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12. 16:22
사람들이 슬슬 인터넷이라는 매우 편리하고 초현대적인 매체에 두려
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원래는 깨끗했던 공중화장실에 누군가의 영향으로 지저분하게 사용한 화장실을 꺼리는 듯한 느낌이다. 누군가는 분명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든 사람의 반성이나 처벌은 없고 그 책임을 잘못이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모두의 책임이라는 지극히 윤리책스러운 말로 덮어버린다. 법안을 추진한 정치인들이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할 대로 팽배해버린 현대 대한민국에서 이 말이 과연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납득을 유도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필자는 그들에게 그야말로 정치인스러운 발상이라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들은 언제나 국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대한민국을 머릿 속에 그리며 결과 역시 외면한 채 그들 머릿속에서 성공적으로 그리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머리 속으로만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서, 같은 대한민국을 머리 속에 담아 공유하는 사람들이 다시금 그 허황된 두뇌를 가진 그들을 여의도로 보낸다는 것이 문제다. 여담이지만, 보통 정치인들을 탓할 때, 그들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도 또 이번에는 안 그러겠지 하며 뽑은 국민들 모두의 책임이라고 하는 정치 컬럼니스트들의 위선에 필자는 망설임없이 돌을 던지고 싶다. 그들을 안 뽑은 사람은 죄가 없다. 이후 내내 강조를 하겠지만, 집단의 선택으로 결과가 안좋았다고 해서 그렇지 않았던 선택을 한 사람들까지 돌을 맞아선 곤란하다.
요즘 시끄러운 인터넷 실명제, 뭐든 그렇지만 시끄러운 이유는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인권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터넷의 기본 정신까 지, 논쟁에 안 나오는 잡지식이란 없다시피 할 정도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자신의 의견에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토론강국(?)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토론에 굶주려 있다. 학창시절부터 적극적으로 토론 경험을 쌓아오는 교육 선진국들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선생님에게 들어오는 일방통행식의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마치 교도소 독방에 갇힌 듯한 기분을 학창 시절 내내 느끼고,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이야기하려는 욕구가 강제로 억눌려진, 더구나 한창 새로운 지식 베이스를 구축하는 12년간의 학창시절 동안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속 시원하게 피력하지 못한 채 대학 입시에만 모든 것을 올인하는 많은 학생들의 비극적인 성장과정 탓이라고 생각한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금 학창시절처럼 국민들의 입을 봉하고 있 으면 언젠간 해결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마치 공산주의국가처럼 자신들이 국민들의 지도자라 착각하는 정치인들이 만든 이 법안에 필자는 찬성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인터넷의 현실을 그대로 방관하자는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국민들이 열망했던 세계 1위라는 패권을 IT라는 하나의 산업형태로서 따냈고, 그것이 지금은 국민들의 자존심 그 자체가 된 상황에서 그것을 생활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이제 사회적으로나, 국가 정서에도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을 만큼 우리 생활에 인터넷, 사이버 문화는 별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깊게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도 사뭇 부담스러울만큼 스케일이 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논객들이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옮다며,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이 글이 쓴 취지처럼 매번 허공에 수다를 떠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해결책은 진정 없는 것인가? 언젠가 필자가 강조했던 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론 자체를 어린 시절부터 별로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토론이 해결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예를 들어 100을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 친다면, 50:50으로 나뉘는 결과를 사람들은 가장 싫어한다. 내가 100을 가져야만 하는 미래만을 상상할 뿐 50을 빼앗기는 미래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100을 가져야 하는데 50을 빼앗겼다고만 생각한다, 물론 100을 모두 상대방에게 주는 극단적인 결과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래 예측에 대한 다양성 상실은 경험의 부족에서 나온다. 만일 누군가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싸울 때 주먹이 어디로 날아오는지, 그 뒤에 헛점이 생기면 기습을 어떻게 해야 내가 이길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싸움에서 질 확률이 높고, 크게 부상을 당할 위험이 높은 것처럼, 토론 역시 지는 데에 익숙하지 않으면 토론이 끝나는 일도, 토론에서 이기는 일도 없다. 하지만 토론이란 것이 말과 글로서 정상적으로만 간다면, 길게 끈다고 해도 크게 피해가 가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100을 가져간다는 미래 이외의 다른 경우의 수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그로 인해 토론이 장기화되며, 서로 포기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포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인신공격과 인격모독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론에서 결과론적으로 별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협상하는 법을 모른다. 자신의 미래가 반드시 승리라고만 생각한다. 그 누구도 그에게 지는 법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굴복하게 될 거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들의 책임이 크다.
