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14. 13:58
오랫만입니다.
이 블로그는 어지간하면 개인적인 이야기는 쓰지 않습니다. 어딘가로 자신의 기분을 표출(배설)하는게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전에 가끔 쓰던 싸이월드 일기장도 쓰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데요. 워낙에 제가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위로받거나 외로움을 잘 타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보니 이런 글 쓰면서 누군가가 글에 반응하는 것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 쓰고 혼자 즐기는, 다시 말해 외로움을 즐기는 그런 몹쓸 아이인데요.
오늘도 사실 모처럼 두부 컨디션도 괜찮고 해서 포스팅을 새로 할까 키보드를 잡았습니다만, 기분이 급 울적해져서 오랫만에 공식성명쪽 포스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공화국은 지난 5월 새로 시작한 뒤로 몇 개의 포스팅 테마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테마'가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지금 정해진 카테고리에 맞지 않으면 쓰기가 참 애매하거든요. 이걸 새로 카테고리를 만들자니 정례화가 될 것 같고 그러다보면 지금도 생계때문에 업데이트가 빡빡한데, 카테고리를 늘리면 이건 뭐 죽으라는거지요 ^^;
그래도 음악 관련 포스팅에 대한 욕심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몇개 기획했던 것도 있었지만 아직은 생계 문제때문에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번쯤 번외편으로 쓰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평소에는 거의 손대지 않은 이곳을 빌어봅니다. 꼭 소개해드리고 싶은 가수가 있어서요. 그래봐야 제가 푹 빠져있는 거물 아티스트도 아니고 특별히 저만 아는 가수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냥...그냥요, 읽어주시면 좋고 안 읽어주셔도 저만 읽죠 뭐
카와무라 카오리 (川村カオリ)는 모스크바에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로 11살 무렵까지 모스크바에 살다가 치바 현으로 이주를 오게 됩니다. 쇼난 지역도 그렇지만 치바 지역도 바닷가가 인접해 있어 학생들이 별로 성실하지 못한 편인데요. (바닷가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부산이나 인천도 그렇고 말하기 힘든 오묘한 분위기가 있긴 합니다) 당시만 해도 1980년대 초반, 이른바 귀한 자식 세대 붐이었던 일본이었기에 이지매 문제가 심각했었고 지금의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유소년들의 이유 없는 하프 이지매를 고스란히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실내화가 없어지고 도시락에 바퀴벌레 시체를 넣는가하면, 심지어 카와무라 카오리를 죽이기 위한 모임(초등학교입니다)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요. 게다가 당시 절묘하게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이 있었는데, 한국은 당시 세계 정세상 오히려 쉬쉬했던 반면 일본에서는 이 사건에 소련이 얽혀 있어 상당히 반감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러시아 하프였던 카와무라 카오리는 이지매가 더욱 심해졌음은 물론 어이없게도 담임 교사로부터 '소련으로 꺼져버려' 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하네요.
이런 실로 악몽같은 초등학교 시절을 거치고 중학교에 입학, 신주쿠에 있는 뮤직 하우스를 통해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에 조금씩 전환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음악계 인사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고 결국 1988년 한 음반 기획사에 의해 발탁되어 카와무라 카오리 (川村かおり)로 데뷰하게 되는데요 이때 발표된 싱글이 바로 전설적인 명곡 'ZOO'가 수록된 명반 'ZOO'입니다.
이후 TV드라마 주제곡과 후속곡도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면서 단기간에 비교적 많은 인기를 얻게 된 그녀는 인기 심야방송의 MC, 영화 출연, 에세이집 발표 등 활동 영역을 넓혀 가며 활발하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당시 총리대신 카이후 토시키와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회담 만찬연에 일본쪽 인사로 초청되어 참석했던 일도 있었는데요 국가간 정상회담에 참석할 수 있는 예능계 인사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도 거의 국빈급 인사로 당시 그녀의 인기를 짐작케 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년여간의 짧은 연예계활동으로 정상급 위치에 오른 그녀는 2년간의 뉴욕 생활 이후 귀국하여 소속사를 변경하고 지금까지의 활동과는 조금 다른 색깔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음악 활동보다는 드라마 출연 등 영리적인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요. 활동 예명을 히라가나 'かおり’에서 가타가나'カオリ’로 바꾼 것도 이 무렵입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모친이 유방암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죠.
