사를 예수님의 친구라며 추앙하기도 하고, 특정 교주를 메시아라며 추앙하기도 해요.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범죄도 어마어마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죠.




우리는 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할까요?


종교는 마음의 양식이에요.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요? 네 맞아요. 독서랑 똑같아요. 종교는 아주 잘 쓰여진 소설을 제각각의 시점으로 읽으며 그 소설에서 얻을 게 있는 사람들은 얻고 얻을 게 없는 사람은 얻지 않아도 되는 아주 자유로운 조직이 되어야만 해요. 왜냐하면 그냥 소설일 뿐이거든요. 누가 봐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비현실적으로 미화하면서까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사람이 쓴 소설이고, 그 소설이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곁들여지면서 덧붙여지고 멋대로 수정되어가며 원전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지경까지 이른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참고하면서 읽으면 될 거에요.


그 소설에는 좋은 말이 많아요. 우리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말들 많죠. 그런데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고 심지어 죽어서까지 잘 된다는 식의 논리로 현세계의 많은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하며 심지어는 빼앗기고 당하면서까지 살 필요는 절대 없다는거에요. 그저 '책 참 잘 봤습니다, 이 책으로 전 인생에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는 의미의 기부금을 낼 수는 있지만 말이에요. 



삼국지 떡밥 나오면 별의별 해석 다 나오는 거랑 다를 게 없어요. 그 해석들이 저자별로 제각각 다른 내용을 통해 책으로 나온 게 벌써 한트럭이잖아요. 성서나 불경도 크게 다를 바 없어요. 종파 역시 그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임일 뿐이고요.



...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여러분의 인생, 삶과 죽음은 여러분거에요.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을 다른 누군가에게 바치지 마세요.



...그게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5장-광신도는 왜 생기나요 편을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2. 9. 6.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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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를 보면 열이 뻗쳐서 잠이 안옵니다. 아직 꼬꼬마인 여자애를 성폭행하지 않나. 잔인한 연쇄 살인범이 아직도 사형되지 않고 우리 세금으로 먹어살리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땐 빨리 그 사람들 죽여버리고 성폭행한 사람들은 능지처참했으면 하는 공격적인 마음이 드는데요. 그런데 법이라는 건 막상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그 사람을 간단하게 그대로 되갚듯 죽이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왜 그런거죠? 당연히 당한 사람이 앙값음을 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범죄자들의 인권이라는 걸 꼭 챙겨줘야 하는 세상인가요?

 

 

<!?>

 

자 자 진정하시고 ...^^;;;

 

우선 범죄란 뭔지부터 알아보도록 해요

 

범죄의 매커니즘을 살펴보도록 하죠. 동물들은 언제나 약육강식을 모토로 이 세상을 살아가요. 그런데 이 약육강식이 인간 사회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되다보니 발전이 없고 인적 소모가 극심했어요. 머리는 비상한데 몸이 약한 사람이 머리가 돌대가리고 힘만 쎈 사람에게 죽어나가니까 사회가 발전할 턱이 없었죠? 그런데 그렇다고 몸이 약한 인류가 몸이 강한 인류를 단독으로 설득한다는 건 있을수 없어요. 무슨 말을 해도 돌대가리들이 알아들어야 말이지..

 

아오 누가 얘 좀 설득해볼래?

 

인류도 역시 진화론에 입각해 살펴보면 몸이 약하고 머리가 좋은 인류가 살아남는데에 몸이 강한 사람의 그 어떤 부분보다 훨씬 우성인자가 있어서 몸이 강하고 무식한 사람을 지배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뛰어난 지능으로 법을 만들고 이를 근거로 정치라는걸 하게 되죠. 벤허 같은 기원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늙고 병들어 힘이 없는 왕이 아무이유없이 명령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절대권력을 갖게 되는것을 볼 수 있어요. 동물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특별히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진화의 경쟁에서 두뇌가 우수한 인류가 살아남은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래서 법이라는건 의외로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었어요. 법이라는게 뭐냐, 바로 머리 좋은 사람들이 머리 나쁘고 힘만 센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만든거에요. 인간이 집단을 만들고 집단을 이끄는데에 있어 힘으로 권력을 잡은것보다 정치적 능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결집시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고, 이는 인류의 집단이 가지는 공통된 약속이 개개인의 힘을 능가했다는 거에요.

 

어이 너, 죽어마땅하지 않나?

 

이게 어떻게 지켜질 수 있었는지가 재미있어요. 집단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위해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걸 항상 두려워하게 되죠. 생명에 대한 위협, 그리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이들을 뭉치게 했고 힘이 센 사람을 집단의 힘으로 능가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엄밀한 조항으로 힘이 제일 센 사람을 집단에 포함시켜 평화조약을 맺게 강요하죠. 우리는 당신 것을 뺏지 않을테니 당신도 우리 것을 뺏지 말라, 만일 이를 어길시에는 집단의 이름으로 당신을 처단하겠다. 라고... 단순하지만 이런 논리는 불과 몇백년전까지 법을 만드는데에 기본 모토로 쓰여왔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아직도 쓰이는걸 보세요.

 

이런 걸 두려워하는게 단지 마을 단위의 집단에서 마을과 마을 단위의 전쟁, 그리고 그 마을 단위가 수백개가 모여 국가를 이루고 그 국가 내에서의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 더 크게는 국가간의 싸움까지 인류는 단지 작은 집단에서의 합의를 이루었을 뿐 약육강식의 본능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물론 희생도 컸죠. 그래서 그 희생을 막자는 공감대 역시 날로 커져가는 전쟁의 크기에 발맞춰 한발 늦지만 퍼져나가게 되요. 국가들은 점차 야만적인 무법지대에서 법을 지키고 서로의 것을 탐하지 않는 데에 익숙해지죠. 지금의 UN같은 단체 협약도 큰 틀에서 보면 이런 약육강식 본능을 억제하고, 그 힘으로 인류 발전에 집중해서 잘살아보세~ 라는 모토로 세워졌어요.

 

 

국제 연합 : 그 설립 목적은 국제법, 국제적 안보 공조, 경제 개발 협력 증진, 인권 개선으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다 - 출처 wiki

 

 

우리는 네 것을 뺏지 않으니 너도 우리 것을 뺏지 말라는 법의 기본 모토에는 이를 어겼을때에 따라붙은 징벌도 자연스럽게 스며있었어요.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면 이 집단이 커진 고대 로마같은 시대에는 사자우리에 사람을 던지고 뜯어먹는것을 스포츠화하여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경각심을 드높였어요. 고대 중국에서는 효수한 수급 (잘린 머리)를 성벽에 걸어두어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능지처참 같은 하드고어한 사형 장면을 불과 몇백년전까지도 국민들 앞에서 라이브로 생중계를 했었어요. 그 잘나가는 미국조차도 공개처형을 했던 역사가 고작 100년 남짓 전까지 있었던 걸 보면 굳이 특정 지역의 잔혹성을 거론하기에는 뭔가 사회 자체의 기능적인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요.

 

불과 150년 전의 미국이에요. 나찌독일이 아니랍니다.

 

형벌과 사회의 잔혹성이 커지게 된 건 중세 유럽의 지나친 왕권강화주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회를 컨트롤하는 정치적 스킬이 매우 원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한마디로 인류가 그 약육강식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컨트롤하는 사회화가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거고 그 전까지는 이들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집단의 강력함을 몸소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거죠. 자신의 힘을 믿고 깝치는 것을 잠재우는 것은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요. 마치 야수를 길들여서 컨트롤하듯이 간신히 테스트스테론을 잠재우곤 했어요.

 

축구가 금지되었던적도 있어요. 왜냐하면 한경기당 수십명씩 사상자가 났었거든요.

 

 

그러다가 인류가 점점 법과 사회에 익숙해지며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다보니 처벌이 너무 강력한 게 오히려 문제가 되기 시작해요. 집단을 이끌고 그 집단의 동의에 의한 대표권력자가 이 처벌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생긴 문제였죠. 대표자의 권력에 의해 강력한 처벌 권한이 남용되어 버린 사례가 역사에도 여럿 기록되어 있고 이에 의한 희생은 결코 인류 발전을 위한 법과는 전혀 관계없는 무모한 희생이 대부분이었어요. 이에 프랑스를 필두로 왕권의 붕괴와 공화국 설립의 대유행으로 인해 법과 권력의 균형잡기와 수위조절에 들어가기 시작하죠. 다수의 의견이 아닌 권력자의 개인 감정이 법에 발현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거에요, 제국사회시절에는 말할것도 없었고 공화정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공화정 초기에는 지나치게 제국에 억눌려있던 국민들의 지나친 자유 발현으로 인해 범죄율이 오히려 증가하는 과도기적 진통을 겪은 적도 있었죠.

 

 

마녀사냥은 집단광기가 아니라 권력자의 비즈니스였다고 하네요.

 

 

이런 옛날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언제나 인류가 집단을 구성하고 그 집단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하는 간부들은 인류사회가 내 이익을 지키고 남의 이익을 침범하는 것을 양쪽 모두의 희생이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왓다는거에요. 왜 그랬냐면 에초에 그들을 지도자로 세우고 법이라는걸 만들고 그들에게 그 법을 집행할 특권을 주게 된 이유가 이미 인류 최초의 법령부터 '인간의 희생을 줄이자'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인간의 희생을 줄인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법이라고 한다면 사실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해결본다'라는 것은 매우 소모적이에요. 따라서 이들은 에초에 평화라는 목적을 건 이상 범인도 죽지 않고, 범인에 의해 죽을 사람도 죽지 않아야 하는 방법을 찾았어야 했어요. 너무 뜬구름잡는 이야기로 들린다고요? 진짜 처음부터 법이라는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그 목적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서 말이죠.

