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보기 전에 필자가 생각했던 것은, ‘과연 미야자키가 이 작품을 얼마나 손댔을까?’하는 단순한 의문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 카피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3년’이라고 써 놓았지만, 사실 고양이의 보은에서도 홍보할 때 단지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리타 히로유키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마케팅에 더 많이 써먹었던 전력(?)이 있는 배급사이기 때문에, 실제로 미야자키씨의 근황에 대해서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터라 별다른 선입견 없이 편하게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오해...
미야자키 감독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옛날 할머니가 전해
주시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던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그런 분위기가 풀풀 풍겨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의 지난 글에 있는 미야자키에 대한 언급에도 나와있듯이 그가 진정 만들고 싶었고 그의 색깔이 가득 담겨있는 작품은 다름아닌 97년작 모노노케 히메부터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그의 작품을 꾸준히 보아 온 사람들이라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평성너구리전쟁 폼포코, 붉은 돼지에서도 충분히 그가 표현하고 싶은 키워드를 읽을 수 있었겠지만, 진정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표현한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였다고 본인 스스로가 밝혔던 전례가 있고, 결과적으로 번복한 셈이 되었지만 그 작품 발표 직후 마지막 작품으로서 은퇴를 발표하기도 했던 만큼 그의 작품 세계관은 최근에 들어서야 그의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왜 은퇴를 번복했을까? 이미 그가 은퇴를 선언한지도 8년이 다 되어가는데 은퇴작이라 공언했던 모노노케 히메 이후 공식적으로 작품이 두 개나 더 나왔다. 그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은퇴를 만류했나? 답은 의외로 쉽다. 필자의 지난 오세암 포스트에서도 언급했듯 애니메이터들은 보통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좋게 말해서 실험적인 작품)의 경우는 흥행성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미야자키도 모노노케 히메 개봉 전 인터뷰에서 그러한 점을 충분히 강조하며 본인은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관객들은 언제나 제작자의 생각과 반대로 움직인다고 누군가가 말했듯,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의 극장판 작품 중 첫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게 되는데, 의미상으로 당시 전세계적인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타이타닉과의 흥행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거두자 이래적으로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미야자키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건 국제적 수상을 거두기 시작한 것도 모노노케 히메 이후부터라는 점인데, 미야자키는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 대중성, 작품성으로서 크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 후로, 은퇴를 번복하고 제 2의 제작자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은 듯 이전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특별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하 하울)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두고 미야자키의 본래 작품관이 훼손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랬으니까...
과연...
명예가 크게 실추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은퇴를 번복하게 만들 만큼 그에게는 아직 그의 애니메이션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게다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니 그
자신감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으리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작품관으로서 그것이 인정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특히나 데즈카 오사무를 바라보며 그에게 가장 큰 반감을 가진 채로 성장해왔던 애니메이터 미야자키에게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노노케 히메 이후의 작품들부터는 대중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작품성의 초점을 작품 자체가 아닌 미야자키 본인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광고 카피에서 나왔듯 베니스 영화제가 원래 김기덕 감독의 ‘빈 집’에 감독상을 준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대중적인 흥행성보다는 감독이 말하는 작품의 키워드를 잘 이해한 후 작품성을 평가하는 평가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딱히 수상이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을까? 하울...은 미야자키의 그 어떤 작품보다 미야자키다운 작품으로서 세상에 공개되었고, 그 부분을 감수하고 본다면 충분히 키워드 전달에 있어서 매우 이상적인 작품으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들이 대부분 평론가들의 ‘밥’이 되곤 하는데, 그만큼 평가가 다양해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의 결론이 나오게끔 만들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작품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각종 장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실로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직 사람들은 미야자키를 잘 몰랐으니까, 아니 그 전에 미야자키가 착각을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
착각...