1999년 모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결혼한 그녀는 그 뒤로부터 남편의 영향을 받아 인디즈 음악에 전념합니다. 투어 콘서트 활동은 물론 남편과 함께 찍은 화보집을 발표하는 등 지극히 결혼 생활에 충실하고 남편의 일을 함께 하는 적극적인 내외조를 아끼지 않는데요. 유니버셜 뮤직과의 계약이나 영화 출연 등 개인적인 활동도 있었지만 결혼 이후 그녀는 남편에 일에 많은 인생을 할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딸을 출산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2004년, 그녀에게 시련이 시작됩니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유방암이 그녀에게 유전되어 찾아온 것이죠. 1년여간의 투병 생활 끝에 한쪽 유방을 절개한 뒤 방송에 복귀합니다. 그러나 이미 남편과는 별거중인 상태였고 오랜 인디생활로 그녀만의 음악은 그녀에게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죠. 그녀에게 남은 건 투병생활동안 거의 돌보지 못했던 딸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투병 생활과 성장기의 고통, 그간의 음악 생활들을 정리한 회고록을 발표하거나 영화에 출연하는 등 음악과는 무관한 활동으로 연예계에 복귀하게 되지만 이전만큼 인기를 되찾지는 못하는데요. 그녀는 대신 유방암을 겪고 일어선 경험을 토대로 핑크 리본 운동 (여성 암 퇴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1년에 한번씩은 암 검사를 받자는 호소를 하는 등 투병 전과는 사뭇 다른 심경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2007년 남편과 함께 활동했던 밴드의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뒤이어 3년여간 지속되었던 별거 생활을 이혼으로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투병 생활동안 그녀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양측 모두 후회없는 심정으로 이혼 도장을 찍었으며 그녀는 이혼을 통해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딸의 친권을 가져오게 되는데요. 그녀에게 있어 가족의 소중함은 포기하기 힘든 그 무엇이었던 것 같습니다.
2008년 10월 개인 블로그를 통해 그녀는 유방함이 재발했음을 알리면서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데요. 기자회견을 통해 단순 관절염으로 생각했던 부분이 연초 암으로 판명되었고 이미 림프절, 폐, 골격 등에 전이가 시작되어 수술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로 항암 약물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주위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투병이 계속되고 있음을 밝힌 뒤 그녀는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음악 활동을 재개하는데요 2009년에 이르러 각종 콘서트나 음악 방송 등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데뷰 20주년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는 등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다시금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랜 투병 생활로 그녀의 몸 상태는 음악 활동은 물론 일상 생활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정도였다고 합니다만 그녀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음악과 함께하려 했고 팬들 역시 그녀의 음악을 기다리고 함께 즐겼습니다. 제대로 서서 노래하기 힘들어 콘서트 대부분을 앉아서 노래했던 그녀였지만 앵콜곡으로 불려진 ZOO만큼은 기타를 손수 메고 서서 부르는 투혼을 보이기도 했죠.
7월 초 그녀로부터 '암이 새롭게 전이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병세가 이처럼 악화되는 가운데에서도 7월 17일 특집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직접 라이브 무대에 오르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는 7월 28일 향년 38세의 나이로 도쿄도 모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생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를 기리는 뜻으로 일본 최대의 정교회에서 치루어졌는데요. 그녀의 생전 세례명은 '아나스타시아', 그리스어로 '부활','부활한 여자'를 의미합니다. 그녀는 일본 사회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여가수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잊혀지겠지만 처음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투병중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힘차고 열정이 가득했던 20주년 기념 앨범에서 그녀가 보여준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녀가 죽은 다음에서야 제게 전해져 제 가슴 속에 부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녀의 데뷰부터 영면까지 그녀의 존재를 모르던 한국인 유학생일 뿐이었고,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그녀가 죽은 뒤 편의점에서 흘러나온 라디오 방송에서 틀어준 20주년 기념음반 수록곡 ZOO가 처음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추모하는 의미에서 나온 음악이었겠습니다만 당시 일에 집중하느라 퍼스널리티의 코맨트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꽤 열정이 넘치는 보컬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그녀에 대해 알아본 뒤 슬쩍 울적해진 기분이 가시지 않는데요.
사랑을 주세요. ~
사랑을 주세요 ~
그녀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끝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언젠간 이런 기분이 가시고 평소처럼 툴툴거리고 까칠한 성격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리고 언젠가 그녀와 그녀의 음악도 제 머릿속에서 잊혀지겠지만,
그녀가 부르던 열정만큼은 오랫동안 미래를 사는 저에게도 계속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고 살고 있으니까요.
사랑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받아가며 삽시다.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인생이니까요.