 

 

우리는 법과 그 집행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 있어요. 그 법을 집행하는데 국민의 뜻을 모두 물어보지 않아요. 이제서야 부랴부랴 배심원제 비슷한 흉내를 내는 수준의 나라는 더더욱 그렇고요. 법은 국민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판결을 법이랍시고 때리는 경우가 지금도 무척 많아요. 아무리 도덕적인 기준과 상식선 밖에 벗어났다고 해도 법 상에서 정당하다면 모든게 용서받는 나라도 있어요.

 

그 반대로 그 사람의 기준에 있어 벗어나기만 한다면 이 사람이 아무리 도덕적인 기준과 상식선 안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이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서 옥살이를 시킬 수가 있어요. 그런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게 엄격하게 제한된 권력을 갖는 것이 우리나라의 사법부이긴 하지만, 그또한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변수가 많고 감정에 휘둘려 저지르는 실수가 적지 않아요.

 

어떤 일본인이 있어요. 4살짜리 여자아이가 살해된사건인데 조사 결과 아동성폭행살인사건에 대한 범인으로 그가 지목되었죠. 옷에 묻은 정액 DNA가 일치했고, 본인도 자백했어요. 그런데 재판에서 갑자기 무죄를 주장했어요. 경찰관의 폭행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다고 말이죠.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증거만으로 그는 17년이나 감옥에서 썩어요. 그리고 결국 DNA감정이 잘못되었다는게 그제서야 밝혀지고 그는 17년이나 억울한 옥살이 끝에 최근 자유를 얻었어요. 이 사람은 징역형이라서 그나마 사지멀쩡하게 나왔는데, 만약 사형이나, 화학적 거세를 당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런 사건이 일본에만 있을것 같나요? 그리고 지금은 없을 것 같죠?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형, 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의 공통점이 있어요. 되돌릴 수 없다는 거에요. 법은 무결하지 않아요. 무결하다고 주장하는 사법부 인사가 있다면 그건 제대로 미친놈일거에요. 법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엄청난 실수를 자신들도 모르게 저지르는 놈이에요. 아직도 완벽하려면 한참 멀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선진국이 되면 될 수록 사법에 대한 집행은 그만큼 신중해야만 해요. 특히나 되돌릴 수 없는 사형같은 것들은 더더욱 말이에요.

 

억울한 옥살이를 하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면 그 사람이 잃어버린 인생은 금전으로 보상할 수 없죠. 이건 인류가 처음 법을 만들 때 걸었던 목적 '인류에 지대한 발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한 것' 이라는 것에 정면으로 위배되요. 에이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범인이 확실하니까 죽여도 되잖아. 라고 생각하실수 있어요. 물론이죠. 누가 봐도 죽어 마땅할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법이라는 것이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되찾을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의 법은 아직도 가야할길이 한참 먼 풋내기고 그 풋내기라는 이름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실수를 남발하며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잖아요.

 

 

요즘은 이런 일 안일어난다고요? 네 맞아요. 근데 곧 일어날지도 모르겠네요.

 

나라 망신까지 시킬정도면 뭐...

 

많은 사람들은 말하죠. 니가 그 범죄자에게 당해보면 그 기분을 알 거라고 니가 당해보지 않아서 그러는거라고, 그 말을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외쳐진지 벌써 20년도 넘었는데, 저 말이 고대의 유물로 매장되기는 커녕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잖아요. 그런 법에게 생사여탈권을 주면 그 칼이 나한테 안올거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역시 그 사람들도 당해보지 않으니 와닿지 않을거에요.

 

 

살인범이 늘어나면 늘어나는 족족 죽이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끊임없이 생산되는 해처리를 그냥 두고 나오는 놈들만 죽이면 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어요.

 

 

잠깐 옛날 이야기 다시 해볼게요, 과거 법들이 강력하고 자극적이었던 이유는 앞서 설명드렸던 것처럼 정치가 지나치게 원시적이고 무식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도 범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문제는 이후 사회가 안정화되고 국민들의 사회성이 높아져 범죄율이 떨어진뒤에도 이런 강력하고 자극적인 법 집행 관행은 정말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와요. 물론 국민들의 수준이 아직 법을 완화시킬만큼 선진화되지 않았을수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요.

 

 

'적어도 나는 이 법으로 인해서 죽을 일은 없을거야'

 

 

머리 좋고 힘이 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힘이 세고 머리가 나쁜 사람들을 견재하기 위한 법은 결국 '만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당시의 잔혹하고 끔찍한 법을 만들던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이 그 법에 걸려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죠. 이미 자신들이 그런 법에서 충분히 면책을 받을 사회를 만들었었고요. 만일 자신이 그런 끔찍한 법에 희생될거란 상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런 법을 만들 수가 없어요.

 

만일 지금에 와서 그런 법을 만들고 주창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법에 자기 자신은 절대 희생되지 않을 거라 굳게 믿는 사람들일것이고 그 법에 자기자신들을 예외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자신들의 권력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할 준비가 충분히 된 사람들이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꺼낼 수 없다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런 법을 자신있게 내뱉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주시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피해자의 심정을 모르고 막말하듯 그들 역시 법으로 인한 희생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지금 우리는 돼지고기를 편하게 먹고 있지만, 누군가는 결국 돼지를 죽여야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떤 돼지는 계속 죽임을 당해야만 하죠. 이런 일이 있는것에 우리는 관심이 없어요. 아니 관심을 둘 필요가 없죠. 우린 저 돼지처럼 죽을 일도 없고, 저 돼지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될 가능성도 없다고 굳게 믿으니까요.

 

 

 

 

...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정리는 매우 간단해요

 

법은 '어느 누구도 희생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수단이에요.

어느 한쪽을 구제하거나 어느 한쪽의 울분을 풀어주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 살인범을 죽여도 살해된 사람은 살아나지 않죠.

가장 좋은 방법은 살인범이 처음부터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거에요.

누가 누군가를 성폭행하면 그 성폭행범의 성기를 잘라도 성폭행당한 사람의 기억이 지워지진 않죠

가장 좋은 방법은 성폭행범이 처음부터 성폭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거에요.

 

이상론이라고요? 천만해요.

지금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상론이라고 하는 이 목적을 향해서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며 법을 개정해나가고 있는걸요.

왜냐하면 법은 원래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진거니까요.

그리고 정부라는 곳은 이런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단체로 이미 몇천년부터 공인되어 왔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어요.

 

이걸 못하고 법을 강력하게 집행하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정치가가 혹시 있나요?

만일 그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안이나 직 간접적인 해결책 없이 그것만을 주장하고 있다면

그 정치가는 이미 정치적 능력이 한심한 수준이라고 광고하는것이나 다름없다는걸 역사가 증명하고 있어요. 

 

 

우린 아직도 법의 강력함에 의존해야만 하는 정치 후진국인걸까요?

 

 

 

그리고 과거 그런 정부들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그런 정부가 국민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고 배워야 해요.

우리가 그걸 역사로 남기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법은 법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런 정부를 국민이 어떻게 취급해줘야 하는지도 함께 생각해보도록 해요.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4장


- 끝 -

posted by RushAm 2012. 8. 23. 17:48

(ex는 예시)

 

시급 : 1시간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시급 4580원 , 불어 독해 원어민 수준의 통번역 숙련자 모집

 

일급 : 하루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일급 5만원, 근무시간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 (20시)까지

 

월급 : 월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노력 여하에 따라 최대 월급 350만원까지 가져가시는 분도 봤어요

 

연봉 : 연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연봉 1800, 기본급 100만원, 연장, 주말, 특근 수당 50만원

 

여성 우대 : 여성 지원자를 우대하겠다는 뜻

ex > C,C++ VC,JAVA 안드로이드 경력 개발자 모집,  여성만 지원바람

 

 

 

 

(ps는 채용자의 속마음)

 

급여 추후협의 : 급여를 채용 후 책정하겠다는 의사표시

ps > 내가 보기엔 조뚜 아닌 일인데, 내가 주고 싶은 급여를 그대로 쓰면 아무도 안올거 같고 해서 일단 면접으로 불러내서 애가 절박하면 흥정해서 최대한 내가 원하는 급여까지 깎아야겠다.

 

근무기간 추후협의 : 근무 기간을 채용 후 결정하겠다는 의사표시

ps > 상태 봐서 괜찮은 애 싸게 부리게 되면 오래 묶어둘거고 안그런거면 맘대로 짤라야겠다.

 

근무시간 추후협의 : 근무 시간을 채용 후 결정하겠다는 의사표시

ps > 끝나는 시간이 늦으면, 추가수당 달라고 하면 안되니까 적당히 갈궈서 당연한걸로 만들어야하고 좀 일찍 끝나면 일찍 끝난만큼 시급 깎아서 주고싶다.

 

학력무관 : 채용에 있어 학력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

ps > 학력 높은 머리 굵은 애들 괜히 연봉 많이 달라고 하니까 고졸애들이랑 하향평준화시키고싶다.

 

신입 : 해당 직종 관련 경력이 없는 순수 신입 인력을 뜻함

ps > 데려와서 가르치는 시간동안 수습임금주고 안되면 짜르지 뭐

 

경력 : 해당 직종 관련 경력이 있는 숙련자 인력을 뜻함

ps > 어떻게든 거저먹고싶다.

