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1. 7. 03:38
대한민국에서는 애들을 가르칠 때 1등을 하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흔히 이 두 가지 육아방식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곤 한다. 부모들에게 과연 저 1등이 어떤 1등을 말하는 것인지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은 ‘공부’일 것이고, 일본의 ‘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본다면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게끔 하는 예절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대신 할 수 있을 텐데, 언뜻 극단적으로 빗나가 보이지만, 이 둘은 가치관적으로 ‘개성’ 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무시당하면서 자라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차후 성장교육에 따른 결과가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개성이라는 것이 장점으로서 인정받는 세상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션, 외모로서의 개성이 개성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논해지는 개성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은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약간의 일탈 정도를 개성으로서 인정할 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범위를 벗어나면 개성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 된다. 이러한 분류법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며, 다수권력으로 인한 소수무시 현상이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개성을 논하고 개성을 추앙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라는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진정한 ‘개성’에 얼마나 익숙해 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의상, 외모, 해어스타일 등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진정한 개성일까? 그렇다면 세계 오지에 있는 마오리족의 짐승 관절뼈를 이용하여 코뼈를 뚫어 꿰어 장식을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 이미 아프리카쪽은 하도 메스컴에 많이 나와서 무뎌졌다고 치고, ‘뉴기니’ 쪽에 있는 입술 늘리기 종족이라든지, 목 늘리기 종족들이 과연 실제로 ‘신기함’을 넘어서 우리가 흔히 연예인으로서 추앙할 수 있는 진정한 ‘개성’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지금 한창 인기를 얻는 가수 ‘비’가 입술의 표면적이 30cm이상 늘어나는 장식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으며 ‘개성파’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편견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제로 속으로는 전혀 ‘평범함’에 벗어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아량이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세상의 편견이 사라지고 개성이 존중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너무나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단지 보기 좋은 개성만이 개성이고, 인간 본질이 아닌 인간을 덮고 있는 부차적인 차이를 개성이라 한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과, 신체적 차이를 보이면,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갖거나, 마치 종교계처럼 남의 생각을 잘못된 것이라 치부하며 부정하기에 바쁘다. 진짜 개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어째서 지역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권은 색깔론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가수 팬클럽끼리 싸우고, 문화 심의라는 잣대로 즐길 권리가 필터링되고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여성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설문해본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내용 중, ‘자신이 임신하고 있는 아이가 신체적 기형아라는 것 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설문에 대한 결과가 있었는데, 설문 참여자 중 과반수 이상이 ‘낙태’를 생각하며 나머지 의견 중에서도 ‘운명, 혹은 의무감으로 키운다’라는 등의 의견이 대다수, 별 생각 없이 그냥 키운다는 의견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나서 사회에서 받을 차별과 불행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불행을 겪을 바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이를 위해 좋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고, 다소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전생에 지은 죄’라고 생각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부모들 중 진심으로 ‘아이가 살아가며 느낄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필자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겉모습 속에는 ‘자식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은 본인들’이라는 생각이 앞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자식이 다른 사람들과 태어나는 조건이 다르다고 해서 특별히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어차피 주어진 조건에 적응해 살아간다는 조건에 있어서 태아에게는 비교적 공평한 조건이 부여되는 것일 테니까, 특별히 태아로서 열등감을 느낄 여유따위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부모는 다르다. 부모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자식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이유로 쉽게 낙태를 결정하지만, 속으로는 일반적인 사람의 형태와 다른 자식을 키우며, 사회의 평균적이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고, 또한 두려웠을 것이다.
