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05. 7. 12. 16:22
사람들이 슬슬 인터넷이라는 매우 편리하고 초현대적인 매체에 두려
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원래는 깨끗했던 공중화장실에 누군가의 영향으로 지저분하게 사용한 화장실을 꺼리는 듯한 느낌이다. 누군가는 분명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든 사람의 반성이나 처벌은 없고 그 책임을 잘못이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모두의 책임이라는 지극히 윤리책스러운 말로 덮어버린다. 법안을 추진한 정치인들이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할 대로 팽배해버린 현대 대한민국에서 이 말이 과연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납득을 유도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필자는 그들에게 그야말로 정치인스러운 발상이라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들은 언제나 국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대한민국을 머릿 속에 그리며 결과 역시 외면한 채 그들 머릿속에서 성공적으로 그리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머리 속으로만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서, 같은 대한민국을 머리 속에 담아 공유하는 사람들이 다시금 그 허황된 두뇌를 가진 그들을 여의도로 보낸다는 것이 문제다. 여담이지만, 보통 정치인들을 탓할 때, 그들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도 또 이번에는 안 그러겠지 하며 뽑은 국민들 모두의 책임이라고 하는 정치 컬럼니스트들의 위선에 필자는 망설임없이 돌을 던지고 싶다. 그들을 안 뽑은 사람은 죄가 없다. 이후 내내 강조를 하겠지만, 집단의 선택으로 결과가 안좋았다고 해서 그렇지 않았던 선택을 한 사람들까지 돌을 맞아선 곤란하다.

요즘 시끄러운 인터넷 실명제, 뭐든 그렇지만 시끄러운 이유는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인권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터넷의 기본 정신까
지, 논쟁에 안 나오는 잡지식이란 없다시피 할 정도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자신의 의견에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토론강국(?)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토론에 굶주려 있다. 학창시절부터 적극적으로 토론 경험을 쌓아오는 교육 선진국들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선생님에게 들어오는 일방통행식의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마치 교도소 독방에 갇힌 듯한 기분을 학창 시절 내내 느끼고,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이야기하려는 욕구가 강제로 억눌려진, 더구나 한창 새로운 지식 베이스를 구축하는 12년간의 학창시절 동안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속 시원하게 피력하지 못한 채 대학 입시에만 모든 것을 올인하는 많은 학생들의 비극적인 성장과정 탓이라고 생각한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금 학창시절처럼 국민들의 입을 봉하고 있
으면 언젠간 해결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마치 공산주의국가처럼 자신들이 국민들의 지도자라 착각하는 정치인들이 만든 이 법안에 필자는 찬성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인터넷의 현실을 그대로 방관하자는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국민들이 열망했던 세계 1위라는 패권을 IT라는 하나의 산업형태로서 따냈고, 그것이 지금은 국민들의 자존심 그 자체가 된 상황에서 그것을 생활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이제 사회적으로나, 국가 정서에도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을 만큼 우리 생활에 인터넷, 사이버 문화는 별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깊게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도 사뭇 부담스러울만큼 스케일이 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논객들이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옮다며,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이 글이 쓴 취지처럼 매번 허공에 수다를 떠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해결책은 진정 없는 것인가? 언젠가 필자가 강조했던 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론 자체를 어린 시절부터 별로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토론이 해결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예를 들어 100을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 친다면, 50:50으로 나뉘는 결과를 사람들은 가장 싫어한다. 내가 100을 가져야만 하는 미래만을 상상할 뿐 50을 빼앗기는 미래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100을 가져야 하는데 50을 빼앗겼다고만 생각한다, 물론 100을 모두 상대방에게 주는 극단적인 결과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래 예측에 대한 다양성 상실은 경험의 부족에서 나온다. 만일 누군가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싸울 때 주먹이 어디로 날아오는지, 그 뒤에 헛점이 생기면 기습을 어떻게 해야 내가 이길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싸움에서 질 확률이 높고, 크게 부상을 당할 위험이 높은 것처럼, 토론 역시 지는 데에 익숙하지 않으면 토론이 끝나는 일도, 토론에서 이기는 일도 없다. 하지만 토론이란 것이 말과 글로서 정상적으로만 간다면, 길게 끈다고 해도 크게 피해가 가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100을 가져간다는 미래 이외의 다른 경우의 수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그로 인해 토론이 장기화되며, 서로 포기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포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인신공격과 인격모독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론에서 결과론적으로 별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협상하는 법을 모른다. 자신의 미래가 반드시 승리라고만 생각한다. 그 누구도 그에게 지는 법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굴복하게 될 거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들의 책임이 크다.

토론에는 언제나 대안이 있다. 대안이 없는 토론은 토론이 아닌 결정권자에 의해 그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미국이 우리나라를 적국으로 규정하고 24시간 이내에 폭격을 해
올 것이라 경고했다면 우리나라의 선택은 모 아니면 도, 즉 항복할것인가, 맞서 싸울것인가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모 아니면 도, 즉 이기느냐 지느냐 밖에 결과가 없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서 싸우듯이 토론에 모든 것을 걸고 열변을 토한다.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못한 채로 끝나면 시위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때까지 저항한다. 이 부분이 필자는 정말 뼈가 시리도록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토론의 긍정적인 부분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의 독특한 토론 문화에서 나오는 양극화 현상에서 승부를 낸 뒤에 승부에 깨끗하게 굴복하지 못하는 추한 모습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토론 문화가 기왕 양극화로 굳어졌다면, 승부 답게 패자가 깨끗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그러는 모습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 당장 오늘자 9시 뉴스를 보더라도 그런 모습을 1가지 이상 찾을 수 있다.

인터넷 실명제 역시 시행 아니면 부결밖에 대안이 없는 것으로 보이
기 때문에 국민들이 열성적으로 자신들의 입장, 찬성과 반대 의견만을 내세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대부분 정치인들이 무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그들 정치인들이 내놓은 법안에 찬성 반대 이외에 새로운 정책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초반 수많은 정책 제안이 이루어졌으나, 대부분 자신들 혹은 자신들 집단을 위한 일방적 님비 정책이 대부분이었다는 보고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든다. 인터넷 실명제가 과연 시행 아니면 부결이라고 치부될 만큼 그 정책 제안 자체가 쓸모있는 정책인지를 생각해보면 뭔가 어설퍼보이지 않는가? 정말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국민들의 찬반 여론이 이렇게 커질 이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정책 자체에 대해서는 납득하게 되고, 일부 피해를 보는 집단에 한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설득과 정책 설명,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에초에 별다른 학식이 없는 필자조차도 그 정책을 비판하고 모든 여론은 아니지만, 일부 실현 가능한 대안이 떠오를 정도의 정책이라면, 원안에 연연하지 말고 차라리 폐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 토론을 뜯어보는 차원에서 먼저 인터넷 실명제가 왜 반발을 일으키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자, 말 그대로 인권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터넷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악플러’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자체가 기분 나쁜 사람들도 무시 못할 수준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인터넷의 기본 정
신, 즉 국가권력에 구애 받지 않고 족벌언론과 같이 여론을 조장할 수 있는 권력을 함부로 특정 계층에 집중하지 않는 뉴매스미디어의 역할을 인터넷이 계속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으며, 주로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이유를 들고 있다. 찬성론을 살펴보자면, '인터넷의 폐해가 심각하다.' '여론 재판으로 인한 마녀사냥식 인권유린이 위험 수위이다' 라는 등의 의견이 많다. 단편적인 몇몇 집단의 주장이지만 잠재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일부 ‘초등학생’들의 철없는 행동들이 기분나쁘다' 라는 의견 역시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인터넷이 점차 푸쉬, 즉 1인 미디어화 되어감에 따라 인격 한 명을 집중적으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로서 많은 사람들이 찬성론에 동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뜯어보는 두 번째로 양 쪽이 찬성과 반대를 하는 이유를 우선적으로
인터넷 실명제라는 논제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반대론의 대표적인 근거인 인권 침해를 보자, 반대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충분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사용자 개개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라는 전제가 붙는다. 물론 ‘개개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행위’ 역시 있어서는 곤란하다. 아직 방향성과 개념이 모호하긴 하지만 주장하고 있는 ‘인터넷의 기본 정신과 자율성’ 역시 훼손되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듯한 정책 역시 이쪽 주장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찬성론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쪽은 반대론자들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다. 인터넷 실명제가 아닌 다른 정책으로서 그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인터넷 여론 재판으로 인한 인권 유린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되고 속칭 ‘초딩들의 건방짐’을 제어할 수 있는 적절한 제어장치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정책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은, 굳이 인터넷 실명제가 반대론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만큼 문제가 많은 정책이라면, 찬성론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다른 정책적 대안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떠오르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이 문제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실명제의 원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바로 다름아닌 오프라인, 즉 주민등록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주민등록증으로 인해 공권력은 국민들의 범죄율을 낮추는 데에 보다 수월해졌고,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국민 역시 낮아진 범죄율과, 보다 체계적으로 평등한 국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만족스럽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민등록증을 가슴에 붙이고 다니면서, 누구나 만나자마자 이름이나 나이를 묻지 않고서라도 알아볼 수 있게 되어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논쟁 문화 ‘민증 까!’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나이를 중시하고, 연륜이 높은 사람을 우대하는 정서가 있다는 점은 좋은 실례이다. 인터넷 실명제는 마치 외출할 때 항상 외투 한쪽에 신분증을 상대방이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글자 크기로 항상 붙이고 다니라는 이야기이니 반대론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학창시절에도 교복에 명찰을 달고, 그도 모자라 아예 박음질을 해버리는 자체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말도 못한다.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은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는 오프라인에
서는 인격 모독이나 스토커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전부 온라인으로 건너왔을 뿐, 오프라인에서 이미 있었고, 지금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산적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철권정치로 인한 국민들의 서열 규격화 및 독재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누구나 여러 사람들이 있고 범죄자가 생길 수도 있으며, 그것이 없어지면 평화로울 것 같지만, 악이 없는 곳은 망한다는 진리는 과거 여러 실례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절대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는다. 이 점은 확실히 각인을 해야 한다. 어떤 정책도 민주적인 방법으로는 찬성론자들이 원하는 온라인 범죄들을 예방할 수는 없다. 오프라인이 그렇게 평화로워서 범죄가 없고 살인이 없는가? 정책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정책 만능주의 이전에 우리나라 정부 정책의 편리주의를 꼬집고 싶다. 이 정책이 국가적으로 적극 추진되는 이유는 국민을 위해서라고 떠들지만 언제 그 말을 서두로 한 정책이 그런 적이 있었는가? 우리나라 경찰들은 오프라인 범죄에는 오랜 역사 덕분에 면역이 되었지만 사이버 범죄에 있어서는 아직 제대로 컨트롤은커녕 범죄 예방조차 변변히 못하는 실정이다. 아무도 무능한 사이버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찰과 국가는 공권력이 공백이 생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할 수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든 범죄를 컨트롤하고, 자신들의 공권력으로서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인터넷 실명제라고 생각한다. 즉 자신들의 능력적 한계를 인정하기 싫은 자들이 만들어낸 자구책이 국민들을 위한다는 정책으로 변질되어 공표된 셈인데, 정책의 공정성을 떠나서 그 자체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다시금 말하고 싶지만, 어떤 정책도 이미 사람들이 포화상태에 이른 인터넷의 모든 범죄를 제어할 수는 없다. 차라리 국가권력에 제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이 정화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가서 한 달쯤 살아보면서 몸소 정책을 체험해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몇 번을 웃는지를 조용히 세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이야기를 바꿔서 오프라인에서 인권 침해가 인터넷처럼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 어째서일까? 사람들은 같은데 어째서 사람들은 직접 만나서는 단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이 많으면서 인터넷에서는 마치 자신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듯이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결정적으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차이는 주민등록증, 즉 실명제에 있는 게 아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서로 직접 얼굴을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서로 얼굴만 본다면 대략적인 연령대 예측이 가능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연령대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 이 점이 연장자에게 함부로 인격모독을 할 수 없는 억제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명제가 그것을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주민등록증을 가슴에 달고 다니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민증은 위조가 가능하다. 금융실명제가 불법적인 정치자금 및 기업들의 불법 상속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문민정부지만 지금 어떤가? 과연 금융실명제가 우리나라의 경제를 투명하게 해주었는가? 실명제보다는 다른 정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이는 육안으로 속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회적으로 집단성을 갖지 못하는 억제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착안, 필자는 인터넷 실명제를 대신할 대안으로 ‘인터넷 연령 등급 표시제’를 조심스레 제안해본다. TV에서 많이 본 것처럼 12,15,19등의 연령 등급, 즉 정확한 연령이 아닌 연령 계층만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인터넷에 글을 남기게 될 때 자신의 연령대가 함
께 표시가 되어 상대방이 그 사람의 연령대를 식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된다면, 상대방에 대한 인격 모독은 물론, 저연령층들의 무분별한 하극상(?)도 방지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연령층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만난 것처럼 예절에 기초한 억제책이 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연령대가 자신이 글을 씀으로 인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다소 건방진 어투를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자구책으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초등학생 이하 저연령층만을 마녀사냥하는 정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의 세태는 건방진 저연령층 못지 않게 나이값 못하는 성인들도 많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오프라인에서 공중도덕을 어기는 각 연령층들에 대한 암묵적인 비난과 양심이 살아날 수 있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물론 기존 실명제의 반대론자의 관점에서도 ‘나이가 정확하게 표시되지 않는 연령대 표기’의 경우 오프라인에서도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인권 침해의 소지가 적으며, 나이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회 통념처럼 오히려 나이로서 평가 절하되었던 부분을 인터넷이라는 메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요즘 세태에서 인터넷의 자율성이 나이 제한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을 정책이니까,