 

군필자 우대 : 병역을 필한 남성을 우대하겠다는 뜻

ps >  군대갔다온 놈들이 후임부리듯 부려도 군말없지 갈궈도 개념차고

 

 

 

(그밖에 난해한 사례)

 

정해진 이력서 양식을 다운받아 작성해서 이메일로 보내주시오라고 써있으면서 해당 사이트내 온라인 지원을 허용한 경우 = 주로 인력 아웃소싱이나 헤드헌팅 회사들이 벌이는 병신짓 + 자사 헤드헌팅 실적 과시용, 쿵짝을 맞춰주는 것이 필요하나, 전문업체들이라고 해서 피드백이 성실한것은 아님

 

근무 시작일이 오늘부터 말일까지인데 채용기간이 말일까지인경우

(ex : 채용공고 등록일 8월 24일, 근무기간 8월 22일~8월 31일 , 이력서 접수기간 8월 31일까지)

= 근무기간이랑 채용기간을 혼동한 사례로 채용담당자나 업주가 그닥 제정신이 아닐 수 있으므로 주의

 

분명 여긴 알바사이트인데, 정직원만 모집한다고 알바 할 사람은 꺼지라는 내용의 채용공고가 올라온 경우 = 정직원 사이트에 아무리 올려도 도무지 채용이 안되는 직종인데, 조건은 허용범위 이하라서 알바나 전전하는 애들 좀 이용해서 싸게 후려먹으려는 심리이므로 어지간히 급한게 아니라면 정규 취업은 가급적 제대로 된 취업전용사이트를 이용할 것

 

 

 

공화국 사회교과서 4부가 곧! 업데이트됩니다

ps > 당분간은 별 예정없다는거지 뭐

 

posted by RushAm 2012. 8. 21. 04:15

<?>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도전중인 취업준비생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라는 곳은 지금까지 제가 있었던 학교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대학을 처음 고르고 공부를 할 때는 제가 직접 학교를 고르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던 공부를 멈추고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었잖아요. 근데 회사를 보면 짤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상사에게 조아리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아요. 싫은 소리도 함부로 못하고, 대체 회사라는 곳은 어떤 곳인건가요? 회사에 들어가면 특정 사람들에게 내 인생을 저당잡혀 살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

 

먼저 회사는 한자어에요.

모일 회에 일 사짜를 써서 모여서 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원래 의미 그대로 회사는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을 말해요. 이 단어에는 지금 학생이 지적했던 조직의 상하관계에서 일과 관계없는 불필요한 머리 조아림의 의미도 담겨있지 않고 싫은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억압적인 카스트 관계도 뜻에 포함되지 않아요. 한마디로 지금의 회사라는 곳은 말만 회사지 전혀 다른 조직이 되어있다는 결론이 되죠.

 

공동체 사회에서 회사 즉 모여서 일한다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했어요. 왜냐하면 모여서 일을 하면 보다 큰 일을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게 되니까 가내수공업 수준의 일이 뭉쳐저 하나의 산업화를 이루게 될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영국 산업 혁명 이전에는 지금의 명품 잡화 브랜드들의 전신이었던 1인 회사 시스템 이른바 자영업 형태가 거의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사회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던거죠.

 

몇백년에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세계적인 명품 잡화 브랜드들도 대부분 이런 작은 가내수공업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닥치듯 벌어진 영국의 산업 혁명은 이런저런 문명의 발달에 의해서 이루어지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모여서 대량생산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서 발로된 것이었다고 해도 무방했을거에요. 식민지는 늘어났고 원자재 물자는 늘어났는데, 이 원자재만을 판매하기에는 너무 이해타산이 맞지 않았고 이를 일종의 촉매제라고 판단한 자본가들이 사람들을 모아서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조직 체계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한게 현대 회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자본가에 의해서 회사가 설립되고 그 뒤에 노동자를 모으는 과정 자체, 그리고 본디 왕권주의 국가였고, 수많은 식민지를 노예처럼 거느렸던 영국이 만들어놓은 이 회사 조직의 근간이 건전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공화정이 되었어도 입헌군주제의 반쪽 공화정이 된 영국 계급사회가 뿌리뽑힐리 없었죠. 당연히 자연스럽게 회사를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지 않아요. 임금 체불이나, 질 떨어지는 음식을 배식하는 정도는 양반이고 생산 라인 천정 높이를 허리를 펼 수 없는 높이로 맞춰서 쉴 틈을 주지 않는 등의 일화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이렇다할 토를 달 수가 없었어요. 이미 사회는 가내수공업만으로 먹힐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기때문에 이 회사에서 내가 쫒겨나게 된다면 가족을 부양할 길이 막막했던거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아무 기준도 없이 던져진 공화정의 첫 정치적 시험 모델에 의한 희생양들이었던 셈인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이 그 자본을 노동력으로 환산해서 노동자에게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다보니 당연히 자본을 가진 사람의 카스트가 더 높게 형성될수밖에 없고, 자본을 가지지 않은 노동자들은 이에 대항할 수 없었던거에요.

 

그래서 노동자들은 불만을 가진 다른 노동자들과 모여 한 목소리를 내고 집단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본에게 맞서게 되는데 이게 지금의 노동조합, 즉 노조의 원형이에요. 당연하겠지만 자본가는 자신이 투자한 자본이 노동자들에 의해서 시간에 맞춰 더 불어나지 않으면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 권력과 같은 눈높이에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노동 조합의 요구는 당연히 자본가가 돈을 버는 데에 우리의 노동력이 더 높은 가치를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거에요. 임금 인상 혹은 근로시간 단축이 핵심인거죠. 우리의 노동시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 주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던가 지금과 똑같은 돈을 줄 거면 노동시간의 가치가 더 비싸졌으니 우리는 그만큼 더 적은 시간을 일할거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요. 사실 지금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노사간 협상 쟁점은 큰 틀에서 보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이 두 가지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마치 사필귀정처럼 이 산업 혁명 속에서 엽기적인 형태로 희생당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이후 세계 최고의 퍼주기식 보상 복지 정책을 누리게 되요. 국가경제의 발전에 대한 지분 요구가 가능했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가피한 과거가 있었으니까요. 그 유명한 영국병의 등장 역시 이같은 반인륜적인 지주들의 산업 혁명에 따른 댓가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치룬 어쩔 수 없는 역사였을거에요. 그런데 이 영국병이 생길만큼 복지가 나아졌다고 해서 회사 내의 전통적 계급사회의 잔재가 완전히 걷혔다고 말하기는 힘들었죠.

 

영국병 창궐로 인해 노동자와 지주 계급이 한번 뒤집힌 후에야 간신히 잡힌 양측의 평등 균형으로 모든 게 해결되었을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어요. 세계 금융의 중심인 영국 은행들은 복지 리스크가 심해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는 자국 기업에 더 이상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지 않았고 기업은 부실해졌으며, 노동자들은 부실한 기업 속에서 제조업 노동자를 업신어기는 등의 자체적 카스트를 만들어버리고 말죠. 자본가 카스트가 몰락하고 노동자에게 권리가 돌아왔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했던 건 결국 자기들 내에서의 차별을 통한 우월감 조성이었다는거죠. 한마디로 입헌군주제를 포기하지 않는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성공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몰라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살기 좋다며 칭송받는 유럽의 복지는 끔찍한 희생에 대한 자연스러운 보상이었어요.

 

 

 

영국으로부터 비교적 이른 독립을 완성한 미국의 경우는 영국과는 문제가 조금 달랐어요. 바로 흑인이라는 존재였죠.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노동력은 포기할 수 없었는데, 이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줄 생각은 에초에 없었어요. 18세기 초 진즉에 흑인 노예 해방을 단행했던 서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표면적인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고 그나마 '공화정'하에서 이루어진 노예 해방 선포가 사회적 강제성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미국의 거의 모든 산업에서의 '하찮은 일' 즉 노동자 계급은 흑인들 차지가 되어있었고 암묵적으로 공고해진 인종차별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거죠. 당연히 미국의 노동운동은 흑인들의 해방운동과 권리 찾기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해야했던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이 영국처럼 원활하게 될 리가 없었어요. 에초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평등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팽패했죠. 이렇게 한번 떨어진 인식은 자본가들을 기고만장하게 했고 미국에서는 수많은 노동 운동과 노조가 자본가들에 의해 힘으로 탄압을 받게 되요. 노조는 폭력으로 제압당하기 일쑤였고, 법은 이를 제제할 어떤 장치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의도적인 방관을 일삼았어요. 처음부터 노동자의 계급을 최하층으로 규정했으니 이들을 구제할 생각이 없던 게 당연했던거죠.

 

생동성 실험 알바 해보신 분 있나요? 그런데 이들이 맞는 건 백신이 아니라 매독균이에요.

 

그런데 미국이 금융위기와 대공황을 거치면서 와그너법이 제정되었고 노동자의 권리가 일면 상승하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의 질떨어지는 노동은 흑인들 차지였어요. 이게 영국이랑 다른 점은 에초 영국은 뭐가 어찌되었던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한 노동자의 권리 찾기에 주력했지만 미국에서의 노동자들은 에초 다른 인종이라는 어떤 넘사벽의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권리를 찾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흑인을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흑인이 백인의 영역 즉 '지주'의 영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흑인은 노동자가 될 수 있지만 사장은 될 수 없고, 도시의 시장도, 대통령도 될 수 없도록 하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들끼리 살게 만들었던 게 미국의 인종차별이었어요.

 

임금 문제로 까불다간 태워죽였다네요.

 

미국이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마틴루터킹의 공민권과 더불어 짐크로 법이 폐지되면서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되었어요. 아니 법으로 인종차별을 허용했던 게 폐지되었다고 보는게 맞죠. 미국은 아예 흑인들의 사회적 차별을 법적으로 허용했던 나라였어요. 그런데 이게 풀렸다고 자본가들의 '그들만의 리그'만들기가 사라진것은 아니었어요. 인종차별이 사라지니까 이제는 인종 차별에 가난까지 더해 아예 가난한 계층이 자신들의 계층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것을 제한하는 시스템을 구상하기에 이르러요. 한마디로 부자인 사람들은 계속 부자일 수 있도록, 정치와 경제가 유착관계를 벌여 서로 공존할 수 있도록 기부와 혜택을 주고 받게 된 거죠. 금융자본의 독점으로 인한 일하지 않는 자들의 부의 축적, 지금의 99%운동도 여기에서 촉발되었던 거에요.

