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4. 1. 3. 10:02

이쯤 되면 거의 왕따 수준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교학사 교과서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선택되지 않았고 선택되더라도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다는 모양새로 시끄러웠던 논란을 잠재우고 있네요. 그런데 과연 교학사 그리고 역사학자 유영익이 이런 상황을 몰랐을까요? 정녕 국민적 반발이 있을 것을 모르고 우리가 '교과서'만 찍으면 어린 학생들 생각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순진합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정말이지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죠.


얘들이 그렇게 멍청할리가 없다 진짜 이 교과서가 마구마구 퍼지도록 채택되게 하고 싶었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리라 지금처럼 대놓고 사람들에게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는 방법까지 필요한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면...


교학사는 '악역'을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논란의 중심에 놓이는 것을 원했죠. 교학사는 사실 '역사교과서'가 아니더라도 다른 걸로 잘 먹고 삽니다. 굳이 역사 교과서 하나 채택 안되더라도 회사가 망해먹지는 않는다는거에요. 게다가 역사교과서는 약간의 블루오션 성격이 남아있어서 채택하던 교과서를 계속 채택해나가는 풍토를 감안해볼 때 기회도 있었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있다고 봐야 하거든요. 많은 투자를 했는데 채택이 되지 않았을 경우의 후폭풍도 분명 감안을 하고 들어갔어야 한다는 거죠.


북한이 요즘 이슈가 거의 없는 가운데 또 다시 지겹게 들려오는 뉴스가 다름아닌 '아베노믹스', '아베정권의 개헌',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뉴스들입니다. 국제뉴스가 마치 그것밖에 없다는 식으로 연일 보도가 되고 있죠. 북한때도 마찬가지지만 주적이라고 부르짖는 대상을 그토록 심도있게 보도하고 나쁘다며 까는 보도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연일 보도가 되는 형태는 마치 '기사 꼭지가 떨어진 보도국의 고민'을 엿보게 합니다. 뭔가 이유가 있지 않는 한 그런 보도가 계속될 리가 없다는 거에요.


징용피해자 명부가 발견된 것이 정말 우연일까? 일본은 왜 그걸 순순히 넘겨준걸까? 그리고 왜 정부는 그걸 조사한다고 들고 들어가서는 여태 무슨 내용인지 소식조차 없는 것인가?


어쨌든 교학사는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로서의 목적을 훌륭히 완수한 걸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적대심이 굉장히 높아졌고 또다시 정신대,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까요. 아베정권을 비롯해 일본이 우익화가 되면 될수록 지금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혁혁한 공적의 친일파들이 쫄리는 자료들이 일본 내 극우단체들에 의해 공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공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답은 하나죠. 일본 자체를 적화시켜서 일본이 공개하는 모든 자료를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교학사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싣고 또 그것으로 하여금 국민적 거부감을 조성하는 것으로 턴을 마친 것이죠.


많은 학교에서 교학사가 선정되지 않았고 교학사를 거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개념있음은 칭찬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분위기를 누가 왜 조성했는지, 왜 굳이 당연해야 하는 걸로 '칭찬하고 안도해야만 하는' 분위기를 꼭 만들어내야만 하는지, 그 필요성과 그에 따른 혜택은 누가 얻어내는지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끝에는 일본의 주둥아리 놀림에 제일 후달릴수밖에 없는 정치인생을 살아온 한 군인 출신 정치가와 그 일족이 있다는 것이죠.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과연 반일주의로 자기방어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아사다 마오는 또 스포츠 뉴스에 얼마나 많이 등장할까요?



