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25. 22:36
상 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 못보신 분들은 클릭
그들이 HOT의 '실패'에서 깨닫게 된 실패 원인은 놀랍게도 '기획의 미숙함'이 아니라 기획은 완벽했으나 그 완벽한 기획을 제대로 소화해주지 못한 유망주들의 실력 부재였습니다. 물론 아무리 지난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 SM의 이같은 판단이 반드시 잘못된 결과론을 도출하기도 애매합니다. 사실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책임이 아닌 SM, 나아가서는 가요 시장 전반에 있었거든요. 아직 대한민국은 아이돌 시장을 어떻게 소비해야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SM은 그런 아이돌 시장이 이미 안정화되었다는 전제 하에 너무 기획을 완벽하게만 짜내려고 했으며 그런 치밀한 기획을 접해보지 않았던 유망주들이 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소화할 리가 없었던거죠. 다시말해 시장, 유망주, 기획사 모두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기때문에 시간을 두고 같이 성장시켜야 했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획은 완벽하다'라는 SM의 편식성 자아도취로 인해 아이돌 시장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 한계를 매우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 바로 HOT의 해체입니다. 얼핏 보면 계약분쟁만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사실 일부 SM맴버들이 '회사에 남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계약분쟁으로 치부하기에 어려운 감이 있는데요. 이들 5명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행보를 보면 각각 롹커(...), 소프트팝가수 (이상 SM에 잔류한 문희준, 강타) 1인 기획사 창업 후 브리티시 팝, 힙합 음악, 댄스 위주 보컬 (이상 잔류하지 않은 토니안, 이재원, 장우혁) 입니다. 눈치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류하지 않은 3인의 음악적 행보가 SM이 지금 현 시점까지 해왔던 음악적 색깔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우선적인 문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단지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게 해준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SM은 HOT의 표면적 성공을 기반으로 꽤 빠른 시점에 주식회사로 전환 코스피에 상장을 하게 되는데요. 이 상장이라는게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공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만, 냉정히 보면 결국 '회사'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아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경영상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업계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애착이 없이도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이 회사를 소유해서 내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경영권 방어'가 안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의 수익을 위해 무조건 생산적인 활동만을 해야하고 지출을 줄여 순익을 높이는 활동을 강요받게 되는데요. 바로 이 점이 SM전체 조직의 분위기를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리더 문희준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사회비판적인 음악 코드와 강한 전사의 이미지라는 HOT의 기획은 문희준의 솔로 데뷰로 이어졌고 HOT의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소프트팝 음악을 추구했던 강타의 잔류는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SM이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과 크게 차이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은 3인은 일단 당시 시점에서 해오던 음악도 아니었고 그들의 음악을 뒷받침할 기획 인력도 없었습니다. 즉 추가 투자가 필요했던 사안이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들이 요구했던 부분은 '가수로서의 재계약'이 아닌 '일정 지위 이상의 승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가수로서 활동은 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추구하는 후배들을 SM 내에서 키워내는 새로운 파트를 맡고 싶다는 것이었죠. 이들의 요구는 기획사에 소속되어 5년 이상 활동한 가수로서는 지극히 당연할수밖에 없는 요구였습니다만, SM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음악을 기획할 자금도 그들을 중역급에 가까운 대우를 해주며 신인을 키우는 역할을 부여해줄 생각도 없거니와 결정적으로 'SM의 기획 가능한 권리'를 독점하고 싶어했던 경영진을 위시한 실무진들의 몽니가 자칫 아이돌들의 은퇴 후 승진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정착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SM은 돈을 많이 안주거나 노예계약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신인으로 입사해서 열심히 SM이 하라는 대로 기획에 발맞춰 꼭두각시짓 하고 난 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동네 피자집도 3년 이상 배달일 열심히 하면 매니저 승진의 기회가 있기 마련인데, SM은 적어도 가수들에게 있어서 '회사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무진 참여'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기획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프로듀서를 하던 사람들 즉 유영진 라인이 독점할수밖에 없었고 그 아래에서 아무리 강타나 문희준이 선배급 대우를 받으며 승진을 한 들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신인을 기획하거나 키워내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HOT의 해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를 알고서도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쪽이 SM에 남았고 이에 반기를 든 3인이 박차고 나간 것이 되는 셈인데요, 물론 세간에 알려진대로 불공정한 계약 관행 역시 문제가 되었겠습니다만 그 이전에 사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SM 5년차로서 그에 걸맞는 지위 상승과 연봉을 요구했고 승진도 안시켜줄거고 돈도 지금 이상 더 줄 생각이 없다는 SM의 입장이 이들과 대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승자박에 가까웠던 SM의 HOT에 대한 오판은 이후 SM의 행보에 있어 갖은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데요. 우선 4집부터 과감하게 시행한 실력파 아이돌의 육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이는 물론 그렇게 나온 아웃풋이 상품성이 너무 떨어졌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더 큰 문제점은 그렇게 키워놓은 결과 자신들의 능력과 경력을 내세워 '상관 대우'를 요구하는 빌미가 된다는 점이었죠. SM은 이후 5년 주기를 꾸준히 지키는 한편,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티스트형' 유망주를 멀리하는 등 철저하게 아이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유닛형 유망주만을 선발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냥 기획한 대로 잘 소화해주는 유망주가 필요할 뿐 음악적 역량을 키워 새로운 음악 포멧을 추구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을 아티스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보아!