 

 

 

 

 

왜 이렇게 장황하게 다른나라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는지 아직 잘 모르시겠다고요?

 

그건 우리나라의 회사라는 곳이 애석하게도 이처럼 전혀 다른 노동운동의 과정과 결과를 가진 영국과 미국의 가장 안좋은 부분을 따와서 합쳐놓은 형태가 되어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의 회사는 미국의 시스템을 베이스로 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에초 단일민족이라서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자본가들은 일단 노동자 계층을 만들고 그들이 절대 자본가를 넘볼 수 없는 갖가지 사회적 제한 장치를 만들어두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하는 순간 자본가들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흑인들을 탄압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처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거죠.

 

그런데 이런 미국 시스템을 베이스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 회사가 롤 모델로 삼았던 기업들은 대부분 일본 기업들인데요. 일본은 입헌 군주제이기때문에 의미적으로 매우 닮은데다, 처음 문물을 받아들인 영국의 기업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영국의 노동자 착취와 그에 따른 보상으로 파격적인 복지 혜택을 내세운 후유증까지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고, 회사 내 자발적 계급사회 구축까지 거의 완벽한 영국식 모델을 정착시킨 나라인거죠. 그런데 이 모델을 이미 미국식 베이스로 사회 문화를 짠 한국에 짜맞추다보니 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가 아닌 나라에서 회사 내 계급사회를 볼 수 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낮은 노동자를 차별하는 미국식 노동자 차별의 잔재가 남아있으니까 계급별로 서로 차별하고 차별당하며 그것을 당연시하는 어처구니없는 회사 문화가 정착되어버리고 말아요. 여기에 그 계급사회의 위에 있는 자본가들은 그 계급사회와 철저하게 선을 긋고 계급사회와 별도의 사회를 구축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미국의 인종차별에서 촉발된 문화를 정착시키기까지 했어요.

 

 

 

아휴 더러운 비정규직 새끼들과 같은 자리에 앉기 싫어요~!

 

우리나라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가르치면서도 회사 내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계급화시키고 비정규직은 일용직, 파견직을 계급화시키고 차별해요. 대학생들이 벌이는 무개념 행동들 중에 학교 청소용역노동자들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동영상이 간혹 화제가 되는데 바로 이런 기형적인 문화가 낳은 현상인거죠. 그렇게 차별하면서 얻은 계급의 최정점에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게 만든 자본가들에 의해 명예퇴직을 당하거나 임금피크제로 더 이상의 계급 상승을 억제당하고 말죠. 그렇게 사회는 반복될거에요.

 

우리나라의 회사들은 미국과 영국 혹은 일본의 자본가와 노동가가 만든 회사 문화 중 자본가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서 섞은 회사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회사 문화는 백약이 무효에요. 영국이나 일본은 입헌군주제라는 배경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 내 계급체계를 타파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할 수 없는 완전한 공화국 사회이고, 미국의 노동자 권리 상승 모델을 가져오기엔 에초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에서 촉발되었던 그들의 사정과는 전혀 다른 상황일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의 모델로도 지금의 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한국 회사 문화가 만든 사회의 우울한 단면인거죠.

 

1960년데 짐크로 법이 폐지되고 노동조합의 권리가 높아지자 미국의 마피아는 이 노동조합들을 장악하며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어요. 한때 미국 정부는 마피아를 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노조의 활동에는 짤없이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동 운동은 인명이 죽어나갈만큼 매우 과격했었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회사 내 갈등에 대해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가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사실상 방조하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지도 몰라요. 노동자는 범법자라는 인식도 아마 여기에서 촉발되었겠죠.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데도 말이에요. 설마 그때 미국의 부패한 경찰들과 자본가들처럼 지금 정부가 자본가들에게 돈을 받고 노조 탄압을 묵인했을리는 없을거에요. 암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회사는 모일 회, 일 사로 만들어진 단어에요 영어로는 COMPANY인데, 이것도 모여서 일한다 혹은 모인다라는 의미 이상을 담고 있지는 않아요. 모여서 일을 하는데에 처음부터 계급이 있고 가져가는 이익이 정해져 있을리는 없어요. 자본의 가치만큼 시간과 인생을 들여 쏟는 노동의 가치도 그에 버금가죠.

 

사람이 모여요. 같이 일을 하기로 해요 제각각 재능이 다르죠. 누군가는 경영을 잘하고 누군가는 힘이 세서 일을 잘하고 누군가는 언변이 좋아서 영업을 잘해요. 이 셋의 능력 중 어떤 게 비싸고 어떤게 싼 능력인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어요. 당연히 그 셋 중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자신과 다른 두 사람의 능력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고요.

 

수익이 생기면 수익을 배분해야 해요. 당연하겠지만 처음에 돈을 만지게 되는 건 경영쪽을 잘하는 친구겠죠. 그 순간 권력이 생겨요.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에게 지금 100원의 수익을 올렸지만 사실은 10원밖에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속이거나 혹은 100원의 수익을 지금 올렸지만 회사가 조금 더 크기 위해서는 이걸 지금 당장 나누는것보다 일단 회사의 공동자산으로 해두고 나중에 더 크게 불려서 나눠갖기로 해요.

 

 

그런데 이 돈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경영을 담당하는 친구만 알게 될 수 밖에 없으니 경영을 담당하는 친구는 회사 사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 즉 다른 친구들에게 수익이 잘 돌아가지 않는 쪽으로 꾸며내거나 혹은 서류와 법적인 절차를 통해 회사 자체의 공동 자산에 대한 소유권 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바꾸기도 해요. 이렇게 되면 다른 친구들에겐 회사에서 나온 이익에 대해 내가 생각한 만큼의 돈만 주면 되지만 나는 회사가 내고 있는 수익 대부분을 먹을 수 있게 되는거죠. 다른 두 친구는 평생 경영하는 친구가 정해놓은 돈만 받으며 살게 되지만 경영하는 친구는 정말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 부를 축적한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혹시라도 이런 불공평하고 떳떳하지 못하게 번 돈을 의심할까봐 이 돈 중 일부를 정부에게 나눠주고 이들이 내가 가진 비밀을 알지 못하게끔 하는 한편, 이 친구들이 나한테 반항을 하면 불법적인 수단을 써서 막아도 내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게 되요. 자신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싶었던거에요.

 

 

...우리나라에서 회사라는 존재는 이미 모여서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영을 하고 돈을 가진 사람이 일방적인 권력을 가지고 모여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평등권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게끔 시스템을 손본데다가 다른 나라에서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삼았던 파격적인 복지 정책이나 정부 차원의 차별 금지법 신설조차도 자본으로 막는 이기주의의 극이 어디인지를 잘 보여주는 최악의 집단이에요.

 

갑이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될 줄이야...

 

...우리나라의 정부라는 존재는 회사가 이런 최악의 집단이 될 때까지 방조했고, 당신의 가족 부양과 노후를 도의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정책을 많이 써가면서 기업이 당신의 가족과 노후를 볼모로 당신을 착취할 수 있도록 꾸준히 어시스트를 하고 있어요. 국민에게 서비스를 한다며 당신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자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서비스 마인드로 당신을 좌절에 빠뜨리는 최악의 집단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콤비에요.

 

 

당신은 취업을 해서 회사라는 집단에 들어가는 동시에

이런 새끼들이랑 평생 싸워야만 하는거에요.

 

...

 

당신은 지금 당신의 생활을 위해서 고맙게도 돈을 주는 자선단체에 봉사를 하기 위해 입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능력을 응당 필요로 하는 조직과 그 조직의 돈을 필요로 하는 당신 사이에서 그 능력을 두고 거래를 위한 흥정을 해야 해요. 그것이 취업이라는 작업인거죠.

 

대부분의 채용 공고에는 그들이 원하는 당신의 연봉이 쓰여져 있지 않아요. 철저하게 감추죠. 당신은 그 공고에 써 있는 '이력서에 반드시 희망 연봉 기재'라는 항목을 보고 얼마를 기재해야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요. 왜 이 녀석들은 자기들 패는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내 패는 먼저 보고 사기도박판 장난질을 일삼으려 하나? 이런 회사는 면접 안 봐도 뻔하다라는 당당함으로 맞서야죠

 

 

입사한 뒤에도 언제나 당신은 계약 당시 약속했던 것들이 잘 지켜지는지,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째서 제대로 지키지 않는지, 내가 계약 사항을 위반한 사실이 없는 만큼 당신들도 계약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내 능력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세요. 그들은 '인맥'이니 '이 업계는 좁다'는 식으로 자신들에게 어느 정도 봉사를 하지 않으면 업계에서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려 이직을 어렵게 만들거라는 협박을 일삼을거에요. 만일 그런 이유로 타사 이직을 제한하고 평판을 떨어뜨린다면 충분한 자료를 수집해서 경찰에 신고하세요. 직장내 협박 공갈로 충분히 처벌받은 사례가 있어서 고소가 쉬울 거에요. 같은 예로 직장 내 계급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신적 폭력 행위도 충분히 처벌 판례가 있으니까 그런 느낌이 감지가 되는 즉시 권리를 찾으면 될거에요.

