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5. 7. 27. 10:29

미디어 업계가 끊임없이 복고로 파고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 복고라는 테마는 끊임없이 물이 샘솟는 그런 소재가 아니라 정말 어딜 파도 나오지 않는 가뭄에 가끔 파면 터지는 그런 소재이며 추억 이상의 롱런이 불가능하다. god의 컴백 이후 컨벤션 효과는 임팩트가 강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HOT의 재결합 무대는 오랫동안 시기를 조율해야만 했다. 따라서 미디어 업계에서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건 그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과거 회귀'를 원할 만큼 지치고 힘겹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슬프게도 보통 이 복고는 40대 이상 경제력을 갖춘 계층의 전유물이었는데 최근엔 복고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계층인 20~30대, 다시말해 복고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현실이 즐거워서 미치겠을 그런 나이대를 타겟으로 한 복고가 파생되고 있다는거다. 이 나라가 얼마나 노답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다.



김영만 아저씨의 등장은 그 극점에 서 있다. 지금까지 2~30대 타겟의 복고라고 한다면 지금으로부터 많아봐야 10년 ~15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준, 다시말해 가장 즐거웠던 시기를 1318 시절로 한정하여 당시 스타를 보며 열광하고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으며 외우고 드라마를 보는 등 미디어의 홍수 속 가장 깊은 곳에 몸을 담그던 그 시절의 감수성 촉촉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던 것이 전부였다. 그에 힘입어 90s스타들의 방송복귀, 청춘나이트콘서트, 밤사, 무한도전 토토가 열풍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이미 한물가버린 콘텐츠를 소비하기 위해 기꺼이 가치에 대한 댓가를 지불했다.


그런데 김영만 아저씨 콘텐츠는 타겟 연령층은 동일함에도 거슬러올라가는 시간이 훨씬 더 아득하게 멀다. 최소 20살, 더 심하게는 25살을 거슬러 올라가서 미취학아동, 초등학교 저학년의 복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찌기 복고 시장에서 이 시장은 '불량식품'열풍 같은 간헐적 소비행태로서 보여지거나 인터넷 상에서 '이거 알면 최소 80년대생' 같은 스팟성 콘텐츠로 소비된 사례는 있었지만, 당시 인물이 직접 나와서 추억팔이하는 '대담형 토크쇼'가 아닌 당시 쓰이던 콘텐츠를 그대로 재현하여 경쟁하는 그런 콘텐츠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때문에 이번 김영만 아저씨 콘텐츠는 내 입장에서 팔릴거라는 굳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더랬다.




그런데 대박이 터졌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깊고 풍부하게 김영만 아저씨를 촉매제로한 과거로의 복고 여행에 심취하고 있으며, 그의 말 한마디에 감동하고 있다. 물론 아저씨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들에게 적절한 감동을 이끌어낼만한 키워드 (3포세대)를 담아내면서도 25년 복고 콘텐츠와 훌륭하게 융합하고 있다는 부분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찌기 없었던 미취학세대 복고라는 콘텐츠에 열광하고 있으며 너나할거없이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물론 이 열풍이 얼마 가지 못할 거라는 것은 아저씨도 나도 종이를 접는 그들도 누구보다 잘 안다. 문제는 바로 이 '얼마 가지 못하는 콘텐츠의 생명력'에 있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열풍과 유행의 특성에 대해 깊이 학습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열풍에는 자기 주관보다는 열풍 그 자체에 '합류'해서 그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짧은 시간동안 최대한 그들과 많이 교류하고 싶다는 욕망이 학습되어 있다. 이젠 아무도 '허니버터칩 먹어봤어?'라고 묻지도 않고 '먹어봤다'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유행이란 '휘발유'처럼 화끈하게 타오르고 금방 꺼지는 특성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반 열풍에 기꺼이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열풍 초반에 탑승하기 위해 애쓴다. 그때그때 다른 공감대에 합류하기 위해 벌어지는 이 행위는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스테디셀러 콘텐츠가 나오기 힘들게끔 만들어놓았다.



사람들이 김영만 아저씨의 '재규어' 자동차를 보며 나오는 반응은 '실망'이 아니라 '우려'다, 사람들은 김영만 아저씨 콘텐츠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김영만 아저씨 콘텐츠가 혹여 이 '재규어' 논쟁으로 인해 그나마 짧은 열풍이 더 짧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는것이다. 자기 자신은 그에 실망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실망하고 아저씨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며 말로가 좋지 않게 될 지도 모를까봐 우려하는 마음 그 자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의 뒷면에는 더 솔직한 마음이 묻어있다. 바로 자신이 아름답게만 기억하고 있는 유년시절과 그리고 김영만 아저씨의 아름답기만 한 멘토로서의 가치를 가진 캐릭터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파생한다. 김영만 아저씨 콘텐츠가 팔리는 것은 김영만 아저씨 콘텐츠가 지금도 먹힐 만큼 강력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열풍을 이끌고 있는 20~30대들에게 진정 어필하고 있는 것은 김영만 아저씨의 콘텐츠도 그의 캐릭터도 아닌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내고 있는 열풍 전반의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김영만 아저씨가 말한 어록들이 모아지고, 그 어록들과 걸맞는 지금까지의 행보들을 정리한 내용과 갖은 미담들, 과거 인터뷰 들이 인터넷 콘텐츠가 되어 재생산, 재소비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스토리다. 아저씨라는 캐릭터를 주연으로 한 요즘 세상에 누구나 목말라하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스토리, 그런데 이런 스토리에 재규어라는 외제 차를 탄 김영만 아저씨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 스토리를 만드는 집단적 창작주체로서 스토리에 방해가 되는 이러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하는것이다. 그들은 창작자면서 동시에 그들이 만든 스토리를 직접 소비하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창작자적 자존심과 소비자적 관점의 몰입이 섞이면서 이와 같은 다소 어이없는 논쟁이 촉발된것으로 보인다.




이 바닥은 '이미지의 전쟁터'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적발된 국민여동생 캐릭터가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국민영웅급 홈런타자가 약물로 적발되어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은 일면 납득이 되지 않는 모습이긴 하다. 흡연은 20세 이상만 되면 불법이 아니며, 약물은 그 자체로 규정에 따라 처벌받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자회견을 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고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린다. 그들이 지은 죄는 '내가 생각했던 캐릭터는 이렇지 않아'라는 순수한 대중의 마음을 깨뜨리고 훼손하여 충격에 빠뜨린 죄라고 봐야할까?


이 나라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순수하게 자랄 것을 강조해왔다. 남녀칠세부동석부터 시작하여 성행위가 아니라 여자의 몸이 그냥 그려지고 표현만 되어도 '더러운 생각'이라며 잡들이는 게 굳이 옛날얘기라고 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렇게 순수하게 자라 난 결과는 지금 보시는대로 '순수함에 대한 지나친 가치숭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순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극단적 터부시'는 확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환상이 깨졌다' 그리고 그 환상이 깨져서 내가 그 순수함을 즐기지 못하고 혹은 내가 순수하다고 자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책임을 순수하다고 느끼게 해준 당사자에게 쏟아내고 있다. 정작 순수함을 부르짖으면서, 재규어의 가격을 쳐보는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그에 대한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적 혼란이 낳은 참극이다.


이 나라의 어린이들이 지금의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 키워낸 당사자들은 만족해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이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터부시되고 배척하는 '오덕'의 모습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거다. 변태스럽고 더럽게만 묘사되는 그들이 '나의 미쿠쨩은 이렇지 않다능' 라고 말하는 모습과 '김영만 아저씨가 재규어를 탈 리가 없어', '나의 ***가 남자랑 잤을리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터부시했던 그들과 이쪽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걸까? 왠지 지금은 전 국민이 미처버리는 독이 든 우물물을 마셔야만 할 것 같다.


posted by RushAm 2015. 6. 29. 16:31

필자가 이 블로그에서 오래 전부터 줄기차게 주장하는 부분이 바로 '조명을 무대 뒤로 옮기자'이다. 조명은 항상 무대 앞에 있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비추고 결국 그 무대가 잘 되었을 경우에 생기는 가장 많은 것들을 가져간다. 이는 언제나 자본과 노동의 불평등을 야기할뿐더러 그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절망적인데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노력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구조적 환경조차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업계든 그들은 당당하게 우리에게 말한다 


'이 바닥 좁으니까 나한테 잘해'




이렇게 영원한 갑과 을의 관계는 공고해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 하나의 타개책이 발견되고 있다. 인터넷에 밀릴대로 밀려버린 한물간 매체인 TV가 그 주인공이다. 소재의 한계와 역량있는 인재들의 영입 실패로 작품성 공동화를 겪고 있는 업계에서 내놓은 방안이 바로 '전문가들의 TV진출'이다. 요즘 TV에는 종편을 포함해서 수많은 전문가와 평론가 그리고 마이스터급 인재들이 나와서 자신의 재량과 지식을 1차원적으로 발산하거나 혹은 역할을 부여받고 엔터테이너로서 활동하는 등 그 자체가 방송 소재이자 액터가 되어 TV 브라운관을 채워나가고 있으며 당연하겠지만 이들을 시청자들이 매우 반기고 있어 이러한 추세는 점차 세분화 지속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가장 먼저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은 드라마 업계다. 아직 전면에 나오지 않았지만 드라마의 작가 이름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 전체 역사에서 오래 되지 않는다. 이윽고 버라이어티가 이에 가세했다. 나영석, 김태호 PD는 그 자체만으로 브랜드가치를 인정받으며 방송사들 위에 서는 슈퍼갑이 되어있다. 음악 업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음악 단독으로는 음반사나 기획사의 위상을 실명을 쓰지 않는 작곡가들이 이미 뛰어넘은지 10년째 되어간다 예전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영원한 을로서 업계의 좁음을 직시하고 '가만히 있으라'를 새겨야 했던 그들이 이제는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것은 결국 대중들에게 집단의 브랜드화가 아닌 개인의 브랜드화가 이루어졌기 때문과 동시에 결국 많은 소비자들이 더 이상 집단적 브랜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문제도 크다.