보아는 이런 어수선한 환경 속에서 기획된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연하겠지만 HOT의 사례에서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는 SM의 철학이 모두 집대성된 최초의 작품이자 (좋지 않은 의미에서)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죠. 당연하겠지만, 보아가 일본에 진출한다는 의미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일본 진출과 귀결되어 있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300만장 싱글기록 우타다 히카루의 800만장 앨범신기록 등이 팡팡 터저나오며 음반 시장이 급폭발하던 당시 일본 시장은 SM이 소박만 치더라도 한국의 몇 배 이상의 돈을 벌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요. 특히 아직도 음반협회에서 MP3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내수 음반 시장의 급격한 침체 역시 그들을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계기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보아는 '유영진'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안고 출발할수밖에 없었는데요. 지금으로 치면 중2병이라도 걸린 듯한 유영진의 '사회비판'에 대한 집착은 보아의 데뷰곡 ID PEACE B의 실패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문제는 유영진이 진짜 10대를 제대로 분석하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가사와 곡을 쓸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고, 그런 곡이 10대들에게 음악적으로라도 어필이 되었냐면 그쪽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보아는 데뷰때부터 각종 구설수에 시달리며 기획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집니다. 보아는 후속곡 '사라'로 SM의 거의 사력을 다한 푸쉬를 통해 명예회복에 성공하지만, 예정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일본 진출 준비에 전력을 쏟게 되죠. 준비를 하면서 간간히 국내에서의 신곡 활동을 겸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보아의 멘탈 손상이 극심하다고 판단했을것으로 본 SM은 외부노출을 극도로 꺼린 채 AVEX와 공동으로 제 2의 육성에 돌입합니다.
이 보아의 육성 과정 역시 SM의 아이돌 육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1999년 데뷰 이후 2년 이상의 공백기를 거친 2001년 일본 데뷰까지 2년간의 공백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제 2차 트레이닝이 그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SM의 육성 기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음악적 감각과 댄스 실력, 아이돌 컨셉 소화 능력까지 포함해서 2년을 넘기기 힘들었습니다만, (악명높았던 SES의 트레이닝기간도 2년 전후) 보아의 경우 투자 금액과 트레이닝 기간이 비약적으로 길어져버린 것이죠. 댄스나 음악에 대한 감각 등 기초 트레이닝 과정 2년에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어 능력이나 예능 개그 연습, 간단한 단막극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연기까지 복합적으로 손을 대는 과정 2년이 다시 포함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길어진 트레이닝 기간이 정설이 된 이유는 보아의 기하학적인 성공 사례 때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죠.
여기에 보아가 SM의 육성 과정에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아이돌'의 데뷰기준 연령대를 높인 대신 육성시작연령대를 대폭 낮추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10대 초반부터 육성을 시작하는 조기육성이 향후 재능 계발 측면에서 효과적인 부분이 분명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생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죠. 단체 합숙과 끝없는 연습, 절대적인 서열 체계의 엄격함 속에서 자라나는 유망주들은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서열 체계 속 상하관계에 훨씬 더 익숙해지고 맙니다.