 

...라는 생각은 반드시 머릿속에 두고 취업을 준비하세요. 잠시 분위기에 휩쓸려서 회사 조직의 거대함에 잠시 물들어버릴지라도 나는 이 회사에 고용되어 생계에 대한 목숨이 걸린 일을 하는게 아니라 회사와 난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엮이는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사에 아쉬워함을 버리세요. 회사는 지금 필요없는 인력을 국가가 억지로 강요해서 뽑아놓고 돈 주는 게 아니라구요. 아니 설령 국가가 억지로 강요해서 뽑는다고 해도 그 강요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인거에요. 회사는 면접이라는 작업부터 당신의 멘탈을 통째로 갉아먹으며 너 따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지만 니가 운이 좋아서 이 회사의 녹을 받아먹게 되었으니 고마운줄 알라는 식으로 당신이 가진 능력을 극한으로 폄훼할거에요. 절대 휘둘리시면 안되요.

 

 

 

 

 

끔찍하지만 건투를 빌게요.

 

 

 

당신의 삶에

승리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3장

- 끝 -

 

posted by RushAm 2012. 8. 19.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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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4살 청년입니다. 유권자가 된지 꼭 4년째 되어가는데요. 주변에서 투표를 해야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88만원 세대이고 99%인건 분명한데요. 그렇다고 우리 입장을 반드시 대변해주는 정당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공약이 나오고는 있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죠. 대체 투표할 곳은 어디인가요? 그리고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봐야만 할까요?

 



<!?>



저도 몰라요. -_-

 

...

 

정치가 밥 먹여준다는 책도 있었고 실제로 청년실업에 관심을 가지는 후보도 많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서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던 사람들이 당선되고 나서 서민 생활이 정말 눈에 띄게 나아졌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거에요. 정치라는건 생각보다 그렇게 단순하게 '소원수리'를 하듯 간단히 내가 원하는 바가 정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 미리 말해두고 시작해야겠어요.

 

사실 소원수리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정치는 '내가 가난한 것'을 구제해줄 수 없어요. 내가 가난하면 일단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죠. 그렇게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먹을 거나 입을 것, 살 집을 살면 해결이 되요. 다행이도 우리나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전보다는 많이 선진화되어서 이제는 이런 개인적인 부분을 정치에 의존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이 가난한 것을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 그 자체를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방해하거나 얻을 수 있는 기대수익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 즉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대부분 옮겨가있어요. 흔히 말하는 서민 정당, 부자 정당이라는 말이 요 근래 5년 정도에서 부쩍 등장했고, 특정 집단을 대변한다는 청년당이나, 녹색당 등의 이색정당이 등장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아요.

 

 

물론 이러한 세분화된 방향성을 가진 정당이 다수 나오고 제각각의 논조를 이 나라가 나아가는 데에 모두 조금씩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선진화된 정치가 맞아요. 그런데 아직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지 고작 5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이런 짧은 이력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인식 부족으로 돌아오게 되요. 언론들의 유력정당 중심의 보도 행태도 있지만, 이들 정당의 활동이 그 정당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거든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정당의 존재와 그 정당의 방향성이 자신에게 꼭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투표 당일에는 유력정당에게 표를 던져요. 그중에는 누가 봐도 정책적으로 전혀 색깔이 맞지 않는 극빈층이 부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력정당에게 투표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과연 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후진적인 발상을 가지고 있어서 유력정당의 사탕발림에 넘어가기만 했던 것일까요? 정말 항간에 말대로 부자정당에게 투표하면 나도 언젠가 부자가 되었을때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요? 그건 이미 사람들이 특정 집단을 타깃으로 한 청년당이나 녹색당에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부정할 수 있는 논리에요 한마디로 지금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지금 현실'에 대한 부분을 걱정할 뿐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청년당이나 녹색당의 한계점은 '지금 당장'우리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지 않다는 거에요. 그들은 '미래'를 이야기하며 우리 아들 딸들이 이 나라에서 살 때 좀 더 쾌적한 환경과 청년 시절 좀 더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자고 역설하죠. 얼핏 청년당은 지금 청년들의 핍박받는 문제점을 당장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직설적인 키워드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이 적어질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과연 '내가 곧 미래에 부자가 될 것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부자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말이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노인들이라고 무조건 보수정당 편이라는 생각만큼 위험한것도 없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세분화되고 있는 과도기 속에 있지만 아직도 프레임을 좀 더 크고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디테일해질 수 없거든요. 그것은 지금 유력정당이 점차 양강체제로 좁혀지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반증되는 셈인데요. 만일 유력정당의 어떤 후보가 서민을 위한 정책, 어떤 공약을 내세우고 그것을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를 한다면 너무 단순한 시각이죠.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치는 그렇게 세세한 공약을 하나하나씩 지켜나가는 정치가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편이 나은가'를 선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에요.

 

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 대선이라는 정치행동이 본격적으로 국민 손에 돌아온 직후 처음 뽑힌 대통령은 5공인사 노태우였어요. 많은 사람들은 유권자들과 서로의 욕심 때문에 야합을 하지 못한 김대중, 김영삼을 비난했죠. 그러나 사실 진정 유권자들이 변화를 바랬다면 그들이 야합을 해내는 여부에 관계없이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을거에요. 투표는 정치권이 야합을 하느냐 마느냐에서 정해지는 게 아니라 결국 국민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거니까요. 야합을 했다고 해도 이겼을지에 대해서는 만약이 없겠습니다만, 아무튼 당시 국민들은 결국 노태우를 원했다는 결론이 나오는거에요.

 

물론 그게 어떤 속임수를 쓴 결과였더라도 말이죠.

 

 

노태우 정권이 부패하고 여당으로 출마한 김영삼과 야당으로 출마한 김대중이 다시 맞붙었을때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오게 되요. 다들 현정권의 부패에 분노했지만 결국 다시 여당으로 출마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세웠죠.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생각보다 그들의 부패가 '현실'에서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는 거에요. 세금이라는 제도의 무서운 점은 공동책임이기 때문에 내가 낸 금액을 가지고 부정축제를 벌인다는 느낌이 잘 와닿지 않는다는 데에 있죠. 난 세금을 1년에 200만원 정도 내는데 그들은 2천억 가까운 부정축제를 벌인다면 그게 진짜 내 돈으로 한다는 느낌이 안오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까지 기업들이 경제 성장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소비되면서 실제 체감 경제가 별로 나쁘지 않았고, 나빠졌다가도 금새 회복되는 국면이었기 때문에 더욱 현실 빈곤을 느끼는 계층이 없었던데다, 내수소비에 대한 각종 규약을 풀면서 오히려 내수경기는 훨씬 좋아지게 되요. 이른바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두텁게 생기는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라는거죠.

 

그래서 국민들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까지 그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간에 '일단 나한테 피해가 없었다'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에게 표를 던졌어요. 그 표의 의미는 단순해요 '지금 현실이 좋다'라는 거죠. 즉 정권이 교체된다는 의미는 지금 사는 삶의 가치관이 바뀐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데, 워낙 고도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불안한 경제상황을 맛봤던 세대들이라 그런지 요즘도 옛날 못살던 시절 회상하면서 진짜 세상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곧잘 듣게 되곤 하는데요. 바로 이 관점 '지금도 밥 안 굶고 안 춥고 사는데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냐'라는 생각이 '보수적인 관점'을 낳게 되고 지금에 안주할 수 있게, 다시말해 지금을 잃지 않게 해줄 수 있을 듯한 '보수를 표방하는 유력정당'에 표를 던지게 되는 거에요.

 

 

또한 그들은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젊은이들을 질타하는 한편 고도경제성장시기의 고통스러운 노동자 시절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어하지 않는 이중적인 생각 또한 가지고 있어요. 지금에 만족하는 만큼 옛날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는게 속내인 셈이죠

 

 

그러던 것이 이 IMF를 계기로 사람들이 처음 이 정치가 자신의 지갑에 들어오는 돈에까지 영향을끼칠 만큼 심각해졌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그들은 여당 대신 참 오랫만에 야당을 택하죠. 자신의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손해가 나면 국민들은 '머무르면 안된다'라고 생각하고 '머물지 않는 쪽'을 택해요. 몽골족이 모래폭풍의 위험을 느끼면 게르를 철거해서 옮기듯, 지금에 머물면 내 지갑이 계속 털리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이런 생각이 아쉽지만 유권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진보 인식의 한계에요. 사실 지금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넓게 보면 이와 큰 차이가 없잖아요.

 

그런데 진보쪽으로 정권교체가 된 다음 김대중 정부 시절 이루어졌던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에서는 모두 보수진영이 압승을 거두게 되요. 사람들은 IMF를 서둘러 극복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 임기 초기 1~2년간 대량 실직과 소비 감축, 금모으기 운동같은 범국민적 극복 노력 등으로 매우 피곤해진 상태였어요.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그리고 대통령 선거의 차이점은 대통령은 정말 멀~리 있는 듯한 존재를 뽑는 느낌이라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나라의 운명, 나라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한편, 국회의원이나 지방선거는 바로 우리 동네, 더 가깝게라면 바로 내 삶의 질과 관련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에 대한 관점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그것과는 또 다르거든요. 국회의원이나 지방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결국 경제 극복에 대한 피로그 극심하니까 나 좀 챙겨주라, 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에요. 복지에 대한 요구가 이때부터 있었던거죠.

 

 

제...제발 그만! 멈춰줘어어!!

