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1. 6. 1. 06:47
대한민국에 이른바 '아이돌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된지도 벌써 십수년이 지났습니다. 아이돌 주기 5년을 계산하면 벌써 시대가 세 번 바뀐 셈인데요. 10년이 넘어가고, 속속 그 아이돌이 일본에 진출해서 성공 가도를 달릴 만큼 (자기들딴에는) 세계적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하는 일면에는 이 산업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이돌을 아티스트와 동일시한 잣대로 평가하거나 팬덤에 의해 음반 시장이 일부 연령대로 치우처버리게끔 방치하기도 하는 부작용이 산적해있기도 하죠.


그래서 공화국 연구소에서는 지난 '대한민국 아이돌 산업을 말한다' 시리즈에 이어 기획사 개별적인 특징과 속성 등을 가능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분석한 '아이돌 기획사 열전'시리즈를 마련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SM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오해가 있으실까봐 덧붙입니다만, 이 기획은 특정 기획사를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철저한 개인 연구에 의해 알게 된 내용들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연구 내용을 인용, 배포하는 등의 문제에 있어 필자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만, 공화국 연구소는 '블로그 기사'가 아닌 개인 연구 자료이므로 다른 포스팅에 비해 텍스트량이 매우 많다는 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서태지와 '아이돌'

아이돌의 원류는 언제부터인가의 논쟁은 사실 너무 무의미합니다. 그 형태만 달랐을 뿐 아이돌이라는 존재는 대한민국 음악계에 언제든 있었거든요. 다만 그 형태가 조금씩 달랐고 그 형태에 따라 어떤 그룹은 살아남고, 사라지는 '대중의 선택'에 의한 생존전쟁을 벌였을뿐입니다. 일례로 10대 문화의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거의 90년대 초반을 양분했던 잼이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밀려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체생산'능력이었는데요. 서태지와 아이들은 신아이레코드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기획사 없는 단독활동, 그러니까 음반 찍어내는 것만 대행했을 뿐, 거의 모든 활동 기획이나 전략, 작사 곡 등의 컴포징에 이르기까지 그룹 내에서 자체생산을 해냈습니다. 실질적인 데뷰무대였던 특종 TV연예에서 이들에게 내린 혹평은 어찌보면 당연했는데요. 이들은 이전 잼이나 소방차등이 보여줬던 아이돌의 계보가 아닌 아티스트의 계보를 아이돌과 섞으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다름아닌 서태지가 혼자 다 해먹을 수 있게 만든 시대적 변화, 1인 작곡, 연주가 가능한 시스템 '컴퓨터 음악(MIDI)'가 있었습니다.


작곡의 상징을 콩나물 던지기에서 신디사이저로 바꾼 혁명의 중심, 기존 밴드들이 이에 반발했던 이유는 지금의 기가샘플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형편없는 미디악기 음질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가진 아날로그적 노하우와 향후 밴드없는 하드레코딩 환경 변화에 따른 밥줄의 위협에 대한 럿다이드식 저항이 아니었을까?


예전 음반 녹음은 그야말로 라이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반주를 직접 마스터링 녹음을 처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능한 실제연주를 따오는 게 관례였죠. 언제나 음반사는 실력있는 세션을 보유해야만 했고, 가수들은 그 세션들을 선배로 극진히 모시는 이른바 '딸랑딸랑'을 해야만 녹음하고 음반 낼 수 있는 이른바 '세션의 권력'이 대세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권력을 제대로 보유할 수 없었던 군사정권시절의 핍박에 저항한 저항음악가들의 선택이 바로 '포크송', 즉 1인 연주가 가능한 음악이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합니다. 어쨌든 기타만 칠 줄 알아도 귀하신 몸이었던 시절이라는 겁니다.

서태지의 경우는 이 기타 하나로 먹고 살 수 있는 엘리드 계보를 걸었습니다만, 시나위 출신의 정통파 록 기타리스트가 솔로 데뷰로 꺼내든 게 록이 아닌 빠른 비트의 '컴퓨터 음악'이었다는 점이 기성 가수들에게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한 음악이 록 음악과 거리가 멀기도 했습니다만, 무엇보다 그동안 록 음악계는 물론 전통적으로 가창력을 중시한 음악계에서 '랩'이라는 음표없는 음악을 추구한 점과 그 음악 자체가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나머지 현지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한 마디로 장르불명의 조잡스러움이 묻어났다는 점이 그것이었죠. 아무리 서태지가 천재였다 한들 1인 작곡 체계는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했고, 아무래도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만 하다보니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음악을 들여오면서 벌어진 '표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야 음원들이 웨이브 기반으로 실제 연주와 진배없는 수준으로 높아졌지만 당시의 사운드캔버스로 대표되는 컴퓨터 음악은 시나위 시절부터 아날로그에 익숙해져 있던 서태지의 감성으로서는 창작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죠.