그리고 교학사는 일본의 후소샤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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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

posted by RushAm 2011. 2. 17. 00:14
1부에서 언급했던 친일파 시조급 인사들의 혁혁한 공로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과 피해, 그리고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 아니 이어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누구보다 친일파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가 정말 우울한점이 대한민국 근대사에 대해서 친일파가 아닌 분들보다 친일파 새끼들이 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근대사에 대해서는 예전 박통시절도 아닌 이상 조금만 찾아보면 외국인의 손에 의해 보다 객관적으로 서술된 자료를 정말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친일파는 이에 대한 나름의 동기 부여가 될 만한 이유가 있다. 역사를 충분히 바닥에 붙은 먼지까지 훑을 만큼 충분히 알아야 자신들을 변호할 수 있으니까, 일본이 역사 연구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이유도, 중국이 동북공정을 위해 역사학자들을 열심히 구워삶는 이유도 다 '뭘 좀 알아야'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냥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라며 역사 교과서를 천대시하는 대한민국 학원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친일파들은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사실 '일본이 나쁘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여기에 두 가지의 속임수가 있다는 걸 반드시 인지해야만 한다. 하나는 지난 번 글에서 밝힌 대로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친일파라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본을 씹음으로서 '친일'이라는 단어적 의미에 대한 회피와 희석을 노리는 것이 첫번째이며 두 번째는 '역사에 드러나있는 대로 일제의 침략과 그로 인한 전 국민, 국토의 피폐화의 대한 책임이 100% 일본에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이제부터 차차 짚어보도록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봉 부통령과 1954년 월드컵 예선전부터 추진했던 한일전, 그리고 정권 내내 꾸준히 주장해왔던 이른바 '반일 정신'은 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 '개과천선'의 이미지를 가져다주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가 경력에 어울리지 않은 광복 이후 친일파와의 정치적 결탁은 누구 하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었지만 (특별히 드러내지 않아도 이미 국민들 대부분이 세대가 같기 때문에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김영삼 대통령의 IMF를 기억하듯이) 의외로 4.19까지 이렇다할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정권을 잡은 뒤 열심히 '자신들의 반일 성향'을 어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은 성골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 정권 말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렇듯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을 지원사격해주면서까지'반일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대표팀 숙소에 삶은 계란 준 에피소드도 있었다. 사실 그렇게 유명해질만한 일화도 아니건만...


우선 앞서 언급한 대로 국민들에게 '친일파'에 대한 이미지를 하루바삐 벗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아쉽게도 정이 넘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러한 거짓 개과천선을 믿어버린 채로 지지를 보내게 되는데 물론 여기에는 그들의 개과천선과 더불어 앞서 언급했던 '북한의 위협'을 언급했던 것이 주효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들을 구제해줄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생긴 친일파에 대한 반감을 돌리기 위한 방편, 즉 빨갱이 후보가 당선되면 이북이 다시한번 남한을 공격하게 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정권을 정당화하며 국민들을 위협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그들의 정권이 굳이 투표 조작을 하지 않더라도 지지율이 오를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렇듯 계속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는데 1960년까지 연임하며 한국전쟁으로 벌어들인 각종 국제적인 이득 조항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내수 시장을 팽창시켜나간다. 이른바 미국의 고도성장최전성기라 불리우는 이 시대에 가뜩이나 한국전쟁 휴전협정 성과를 내세워 재선에 성공한 (미국은 어쨌든 임기 내 종전 업적을 남기는게 킹왕짱임) 아이젠하워에게 있어 틈만나면 반동이니 뭐니 북한을 자극하며 자신들의 정권을 지켜나가려는 친일파들이 달가워보일리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미국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듯한 이 시대 친미파의 교과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헛기침 한방에 바로 쫄아주시는데 공교롭게도 문제의 아이젠하워와 재임 기간을 같이한 이승만은 그 뒤 재임 기간 내내 북풍을 활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된다.

소련 덕분인지는 몰라도 종전 후에는 나름 ㅎㄷㄷ한 리즈시절도 누렸던 북한..