필자가 제안한 정책이 반드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론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적어도 대안이 나올 수 있는 토론에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끊임없이 생각해내지 않으면, 토론은 끝나기 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토론 중에서도 양극적 관점에서 타결이 되는 토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토론을 하는 중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만큼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득 만큼 상대방의 이득도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가장 간단한 토론의 기본 정신을 망각해서는 토론이 매번 곤란해지지 않을까?, 인터넷 실명제 토론을 바라보면
서 적어도 토론에 참여하며, 상대방의 의견에 상호 반대만을 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그들이 바라는 인터넷의 순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인격 모독을 안하고 있는지, 인터넷의 자율성에 의한 장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라도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해 자신을 국가의 권력으로서 컨트롤해주길 원하기에 그런 논쟁을 벌이고 있는 거라면 적극 말리고 싶다. 이제는 정치인들을 찍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정치인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이 더는 일어나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생명체 인간이 만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개개인을 인정하고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아주 작은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이 귀한 줄 알아야지, 하며 싸우시던 어릴 적 어머니의 말다툼이 문득 떠오른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5. 2. 15. 10:30
우리들은 초등학교 때 배우는 기초 인성학문들 중 얼마나 진실이 있고 얼마나 거짓이 담겨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박정희 정권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하는 정책이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서 민주적이고, 당연히 대통령은 그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박정희가 해야 하는 걸로 배웠으며 간첩 반공은 무조건 때려잡아 바로 사형시켜도 인권에 어긋나지 않는 걸로 알았다. 5공때도 초등학교 교사들에 의해 왜 광주사태가 정당했고, 그들은 왜 빨갱이인지를 수차례 들어오며, 한문 학습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권장하던 조선일보를 읽으며 사회에 대한 편향적인 가치관을 갖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교 때에 생기는 사회 가치관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중학교 입시가 없다는 유일한 장점으로 인해 학과 수업보다는 사회 전반적인 이슈나, 사회 문제등을 중심으로 교사들의 수업이 가끔 이어질 때가 있는데, (중등교육 이상부터는 꿈도 못꾼다. 만일 그런 교사가 있다면 학부모들이 나서서 그 교사의 생명은 끝날 것이다. 황금 같은 수능 예비 공부시간을 쓸데없는 데에 할애한다는 이유로) 이 시간에 교사들은 객관적인 시각으로서 사회 문제를 짚어주고, 학생들이 그들의 눈으로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메스컴을 보고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직설적으로 주입하는 데에 그친다는 점이다. 필자가 지금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많은 가치관 충돌 및 계층간의 갈등의 원인을 바로 이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새어버렸지만, 아무튼 대부분의 가치관 확립과
그나마 인성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이 초등학교때 배우는 사회적 가치관과 규범 등이 실제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은 제법 큰 문제라고 본다.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교과서는 5년마다 개정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5년 전의 국회 모습, 5년 전의 정책을 배울 수도 있고, 교과서를 만들던 시기를 포함한다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으며 실제로 필자는 그것을 실감하며 자라 왔다. 교과서를 집어던지고 도서관의 과거 신문 열람실과 전문자료를 탐독하는게 이해안가는 단어가 많았던 초등학생 신분으로서도 사진의 정확성 측면에서 더 나은 결과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아무튼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도덕적 대표어 중에 필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을 가장 크게 왜곡된 언어로서 봉하고 싶다. 초등학생들은 그 말을 정말 진심으로 믿고 자라나지만, 메스컴에서 연일 벌어지는 각종 비리와 혼탁한 돈 문화들은 그 말에 대한 설득력을 갖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서 가치를 갖고 있는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실제 배우고 자라면서 그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지를 느끼고 반대편으로 튕겨나가는 힘이 직접 던지는 힘보다 더 크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Episode.1
얼마 전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 ‘이
성재’ 씨가 나온 적이 있다. 성에 관련된 에피소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토크쇼 형태의 프로그램에서 그는 솔직담백한 언동으로 출연자들에게 큰 공감과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여성 출연자가 자신과 관련된 에로비디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자, 문득 이성재씨가 끼어들며 한마디를 던진다.
- 에로가 나쁘니? -
그 프로그램은 심야 프로그램이었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타킷을 던진 프로그램이 아니며 출연진 역시 갓 20대를 넘긴 것도 아닌 20대 중반 이상으로 출연진을 꾸린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이성재씨의 저런 주장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으며 엄밀히 따지면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출연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위트로서 받아들이고 폭소를 터뜨린다. 그 폭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사회적 통념에 묶여 있던 끈을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해줌과 동시에 전혀 속박되어 살고 있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이성재씨에 대한 무언의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복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아이들을 길러내는 수 많은 부모들과 그 아이들의 첫 번째 스승이 되어줄 우리나라 수많은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제발 부탁이니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눈에 자신의 시각을 대입시켜서 역으로 색안경을 끼우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들이 보는 세상은 분명 당신들이 보는 세상과 다르다. 뉴스에서 도둑이 남의 집 물건을 털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그 도둑질이 나쁘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십중팔구 아이들은 되묻는다 ‘도둑질이 왜 나쁘죠?’라고 그럼 십중팔구 부모들은 말한다 ‘부모들이 나쁘다면 나쁜거야!’ 라고, 자 그럼 그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가 되어서 9시 뉴스를 보고 정치인들이 세금 도둑질을 하고서도 면책 특권을 통해 사면 복직하고, 국민들은 그 사람에게 정치 잘했다고 재선으로서 다시금 국회의원직을 안겨주는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같은 도둑질임에도, 수십억을 착복한 사람들은 도둑질이라는 천박한 단어가 아닌 착복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는 이유
로 조금도 처벌받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재력 앞에 그들에게 온갖 위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생계가 어려워 아이들 분유값을 위해 몇만원을 절도한 일당에게는 도둑놈이라며 온갖 나쁜놈이라는 나쁜 놈 단어는 다 가져다 붙이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어떻게 느낄 것인가? 굳이 이렇게 먼 예를 들지 않아도, 자신보다 집안이 더 좋고 선생님의 아들이 시험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유출시켜 성적이 잘 나와 좋은 대학에 가고, 자신이 의사가 되고 싶은데, 자신보다 훨씬 낮은 성적의 아이가 아버지가 의사라는 이유로 자신을 누르고 의대에 합격한다면 그런 일을 겪게 되는 아이들은 우선적으로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던, 직업의 귀천에 대한 자신들의 가치관부터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게 아닌데, 선생님은 분명 저 국회의원들과 일반인들과 같은 직위로서 평등하다고 했는데 왜 저들은 잘 살고 있는 거지? 왜 그럴까?, 수 많은 호기심에 휩싸여 있지만 중고등학교때 사회 인성 교육을 해주는 선생님이나 학부모는 없다. 오로지 6년간 대학입시를 위해 그러한 생각은 ‘잡생각’이라는 것으로 치부되어 잠시동안 잠재 시켜 두어야 하는 쓸데없는 것들일 뿐이다.

Episode.2
필자가 초등학교시절 학생들에게 직업에 대한 귀천을 어떻게 생각하
냐는 것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키면서 ‘귀천이 있다’ 라고 말하는 학생들에게는 교실 전체 학생들의 이상한 시선을 받게 하고, 교사가 마치 거짓 진술을 한 죄인을 다루듯이 계속적으로 학생을 추궁하여 결국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것을 거의 반강제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교사에게 필자의 발표 시간을 이용하여 약 3분여동안 어째서 귀천이 없는지에 대한 설명을 교사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필자의 기대와는 달리 교사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옛날 관료주의시대때는 직업의 귀천이 있었지만 지금은 현대이며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귀천이 없다’ 라고 말한다. 항상 이런 말 뒤에 붙은 흔한 질문들이 필자 뒤로 계속 이어진다. ‘그럼 대통령도 우리랑 같이 평등한 직위인가요?’, ‘국회의원은요?’, ‘장관은요?’, ‘할아버지는요?’ … 생각해보면 참 순수한 발상이다. 교사는 모두 다 평등하다는 말을 웃으며 학생들에게 전한다. 물론 이후에도 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모든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말라는 도덕적 당부도 잊지 않는다. 아이들의 웅성거림과 교실 분위기의 위압감으로 인해 필자의 두 번째 질문 ‘그럼 어째서 선생님은 주임 선생님을 그렇게 무서워하죠?’라는 소리는 목구멍에서 채 나오지 못했다.

아이들은 반항기를 겪으면서 비뚤어진다고 하지만 반항기에 대한 정
의를 필자는 다소 다르게 내리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춘기가 시작되고 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 정말 순수하게 확립이 되지만, 자신이 배웠던 그 아름답고 깨끗하고 정직한 사회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좌절하기 때문에 그 좌절감과 세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느끼는 비관적 사고, 그리고 불만요소들이 인성이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표출이 되는 것을 실상은 전혀 다름에도 우리는 사춘기의 반항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무서운 10대들의 범죄행각이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하는 부분인데, 필자가 감히 주장하지만, 절대 사춘기의 반항은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반항 심리는 실제로 찻잔 속의 태풍이다. 자신이 성장하면서 자신이 인격적으로 성장했음을 남자라면 아버지, 여자라면 어머니에게 보여주는 정도에 그친다. 여기에는 그 당시 항상 있게 되는 진로상담 같은 부모와의 대화에서도 충분히 촉발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것이 가정의 관리 소흘로 사회 문제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물론 관리 소흘이야 있겠지만, 에초부터 가정에 책임을 돌리기 이전에, 당신들이 사회에 대한 얼마나 큰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주었고, 그리고 그 가치관에 맞는 사회를 보여주었는지 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진정 세상은 살기 아름다운 세상인지, 자식 서랍에서 에로 비디오를 빼앗으면서 자식을 두드려 패면서 왜 에로가 나쁜지, 실질적인 부분을 얼마만큼 현실적으로 가르쳐 주었는지를 말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은 어른들의 이중적 행태와 그 어른들이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추악한 뒷모습에 직설적으로 대립할 뿐이다. 아이들에게만큼은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런 세상을 너무 빨리 알게 됨으로서 일어나는 부작용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진정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가르치는건지 아니면 어른으로서 자신만은 그런 세상에서 자신만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위선인지는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지금 가는 길이 멋진 낙원이라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멋진 낙원이 펼쳐질 거라고, 거짓말을 해주는 것이 결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던 그곳이 낙원이 아닐 때 자신들에게 그렇게 가르쳐 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이중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큰 배신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의도대로 정말 아이들이 밝은 세상만을 보며 진심으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청년 실업자들이 자신의 백수라는 직업에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끼고 아파트 옥상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지를 한번 대답해보라는 거다.