그는 아이돌이 아니었지만, 본의아니게 아이돌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다.


흔히 음악계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뷰가 가져온 센세이션은 생각보다 많은 파생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들의 데뷰, 그리고 그 데뷰에 대한 음악계의 상반된 평가,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끼친 영향은 그들의 은퇴를 전후해 그들이 만들어놓은 밥상을 어떻게 먹는지 혹은 뒤집어 엎는지에 대한 큰 대명제가 갈리게 되는데요. 그가 하는 음악을 인정하고 필요한 일부분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음악에 활용했던 세력과, 그의 음악을 극렬히 비판하며 그가 추구했던 방향성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쪽 그리고 그의 음악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계승하여 발전시킨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당시 추구했던 그들의 방향성을 꾸준히 추구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죠. 오늘 이야기하게 될 SM엔터테인먼트도 그 당시 갈라저나온 커다란 줄기로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축입니다.

HOT의 위대한 유산

서태지의 음악이 미국, 일본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본다면, SM엔터테인먼트는 그가 추구했던 음악 중 미국적 음악 코드에 한국적 대중화를 위해 입혔던 'JPOP'의 감성코드에 주목합니다. 굉장히 트랜디하면서도 랩과 잘 어울리며 자극적이지 않아 부담없이 귀에 잘 들어오는 음악을 추구하죠. 재미있는 건 이런 JPOP의 감성 자체는 AVEX나 BEING 등 그야말로 90~00년대를 쓸어버리던 기획사에서 나온 코드였지만, 정작 이들이 일본을 통해 들여온 건 그들의 음악적 감성이 아닌 쟈니즈의 아이돌 시스템이었다는 것인데요. 한마디로 음악성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돌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SES가 일본 진출 당시 기술적 자문을 하기도 했던 BEING계열 소속 故 사카이 이즈미


무조건 외모를 중시하던 당시의 아이돌 선발 시스템에서 나름 수준 높은 음악을 추구하고 싶었던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노래실력을 갖춘 유망주는 생각보다 잘 모여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외모와 노래 실력은 상반되는 케이스가 많았고, 좀 실력이 있다 싶은 녀석은 아이돌 그룹에는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을테니까요. 게다가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컨셉이 아이돌스러운 POP음악 이라는 난점이 작용하고 있어 그 음악에 걸맞는 보이스 컬러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주 노래를 잘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지금까지의 '잘 한다'는 기준과 상당히 다른, 그러니까 당시 기준으로 다른 가수들의 창법을 흉내내면서 자라온 가수 지망생들이 아닌 그냥 백지 상태에서 가르칠 수 있는 다이아몬드 원석이 필요했던 것이죠.

사실 예전부터 최근까지 쟈니즈의 보이 그룹에서 '노래 담당'을 따로 두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요. 아이돌이 노래를 반드시 잘해야한다는 고정관념도 없을 뿐더러, 아이돌이 완성도 높은 음악을 할 필요성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입니다) 이유는 물론 노래를 잘하는 아이를 뽑으면 '큰 틀'에서의 기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죠. 원래 아이돌이라는 것은 어떤 컨셉 (미소년 집단, 짐승남, 시크한 도시남자 등) 을 잡게 되면 그 컨셉에 걸맞는 맴버를 모집하고 그 맴버들은 짜여진 컨셉에 걸맞는 활동만 펼쳐주면 그만입니다. 당연하겠지만 이 컨셉의 거의 대부분은 외모와 댄스실력인데요. 그런데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전제조건을 달게 되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냥 외모만 맞춰 오디션보고 캐스팅하는 게 아니라 일단 외모를 맞춘 뒤에 얘가 노래를 잘 못하거나 보컬 색깔이 안맞거나 하면 탈락을 시켜야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뽑았는데 컨셉에 적응을 못하거나 (가창력 좋은데 춤까지 잘추는 애들은 정말 드물죠) 하면 데뷰 스케줄부터 삐걱거리는 등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 자명하니까요.