 

IMF가 일찌감치 졸업된 후유증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정말 많은 변화가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큰 불안은 '노후에 대한 불안'이었어요. IMF 이전까지 일본식 '종신고용'정책을 고수하던 기업들이 속속 구조조정을 통해 종신고용 보장을 철회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회사에만 노후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이때 그 유명한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그룹 AIG 띠링띠링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계 민영보험회사들이 진출해서 이 불안심리를 노리고 한끗발 날리기도 했었어요. 지금은 망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그당시만 해도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는 심리도 심리지만 가능하면 '더 안정적으로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보수적인 심리가 더 강했어요. 생활수준이 갑자기 너무 떨어지니까 브레이크를 걸고 싶은 마음이 정치계의 보수를 찾게 만든 원동력이 된 거에요. 여러분들이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를 대할 때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아요. 굳이 국회에 의석이 몇 명 채워져야 정권에 힘이 실리니 어쩌니 하는 그런 바보같은 힘 논리는 그냥 대선에서 끝나야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적지 않거든요.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자치선거는 오히려 대선보다 정권교체가 훨씬 힘들고 10선이상의 의원이 나오기도 하는거에요.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거죠.

 

정치라는건 보기에는 무슨 복잡한 파워게임처럼 보이지만 큰 흐름을 보면 단순하고 알기 쉬워요. 노무현이 당선된 것은 2002년 월드컵에서 뜨게 된 열망 즉 '뭔가 더 나아지고 싶다' 라는 욕망이 진보의 요구로 이어져 노무현이 당선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더불어 집값과 바닥을 친 경제의 고속성장드라이브라는 진보적 요구가 거대했다고 볼 수 있어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역사적 사실로는 우리당의 과반으로만 기록되어있지만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은 텃밭인 TK PK를 빼앗기지 않았죠.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TK PK의 지역경제는 당시 최악이었음에도 그 원흉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재신임했다는 거에요.

 

사람들이 보수를 찾게 되는 이유는 '너무 많은 성장으로 내실을 다질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너무 많은 추락으로 인해 그 추락을 멈추고 현상유지라도 하고 싶다'라는 심리가 있을 때도 있어요. 역시 '지금을 사는 나만 피해가면 된다'라는 이기주의에서 발로된 발상인데요. TK PK의 경제가 떨어진 이유를 제공한 사람들이 다시 당선되는 이유는 단지 지역주의와 당의 유착관계라고만 보기는 어려워요. 그들은 당 이름이 아니라 당이 가진 이미지 코드 '보수'가 필요했던 것 뿐이거든요.

 

내가 국밥 좀 먹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그의 보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이런 보수에 대한 열망은 급격한 사회체계 변화를 추구했던 노무현을 대신해 이명박을 대통령에 올리게 되요. 이명박의 이미지는 단순히 경제를 살리는 이미지였다기보다는 서울시장 당시 '성장'을 멈추고 '국민의 삶의 질'에 집중한다는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거든요. '청계천'이 가지는 의미는 처음으로 서울시가 고가도로따위에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도시환경개선에 돈을 썼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이는 고 건 전 시장이 추진했던 하늘공원, 선유도 공원 등으로 대표되는 서울도심녹화사업과 닮아있는데 다만 하늘공원은 개장 첫날 인파가 마구 몰릴만큼 이슈화되지 않았던거고 청계천은 한달 남짓은 각종 이슈로 뉴스에 매일 오르내렸던 게 차이라면 차이일수도 있지만요.

 

이런 이미지, 국민들은 이명박에게 지표상의 경제성장을 기대한 것이 아닌 진정한 보수처럼 급속성장을 잠시 멈추고 내정을 챙기는 모습을 기대했던거에요. 노무현 정권이 아무리 경제를 살렸다고 지표를 들이대도 소용이 없었던 이유가 그거였거든요.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 당시 복지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았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IMF가 준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자존심 스트레스에 지쳐있었고 이명박이 가진 보수의 힘을 원했어요. 그 뒤로 두 번의 지방선거와 두번의 국회의원 선거 모두 한나라당과 현 새누리당이 과반을 차지한 것은 이런 보수의 대한 열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죠. 사람들은 지금 피부로 느끼는 경제가 아무리 힘들어져도 여당을 찍을 수밖에 없어요. 희망을 잃으면 잃을수록 '아 어서 이 상황을 타개하자'라는 진보적인 생각보다 '더 떨어지고 싶지 않다 이 이상은 악몽이야'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 쉬우니까요.

  

 

 

머리가 더 복잡해지지는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옹색하지만 결론을 내볼게요.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유력 정당들이 가장 못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당 내의 다양한 세력을 용서하는 능력이에요. 보수정당 내에서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다할 소신을 발휘하기 힘들어요. 그 반대로 진보정당 속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하고 있죠. 그럴 바엔 상대 당으로 꺼지라는 식의 이분법적 선긋기도 쉽게 볼 수 있어요.

 

사실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진보 속의 보수, 보수 속의 진보에요. 그들은 한쪽으로 입장이 쏠려있지 않아서 어떤 사안을 보다 중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죠. 아주 보수적인 정책이 나온다고 한다면 이 정책을 마냥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말 국민에게 필요한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할 여지를 갖어야 할 세력이 바로 이 세력이에요. 이 세력은 고정되어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떤 정책이든 사실 당리당략이라는 껍질을 까고 알맹이를 본다면 생각이 집단적으로 일치할 수는 없기때문이죠. 양쪽 당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분명 나와야 정상이에요. 그게 사람이 만든 집단의 기본적이고도 기본적인 순리인거죠.

 

이런건 말이 안되는거에요.

 

이들이 목소리를 올바르게 낼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먼저 변해야겠죠. 정치가 변하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그 기본적인 집단의 순리를 따라가면 되요.

 

5천만이 넘는 국민들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딱 두 가지 목소리만으로 대표할수도 없죠. 지금의 양강 구도는 정말 5천만 국민들이 딱 두가지 목소리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중에서는 단지 정치에 대한 외부적 인식 주입으로 인해 자신의 소신과 관계없이 대세를 따르듯 떠밀려 합류한 사람들도 분명 있다는 거죠. 투표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식이 되는데 그들의 대표가 그러지 말라고 바라는 건 모순이겠죠. 콩심은데 콩 나고 그렇게 떠밀리듯 다른 생각에 합류해서 뽑힌 정치인들이 이분법적 논리를 중단할 수는 없을거에요

 

그렇다고 지금부터 어려운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요. 매니페스토, 그거 지키는 사람 별로 없어요. 단지 이 사람이 '보수'인지 '진보'인지만 잘 구분하시고 내가, 이 마을이, 이 도시가, 이 나라가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쳐진 사람들을 보듬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해서 그 판단에 따라 보수나 진보에게 표를 던지시면 될 거에요.

 

무소속 후보의 당선이 많아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만 주의하실 점이 있어요. 어떤 당이나 후보는 이 보수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보수도 진보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정치를 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정치는 그들 스스로의 꿈이 이루어지지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들이 진짜 보수인지 아닌지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언론이 장악되었다고요? 진보성향언론들이 왜곡한다고요? 그거 아무 상관 없어요. 내 생각이 올바르면 보수언론 속에서도 진실을 볼 수 있고 진보언론속에서도 수구를 찾아낼 수 있어요. 아무리 보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보를 빨갱이라고 싸잡아도,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를 죄다 수구친일파라고 몰아세워도 앞서 말했지만 집단이라는 것은 결코 일원화될 수 없거든요. 단체가 개개인의 사상을 100% 일치시키도록 만드는건 불가능한거죠.

 

왜냐하면 진보정당이든 보수정당이든 말이죠. 지금 나와 있는 유력정당들은 자신들의 세를 불리기 위해서 덕지덕지 가져다 붙인 사람들이 한트럭이라 그 정당의 이름이 보수 혹은 진보를 대표하기 이미 힘든 지경이에요. 지금의 보수정당에 있는 사람들을 당이 가진 보수적 이미지만으로 뽑아서도 안될것이고 진보 정당에 있는 사람을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 당 이름이 가진 진보 성향을 믿고 뽑아서는 안된다는 말이에요.

 

결국 보수정책을 기대했던 보수정당은 가장 보수적이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죠.

 

 

물론 지난 10년의 정권도 아주 진보적이라고 보기 힘들었어요.

 

 

보수가 필요하면

보수적인 사람을 찍어서

그가 보수적인 생각을

이 도시, 이 나라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고


진보가 필요하면

진보적인 사람을 찍어서

그가 진보적인 생각을

이 도시, 이 나라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정치 참여이며

투표로 이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원칙

 

 

투표는 꼭 해주세요.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니까...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2장 

- 끝 -

posted by RushAm 2012. 7. 19. 17:10

이 글은 대한민국에서 정규교육을 이수받고 있거나 혹은 이수받은 이후 이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인 민주주의의 시민 권리와 국가 혹은 유관기관 및 기업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고 자신이 왜 지금 이것을 하고 있어야 하며 이걸 하면 정말 제대로 앞길이 트이는지에 대해서 매우 불안해하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 쓰여질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회를 살아가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알고 계실만한 내용이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거나 흥미로운 내용이 되지는 않을 것 같으므로 '뭐야 이거! 다 아는 내용이잖아!'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기쁜 마음으로 구독을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가급적 어떤 정치적 성향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혹여 이 글이 정치적인 지적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제 글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치판 자체가 정상적인 꼬락서니가 아니기 때문이기에 느껴지는 착시이므로 너무 우려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본 상담 중 질문 내용은 실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글 형식에 따라 만들어진 픽션입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

저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내년이면 수능 세대가 되는데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학원에 가서 늦은 밤까지 공부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뭘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공부는 학원에서 더 먼저 배우고 학교에서는 잠만 잡니다. 솔직히 학교 안 다니면 안된다고들 하는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공부에도 별로 취미가 없지만 그냥 대학 못가면 안된다고 하길래 학원에서라도 열심히 공부하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다른 특기라도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것도 없고 그냥 공부해서 대학이나 잘 가야할것 같은데, 솔직히 고등학교도 그렇고 대학도 그렇고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왜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

저도 그랬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늘 생각했어요. 한번쯤은 다들 생각했을 거에요. '학교는 왜 다니는 걸까', '학교에서 다니는 지식이 과연 도움이 될까?', '정말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인생 나락으로 떨어지고 사람구실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

 

사실 학생이나 우리의 고민을 더 깊어지게 만든 건 이같은 질문들에 대한 어른들의 이중적인 태도에요. '학교에서 배운 지식 하나도 쓸모없어'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그래도 학교는 나와야해, 뒷구멍으로라도 나와야해' 라는 모순된 답변을 우린 수도 없이 들어왔고, 이에 최면이라도 걸린듯 어떤 이에게는 정말 지옥같고 어떤 이에게는 이보다 시간낭비일수가 없지만 어떤 이에게는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될수도 있는 학교라는 곳을 다니거나 졸업해왔어요.