토론에는 언제나 대안이 있다. 대안이 없는 토론은 토론이 아닌 결정권자에 의해 그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미국이 우리나라를 적국으로 규정하고 24시간 이내에 폭격을 해 올 것이라 경고했다면 우리나라의 선택은 모 아니면 도, 즉 항복할것인가, 맞서 싸울것인가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모 아니면 도, 즉 이기느냐 지느냐 밖에 결과가 없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서 싸우듯이 토론에 모든 것을 걸고 열변을 토한다.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못한 채로 끝나면 시위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때까지 저항한다. 이 부분이 필자는 정말 뼈가 시리도록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토론의 긍정적인 부분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의 독특한 토론 문화에서 나오는 양극화 현상에서 승부를 낸 뒤에 승부에 깨끗하게 굴복하지 못하는 추한 모습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토론 문화가 기왕 양극화로 굳어졌다면, 승부 답게 패자가 깨끗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그러는 모습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 당장 오늘자 9시 뉴스를 보더라도 그런 모습을 1가지 이상 찾을 수 있다.
인터넷 실명제 역시 시행 아니면 부결밖에 대안이 없는 것으로 보이 기 때문에 국민들이 열성적으로 자신들의 입장, 찬성과 반대 의견만을 내세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대부분 정치인들이 무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그들 정치인들이 내놓은 법안에 찬성 반대 이외에 새로운 정책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초반 수많은 정책 제안이 이루어졌으나, 대부분 자신들 혹은 자신들 집단을 위한 일방적 님비 정책이 대부분이었다는 보고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든다. 인터넷 실명제가 과연 시행 아니면 부결이라고 치부될 만큼 그 정책 제안 자체가 쓸모있는 정책인지를 생각해보면 뭔가 어설퍼보이지 않는가? 정말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국민들의 찬반 여론이 이렇게 커질 이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정책 자체에 대해서는 납득하게 되고, 일부 피해를 보는 집단에 한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설득과 정책 설명,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에초에 별다른 학식이 없는 필자조차도 그 정책을 비판하고 모든 여론은 아니지만, 일부 실현 가능한 대안이 떠오를 정도의 정책이라면, 원안에 연연하지 말고 차라리 폐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 토론을 뜯어보는 차원에서 먼저 인터넷 실명제가 왜 반발을 일으키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자, 말 그대로 인권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터넷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악플러’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자체가 기분 나쁜 사람들도 무시 못할 수준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인터넷의 기본 정 신, 즉 국가권력에 구애 받지 않고 족벌언론과 같이 여론을 조장할 수 있는 권력을 함부로 특정 계층에 집중하지 않는 뉴매스미디어의 역할을 인터넷이 계속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으며, 주로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이유를 들고 있다. 찬성론을 살펴보자면, '인터넷의 폐해가 심각하다.' '여론 재판으로 인한 마녀사냥식 인권유린이 위험 수위이다' 라는 등의 의견이 많다. 단편적인 몇몇 집단의 주장이지만 잠재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일부 ‘초등학생’들의 철없는 행동들이 기분나쁘다' 라는 의견 역시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인터넷이 점차 푸쉬, 즉 1인 미디어화 되어감에 따라 인격 한 명을 집중적으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로서 많은 사람들이 찬성론에 동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뜯어보는 두 번째로 양 쪽이 찬성과 반대를 하는 이유를 우선적으로 인터넷 실명제라는 논제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반대론의 대표적인 근거인 인권 침해를 보자, 반대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충분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사용자 개개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라는 전제가 붙는다. 물론 ‘개개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행위’ 역시 있어서는 곤란하다. 아직 방향성과 개념이 모호하긴 하지만 주장하고 있는 ‘인터넷의 기본 정신과 자율성’ 역시 훼손되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듯한 정책 역시 이쪽 주장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찬성론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쪽은 반대론자들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다. 인터넷 실명제가 아닌 다른 정책으로서 그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인터넷 여론 재판으로 인한 인권 유린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되고 속칭 ‘초딩들의 건방짐’을 제어할 수 있는 적절한 제어장치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정책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은, 굳이 인터넷 실명제가 반대론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만큼 문제가 많은 정책이라면, 찬성론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다른 정책적 대안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떠오르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이 문제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실명제의 원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바로 다름아닌 오프라인, 즉 주민등록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주민등록증으로 인해 공권력은 국민들의 범죄율을 낮추는 데에 보다 수월해졌고,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국민 역시 낮아진 범죄율과, 보다 체계적으로 평등한 국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만족스럽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민등록증을 가슴에 붙이고 다니면서, 누구나 만나자마자 이름이나 나이를 묻지 않고서라도 알아볼 수 있게 되어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논쟁 문화 ‘민증 까!’