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9. 16. 00:15
가장 간단한 속담을 예로 들어도 두 마리 토끼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흔하게 쓰이고 있을 정도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어떤 부분이든 간에 본인 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아니 스스로에게 그렇게 주문을 걸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르지만, 두 가지 꿈을 쫓을 수는 없는 것이라 항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항상 소설, 드라마, 심지어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인생극장이라는 콩트를 통해 일탈을 즐기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사실 보통 고역이 아니다. 기자들은 기자들 나름대로 뭔가 기사를 흥미있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가야 하는데, 대체로 제작진들이 말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취약점을 보이는지,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드는 느낌은 올림픽 금매달을 따고 돌아온 유도 선수를 인터뷰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별히 평가절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작품에 대해 언론에게 밝히는 소견의 특색이 크게 없다는 것, 아무튼 보통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예술론’ 을 펼치는 사람과 ‘상업론’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대중문화론’ 을 주창하는 식의 두 가지 정도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국내 제작진들의 대부분이 이마저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상품이건 손때가 묻는 발명품이건, 메이저 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한 작품이 있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만한 물건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본인의 작품 활동에 있어 ‘대회용’과 ‘대중성’은 철저하게 구분지으며 작품 세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가지 제약 모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만을 만들어서는 충족하지 못하는 것들, 즉 하나의 제약으로서 애니메이터의 가치관을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인프라가 넓지 않아서인지, 그런 고생을 겪고 싶어도 못 겪는, 이른바 ‘강제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제작자 지망생, 실제 제작진,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조차도 본인들의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작품 속에 십분 발휘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심미적 부분에 공을 많이 들여 국내 외 애니메이션 축제 기준에 걸맞게끔 작품성을 다듬은 후 그렇게 만들어진 ‘대회용’ 작품을 공개했을 때 ‘대중적인 흥행’을 노리기까지 한다.
TV 문화 산업에 대한 특집을 논하는 프로그램, 마고 21의 오세암 제작진 인터뷰가 프로그램 중반부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을 논하는 단계에서 등장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제작진이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한국 애니메이션이니까 재미 없을거야! 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안 보는 걸 저희가 어떻게 합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정말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마고 21이 오세암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사람들이 많이 봐 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되려면 어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묻고 싶었다. 제일 가까운 SICAF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경쟁부분 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작들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극장에 걸릴 때, 어떤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단지 그림자놀이로, 단순 종이인형, 클레이, 흙으로 표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돈 7000원을 내고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그런 작품들은 비교 대상이 다르니 자처하고서라도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는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가 그렇게 모든 해외 상을 다 휩쓸었다고 광고에 홍보를 거듭하고 영화 프로그램에서 줄기차게 소개해도 전국 관객수 5만을 못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점도 없었단 말인가? 그들이 오세암을 두고 한 홍보 전략 중 ‘해외 수상작’ 이외에 다른 흥미 요소를 끌 수 있는 무엇이 있었는가? 모성애를 찾아 떠나는 두 남매? 그것이 정말 극단적으로 말해서 호쾌하게 날아다니며 불폭탄을 쏘는 건담류 로봇물에 빠진 남자어린이들, 남녀간의 진득한 순정물에 빠진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그것에 견주어 오세암을 택할 수 있을 정도로 흥행성, 흥미 요소가 많았을까? 아니 많았을거라 생각한건가? 자신들의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반영하고, 해외 그랑프리에서 수상한 작품을 보고 진정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관객과, 그걸 만든 제작진, 그리고 그 작품에게 상을 준 심사위원 뿐일 것이다.