그렇다고 미야자키가 어떤 분의 말처럼 갑자기 ‘오시이 마모루’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시이 마모루가 처음부터 자기 생각대로 작품을 만들어 오면서도 비주얼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자신의 키워드를 사람들로 하여금 읽을 수 있도록 작품 활동을 펼쳤다면 미야자키는 비
주얼의 아름다움보다는 비단 자신의 키워드와 맞지 않더라도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 형식에 자신의 키워드를 느낄 듯 느끼지 못할 듯하게 섞어 내놓았다. 마치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오시이 마모루는 시각적인 부분을 강조한 순수 양식 요리를 내놓았다면, 미야자키는 한국식 굴비구이를 내놓으면서 스리슬쩍 일본식 고추냉이를 함께 내온 격, 사실 오시이 마모루의 경우는 필자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두 감독의 현재까지의 행보에 대해서 섣불리 어느 쪽이 잘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 해도 공각기동대로 대표되는 오시이 마모루의 키워드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적극적인 매니아층과 이번 작품 ‘하울’의 모든 키워드를 이해할 수 있는 미야자키 골수팬의 수는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에 하고 싶은 키워드를 담아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애니메이터 인생을 걸만큼 값진 일이겠지만, 한편으로 그 값어치만큼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꽤나 회의적인 부분일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들이 평론가들로 하여금 ‘제멋대로식’의 키워드 해석을 낳았듯이 ‘하울’도 이제는 미야자키식의 키워드를 읽어보는 재미를 즐겨보면 어떨지 싶다, 필자도 미야자키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하울’을 보고 이후 수많은 감상문을 보면서 필자의 생각과 많이 다른 해석을 내놓으시는 분들이 많았기에 굳이 필자의 해석이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읽을 거리 정도로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이후부터는 필자의 키워드 분석이므로 내용 누설이 치명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도입부분을 보면 성이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여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저 성에 가까이 가면 심장을 빼앗긴다’라는 식의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움직이는 성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을 소문이라는 매개체로서 대변하고 있다. 움직이는 성이 말하는 키워드는 ‘막연한 두려움’이다. 특별히 움직이는 성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 사람을 공격한 것을 본 사람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의 희미한 실체만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 여기에서 심장이라는 것은 정열을 의미한다. 사람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심박동수의 차이라고 하는 연구 결과가 얼마 전에 나왔고 남자와 여자의 수명 차이가 바로 이 심박동수의 내구성에 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심장은 정열, 열혈, 젊음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은 움직이는 성에게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빼앗긴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건데, 어째서일까?
움직이는 성을 보면 잡동사니가 잔뜩 붙어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몇 가지 상징적인 부분이 붙어있는 걸 볼 수 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이 가능한 십자가가 붙어 있는 건물,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는 대포구조물, 방의 스위치에 따라 하울만이 나갈 수 있는 전쟁지옥의 세계, 우주외계에서 떨어진 캘시퍼가 성을 움직이는 엔진이 되는 성,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후세계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전재로 반강제적인 가치관을 강요하는 종교에 얽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베타적이면서도 전쟁억제라는 이유 때문에 편리적 공생 관계를 취해야만 하는 국가주의의 희생양이 되며, 지구라는 별의 위대함을 인식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직 검증되지도 않았고 누구도 확실하게 본 적이 없는 외계생명체에 대한 공격을 두려움을 가지도록 수많은 공상과학영화가 나오곤 한다. 즉 미야자키는 인간이 그 실체를 전혀 모르면서 막연한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개개인의 가치관을 훼손하는 3가지의 키워드, ‘종교’,‘국가주의’, ‘우주’를 표현하는 차원에서 움직이는 성을 만든 것이라고 본다. 미야자키가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의 주장을 가로막는 국가주의 사람들의 주장 ‘국가주의가 전쟁억제와 세계평화를 가져다준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과 동시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사후세계에 대한 협박으로 사람들을 종교라는 새로운 파벌로 나누어버리는 정세를 비판하고, 또한 일부 강대국들에 의해 우주인에 대한 두려움을 새뇌받고 많은 사람들의 우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로막아버린 채 그들만의 우주개발을 일삼고 있는 현실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키워드는 3가지이지만 모두 ‘무정부주의’라는 개념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미야자키다운 발상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건 초반부를 굉장히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부분이기에 사람들에게 많은 의문을 갖게 만든 것 같다. 미야자키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5분의 법칙을 지킨 모양인데, 워낙 국내 사정상 초반
5분에는 애들이 뛰어다니는 시간이다 보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피는 자신감이 굉장히 결여된 캐릭터로 나온다. 한창 꾸밀 나이에도 꾸미지 않고 주변 친구들이 남자를 꼬시기 위해 열중하는 와중에도 친구들의 이상한 시선을 받으면서 그저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으면서 사는 데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외모에도 자신감을 크게 상실한 모습을 보인다. 하울을 만나고 하울에게 ‘예쁘다’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것을 인정할 리가 만무, 따라서 마녀에게 저주를 받은 후에도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운명을 찾아 나서고 싶지만 자신감을 상실하고 가업을 물려받는다는 생각은 더 이상 그녀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소피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 90세의 육체를 가지건 18세의 육체를 가지건 인생이 특별히 변하거나 영향을 끼칠 부분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이 없었던 그녀가 90세에 이르러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의 운명을 찾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집을 떠나 움직이는 성을 찾아가는데, 이후 청소를 멋대로 하는 바람에 하울의 머리 색깔이 변하면서 트러블이 일어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소피는 전형적인 내성보수주의자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도전 정신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생각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조숙을 넘어 노인네 같은 생각들이 가득한,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을 소피라는 캐릭터로서 대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덧붙이면, 어째서 소피가 잠을 잘 때만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꿈’이 있고 없고의 인생 차이를 표현한 것' 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잠을 잘 때는 꿈을 꾸고 꿈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또한 미래지향적인 상징이다. 즉 꿈을 꿀 때만큼은 그녀도 18세로서 있을 수 있었다는 것, 꿈을 잃어버리고 외모상의 젊음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미야자키의 재치라고 생각한다.