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나이를 중시하고, 연륜이 높은 사람을 우대하는 정서가 있다는 점은 좋은 실례이다. 인터넷 실명제는 마치 외출할 때 항상 외투 한쪽에 신분증을 상대방이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글자 크기로 항상 붙이고 다니라는 이야기이니 반대론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학창시절에도 교복에 명찰을 달고, 그도 모자라 아예 박음질을 해버리는 자체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말도 못한다.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은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는 오프라인에 서는 인격 모독이나 스토커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전부 온라인으로 건너왔을 뿐, 오프라인에서 이미 있었고, 지금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산적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철권정치로 인한 국민들의 서열 규격화 및 독재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누구나 여러 사람들이 있고 범죄자가 생길 수도 있으며, 그것이 없어지면 평화로울 것 같지만, 악이 없는 곳은 망한다는 진리는 과거 여러 실례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절대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는다. 이 점은 확실히 각인을 해야 한다. 어떤 정책도 민주적인 방법으로는 찬성론자들이 원하는 온라인 범죄들을 예방할 수는 없다. 오프라인이 그렇게 평화로워서 범죄가 없고 살인이 없는가? 정책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정책 만능주의 이전에 우리나라 정부 정책의 편리주의를 꼬집고 싶다. 이 정책이 국가적으로 적극 추진되는 이유는 국민을 위해서라고 떠들지만 언제 그 말을 서두로 한 정책이 그런 적이 있었는가? 우리나라 경찰들은 오프라인 범죄에는 오랜 역사 덕분에 면역이 되었지만 사이버 범죄에 있어서는 아직 제대로 컨트롤은커녕 범죄 예방조차 변변히 못하는 실정이다. 아무도 무능한 사이버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찰과 국가는 공권력이 공백이 생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할 수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든 범죄를 컨트롤하고, 자신들의 공권력으로서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인터넷 실명제라고 생각한다. 즉 자신들의 능력적 한계를 인정하기 싫은 자들이 만들어낸 자구책이 국민들을 위한다는 정책으로 변질되어 공표된 셈인데, 정책의 공정성을 떠나서 그 자체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다시금 말하고 싶지만, 어떤 정책도 이미 사람들이 포화상태에 이른 인터넷의 모든 범죄를 제어할 수는 없다. 차라리 국가권력에 제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이 정화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가서 한 달쯤 살아보면서 몸소 정책을 체험해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몇 번을 웃는지를 조용히 세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이야기를 바꿔서 오프라인에서 인권 침해가 인터넷처럼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 어째서일까? 사람들은 같은데 어째서 사람들은 직접 만나서는 단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이 많으면서 인터넷에서는 마치 자신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듯이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결정적으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차이는 주민등록증, 즉 실명제에 있는 게 아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서로 직접 얼굴을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서로 얼굴만 본다면 대략적인 연령대 예측이 가능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연령대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 이 점이 연장자에게 함부로 인격모독을 할 수 없는 억제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명제가 그것을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주민등록증을 가슴에 달고 다니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민증은 위조가 가능하다. 금융실명제가 불법적인 정치자금 및 기업들의 불법 상속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문민정부지만 지금 어떤가? 과연 금융실명제가 우리나라의 경제를 투명하게 해주었는가? 실명제보다는 다른 정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이는 육안으로 속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회적으로 집단성을 갖지 못하는 억제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착안, 필자는 인터넷 실명제를 대신할 대안으로 ‘인터넷 연령 등급 표시제’를 조심스레 제안해본다. TV에서 많이 본 것처럼 12,15,19등의 연령 등급, 즉 정확한 연령이 아닌 연령 계층만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인터넷에 글을 남기게 될 때 자신의 연령대가 함 께 표시가 되어 상대방이 그 사람의 연령대를 식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된다면, 상대방에 대한 인격 모독은 물론, 저연령층들의 무분별한 하극상(?)