제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제게 사랑을 주고 있는 사람도
모두 모두 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블로그는 어지간하면 개인적인 이야기는 쓰지 않습니다. 어딘가로 자신의 기분을 표출(배설)하는게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전에 가끔 쓰던 싸이월드 일기장도 쓰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데요. 워낙에 제가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위로받거나 외로움을 잘 타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보니 이런 글 쓰면서 누군가가 글에 반응하는 것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 쓰고 혼자 즐기는, 다시 말해 외로움을 즐기는 그런 몹쓸 아이인데요.
오늘도 사실 모처럼 두부 컨디션도 괜찮고 해서 포스팅을 새로 할까 키보드를 잡았습니다만, 기분이 급 울적해져서 오랫만에 공식성명쪽 포스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공화국은 지난 5월 새로 시작한 뒤로 몇 개의 포스팅 테마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테마'가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지금 정해진 카테고리에 맞지 않으면 쓰기가 참 애매하거든요. 이걸 새로 카테고리를 만들자니 정례화가 될 것 같고 그러다보면 지금도 생계때문에 업데이트가 빡빡한데, 카테고리를 늘리면 이건 뭐 죽으라는거지요 ^^;
그래도 음악 관련 포스팅에 대한 욕심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몇개 기획했던 것도 있었지만 아직은 생계 문제때문에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번쯤 번외편으로 쓰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평소에는 거의 손대지 않은 이곳을 빌어봅니다. 꼭 소개해드리고 싶은 가수가 있어서요. 그래봐야 제가 푹 빠져있는 거물 아티스트도 아니고 특별히 저만 아는 가수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냥...그냥요, 읽어주시면 좋고 안 읽어주셔도 저만 읽죠 뭐
카와무라 카오리 (川村カオリ)는 모스크바에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로 11살 무렵까지 모스크바에 살다가 치바 현으로 이주를 오게 됩니다. 쇼난 지역도 그렇지만 치바 지역도 바닷가가 인접해 있어 학생들이 별로 성실하지 못한 편인데요. (바닷가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부산이나 인천도 그렇고 말하기 힘든 오묘한 분위기가 있긴 합니다) 당시만 해도 1980년대 초반, 이른바 귀한 자식 세대 붐이었던 일본이었기에 이지매 문제가 심각했었고 지금의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유소년들의 이유 없는 하프 이지매를 고스란히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실내화가 없어지고 도시락에 바퀴벌레 시체를 넣는가하면, 심지어 카와무라 카오리를 죽이기 위한 모임(초등학교입니다)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요. 게다가 당시 절묘하게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이 있었는데, 한국은 당시 세계 정세상 오히려 쉬쉬했던 반면 일본에서는 이 사건에 소련이 얽혀 있어 상당히 반감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러시아 하프였던 카와무라 카오리는 이지매가 더욱 심해졌음은 물론 어이없게도 담임 교사로부터 '소련으로 꺼져버려' 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하네요.
이런 실로 악몽같은 초등학교 시절을 거치고 중학교에 입학, 신주쿠에 있는 뮤직 하우스를 통해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에 조금씩 전환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음악계 인사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고 결국 1988년 한 음반 기획사에 의해 발탁되어 카와무라 카오리 (川村かおり)로 데뷰하게 되는데요 이때 발표된 싱글이 바로 전설적인 명곡 'ZOO'가 수록된 명반 'ZOO'입니다.
이후 TV드라마 주제곡과 후속곡도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면서 단기간에 비교적 많은 인기를 얻게 된 그녀는 인기 심야방송의 MC, 영화 출연, 에세이집 발표 등 활동 영역을 넓혀 가며 활발하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당시 총리대신 카이후 토시키와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회담 만찬연에 일본쪽 인사로 초청되어 참석했던 일도 있었는데요 국가간 정상회담에 참석할 수 있는 예능계 인사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도 거의 국빈급 인사로 당시 그녀의 인기를 짐작케 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년여간의 짧은 연예계활동으로 정상급 위치에 오른 그녀는 2년간의 뉴욕 생활 이후 귀국하여 소속사를 변경하고 지금까지의 활동과는 조금 다른 색깔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음악 활동보다는 드라마 출연 등 영리적인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요. 활동 예명을 히라가나 'かおり’에서 가타가나'カオリ’로 바꾼 것도 이 무렵입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모친이 유방암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죠.