이는 SM에 있어 두 가지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데요. 우선 육성 과정에서 SM에 절대적인 충성도를 주입시켜 향후 재계약이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데에 드는 장벽을 대폭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첫 번째이고, 잘 알려져있지 않은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생활 통제, 즉 아이돌의 순수무결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이돌 윤리 기준은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과거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나 폭력에 연루된 증거 등 윤리의식에 반하는 과거가 적발될 경우 아이돌로서 살아남기 힘든 풍토가 (당시까지는)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생활 전반을 통제함으로서 데뷰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문제점을 사전 예방하고자 하는 포석이 있었던 것이죠. 일본이야 아이돌이 스캔들을 일으키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시스템입니다만, 에초 계약 자체가 일방적인 육성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국의 계약 조건에서는 그런 조항을 넣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에초 소속 정규직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상품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 쪽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보아'의 성공 전후,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SM의 주식시장상장을 전후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SM의 육성 체계가 급작스럽게 늘어난 시기가 보아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뒤라고 가정한다면 2002년 후반 정도가 되는데요. 문제는 이 때까지 정상적인 흐름으로 국내 시장을 노리던 SM의 보이그룹 걸그룹 라인이 급작스럽게 '해외 경쟁력이 있는' 소수정예 라인으로 수정되면서 국내용 아이돌로 키워지던 아이돌이 떨이처리되듯 쏟아져나오게 되는데요. 보아 라인이었던 다나, SES라인이었던 밀크, HOT-신화 라인이었던 블랙비트가 속속 데뷰를 빙자한 '정리'가 되면서 SM의 유망주라인은 새 판을 짜게 됩니다.
사실 그냥 키우던 애들을 더 키워서 해외진출시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블랙비트의 경우 이미 5년 이상 육성이 끝난 상태였고 그밖의 그룹 역시 그 시점에서 나이가 20줄을 넘긴 데뷰 시기가 꽉 차버린데다, 그렇게 머리가 굵어진 애들을 추가적인 비용과 시간을 들여 육성시키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해외 진출하는 데에 있어 국내용 이상의 포텐셜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옮은 판단이었던 역사적인 오판이었건 말입니다.
그리고 SM이 가질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고민은 '보아'라는 거대한 떡밥에 비해 SM이 가진 실속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인데요. 사실상 AVEX 산하의 이른바 '아무로 - 하마사키 - 코다'라인을 탔던 보아의 후광 탓에 SM이 보아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이 거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보아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곡들은 대부분 일본 원곡인데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곡 역시 스웨덴 리메이크곡 NO.1 .... 음악 최우선주의를 표방했던 SM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음에 분명했을테죠. 게다가 유영진의 곡 메이킹 능력 역시 이전의 불안한 중2병 때와는 달리 보아의 NO.1앨범을 기준으로 점점 완숙함을 보이고 있는 시점이었기때문에 진정 '지분 100%'를 가지고 '자신들이 만든 곡'을 내세워 일본 시장을 공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 했습니다. 물론 속사정을 살펴보면 보아의 성공에도 이렇다할 저작권료 수익같은 것이 대부분 AVEX좋은 일만 시켜버린 상황에서 SM에 돈이 돌지 않으니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해외진출'을 위시한 투자금 추가 유치를 끌어낼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기존 라인을 다 버리는 모험수를 감행하며 그룹 하나를 데뷰시킵니다. 지금까지 AVEX나 BING을 벤치마킹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쟈니즈 냄새가 풀풀풍기는 5인조 보이그룹이 ....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그들이 HOT의 '실패'에서 깨닫게 된 실패 원인은 놀랍게도 '기획의 미숙함'이 아니라 기획은 완벽했으나 그 완벽한 기획을 제대로 소화해주지 못한 유망주들의 실력 부재였습니다. 물론 아무리 지난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 SM의 이같은 판단이 반드시 잘못된 결과론을 도출하기도 애매합니다. 사실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책임이 아닌 SM, 나아가서는 가요 시장 전반에 있었거든요. 아직 대한민국은 아이돌 시장을 어떻게 소비해야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SM은 그런 아이돌 시장이 이미 안정화되었다는 전제 하에 너무 기획을 완벽하게만 짜내려고 했으며 그런 치밀한 기획을 접해보지 않았던 유망주들이 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소화할 리가 없었던거죠. 다시말해 시장, 유망주, 기획사 모두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기때문에 시간을 두고 같이 성장시켜야 했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획은 완벽하다'라는 SM의 편식성 자아도취로 인해 아이돌 시장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난 천재니까...