실력이 곧 브랜드



그렇게 사회적 요구와 흐름에 따라 요식업계까지 왔다. 예전 요식업과 방송의 만남은 '업장'그 자체에 있었다. 결국 '맛집'으로 홍보되기 위해 수억의 돈을 들여서 '집단'을 홍보했다. 사람들은 초창기 믿었던 '집단'에 대한 브랜드화에 수없이 배신당하며 점점 지쳐갔고, 더 이상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그 본질적인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즉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적 매개체는 인간인 이상 사라질 수가 없기 때문에 꾸준히 관심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식당을 파해치고, 더 확률이 좋은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고픈 욕망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욕망에 방송국이 발맞추어 힌트를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스타 셰프가 태어났다.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그외에 요리를 직접 시연하는 프로그램에서 셰프들은 때로는 세상의 모든 요리를 통달한 듯한 달인으로 묘사되거나 혹은 따로 묘사할 필요가 없이 직접 눈으로 그 실력을 검증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서 보여준다. 어쨌든 그들은 지금까지 단순히 반찬을 재활용하는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것에 그치거나 혹은 매우 중요한 비법 양념만이 맛을 좌우하는 것으로 표현해왔던 요식업계의 맛의 비결을 셰프 그 자신의 스킬과 안목, 그리고 경험에서 오는 지혜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시청자들의 시각적 검증과 방송국이라는 신뢰성 높은 메체의 특성을 타고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출연했던 셰프들의 식당 혹은 그들이 근무하는 식당은 소위 대박이 나고 있으며 이러한 열풍은 방송에 출연한 셰프에서 끝나지 않고 셰프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관심과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본의 중심에 자본 그 자체가 아닌 셰프라는 기능장이 자리를 차지하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기 힘든 리버럴의 순기능이 이루어지게 되자, 그동안 불합리에 억눌려왔던 것들이 일거에 폭발한것일까? 갑자기 놓여진 이 사다리에 대한 자리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방송 수혜 제 1세대 셰프라고 할 수 있는 강레오가 지금의 제 2세대 셰프라고 할 수 있는 최현석을 디스했다는 풍문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셰프는 아니지만 요식업계가 집단적 브랜드에서 셰프로 방송 소재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도기를 지켰던 황교익까지 이 논쟁에 참전하면서 점입가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들의 이해관계는 사뭇 다르다. 강레오는 방송의 힘을 빌은 스타셰프 1세대다. 당시 셰프에 대해 방송에서 캐릭터를 부여하고 이용해먹기 위해 만든 그들의 role은 '엄하고 무서운 셰프'다 드라마 파스타에서도, 마스터쉐프코리아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그려진다. 이는 다분히 마스터쉐프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셰프 프로그램들이 미국이나 영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그대로 가져다 쓰다시피 했기 때문이며 특별히 셰프가 무서워야 한다는 어떤 방송 제작 철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말 그대로 리얼리티였기 때문에 주방의 엄격한 분위기를 다큐 식으로 그대로 옮겨놓은 경우가 많았으며 강레오 역시 그 주방의 엄격함을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기에 특별히 가공할 필요 없이 편하게 연기하는 것이 가능했을것이다. 다만 이런 프로그램들은 말 그대로 다큐를 버라이어티화 시켜야하고 초반의 신선함을 후반부까지 이어나갈만한 지속적 소재공급에 한계가 있다. 한마디로 뿌리가 부실한 방송이었으며 당연하겠지만 이런 방송은 오래 가기 힘들다, 시청자들은 겉모습만 흉내낼 줄 알았던 이같은 프로그램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강레오가 잘못한것도 없고 시청자들이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시청자들은 엄격한 프로그램만 계속 보는 것을 거부할 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최현석은 이와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스타셰프 2세대다 그는 그의 대표 출연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지금까지의 셰프와는 전혀 다른 role을 부여받는다. 물론 최현석 본인의 성향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가 정말 요리할 당시에 허세스러운 액션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일상의 그것보다는 훨씬 재미있게 방송에서 표현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허세라는 캐릭터를 부여받았으며 이것이 시청자들에게 아주 제대로 먹혔다. 더구나 그런 허세만 가지고 있던 캐릭터 (김풍) 과 허세없이 묵묵히 실력으로 보여주는 캐릭터 (샘 킴) 사이에서 이른바 '병신같지만 멋있어'라는 갭모에 캐릭터를 발산하며 재미와 실력 모두를 어필하는 데에 성공한다.



필자가 굳이 비속어를 써가면서 최현석의 캐릭터를 표현한 이유가 있다. 강레오가 지적한 부분은 그의 인터뷰 속에서 나온 분자요리나 기타 장르의 다양성이 아니다. 다름아닌 자신이 했던 스타셰프 1세대의 '위엄'캐릭터를 왜 지키지 않았냐는 일갈이다. 즉 자신은 충분히 셰프의 위엄을 지켜가면서 방송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위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왜 최현석은 그 위엄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다른 셰프들의 위엄까지 한번에 깎아버리는 악수를 두고 있느냐는 지적인것이다. 이걸 더 쉽게 말하면 이렇다



- 내가 너처럼 광대짓으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걸 몰라서 안한 게 아니다 -

- 근데 너는 무슨 자격으로 요식업 선후배의 명성을 깎으아가며 너 하나 잘 살겠다는 광대짓을 하는 것이냐 -


여기에 황교익이 참전한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황교익은 아쉽지만 셰프가 아니며 자기 자신이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요리평론가 사이에서도 정말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다시말해 황교익은 요리가 방송이나 미디어계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먹고살기 힘든 다소 절박한 위치에 있다. 황교익의 강레오 디스는 특별히 최현석을 편들기 위함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강레오 논리에 대한 전면적 비판임에 다르지 않다. 다시말해 방송판이 깨지면 셰프들은 지금 쿡방에서 주목한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시 깊은 어둠으로 숨어들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황교익의 판까지 줄어들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상황에서 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는 판단하기 힘들다. 각자 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최현석 역시 작가가 준 그 role을 매우 만족스럽게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따른다. 그는 전문 연기자가 아님에도 전문 연기자도 버거워할만한 어려운 캐릭터를 부여받았으며 그 캐릭터를 완전하게 소화하기에는 매우 많은 빈틈을 보이는 역량적 한계를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만큼 매력적으로 기획되었던 허셰프 캐릭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청자들에게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지금 그것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를 판단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천우의 기회를 맞닥뜨린 사람에게 냉정함을 바라는 것은 사치다.


다만 강레오가 말한 '판을 깨는 것'이 과연 누구인지는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정말 셰프들이 받는 지금과 같은 관심이 현장의 분위기와 위계를 그대로 유지해야하는 정당성이 있는 것인지? 예능적인 캐릭터로 성공하는 것이 정말 요식업계 종사자 전체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고려해야 할 만큼 민감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강레오의 말처럼 요식업계의 엄격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극소수의 게임이 되어야만 하는지 그의 표현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셰프의 희화화라는 치트키를 쓴 최현석이 보여준 요식업계의 전반적 이미지 대중화가 향후 요식업계의 자존심을 말아먹는 것인지를 말이다.


이연복의 이 한마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다리가 만들어졌다. 어찌 보면 사다리는 반칙이다. 그동안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과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교류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사회는 어떤 분야이든 인적 자원의 정체를 낳는다. 주방에도 이른 바 서열이 있고 흔히 말하는 똥군기가 있었다. 그렇게 카스트화 되어 있던 그 카스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강레오다. 그는 사다리가 놓여진 지금 상황에서도 장유유서를 고집했다. 주방의 서열 그대로를 가져가야만 적어도 경험이 적은 셰프들이 셰프의 타이틀을 달고 설치는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은 것 같다. 마치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준과 같은 논리다.