덤 : 마지막에 나름대로 저주는 풀리지만 머리만큼은 흰 머리인 채로 남아있는다. 거기에 평소 자신의 머리 색깔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 하울... 생각해보면 꽤 재미있는 기획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배경설명이 전혀 없어서 이 부분을 무책임하게 처리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반인들의 무지’이다.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그들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싸우고 있고 양국의 지도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들을 공격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이 퍼뜨리는 대국민선동에 휘말려 적대감을 갖는다. 소피가 장을 보다가 전투 후 돌아오는 전함을 목격하고 하늘에서 호회를 뿌리고, 그것을 줍지 말라는 관리간부들의 목소리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다시 말해 국가주의가 낳은 최대맹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근거를 보다 명확하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주의가 전쟁억제책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이 전혀 줄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건 간단한 비유로 설리만은 이라크전의 미국, 개는 ‘영국’정도일까? 설리만은 밥만 주면 짖지 않는 개가 옆에 두는 심복부하보다 훨씬 더 필요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소피를 설리만까지 안내한 소년 이외에 설리만 옆에 가장 가까이 있는 직속 심복조차 없는 썰렁한 응접실이라는 걸 볼 수 있다, 혹시 소년도 설리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표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녀
가 소피와 함께 걸어서 계단에 오르는 장면에서 얼굴이 팽팽하게 젊어보이는 마녀가 땀을 뻘뻘 흘리고 소피 역시 굉장히 힘들게 오르지만 마녀와 비교해 비교적 힘을 덜 들이고 올라온다. 성 안에서 그녀의 노화를 가속시킨 것은 다름아닌 커다란 전구, 마치 땀을 빼듯이 급격한 노화를 거듭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째서 별다른 마법이나 저주가 아닌 전구 불빛 하나에 저렇게 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이 부분은 마녀에 대한 다소의 상상력이 필요한데, 마녀는 자신의 젊음을 지키는 방법을 외모로서 보여지는 것으로서 젊음이 지켜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캐릭터로서 그 외모를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기 위해 검은 옷으로 온 몸을 뒤덮었고 탐욕과 욕심을 의미하는 살을 많이
찌워 욕망을 충족했음을 표현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항상 빛이 없는 밤에 길거리를 활보하고, (소피에게 저주를 거는 장면에서 심야에 가게 문을 닫으려는 찰나에 들어온 점) 낮에는 절대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이동하지만 (성에 마차가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을 듣고 마차에서 내린 적이 없다며 투덜거리는 장면) 그것들이 마녀의 젊음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수는 없었고 그래서 항상 입버릇처럼 하울의 심장을 노린다는 말을 한다. 하울은 그녀가 보기에 젊음과 미의 결정체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녀에겐 열정을 상징하는 하울의 심장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소유욕을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리만의 경우 국가주의를 유지하게 위해 그녀의 존재를 충분히 부정할 필요가 있었고, 일종의 쿠테타를 방지한다는 명목이었는지 아니면 싹을 잘라낸다는 의미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설리만은 그렇게 커다란 전구를 이용 그녀의 실체를 비추게 되고 그녀는 겉모습으로서 가려졌던 가식적인 부분이 사라진 그녀의 실체를 스스로 깨닫게 되면서 원래 나이의 육체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마치 젠틀맨리그의 도리안과 비슷한 설정)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보면서도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재력과 권력의 겉모습은 결코 그녀에게 젊음과 꿈을 되찾아줄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덤 : 미야자키와 안노 히데아키가 하는 말들은 두 사람의 작품성향 만큼이나 꽤 극단적으로 어긋나 있지만, 그들이 항상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저는 인생이 끝날 때까지 소년의 꿈을 가진 채로 살아가고 싶습니다.’라는 말이다. 안노에게 있어 미야자키는 작품성향은 다를지 몰라도 애니메이터로서 정말 제대로 된 스승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의 이야기를 전부 보셨다면 이미 벌써 눈치채셨겠지만, 소피는 하
울과 함께 살면서 정열이라는 것,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소녀로서의 생각과 꿈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반 부분에 하울이 잠을 자고 있는 소피를 쓰다듬고는 2층으로 올라가자 소피가 잠을 깨고는 하울을 뒤쫓아가는데 그 후 예고편에 그것처럼 기나긴 터널 같은 곳으로 날아가버리는 하울을 보면서 갑자기 다시 늙어버리는 소피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하울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과 함께 하울이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 하울에게 자신의 꿈을 의지하고 있는 소피의 나약한 모습 (하울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에 다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대변한다. 무언가에 의지하려고 하는 현대 젊은이들의 나약한 모습과 오버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법은 하나의 능력 척도이다. 직업력이라고 불리우는 가시적인 능