이승만은 가뜩이나 불안한 내정을 바로잡을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북풍'이 사라지자 정치적 입지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사실 미국의 간섭을 무시하고 멋대로 북풍을 이용할수도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군사력으로는 북한과 단독으로 맞서서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나몰라라'하는 상황에서 정말 북한이 재침공이라도 하게되면 정권이고 뭐고 다 끝장나게 생겼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대신할 것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일본'이다. 즉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반일 감정이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극도로 심했던 시기는 다름아닌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자신과 반대편에 서 있던 독립운동가 정치세력을 규탄하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일본을 싫어하게 만든다. 우리나라가 일제침략기를 거친 것도, 지금처럼 못살게 된 것도 다 일본 탓이다. 남북전쟁을 부추겨 중간에 무기중간도매로 엄청난 이익을 챙겨 경제부국이 된 야비한 국가다라고 일부 진실을 섞어 일본을 철저하게 호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독립운동가 세력의 '일제침략기에 대한 친일파 책임론'을 회피하고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한 포석임에 다르지 않았지만 사실 이승만 정권에는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다. 군사력으로는 북한이나 일본이나 밀리긴 마찬가지였지만, 좀 건드리면 우리를 바로 작살낼 수 있는 힘을 보유했고 그 힘이 닿는 사정거리에 있던 북한과는 달리 일본은 당시 전범국으로 발이 묶여 아무리 도발해도 우리나라를 공격해오지 않을 거라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심지어 한국전쟁기간중에도 일본의 침략을 걱정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재임기간 내내 일본의 재침략 가능성을 제시하며 일풍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해먹는다.

이승만이 무려 한국전쟁 당시부터 임기말까지 이용해먹었던 일풍의 근거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장면, 내용을 보면 이승만의 일풍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러한 일풍은 윤보선 이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 의해 다시 '북풍'을 이용하는 쪽으로 변화되며 정말 타이밍 좋게 이승만이 사망한 직후인 1965년부터 미국의 압박에도 거의 진척이 없었던 한일협정이 재개되는 한편 침묵하던 북한이 도발을 즉시 개시하며 박정희의 재임기간 16년간 무려 29건의 진실과 거짓이 섞인 북풍 도발이 기록된다. 정계에 빨갱이 색출 작업이 재개되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북한 도발은 윤보선과 김대중과의 대결이 시작되었던 1967~71년사이에 집중되었다.

이렇듯 거의 1,2,3공화국 대한민국의 경제부흥기 정권의 핵심을 틀어쥐며 대한민국에 뿌리를 박은 친일파와 그의 후손들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이들은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이 가능한 '반일 감정'을 더 많이 가져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잊을 만 하면 일제침략기를 들먹이며 종군위안부 문제를 뉴스에 올린다.(동아일보가 대표적) 그리고 가능하면 일제의 만행이 좀 더 이슈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이승만이 그랬듯, 자신들의 차악과 개과 천선 이미지와 더불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이 일제의 만행보다 더 작게 비춰지길 원하며,  그 시기의 모든 국민적 고통에 대한 책임을 일제에 전가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실 부분이 있다. 바로 뉴라이트라는 조직의 존재 의미다.  뉴라이트는 일본의 우익교과서를 지지하며 위안부를 부정하는 등, 그야말로 대놓고 친일임을 과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들이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인데, 이들이 지원하는 뉴라이트의 활동을 보면정말 친일파들이 국민들에게 개과천선의 이미지를 심고 있는 것이 맞느냐는 반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뉴라이트의 주요 먹이 '역사교과서' 문제 그들은 사실 가능하면 일본의 만행에 대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적힌 역사교과서가 채택되길 바란다, 사실 역사교과서가 의무교육이 되길 바라는 쪽은 친일파쪽이 더 적극적인데. 단! 가능한 만큼 일제강점기의 만행들은 대부분 일본의 책임이라고 기록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뉴라이트를 이용해 '일본 강점기를 옹호하고 변론하는' 기자회견을 몇 번이고 갖는 것이다. 이러면 국민들은 발끈해서 국사 교육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가능하면 일제에 대해 더 크게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의 친일 행각보다 일제의 악랄함이 더 크게 부각될것임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실 뉴라이트는 모로 보나 바로 보나 친일파의 정실(?)이라고 보긴 힘든 구석이 많다 그들의 성분 상 가문 단위의 친일 전력도 별로 없고 일부 맴버를 제외하면 정말 어디에서 뭐하다 나왔는지 모를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의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들이 대체 지금와서 친일을 해서 대체 무슨 이득을 볼 수 있냐는 것, 아무리 친일파가 빽이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들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사회생활하면서 이념이 다른 사람과 섞이기 두고두고 어렵다는 것을 각오한 이들의 무모함은 마치 자살폭탄테러에 뛰어드는 인간폭탄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이 부분에서 답이 이미 나온 셈인데. 그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을 싫어하게 만드는' 즉 일본을 주적으로 만들게끔 공작하는 공작원들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이들의 활동 내용, 즉 일본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키는 데에 전력을 쏟는다는 것. 바로 이 코드가 일본의 극우랑 맞아떨어져. 일본의 극우들과 연합해 교과서를 만들거나 일본의 극우들의 활약에 동조함으로서 뉴라이트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의 극우 이미지가 되는데, 이로 인해서 뉴라이트가 득을 보는 것은 사실 거의 없다시피한다. 하지만 뉴라이트로 인해 일본을 주적으로 돌려 일제침략기에 대한 책임을 연신 일본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성공한 댓가로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친일파 청산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던 진성 친일파들은 아주 짭짤한 재미를 본다. 이들에게 있어 뉴라이트는 총알받이... 친일파들에게 자금을 받아 알바를 뛰는 소모품일 뿐인 것이다.