즉 태아는 태어날 때의 부여 받은 조건을 스스로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비관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자라나 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비관적이라 느끼게 되는 것이 맞다. 다시 말해 부모들이 흔히 기형아 낙태에 대한 의견으로 말하는 ‘자식을 위해’, ‘의무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라는 말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그저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하다. 필자의 이런 의견에 엄청나게 반발할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반발을 하기 이전에, 장애아 출산에 대한 경험을 해볼 확률이 높지 않은 이상 그것을 체험으로서 이해하기는 힘들고 그냥 한번쯤 자신이 장애아의 부모가 된다는 가정 하에 이 문제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똑똑히 생각해보라. 당신들은 일반적인 정상아를 키우면서 겪는 고생보다 비정상아를 키우는 고생이 더 힘들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낙태 혹은, 숙명, 의무감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말이다. 부모들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단어 ‘정상’, 그들은 남들, 그리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형태에 반하는 생김새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부모들이 똑같이 겪는 고생보다 더 한 육아고통을 더 받는 것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과 인생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진정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일말의 망 설임이 있을 리가 없다. 의무감, 운명 같은 구차한 변명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으며, 장애우로서 고통받는 생활의 불편함보다,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잃고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 더욱 큰 불행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이 키우는 동안, 즉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 태아의 나이가 30대를 넘기기 전에 죽는 부모를 보기는 드물 뿐더러, 굳이 이유를 들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부모들에게는 절대 자식이 가질 비관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오히려 자식이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그리고 보다 한층 더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아이를 보다 사랑으로 감싸며 키워낼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낙태를 택하는 수많은 부부들이여, 단지 본인들을 위한 판단을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덧칠하지 마라, 당신들은 이미 ‘정상인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짐과 동시에 그 아이가 가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특별한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당신들은 아이가 장성하여 세상의 차별을 받을 것을 겁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가 일반적이지 못한 육아고통으로 점철될 것과, 자신들이 일반적인 인간의 형태가 아닌 자식을 키운다는 세상의 편견을 견디어 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두려웠다면 에초에 태어날 것을 이미 포기했을 것인데, 당신들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이 넘칠 정도로 충만한 상태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 증거로 잘 될 장군감 아이는 울음소리도 우렁차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우렁차게 울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는데 부모들 스스로 세상에 대해서 그 아이를 가진 자격에 대한 겁을 집어먹지 마라, 아이는 태어나면서 큰 울음소리로 ‘부모님, 저는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나갈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만일 태어나면서 말을 못하는 성대이상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그 아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 어떤 아이보다 우렁찬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명 들릴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태어날 아이를 축복으로 맞아들이자, 모든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도 축복 받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한글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생겼을 법한, 아니면 최근 일본문화개방의 영향으로 생겼는지도 모를 일본어를 그대로 직역한 듯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중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라는 표현이다. 자신과 다르고, 다수의 형태를 가진 인간의 형태와 다른 행동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단지 겉에 걸치는 치장을 개성의 전부로서 치부하고, 진정 절대다수의 형태와 다른 ‘개성’이라 추켜세워주어야 할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평범과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것이 지금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 선천적 장애아, 혹은 동성연애자, 트랜스젠더 그리고 평범함을 거부하고 진정 다른 파격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칭해 주었던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집어치워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고교를 자퇴하거나 혹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길을 소신있게 택하는 인터넷 만화가, 비주류 애니메이터, 아마추어 게임제작자, 독립영화감독, 등 사회에서 커리어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부심과 꿈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그들을 사회의 이단아, 혹은 사회 부적응자 따위로 부르기에는 그들의 열정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제 그들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보는 건 어떨까?, 남들과 다른 그것이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될 수는 없어도 남에게 없는 그 무언가를 가졌다는 가치에 대한 자부심,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존중으로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그 존중을 자신이 수혜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개성이라는 것이 장점으로서 인정받는 세상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션, 외모로서의 개성이 개성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논해지는 개성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은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약간의 일탈 정도를 개성으로서 인정할 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범위를 벗어나면 개성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 된다. 이러한 분류법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며, 다수권력으로 인한 소수무시 현상이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개성을 논하고 개성을 추앙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라는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진정한 ‘개성’에 얼마나 익숙해 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의상, 외모, 해어스타일 등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진정한 개성일까? 그렇다면 세계 오지에 있는 마오리족의 짐승 관절뼈를 이용하여 코뼈를 뚫어 꿰어 장식을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 이미 아프리카쪽은 하도 메스컴에 많이 나와서 무뎌졌다고 치고, ‘뉴기니’ 쪽에 있는 입술 늘리기 종족이라든지, 목 늘리기 종족들이 과연 실제로 ‘신기함’을 넘어서 우리가 흔히 연예인으로서 추앙할 수 있는 진정한 ‘개성’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지금 한창 인기를 얻는 가수 ‘비’가 입술의 표면적이 30cm이상 늘어나는 장식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으며 ‘개성파’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편견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제로 속으로는 전혀 ‘평범함’에 벗어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아량이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세상의 편견이 사라지고 개성이 존중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너무나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단지 보기 좋은 개성만이 개성이고, 인간 본질이 아닌 인간을 덮고 있는 부차적인 차이를 개성이라 한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과, 신체적 차이를 보이면,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갖거나, 마치 종교계처럼 남의 생각을 잘못된 것이라 치부하며 부정하기에 바쁘다. 진짜 개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어째서 지역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권은 색깔론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가수 팬클럽끼리 싸우고, 문화 심의라는 잣대로 즐길 권리가 필터링되고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여성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설문해본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내용 중, ‘자신이 임신하고 있는 아이가 신체적 기형아라는 것 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설문에 대한 결과가 있었는데, 설문 참여자 중 과반수 이상이 ‘낙태’를 생각하며 나머지 의견 중에서도 ‘운명, 혹은 의무감으로 키운다’라는 등의 의견이 대다수, 별 생각 없이 그냥 키운다는 의견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나서 사회에서 받을 차별과 불행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불행을 겪을 바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이를 위해 좋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고, 다소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전생에 지은 죄’라고 생각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부모들 중 진심으로 ‘아이가 살아가며 느낄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필자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겉모습 속에는 ‘자식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은 본인들’이라는 생각이 앞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자식이 다른 사람들과 태어나는 조건이 다르다고 해서 특별히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어차피 주어진 조건에 적응해 살아간다는 조건에 있어서 태아에게는 비교적 공평한 조건이 부여되는 것일 테니까, 특별히 태아로서 열등감을 느낄 여유따위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부모는 다르다. 부모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자식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이유로 쉽게 낙태를 결정하지만, 속으로는 일반적인 사람의 형태와 다른 자식을 키우며, 사회의 평균적이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고, 또한 두려웠을 것이다.