도 방지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연령층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만난 것처럼 예절에 기초한 억제책이 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연령대가 자신이 글을 씀으로 인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다소 건방진 어투를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자구책으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초등학생 이하 저연령층만을 마녀사냥하는 정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의 세태는 건방진 저연령층 못지 않게 나이값 못하는 성인들도 많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오프라인에서 공중도덕을 어기는 각 연령층들에 대한 암묵적인 비난과 양심이 살아날 수 있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물론 기존 실명제의 반대론자의 관점에서도 ‘나이가 정확하게 표시되지 않는 연령대 표기’의 경우 오프라인에서도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인권 침해의 소지가 적으며, 나이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회 통념처럼 오히려 나이로서 평가 절하되었던 부분을 인터넷이라는 메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요즘 세태에서 인터넷의 자율성이 나이 제한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을 정책이니까,
필자가 제안한 정책이 반드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론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적어도 대안이 나올 수 있는 토론에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끊임없이 생각해내지 않으면, 토론은 끝나기 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토론 중에서도 양극적 관점에서 타결이 되는 토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토론을 하는 중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만큼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득 만큼 상대방의 이득도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가장 간단한 토론의 기본 정신을 망각해서는 토론이 매번 곤란해지지 않을까?, 인터넷 실명제 토론을 바라보면 서 적어도 토론에 참여하며, 상대방의 의견에 상호 반대만을 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그들이 바라는 인터넷의 순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인격 모독을 안하고 있는지, 인터넷의 자율성에 의한 장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라도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해 자신을 국가의 권력으로서 컨트롤해주길 원하기에 그런 논쟁을 벌이고 있는 거라면 적극 말리고 싶다. 이제는 정치인들을 찍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정치인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이 더는 일어나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생명체 인간이 만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개개인을 인정하고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아주 작은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이 귀한 줄 알아야지, 하며 싸우시던 어릴 적 어머니의 말다툼이 문득 떠오른다.
요즘 시끄러운 인터넷 실명제, 뭐든 그렇지만 시끄러운 이유는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인권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터넷의 기본 정신까 지, 논쟁에 안 나오는 잡지식이란 없다시피 할 정도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자신의 의견에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토론강국(?)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토론에 굶주려 있다. 학창시절부터 적극적으로 토론 경험을 쌓아오는 교육 선진국들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선생님에게 들어오는 일방통행식의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마치 교도소 독방에 갇힌 듯한 기분을 학창 시절 내내 느끼고,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이야기하려는 욕구가 강제로 억눌려진, 더구나 한창 새로운 지식 베이스를 구축하는 12년간의 학창시절 동안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속 시원하게 피력하지 못한 채 대학 입시에만 모든 것을 올인하는 많은 학생들의 비극적인 성장과정 탓이라고 생각한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금 학창시절처럼 국민들의 입을 봉하고 있 으면 언젠간 해결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마치 공산주의국가처럼 자신들이 국민들의 지도자라 착각하는 정치인들이 만든 이 법안에 필자는 찬성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인터넷의 현실을 그대로 방관하자는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국민들이 열망했던 세계 1위라는 패권을 IT라는 하나의 산업형태로서 따냈고, 그것이 지금은 국민들의 자존심 그 자체가 된 상황에서 그것을 생활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이제 사회적으로나, 국가 정서에도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을 만큼 우리 생활에 인터넷, 사이버 문화는 별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깊게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도 사뭇 부담스러울만큼 스케일이 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논객들이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옮다며,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이 글이 쓴 취지처럼 매번 허공에 수다를 떠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해결책은 진정 없는 것인가? 