그런데 SM엔터테인먼트는 이런 잠재적 불안요소를 떠안아가면서까지 음악성을 갖춘 아이돌에 목을 맸던 것일까요? 그것은 SM엔터테인먼트가 한국의 쟈니즈가 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존재 '유영진'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수만 회장과 함께 사내 종신계약 이사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음악최우선주의'라는 방향성을 지금까지의 행보 속에서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었는데요. 본인 스스로가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생활을 시작하기도 했고, 전자음악에 대한 인식이나 수준이 낮을 때부터 꾸준히 밀어봤던 분야일테니, 이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음악만을 중시한 나머지 아이돌이 본연의 색깔을 잃은 보컬그룹이 되지 않도록 음악적 완성도는 높이되 가능한 초창기 기획했던 '컨셉'을 최대한 살리고, 그 방향성을 끝까지 고수하는 음악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초창기 SM의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이 당시에는 '연습생'이라는 개념보다는 직접적인 캐스팅에 의한 속성 데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연습 기간은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었고, 어떤 그룹의 형태를 기획하고 그 그룹의 피스를 몇 개로 나눈 다음 그 조각에 맞는 인재를 찾아나서는 오디션이나 캐스팅 작업을 통해 완성시키는 방식이었죠. 눈치채셨겠지만, 이는 일본의 고전적이고도 정평이 나 있는 아이돌 기획 시스템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초창기 SM은 사실상 일본 아이돌 생산 시스템을 상당 부분 벤치마켕한 흔적을 곳곳에서 조금씩 찾아볼 수 있었죠.

하지만 조금 아쉽게도 유영진은 그런 음악적 욕심과 더불어 '아이돌 그룹에 대한 이해'를 양립시켜 '작곡'과 '프로듀싱'을 함께 맡아야만 했던 어려움이 존재했고, 이런 초창기의 열악한 환경은 그의 성향을 매우 고지식하게 만들어놓고 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SM을 있게 한 그룹으로 꼽히는 HOT의 경우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의야해하실줄로 압니다만, 일단 들어보세요

HOT 기획 당시 유영진은 HOT를 기성 세대를 비판하는 개김성 강한 5명의 악동으로 컨셉을 잡고 각종 음악 컨셉 등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컨셉은 데뷰곡 전사의 후예의 예상치못한 초반 대 부진에서 비롯된것처럼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요. 생각했던것만큼 당시의 10대들은 그런 심각한 가사에 공감하거나 열광해주지 않았습니다. 위키에서는 전사의 후예가 표절 시비로 인해 제대로 인기를 얻을 기회가 없었다는 주장도 보입니다만, 이런 문제를 포함한 기획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려진 대로 이들의 학창시절은 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고 한다. 전사의 후예는 타이틀에서 가해자의 이야기를 연상시키지만 내용은 피해자를 시사하고 있다. 만일 이들이 가해자의 악동적 이미지를 그대로 곡에 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말할것도 없이 학교폭력미화라는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을 먹지 않았을까?


이같은 예상치못한 결과에 대해 유영진은 일단 데뷰 앨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일단 후속곡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에 2집을 내놓을 것을 준비하게 되는데요.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아무 전략없이 내놓은 캔디가 대박을 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리더 문희준의 이미지를 보시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거친 느낌의 그룹으로 기획되었던 그들이기에 이런 말랑말랑한 곡이 어울리지도, 시장에 통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인데요.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의 아이돌 시장은 그야말로 '애들다운' 곡이 더 먹히는 시대였고 그들이 내세운 문희준의 거칠고 와일드한 캐릭터보다 부드러운 보컬의 강타를 중심으로 한 캔디가 더 쉽게 받아들여진 당연한 역사가 쓰여져버린 것이죠.

HOT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기획사 SM입장에서는 정말 얻어걸렸다 싶을 만큼 기획 차원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유영진이 내놓은 전사의 후예가 실패하고 SM소속이 아닌 외부 작곡가 장용진에 의해 만들어진 캔디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룹 전체 기획이 대중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음을 반증했던 것이죠. 물룐 표면상의 성공은 기획사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겠습니다만, 장기적으로 실패한 기획 속에 얻어걸림을 바란다는 것은 기획사 입장에서는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시장은 언제나 요행을 바라는 자에게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유영진은 HOT의 1집의 실패 원인을 '시장의 미성숙'과 '컨셉의 난해함이 불러오는 소화력 부족'으로 본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와 SM은 1집의 이같은 빗나간 성공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2집에서는 10대들의 사회적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부각시킨 '늑대와 양'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결과는 방송금지처분 그리고 곡 자체가 가진 난해함 탓에 매우 심각한 수준의 실패를 맛보고 맙니다. 지난 1집의 성공에 의한 엄청난 버프가 있었음에도, 실제 기획 자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냉담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여기에 후속곡으로 나온 '장용진'의 '행복'이 2집의 포텐셜을 모두 가져가버렸다고 평가될 만큼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SM과 유영진은 HOT의 지분을 장용진 한 사람에게 빼앗기다시피할만큼 기획사로서의 두 번째 실패를 맛보고 맙니다, 이후 장용진은 HOT음반에서 그 이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데요. 석연치않은 표절 시비가 있었고 표절 원곡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만큼 모호한 부분으로 봐서 사실상 HOT에서 타의적으로 배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장용진이 직접 보컬로 참가한 듀엣 '동자'