즉 태아는 태어날 때의 부여 받은 조건을 스스로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비관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자라나 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비관적이라 느끼게 되는 것이 맞다. 다시 말해 부모들이 흔히 기형아 낙태에 대한 의견으로 말하는 ‘자식을 위해’, ‘의무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라는 말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그저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하다. 필자의 이런 의견에 엄청나게 반발할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반발을 하기 이전에, 장애아 출산에 대한 경험을 해볼 확률이 높지 않은 이상 그것을 체험으로서 이해하기는 힘들고 그냥 한번쯤 자신이 장애아의 부모가 된다는 가정 하에 이 문제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똑똑히 생각해보라. 당신들은 일반적인 정상아를 키우면서 겪는 고생보다 비정상아를 키우는 고생이 더 힘들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낙태 혹은, 숙명, 의무감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말이다. 부모들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단어 ‘정상’, 그들은 남들, 그리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형태에 반하는 생김새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부모들이 똑같이 겪는 고생보다 더 한 육아고통을 더 받는 것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과 인생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진정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일말의 망 설임이 있을 리가 없다. 의무감, 운명 같은 구차한 변명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으며, 장애우로서 고통받는 생활의 불편함보다,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잃고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 더욱 큰 불행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이 키우는 동안, 즉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 태아의 나이가 30대를 넘기기 전에 죽는 부모를 보기는 드물 뿐더러, 굳이 이유를 들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부모들에게는 절대 자식이 가질 비관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오히려 자식이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그리고 보다 한층 더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아이를 보다 사랑으로 감싸며 키워낼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낙태를 택하는 수많은 부부들이여, 단지 본인들을 위한 판단을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덧칠하지 마라, 당신들은 이미 ‘정상인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짐과 동시에 그 아이가 가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특별한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당신들은 아이가 장성하여 세상의 차별을 받을 것을 겁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가 일반적이지 못한 육아고통으로 점철될 것과, 자신들이 일반적인 인간의 형태가 아닌 자식을 키운다는 세상의 편견을 견디어 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두려웠다면 에초에 태어날 것을 이미 포기했을 것인데, 당신들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이 넘칠 정도로 충만한 상태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 증거로 잘 될 장군감 아이는 울음소리도 우렁차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우렁차게 울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는데 부모들 스스로 세상에 대해서 그 아이를 가진 자격에 대한 겁을 집어먹지 마라, 아이는 태어나면서 큰 울음소리로 ‘부모님, 저는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나갈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만일 태어나면서 말을 못하는 성대이상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그 아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 어떤 아이보다 우렁찬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명 들릴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태어날 아이를 축복으로 맞아들이자, 모든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도 축복 받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한글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생겼을 법한, 아니면 최근 일본문화개방의 영향으로 생겼는지도 모를 일본어를 그대로 직역한 듯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중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라는 표현이다. 자신과 다르고, 다수의 형태를 가진 인간의 형태와 다른 행동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단지 겉에 걸치는 치장을 개성의 전부로서 치부하고, 진정 절대다수의 형태와 다른 ‘개성’이라 추켜세워주어야 할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평범과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것이 지금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 선천적 장애아, 혹은 동성연애자, 트랜스젠더 그리고 평범함을 거부하고 진정 다른 파격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칭해 주었던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집어치워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고교를 자퇴하거나 혹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길을 소신있게 택하는 인터넷 만화가, 비주류 애니메이터, 아마추어 게임제작자, 독립영화감독, 등 사회에서 커리어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부심과 꿈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그들을 사회의 이단아, 혹은 사회 부적응자 따위로 부르기에는 그들의 열정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제 그들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보는 건 어떨까?, 남들과 다른 그것이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될 수는 없어도 남에게 없는 그 무언가를 가졌다는 가치에 대한 자부심,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존중으로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그 존중을 자신이 수혜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 Rush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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