언젠가 필자가 강조했던 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론 자체를 어린 시절부터 별로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토론이 해결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예를 들어 100을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 친다면, 50:50으로 나뉘는 결과를 사람들은 가장 싫어한다. 내가 100을 가져야만 하는 미래만을 상상할 뿐 50을 빼앗기는 미래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100을 가져야 하는데 50을 빼앗겼다고만 생각한다, 물론 100을 모두 상대방에게 주는 극단적인 결과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래 예측에 대한 다양성 상실은 경험의 부족에서 나온다. 만일 누군가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싸울 때 주먹이 어디로 날아오는지, 그 뒤에 헛점이 생기면 기습을 어떻게 해야 내가 이길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싸움에서 질 확률이 높고, 크게 부상을 당할 위험이 높은 것처럼, 토론 역시 지는 데에 익숙하지 않으면 토론이 끝나는 일도, 토론에서 이기는 일도 없다. 하지만 토론이란 것이 말과 글로서 정상적으로만 간다면, 길게 끈다고 해도 크게 피해가 가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100을 가져간다는 미래 이외의 다른 경우의 수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그로 인해 토론이 장기화되며, 서로 포기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포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인신공격과 인격모독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론에서 결과론적으로 별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협상하는 법을 모른다. 자신의 미래가 반드시 승리라고만 생각한다. 그 누구도 그에게 지는 법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굴복하게 될 거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들의 책임이 크다.
토론에는 언제나 대안이 있다. 대안이 없는 토론은 토론이 아닌 결정권자에 의해 그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미국이 우리나라를 적국으로 규정하고 24시간 이내에 폭격을 해 올 것이라 경고했다면 우리나라의 선택은 모 아니면 도, 즉 항복할것인가, 맞서 싸울것인가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모 아니면 도, 즉 이기느냐 지느냐 밖에 결과가 없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서 싸우듯이 토론에 모든 것을 걸고 열변을 토한다.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못한 채로 끝나면 시위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때까지 저항한다. 이 부분이 필자는 정말 뼈가 시리도록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토론의 긍정적인 부분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의 독특한 토론 문화에서 나오는 양극화 현상에서 승부를 낸 뒤에 승부에 깨끗하게 굴복하지 못하는 추한 모습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토론 문화가 기왕 양극화로 굳어졌다면, 승부 답게 패자가 깨끗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그러는 모습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 당장 오늘자 9시 뉴스를 보더라도 그런 모습을 1가지 이상 찾을 수 있다.
인터넷 실명제 역시 시행 아니면 부결밖에 대안이 없는 것으로 보이 기 때문에 국민들이 열성적으로 자신들의 입장, 찬성과 반대 의견만을 내세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대부분 정치인들이 무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그들 정치인들이 내놓은 법안에 찬성 반대 이외에 새로운 정책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초반 수많은 정책 제안이 이루어졌으나, 대부분 자신들 혹은 자신들 집단을 위한 일방적 님비 정책이 대부분이었다는 보고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든다. 인터넷 실명제가 과연 시행 아니면 부결이라고 치부될 만큼 그 정책 제안 자체가 쓸모있는 정책인지를 생각해보면 뭔가 어설퍼보이지 않는가? 정말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국민들의 찬반 여론이 이렇게 커질 이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정책 자체에 대해서는 납득하게 되고, 일부 피해를 보는 집단에 한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설득과 정책 설명,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에초에 별다른 학식이 없는 필자조차도 그 정책을 비판하고 모든 여론은 아니지만, 일부 실현 가능한 대안이 떠오를 정도의 정책이라면, 원안에 연연하지 말고 차라리 폐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 토론을 뜯어보는 차원에서 먼저 인터넷 실명제가 왜 반발을 일으키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자, 말 그대로 인권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터넷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악플러’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자체가 기분 나쁜 사람들도 무시 못할 수준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인터넷의 기본 정 신, 즉 국가권력에 구애 받지 않고 족벌언론과 같이 여론을 조장할 수 있는 권력을 함부로 특정 계층에 집중하지 않는 뉴매스미디어의 역할을 인터넷이 계속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으며, 주로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이유를 들고 있다. 찬성론을 살펴보자면, '인터넷의 폐해가 심각하다.' '여론 재판으로 인한 마녀사냥식 인권유린이 위험 수위이다' 라는 등의 의견이 많다. 