공동화되어 있는 곳에 구세주처럼 내려온 사다리를 타는 데에도 순서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촉발된 이 논쟁의 끝은 어디일까? 결국 그 논쟁을 마무리짓는 것은 대중일것이다. 물론 그 대중의 판단이 정녕 요식업계에 있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굳이 대중이 특정 업계의 흥망까지 고려해가면서 그들을 소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굳이 이 상황에서 슈퍼갑은 다름아닌 대중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들에게 말한다. 요식업계의 문제해법은 당신들 스스로 찾으라고, 당신들 싸움에 애먼 대중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리고 이 판이 싫으면 떠나라고...




posted by RushAm 2015. 6. 23. 13:16

<?>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아이들에게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누군가를 때리는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들에게 되갚아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라요. 


- 대체 내가 뭘 잘못했을까 - 하고요.


대체 왜 그들은 저를 때리는걸까요 제가 뭘 잘못한걸까요? 그리고 왜 선생님과 반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들도 제가 맞는 이유가 당연하다고 하는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만 맞을 수 있을까요?



<!>


넌 잘못한게 없어', '힘내, 괜찮아질거야' 

같은 원론적인 얘기는 집어치울게요. 이 코너는 '실용교과서'지 구역질나는 멘토서적이 아니거든요.


인간사회가 동물사회와 다른 점을 한번 말씀(http://rusham.tistory.com/235) 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해당 내용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그냥 사람들은 동물이 아닌 척 흉내만 내고 있는거지 사실 늑대소년 영화처럼 마냥 본성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살아가는 존재들일 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게 인류에게 있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합의'를 했을 뿐이지 그 합의가 도출된 순간 인간이 동물이 아니게 된 게 아니에요. 강력한 규율에 의해 그 본능이 드러나는 즉 마음가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큰 손해'와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집단의 힘이 있기 때문에 굴복하는것 뿐이죠.


그런데 그 본능이 가장 활발하게 에너지화하는 시기인 1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를 인류는 어처구니없게도 오랜 기간 '치외법권'으로 다스려왔어요. 청소년보호법, 청소년 면책 특권 등으로 말이죠. 물론 그 법은 청소년이 어떤 법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데에 따른 보상 차원임과 동시에 미성년자라는 타이틀을 통해 법적 지위를 가진 성년들이 그들의 갖은 권리를 응당 침해할 수 있다는 편리성때문에 이어져오고 있는거죠. 참정권을 포함해서 많은 권리를 제약당하고 있는 청소년을 통치하고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이끌어내고 싶어했던 국가가 그런 일방적인 권리행사가 헌법의 자유평등권에 침해되는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청소년의 범죄를 '치외법'으로 빼놓은 거에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딜'을 한거죠.



청소년들이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보상으로 치외법을 얻었다면 어른들은 청소년을 통치하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그 통치하는 청소년을 보호하고 그들의 범죄를 컨트롤하며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자세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어른들은 어떤가요? 과연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얼마나 책임을 지려 하고 있나요? 선생님, 사법부 그리고 그들이 반 강제적으로 할당한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의 '부모'들은 과연 얼마나 이에 대해 이해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요? 아마 안하고 있을거에요 그러니까 이지경이지...


그런데 요즘 뭐가 공론화되고 있는 줄 아세요? '청소년을 처벌하자'에요. 청소년의 범죄 처벌 연령대를 대폭 낮추자는 움직임이 공론화되고 있어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죠. 아니 법적으로 누리는 게 거의 없는데 처벌은 하겠다? 이게 무슨 개 풀뜯어먹는 소리입니까? 에초 쇼당이 안맞는 이야기잖아요. 청소년들에게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대신에 법적으로 처벌도 면제해줬던 걸 다시 빼앗겠다면 청소년들에게 참정권도 주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 지위도 부여해줘야 하는게 응당 맞지 않나요? 전 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와 열손가락 지문을 채취해가면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만드는 몇 안되는 희귀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말입니다.






당면한 현실을 되짚어볼게요.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사는 것은 향후에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히고 뭐 이딴건 다 집어치우고 진짜 손해가 막심한 거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 수 있어요. 그건 미성년자로서 제약을 받는 관련법에도 나와있지 않은 그냥 대한민국 국민이 태어나면서 탯줄 끊음과 동시에 부여받는 국민 기본권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은 굳이 친구들을 많이 만들 필요도 없고, 소심하게 찌질하게 살아도 되요. 혼자 교실에서 책만 읽어도 되고 친구들 화제가 굳이 흥미가 없어도 무리해서 의무적으로 끼어들지 않아도 되요. 즉 내가 하고 싶지 않은것, 내가 잘하지 않는 것을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할 필요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왕따'라는 단어를 굉장히 싫어해요. 왕따라는 단어는 그냥 '따돌린다'라는 거거든요.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각종 범죄들이 그냥 뭉뚱그려서 너무나도 소프트한 '왕따'라는 표현으로 치완되요. 그 속에 묻힌 '폭력', '성폭력', '쓰레기무단투기', '오물투척' ...심지어 '고문'까지 정말 구역질나는 액션들이 그냥 '왕따' 딱 한마디로 묻혀버리는거죠. 그리고 이 왕따라는 단어가 지극히 가해자 중심에서 만들어진 단어라는 점도 큰 문제에요. 왕따...즉 따돌린다는 건데, 피해자는 정말 아무런 액션이 없이. 가해자의 액션을 표현한 단어인데 정작 그 단어적 낙인은 피해자에게 붙여진다는거 참 웃긴 세상이죠.


'낙오 공포' 에 미쳐있는 사회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요. 어떤 사람은 매우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호탕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두루두루 사귀게 되죠. 그런 반면 어떤 사람은 별로 그런 걸 좋아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딱히 정답은 없어요. 어떻게 살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걸로 사회적 합의는 끝난거니까, 그런데 이노무 사회는 답을 정해놓은 모양이에요. 이미 기득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서 그들을 맹목적으로 팔로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내면과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하급화시키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있어요.


당연히 그 답은 사람들과 아무런 교류가 되고 있지 않은 소수보다 사람들과 교류를 많이 하는 소수쪽으로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 교류가 비폭력적이던 폭력적이던 일단 장악하면 그쪽이 갑이고 선이며 진리라는 사고방식이 다수결의 원칙처럼 굳어지게 되는거죠. 비폭력적이라면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편, 폭력이 수반되었다면 그 사람 편이 되는 쪽이 내게 있어 더 안전하고 안심이 되니까 그 사람 편이 되는 것, 그렇게 소수는 지지받지 못하고 다수에 의해 다수에 합류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는 게 이 사회에요. 제발 여기에서 끝나면 참 좋겠지만...





문제는 그 합류하지 않은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거에요. '다수가 진리다', '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라는 오지랖과 간섭을 끊임없이 부리죠. 그게 왜 그러냐면 그들 역시 자신들의 선택에 확신이 없는 한심한 사람들이라서 어떻게든 하나로 일원화시키고 싶어하는거에요. 소수 의견이 남아있으면 내가 정말 이게 맞기 때문에 선택한건지, 아니면 권력이나 대세에 휩쓸린 한심한 사람인지 헛갈리거든요. 그것조차 싫으니까, 소수를 어떻게든 내가 있는 다수에 합류시켜서 합리화시키고 싶어하는거에요.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거 잘 알죠?

만약 이런 대세적 움직임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슬슬 폭력을 가하기 시작해요. 그리고 그 작은 폭력은 곧 그들의 동의를 받고 있는 하나의 소수가 또다른 소수인 당신을 탄압하는 것을 방치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방점을 찍게 되죠. 그 소수가 당신을 강력하게 교화시키던, 혹은 그들이 늘 하던 대로 강력한 권력 혹은 폭력으로 당신을 탄압하던 그들을 따르는 대다수는 침묵해요. 그들도 알아요 그게 잘못되었다는걸, 하지만 그들은 이기적이게도 그것이 잘못된 것보다 자기 자신의 선택, 즉 인지부조화가 깨지지 않는 걸 더 많이 바라기 때문에 침묵하는거에요.





정말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성장한 사람 절반 이상이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러분들같은 청소년을 낳고 살고 있는 어른들이에요. 경찰도, 학부모도, 선생님도 말이에요.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뭘 잘못생각했는지조차 모른 채 똑같이 방관자로 살아가고 있어요. 난 노동자가 아니니까, 난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니까, 난 성 소수자가 아니니까, 난 극빈곤층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높게 성공한 사람 (대부분 돈이겠지만)을 비추어 추앙할 뿐 자기 삶이 없죠. 교실 안의 방관자들이 그냥 머리만 커지고 얼굴만 좀 늙었을뿐이지 텅텅 빈 가치관은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여러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그들은 피해자를 '찌질하다, 실패한 인생이다'라고 정의해버리고 있어요. 가해자에 이미 빙의하고 있으니까 가해자의 시점으로 보면 '나같아도 그랬을거야'라는 어처구니없는 공감대를 펼치고 있는거죠. 내가 너라도 진짜 패고싶었을거야, 내가 그 사람이었더라도 진짜 강간하고 싶었을거야 같은...그런 것들, 그런 결론을 도출하고 싶어하니까 그렇게 피해자의 인적사항에 관심이 많은거에요. 가해자에 공감하기 위해서, 피해자 여성은 얼마나 이뻤는지, 피해자 학생은 얼마나 사회부적응 찌질남이었는지를....