직업에 대한 가치관을 굳이 귀하고 천하다는 두 가지 극단적 성향으
로 보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그 두 가지로 큰 대분류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업이 있는지, 그리고 그 직업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떠한 이상적인 가치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지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 초등학생들 어느 누구에게나 되고 싶은 직업을 물어보면, 대부분 의사, 선생님 등 부모들이 강요하는 학벌주의와 사회에서 좀 더 대접받는 직업들만이 잔뜩 나오는데 이래서는 곤란하다. 여기에서는 소질이 있고 없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마냥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라고 가르치는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필자가 보기에 과히 추천할만한 직업은 못 된다. 돈은 많이 벌 수 있을지 모르고, 그 만큼 사회적 지위가 높을지도 모르겠지만, 진정 자신이 그 일로서 얼마만큼의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인생 중후반기에 가서 그 직업에 대한 얼마만큼의 회의감을 가질 수 있는지, 그런 세세한 부분을 알고 있지 않으면서 자식에게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했던 부분을 모두 무시하고 사회적으로 보여지고 동경하는 부분만을 강요한다면, 그건 크나큰 모순이다. ‘의사는 돈 잘 벌고 좋은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니까 넌 의사가 되어야 해!’ 가 아니라 ‘의사는 자신이 사명감을 갖지 않은 이상 사람이 죽어 나가는 스트레스와 자신이 생명을 다룬다는 생명존중적 사고가 필요하며 생명이 죽어나갈때의 죄책감과 스트레스, 과로가 수반되기 때문에 수명이 짧아질 수도 있다. 성형외과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돈만 알게 되면 특히나 성형외과처럼 가식적인 부분의 온
상이 되는 직업은 더욱 사람이 진실해지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라는 식으로 직업 하나 하나에 대해서 보다 현실적으로 높은 판단을 할 수 있을 객관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수백번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아이들에게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 쉬울 것이며 나중에 성장한 이후에도 그 생각이 별로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모든 직업들이 전부 장단점이 있으니까, 지금처럼 많은 서민들이 ‘재벌은 나쁜 놈’ 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재벌은 재벌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재벌은 절대 때려죽여도 서민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정과, 정약결혼으로 인한 진정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는 인생을 겪게 된다. 그 가치는 어느 쪽이 크다고 할 수 없다. 최근 잘 알려진 탤런트 고현정의 이혼 사례를 보면 많은 여성들의 신데렐라 컴플랙스가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은 욕심이 많지만, 이 세상에 어떤 인생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의 선택에서 어떤 인생이 보다 더 재미있고 보다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지를 선택할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그 아이가 평생 백수로 살게 되더라도, 백수로 살면서 다른 직장인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유롭게 사회를 보는 발상과 백수만이 가질 수 있는 자
유로운 여행, 틀에 박힌 삶이 아닌 자기 주관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준다면 과연 백수가 나쁜 직업일까? 백수가 무조건 나쁜 직업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그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어째서 사회가 멋대로 정한 규범으로 귀천을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만들어가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통념에 휘둘려 구애 받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지금의 가질 수 있는 직업, 거지가 될 수도 있고, 노숙자가 될 수도 있고, 백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현재 위치에 대해서 결코 부끄럽거나 남들보다 손해보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백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그것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을 찾으면 백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결코 흉이 될 리는 없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15년동안 TV만 보는 백수생활을 했지만, 그가 과연 흔히 사회에서 경고하듯 말하는 인생 폐인이 되어있던가? 그는 TV를 통해 지식이 누구보다 많아졌고, TV에서 나오는 무술을 보면서 자신의 무예를 닦아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싸움 실력과 운동 실력을 익혔다. 작문 실력도 그가 15년동안 갇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잘 다듬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다 정확히 직시하자, 그리고 그 가치를 한쪽으로 폄하시켜서 과도하게 어느 한쪽을 높게 매기지 말자, 의사와 국회의원들은 돈과 명예를 얻었지만, 콘솔 게임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 게임을 하면서 백수들이 느끼는 그런 감정을 평생 느끼지 못하고 항상 스트레스만 받다가 인생을 끝마칠수도 있다, 얼마나 억울해보이는가? 그들은 이 재미있는 게임의 재미를 자기만큼도 못 느끼고 죽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재미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스트레스만 받다가 죽는가? 물론 돈을 많이 벌겠지만, 돈을 많이 버는 만큼 그것을 쓰는데 그 쓰는 것으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고작 하는 인생의 재미라는게 룸싸롱에 가서 호스티스들을 성적으로 괴롭히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게임에서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돈으로 살수 있겠는가? 그들이 돈을 아무리 써 본 들 당신들이 백수로서 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다시금 같은 기분
으로 해 볼 수 있겠는가? 절대 무리다. 자신이 가진 부분을 돈에 가치보다 낮게 판단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어떤 직업이든 간에 다른 누구보다 어떤 것을 많이 가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덜 가진 것도 분명 있다. 지금 추앙받는 수많은 귀한 직업들이 좋은 것만 잔뜩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게 절대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보자, 누구나 백수가 될 수 있고, 언제 그들이 돈을 많이 버는 레벨크로스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하느님이 대홍수를 일으켰을 때 많은 동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노아의 방주에 올라탔지만, 방주에 올라타지 못했다고 해서 불행할 필요는 없고, 자신이 보다 떳떳해지며 오히려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는 용기 없는 사람들을 한껏 비웃으며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길 권해 본다. 누구도 태어날때부터 귀한 직업은 아니며, 죽은 후에까지 귀하게 대접받는 직업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5. 1. 20. 22:20
이 작품을 보기 전에 필자가 생각했던 것은, ‘과연 미야자키가 이 작품을 얼마나 손댔을까?’하는 단순한 의문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 카피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3년’이라고 써 놓았지만, 사실 고양이의 보은에서도 홍보할 때 단지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리타 히로유키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마케팅에 더 많이 써먹었던 전력(?)이 있는 배급사이기 때문에, 실제로 미야자키씨의 근황에 대해서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터라 별다른 선입견 없이 편하게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오해...
미야자키 감독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옛날 할머니가 전해
주시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던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그런 분위기가 풀풀 풍겨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의 지난 글에 있는 미야자키에 대한 언급에도 나와있듯이 그가 진정 만들고 싶었고 그의 색깔이 가득 담겨있는 작품은 다름아닌 97년작 모노노케 히메부터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그의 작품을 꾸준히 보아 온 사람들이라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평성너구리전쟁 폼포코, 붉은 돼지에서도 충분히 그가 표현하고 싶은 키워드를 읽을 수 있었겠지만, 진정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표현한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였다고 본인 스스로가 밝혔던 전례가 있고, 결과적으로 번복한 셈이 되었지만 그 작품 발표 직후 마지막 작품으로서 은퇴를 발표하기도 했던 만큼 그의 작품 세계관은 최근에 들어서야 그의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왜 은퇴를 번복했을까? 이미 그가 은퇴를 선언한지도 8년이 다 되어가는데 은퇴작이라 공언했던 모노노케 히메 이후 공식적으로 작품이 두 개나 더 나왔다. 그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은퇴를 만류했나? 답은 의외로 쉽다. 필자의 지난 오세암 포스트에서도 언급했듯 애니메이터들은 보통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좋게 말해서 실험적인 작품)의 경우는 흥행성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미야자키도 모노노케 히메 개봉 전 인터뷰에서 그러한 점을 충분히 강조하며 본인은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관객들은 언제나 제작자의 생각과 반대로 움직인다고 누군가가 말했듯,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의 극장판 작품 중 첫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게 되는데, 의미상으로 당시 전세계적인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타이타닉과의 흥행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거두자 이래적으로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미야자키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건 국제적 수상을 거두기 시작한 것도 모노노케 히메 이후부터라는 점인데, 미야자키는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 대중성, 작품성으로서 크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 후로, 은퇴를 번복하고 제 2의 제작자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은 듯 이전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특별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하 하울)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두고 미야자키의 본래 작품관이 훼손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랬으니까...

과연...
명예가 크게 실추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은퇴를 번복하게 만들 만큼 그에게는 아직 그의 애니메이션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게다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니 그
자신감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으리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작품관으로서 그것이 인정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특히나 데즈카 오사무를 바라보며 그에게 가장 큰 반감을 가진 채로 성장해왔던 애니메이터 미야자키에게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노노케 히메 이후의 작품들부터는 대중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작품성의 초점을 작품 자체가 아닌 미야자키 본인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광고 카피에서 나왔듯 베니스 영화제가 원래 김기덕 감독의 ‘빈 집’에 감독상을 준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대중적인 흥행성보다는 감독이 말하는 작품의 키워드를 잘 이해한 후 작품성을 평가하는 평가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딱히 수상이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을까? 하울...은 미야자키의 그 어떤 작품보다 미야자키다운 작품으로서 세상에 공개되었고, 그 부분을 감수하고 본다면 충분히 키워드 전달에 있어서 매우 이상적인 작품으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들이 대부분 평론가들의 ‘밥’이 되곤 하는데, 그만큼 평가가 다양해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의 결론이 나오게끔 만들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작품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각종 장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실로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직 사람들은 미야자키를 잘 몰랐으니까, 아니 그 전에 미야자키가 착각을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

착각...
그렇다고 미야자키가 어떤 분의 말처럼 갑자기 ‘오시이 마모루’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시이 마모루가 처음부터 자기 생각대로 작품을 만들어 오면서도 비주얼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자신의 키워드를 사람들로 하여금 읽을 수 있도록 작품 활동을 펼쳤다면 미야자키는 비
주얼의 아름다움보다는 비단 자신의 키워드와 맞지 않더라도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 형식에 자신의 키워드를 느낄 듯 느끼지 못할 듯하게 섞어 내놓았다. 마치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오시이 마모루는 시각적인 부분을 강조한 순수 양식 요리를 내놓았다면, 미야자키는 한국식 굴비구이를 내놓으면서 스리슬쩍 일본식 고추냉이를 함께 내온 격, 사실 오시이 마모루의 경우는 필자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두 감독의 현재까지의 행보에 대해서 섣불리 어느 쪽이 잘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 해도 공각기동대로 대표되는 오시이 마모루의 키워드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적극적인 매니아층과 이번 작품 ‘하울’의 모든 키워드를 이해할 수 있는 미야자키 골수팬의 수는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에 하고 싶은 키워드를 담아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애니메이터 인생을 걸만큼 값진 일이겠지만, 한편으로 그 값어치만큼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꽤나 회의적인 부분일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들이 평론가들로 하여금 ‘제멋대로식’의 키워드 해석을 낳았듯이 ‘하울’도 이제는 미야자키식의 키워드를 읽어보는 재미를 즐겨보면 어떨지 싶다, 필자도 미야자키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하울’을 보고 이후 수많은 감상문을 보면서 필자의 생각과 많이 다른 해석을 내놓으시는 분들이 많았기에 굳이 필자의 해석이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읽을 거리 정도로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이후부터는 필자의 키워드 분석이므로 내용 누설이 치명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내용누설 주의보는 여기까지입니다. 클릭만 안하시면 괜찮습니다.