친일파는 종군위안부를, 일본 극우는 요코다 메구미를 주기적으로 이용해먹는다.


뉴라이트의 활동은 일본 극우와 맥을 같이한다. 일본 극우 역시 젊고 유능하며 사회적 명망이 있는 인사들을 대거 지원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한국에서는 뉴라이트가 그 젊고 유능하며 친일파들의 스폰서를 받는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세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역할은 가짜 친일파가 되는 것, 가능하면 과거 친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지금 와서 당시의 일본을 지지하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나가는것, 그래서 다시금 일제강점기가 일어나고 당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등의 저항이 잇따라 실패로 돌아간 원인에 대한 책임을 모두 일제에게 싸잡아 떠넘기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며 권력을 쥐고 후에 있을 자신들의 후손에게 닥칠 친일파 책임론을 회피하기 위한 친일파들의 중장기 방안인 것이다.


4부에서 계속
posted by RushAm 2011. 2. 10. 18:25
지난 기성용의 세레머니로 인해 다시금 화두로 떠오른 '반일 감정'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이 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반일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분들이 속속 돌아가시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새삼 이 반일 감정에 대한 '원천지'에 대해 무척 알아보고 싶어졌다. 정말 이 반일 감정이라는 물건은 일제 강점기 당시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에 의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일제의 사악함을 잊지 않고 일본을 적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그러기에는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참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런 반일 감정에 비해 당시 나라를 팔아먹었던 친일파들은 이상하리만큼 청산이 어려웠고 심지어는 친일파 출신 대통령이 10년여간 독재를 지속했으며 일본 이름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지금 상황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갔다. 그래서 한번 찾아보고 생각해본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광복은 '종전'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광복을 '태평양전쟁'의 종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차세계대전'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일본이 '임진왜란'때처럼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가 일본에 당한 것 자체는 사실이긴 한데 전쟁에 패해서 식민지가 되었던 2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나 폴란드와는 좀 다른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일본은 '조선'을 반드시 칠 필요도 없었고 군사력으로 쳐서도 안됐다. 일본의 목적은 대륙 정벌이었는데, 기본적으로는 당시 조선과 맞짱을 떠서 이길 승산도 없었고 이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이순신에게 남해안에서 캐작살난 걸 아직 잊고 있지 않고 있었던데다가 그 전에 미국이랑 프랑스가 서해안에서 캐작살나는 걸 똑똑히 봤기때문에 일단 조선이랑 맞짱을 떠서 이길 자신도 없었고 이기더라도 반 이상 작살난 군대로 대륙정벌의 야망을 꿈꾸기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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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전략은 우선 조선을 피 한방울 안흘리고 취하는 것에 모아졌다. 당연히 그러려면 정치 조직을 쥐어잡는 것에 집중할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주목한 쪽이 급작스럽게 10년도 아니고 3대 100년 권력을 갑자기 흥선대원군에게 빼앗긴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2인자로 전락한 안동 김씨는 흥선대원군 10년동안 그야말로 좃to the망했는데, 그들이 해왔던 온갖 정권비리 (벼슬을 돈으로 사고 파는) 나 나라에서 하는 고리사채업 (환곡) 제도를 속속 폐지 정비하면서 순조, 현종, 철종까지 이어지며 홍경래의 난, 임술 민란등으로 대표되는 민심 상실을 속속 회복해나가던 중이었기에 민초들의 지지율마저 높았던 흥선대원군 세력을 상대로 그들이 다시 정권의 주도권을 되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들에게 생긴 서포터가 바로 일제였다. 말이 좋아 대연정이지 역사상으로는 정말 대실패에 가까웠던 흥선대원군의 '안동 김씨 며느리 들이기' 는 결국 흥선대원군의 10년 이후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에 의해 개방의 빗장이 풀리며 속속 일제를 비롯한 타국과의 교류 조약이 체결되는 것으로 뒤통수를 맞게 된다.

(사실 명성황후의 개방 정책은 그렇게까지 나쁜 게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패착일수밖에 없다. 뭐 원인을 따지자면 흥선대원군 본인의 욕심 탓에 고종 즉위 이후 10년간 실권력을 휘두른 결과 고종의 정치 역량이 제대로 성장할 기회가 없어 결국 흥선대원군 이후 명성황후의 꼭두각시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때문이기에 뭐라 하소연할껀덕지가 없긴 하지만)