력, 지식이 뛰어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하는 등의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치의 정도를 표현한다. 필자 기준으로 대단히 매니악한 표현을 쓰자면, 설리만은 데즈카 오사무, 이웃나라 왕은 월트디즈니, 하울이 미야자키 하야오정도로 대입해보면 답이 쉽게 나올 것이다. 이웃나라의 왕은 세계에 자신의 키워드를 내세우고 있는 절대적인 마법의 강자, 그리고 표면적인 부분만을 강조해서 이웃나라의 왕에 도전하고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실질적인 부분에서 결국 이웃나라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가식을 보여주고 있는 상당히 뛰어난 마법력을 가진 설리만, 설리만의 나라에서 살면서 뛰어난 마법력 때문에 함께 이웃나라와 싸우자는 설리만의 제의를 거부하고 진정한 측면에서 가식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 많은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설리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하울, 이 세사람의 애니메이션 업계 상관관계는 너무 유명한데다, 필자의 키워드 추리 중 가장 주관적인 부분이므로 논란이 커질지도 모르기에 여기까지만 줄이도록 한다.
이야기 후반부에서야 등장하는 캘시퍼의 정체는 보는 그대로 혜성이
다. 하울은 어린 시절 혜성을 받아 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난해하게 받아들이고 계신 것 같고, 이후 캘시퍼가 하울의 심장에 불을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대단히 오묘한 설정이기 때문에 이 부분도 필자 개인적인 해석으로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사설이 길어졌는데 우선 하울의 심장에 캘시퍼가 살고 있는 것은 하울은 평소에 심장이 없는 채로 싸움에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울은 자신의 꿈과 젊음을 상징하는 심장, 즉 진심을 빼고 살아갔고, 심장은 떼어놓으면 그냥 죽어버리기 때문에 캘시퍼는 그 심장을 살아있을 수 있게끔 계속 정열로서 불태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울은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능력만을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고, 그것이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언제나 만신창이가 되어 귀가를 한다. 그리고 캘시퍼가 치료를 해주는 식, 즉 하울은 자신의 진심, 즉 꿈과 열정이 없는 껍데기뿐인 삶을 사는 것을 괴로워했으며 자신의 능력만을 사용해서 사는 기계적인 삶을 싫어했다. 캘시퍼가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심을 확인하는 것으로서 그는 삶의 원동력을 얻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피를 흘리지는 않고 상처도 없었으니까, 지친 그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은 하울 자신의 정열, 어릴 때부터 잃지 않고 있었던 그 꿈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미야자키와 하울을 대입하면 좀 더 명확해지는데, 아무튼 캘시퍼의 존재 여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캘시퍼와 하울이라는 캐릭터는 '어린 왕자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보면 비교적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덤 : 하울이 켈시퍼를 이용해서 성 내부 리모델링(?)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기적과도 같은 굉장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미야자키 스스로 자평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장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졌으리라 생각했고 대부분의 감상문에서
언급되는 캐릭터였던 허수아비가 의미하는 것은 월트디즈니가 만들어 왔고 드림웍스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것, 바로 월트디즈니식의 스토리를 조롱하는 부분이다. 월트디즈니 본인은 말할 필요도 없고, 타도 월트디즈니를 외치면서 결국 그의 생각 하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일방적인 애니메이터의 희생만을 강요했던 데즈카 오사무에 대한 미야자키의 악감정이 잘 드러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즉 미야자키는 하울…이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결국 당신들은 진정한 작품의 키워드를 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월트디즈니가 만들어놓은 거짓과 가식만을 원하고 있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난 다음 ‘허수아비가 왕자로 되는 장면’ 이외에는 도무지 다른 장면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허수아비는 나름대로 미야자키가 의도했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극장을 나오면서 다들 하는 첫마디는 ‘허수아비’였고 1시간 50분 내내 진행되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관객은 찾기 어려웠으니까 말이다.