갓길...
많은 사람들이 하울…을 비판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캐릭터의 성장 과정을 담아서 좀 더 깊은 감동을 이끌어낸다든지, 마법의 세계관을 좀 더 심오하게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생각을 갖게끔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캐릭터성을 살려서 훌륭한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미야자키 본인이 너무 기고만장한 나머지 ‘이래도 볼거냐!’라는 식으로 던져놓고 관객들을 우롱했다는 등의 평가가 많았다. 항간에는, 최악의 졸작을 만회하려면 빨리 차기작을 내놓은 후에 은퇴하라 라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실망감이 그가 이전에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와 지지율만큼 대단한 듯 한데. 사실 쓰신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필자는 그 감상문들을 읽으면서 조금 웃었다. 새로운 것, 새로운 것 항상 주문을 외우듯이 그것을 찾으면서도 정작 가장 큰 범주 내에서의 새로운 것에는 베타적이고 지독한 보수성을 보이는 사람들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의 의도와는 다르게 많은 관객들은 결과적으로 월트디즈니가 만들어 놓은 가장 큰 틀 안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작품’을 추구하려 했고 그것에 부합되지 않으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작곡을 예로 들자면 이미 만들어놓은 드럼 베이스 내에서 이미 만들어진 장르의 형태 (록이라든지 R&B, 발라드 등) 내의 규칙에 부합하여 만든 곡들도 물론 창작곡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에 부합하지 않은 새로운 음악의 형태가 비교대상격인 인기장르를 기준으로 삼을 때 음악적 흐름이 지저분하다든지, 음악적 운율이 살지 않는다든지 하는 비판을 하는 것과 같은 이
치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서 창작자의 눈을 버리고 보아야만 한다. 나라면 저렇게 안 만들고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더 재미 있을 텐데, 라는 평가는 평가가 아니라 창작 간섭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창작자로서의 비판이 아닌 관객으로서의 비판을 해줬으면 한다. 전문가 비평이라는 타이틀은 깊이 있고 보다 일반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함께 직시해주는 날카로운 부분임에 분명하지만 커다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넓은 범주의 시각만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니까, 요리는 맛보는 사람마다 맛이 다르고 미식가들이라고 싫어하는 요리가 없는 것도 아니며, 요리의 대가들은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맛 이외의 맛은 전부 맛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게 실제 요식업계에서 일어나는 우물 안 행태이지 않는가, 진정 새로운 맛과, 새로운 볼거리를 찾고 싶다면 보는 사람들이 생각의 넓이를 보다 넓히고 실질적인 고정관념이 없는 눈으로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해외 여행을 다니면서 현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서둘러 김치봉지를 꺼낸다면 그 순간 당신은 반쪽 여행을 한 셈이나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1. 28. 02:33
잠깐!!
꽤 어처구니 없는 논쟁으로 홍역을 치른 작품이라는 것 이외에는 이 작품에 대해서 필자가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후기에 흔히 말하는 내용 누설 (예 :스포일러, 네타바레) 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필자의 후기 작성 모토이기도 하다.

누구냐!?
지난 여름 SICAF를 다녀오고 난 뒤에 발표된 국내 신작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가했던 비판과 관련해서 아주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다름아닌 윤인완,양경일 원작의 신 암행어사 (당시에는 애니메이션이 아직 논의되기 이전이었다)가 역사를 왜곡하고 위인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킨다는 의견으로 촉발된 이 논쟁은 결국 미결의 논쟁으로 남았고, 필자도 원작을 보지 않은 관계로 논쟁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그래왔듯 고전적인 캐릭터의 재창조와 새로운 스토리에 의한 스토리 재구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환영할 만한 매우 고무적인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논쟁이 어떤 생각과 관점에서 그러한 논쟁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극장판을 감상한 후에도 오히려 좀 더 과감한 수준에서 개연성을 보여주지 못함에 실망했을 뿐, 그 시도와 충분한 결과로서 이어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으로 본다.
흔히 게임, 애니메이션 등 문화컨텐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공공의 적으
로 ‘영등위’와 ‘YWCA’를 거론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이 그들의 생각 범위 내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창작자들이 괴로워하는 부분은 영등위나 YWCA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유저들의 예측할 수 없는 뒤통수치기가 원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만의 마인드를 갖지 못하고 이리 저리 휩쓸리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기에 문화계의 여론은 제주도의 유채꽃처럼 사방 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것 같다. 극장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인공의 이름이 실제 들었던 위인들의 이미지와 다르다는 점을 일일히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극장에서는 조용히 해야한다. (…)

어떻게!?
필자의 관점상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새로운 시도로서 진정한
창작물을 완성시켰다는 것, 극장판에서도 여실히 그들만의 색깔이 느껴지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고, 웅성거리게 만들고, 동요를 일으켰다는 점, 관객 수에 관계없이 많은 관객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는 점, 아직 완결이 되지 않은 원작의 스토리를 무리하게 짧은 시간에 담으려 하지 않고 적절한 결말로서 극장판만의 스토리를 마무리 지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실제로 원작 스토리를 맡은 윤인완이 이번 극장판 연출과, 제작에 얼마만큼 감수하고 참여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지금까지의 극장판 제작에서 가장 어렵고, 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 왔던 ‘스토리의 봉합’을 비교적 이상적으로 처리했다는 부분만큼은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관람 전부터 기대했던 오오타니 코우의 음악도 역시 기대한 대로 자신
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작품의 분위기를 보다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다. 오오타니 특유의 전투화면의 긴박함과 그렇지 않을 때의 음악적 완급 조절 능력은 이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튀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영상에 동화될 수 있는 음악으로 작품의 무게감을 보다 깊이있게 만들어주었다. 거기에 보는 내내 필자의 눈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던 OLM만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배경 작화, 이미 Figure17에서 그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었던 특유의 수채화풍 배경 작화는 다소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디지털 난무 효과 속에서도 충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별히 흠잡을 데 없는 캐릭터디자인과, 자칫 소흘해 질 수 있는 총기 등의 소품 디자인까지, 겉껍데기만으로 치장한 원더풀데이즈의 실패를 곱씹지 않으려는 듯, 그렇게 신 암행어사는 보는 이를 작품 속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어째서!?
솔직히 시무라 조지 감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어째서 이 사
람이 감독을 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이 든다. 제작상에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이 감독이 되었는지도, 얼마만큼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제작팀에서의 감독의 입지와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이 작품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스텝들을 무난히 이끌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프로중의 프로들이 모여 만든 작품이 보여 줄 수 있는 파괴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지만, 신 암행어사는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저한계선을 간신히 지키는 선에서 가치창조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어 필자로서는 굉장히 입맛이 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원더풀데이즈에서 드러났던 것과는 정 반대의 현상인데, 시무라 조지 감독 본인이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다소 부족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작품 전체적으로 느껴진다. 원더풀데이즈가 감독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과해서 작품을 무너뜨렸다면 이쪽은 그것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느낌, 물론 기우이며 필자만의 시점으로 본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비슷한 케이스로 최악의 스토리라인을 가진 지구소녀 아르주나를 제작진의 역량과 칸노 요코의 음악으로 평균 이상의 작품으로 그 가치를 끌어올렸던 것처럼, 신 암행어사도 무언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아래로 처지는 것을 간신히 끌어올려 정상 궤도로 진입시키려는 노력으로 완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다소는 쓸데없을 수도 있는 생각이 작품을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해외 진출한 운동선수 경기를 TV중계할 때라도 들어가는 자막만큼은 한국에서 따
로 만들어 로컬라이징에 최선을 다하는데 반해 신 암행어사는 판권이 일본으로 가 있고, 원작자 윤인완의 작품 활동 무대도 일본이라는 것은 자처하고서라도 지나치게 국내 로컬라이징에 성의가 없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순수 일본 제작 애니메이션이 들어와도 이 정도까지 성의를 느끼지 못할 만큼은 아닐텐데... 특별히 일본쪽 이권을 가진 업체들이 이것 저것 요구를 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대부분 손을 대야 할 부분을 배급사가 손을 대지 않았으며, 보컬 가수의 캐스팅과 테마곡 선정에도 워낙 얽혀 있는 업체가 많아서 그런지,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가장 크게 느껴졌던 부분은 믹싱, 성우의 연기 부분과 배경음악의 톤이 너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탓에 작품을 몰입하는 데에 있어 효과음과 성우의 연기 속에서 음악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어 작품 몰입과 흐름 파악에 나쁜 영향을 끼칠 정도로 심각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작품 사운드를 리샘플링하는데에 있어 자신들이 직접 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성우의 연기와 그 외적 요소들의 이질감은 맞지 않는 테트리스처럼 감상 내내 필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뭘 했지!?
평소에 필자는 국내 3D 애니메이션 업계를 보면서, (어디 3D 게임에
나 나올 법한 3D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서 그게 과연 팔릴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신 암행어사에서 너무 쉽게 드러나고 말았다. 많은 관객들은 그래도 3D 애니메이션만큼은 한국이 꽉 잡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겠지만, 스텝롤에서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쪽 3D애니메이션 제작진과 수많은 일본 3D 애니메이션 외주 제작진들의 명단을 보면서, 괜시리 허탈감이 느껴졌다. 3D를 완전히 2D와 다른 분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인식이 무척 아쉽기도 하고, 결국 실용적인 부분에서 우리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는 사실에 슬퍼지기도 했다. 3D로서 자신들만의 색깔을 강하게 추구하는 미국, 2D의 문화 가치를 더 높게 생각하는 일본에 비해 2D와 3D의 차이에만 신경 썼던 우리나라가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2D와 3D는 기술적인 처리방식만 다를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리얼리티를 띈다고 해도 인간에 가까워지려면 앞으로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진짜 인간 같은 그림이
나와서 움직이는 영화를 만들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면 파이날 판타지 더 무비는 벌써 스테디 셀러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실제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3D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 기술적인 부분에만 급급했던 우리나라는 결국 실제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에서 활용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고려 청자에다가 밥을 비벼먹을 수는 없었을 테니...
결국 윤인완의 원작을 제외하면 한일합작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작품이 되어버린 신 암행어사, 대한민국이 가장 자신있어했던 3D 분야가 괴멸하면서 정작 이제는 제대로 된 원작이 있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 문화계를 지원한답시고 TV에서 보고 들은 한류 열풍처럼, 남이 비벼놓은 밥을 떠먹여주기만 줄기차게 기다리는 한국 문화계 수뇌부들의 바보짓은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겠다.