가해자에 대한 검증 노력은 조금도 없는거죠.




...해법을 이야기할 시간인데 마음이 좀 갑갑해집니다. 그래도 뭔가 이야기는 해드려야겠죠


현행법상 청소년이 절대보호를 받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선생님이 대신 뭘 하던 그런거 없고요. 부모도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알잖아요. 위에 적은 인생을 살아온 그 방관자들이 당신을 위해 뭘 해줄 수 있는 건 조금도 없어요. 여러분은 누군가를 때리고 싶지 않은 인생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너도 한대 때려!'같은 무식한 소리에는 일단 귀를 닫으시고요. 때리면 즉시 '신고'하세요. 혹시 신고할 여력이 없으신 분들이나 신고하면 더 큰 보복이 될까봐 두려워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고 그 기분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인생관을 가장 덜 깎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주먹보다 법이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아요. 


자기가 손해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교사들이 당신에게 이런 저런 회유책이나 자기만 믿으라는 식의 헛된 개소리를 지껄이거나, 학교에 먹칠하거나 풍파를 일으키지 말라는 협박을 하더라도 결코 굴하지 마세요. 방관자들은 사실 무섭지 않아요. 당신보다 더한 겁쟁이거든요.


만약 경찰조차 방관자로 자라온 꼰대라면 다른 경찰에게 사건을 재배정해달라고 하시면 되요. 꼰대검찰이 '이깟 애들 장난'이라고 던져버리거나 혹은 가해자 부모님이 금수저라서 대충 봐주고 사건을 덮어버리거나 하면 다른 검사에게 사건 재배정을 요청하고 해당 경찰과 검찰을 업무 태만으로 공무원윤리강령 위반 신고를 해두세요. 방관자들은 진짜 어리석은게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게 뭐든 날아와야 그제서야 이쪽을 바라보는 속물들이라서 일단은 당신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빼고서라도 조금 덜 하기 싫어하는 수단을 총동원해서 그 방관자들이 당신을 괴롭히는 소수에게 칼을 겨누도록 해야 하는거죠.


...



미안합니다.

사실 정말 답이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여러분은 잘못되지 않았어요.



절대!


posted by RushAm 2015. 4. 16. 12:06

왜 지겨운가?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요 몇 년 사이에 제법 큰 규모로만 따져도 몇 번이나 일어났다. 그것도 굉장히 민감할 수 있는 금융권 개인정보 유출이 일어났고 일부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실제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고도화된 보이스 피싱으로 이어지고 있고 피해는 짧은 시간 내에 크게 벌어지지 않고 있지만 점진적으로 한 사람씩 일어나고 있으며 일부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마저 보이스 피싱에 휘말리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워낙 많은 선례가 있어서인지 혹은 너무 큰 규모라서 자신의 개인정보 유출이 얼마나 범사회적인 위기를 야기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듯 반응이 무심하다. 이런 사건이 해외에서 일어났으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을지에 대한 부분은 크게 와닿지 않으실 테니 제쳐두고서라도 이들이 무관심한 이유는 첫째로 나한테 당장 피해가 오지 않았으며 너무나도 큰 피해규모로 인해서 그 가치에 대한 판단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그 가치를 오롯이 의 가치로만 평가하려는 공통된 감정적 한계선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상 결정이 나서 승소한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수많은 개인정보 누출이 이루어지고있다.


개인정보 유출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듣보잡 로펌에 휘둘려 공동 소송을 준비한다는 뉴스가 단골로 흘러나온다. 그런데 그 공동 소송의 대상은 늘 해당 회사이며 소송 내용은 금전적 보상이다. 잘 아는 것처럼 이 소송은 한번도 속시원히 이긴 사례 없이 대다수가 패소만 거듭하고 있는데, 사실 그들은 실제 금전적으로 손해를 봤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실제 금전적으로 손해를 본 (유출로 인한 보이스 피싱 등) 사람들이 섞여 있지 않거나 섞여 있어도 그들과 피해 정도를 옆으로 나누어서 도드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는 사법부조차도 그들의 금전적 피해에 대한 심정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세월호가 침몰한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오늘도 그대로 그곳에 있다. 죽은 아이들과 사람들도, 아직 생사가 파악되지 못한 사람들도, 그리고 그 유족들도 아직 그 곳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세월호에 대해 심정적인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소소한 공집합속 교환이 있을 지언정 큰 변화는 없이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사람들과 세월호는 이제 그만 지겹다는 사람들 말이다.

 

이건 영화의 한 장면이다.


너무 큰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일가족 4명이 사망한 교통사고보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받아들이기 더 힘들어하는 것 같다. 마치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포세이돈어드벤처'처럼 영화 스크린이나 TV스크린 속에서나 벌어질 것 같은 일이 현실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그들이 말하는 지겹다라는 키워드가 숨어있다.

 

이건 영화가 아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단 한번도 현장에 가서 진짜 유가족들을 단 한번도 만나본 적도 없으며 적어도 그들을 가감없이 취재한 언론들의 보도를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주류 언론들이 단 한번도 이 세월호 사건을 현실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세월호 보도는 JTBC처럼 늘 팽목항에서 사람들과 만나거나 고발뉴스처럼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사이에서 함께 호흡하는 취재를 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었고 오늘은 시체가 몇 구나 끌어올려졌으며 세월호는 얼마나 큰 배였고 이게 얼마나 참혹한비극인지에 대해서 내래이션했다. 마치 비극영화를 더 슬프게 만드는 연출처럼 그것에만 너무 열중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정론으로 전했다

 

연합뉴스는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 이라는 키워드로 보도했다.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며 이루어질수도 없는 판타지적인 키워드였다. 그러나 이 키워드는 세월호 정국 초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각인된 기사 카피 중 하나였으며 이들 언론이 세월호를 얼마나 영화 속 한 장면화시키는데 열중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현실감 없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아무리 좋은 영화도 두번 이상 보기 힘든데, 다들 영화로 인식하지 않는다면야 사람이 죽은 대형 참사에 인간으로서 그런 반응이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에는 애석하게도 금융권에서 개인정보 유출로 자기 재산을 잃은 사람보다 금융정보가 털렸는데도 평소 늘 오던 스팸 문자 조금 늘어난 수준에서 그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세월호 뿐만 아니라 국가의 과오 혹은 이익단체의 과오로 인해 자식을 먼저 잃은 부모보다 그렇지 않고 자식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에게 있어 세월호의 아픔을 진정 공유할 수 있느냐면 그거야말로 판타지가 된다. 사람은 아무리 감정을 이입해도 당사자가 되지 않는 한 그 가치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사람이, 자식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아픔의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두 번째 가치판단의 오류가 발생한다.

 

...

 

보상금


마치 영화 같은 극적인 연출을 최우선시해왔던 주류 언론들의 세월호 보도에 대한 감상의 결과는 마치 영화 흥행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에 맞춰지는 것 같다. 감독이 얼마를 벌었느냐 배우가 얼마를 벌었느냐가 늘 천만관객 영화 후에 보도되고 그 보도에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게 되듯이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애석하게도 이었다.




 

사람들의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다. 우리나라는 정의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벌써 옛 말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급격하게 핵가족화가 이루어지고 전통적인 가족관이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부모의 사망에 감정적으로 슬퍼하기보다 그들이 가진 유산이 어떻게 배분되는지 그 유서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정말 짜증나게도 이 역시 보편적 미디어인 TV미디어 (드라마)의 혁혁한 성과임에 다르지 않다.

 

수많은 드라마들이 재벌 2세를 그리며 나이든 아버지가 유산을 어떻게 나누어주는지 그리고 유서에 누구의 이름이 오르는지를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다룬다. 아침드라마라 명명되는 막장드라마는 재산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큰어른은 사후에 얼마나 더 많은 재산을 분배해주는지에 대해 가치가 매겨지고 행여 죽기 전에 재산분배가 끝나버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고려장과 다를 바 없는 유배지 (정신병원, 노인요양원)으로 쫒겨나는 모습을 질리지도 않고 그리고 있다.