단편적인 몇몇 집단의 주장이지만 잠재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일부 ‘초등학생’들의 철없는 행동들이 기분나쁘다' 라는 의견 역시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인터넷이 점차 푸쉬, 즉 1인 미디어화 되어감에 따라 인격 한 명을 집중적으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로서 많은 사람들이 찬성론에 동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뜯어보는 두 번째로 양 쪽이 찬성과 반대를 하는 이유를 우선적으로 인터넷 실명제라는 논제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반대론의 대표적인 근거인 인권 침해를 보자, 반대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충분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사용자 개개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라는 전제가 붙는다. 물론 ‘개개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행위’ 역시 있어서는 곤란하다. 아직 방향성과 개념이 모호하긴 하지만 주장하고 있는 ‘인터넷의 기본 정신과 자율성’ 역시 훼손되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듯한 정책 역시 이쪽 주장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찬성론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쪽은 반대론자들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다. 인터넷 실명제가 아닌 다른 정책으로서 그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인터넷 여론 재판으로 인한 인권 유린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되고 속칭 ‘초딩들의 건방짐’을 제어할 수 있는 적절한 제어장치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정책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은, 굳이 인터넷 실명제가 반대론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만큼 문제가 많은 정책이라면, 찬성론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다른 정책적 대안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떠오르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이 문제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실명제의 원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바로 다름아닌 오프라인, 즉 주민등록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주민등록증으로 인해 공권력은 국민들의 범죄율을 낮추는 데에 보다 수월해졌고,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국민 역시 낮아진 범죄율과, 보다 체계적으로 평등한 국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만족스럽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민등록증을 가슴에 붙이고 다니면서, 누구나 만나자마자 이름이나 나이를 묻지 않고서라도 알아볼 수 있게 되어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논쟁 문화 ‘민증 까!’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나이를 중시하고, 연륜이 높은 사람을 우대하는 정서가 있다는 점은 좋은 실례이다. 인터넷 실명제는 마치 외출할 때 항상 외투 한쪽에 신분증을 상대방이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글자 크기로 항상 붙이고 다니라는 이야기이니 반대론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학창시절에도 교복에 명찰을 달고, 그도 모자라 아예 박음질을 해버리는 자체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말도 못한다.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은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는 오프라인에 서는 인격 모독이나 스토커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전부 온라인으로 건너왔을 뿐, 오프라인에서 이미 있었고, 지금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산적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철권정치로 인한 국민들의 서열 규격화 및 독재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누구나 여러 사람들이 있고 범죄자가 생길 수도 있으며, 그것이 없어지면 평화로울 것 같지만, 악이 없는 곳은 망한다는 진리는 과거 여러 실례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절대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는다. 이 점은 확실히 각인을 해야 한다. 어떤 정책도 민주적인 방법으로는 찬성론자들이 원하는 온라인 범죄들을 예방할 수는 없다. 오프라인이 그렇게 평화로워서 범죄가 없고 살인이 없는가? 정책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정책 만능주의 이전에 우리나라 정부 정책의 편리주의를 꼬집고 싶다. 이 정책이 국가적으로 적극 추진되는 이유는 국민을 위해서라고 떠들지만 언제 그 말을 서두로 한 정책이 그런 적이 있었는가? 우리나라 경찰들은 오프라인 범죄에는 오랜 역사 덕분에 면역이 되었지만 사이버 범죄에 있어서는 아직 제대로 컨트롤은커녕 범죄 예방조차 변변히 못하는 실정이다. 아무도 무능한 사이버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찰과 국가는 공권력이 공백이 생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할 수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든 범죄를 컨트롤하고, 자신들의 공권력으로서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인터넷 실명제라고 생각한다. 즉 자신들의 능력적 한계를 인정하기 싫은 자들이 만들어낸 자구책이 국민들을 위한다는 정책으로 변질되어 공표된 셈인데, 정책의 공정성을 떠나서 그 자체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다시금 말하고 싶지만, 어떤 정책도 이미 사람들이 포화상태에 이른 인터넷의 모든 범죄를 제어할 수는 없다. 차라리 국가권력에 제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이 정화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가서 한 달쯤 살아보면서 몸소 정책을 체험해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몇 번을 웃는지를 조용히 세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이야기를 바꿔서 오프라인에서 인권 침해가 인터넷처럼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 어째서일까? 