시끄러!
전주비빔밥에는 약 20가지의 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어떤 재료가 맛
있고 어떤 재료가 맛없다고 해서 한 가지 재료가 다른 재료보다 많이 들어간다면 전주비빔밥의 맛은 사라진다. 무조건 20가지 재료를 밥과 섞는 다른 형태의 음식이 전주비빔밥과 같은 조리법으로 조리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전주비빔밥의 오묘한 맛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하물며 전주에서만 나는 나물과 고기를 쓰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똑 같은 비빔밥이라도 전주비빔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 아니던가, 오리지널리티라는 건 이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 속에서 신 암행어사라는 새로운 맛으로 기존 암행어사 박문수, 이몽룡의 고전을 완전히 잊게 해 줄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이 작품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준 셈이고, 적어도 필자에게는 충분히 이 작품으로서 일종의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미 소재의 바닥을 드러낸 일본에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우리 고전을 새로운 시각에 맞게 재구성하여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한다면 비단 우리나라가 메인프로듀스에서 주도권을 잃더라도 문화 컨텐츠의 세계적 흐름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주체로서 활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완전히 메인프로듀스쪽에서 손을 놓는 건 좋지 않다. 쌀 개방에 맞서는 농민들의 주장이 ‘최소한의 식량 자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라는 이유가 있듯이 문화, 애니메이션계에도 남의 도움 없이 우리들끼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는 일종의 자생력 정도는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신 암행어사처럼 거의 모든 부분을 포기하고 프리프로듀스만을 자급하는 형태가 계속된다면 이전 우리나라의 메인프로듀스쪽으로 급격하게 추가 기울어진 반쪽 세계 3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FTA가 되어 수입채소가 들어와도 김치는 역시 강원도 배추로 담아야 제맛이고, 전주에서 나는 나물로 비빈 진짜 전주비빔밥이 더 맛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피자가 맛있어도 피자 치즈로 밥을 비벼먹지는 말자, 아 참, 고려청자에는 더더욱 …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1. 7. 03:38
대한민국에서는 애들을 가르칠 때 1등을 하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흔히 이 두 가지 육아방식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곤 한다. 부모들에게 과연 저 1등이 어떤 1등을 말하는 것인지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은 ‘공부’일 것이고, 일본의 ‘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본다면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게끔 하는 예절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대신 할 수 있을 텐데, 언뜻 극단적으로 빗나가 보이지만, 이 둘은 가치관적으로 ‘개성’ 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무시당하면서 자라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차후 성장교육에 따른 결과가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개성이라는 것이 장점으로서 인정받는 세상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션, 외모로서의 개성이 개성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논해지는 개성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은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약간의 일탈 정도를 개성으로서 인정할 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범위를 벗어나면 개성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 된다. 이러한 분류법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며, 다수권력으로 인한 소수무시 현상이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개성을 논하고 개성을 추앙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라는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진정한 ‘개성’에 얼마나 익숙해 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의상, 외모, 해어스타일 등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진정한 개성일까? 그렇다면 세계 오지에 있는 마오리족의 짐승 관절뼈를 이용하여 코뼈를 뚫어 꿰어 장식을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 이미 아프리카쪽은 하도 메스컴에 많이 나와서 무뎌졌다고 치고, ‘뉴기니’ 쪽에 있는 입술 늘리기 종족이라든지, 목 늘리기 종족들이 과연 실제로 ‘신기함’을 넘어서 우리가 흔히 연예인으로서 추앙할 수 있는 진정한 ‘개성’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지금 한창 인기를 얻는 가수 ‘비’가 입술의 표면적이 30cm이상 늘어나는 장식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으며 ‘개성파’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편견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제로 속으로는 전혀 ‘평범함’에 벗어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아량이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세상의 편견이 사라지고 개성이 존중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너무나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단지 보기 좋은 개성만이 개성이고, 인간 본질이 아닌 인간을 덮고 있는 부차적인 차이를 개성이라 한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과, 신체적 차이를 보이면,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갖거나, 마치 종교계처럼 남의 생각을 잘못된 것이라 치부하며 부정하기에 바쁘다. 진짜 개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어째서 지역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권은 색깔론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가수 팬클럽끼리 싸우고, 문화 심의라는 잣대로 즐길 권리가 필터링되고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여성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설문해본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내용 중, ‘자신이 임신하고 있는 아이가 신체적 기형아라는 것
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설문에 대한 결과가 있었는데, 설문 참여자 중 과반수 이상이 ‘낙태’를 생각하며 나머지 의견 중에서도 ‘운명, 혹은 의무감으로 키운다’라는 등의 의견이 대다수, 별 생각 없이 그냥 키운다는 의견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나서 사회에서 받을 차별과 불행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불행을 겪을 바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이를 위해 좋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고, 다소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전생에 지은 죄’라고 생각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부모들 중 진심으로 ‘아이가 살아가며 느낄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필자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겉모습 속에는 ‘자식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은 본인들’이라는 생각이 앞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자식이 다른 사람들과 태어나는 조건이 다르다고 해서 특별히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어차피 주어진 조건에 적응해 살아간다는 조건에 있어서 태아에게는 비교적 공평한 조건이 부여되는 것일 테니까, 특별히 태아로서 열등감을 느낄 여유따위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부모는 다르다. 부모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자식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이유로 쉽게 낙태를 결정하지만, 속으로는 일반적인 사람의 형태와 다른 자식을 키우며, 사회의 평균적이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고, 또한 두려웠을 것이다.

즉 태아는 태어날 때의 부여 받은 조건을 스스로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비관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자라나
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비관적이라 느끼게 되는 것이 맞다. 다시 말해 부모들이 흔히 기형아 낙태에 대한 의견으로 말하는 ‘자식을 위해’, ‘의무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라는 말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그저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하다. 필자의 이런 의견에 엄청나게 반발할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반발을 하기 이전에, 장애아 출산에 대한 경험을 해볼 확률이 높지 않은 이상 그것을 체험으로서 이해하기는 힘들고 그냥 한번쯤 자신이 장애아의 부모가 된다는 가정 하에 이 문제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똑똑히 생각해보라. 당신들은 일반적인 정상아를 키우면서 겪는 고생보다 비정상아를 키우는 고생이 더 힘들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낙태 혹은, 숙명, 의무감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말이다. 부모들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단어 ‘정상’, 그들은 남들, 그리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형태에 반하는 생김새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부모들이 똑같이 겪는 고생보다 더 한 육아고통을 더 받는 것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과 인생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진정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일말의 망
설임이 있을 리가 없다. 의무감, 운명 같은 구차한 변명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으며, 장애우로서 고통받는 생활의 불편함보다,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잃고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 더욱 큰 불행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이 키우는 동안, 즉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 태아의 나이가 30대를 넘기기 전에 죽는 부모를 보기는 드물 뿐더러, 굳이 이유를 들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부모들에게는 절대 자식이 가질 비관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오히려 자식이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그리고 보다 한층 더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아이를 보다 사랑으로 감싸며 키워낼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낙태를 택하는 수많은 부부들이여, 단지 본인들을 위한 판단을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덧칠하지 마라, 당신들은 이미 ‘정상인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짐과 동시에 그 아이가 가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특별한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당신들은 아이가 장성하여 세상의 차별을 받을 것을 겁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가 일반적이지 못한 육아고통으로 점철될 것과, 자신들이 일반적인 인간의 형태가 아닌 자식을 키운다는 세상의 편견을 견디어 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두려웠다면 에초에 태어날 것을 이미 포기했을 것인데, 당신들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이 넘칠 정도로 충만한 상태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 증거로 잘 될 장군감 아이는 울음소리도 우렁차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우렁차게 울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는데 부모들 스스로 세상에 대해서 그 아이를 가진 자격에 대한 겁을 집어먹지 마라, 아이는 태어나면서 큰 울음소리로 ‘부모님, 저는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나갈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만일 태어나면서 말을 못하는 성대이상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그 아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 어떤 아이보다 우렁찬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명 들릴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태어날 아이를 축복으로 맞아들이자, 모든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도 축복 받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한글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생겼을 법한, 아니면 최근 일본문화개방의 영향으로 생겼는지도 모를 일본어를 그대로 직역한 듯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중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라는 표현이다. 자신과 다르고, 다수의 형태를 가진 인간의 형태와 다른 행동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단지 겉에 걸치는 치장을 개성의 전부로서 치부하고, 진정 절대다수의 형태와 다른 ‘개성’이라 추켜세워주어야 할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평범과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것이 지금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 선천적 장애아, 혹은 동성연애자, 트랜스젠더 그리고 평범함을 거부하고 진정 다른 파격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칭해 주었던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집어치워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고교를 자퇴하거나 혹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길을 소신있게 택하는 인터넷 만화가, 비주류 애니메이터, 아마추어 게임제작자, 독립영화감독, 등 사회에서 커리어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부심과 꿈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그들을 사회의 이단아, 혹은 사회 부적응자 따위로 부르기에는 그들의 열정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제 그들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보는 건 어떨까?, 남들과 다른 그것이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될 수는 없어도 남에게 없는 그 무언가를 가졌다는 가치에 대한 자부심,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존중으로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그 존중을 자신이 수혜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1. 1. 19:16
흔히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하지만, 필자는 그 스승이라는 단어에 심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스승은 교사, 강사와는 분명 다른 표현이며, 그냥 지식이 많아서 가질 수 있는 칭호는 절대 아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나라 교사들이 듣기 원하는 대로 아무 의미없이 그들이 불러달라는 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짜 사심 없는 학생을 위한 교육을 해도 스승이라는 칭호가 나가기가 힘든데 지금 하는 짓들이 정말 학생들을 위한 짓들인지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다니는 어처구니없는 지식인들의 기침 한 번으로 좌지우지될만큼 교육이 무게감 없는 돈 잔치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나라가 불황이니까 슬슬 삐걱거리던 부분이 하루에도 몇 개씩 망가지
기 시작하는데, 그걸 고치는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기계가 삐걱거리면 기름치면 끝이지만, 인간이 삐걱거리는데는 약도 뭐도 없는 게 사실이다. 이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라지만 세상이 아무리 추악해도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그런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을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인재로서 가르쳐야 할 교육계가 하는 작태가 이지경이니 이미 교육계의 휘하를 한참 벗어난 필자이지만, 그것을 한참 떠나서 이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꿈과 미래를 볼모로 유치한 싸움을 진행중인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어째서 교육자,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정부가 저다지도 현 실정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저렇게 매번 대립하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어째 저들은 20년을 넘게 싸워도 합의점을 못 찾는지, 인간성을 떠나서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지금까지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친다고 으스대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현안으로 대립하고 있는 문제점이 그렇게 해결이 힘든 문제인지
를 우선 곰곰히 뜯어보자, 지금 크게 두 가지 현안으로 교육계는 싸움터가 되고 있는데,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나는, 고교 평준화에 따라 학생 선발 방식에서 변별력을 갖지 못한 자료로서 선발이 어려워진 학교들이 암묵적으로 자행해온 고교 등급제 적용에 따른 국정감사 적발 사건, 다른 하나가 지금 한창 시끄러운 사립학교법 개정이다. 뉴스, 그리고 각종 언론에서 이 두 가지를 하도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고 첨예하게 두 의견이 대립해서 뭐 하나 새로운 대안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정말 저게 그렇게 해결이 힘든 일인가? 하고 새로운 관점보다는 그 두 가지 입장 중 한 쪽 편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 식으로 여론이 조성되고 있는데, 이래서는 몇백년이 흘러도 해결이 될 리가 없다. 교육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말 현명하고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방안을 제시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교사도 인간이고, 학력이 높다고 논리적이지 않다. 대학생들중에서도 수능시험문제패턴만 연구해서 머리가 굳어버린 사람들도 있고,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시험 체제에서 선발된 모든 인력들은 이미 머리가 굳어서 새로운 생각은 하지 못하는 돌머리가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나오는 의견이 진정 논리적이고, 범국민적인 여론을 이끌 만큼 체계적인가? 그런데 아직도 해결이 안나고 대립만 하고, 고작 한다는 게, 올해만 어찌어찌 넘기고 내년에 다시 이야기해보자, 라니 그게 정말 문제해결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냉정하게 보자, 과연 저 문제가 어려운건가? 언론에서 하도 어렵게 써서 여기에서 아무리 쉽게 풀어써도 이쪽이 더 어려워보일 지경이겠지만, 한번 들여다 보자, 자세히 보면 시간차가 있지만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는 매우 커다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
학’에 얽힌 문제라는 것이다. 고교등급제를 시행한 학교 리스트를 자세히 보면 그 중에 어디를 봐도 국.공립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교등급제가 적발된 대학들도 사립, 교육법에 반기를 든 것도 사립이다. 지금 한창 논쟁이 일고 있는 사학개정법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학에 대한 문제라는 것은 법 자체에 친절하게 명시되어 있으니, 이 두 가지 문제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본다. 그럼 왜 ‘사학’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 답은 생각외로 단순하다. Give & Take가 안 되고 있어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게 또 무슨 소리냐, 우리나라의 교육법은 국. 공립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소속된 전 교육기관에 영향력을 끼친다. 비단 교육법뿐만 아니라, 개인, 기업 등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법률 (헌법, 국가기본법) 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민법 속에서도 예외나, 치외법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이러한 우리나라의 법 체계가 법망만 복잡하게 만들 뿐 실제 실효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법 체계를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교육게에 들이대려 하니 기계에게나 어울릴 법한 글들로 하나하나 인권을 침해하듯 사학 운영을 간섭하고 있으니 사학들이 반발을 하는 거다. 개인으로 치면 오늘 아침은 뭘 먹어야 하고 점심은 뭐 먹어야 하고 저녁은 뭘 먹어야 한다.라는 걸 법으로 명시해두고 편식을 하거나 밥을 남기면 범법자가 되는 셈인데. 사학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고 거슬리는 시어머니식 참견을 견디지 못하는게 당연하고. 교육계는 교육계대로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일정한 도가 있는 법이라며 사람을 가르치는 건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니만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도리고 이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결국 싸움이 일어나고 만다.