 

배우조차 예외없었다


그걸 보고 우리는 아 저런 나쁜 사람들이라고 되뇌이며 자신의 도덕성이 아직 훼손되지 않았음을 검증하는 반면 무의식중에 그런 세상이 되고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하는 세상임을 인지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이 리얼스토리 논픽션다큐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고 있으며 그렇게 잘못된 선택을 한 노인 인구의 자살률은 이제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사람은 죽어서 유산을 남기며 그 유산을 남기지 못하거나 혹은 적게 남기는 사람은 아무리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어도 삶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배척당하는 그런 사회, 이런 사회는 사회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폭, 즉 희로애락의 파장이 매우 좁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두려울수밖에 없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사람들은 아직도 영화로 인식하고 있다. 이제 그 다음은 그 영화가 얼마나 흥행했는지에 대한 돈에 관심을 갖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리고 언론은 마치 영화의 흥행 성적과 감독이 이번 영화로 얼마나 떼부지가 되었는지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를 하듯 매번 세월호 유족들이 이번 사건으로 얼마나 금전적 물질적 혜택을 보게 되는지만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좁아진 감정의 폭으로 죽음보다 앞선 금전적 욕망 즉 자기 자신을 세월호에 그릇된 잣대로 투영함으로서 세월호 유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자식을 잃어보지 않은 그들에게 있어 세월호 유족들과 실종자들의 자식을 잃은 슬픔이 그들에게 있어 와닿을리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사실 결코 있을 수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으니까 그들은 애써 그 공감대를 자기 자식에게 대입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제 그만 좀 해라 라고 한다. 니 자식을 잃었다고 내 자식을 잃는다는 가상 체험까지 시키는 그들에게 분노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끔찍한 공포영화를 기피하는 사람들처럼 이 끔찍한 상상을 하고 싶지 않으니 어서 이 이야기가 뉴스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애써 그들의 자식 잃은 슬픔을 내가 부모 잃은 슬픔의 정도와 동일시한다. 같은 가족을 잃은 거니까 똑같을거야,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 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유산에 대한 욕망적 가치가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을거야라고 말이다.

 

그들은 에초에 세월호 사건에 자기 자식을 대입한 적이 없다. 그런 끔찍한 일은 내 금지옥엽에게 일어난다는 상상 자체만으로 고통이니까 그런 건 아이들에게 포르노를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정서를 위해 상상하지도 공감하지도 말야아 하는 유해메체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잃은 부모에게 부모 잃은 본인들의 모습과 심정을 오버랩한다. 아니 물론 부모가 돌아가시면 슬프지, 그런데 그 슬픈 것도 잠깐이야, 결국은 남겨주신 유산이 엄청 크면 부모가 떠나가신 슬픔에 대해 감사하게 돼, 그 유산이 적으면 원망하게 되고- 라는 상식,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덤덤하게 하는 국회의원이 나오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다.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마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내 수중에 떨어질 유산을 계산하듯이 세월호 유족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이 대체 얼마를 받는지를 관심있게 지켜보며 그들 나름대로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정도 금액 이 정도 혜택이면 뭐 그럭저럭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그들로 따지면 유산 잭팟이 터지는 수준의 큰 금액과 엄청난 혜택이 줄줄이 언론을 통해 마치 확정된것마냥 보도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아니 그 정도 유산을 받았으면 나라면 만족스러워서 춤이라도 출텐데 뭘 더 달라고 저러는거야? 그들에게 있어 세월호 유족들의 지금 모습은 자신들이 유산을 가지고 개싸움을 벌이는 스스로의 모습과 오버랩될 뿐이다.

 

상복을 벗을 틈이 어딨어? 출처(http://park5s56.tistory.com/63) 

 

사람들의 감정기관이 퇴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게임을 좀 더 편하게 즐기기 위해 돈을 주고 아이템을 사는 몇 안되는 나라로 꼽히는 대한민국의 게이머, 그들은 게임을 처음부터 고생고생해서 즐겁게 하는 감정을 퇴화시키고 돈으로 단시간에 마음껏 게임 속 권력을 휘두르는 재미만을 과도하게 진화시켰다. 인생도 다를 바 없다. 조금의 고생도 그로 인한 경제적 고통도 그들에게 있어 인생에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돈을 써서 그 고통 없이 편하게 살며 그에 맞는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한다. 가족의 화목 속에서 오는 정겨운 대화와 쌓이는 정은 그들에게 있어 당장은 돈을 벌어서 나중에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는 뒤로 미루어진 가치에 불과하다. 지금 세상은 어쩌면 돈으로 뭐든지 나중에 만회할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해 있고 그렇게 금전만능주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성적 희로애락의 영역까지 침투해가고 있다.



회사는 내부고발자를 금전적으로 압박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는 시스템 부분을 누군가에게 지적당하면 수천만원을 들여 그 시스템을 고치기보다 그 사람에게 돈 몇백을 주고 무마시키는 쪽을 택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 돈을 받는 것에도 그 돈을 받고 그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에도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런 사람들이 지지하고 만들어낸 정부 그리고 그들이 그들을 지지해준 사람들의 방식대로 이 일을 처리하려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정부는 시스템 부분을 고치는 데에 돈을 들이는 것 (인양을 하는 데에 돈을 들이거나 책임질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데에 드는 비용) 보다 세월호 가족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편이 싸게 먹힌다고 판단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은 단순히 그런 차원에서 만족할 수 없는 감정적 손실이 있다는 점을 정부도 그들을 지켜보는 대다수의 제 3자들도 자신들의 내적 가치관으로 그들이 돈을 거부하고 시스템을 고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시스템을 고치는 쪽을 택하면 그들이 받는 돈은 0원이 될 텐데 당장 시스템 고친다고 나한테 득이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들은 눈앞의 몇억을 포기하고 나한테 당장 이득도 안 되는 국가 시스템 개혁을 그렇게 요구하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거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은 고스란히 객나적 해석으로 치완되어 그들이 더 큰 돈을 요구하기 위한 시위로 곡해되어 머릿속에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위로금 금액이 차등 지급된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 1차출처 (중앙일보) 2차출처(국민TV)


감정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당장 피부에 와닿기 직전까지 모르고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들 역시 자식을 잃게 되었을 때 즈음에서야 세월호 유족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무감각해진 건가? 가족을 잃는다는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공감대를 얻기 힘든 논제가 되었으며 그 가족을 잃은 슬픔이 언제부터 어디에서 무슨 교통기관을 타고 얼마만큼 좋은 보험을 몇 개를 들고 죽었는지가 그가 죽은 슬픔보다 훨씬 더 앞서있었는가? 감정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 되어버린 와중에 그들에게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다 한들 소용이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가득해진다.

 

사랑하는 감정,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감정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착각할 뿐이지 돈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수천 수만가지나 넘게 산적해있다. 세월호 희생자가족들은 그 돈으로 되돌리는 것은 고사하고 그 돈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큰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돈 욕심이 생길까? 사람의 본능적 희로애락을 정직하게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금전적인 가치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을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그 후 다양한 선택지를 택했다. 물론 그 중에는 당면한 금전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사람들도 있고, 혹은 이 나라에게 아무런 기대를 걸지 못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이 나라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지금 미디어에서 소리높여 외치고 있는 그분들은, 이 나라를 포기하지도 그 포기하는 대가로 어떤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선뜻 이해한다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의 상태에 계신 분들임에 틀림없다.

 

그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그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은 돈으로도 어떤 혜택으로도 복구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국가라는 보호장치에 의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분들이 바라는 것은 너무 숭고하다. 우리가 지금 진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아프고 힘드니까, 이 아픔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겪게 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 라는 바람 그분들이 그것을 계속 정부에게 요구하는 대신 돈을 포기했기 때문에 숭고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잃어서 그분들에게 어떤 만족감도 얻을 수 없는 일에 스스로를 갈아넣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세월호 1 정부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많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둘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변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묵념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것보다 내 자신이 과연 그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감정적 가치에 대해 얼마나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는지, 세월호는 그 가치를 일깨워주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우리 속에 자리잡아야 한다.

 

국가는 우리의 공공재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 아픔을 다시 만들어낼 수도 있는 이 국가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개인정보 소송도 치완할 수 없는 정신적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이 벌어졌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 대책을 국가에게 요구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도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금전적으로 그 피해를 얼마나 환산해야 하는지에 대해 뉴런을 쓸데없이 소모하지 말고 그 돈으로 치완할 수 없는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지랄맞은 풍토부터 걷어내고 돈으로 치완할 수 없고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한번씩 생각할 수 있는 세월호 사건의 날 4 16일은 그런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

 

슬픈 날이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매우 끔찍한 날이다.


그러니까 내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면 마치 공포영화가 끔찍해서 보기 역겨워서 티비를 끄고 극장을 나와버리는 것으로 해결될거라는 판타지적인 망상에서 이제는 벗어나자, 그리고 마치 그 영화 같은 현실감없는 사건이 현실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내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가치관을 조금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으며 그것을 잃은 사람에게 돈으로 보상받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돈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이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지만, 그것때문이라도 4 16일은 매년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우리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감정적 상실이 벌어지는 일을 다시는 재현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정부에게 어떤 것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분들과 같이 아픔을 나누고 같이 슬퍼해주는 것만큼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분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정말 작은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posted by RushAm 2015. 3. 21. 10:24

이 나라에 참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경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좋은 인재가 권력의 반대편에 모이기 참 힘든 부분이 있다. 자신이 돈과 시간을 들여 공부한 것들을 돈이나 권력으로 환산하고 싶어하는거야 인간의 본능이긴 하지만 예전에 민주화 시위를 더 넓은 식견으로 당시의 민주주의가 독재임을 비판할 수 있었던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선택이 조금은 아쉽긴 하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지금의 새누리당에는 정치 경제 사회학 측면에서 제법 알아주는 인재들이 모여있고 이들의 사회전략은 다소 빈약하고 구태스러운 정치인들과 그들에 의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낡은 새누리당이 지금까지 이 사회를 장악하게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의 정치 지식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의 전략은 마치 4.19나 6.10때 지식인들이 주가 되어 민중을 이끌었던것처럼 당시를 기억하고 당시 수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새누리당쪽으로 이끌어내고 있는것이다.