‘이웃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최근작이라고 볼 수 있는 ‘모노노케 히메’ 를 상영하기 전 모 잡지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필자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작품 세계를 지금까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빼놓지 않고 계속 구상했고, 그 동안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을 너무나도 만들고 싶었다.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기에 나는 이제 은퇴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가 토에이, 니폰 애니메이션을 거처 지브리 스튜디오에 오기까지 그의 애니메이션 인생 40년동안 그가 그만의 색깔로서 그만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아마노 요시타카처럼 데뷰 때부터 천재적인 감성과 타츠노코의 지원 하에 자신의 작품관을 마음껏 펼쳐 성공을 거둔 예도 있고, 그 이외에도 곤조의 아이콘 ‘고토 케이지’의 키디 그레이드처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 어떤 애니메이터들일지라도, 흥행성에 기초를 둔 작품 속에서 해외 수상을 거둔 적은 있어도, 해외 수상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흥행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 때에는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작품에 임하며, 이것이 흥행이 되는지에 여부는 관계없이 본인의 자아만족,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카타르시스적 보상 차원에서 접근한다. 즉 애니메이터들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예술적인 작품을 만드는 행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필자는 이러한 부분을 애니메이터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비애라고 생각하고 있고,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보다 작품성이 다듬어지고 자신이 표현하고픈 것들을 보다 날카롭고 능숙하게 빈틈없이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걸 극복하고, 처음부터 소신껏 자신들의 색깔을 가득 담아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결코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치고는 본인들이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김기덕 감독이 메이저 영화 그랑프리에서 두 차례나 감독상을 받게 된 게기의 작품들이 흥행면에서 어떤 성적을 보였는지를 한번쯤은 깊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강가에 흐르는 도랑도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 양 갈래에 흐르는 물의 양이 다르기 마련인데, 어째서 세 갈래로 가는 물길이 같기를 바라는가? 욕심을 부리지 마라, 자신이 만든 만큼 씨를 거두게 되는 것은 아무리 이 세상이 타락하고 변했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불변의 진리다.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시하고 배척당한다고 탓하지 말고, 그 이전에 오세암에 모여든 10만 관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다. 관객 하나 하나는 당신들에게 있어 흥행성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단지 숫자로 표현되는 입장관객수에 일회일비하지 말고, 그들에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렇다면 당신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고 울분을 토했던, ‘한국 애니라서 무시당하고 상영관이 제대로 없었다는 실패의 변’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치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 온 사람들, 그들에게는 자신만이 표현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이 분명 한 가지씩은 있다. 사실 대부분은 그것을 자신이 애니메이터라는 직함을 가진 직후부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그것이 작게는 같은 팀, 후원사의 사장님, 넓게는 세계적 그랑프리의 심사위원, 나아가서는 많은 수의 애니메이션 관객들에게 그것을 보이고, 그 속뜻을 함께 나누고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서 작품 활동에 임한다. 애니메이션도 결국 사람이 만든 작품을 사람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자신과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0%가 아니듯이 어느 누군가는 당신의 생각을 표현한 그 작품에 만족하고 당신에게 지지를 보낼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너무 성급하게 삼키지 말고,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가 자신이 가진 생각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것 그 이외에는 없다면 진심으로 그 이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제작에 전력을 쏟아라, 유명한 1인 독립 애니메이터 신카이 마코토가 그랬듯 만들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도와준다면 그걸 배워서라도 혼자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정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굳이 타국 작품들과의 차별성만을 강조하여 적대시하고 어렵게 갈 필요는 없다. 산을 오르는데 누군가가 먼저 간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버리고 새로 어려운 길을 닦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일본 애니메이션도 처음에는 디즈니를 의식하기에 바빴고, 스퀘어의 파이날 판타지도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조금씩 우리만의 색깔을 보여주면 된다. 굳이 우리만의 색깔을 가득 집어넣고, 일본색, 미국색을 피하기에 급급하지 말자. 