그 한계를 매우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 바로 HOT의 해체입니다. 얼핏 보면 계약분쟁만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사실 일부 SM맴버들이 '회사에 남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계약분쟁으로 치부하기에 어려운 감이 있는데요. 이들 5명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행보를 보면 각각 롹커(...), 소프트팝가수 (이상 SM에 잔류한 문희준, 강타) 1인 기획사 창업 후 브리티시 팝, 힙합 음악, 댄스 위주 보컬 (이상 잔류하지 않은 토니안, 이재원, 장우혁) 입니다. 눈치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류하지 않은 3인의 음악적 행보가 SM이 지금 현 시점까지 해왔던 음악적 색깔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우선적인 문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단지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게 해준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SM은 HOT의 표면적 성공을 기반으로 꽤 빠른 시점에 주식회사로 전환 코스피에 상장을 하게 되는데요. 이 상장이라는게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공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만, 냉정히 보면 결국 '회사'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아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경영상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업계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애착이 없이도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이 회사를 소유해서 내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경영권 방어'가 안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의 수익을 위해 무조건 생산적인 활동만을 해야하고 지출을 줄여 순익을 높이는 활동을 강요받게 되는데요. 바로 이 점이 SM전체 조직의 분위기를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리더 문희준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사회비판적인 음악 코드와 강한 전사의 이미지라는 HOT의 기획은 문희준의 솔로 데뷰로 이어졌고 HOT의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소프트팝 음악을 추구했던 강타의 잔류는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SM이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과 크게 차이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은 3인은 일단 당시 시점에서 해오던 음악도 아니었고 그들의 음악을 뒷받침할 기획 인력도 없었습니다. 즉 추가 투자가 필요했던 사안이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들이 요구했던 부분은 '가수로서의 재계약'이 아닌 '일정 지위 이상의 승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가수로서 활동은 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추구하는 후배들을 SM 내에서 키워내는 새로운 파트를 맡고 싶다는 것이었죠. 이들의 요구는 기획사에 소속되어 5년 이상 활동한 가수로서는 지극히 당연할수밖에 없는 요구였습니다만, SM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음악을 기획할 자금도 그들을 중역급에 가까운 대우를 해주며 신인을 키우는 역할을 부여해줄 생각도 없거니와 결정적으로 'SM의 기획 가능한 권리'를 독점하고 싶어했던 경영진을 위시한 실무진들의 몽니가 자칫 아이돌들의 은퇴 후 승진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정착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문희준의 솔로 데뷰가 지속적인 안티팬만 양산하자 SM은 아무미련없이 문희준을 포기한다. 그의 군입대는 안티팬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군 제대 후 2008년 싸이더스 소속으로 신보를 냈을 당시...
SM은 돈을 많이 안주거나 노예계약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신인으로 입사해서 열심히 SM이 하라는 대로 기획에 발맞춰 꼭두각시짓 하고 난 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동네 피자집도 3년 이상 배달일 열심히 하면 매니저 승진의 기회가 있기 마련인데, SM은 적어도 가수들에게 있어서 '회사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무진 참여'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기획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프로듀서를 하던 사람들 즉 유영진 라인이 독점할수밖에 없었고 그 아래에서 아무리 강타나 문희준이 선배급 대우를 받으며 승진을 한 들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신인을 기획하거나 키워내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HOT의 해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를 알고서도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쪽이 SM에 남았고 이에 반기를 든 3인이 박차고 나간 것이 되는 셈인데요, 물론 세간에 알려진대로 불공정한 계약 관행 역시 문제가 되었겠습니다만 그 이전에 사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SM 5년차로서 그에 걸맞는 지위 상승과 연봉을 요구했고 승진도 안시켜줄거고 돈도 지금 이상 더 줄 생각이 없다는 SM의 입장이 이들과 대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승자박에 가까웠던 SM의 HOT에 대한 오판은 이후 SM의 행보에 있어 갖은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데요. 우선 4집부터 과감하게 시행한 실력파 아이돌의 육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이는 물론 그렇게 나온 아웃풋이 상품성이 너무 떨어졌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더 큰 문제점은 그렇게 키워놓은 결과 자신들의 능력과 경력을 내세워 '상관 대우'를 요구하는 빌미가 된다는 점이었죠. SM은 이후 5년 주기를 꾸준히 지키는 한편,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티스트형' 유망주를 멀리하는 등 철저하게 아이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유닛형 유망주만을 선발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냥 기획한 대로 잘 소화해주는 유망주가 필요할 뿐 음악적 역량을 키워 새로운 음악 포멧을 추구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을 아티스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죠.