- 선별적 무상급식을 시행합니다.-

- 부자들이나 밥값을 낼 여력이 있는 사람들까지 무상급식을 실시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죠. -


굉장히 달콤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뿌리깊게 박혀있는 상위 10% 특권층의 사회 기여도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보편적 무상복지와 대척점에 있는 이 키워드가 가진 파괴력은 비단 새누리당 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새누리당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서민층에게도 암묵적인 지지를 이끌어낼 수준까지 올라와있다. 대체 이 정책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매력있게 보이는 것일까? 2015년 연말 정산 시즌 당시 유리지갑들의 반발과 더불어 뜨겁게 달구어진 바로 이 키워드의 대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 부자 증세 -



사람들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이 키워드는 그들의 다소 허망한 이유 '우린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했다'라는 변명과 함께 지금까지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사람들 마음 속에는 이 부자 증세로 얻었어야 할 카타르시스를 얻지 못한 욕구불만이 가득하다. 그러던 와중에 다시금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무상급식 프레임이 다시 등장하고 새누리당, 아니 홍준표는 이 무상 급식 프레임을 '저소득층의 무상 급식'에서 핀트를 바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세금을 올리는 데 동의하지 않은 부자들이 무상급식이라는 보편적 복지로 혜택을 받고 있다 -

- 우리 세금으로 부자들의 아들딸들을 먹여살리고 있다 -


전략적으로 짜여진 프레임에 동요될수밖에 없는 서민들은 보편적 무상급식의 키워드 '저소득층 아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자'라는 부분보다 더 강력한 동기부여 즉 '부자가 이득을 보게 놔둘 수 없다!'가 생기게 된다. 마치 '친일파'보다 더 빨리 때려잡아야 할 '공산당'의 대안 프레임처럼 새누리당은 예전 자유당시절 그대로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차악'으로 상대의 패러다임을 '극악'으로 규정하는 데에 거의 장인 수준이 되어있는 듯 하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이 정책의 민낯을 까발려보도록 하자.



1. 부자 증세는 어디로?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부자 증세에 대한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하도 벽창호처럼 새누리당과 정부가 그에 응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이때를 맞춰 홍준표가 부자들에 대한 분노를 배출할 수 있는 출구로서 '부자들의 무상급식 금지'라는 키워드를 제시했고 사람들은 급격하게 부자 증세에 대한 욕구를 이쪽으로 대신 배출하고 있는 중이다. 



만일 4.29 재보선까지 부자 증세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고 혹여 이 재보선이 여당의 완패로 끝날 경우 정부는 이 부자 증세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큰 부담을 느낄 수도 있었다. 증세가 아니라고 하는 정부의 변명과 동떨어진 조세 체감 지수,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 부담이 고르게 나누어지지 않고 있는 상위 10%들의 조세 형평성이 지속적으로 주목받을 경우 더 이상 '담배는 상류층도 피우니까 형평성에 맞는다'는 개소리가 통하기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홍준표의 '선별적 무상급식' 론이며 이 조례는 단지 한 광역단체장의 국지적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연일 전국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마치 전 국가적 논리인마냥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


자 그럼 그들 말대로 정말 '보편적 무상복지'가 부자들에게 무상으로 밥을 주는 일종의 '혜택'인지에 대해 까발려보도록 하자, 이 프레임에는 꽤나 큰 함정이 있는데 바로 '거울이 없는 방'의 함정이다. 이 기사에 반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상위 10%도 하위 10%에 속하지 않는 가운데 80%에 속해 있는 말 그대로 극빈층도 극부층도 아닌 평범한 가정을 가진 시민들이다. 그들은 지금 거울을 보지 못하고 있는 함정에 빠져 있다.



2. 거울없는 방의 함정




- 보편적 무상 급식 개요 -

1인당 점심 한 끼 급식 비용 : 6천원 x 등교일 25일 = 약 15만원 


상위 10% 극부층이 받는 혜택 : 매월 15만원

중위 80% 서민층이 받는 혜택 : 매월 15만원

하위 10% 극빈층이 받는 혜택 : 매월 15만원


- 선별적 무상 급식 개요 -

1인당 점심 한 끼 급식 비용 : 6천원 x 등교일 25일 = 약 15만원 


상위 10% 극부층이 받는 혜택 : 없음

중위 80% 서민층이 받는 혜택 : 없음

하위 10% 극빈층이 받는 혜택 : 매월 15만원 

+ 홍준표의 안 : 상위와 중위 90%에서 아낀 돈을 하위 10%의 교육복지에 쓰겠다.





거울이 없는 방에서는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만 보일 뿐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말해 이 문제에 대해 지금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상 하위 10%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은 80%의 서민들은 자신의 좌 우에 있는 상위 10%와 하위 10%를 번갈아 보며 아주 단순하게도 상위 10%에게 돈을 주지 말고 그 돈을 하위 10%에 주자는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정책은 '상위 10%'에 쓰이는 돈을 '하위10%'에게 주자는 게 아니라 '상위 10%'와 나 즉 '중위 80%'의 돈을 다 '하위10%'에게 몰아주자는 논지임을 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저 '부자들에게 돈을 줄 수 없다'라는 감정적 논지에 휘말려 자기 자신의 손익을 차마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한 채 무심코 이 선별적 복지안에 찬성을 하고 있다는 거다.


혹자는 '뭐 그래도 부자들에게 혜택이 가지 않으니까 나한테 혜택이 가지 않더라도 괜찮아, 하위 10%에게 더 많은 혜택이 가게 하면 그게 진정한 복지 아니겠어?'라고 어쨌든 부자들에게 타격을 입혔다는 것에 만족할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착각들 하고 계시네요



2-1 부자들의 승리


한 때 교통범칙금을 소득위 차등화시키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고소득 고자산가들에게 있어 범칙금 10만원은 서민들이 느끼는 범칙금 10만원에 비해 부담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예방 효과나 교통법규 준수율 재고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논지였다. 물론 이 이야기 역시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무상복지 이야기하다가 교통범칙금 이야기로 돌려가면서까지 필자가 말하고 싶은 이거다


- 그들은 10만원의 교통 범칙금이 모기 물린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은 위치에 있다 -


부자들이 만약 매달 1자녀당 15만원의 아이 점심 식사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에 크게 기뻐할 만한 위치에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에게 15만원은 우리에게 천오백원 정도의 체감 화폐 가치 이하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수준의 혜택이다. 물론 아주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며 그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데 그건 다음 단락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더 중요한 논제는 '부자 증세'이다. 이 부자 증세 특히 보유 재산에 과세를 한다던가, 소득분위를 더 세분화하거나 상한선을 더 높이거나 하는 문제는 고작 15만원 정도로 이야기할 수 없는 엄청난 타격을 가져온다. 단순 계산으로 매달 몇천 몇억이 왔다갔다 하는 문제인거다. 당연히 이 정도 끕이 되면 민감해질수밖에 없고 어떻게든 이 논제가 국민여론에 떠밀려 법사위까지 올라가는 것만큼은 막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이들도 '상위 10%' 즉 국민 중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으로는 (속은 어떨지 몰라도) 영향력이 크지는 않다는게 문제


출처 : '조세'(稅金)일보


그래서 부자들의 권익을 챙겨주는 세력들이 나서서 부자증세에 대한 분노의 화살을 대신 배설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보편적 복지'논쟁인것이다. 부자들에게 돈을 더 뜯어내는 것보다 부자들에게 가는 혜택을 줄이는 것으로 퉁 치자는 것, 사람들은 실리적인 부분보다 표면적인 키워드에 집착할것이라는 것을 새누리당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이는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보다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자들은 매달 15만원의 복지 혜택을 잃은 대신 매달 몇천 몇억이 들어갈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부자 증세 논란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다. 당장 이 프레임 전환으로 얻은 순익만 몇 만 %인가? 이에 협조한 의원들에게 크게 룸이라도 쏘고 트렁크 골프백에 두둑하게 챙겨드린다고 해도 그건 일시불이며 이 정책의 고착화는 두고두고 혜택을 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부자들은 굉장히 남는 장사를 한 것임에 틀림없다.새누리당 정말 대단한 놈들이다. 고객(부유층)우선주의를 정치에 접목시킨 노하우는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2-2 서민들의 패배


저소득 하위 10%들은 아예 점심값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복지로서 아이들의 점심값을 지원해주는 것은 굳이 보편적 복지를 거론하기 전이라 할지라도 이미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쯤해서 선별적 복지를 찬성한다는 분들에게 묻는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매들 급식비 15만원이 부담스럽지 않고 충분히 감내할만한 금액이었나?