자 그럼 이런 판국인데 왜 Give & Take가 나오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사학법의 적용과, 공익성이 있는 인력양성사업이라는 이유로 국공립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대학 인력 양성 국가 주도 프로젝트를 사학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면서, 국공립에 들어가는 국가 예산을 사학에도 똑같이 자금 지원을 비롯한 각종 혜택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제 혜택은 물론이고 직접적인 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교육부는 돈 들인 만큼 말을 들으라고 하는 거고 사학은 돈으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맞서는 셈이다.
이러한 문제가 지금까지 질질 끌 만큼 해결책이 없느냐, 세상 모든 분쟁에서 해결책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그 해결책이 중립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바라보자면 조금 어렵지만, 한쪽이 한쪽을 잠식하는 식의 반쪽짜리 해결책으로는 근본적으로 어림없으며 다시금 그 문제가 화자되고 불씨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보다 제 3의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다른 분야처럼 대충 해결하면서 추이를 지켜볼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한시가 급한, 그러면서도 나라
의 꿈과 미래가 걸려있는 교육 문제이니 만큼 문제 해결은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앞서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이야기해보았는데,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이냐? 너무 무거운 주제 분석치고는 김이 빠지는 해결책이긴 하지만, 간단한 방법이 있다. Give & Take가 되지 않는다면, Give도 하지 말고 Take도 바라지 않으면 된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경쟁만큼 좋은 것도 없지 않겠는가? 교육계와 사학이 서로 아무런 분쟁 없이 협력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갈라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가 더 달리기가 빠른지를 입으로 논하면 끝이 없다. 제일 좋은 방법은 정확한 규격의 트랙에서 서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건 마라톤을 시키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경주를 시켜보면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선 사립대학들이 뉴스에 나오는 대로 의사
의 아들, 돈 있는 집안, 강남권 고교, 강남권 집안, 교수의 선발 전권 행사 등의 문제점을 교육부가 태클을 걸고 있어서 말썽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엔 이 문제에 대해서 교육부는 문제를 삼아서는 안된다. 사학이란 돈을 벌어야 운영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정신으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선심성 경영으로서는 절대 학교를 유지할 수 없고 일부, 혹은 전체적으로 기업 정신에 입각한 경영이 불가피하다. 사학은 사학이다. 운영자 입장에서는 돈을 벌어야 교수 월급도 주고, 학생들 가르칠 건물도 짓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사장은 운영자금을 비축하고 개인 유용할 수 있는 부를 축적할 수도 있는것이다. 교육부는 사학에까지 국가기관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공무원 윤리강령을 들이대면 안된다. 그들이 고교등급제로 학생을 뽑건 어떤 기준으로 기부입학을 받건 국가기관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개인기관으로서 기업에 적용되는 상법을 적용해서 세금을 포탈했다든지등을 적발하는 선에서 국가의 개입은 끝나야 한다. 지금 국가는 교육법, 상법을 둘 다 적용함으로서 문제를 키우고 있고 해결이 안 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데, 사학에게 거는 기대, 즉 Take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사학도 나름대로 교육 철학이 있고 경영 철학도 존재한다. 기업에서는 사장이 보스인데 보스한테 누군가가 위에서 이것저것 간섭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정말이지, 정부와 교육부는 서민의 상식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Take를 바라지 않는데 Give를 할 필요는 없다. 교육부는 일체 학생선발권, 교육 관련 운영에 대한 모든 권리를 사학에 보장해주는 대신 교육 관련 예산 배정을 끊으면 된다. 물론 BK21 등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인재육성사업 역시 사학에서 모두 철수시키고 국공립에만 국가 에산과 각종 인재육성사업을 집중시키면 지금의 교육부가 관할해야 할 영역이 훨씬 간편해지고 각종 사업, 법 적용도 쉬워지며, 분쟁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줄어들 것이다. 국공립이 국가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사학은 사학 나름대로 사학쪽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자체 인재 육성 연합 사업을 구축할 여력이 충분하다. 요즘 뉴스 보니까 사학쪽 단합이 너무 잘 되고 있던데, 그 나이 많으신 분이 단결해서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열정을 봤을 때, 이쪽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가령 이런 문제제기가 나올 수도 있다. ‘아니 그럼 사학쪽에 소속된 학교에 들어가고 싶은 집안 가난하고, 아버지 직업 시원찮고, 백도 없는 학생들은 사학에 들어가는 걸
포기해야 합니까? 학력이 재산인 대한민국에서 사학에 못 들어가는 것은 사회, 계층간 갈등을 심화시킬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할 수험생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꽤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학에 대한 우리나라의 지지도가 꽤 높은 편이니까…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사학측에서 주장하고 있는 학교 운영 방식은 학교를 경영한다는 측면에서는 굉장히 좋은 방식이지만, 인재 육성 방식에서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아버지가 의사라고 아들도 반드시 의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 전에 의대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 중, 그리고 지금 의사의 꿈을 가지고 의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소질’로 의사직을 택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버지가 정치인, 기업인, 혹은 돈이 많다고 아들이 반드시 공부를 잘 한다고 볼 수도 없고, 고액과외, 좋은 학원, 강남에 살고, 강남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전부 공부를 잘하고 뭔가 공부를 잘 하는 피가 흐르는 건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학이 반드시 이런 학생들로 정원 100%를 채우는 건 아니지만, 기업이 실적으로서 주주들에게 어필하듯 학교는 학생들의 학력으로서 전 세계 학계에 어필하는 것이 정설이므로 사학의 지금 선발 방식은 만일 필자가 이야기한 대로 교육계가 지원을 끊고 또한 프로젝트에 대한 간섭도 끊는다면, 학교 자체적인 위상 측면에서 저런 선발 방식은 지속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교육계 휘하에 있는 국공립의 방식이 이상적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고교평준화가 절대적인 정책이 아니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분명 강남권 소속 학교가 전부는 아니지만 마치 야구로 따지면 이승엽의 56개 홈런과 메이저리그 알랙스 로드리게스의 56개 홈런은 가치가 다르듯 분명 학력이라 불리우는 수능 잘 보는 방법의 노하우 차이는 분명 있는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그 수능과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대학에서 전공 위주로 배우는 것과는 큰 격차가 있고 실제 활용이 거의 안된다고는 하지만, 문과를 제외한 이과와 공과에서는 수학적인 기초지식이 뛰어나지 않으면 실제로 수강이 어려울 정도로 커리큘럼이 빡빡하게 구성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교육부가 실시하는 정책으로 얼마나 실제 우리나라 과학 기간 인력계를 살찌울 인력이 탄생할지는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각각 장단점이 있는 서로의 정책을 서로 인정하고 한번쯤은 경
쟁을 시켜보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서로의 정책이 맞다고 싸우기만 하다가 서로 섞여서 사학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가난한 집 학생을 아무 이득 없이 적선하듯 입학시키거나, 국공립에서 어설프게 사학의 위상을 따라간다는 명목 하에 공무원 집안, 교사 집안, 교수 집안, 정계 인사의 집안 자제들을 입학시키는 서로에게 다분히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촌극들을 이제 그만 끝내고 서로 자신들만의 색깔을 가지고 각자 평행선처럼 열심히 각자의 정책만으로 승부를 내 보라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서로 섞이면서 싸우는 일로 20년, 200년을 하나같이 해결 못하고 계속 유망한 새싹이 방치되어 말라버리고 썩어버리는 현실보다는 한번쯤은 교육계도 자극이라는 것을 받아서 입으로만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지 말고 교육자들이라면 교육자들 답게 자신들만의 철학으로 승부를 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10년 정도면 각자 배출한 인재가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가 답이 나오고 그때쯤이면 어느 쪽이 맞는지 보다 정직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니까…

그 사이 수험생들은 자신의 여건에 맞게 학교를 선택하면 된다. 사학
에 못간다고 해서 학벌주의 사회에서 뒤쳐진다는 이야기는 사실 설득력이 없다. 연세대 고려대가 아무리 이미지 개선을 해도 아직 서울대를 한국사회 인지도에서 이기지 못했다. 암울한 순위이긴 하지만 전 세계 대학 순위에서 하위권에 있는 서울대 아래에 있는 것이 연고대인 건 확실하다. 이공계도 마찬가지다. 비교가 참 힘들지만 대외적 인지도측면이나, 명성, 그리고 실제 인재 육성 프로그램으로 인한 학문 수준에서 한양공대와 포항공대가 아무리 홍보를 해도 사람들 뇌리에는 카이스트가 그들과 항상 함께 인지되어 있다. 아무리 민간 자격증이 돌풍을 일으켜도 기업에서 인정받는 건 국가공인 자격증 이상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기에서 하나 분명한 것은 최소한 사학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 고교등
급제, 기부입학, 교내 비리를 가지고 고발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사학을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것을 모두 감수하고 들어간다는 것이며 이미 사학도 그걸 감수할 만큼의 학생만을 뽑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일은 없다. 자식을 사학에 보낸 학부모들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기부금 내는 것 법적으로 제약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지금 문제를 제기하고 분노하는 쪽은 교육부와 국공립, 그리고 대한민국 1% 이외에 대다수의 서민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리그를 펼치게끔 놔두면 최소한 교육계에서 일어나는 차별 역차별 하는 건 사라지니, 저쪽에서나 이쪽에서나 불만이 들릴 턱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방식대로 문제해결이 된다면, 수험생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교등급제에 찬성하고 사립학교 개정법에 반대하는 사학파들은 사학으로 고교등급제에 반대하고 사립학교 개정법에 찬성하는 교육부파들은 국공립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선택권도 좁아지지 않고 머리아프게 사학이나 국공립이냐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강남 특권, 교육 비리 등의 짜증나는 뉴스를 더 이상 안 봐도 되니 얼마나 세상이 상쾌해지겠냐는 것이다. 다소 이야기가 생략된 감이 있지만,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사학법개정논란도 필자가 제기한 해결방법으로 충분히 불식 가능하다. 사학의 존립을 우선하는 방향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그것이 대학교이건 고등학교이건 약간의 정책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맥략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경쟁이라는 것은 굉장한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발전할 수 있게 만들어준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너무나도 간단한 진리를 모른 채 싸우는 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다. 두 명의 훈장
선생님 중 어느 쪽에 배울지를 결정하는데 먹물을 튀기며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두 훈장 밑에서 배울 학도들이 있을까? 지금의 교육계는 그런 싸움을 벌이면서도 반 강제적으로 학생들을 책상에 묶어두고 먹물튀기며 서로 검게 물들어가는 선생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육자라면 먹물을 튀기며 서로를 더럽히며 싸우기보다는 붓에 먹물을 묻혀 서로가 가진 지식으로서 기량을 겨루는 것이 어떨까? 학생들은 두 훈장 중 어느 쪽이든 갈 것이고, 어느 훈장이 잘 가르치는지는 학도들이 장성해서 어떤 인물이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법이다. 세상 사는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를 잊어버리고 어려운 말들이나 늘어놓으면 지식인이라 착각하고 살면서 실제 하는 행동들은 초등학생만 못한 현 교육계에 필자는 혀가 차일 뿐이다. 제발 부탁이니 자신들만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이제 막 자라나는 깨끗한 꿈나무들에게 먹물을 튀겨 더럽히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옛말에 근묵자흑, 더러운 걸 가까이 말라 하였듯이...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0. 4. 10:48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일본인이 야구로서
는 제일 알아준다는 리그를 보유한 미국에서 자국민이 가지고 있는 기록을 깨버린 것,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자국인이 아닌 용병, 게다가 그들이 항상 경외시하는 아시아 황인계 선수가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점을 미국 내에서 그렇게 달가워할 리가 없다. 굳이 미국의 반응을 어렵게 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치로에 대한 의견은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분분하게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이국에서 날아든 스포츠 뉴스에 의견을 내는 사람들은 평소 정치계 뉴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글들을 다수 쏟아내기 시작한다. 단지 이치로=일본인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을 뿐인데, 이러한 공식 하나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종군위안부, 독도, 교과서, 신사참배’까지… 물론 정치계에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야구 좋아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실제로 통계를 보면 국내 프로야구 관객들이 3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사회 구성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나올법도 한 글들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이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나라가 특히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사회 전반적으로 경쟁자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로 물어뜯고 견제하는 나라는 넓게 볼 필요도 없
이 바로 좌 우, 중국과 일본이다. 이들의 경제, 정치, 역사적 활동에 대해 서로 예의 주시하고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국익에 반하거나 상징적으로 불편한 활동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국가적 성명을 내곤 한다. 이런 나라들에 대해서 각 나라의 국민들은, 각양각색의 기준들 들어 자신들의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주장이 서로 맞물리면서 국민적인 감정도 좋아질 기미가 없다. 최근에는 일본이 잠잠한 반면, 중국쪽이 고구려사 왜곡을 비롯한 각종 파상공세로 대한민국과의 수교에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양국 분위기가 좋지 않은 흐름을 띄고 있고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비판도 활발한 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살펴볼 부분이 있다. 중국의 최근 외교정책을 흔히 우리나라에서 표현하기를 ‘오버한다’, ‘부풀린다’, ‘터무니 없는 논리’다는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과거, 고구려의 자료가 분명히 나와있음에도 억지주장을 펼쳐 그것을 부정하거나, 기록을 삭제하는 등, 어린애가 떼를 쓰는 식의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취하고 있는 부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중국이라는 존재에 염증을 느끼는 것 같다.
솔직히 이런 녀석들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냐마는...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과, 이치로의 대기록 수립에 대한 우리나라의 반응과 다른 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인이 현 중국 영토에서 살았고 유목민족이라는 이유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는 중국과 이치로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지금까지 일본이 저질렀던 모든 죄를 들어 그의 기록이 하찮은 것이었음을 증명하려 하고, 혹시라도 그가 제일교포가 아닌지를 사돈에 팔촌, 증조에, 고조까지 조사해가며 뒤적거리는 사람들, 그의 옛 소속팀이었던 오릭스에서의 타격 코치가 한국계 제일교포라는 것을 찾아내서 자랑스럽다는 칭호까지 붙여가며 이치로의 일본인으로서의 기록을 무마시키려는 언론들…