 

 

 

물론 저도도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답을 시원스럽게 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앞서 예를 든 어른들과는 조금 이유가 달라요. 학교라는 곳은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고 필요없는 사람에게는 1분 1초가 지옥일뿐인 곳이거든요. 필자가 어떤 생각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학교를 다니거나 다니지 말라는 식으로 말해버린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악충수를 두거나 필요없는 사람을 지옥에 옭아맬수도 있어요. 한마디로 상투적이며 책임회피적인 이야기로 들려 미안하지만 결국 그 판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의 학교, 그리고 그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정부와 그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를 공유하며 자라난 이 사회 어느 누구도 학교에서 지금 자라나고 있는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생각과 고민의 기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있어요. 관심? 그거 대단할거 없지 않나요?. 학교가 뭔지,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인지를 경험론이 아닌 원론으로 설명해주고 스스로 판단하게끔 유도하는 게 전부에요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고요., 그런데 아직 이 세상에서 그런 노력의 흔적을 발견한 적이 없죠? 어느 누군가는 혹시 있는데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는다고 학생을 질책할지도 몰라요. 다만 그정도로 노력을 해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 맞을까요?

 

중퇴해서 후회한다는 기사는 많지만 중퇴해서 이렇게 성공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는데...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학생에게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스스로 해답을 찾고 결정하는 데에 있어 단 한발자욱만 내딛어도 될 때까지 문 앞으로 이끌어줄 좌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볼까 해요. 학생이 가진 의문의 본질과 이 사회가 잘 가르쳐주지 않는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학생들에게 지금 소속되어 있는 작은 사회 학교는 물론 그 학교를 축으로 결성된 공동체 사회에 대해 그들 스스로 판단하여 비판받을 수 있도록 있는대로 재료를 다 쏟아주고 싶어요. 그 첫 시간으로 지금 다니고 있는 혹은 다녔었던 학교는 대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해요.

 

우선 학교를 왜 다닐까에 앞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지금 학생이 학교를 다니는 것을 과연 누가 원하고 있을까에요. 학부모님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겠죠? 아무튼 학생이 학교에 다녔으면 하고 바래요. 그런데 그 분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학생이 학교를 어쨌든 졸업이라도 하고 어쨌든 입학이라도 시키려는 걸까요?

 

이 사회는 뭐 대단해보이지만 사실 그 조직의 건실함은 좀 많이 떨어져요. 왜냐하면 정말 단기간에 경제 발전을 급속도로 이륙한 나라가 내부를 건실하게 다져놓을 여유가 있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거거든요. 당연히 건실하지 못하면 어떨까요? 그래요 대충 하겠죠. 이 사회 엄청 대단해보이지만 진짜 대충 얽혀있어요.

 

 

당시 신분증인 도민증, 일단 한글도 없고...

 

 

이 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서 진짜 아무것도 없었을때 나라에서 제일 필요한 인력은 뭐였을까요? 물론 건설노동자도 필요했지만 그보다 필요한 건 이 나라의 기본적인 행정 체계를 갖출 수 있는 인력이 정말 많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자릴 원했고요. 문제는 이런 일자리는 지금이야 서류 쓰고 도장 찍고 하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허다했다는거에요.

 

이런 인력이 충분히 공급되려면 일단 학교가 많이 있어야했고 그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시켜야겠죠? 그런데 당시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10살 전후부터 든든한 인력이 되는 인재를 학교에 잘 보내려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교는 당시 국민들에게 '아이를 맡는다'는 개념으로 학교의 개념을 바꿔요. 즉 초창기 학교는 배움의 장이라기보다 양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죠. 아무튼 애들 밥이라도 먹이고 시간이라도 때워주니까 일단 학교 보내는 국민들이 적잖이 늘게 되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 어려운 시기에 왜 그리도 학교를 열심히 세우고 운영했을까요?

 

분단국가였고 휴전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정부가 직접 학교를 장악해서 어느 정도 북한과 대립되는 그리고 현 정부에 대한 홍보와 사상을 주입시킬 필요성이 있었던거죠. 그래서 당시 학교에서는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토씨 한 글자까지 빼놓지 않고 외우게 했던거에요. 학교가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를 잘 볼 수 있는 사례인거죠. 외우지 못하면 구타나 체벌이 그렇게 극심했다고 하네요. 대체 애국가와 국민교육헌장이 교육적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어요.

 

교련 수업도 같은 맥락...

 

 

어쨌든 이렇게 학교를 나오게 되면 싫든좋은 한글이랑 계산 정도는 깨치게 되요. 중학교 고등학교 정도 나오게 되면 적어도 공무원정도는 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갖추게 되죠. 믿기 어렵겠지만 예전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공무원 할 수 있었어요. 물론 지식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이른바 사상적인 것까지 모두 검증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근데 사회 체계가 제대로 안 잡혀서 그 체계 잡기 위해 뽑는 인력 선발에 그 기준이 뭐가 있겠어요? 에초에 뽑는 사람이 뽑히는 사람보다 학력이 더 낮은 경우도 허다했어요. 당연히 선발시험따윈 꿈도 못꾸죠 (누가 출제하겠어요) 그래서 그때는 그냥 어디 학교 나왔다고 하면 일단 어느 정도 배운 놈이라고 인정해주고 그 학력에 맞는 일자리를 주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만든 사회 체계가 튼실할리가 있나요? 당연히 엉망진창이고 몇 번의 치명적인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 그나마 좀 봐줄만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엉망진창이에요.

 

그러니까 학교는 우리가 필요로 해서 다니는 게 아니라 에초부터 정부가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키워내서 자기들이 써먹기 위해 세운 기관이에요. 30년 전만해도 전국 주산대회 열리고 모든 학교에서 주판을 가르쳤어요. 산업혁명이라는 70년대에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인문계를 누르고 명문가도를 달렸던 때가 있었어요. 모두 그 당시 정부의 경제 정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바뀌었어요, 적어도 국공립 학교라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고 보면 될거에요. 대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요즘 말하는 갑을 관계에서 학교가 갑이고 학생이 을이 아니라는거에요. 당연하겠지만 선생님들이 여러분들을 학교에 옭아매는 이유도 물론 여러분들을 매우 사랑하고 미래가 걱정되어서도 있겠지만 더 대의적인 부분에서 실 끝을 찾아가면 인사고과가 나오고 그 인사고과의 목적에는 당연히 국가정책상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서 이 사회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소비하고 또 생산하는 일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깔려있는거에요. 이 육성 계획에서 여러분이 이탈하면 선생님들은 정부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죠. 선생님들도 정부한테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거에요.

 

원하는 쪽이 을이 될 수 밖에 없으니 학교에 가기 싫은 학생이 학교에 다니길 원하는 학교와 그 위의 정부가 을이 되고 학생이 갑이 되긴 했는데, 왜 학교를 억지로 다니는 상황이 되었는지 이상하죠? 학교는 나오라고 하면서 대학교까지 나온 형 누나들이 실업자로 PC방에서 총질하는 모습 보면 뭔가 위화감도 느껴지고 그렇잖아요,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요?

 

 

그건 이 나라가 70년대 후반까지는 정부 주도로 5개년 경제 개발 정책 (사회교과서에서 배웠죠?) 같은 것들을 펼치면서 스스로 일자리나 산업의 흐름을 결정하고 기업들이 따라가는 식으로 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최신 경제 트랜드를 읽고 어떤 인력이 어떻게 공급되어야 하는지를 정부가 가장 먼저 꿰고 그걸 조절할 능력이 충만했어요. 그래서 계획에 맞춰 학교도 세우고 인력이 나오면 그만큼의 일자리가 이미 준비가 되는 선순환형태가 되었던거에요. 그러니까 그때는 진짜 학교만 가면 정부나 기업이 다 알아서 일자리 만들어놓고 기다리는 판국이었던거죠. 인력이 귀했고, 그래서 대학만 가도 월급이 엄청 높은 일자리 만들어놓고 모셔갈 지경이니 소 팔아서 서울대 보내도 투자금 손쉽게 회수 가능했던거에요.

 

그런데 80년대부터 근 30년동안 제대로 된 정부 주도 경제정책보다는 대기업이 스스로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바뀌게되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때 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을 세우기보다는 29만원을 벌기에 더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 같거든요.  암튼 정부가 대기업에 경제개발 주체를 넘겨주면서 대기업들은 정말 막강한 주도권을 갖고 급격히 이 나라에서 세력을 키워나가요. 그런데 그 키워나가는 주체가 국민들을 키워내야하는 의무가 있는 정부가 아니라 그런 의무가 있을 턱이 없는 기업이 되면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져요.

 

인력은 부족하다는데, 채용은 안되던 시절...