서민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중산층 최면에 빠져 있다. 나는 그래도 저소득층이 아냐,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정부로부터 점심을 구걸하는 거지새끼가 아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억지로라도 프레임을 나누고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다. 어떻게든 나는 하위 10%와 같아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래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혜택마저 '우릴 저소득층 취급하는 거냐!'며 걷어차버리고 있다.


출처 : 인권오름 (http://hr-oreum.net/article.php?id=2132) [그림 :윤필]


야당에서 말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차별'을 누가 하고 있는지가 이제 명확하다. 그들에 속할 가능성이 한없이 0에 수렴하는 상위 10%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그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에 속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중위 80%들이 만들고 있다. (이미 다수라는 측면만으로 확실하지만) 보편적 복지가 가져오는 것들 중 그들 일부가 느끼는 거부감은 '우리가 저소득층이랑 수준이 같다고? 말도 안돼'라는 심정적 저항이 없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현실적으로는 절실히 필요한 15만원이라는 혜택을 저소득층과의 차별성이라는 아무런 명분도 실리도 없는 핵존심을 내세우며 걷어차고 '대신 부자들도 우리만큼 타격 입었으니까 그걸로 됐어'라며 만족해하고 있다. 글쎄? 15만원이라는 금액이 그들에게도 우리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2-1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고...



2-3 복지수준의 후퇴


새누리당이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은 단지 부자 증세를 막는 것만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새누리당은 현 집권당이기 때문에 마냥 부자 증세 철회를 기뻐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지금 현 정부의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증세가 없다면 살림이 팍팍해지는 것은 당연할 터, 그렇다고 당장 줄일 수 있는 예산들을 줄여나가자니 눈에 띄는 복지 예산까지 줄이기에는 국민적 저항이 너무 심해진다. 특히 그들의 고정 지지층이라고 할 수 있는 중장년층 여성들과 노인들의 반발이 두려울수밖에 없다.


이쯤해서 새누리당의 씽크탱크들이 모터를 돌리기 시작했다 '티 안나게 증세를 했던 것처럼 티 안나게 복지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라는 논리다. 여기에서 나온 방안이 '보편적 복지'개념을 깨부수자 라는 것...


대부분 하위 10% 저소득층과 관련된 항목들임을 알 수 있다.


앞서 거울없는 방에서 선별적 무상급식에 대한 설명과 함께 홍준표의 방안을 설명한 바 있다. 즉 90%의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급식 비용을 아낀 약 600억의 비용 예산을 10%아이들에게 집행하겠다는 것, 여기에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기존에 교육부에서 하던 정책과 중복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90%로부터 무상급식 예산을 당장 빼앗긴 했고 이를 10%에게 쓰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예산이 과잉집행되고 있다는 것...


바우처 사업 : 418억 - EBS 교재 구입 및 수강료에 사용 

맞춤교육지원 : 159억 - 영어 수학 과학 등 맞춤형 진로캠프에 보내는 사업

교육여건개선 : 66억 - 기숙형 학사


일단 교육청의 주장을 뒤로 하고 쓰이는 분야를 자세히 살펴보자, 민간쪽이 하나도 없다. 아주 좋게 보자면 이번 정책은 민간쪽과 결탁해서 이권을 챙기려는 정책은 분명 아닌 것인데, 이게 더 문제다. 이 세 가지 예산 분배에 연관된 곳들이 모두 정부 예산을 받거나 혹은 지원받는 준 공공기관 이상 급이라는 것...


한마디로 600억원의 예산이 중복 집행되던 어쩌건 간에 그 돈은 결국 다시 국가가 쓰는 돈을 줄이는 데에 쓰인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EBS쪽에 수입이 늘어나면 당연히 EBS쪽에 들어가는 정부지원금이 줄게 된다. 맞춤형 진로캠프가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방향이라면 당연히 정부의 수익사업이 되는 것이고, 기숙형 학사는 말이 필요가 없다. 심지어 교육부랑 예산이 겹친다는 말은 예산이 과잉집행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이후 교육부 혹은 경남도 예결산특위에서 잉여예산이 생긴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남는 돈은 ...




 ※ 세계잉여금의 처리 순서(국가재정법 제90조)
  ① 지방 교부세․교부금 정산
  ② 공적자금상환기금에 출연(① 사용금액을 제외한 세계잉여금의 100분의 30이상)
  ③ 국채 또는 차입금의 상환 등(①, ② 사용금액을 제외한 세계잉여금의 100분의 30이상)
    - 국채 또는 차입금의 원리금
    - 국가배상금
    - 공공자금관리기금의 융자계정의 차입금 원리금
    - 그 밖에 다른 법률에 따라 정부가 부담하는 채무
  ④ 추가경정예산안의 편성
  ⑤ 익년도 세입으로 이입




결국 아낀 600억을 10% 저소득층에 쓴다는 명분으로 늘어놓았지만 결국은 그 아낀 돈을 저소득층에게 쓴다는 것은 고도의 트릭을 이용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국가예산절감 즉 복지예산줄이기인것이다.


새누리당의 노림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복지 예산을 줄이는 데에 더 큰 동력을 가하기 위해 복지에 대한 개념 자체를 저소득층에게 한정시키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이들이 보편적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거지는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



학교들이 보편적 무상급식 이후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중앙정부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내막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게 에어컨을 가동을 못한다던가, 시설이 제대로 확충되지 못한다던가 등, 무상급식으로 인해 다른 시설에 대한 투자를 제대로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본질적으로 '예산이 부족해서 무상급식의 질을 떨어뜨릴 수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입밖에 꺼내는 교육단체장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보편적 무상급식의 가장 큰 장점은 '저소득층의 소외감 해소' 따위가 아니다. 바로 '복지 수준의 상향 평준화'다 학교 무상급식은 부잣집 아이도, 서민 아이도, 저소득층 아이도 모두 똑같은 반찬과 똑같은 질의 식사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그 식사의 질적 수준은 어디에 맞춰야 할까? 무상 급식이니까 저소득층의 생활수준에 맞는 식사를 제공한다면? 상위 10% 아주머니들, 끗발 좋은 남편을 두신 우리 잘나신 그분들이 당장 학교 교장실로 뛰어들어와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 아니 어떻게 우리 애한테 그딴 쓰레기같은 음식을 먹일 수가 있죠? -


이미 우리는 어린이집 불량급식 사태 때 이에 대한 예고편을 본 바 있다.


상위 10%의 학부모들이 무상급식의 질이 떨어지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다른 걸 먹일 수 있도록 도시락을 따로 싸주거나 음식을 배달시켜주거나 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의외로 아이들에게 들이는 비용은 아끼지 않지만 시간은 극도로 아낀다. 물론 정말 극한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상류층들은 학교에 더 나은 급식을 요구하지 내 아이에게 따로 다른 식사를 제공하는 정성을 들이는 쪽을 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상급식에 한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부자일수록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나 내는 세금을 절세하는 데에 더 작은 금액에 훨씬 민감하니까, 있는 놈들이 더하다는 이야기는 정말로 진실이다.


때문에 학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위 10%아이들이 만족할만한 수준의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 아니 만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0%의 학생들이 먹고 뱉을 만큼은 아닌 수준까지는 급식의 질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아이들은 영양의 불균형이 없이 고르게 질좋은 밥을 학교로부터 제공받고 다닐 수 있다. 필자가 얼마 전에 만나본 학생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는데 지금의 상황을 잘 대변해줄 것 같아서 소개한다.


'학교 싫어요, 야자 너무 늦게 끝나요. 진짜 밥만 맛있지 않았어도 학교 진작에 때려 치우는건데'

(전남의 모 학교 학생)


...


만일 선별적 무상급식이 시행된다면 학교는 이와 같은 상위 10%의 등쌀에서 해방된다. 저소득층에게 걸맞는 수준의 식사만을 제공해도 되기 때문이다. 1인당 식사 비용은 점점 더 낮아질 것이고 예산은 그만큼 절약될 것이다. 하위 10%는 상위 10%와 같은 소수이지만 그들과 같은 끗발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는 영향력이 없이 계속 묻힐 것이며, 그들이 편의점에서 급식 카드가 먹히지 않거나 주변에 살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지 않거나 야당이 말하는 '차별'을 당해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차별적'급식 수준은 아무도 클레임을 걸지 않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한 지속적으로 낮아질 것이고 그곳에서 아껴진 복지 예산은 고스란히 예산 절감으로 이어져 펑크투성이 국고를 매우는데 협조할 것이다.