관객들은 아무리 일본, 미국과 똑같은 동화, 똑같은 타이틀을 걸어 놓아도 같은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르는 걸 구분해내듯이 충분히 구별할 수 있으며 , 지금 당장 우리만의 작품을 위해서 머리싸매고 고민해도 지금 당장은 답이 나올 턱이 없고, 사실상 그 답이 나온다 해도 관객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경쓰지 말고 손이 가는대로 범작이 나오든, 평작이 나오든 줄기차게 한번 만들어보자. 한국영화가 성공가도 이어가는 중에 전부 볼만한 대작들만 가득한 게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평작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범작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문화다. 그 속에서 조금씩 사람들에게 한국 애니만의 참맛을 알려주면 어떨까? 맛있는 달고나를 더욱 달게 만들어주는 건 쓰디쓴 소다라는 것을 말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사실 보통 고역이 아니다. 기자들은 기자들 나름대로 뭔가 기사를 흥미있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가야 하는데, 대체로 제작진들이 말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취약점을 보이는지,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드는 느낌은 올림픽 금매달을 따고 돌아온 유도 선수를 인터뷰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별히 평가절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작품에 대해 언론에게 밝히는 소견의 특색이 크게 없다는 것, 아무튼 보통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예술론’ 을 펼치는 사람과 ‘상업론’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대중문화론’ 을 주창하는 식의 두 가지 정도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국내 제작진들의 대부분이 이마저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상품이건 손때가 묻는 발명품이건, 메이저 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한 작품이 있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만한 물건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본인의 작품 활동에 있어 ‘대회용’과 ‘대중성’은 철저하게 구분지으며 작품 세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가지 제약 모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만을 만들어서는 충족하지 못하는 것들, 즉 하나의 제약으로서 애니메이터의 가치관을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인프라가 넓지 않아서인지, 그런 고생을 겪고 싶어도 못 겪는, 이른바 ‘강제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제작자 지망생, 실제 제작진,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조차도 본인들의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작품 속에 십분 발휘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심미적 부분에 공을 많이 들여 국내 외 애니메이션 축제 기준에 걸맞게끔 작품성을 다듬은 후 그렇게 만들어진 ‘대회용’ 작품을 공개했을 때 ‘대중적인 흥행’을 노리기까지 한다.
TV 문화 산업에 대한 특집을 논하는 프로그램, 마고 21의 오세암 제작진 인터뷰가 프로그램 중반부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을 논하는 단계에서 등장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제작진이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한국 애니메이션이니까 재미 없을거야! 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안 보는 걸 저희가 어떻게 합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정말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마고 21이 오세암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사람들이 많이 봐 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되려면 어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묻고 싶었다. 제일 가까운 SICAF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경쟁부분 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작들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극장에 걸릴 때, 어떤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단지 그림자놀이로, 단순 종이인형, 클레이, 흙으로 표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돈 7000원을 내고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그런 작품들은 비교 대상이 다르니 자처하고서라도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는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가 그렇게 모든 해외 상을 다 휩쓸었다고 광고에 홍보를 거듭하고 영화 프로그램에서 줄기차게 소개해도 전국 관객수 5만을 못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점도 없었단 말인가? 그들이 오세암을 두고 한 홍보 전략 중 ‘해외 수상작’ 이외에 다른 흥미 요소를 끌 수 있는 무엇이 있었는가? 모성애를 찾아 떠나는 두 남매? 그것이 정말 극단적으로 말해서 호쾌하게 날아다니며 불폭탄을 쏘는 건담류 로봇물에 빠진 남자어린이들, 남녀간의 진득한 순정물에 빠진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그것에 견주어 오세암을 택할 수 있을 정도로 흥행성, 흥미 요소가 많았을까? 아니 많았을거라 생각한건가? 자신들의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반영하고, 해외 그랑프리에서 수상한 작품을 보고 진정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관객과, 그걸 만든 제작진, 그리고 그 작품에게 상을 준 심사위원 뿐일 것이다.