정말 단순한 질문이면서 핵심적인 질문이지만, 필자가 여기에 해줄 말은 그렇게 길지 않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지브리 스튜디오 후진 양성 프로젝트로서 진행된 이 작품은 원래 미야자키가 맡을 예정이 아니었으나, 원 감독이었던 호소다 마모루의 원안과 각본이 지브리의 프라이드를 지키고저 하는 미야자키의 성에 차지 않았다는 것이 답이 되겠지만, '왜 만들었는가' 가 아닌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겠지만 몇 가지 근거를 통한 추리를 해본다면, 필자가 앞서 이야기한 대로 미야자키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고, 그의 30년 작품활동을 통해 얻은 인기만큼 그가 생각하는 키워드를 이제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점철된 스토리 속에 살짝 뿌리는 향신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내놓고 싶은 새로운 요리로서 승부해도 이제는 그 맛에 충분히 익숙해져 관객들이 충분히 그 깊은 맛을 이해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원소기호로 따지면 (H2O:물)에서 설명을 빼고 (H2O)만을 써놓은 채 30년동안 H2O가 물이라는 것을 누차 강조했으니 이제는 H2O만 말해도 충분히 그것이 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나는 삼다수와 그냥 수돗물의 맛의 차이를 처음에는 몰랐지만, 30년동안 꾸준히 먹였기 때문에 이제는 삼다수의 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베니스 영화제 수상에서도 잘 드러나듯 세계인을 상대로 미야자키의 작품이 아직 오랜기간 소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월트디즈니의 그것처럼 자신의 키워드를 사람들이 흔히 인식할 수 있는 상식으로 (언제나 공주에게는 왕자가 나타나 행복하게 산다 라는 식의 월트디즈니 논리)서 애니메이션의 판도 자체를 뒤엎을 수 있을 것을 확신했지만, 아직 픽사와 드림웍스도 월트디즈니를 180’비틀지 못했듯 미야자키도 아직까지는 무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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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길...
많은 사람들이 하울…을 비판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캐릭터의 성장 과정을 담아서 좀 더 깊은 감동을 이끌어낸다든지, 마법의 세계관을 좀 더 심오하게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생각을 갖게끔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캐릭터성을 살려서 훌륭한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미야자키 본인이 너무 기고만장한 나머지 ‘이래도 볼거냐!’라는 식으로 던져놓고 관객들을 우롱했다는 등의 평가가 많았다. 항간에는, 최악의 졸작을 만회하려면 빨리 차기작을 내놓은 후에 은퇴하라 라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실망감이 그가 이전에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와 지지율만큼 대단한 듯 한데. 사실 쓰신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필자는 그 감상문들을 읽으면서 조금 웃었다. 새로운 것, 새로운 것 항상 주문을 외우듯이 그것을 찾으면서도 정작 가장 큰 범주 내에서의 새로운 것에는 베타적이고 지독한 보수성을 보이는 사람들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의 의도와는 다르게 많은 관객들은 결과적으로 월트디즈니가 만들어 놓은 가장 큰 틀 안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작품’을 추구하려 했고 그것에 부합되지 않으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작곡을 예로 들자면 이미 만들어놓은 드럼 베이스 내에서 이미 만들어진 장르의 형태 (록이라든지 R&B, 발라드 등) 내의 규칙에 부합하여 만든 곡들도 물론 창작곡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에 부합하지 않은 새로운 음악의 형태가 비교대상격인 인기장르를 기준으로 삼을 때 음악적 흐름이 지저분하다든지, 음악적 운율이 살지 않는다든지 하는 비판을 하는 것과 같은 이
치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서 창작자의 눈을 버리고 보아야만 한다. 나라면 저렇게 안 만들고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더 재미 있을 텐데, 라는 평가는 평가가 아니라 창작 간섭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창작자로서의 비판이 아닌 관객으로서의 비판을 해줬으면 한다. 전문가 비평이라는 타이틀은 깊이 있고 보다 일반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함께 직시해주는 날카로운 부분임에 분명하지만 커다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넓은 범주의 시각만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니까, 요리는 맛보는 사람마다 맛이 다르고 미식가들이라고 싫어하는 요리가 없는 것도 아니며, 요리의 대가들은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맛 이외의 맛은 전부 맛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게 실제 요식업계에서 일어나는 우물 안 행태이지 않는가, 진정 새로운 맛과, 새로운 볼거리를 찾고 싶다면 보는 사람들이 생각의 넓이를 보다 넓히고 실질적인 고정관념이 없는 눈으로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해외 여행을 다니면서 현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서둘러 김치봉지를 꺼낸다면 그 순간 당신은 반쪽 여행을 한 셈이나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