 

정부는 더 이상 학교에서 사회에 맞는 인력을 급하게 키워낼 필요성도 없어졌고, 학교는 실이 끊어지니까 이도저도 아니게 되기 시작해요. 더구나 정치가 몇 번의 ㅄ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동안 기업은 신나게 돈을 벌어들이며 이 나라에 주도권을 잡아나갔고 경제 트랜드를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죠. 그 ㅄ같은 약 7년간의 시간동안 정부는 이 나라의 경제 트랜드에서 몇 년이나 뒤쳐지게 되요.

 

그러다보니 이 갭만큼 학교도 뒤쳐질수밖에 없죠. 기업은 컴퓨터할수 있는 인재를 원하는데 학교는 학생들이 아직 주판이나 튕기고 있었어요. 기업들은 당연히 이런 인재를 뽑지 않죠. 뽑을 의무도 없고요. 그런데 사실 컴퓨터를 하고 하지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이 경제의 주도권을 도덕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집단이 쥐게 되니까 이 권력을 남용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는지, 경제와 일자리에 대한 선순환개념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놔요. 필요한 인력을 뽑는게 아니라 뽑고 싶은 인재가 필요했던거죠.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기술을 배워서 직업을 갖기보다 고학력으로 고임금을 받는 화이트칼라가 되기 위해 인문계를 택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고, 회사들도 이렇다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전공이야 어떻든 고학력자를 많이 뽑는 식으로 바뀌어나가게 되요.

 

앞서 서두에 사회 조직이 진짜 대충 얽혀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게 왜그러냐면 바로 이 기업, 더 엄밀히 말해 그 안에 있는 기업 조직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되다보니 필요한 능력에 맞는 사람을 뽑기보다 '사적인 이익'에 필요한 인재를 추구하려는 성향이 생겨버린거에요. 같은 고향이나 같은 학교 출신을 더 우대하는 풍토가 생겼죠. 그런데 이게 같은 학교 나왔다고 하면 그 학교별로 사내에 파벌이 생기게 되고 당연히 어떤 능력제로 뽑은 인력들이 아니다보니 능력들이라곤 다들 고만고만해서 어느 파벌이 더 나은지에 대해서 승부가 잘 나지 않았어요.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결국 고등학교때 짱먹던 놈이 동창회에서도 으스대듯, 회사 내에서도 좀 먹어주는 명문학교 출신들이 더 어깨를 펴고 다니게 되요. 사람이라는게 공평함 속에서도 서열을 정하기 마련이거든요. (명문학교 나오면 배우는게 아주 쬐끔 낫긴 하지만) 이렇게 학벌이라는게 생기게 되요.

 

 

그리고 학교들은 점차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보다 그 대기업의 주력 파벌에 소속되기 위한 프리패스 발급, (졸업장)을 따기 위한 에스컬레이션의 역할을 하게 되는거죠. 당연히 학교가 뭘 가르칠 생각을 할 리가 없고, 학생도 뭘 배우려고 하기보다 턱걸이로라도 학교에 들어가고 졸업장을 따내서 편하게 취업하려는 생각만 하게 되요. 또 그게 됐다는것도 문제였고요.

 

정부는 경제에 관심이 없고, 기업은 정부에게 어떻게든 더 권리 따내려고 돈먹이고 있고 정치는 좋다고 그 돈 받고 정사에는 똥싸놓고, 기업 내에서는 생산직에는 인력부족에 서류에 도장찍는 일만 하는 화이트칼라만 잔뜩하고 능력있는 사원들보다 파벌좋은 사원이 더 잘나가니 회사가 잘 될 턱이 있을가요? 정부에게 따낸 권리를 이용해서 손쉽게 경제 주도권을 잡았던 회사들은 점점 ㅄ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ㅄ같은 상황이 알려지면 부도나니까 부도나기 싫어서 정부에게 없는 돈 털어서 바치고 정부는 부도나지 않는 방법이나 부도를 감추는 방법을 회사들에게 만들어줬어요. 금가는 벽에 페인트칠한다고 벽수리가 될까요? 결국 빵~ 하고 한국 경제는 무너지고 말아요.

 

 

 

IMF가 터진거죠.

 

그러고보니 증권거래소가 본격적으로 태동된 시기도 1980년대 초반이었네요.

 

벤처 기업이 약진하고 중공업이 속속 몰락했어요. 경제는 어려워졌고 실업자가 속출했으며 회사에서는 이미 파벌로 버텨내지 못하고 개개인의 능력으로 경쟁, 즉 평생직장이 아니라 짤리지 않는 경쟁을 해야 했던거에요. 벤처기업들이 요구하는 인력도 이전과 달랐죠. 문제는 이런 변화를 정부가 기업 스스로가 했다면 정부나 교육 부처가 조금이나마 예측이란 걸 하고 인재육성 차원의 교육제도를 손봤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변화가 우리손이 아닌 외국인 IMF에 의해 몇 년이나 계속되는 바람에 우리 정부는 이 생소한 변화에 감도 제대로 못잡고 해메게 되요.

 

IT산업이 뜬다고 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 학과가 난립해요. 게임 산업이 뜬다고 해서 게임학과가 난립하고 애니메이션 학과니 된장학과니 순결학과니 하는 이전에는 거의 볼 수가 없던 학과들이 대학에 잔뜩 생긴 것도 이때부터에요. 왜 이런 학과가 생겼고 그것도 초반에는 반짝이나마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불안해했거든요. 대학 간판으로 취업하던 시기가 너무 갑자기 끝나버리니까 뭘 어떻게 할지 감을 못잡고 방황하기 시작했던거에요.

 

대학들이 갑자기 등록금을 산더미같이 올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에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나갈 것을 계획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취업문이 막히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되자 대학으로 몰렸거든요. 대학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고등학교 이하 학교가 응당했어야 했던 취업이나 진학 진로에 대한 부분을 직접 맡아 해본답시고 ㅈㄹ하기 시작한거에요. 그런데 국가도 어떻게 못하는걸 일개 대학들이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요? 그 결과가 특이한 학과 개설 경쟁과 취업율 경쟁, 그리고 취업율을 높이기 위한 기업간의 산학제휴에 집중하게 되요. 대학 진학율은 덩달아 급증하게 되고 대학들은 그들의 미래를 볼모로 삥을 뜯듯 등록금을 올려댄거에요.

 

대학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대학을 욕할 필요가 없어요. 사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에초 학교를 산업에 이용해먹으며 정부가 인력 창출을 좌지우지하는 형태로 만들었던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정부주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으면 끝까지 그렇게 가던가, 기업에게 산업 전반을 넘겨주려면 교육제도도 함께 개편을 하던가 했어야 하는데 80년대 대기업으로 경제 주도권이 갑자기 넘어가고 난 뒤에는 돈세느라 교육제도 손보는건 신경도 안썼으니까요. 더 냉정하게 말하면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학교는 초, 중, 고등학교 모두 거의 변하지 않았아요. 아니 변화를 거부했죠. 그 결과가 지금의 꼬락서니에요.

 

지금의 학교는 80년대에서 정체되어있어요. 정부에 의해 조종되던 꼭두각시로 잘 작동하다가 80년대 정부가 관심이라는 실을 끊어버리면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어요. 지금의 어떤 정치인들도 민생을 살리니 경제를 살리니, 역사관이 어떻니 하는 이야기는 잔뜩 해도 학교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교육감에게 알아서 맡길 심산인건지 일언반구 말이 없어요. 이야기는 별다를거 없이 정부가 하던 거 마저 책임지라는데 그걸 할 사람이 아무도 없나보죠?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학생,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거 전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유난히 학교에서 사고치는 애들 많아지고 왕따가 많아지고 학교폭력이 심화되는거 그거 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아무런 확신이 없이 헛구호만 지껄이니까 생기는거에요. 학생 친구들이 가끔 교사들을 무시하고 대들고 그러는거 분명 그 자체로 잘못된거지만 학생들이 무시하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학교는 변화를 거부하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새로운 선생님들이 들어간들 그게 변하겠어요? 구정물에 깨끗한 물 한두방울 떨어뜨려서 정화가 될까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지금은 학생이 학교를 거부하고 새로운 학교를 요구한다고 해도, 어느 누구 하나 학생 편이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선생님들은 당연히 자신들 인사고과가 걸려있으니 학생이 어떤지는 관계없이 일단 학교에 묶어두기만 하려고 애쓸것이고, 학생의 부모님, (그러니까 학부모분들)은 지금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에 대한 불안함이랑 자신들이 겪었던 학생때와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이 뒤섞여서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은 학교를 쉽사리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학교를 신뢰하지도 못하니까 학생을 아침부터 새벽까지 잡들이듯 굴려가며 학원에 보내서 그분들도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대비를 시켜야만 안심이 되는거에요.

 

 

 

학생은 을이 아니에요. 정부는 학생이 학교를 잠자코 다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어른들은 그네들도 미래에 대한 답을 모르면서 여러분들을 과거 자신들의 경험에 속박하려 들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제 당당하게 요구해야 할 때에요. 우리가 왜 학교에서 잠을 자고, 학교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애쓰는지 분명하게 알아줄 것을 요구할 수 있어요. 학생이 정말 다니고 싶고, 다닐 만한 학교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해야 해요. 다닐만한 학교가 아닌데도 다닐 걸 강요하고 다니지 않을 경우의 불이익을 사회적 압박을 빌어 협박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불안해 대항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의 학교가 뭐가 잘못되었고 내가 그 잘못된 학교를 그만둘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만둔 학교를 대신할 제대로 된 학교를 요구할 권리가 분명 있다는거 꼭 기억하고 혹시 졸업하고 난 다음에 후배, 조금 먼 미래겠지만 학생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항상 머릿속에 두고 있길 바래요.

 

 

 

세상의 터닝 포인트가 반드시 지금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1장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