1999년 모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결혼한 그녀는 그 뒤로부터 남편의 영향을 받아 인디즈 음악에 전념합니다. 투어 콘서트 활동은 물론 남편과 함께 찍은 화보집을 발표하는 등 지극히 결혼 생활에 충실하고 남편의 일을 함께 하는 적극적인 내외조를 아끼지 않는데요. 유니버셜 뮤직과의 계약이나 영화 출연 등 개인적인 활동도 있었지만 결혼 이후 그녀는 남편에 일에 많은 인생을 할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딸을 출산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2004년, 그녀에게 시련이 시작됩니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유방암이 그녀에게 유전되어 찾아온 것이죠. 1년여간의 투병 생활 끝에 한쪽 유방을 절개한 뒤 방송에 복귀합니다. 그러나 이미 남편과는 별거중인 상태였고 오랜 인디생활로 그녀만의 음악은 그녀에게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죠. 그녀에게 남은 건 투병생활동안 거의 돌보지 못했던 딸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투병 생활과 성장기의 고통, 그간의 음악 생활들을 정리한 회고록을 발표하거나 영화에 출연하는 등 음악과는 무관한 활동으로 연예계에 복귀하게 되지만 이전만큼 인기를 되찾지는 못하는데요. 그녀는 대신 유방암을 겪고 일어선 경험을 토대로 핑크 리본 운동 (여성 암 퇴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1년에 한번씩은 암 검사를 받자는 호소를 하는 등 투병 전과는 사뭇 다른 심경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2007년 남편과 함께 활동했던 밴드의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뒤이어 3년여간 지속되었던 별거 생활을 이혼으로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투병 생활동안 그녀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양측 모두 후회없는 심정으로 이혼 도장을 찍었으며 그녀는 이혼을 통해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딸의 친권을 가져오게 되는데요. 그녀에게 있어 가족의 소중함은 포기하기 힘든 그 무엇이었던 것 같습니다.
2008년 10월 개인 블로그를 통해 그녀는 유방함이 재발했음을 알리면서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데요. 기자회견을 통해 단순 관절염으로 생각했던 부분이 연초 암으로 판명되었고 이미 림프절, 폐, 골격 등에 전이가 시작되어 수술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로 항암 약물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주위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투병이 계속되고 있음을 밝힌 뒤 그녀는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음악 활동을 재개하는데요 2009년에 이르러 각종 콘서트나 음악 방송 등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데뷰 20주년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는 등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다시금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랜 투병 생활로 그녀의 몸 상태는 음악 활동은 물론 일상 생활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정도였다고 합니다만 그녀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음악과 함께하려 했고 팬들 역시 그녀의 음악을 기다리고 함께 즐겼습니다. 제대로 서서 노래하기 힘들어 콘서트 대부분을 앉아서 노래했던 그녀였지만 앵콜곡으로 불려진 ZOO만큼은 기타를 손수 메고 서서 부르는 투혼을 보이기도 했죠.
7월 초 그녀로부터 '암이 새롭게 전이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병세가 이처럼 악화되는 가운데에서도 7월 17일 특집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직접 라이브 무대에 오르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는 7월 28일 향년 38세의 나이로 도쿄도 모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생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를 기리는 뜻으로 일본 최대의 정교회에서 치루어졌는데요. 그녀의 생전 세례명은 '아나스타시아', 그리스어로 '부활','부활한 여자'를 의미합니다. 그녀는 일본 사회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여가수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잊혀지겠지만 처음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투병중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힘차고 열정이 가득했던 20주년 기념 앨범에서 그녀가 보여준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녀가 죽은 다음에서야 제게 전해져 제 가슴 속에 부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녀의 데뷰부터 영면까지 그녀의 존재를 모르던 한국인 유학생일 뿐이었고,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그녀가 죽은 뒤 편의점에서 흘러나온 라디오 방송에서 틀어준 20주년 기념음반 수록곡 ZOO가 처음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추모하는 의미에서 나온 음악이었겠습니다만 당시 일에 집중하느라 퍼스널리티의 코맨트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꽤 열정이 넘치는 보컬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그녀에 대해 알아본 뒤 슬쩍 울적해진 기분이 가시지 않는데요.
사랑을 주세요. ~
사랑을 주세요 ~
그녀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끝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언젠간 이런 기분이 가시고 평소처럼 툴툴거리고 까칠한 성격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리고 언젠가 그녀와 그녀의 음악도 제 머릿속에서 잊혀지겠지만,
그녀가 부르던 열정만큼은 오랫동안 미래를 사는 저에게도 계속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고 살고 있으니까요.
사랑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받아가며 삽시다.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인생이니까요.
제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제게 사랑을 주고 있는 사람도
모두 모두 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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