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04. 10. 4. 10:48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일본인이 야구로서
는 제일 알아준다는 리그를 보유한 미국에서 자국민이 가지고 있는 기록을 깨버린 것,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자국인이 아닌 용병, 게다가 그들이 항상 경외시하는 아시아 황인계 선수가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점을 미국 내에서 그렇게 달가워할 리가 없다. 굳이 미국의 반응을 어렵게 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치로에 대한 의견은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분분하게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이국에서 날아든 스포츠 뉴스에 의견을 내는 사람들은 평소 정치계 뉴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글들을 다수 쏟아내기 시작한다. 단지 이치로=일본인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을 뿐인데, 이러한 공식 하나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종군위안부, 독도, 교과서, 신사참배’까지… 물론 정치계에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야구 좋아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실제로 통계를 보면 국내 프로야구 관객들이 3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사회 구성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나올법도 한 글들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이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나라가 특히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사회 전반적으로 경쟁자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로 물어뜯고 견제하는 나라는 넓게 볼 필요도 없
이 바로 좌 우, 중국과 일본이다. 이들의 경제, 정치, 역사적 활동에 대해 서로 예의 주시하고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국익에 반하거나 상징적으로 불편한 활동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국가적 성명을 내곤 한다. 이런 나라들에 대해서 각 나라의 국민들은, 각양각색의 기준들 들어 자신들의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주장이 서로 맞물리면서 국민적인 감정도 좋아질 기미가 없다. 최근에는 일본이 잠잠한 반면, 중국쪽이 고구려사 왜곡을 비롯한 각종 파상공세로 대한민국과의 수교에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양국 분위기가 좋지 않은 흐름을 띄고 있고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비판도 활발한 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살펴볼 부분이 있다. 중국의 최근 외교정책을 흔히 우리나라에서 표현하기를 ‘오버한다’, ‘부풀린다’, ‘터무니 없는 논리’다는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과거, 고구려의 자료가 분명히 나와있음에도 억지주장을 펼쳐 그것을 부정하거나, 기록을 삭제하는 등, 어린애가 떼를 쓰는 식의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취하고 있는 부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중국이라는 존재에 염증을 느끼는 것 같다.
솔직히 이런 녀석들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냐마는...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과, 이치로의 대기록 수립에 대한 우리나라의 반응과 다른 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인이 현 중국 영토에서 살았고 유목민족이라는 이유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는 중국과 이치로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지금까지 일본이 저질렀던 모든 죄를 들어 그의 기록이 하찮은 것이었음을 증명하려 하고, 혹시라도 그가 제일교포가 아닌지를 사돈에 팔촌, 증조에, 고조까지 조사해가며 뒤적거리는 사람들, 그의 옛 소속팀이었던 오릭스에서의 타격 코치가 한국계 제일교포라는 것을 찾아내서 자랑스럽다는 칭호까지 붙여가며 이치로의 일본인으로서의 기록을 무마시키려는 언론들…

스포츠, 특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리우는 야구에서의 기록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리그가 커질수록 데이터 야구를 펼치는 감독이 많아진다는 점은 이를 잘 반증한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선수 중 천재라고 안
불리웠던 사람은 없다. 천재들에 싸움, 프라이드의 홍수속에서 보다 자신만의 프라이드를 드러내려 애쓴 그이다. 그를 뒤에서 서포터해준 것은 일본인일지 모르지만, 그가 아파서 안타를 대신 처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일본 국기를 몸에 두르고 국가대표의 심정으로 메이저리그를 뛴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애국심이 많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메이저리그라는 무대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열리고 있어도, 전세계 몇십개국에서 가장 야구를 잘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인 프로 리그라는 점을 깊이 상기해야 한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자국민 출신 선수가 좋은 성적을 보인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다만 프로 스포츠에서, 자국민이 잘 한다는 이유로 자국기를 들고 가서 흔들며 자국 만세를 외치는 것이 과연 선수들을 위한 그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박찬호 선수가 국내 첫 메이저리거로서 겪은 수많은 아픔들은 본인 스스로가 성적을 제대로 못 낸다는 본인 자책이 아닌 본인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이었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국가대표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축구에서도 태극전사라는 수식어는 없어진 지 오래다. 요즘은 왠만해서는 유니폼에 태극기를 붙이는 걸 보기 어렵다. 축구협회의 앰블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국가대항전이라는 의미도 클럽축구의 그것처럼 각 나라의 축구협회 소속팀이라는 이름으로서 대결이 이루어진다. 원래 스포츠는 전쟁이라 표현될 만큼 잔혹한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는 어쩔 수 없는 개인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이
상의 의미는 사치다. 리그 내 팀을 옮기는 건 선수인생 중 부지기수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보다 나은 리그로 옮기는 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 민족적 자존심, 종교적 갈등으로 수없이 초래되었던 전쟁들은 이제 미국이라는 나라의 욕심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진 지 오래이며, 국가간 대립은 FTA와 수교로 인해서 완화되고 있고, 경제라는 선의의 경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 국가간의 모습이다. 물론 세세하게 나누어 볼 수 있는 각 국가간의 불편한 관계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각 국가 원수를 비롯한 외교 전문가들이 해결할 문제이며 조금 더 나아가서 범국민들이 뜻을 모아 해결할 문제이다.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에게 국수주의라는 새로운 족쇄를 채우지 말자, 보아라는 가수가 한 일간의 감정을 녹이는 역할은 ‘기대 효과’이지 보아가 절대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숙명’이 아니라는 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 해외 빅리그에 진출한 이천수에게 ‘선수 개인적으로’ 혹은 ‘스포츠로서’ 그를 응원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국위선양’, ‘국가대표로서 한국인의 위대함을 대신 보여주고 와라!’라는 식의 생각은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권에서는 요즘 과거사 청산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친일 행적이 있는 정치인들을 색출해내어 그 죄가 후손이 저지른 것이 아닐지라도 그 사실만큼은 숨지기 않고 명확이 드러내자는 취지의 정책이다. 하지만 가령 어떤 정치인의 아버지가 일본군 순사부장을 지냈던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를 심판하는 건 국민들이지 그 법으로서 그를 심판할 수는 없다. 그는 현행법상으로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당시를 살면서 친일 행적을 벌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보인다면 국가적으로 그가 필요하고 시대가 그를 원한다면 그 사람의 능력적 가치를 통하여 충분한 활동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국민들의 지지로서 자신의 직책이 결정되는 자리이기에 이러한 정책이 쉬이 통과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치로의 신기록 수립으로 수많은 일본인 유명인사들 중 한국인이 많다라는 일본 대내외적인 공공연한 사실을 들어 이치로의 과거 증조, 고조까지 뒤지고 있는데, 별로 먼지가 나올 구석은 없어 보인다. 판매부수와 관계된 키워드라면 개코같이 찾아내는 국내 스포츠 언론들이 이치로가 군국주의 관련된 일부의 증거라도 발견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나오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에초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치로의 일본인으로서 세운 기록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시점으로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변칙적으로 우리나라의 반일 감정이라는 크나큰 설득력 향상 아이템이 존재하지만, 리그, 프로 스포츠에 국수주의를 들먹이며 논쟁을 벌이는 에너지 낭비는 이제 없어야 하지 않을까? 박찬호와 이치로의 한일 투타 맞대결보다, 이제는 메이저리그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팬으로서의 여유를 찾을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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