그 중 일본과의 을사조약은 부당하기 그지없는것으로 유명한데, 뭐 하나 아쉬울 게 없었던 조선에게 왜 이런 조약이 강제될수밖에 없었는지는 두말할필요없이 정권 내 핵심 세력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다수결은 아니었지만, 신하들이 허위보고를 하더라도 짬이 높고 쪽수만 많으면 대세가 되던 시절이었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일본이 이를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 정권 핵심은 놓쳤어도 나름의 세력과 정 2품 정도의 참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안동 김시 세력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정권을 조금씩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신들이 정권을 되찾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최면술사 일제의 작품이었지만, 그에 놀아나 한치 앞을 못보고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일본이든 뭐든 나라를 팔 작정을 진즉부터 했던 매국노 (당시에는 아직 권력침탈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친일파까진 아니었다) 시조 늙은이들의 노망짓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왜 우리나라 첫 개항지가 부산이 아니라 강화도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지 않은가?
왜 일본이 이렇게 번거로우면서도 장기적인 방법을 택했는지는 당연히 일본이 국제 정서에 더 밝았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직접 조선과 전쟁을 선포하면 조선은 당연히 청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해 필사 저항할것임에 자명했고 청나라가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은 당연히 그 청나라와 인접해있는 유럽에도 소식이 전해지는 건 당연했다. 1차 대전으로 전쟁이라면 아주 치를 떨던 유럽에 전범 이미지를 주는 것은 향후 정복계획에 있어 상대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미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만국평화의회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그들은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침탈을 어떻게든 '내전'으로 위장할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직접 침탈보다 내분을 유도하는 식의 장기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헤이그 특사의 비극을 모두 잘 배웠을 것이다.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열사는 본회의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일제의 부당함을 설파했지만 그에 대한 의회의 반응은 단지 '조선이 불쌍하다' 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헤이그 특사의 실패 원인은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일제가 영국과 짜고 방해공작을 펼쳤다거나 미리 의회를 구워삶았다는 식의 설이 당당히 교과서에 나오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만국평화의회는 조선의 상황, 즉 일본이 연루되어 이는 아주 특수한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네이티브가 아니었던 이위종 열사가 그걸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고도 생각하기 힘들다. 결국 이 만국평화의회는 조선의 상황을 단지 '두 가지 정치 세력이 부딪힌 정치 내분 정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이 의도했던 바와 맞아떨어진다.(누가 봐도 사실 고종과 안동 김씨의 정치권력다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테니, 이는 이후 일제의 비교대상으로 지목되었던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가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았는지를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처음부터 이를 계산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헤이그 특사가 실패하고 일제의 침략을 침략으로 인정받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외세에 국가를 내주면서까지 내 배때기에 기름을 끼게 만들겠다'는 친일파의 시조들이 벌인 초딩짓 때문이었음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이는 정말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이 얼마나 세계정복을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인데, 결국 이 당시 일본 편을 들었던 영국은 일본이 '설마' 4억 인구의 영국을 칠 거라고는 꿈도 못꾼 채 방심했다가 캐발렸다. 만일 일본이 처음부터 조선과의 '전쟁'으로 첫 단추를 끼웠다면 영국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만큼 일본을 얕보았을리가 없었을것이다. 만국평화의회에서 발언권이 한층 불리해질것임은 물론이었다.)