스포츠, 특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리우는 야구에서의 기록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리그가 커질수록 데이터 야구를 펼치는 감독이 많아진다는 점은 이를 잘 반증한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선수 중 천재라고 안
불리웠던 사람은 없다. 천재들에 싸움, 프라이드의 홍수속에서 보다 자신만의 프라이드를 드러내려 애쓴 그이다. 그를 뒤에서 서포터해준 것은 일본인일지 모르지만, 그가 아파서 안타를 대신 처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일본 국기를 몸에 두르고 국가대표의 심정으로 메이저리그를 뛴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애국심이 많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메이저리그라는 무대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열리고 있어도, 전세계 몇십개국에서 가장 야구를 잘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인 프로 리그라는 점을 깊이 상기해야 한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자국민 출신 선수가 좋은 성적을 보인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다만 프로 스포츠에서, 자국민이 잘 한다는 이유로 자국기를 들고 가서 흔들며 자국 만세를 외치는 것이 과연 선수들을 위한 그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박찬호 선수가 국내 첫 메이저리거로서 겪은 수많은 아픔들은 본인 스스로가 성적을 제대로 못 낸다는 본인 자책이 아닌 본인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이었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국가대표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축구에서도 태극전사라는 수식어는 없어진 지 오래다. 요즘은 왠만해서는 유니폼에 태극기를 붙이는 걸 보기 어렵다. 축구협회의 앰블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국가대항전이라는 의미도 클럽축구의 그것처럼 각 나라의 축구협회 소속팀이라는 이름으로서 대결이 이루어진다. 원래 스포츠는 전쟁이라 표현될 만큼 잔혹한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는 어쩔 수 없는 개인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이
상의 의미는 사치다. 리그 내 팀을 옮기는 건 선수인생 중 부지기수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보다 나은 리그로 옮기는 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 민족적 자존심, 종교적 갈등으로 수없이 초래되었던 전쟁들은 이제 미국이라는 나라의 욕심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진 지 오래이며, 국가간 대립은 FTA와 수교로 인해서 완화되고 있고, 경제라는 선의의 경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 국가간의 모습이다. 물론 세세하게 나누어 볼 수 있는 각 국가간의 불편한 관계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각 국가 원수를 비롯한 외교 전문가들이 해결할 문제이며 조금 더 나아가서 범국민들이 뜻을 모아 해결할 문제이다.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에게 국수주의라는 새로운 족쇄를 채우지 말자, 보아라는 가수가 한 일간의 감정을 녹이는 역할은 ‘기대 효과’이지 보아가 절대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숙명’이 아니라는 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 해외 빅리그에 진출한 이천수에게 ‘선수 개인적으로’ 혹은 ‘스포츠로서’ 그를 응원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국위선양’, ‘국가대표로서 한국인의 위대함을 대신 보여주고 와라!’라는 식의 생각은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권에서는 요즘 과거사 청산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친일 행적이 있는 정치인들을 색출해내어 그 죄가 후손이 저지른 것이 아닐지라도 그 사실만큼은 숨지기 않고 명확이 드러내자는 취지의 정책이다. 하지만 가령 어떤 정치인의 아버지가 일본군 순사부장을 지냈던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를 심판하는 건 국민들이지 그 법으로서 그를 심판할 수는 없다. 그는 현행법상으로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당시를 살면서 친일 행적을 벌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보인다면 국가적으로 그가 필요하고 시대가 그를 원한다면 그 사람의 능력적 가치를 통하여 충분한 활동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국민들의 지지로서 자신의 직책이 결정되는 자리이기에 이러한 정책이 쉬이 통과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치로의 신기록 수립으로 수많은 일본인 유명인사들 중 한국인이 많다라는 일본 대내외적인 공공연한 사실을 들어 이치로의 과거 증조, 고조까지 뒤지고 있는데, 별로 먼지가 나올 구석은 없어 보인다. 판매부수와 관계된 키워드라면 개코같이 찾아내는 국내 스포츠 언론들이 이치로가 군국주의 관련된 일부의 증거라도 발견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나오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에초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치로의 일본인으로서 세운 기록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시점으로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변칙적으로 우리나라의 반일 감정이라는 크나큰 설득력 향상 아이템이 존재하지만, 리그, 프로 스포츠에 국수주의를 들먹이며 논쟁을 벌이는 에너지 낭비는 이제 없어야 하지 않을까? 박찬호와 이치로의 한일 투타 맞대결보다, 이제는 메이저리그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팬으로서의 여유를 찾을 때가 아닌가 싶다.

- Am -
posted by RushAm 2004. 9. 26. 04:02
연예인의 대표주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역시 가수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 오죽하면 탤런트들조차도 멀티플레이어 아이돌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음반을 내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정도로 가수라고 하면 그야말로 누구나 주목받는 대중적인 우상이라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자신의 명예, 인기를 위해, 스타성을 위해, 그냥 가수라는 직업이 탐이 나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점차 한국 가요계의 경쟁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순수성을 가져야 할 가수라는 직업이 다른 직업 연예인 소속사의 사업 영역 확장으로 이용되고, 가창력보다는 쇼 프로그램에서의 재치와 얼마만큼의 TV 출연으로 인한 홍보 여부가 성공의 척도로 등장하면서 원래 그 무대에 있어야 할 재능 있는 수많은 유망주들이 홍대, 영화음악계를 전전한다. 우리나라 애니음악도 비슷한 맥략에서 그들의 도피처, 혹은 소위 밤무대라 불리우는 야간업소와 비슷한,
마이너리그의 개념으로서 성장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데뷰 때부터 메이저 음반 기획사의 홍보 수단으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는 옆나라의 애니음악과는 사뭇 다른 형태지만, 일본도 충분히 그러한 시기를 겪었다. 옆나라라고 해서 처음부터 애니 인프라가 높았던 것도 아니고, 지금도 애니음악이 대박흥행의 보증수표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다 반짝스타로서 생을 마감하는 가수들이 부지기수로 애니음악계를 거치는 것을 볼 때 애니음악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수준에서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정여진
이름으로 듣기에는 다소 생소한 이 가수, 우리가 항상 어떤 TV프로그램을 볼 때나 일반인이라면 스텝롤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이는 애니메이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열성적으로 정말 1초나 제대로 나올까 말까 하는 스텝롤을 바삐 읽어내려갈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 매니아가 아니라면 당연히 정여진이라는 이름은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가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듯, 그녀의 목소리는 누구나 어딘가에서 한번 정도는 들어봤던 것처럼 아련하게 우리 기억속에 남아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영화 체인지의 테마곡과, 투니버스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의 번안곡을 두루 맡기 시작하면서부터지만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애니음악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전설적인 보컬이라 불리울 만큼의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무려 27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녀의 애니메이션 데뷰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필자 본인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 전자인간 337, 똘이장군, 그레이트 마징가, 빨간머리 앤, 보물섬, 로보트 킹, 개구리 왕눈이,요술공주 밍키,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 시대를 유년기로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정말 정겨운 동요처럼 기억되고 있는 그 음악들이 모두 그녀의 보컬로서 불리웠던 것들이다. 그녀 나이 5세부터 시작된 애니음악 인생 27년, 어린아이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애니메이션계에서 제대로 된 음악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동안 그녀는 한번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고, 지금도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노래를 불러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녀가 불러 온 애니음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녀가 인정받기까지는 정말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선적으로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가 아동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의 권리 회복에 또한번 수 년이 걸렸다. 가수라는 직업, 연예인으로서 대중에게 존재가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공인이라는 개념이 매스미디어 도입 당시부터 굳어져 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귀천을 잣대질당하며 성장해왔던 음악들, 그 속에 애니음악이 있었다. 아직도 애니음악의 자체작곡 비중이 높지 않는 상태에서 수많은 애니음악 보컬들이 가수들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갖지 못하고 원곡 그대로 따라서 불러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에 이들의 음악성이 인정받기에는 아직 많은 어려움이 있고, 최근에서야 애니음악 업계 자체를 주목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가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보다 고취시키고자 마치 정치인이 득표유세를 하는 식으로 반짝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번안곡 가수라는 딱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애니음악인들에 대한 편견의 시각은 쉽게 나아지기는 힘들 것이다.