사람들은 같은데 어째서 사람들은 직접 만나서는 단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이 많으면서 인터넷에서는 마치 자신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듯이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결정적으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차이는 주민등록증, 즉 실명제에 있는 게 아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서로 직접 얼굴을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서로 얼굴만 본다면 대략적인 연령대 예측이 가능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연령대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 이 점이 연장자에게 함부로 인격모독을 할 수 없는 억제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명제가 그것을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주민등록증을 가슴에 달고 다니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민증은 위조가 가능하다. 금융실명제가 불법적인 정치자금 및 기업들의 불법 상속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문민정부지만 지금 어떤가? 과연 금융실명제가 우리나라의 경제를 투명하게 해주었는가? 실명제보다는 다른 정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이는 육안으로 속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회적으로 집단성을 갖지 못하는 억제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착안, 필자는 인터넷 실명제를 대신할 대안으로 ‘인터넷 연령 등급 표시제’를 조심스레 제안해본다. TV에서 많이 본 것처럼 12,15,19등의 연령 등급, 즉 정확한 연령이 아닌 연령 계층만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인터넷에 글을 남기게 될 때 자신의 연령대가 함 께 표시가 되어 상대방이 그 사람의 연령대를 식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된다면, 상대방에 대한 인격 모독은 물론, 저연령층들의 무분별한 하극상(?)도 방지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연령층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만난 것처럼 예절에 기초한 억제책이 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연령대가 자신이 글을 씀으로 인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다소 건방진 어투를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자구책으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초등학생 이하 저연령층만을 마녀사냥하는 정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의 세태는 건방진 저연령층 못지 않게 나이값 못하는 성인들도 많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오프라인에서 공중도덕을 어기는 각 연령층들에 대한 암묵적인 비난과 양심이 살아날 수 있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물론 기존 실명제의 반대론자의 관점에서도 ‘나이가 정확하게 표시되지 않는 연령대 표기’의 경우 오프라인에서도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인권 침해의 소지가 적으며, 나이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회 통념처럼 오히려 나이로서 평가 절하되었던 부분을 인터넷이라는 메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요즘 세태에서 인터넷의 자율성이 나이 제한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을 정책이니까,
필자가 제안한 정책이 반드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론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적어도 대안이 나올 수 있는 토론에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끊임없이 생각해내지 않으면, 토론은 끝나기 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토론 중에서도 양극적 관점에서 타결이 되는 토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토론을 하는 중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만큼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득 만큼 상대방의 이득도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가장 간단한 토론의 기본 정신을 망각해서는 토론이 매번 곤란해지지 않을까?, 인터넷 실명제 토론을 바라보면 서 적어도 토론에 참여하며, 상대방의 의견에 상호 반대만을 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그들이 바라는 인터넷의 순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인격 모독을 안하고 있는지, 인터넷의 자율성에 의한 장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라도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해 자신을 국가의 권력으로서 컨트롤해주길 원하기에 그런 논쟁을 벌이고 있는 거라면 적극 말리고 싶다. 이제는 정치인들을 찍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정치인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이 더는 일어나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생명체 인간이 만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개개인을 인정하고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아주 작은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이 귀한 줄 알아야지, 하며 싸우시던 어릴 적 어머니의 말다툼이 문득 떠오른다.
- Rush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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