이런 이유로 세계사에 대한민국 침략사는 전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8월 15일이 종전이 아닌 해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권을 빼앗긴 거라고 교과서에도 나와있듯이 말이다. 본격 전쟁은 청일전쟁, 러일전쟁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청나라가 캐발린 이유는 조총 때문도 아니고 청나라가 병신이어서도 아니라 우리나라가 정말 맘먹고 상대국 침략전쟁 일으킨다고 치면 정말 잘나갈수밖는 천혜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옛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 알겠지만 수도가 국내성, (즉 지금의 신의주를 기준으로 압록강 상류쪽 꼭지점 부근) 눈앞에는 압록강과 옆에는 백두산을 필두로 한 개마고원이 떡 버티고 있다. 농성에는 이민한 곳이 없다. 이 곳을 베이스로 전쟁을 일으키면 아무리 대군이라도 침략 루트는 제한적일수밖에 없고 상대국은 소모전 빼고는 딱히 답이 없게 된다.(고구려의 후손 발해민족이 옛 고구려의 그 광대한 영토를 되찾는데는 채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신생국이 불과 1세기도 안되는 기간에 얻은 영토치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러일전쟁은 두만강 끝자락, 청일전쟁은 압록강 끝자락, 바다를 끼고 있으니 옆구리 치기도 안되니까 대군이 아무리 많아도 정체만 될 뿐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천혜의 요지를 일본이 군사로 내리누르려 했다면? 청일전쟁으로 군사력을 전부 압록강 근처까지 대치하던 와중에 가뜩이나 개김성으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았던 조선 국민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신중하게 정권을 차츰 침탈해가는 것은 물론 공포 정치를 통해 이렇다할 분란을 일으킬 것을 적절히 차단했어야 했다. 물론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친일파의 시조분들의 혁혁한 친일 행적 덕분임은 역사에 너무나도 잘 나와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국제재판소에서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상 판정을 받기가 힘이 든 이유도 이 전쟁의 직접적인 책임에 대한 회피를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각종 증거들을 일본이 속속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침략전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첫번째이고 두 번째가 국제법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각종 조약 문서 때문이다. 물론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시발점은 누차 강조하듯 '친일파 시조'분들의 절대적인 공적임에 다르지 않다. 즉 친일파들의 한치 앞을 내다보지 않으신 눈 앞의 권력욕으로 인해 벌써 3대 아니 5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이 한 짓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못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옛 이야기'일 뿐이라며 애써 후손의 면책을 주장하시는 친일파의 후손분들에게 우린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