‘이웃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최근작이라고 볼 수 있는 ‘모노노케 히메’ 를 상영하기 전 모 잡지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필자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작품 세계를 지금까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빼놓지 않고 계속 구상했고, 그 동안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을 너무나도 만들고 싶었다.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기에 나는 이제 은퇴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가 토에이, 니폰 애니메이션을 거처 지브리 스튜디오에 오기까지 그의 애니메이션 인생 40년동안 그가 그만의 색깔로서 그만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아마노 요시타카처럼 데뷰 때부터 천재적인 감성과 타츠노코의 지원 하에 자신의 작품관을 마음껏 펼쳐 성공을 거둔 예도 있고, 그 이외에도 곤조의 아이콘 ‘고토 케이지’의 키디 그레이드처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 어떤 애니메이터들일지라도, 흥행성에 기초를 둔 작품 속에서 해외 수상을 거둔 적은 있어도, 해외 수상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흥행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 때에는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작품에 임하며, 이것이 흥행이 되는지에 여부는 관계없이 본인의 자아만족,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카타르시스적 보상 차원에서 접근한다. 즉 애니메이터들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예술적인 작품을 만드는 행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필자는 이러한 부분을 애니메이터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비애라고 생각하고 있고,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보다 작품성이 다듬어지고 자신이 표현하고픈 것들을 보다 날카롭고 능숙하게 빈틈없이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걸 극복하고, 처음부터 소신껏 자신들의 색깔을 가득 담아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결코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치고는 본인들이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김기덕 감독이 메이저 영화 그랑프리에서 두 차례나 감독상을 받게 된 게기의 작품들이 흥행면에서 어떤 성적을 보였는지를 한번쯤은 깊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강가에 흐르는 도랑도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 양 갈래에 흐르는 물의 양이 다르기 마련인데, 어째서 세 갈래로 가는 물길이 같기를 바라는가? 욕심을 부리지 마라, 자신이 만든 만큼 씨를 거두게 되는 것은 아무리 이 세상이 타락하고 변했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불변의 진리다.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시하고 배척당한다고 탓하지 말고, 그 이전에 오세암에 모여든 10만 관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다. 관객 하나 하나는 당신들에게 있어 흥행성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단지 숫자로 표현되는 입장관객수에 일회일비하지 말고, 그들에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렇다면 당신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고 울분을 토했던, ‘한국 애니라서 무시당하고 상영관이 제대로 없었다는 실패의 변’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치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 온 사람들, 그들에게는 자신만이 표현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이 분명 한 가지씩은 있다. 사실 대부분은 그것을 자신이 애니메이터라는 직함을 가진 직후부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그것이 작게는 같은 팀, 후원사의 사장님, 넓게는 세계적 그랑프리의 심사위원, 나아가서는 많은 수의 애니메이션 관객들에게 그것을 보이고, 그 속뜻을 함께 나누고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서 작품 활동에 임한다. 애니메이션도 결국 사람이 만든 작품을 사람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자신과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0%가 아니듯이 어느 누군가는 당신의 생각을 표현한 그 작품에 만족하고 당신에게 지지를 보낼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너무 성급하게 삼키지 말고,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가 자신이 가진 생각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것 그 이외에는 없다면 진심으로 그 이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제작에 전력을 쏟아라, 유명한 1인 독립 애니메이터 신카이 마코토가 그랬듯 만들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도와준다면 그걸 배워서라도 혼자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정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굳이 타국 작품들과의 차별성만을 강조하여 적대시하고 어렵게 갈 필요는 없다. 산을 오르는데 누군가가 먼저 간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버리고 새로 어려운 길을 닦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일본 애니메이션도 처음에는 디즈니를 의식하기에 바빴고, 스퀘어의 파이날 판타지도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조금씩 우리만의 색깔을 보여주면 된다. 굳이 우리만의 색깔을 가득 집어넣고, 일본색, 미국색을 피하기에 급급하지 말자. 관객들은 아무리 일본, 미국과 똑같은 동화, 똑같은 타이틀을 걸어 놓아도 같은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르는 걸 구분해내듯이 충분히 구별할 수 있으며 , 지금 당장 우리만의 작품을 위해서 머리싸매고 고민해도 지금 당장은 답이 나올 턱이 없고, 사실상 그 답이 나온다 해도 관객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경쓰지 말고 손이 가는대로 범작이 나오든, 평작이 나오든 줄기차게 한번 만들어보자. 한국영화가 성공가도 이어가는 중에 전부 볼만한 대작들만 가득한 게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평작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범작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문화다. 그 속에서 조금씩 사람들에게 한국 애니만의 참맛을 알려주면 어떨까? 맛있는 달고나를 더욱 달게 만들어주는 건 쓰디쓴 소다라는 것을 말이다.
- Rush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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