세상 일 쉬운 게 하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믿고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면서도 일의 귀천, 직업의 귀천을 매기고 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을 찾아 취업난 속에서도 사무직을 선호하는 사회, 음악계도 이러한 개념에서 1류 2류를 나누고 인기가 가늠되며, 사람들의 관심도
차이가 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애니음악을 하는 보컬들이 2류,3류라 칭할 정도로 가창력면에서 메이저 가수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메이저 가수들에게 정말 각양각색으로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새로운 음악장르를 지닌 곡들만을 부르게 했을 때 얼마만큼 그 곡들을 소화할 수 있을까? 팝, 발라드 가수가 힙합을 하면 자연스러워 보일 리가 없고, 록가수가 트로트를 부르면 트로트만의 감칠맛이 나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특별히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매 작품마다 애매모호한 곡 색깔을 가지는 애니음악들을 꾸준히 평균 이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가수가 그리 흔하겠는가? 매 레코딩때마다 듣도보지도 못한 희안한 음악들을 보컬로서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은 1류 2류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창력의 기준으로 평가가 불가능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중의 평가는 자신의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극명하고 때로는 매우 냉정하게 스타를 만들어내고 퇴물을 걸러낸다. 연예계를 치열한 격전지로 만드는 것은 연예인 본인들이 아닌 대중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연예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TV에 나와서 한번이라도 대중들에게 얼굴을 내밀고, 내밀었으면 자신의 얼굴이 한번에 기억될 수 있도록 소위 말하는 ‘끼’를 보여주어 존재를 각인시키는데에 열중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가요프로그램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다는 그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그 사실과 그들이 TV에 한번 더 나왔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일 뿐, 특별히 음악으로서 그들을 기억하기는 힘들다. 이렇듯 연예인들마다 각자의 정체성이 흐릿해지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장인이라 불리울만한 연예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표현하지 못할 아쉬움일 것이다. 연기를 겸하고 있는 가수, 연기자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출시했던 수많은 탤런트들, 그들이 과연 10년 후에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노래 잘했던 탤런트?, 연기 잘했던 가수?, 사람의 능력은 200%라는 오버 페이스 속에서도 언제나 1이라는 능력을 부여받으며 그것이 어떤 한 분야에 전부 투입되지 않고 분산되면 그 존재감은 희미해질 뿐이라는 것을 당장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전설이라는 의미가 현대에 와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로 최대한의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것은 연예인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의 누구라도 생각하고픈 인생의 성공이란 달디단 열매의 맛이 아닐까?, 그 성공이 부와, 명예 그리고 대중적 인기로 한정되기 보다는 가수로서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가수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를 바라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열망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에서 성공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가장 큰 행복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녀, 정여진처럼 말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9. 16. 00:15
가장 간단한 속담을 예로 들어도 두 마리 토끼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흔하게 쓰이고 있을 정도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어떤 부분이든 간에 본인 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아니 스스로에게 그렇게 주문을 걸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르지만, 두 가지 꿈을 쫓을 수는 없는 것이라 항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항상 소설, 드라마, 심지어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인생극장이라는 콩트를 통해 일탈을 즐기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사실 보통 고역이 아니다. 기자들은 기자들 나름대로 뭔가 기사를 흥미있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가야 하는데, 대체로 제작진들이 말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취약점을 보이는지,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드는 느낌은 올림픽 금매달을 따고 돌아온 유도 선수를 인터뷰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별히 평가절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작품에 대해 언론에게 밝히는 소견의 특색이 크게 없다는 것, 아무튼 보통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예술론’ 을 펼치는 사람과 ‘상업론’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대중문화론’ 을 주창하는 식의 두 가지 정도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국내 제작진들의 대부분이 이마저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상품이건 손때가 묻는 발명품이건, 메이저 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한 작품이 있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만한 물건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본인의 작품 활동에 있어 ‘대회용’과 ‘대중성’은 철저하게 구분지으며 작품 세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가지 제약 모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만을 만들어서는 충족하지 못하는 것들, 즉 하나의 제약으로서 애니메이터의 가치관을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인프라가 넓지 않아서인지, 그런 고생을 겪고 싶어도 못 겪는, 이른바 ‘강제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제작자 지망생, 실제 제작진,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조차도 본인들의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작품 속에 십분 발휘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심미적 부분에 공을 많이 들여 국내 외 애니메이션 축제 기준에 걸맞게끔 작품성을 다듬은 후 그렇게 만들어진 ‘대회용’ 작품을 공개했을 때 ‘대중적인 흥행’을 노리기까지 한다.

TV 문화 산업에 대한 특집을 논하는 프로그램, 마고 21의 오세암 제작진 인터뷰가 프로그램 중반부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을 논하는 단계에서 등장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제작진이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한국 애니메이션이니까 재미 없을거야! 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안 보는 걸 저희가 어떻게 합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정말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마고 21이 오세암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사람들이 많이 봐 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되려면 어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묻고 싶었다. 제일 가까운 SICAF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경쟁부분 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작들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극장에 걸릴 때, 어떤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단지 그림자놀이로, 단순 종이인형, 클레이, 흙으로 표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돈 7000원을 내고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그런 작품들은 비교 대상이 다르니 자처하고서라도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는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가 그렇게 모든 해외 상을 다 휩쓸었다고 광고에 홍보를 거듭하고 영화 프로그램에서 줄기차게 소개해도 전국 관객수 5만을 못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점도 없었단 말인가? 그들이 오세암을 두고 한 홍보 전략 중 ‘해외 수상작’ 이외에 다른 흥미 요소를 끌 수 있는 무엇이 있었는가? 모성애를 찾아 떠나는 두 남매? 그것이 정말 극단적으로 말해서 호쾌하게 날아다니며 불폭탄을 쏘는 건담류 로봇물에 빠진 남자어린이들, 남녀간의 진득한 순정물에 빠진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그것에 견주어 오세암을 택할 수 있을 정도로 흥행성, 흥미 요소가 많았을까? 아니 많았을거라 생각한건가? 자신들의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반영하고, 해외 그랑프리에서 수상한 작품을 보고 진정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관객과, 그걸 만든 제작진, 그리고 그 작품에게 상을 준 심사위원 뿐일 것이다.

‘이웃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최근작이라고 볼 수 있는
‘모노노케 히메’ 를 상영하기 전 모 잡지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필자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작품 세계를 지금까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빼놓지 않고 계속 구상했고, 그 동안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을 너무나도 만들고 싶었다.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기에 나는 이제 은퇴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가 토에이, 니폰 애니메이션을 거처 지브리 스튜디오에 오기까지 그의 애니메이션 인생 40년동안 그가 그만의 색깔로서 그만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아마노 요시타카처럼 데뷰 때부터 천재적인 감성과 타츠노코의 지원 하에 자신의 작품관을 마음껏 펼쳐 성공을 거둔 예도 있고, 그 이외에도 곤조의 아이콘 ‘고토 케이지’의 키디 그레이드처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 어떤 애니메이터들일지라도, 흥행성에 기초를 둔 작품 속에서 해외 수상을 거둔 적은 있어도, 해외 수상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흥행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 때에는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작품에 임하며, 이것이 흥행이 되는지에 여부는 관계없이 본인의 자아만족,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카타르시스적 보상 차원에서 접근한다. 즉 애니메이터들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예술적인 작품을 만드는 행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필자는 이러한 부분을 애니메이터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비애라고 생각하고 있고,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보다 작품성이 다듬어지고 자신이 표현하고픈 것들을 보다 날카롭고 능숙하게 빈틈없이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걸 극복하고, 처음부터 소신껏 자신들의 색깔을 가득 담아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결코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치고는 본인들이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김기덕 감독이 메이저 영화 그랑프리에서 두 차례나 감독상을 받게 된 게기의 작품들이 흥행면에서 어떤 성적을 보였는지를 한번쯤은 깊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강가에 흐르는 도랑도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 양 갈래에 흐르는 물의 양이 다르기 마련인데, 어째서 세 갈래로 가는 물길이 같기를 바라는가? 욕심을 부리지 마라, 자신이 만든 만큼 씨를 거두게 되는 것은 아무리 이 세상이 타락하고 변했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불변의 진리다.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시하고 배척당한다고 탓하지 말고, 그 이전에 오세암에 모여든 10만 관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다. 관객 하나 하나는 당신들에게 있어 흥행성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단지 숫자로 표현되는 입장관객수에 일회일비하지 말고, 그들에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렇다면 당신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고 울분을 토했던, ‘한국 애니라서 무시당하고 상영관이 제대로 없었다는 실패의 변’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치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 온 사람들, 그들에게는 자신만이 표현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이 분명 한 가지씩은 있다. 사실 대부분은 그것을 자신이 애니메이터라는 직함을 가진 직후부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그것이 작게는 같은 팀, 후원사의 사장님, 넓게는 세계적 그랑프리의 심사위원, 나아가서는 많은 수의 애니메이션 관객들에게 그것을 보이고, 그 속뜻을 함께 나누고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서 작품 활동에 임한다. 애니메이션도 결국 사람이 만든 작품을 사람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자신과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0%가 아니듯이 어느 누군가는 당신의 생각을 표현한 그 작품에 만족하고 당신에게 지지를 보낼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너무 성급하게 삼키지 말고,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가 자신이 가진 생각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것 그 이외에는 없다면 진심으로 그 이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제작에 전력을 쏟아라, 유명한 1인 독립 애니메이터 신카이 마코토가 그랬듯 만들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도와준다면 그걸 배워서라도 혼자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정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굳이 타국 작품들과의 차별성만을 강조하여 적대시하고 어렵게 갈 필요는 없다. 산을 오르는데 누군가가 먼저 간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버리고 새로 어려운 길을 닦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일본 애니메이션도 처음에는 디즈니를 의식하기에 바빴고, 스퀘어의 파이날 판타지도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조금씩 우리만의 색깔을 보여주면 된다. 굳이 우리만의 색깔을 가득 집어넣고, 일본색, 미국색을 피하기에 급급하지 말자. 관객들은 아무리 일본, 미국과 똑같은 동화, 똑같은 타이틀을 걸어 놓아도 같은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르는 걸 구분해내듯이 충분히 구별할 수 있으며 , 지금 당장 우리만의 작품을 위해서 머리싸매고 고민해도 지금 당장은 답이 나올 턱이 없고, 사실상 그 답이 나온다 해도 관객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경쓰지 말고 손이 가는대로 범작이 나오든, 평작이 나오든 줄기차게 한번 만들어보자. 한국영화가 성공가도 이어가는 중에 전부 볼만한 대작들만 가득한 게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평작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범작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문화다. 그 속에서 조금씩 사람들에게 한국 애니만의 참맛을 알려주면 어떨까? 맛있는 달고나를 더욱 달게 만들어주는 건 쓰디쓴 소다라는 것을 말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9. 15. 00:27
"만화주제가라 부르면 촌스럽다 하고 애니메이션 오프닝이라 부르면 감탄하더라."
신해철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얼마 전에 했던 이야기다. 저 말이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음악성이 아닌, 단순히 불리우는 정도에 따라서 가치판단이 달라져야만 하는 국내 애니음악계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창희.
여행스케치 1기 맴버, 투니버스 입사 후 우연한 게기로 인해 애니음악을 맡게 된 이후,
지금까지 이쪽 음악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곡가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는 영혼기병 라젠카의 음악을 맡았던 ‘신해철’의 경우처럼 단순히 기존 가요 장르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사람들은 ‘음악은 좋은데, 이건 애니음악 같지 않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처럼 애니음악아라는 것은 현 대중음악에서 쉽게 활용되고 있는 대분류 장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의 음악적 색깔과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전문 작곡가가 필요한 부분이며, 실질적으로 이 부분에서 두각을 보인 작곡가가 바로 이창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초창기 음악도 사실 ‘애니음악’이라 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음악들이 많았고, 본인 특유의 음악성을 살리기 보다는, 원곡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언뜻 들으면 살짝 리믹스 해놓은 정도에 그치는 수준의 곡들이 많았지만, 점차 이창희 본인이 애니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하고, 애니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음악적 색깔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특별히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없었던 애니음악 분야이기에, 애니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애니음악을 완성시키는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나디아 여는 노래’, ‘카우보이 비밥 마무리 노래’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지금까지 원곡을 번안하던 수준에 그쳤던 투니버스 애니음악에 대해서 시청자들의 반응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박완규’가 불러주었던 ‘카우보이 비밥 마무리 노래’는 이후 박완규가 따로 음반에 수록하면서, 애니 음악이 완성도가 충분히 향상되고 있음을 대중에게 알리는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미소의 세상’, ‘정글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마무리 노래’ 등 보다 애니음악이라는 미묘한 장르에 잘 부합되는 색깔의 곡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 팬들의 높은 지지 속에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음악 음반 'WE' 프로젝트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지금에 이른다.

이제는 ‘만화인의 노래’라는 공식적인 시상 행사까지 가지게 될 정도로 하나의 독창적인 분야로 인정받게 된 애니음악 분야, 이제는 보다 음악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곡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팬들을 즐겁게 한다. 또한 이창희씨 이외에도 애니음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하는 유망한 신인 작곡가들이 많아진다는 사실 역시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국내 애니메이션’이 시장점유율이 낮고, 이제는 나오지도 않는데, 왜 애니음악계를 성장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인과 의견충돌이 있었던 적이 있다. 항상 ‘케이크를 먹을 일이 없기 때문에 생크림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생크림을 사 두면 언젠가 케이크를 만들 일이 있을 때 쓸 수 있다’라는 인식이 비단 애니음악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필히 요구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얼터너티브 음악이 당장 국민 정서에 안맞기 때문에 출시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 보다는 ‘얼터너티브 음악을 하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이 늘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라틴어로 ‘농사짓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항상 씨를 뿌려두지 않으면 원하는 작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중에게 외면 받을 분야에 대한 시각을 다르게 보자. 그 속에 그들만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화 코드가 있을 것이고, 그 문화 코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언제 늘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농사가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는 아무도 모르듯이 말이다.

- Rush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