바다 이야기는 좀 하고 넘어가자, SM 소속 가수 중 최초로 유영진 사단에 '개긴'뒤 재계약 불발과 소속사 이적 이후 전설적인 수준의 찌질한 방해공작은 이미 잘 알려져있지만, 그녀가 왜 SM에 개겼는지, 왜 그 개김에 SM이 발끈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위키에도 언급이 안되어있다) 가수였던 아버지에 의해 오랫동안 트레이닝된 그녀만의 독창적인 창법은 흔히 SM창법이라 불리는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이를 유영진 사단이 자신의 기획에 맞게 맞춰나가면서 창법 개조를 거부한 바다측과 트러블이 잦았다고 한다. 자신의 기획과 음악에 대한 프라이드가 하늘을 찔렀던 당시의 유영진 사단에게 있어 이런 행위는 하극상과 다름없게 받아들여졌고, 결국 메인 보컬의 탈퇴라는 흐름을 감수한 채 SES와 바다 모두를 떠나보내는 강수를 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다 한 사람만으로 SM, 특히 유영진 사단의 성향을 적나라하게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보아!
보아는 이런 어수선한 환경 속에서 기획된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연하겠지만 HOT의 사례에서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는 SM의 철학이 모두 집대성된 최초의 작품이자 (좋지 않은 의미에서)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죠. 당연하겠지만, 보아가 일본에 진출한다는 의미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일본 진출과 귀결되어 있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300만장 싱글기록 우타다 히카루의 800만장 앨범신기록 등이 팡팡 터저나오며 음반 시장이 급폭발하던 당시 일본 시장은 SM이 소박만 치더라도 한국의 몇 배 이상의 돈을 벌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요. 특히 아직도 음반협회에서 MP3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내수 음반 시장의 급격한 침체 역시 그들을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계기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보아는 '유영진'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안고 출발할수밖에 없었는데요. 지금으로 치면 중2병이라도 걸린 듯한 유영진의 '사회비판'에 대한 집착은 보아의 데뷰곡 ID PEACE B의 실패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문제는 유영진이 진짜 10대를 제대로 분석하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가사와 곡을 쓸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고, 그런 곡이 10대들에게 음악적으로라도 어필이 되었냐면 그쪽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보아는 데뷰때부터 각종 구설수에 시달리며 기획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집니다. 보아는 후속곡 '사라'로 SM의 거의 사력을 다한 푸쉬를 통해 명예회복에 성공하지만, 예정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일본 진출 준비에 전력을 쏟게 되죠. 준비를 하면서 간간히 국내에서의 신곡 활동을 겸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보아의 멘탈 손상이 극심하다고 판단했을것으로 본 SM은 외부노출을 극도로 꺼린 채 AVEX와 공동으로 제 2의 육성에 돌입합니다.
이 보아의 육성 과정 역시 SM의 아이돌 육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1999년 데뷰 이후 2년 이상의 공백기를 거친 2001년 일본 데뷰까지 2년간의 공백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제 2차 트레이닝이 그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SM의 육성 기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음악적 감각과 댄스 실력, 아이돌 컨셉 소화 능력까지 포함해서 2년을 넘기기 힘들었습니다만, (악명높았던 SES의 트레이닝기간도 2년 전후) 보아의 경우 투자 금액과 트레이닝 기간이 비약적으로 길어져버린 것이죠. 댄스나 음악에 대한 감각 등 기초 트레이닝 과정 2년에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어 능력이나 예능 개그 연습, 간단한 단막극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연기까지 복합적으로 손을 대는 과정 2년이 다시 포함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길어진 트레이닝 기간이 정설이 된 이유는 보아의 기하학적인 성공 사례 때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죠.