이후 HOT는 이 '행복'의 성공이 남긴 후유증을 제대로 치루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는데요. 유영진은 두 번의 기획 실패로 이미 모호해질대로 모호해진 HOT의 기획 컨셉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의미였는지 모를 3집 열맞춰를 내놓았지만 어이없게도 행복에서 이미 한번 데인 '표절' 시비가 본격적으로 붙으며 더 크게 데이고 맙니다. SM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한번 데인 일을 반복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며,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유영진의 곡이 이런 일에 휩싸였다는 점은 많은 부분을 시사합니다. 그만큼 HOT가 처음 가진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기획사 내부에서도 대단히 무리를 했다는 점이 첫번째이고 유영진 본인 역시 세 번째마저 실패했을 경우 자신의 음악 철학과 지금까지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 두번째이죠. 그 역시 3집에 이르러 HOT의 초창기 기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에 대해 '성공에 관한 본격적인 의구심'을 가졌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HOT맴버들의 자작곡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요. 그의 철학 상으로 기획형 아이돌에게 작곡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습니다만, 완고하게 자신의 철학을 밀어붙였던 1,2집이 연속으로 실패하게 되자 립싱크나 악보를 못 읽는 실력없는 아이돌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조금씩 수용하고 기획에 반영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해서 강타가 작곡한 빛은 이전 장용진의 캔디나 행복에 비해 음악적 색깔만 유사할 뿐 완성도면에서는 합창 교향곡 멜로디 샘플링에 대거 의존한 곡이 된 것을 비롯 자작곡이라고 발표된 곡들이 대부분 음악적으로 평가할 가치가 없을 만큼 불안정한 결과가 나오고 맙니다. 당시 이들이 보여준 '오판'은 3집 직전 다소 애매하게 나온 2.5집격에서 발표된 유영진의 'We are the future'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한층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는데요. 이 곡은 열맞춰, 늑대와 양, 전사의 후예와 코드를 공유하면서도 음악 감각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대중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령 실패했더라도 이미 가지고 있는 '컨셉'을 지킨다는 것이 아이돌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백청강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곡으로 꼽았던 'We are the future'


이 곡이 어떻게 보면 HOT가 기존에 가진 기획 컨셉을 유지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 셈이 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SM은 이 당시부터 HOT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접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HOT의 원래 기획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 엄두를 못냈던 것인지, 4집에 이르러서는 앨범 수록곡 전곡과 프로듀싱을 맡겨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고 기획의 주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HOT는 이후 가뜩이나 불안해진 기획 정체성과 함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맴버들의 아무런 철학이 없는 무미건조한 음악 성향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기획 주체가 사라진 아이돌 그룹의 말로는 볼 필요도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죠.

HOT가 SM에 남긴 유산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SM 최초의 성공작'이 아닌 '최초의 실패작'이라는 상징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해서 SM이 정말 오랫동안 벤치마킹했던 일본의 '캐릭터형 아이돌' 시스템이 국내에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점을 HOT의 실패로 인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요. 이후 SM은 선행 기획 후 해당 그룹에 맞춘 퍼즐 맞추기 형태의 일본식 아이돌 기획 시스템 노선을 대폭 수정하기에 이릅니다만, 문제는 HOT의 기획 실패를 통해 그들이 분석한 실패 원인이 한국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기획 차원의 반성이 아닌 완벽한 기획에 대한 유망주들의 소화력 부족으로 기획이 가진 포텐셜이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는 지극히 책임회피적인 결론을 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유영진을 비롯한 SM이 날고 긴다 한들 이제 막 아이돌 시장이 태동하려는 한국 시장에서 당시 그들은 풋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에도 그들이 가진 음악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한국 시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본의 성향과는 상당 부분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만 SM은 자체적인 기획 노선을 한국 성향에 맞게 최적화하기보다는 그들의 기획 성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유망주들의 육성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쪽을 택하게 되죠. 이러한 그들의 이기적인 고집이 향후 SM 그리고 아이돌 시장의 기획 판도를 어떻게 바꾸게 될 지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中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