여기에 보아가 SM의 육성 과정에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아이돌'의 데뷰기준 연령대를 높인 대신 육성시작연령대를 대폭 낮추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10대 초반부터 육성을 시작하는 조기육성이 향후 재능 계발 측면에서 효과적인 부분이 분명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생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죠. 단체 합숙과 끝없는 연습, 절대적인 서열 체계의 엄격함 속에서 자라나는 유망주들은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서열 체계 속 상하관계에 훨씬 더 익숙해지고 맙니다.
HOT 맴버가 아닌 보아가 서열 1위인 이유...
이는 SM에 있어 두 가지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데요. 우선 육성 과정에서 SM에 절대적인 충성도를 주입시켜 향후 재계약이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데에 드는 장벽을 대폭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첫 번째이고, 잘 알려져있지 않은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생활 통제, 즉 아이돌의 순수무결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이돌 윤리 기준은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과거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나 폭력에 연루된 증거 등 윤리의식에 반하는 과거가 적발될 경우 아이돌로서 살아남기 힘든 풍토가 (당시까지는)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생활 전반을 통제함으로서 데뷰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문제점을 사전 예방하고자 하는 포석이 있었던 것이죠. 일본이야 아이돌이 스캔들을 일으키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시스템입니다만, 에초 계약 자체가 일방적인 육성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국의 계약 조건에서는 그런 조항을 넣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에초 소속 정규직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상품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 쪽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보아'의 성공 전후,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SM의 주식시장상장을 전후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SM의 육성 체계가 급작스럽게 늘어난 시기가 보아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뒤라고 가정한다면 2002년 후반 정도가 되는데요. 문제는 이 때까지 정상적인 흐름으로 국내 시장을 노리던 SM의 보이그룹 걸그룹 라인이 급작스럽게 '해외 경쟁력이 있는' 소수정예 라인으로 수정되면서 국내용 아이돌로 키워지던 아이돌이 떨이처리되듯 쏟아져나오게 되는데요. 보아 라인이었던 다나, SES라인이었던 밀크, HOT-신화 라인이었던 블랙비트가 속속 데뷰를 빙자한 '정리'가 되면서 SM의 유망주라인은 새 판을 짜게 됩니다.
SM의 잃어버린 역사로 남아있는 그들...블랙비트
사실 그냥 키우던 애들을 더 키워서 해외진출시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블랙비트의 경우 이미 5년 이상 육성이 끝난 상태였고 그밖의 그룹 역시 그 시점에서 나이가 20줄을 넘긴 데뷰 시기가 꽉 차버린데다, 그렇게 머리가 굵어진 애들을 추가적인 비용과 시간을 들여 육성시키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해외 진출하는 데에 있어 국내용 이상의 포텐셜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옮은 판단이었던 역사적인 오판이었건 말입니다.
그리고 SM이 가질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고민은 '보아'라는 거대한 떡밥에 비해 SM이 가진 실속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인데요. 사실상 AVEX 산하의 이른바 '아무로 - 하마사키 - 코다'라인을 탔던 보아의 후광 탓에 SM이 보아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이 거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보아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곡들은 대부분 일본 원곡인데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곡 역시 스웨덴 리메이크곡 NO.1 .... 음악 최우선주의를 표방했던 SM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음에 분명했을테죠. 게다가 유영진의 곡 메이킹 능력 역시 이전의 불안한 중2병 때와는 달리 보아의 NO.1앨범을 기준으로 점점 완숙함을 보이고 있는 시점이었기때문에 진정 '지분 100%'를 가지고 '자신들이 만든 곡'을 내세워 일본 시장을 공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 했습니다. 물론 속사정을 살펴보면 보아의 성공에도 이렇다할 저작권료 수익같은 것이 대부분 AVEX좋은 일만 시켜버린 상황에서 SM에 돈이 돌지 않으니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해외진출'을 위시한 투자금 추가 유치를 끌어낼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기존 라인을 다 버리는 모험수를 감행하며 그룹 하나를 데뷰시킵니다. 지금까지 AVEX나 BING을 벤치마킹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쟈니즈 냄새가 풀풀풍기는 5인조 보이그룹이 ....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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