2013년11월 천안지역 초 중 고등학교 저소득층에게 제공된 점심 식사 도시락 메뉴

80%의 서민들은 암묵적으로 이들 하위 10% 저소득층의 이같은 팍팍한 삶에 연민은 보낼지언정 이들의 주장에 심정적 동의를 보내는 사람은 적을 수 밖에 없다. 뿌리깊게 박혀진 '저소득층다운 삶'이라는 계층적 이분법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재되어 있는 신분제에 대한 의식과 자신은 그 쪽에 속하지 않는다는 핵존심이 이들을 본위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6천원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식사를 제공받으며 상처받는 자존심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인 OECD국가답지 않은 학교 급식을 제공받는 아이들로 남겨질 것이다.


...


3 무상급식과 무상복지가 나아가야 할 길


보편적 무상급식은 단순히 부자들에게 얼마 혜택을 주고 저소득층과 똑같은 혜택을 주는 단순한 열등감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소득층 즉 우리의 낮은 곳의 복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그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그들의 목소리와 같은 것을 내세워야 한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수준의 식사 수준을 해야 하는 것을 '거지들이 어딜 우리처럼 질좋은 밥을 먹으려 해?'라는 마음가짐에 암묵적인 동의를 행한다면 이 나라 복지 수준의 본질적 향상은 요원할 것임에 틀림없다.


복지 수준 향상은 단지 복지 예산을 늘리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복지 예산을 100원에서 200원 늘리는 것으로 저소득층 1명 살릴 것을 2명 살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저소득층 1명에게 들어가는 예산이 100원에서 200원으로 늘어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렇게 만드는 것은 저소득층 하위 10%의 힘만으로는 어림이 없다. 보편적 무상복지는 여기에 상위 10%를 함께 합류시킴으로서 그들의 끗발을 통해 수많은 복지 중 가장 시급하다고 할 수 있는 '아이들 먹이는 문제'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들이 '저소득층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한 저소득층의 생활 수준은 여전히 1970년대 극빈층의 삶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정부는 극빈층을 이들과 같은 논리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딜 거지새끼들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는 것은 결국 거울 없는 방의 오류를 야기한다. 저소득층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80%의 서민과 같은 수준을 영위하면 우리가 저소득층과 같은 생활 수준을 영위하게 되어 90%의 저소득층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사회는 신분계급사회가 아니지만 저소득층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는 만큼 80%의 서민 생활이 저소득층으로 하향평준화되도록 시장경제가 가만히 두고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새로운 격차는 만들어질 것이고 80%의 생활 수준도 덩달아 높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밑에서 밀어올라오면 나 역시 같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여 부자들에게 15만원의 혜택을 주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게 무슨 복지냐고 생각될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들이 이득을 얻은 만큼 그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걷도록 국가를 압박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만큼 우리도 받는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자 거울이 없는 방에서도 우리는 우리 몸의 절반 이상을 볼 수 있다. 당장 80%의 중위층에게 15만원이 언제부터 그렇게 하찮은 돈이었던가?



반대로 그들을 나한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점점 나락으로 밀어낸다고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고 어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사회는 빈틈을 용서하지 않는다. 저소득층을 저 아래로 떨어뜨려 서민 자신들과 격차를 벌려놓았다고 한다면 그 빈틈은 결국 다시 세분화된 소득분위의 서민들이 채우게 되어 있고 결국 지속적인 하향 평준화는 이쪽이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부자들과 하위 10%가 같은 밥을 먹게 한다는 것 그래서 부자들이 국가에 자신들 수준에 맞는 밥을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무상급식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복지 수준 향상의 가장 큰 지름길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 이 사회의 복지 수준을 높일 수 있는 힘은 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그들을 인질로 옭아매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식생활 수준과 복지 수준이 함께 높아질 것을 기대해야지 아래를 바라보며 하위10%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공분하여 선별적 복지에 동의하며 선을 긋는 하등 도움이 안되는 그릇된 우월감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무상급식은 우리 나라 복지의 극히 일부분이다. 모든 사람들이 '내 문제'로 인식할 때 이 나라의 복지의 질이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곧 내 문제가 되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것이 함께 변하는 나라가 우리가 늘 보아오던 북유럽 복지 선진국이 지금의 복지 수준을 완성한 국가 모델임에 다르지 않다. 


...


더 이상 북유럽을 부러워만 하지 말고 

우리부터 이 나라를 북유럽처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posted by RushAm 2015. 1. 5. 14:32

작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드라마 미생, 그리고 2014년 연말부터 2015년 연초까지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국제시장 혹자가 말하듯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의 가혹함을 구구절절히 보여주며 당신은 아직 완생이 아닌 미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가혹했던 과거를 실제로는 가혹하지 않고 오히려 잘된 삶, 이른바 미생을 완생이었다고 최면을 거는 것 둘 다 모두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드라마이며 영화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선악은 없다. 만듦새라곤 형편없고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그 영화를 만들었다거나, 보는 사람들이 뭔가를 착각해서 쓸데없는 눈물을 흘리건 특별히 상관은 없다. 어쨌든 그 영화, 드라마로 인해 자살인구가 줄어든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나 그것들을 정치에 이용해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미생을 보지 않고, 국제시장을 보지 않고 말하는 자들을 위해 잠시 그 두 작품을 본 감상과 내가 정치인이라면 그 둘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 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 두 작품이 세대와 연령대가 비록 갈렸을지언정 대한민국을 열광시키고 있는거라면 분명 그것이 지금의 민심일것이며 그 민심 속에 문제의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미생에 열광했는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칭찬에 목말라있다. 칭찬이라는 물건은 하나도 듣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듣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고래마저 춤추게 만드는 마약이기 때문이다. 이 칭찬이라는 물건의 본질은 의외로 위로와 많이 닮아있는데 이른바 영혼없는 칭찬이 되지 않으려면 그 사람이 무엇에 가장 어려워하고 있으며 그 어려운 와중에 무엇을 해냈는지를 캐치해내야만 한다. 답정너 이론처럼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이 칭찬받고 싶은 분야가 반드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미생은 그런 젊은 세대들에게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칭찬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즉 이 작품 자체로 지금 고통받고 있는 각개각층의 젊은이들이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미생 만화 그리고 드라마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이 드라마와 만화가 잘 된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화제가 되고 있다는 부분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나 혼자 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나 뿐만 아니라 내 옆사람도, 윗사람도, 아랫 사람도, 부모가족들도 다 한번씩은 볼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그들로부터 그랬구나~ 네가 저렇게 힘들었구나 라는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일말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게 된다.

 

물론 이 드라마로 인해서 실제로 무언가가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건 이미 좌절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칭찬이 무척 고프다. 헛소리로 가득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따위에 너무나도 지쳐있다. 신기루 같은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활자공해 자기계발서에 신물을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론 당장 그들에게 긴급처방을 내리던 아니던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과 국가비전임에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이미 그것이 당장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당장 받을 수 있는 것, 비록 잠시 언 발에 오줌을 누는 정도의 따스함이겠지만 그마저도 급하기에 그들은 이 드라마로 인해 어렵게 얻은 반전의 찬스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왜 미생에 열광하면 안되는가?

 

문제는 이 드라마와 이 드라마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을 바라보는 정책 실무자, 즉 정부의 생각이다. 서두에도 말했듯이 이 드라마로 인해 무언가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이 드라마를 보고 진짜 무언가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를 가지기에는 이 드라마가 가지는 현실고증적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이 드라마로 인해 정부가 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매우 큰 거부감이 든다. 비단 모 언론이 멋대로 작명해버려 실제로 정부가 그렇게 작명한 것으로 굳어져버린 장그래법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말이다.

 

윤태호 작가가 ‘정부가 정말 만화를 다 보고 이 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반응을 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정부처럼 단순무식하고 보수적인 집단은 이 만화를 모두 정독하기도 어렵거니와 정독하려는 시도를 해서도 안된다. 이 만화 속의 세상과 그 만화가 가지고 있는 여론 파괴력에 중독되어 미생이라는 프레임에 완전히 갇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미디어가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도가니의 사례를 들며 이러한 미디어의 역할에 순기능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도가니방지법이 새로 제정되기는 했지만 도가니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당시 도가니 사건이 당시 법 체계가 허술해서 발생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미디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인기영합주의에서 벌어진 입법경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사법력의 강화에서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그래법의 탄생 배경 역시 이러한 국회의원들의 인기영합주의에서 나온 여론몰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으며 장그래법이라는 네이밍 자체에서 나오듯이 그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데에, 혹은 비정규직의 근속 기간을 늘리는한마디로 2년 안에 해고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에서 급조한 법이라는 점이 공분을 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들에게 어떤 계기로 인한 입법과 그로 인한 문제해결이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을 정도니까

 


입법은 특정 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편리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사법은 절대적 중립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개념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법을 입법하는 것 이상의 부담을 수반한다. 비록 지금의 사법체계가 지극히 한쪽에 치우치고 있어 특정 계층에 희생과 손해를 강요하는 체계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채로 오랫동안 굳어져있다면 그것은 이미 이득을 본 쪽에서 자신의 몫이라고 단정해버린 뒤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에는 단지 지금의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범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하는 매우 큰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그런 어려움에 직면한 가운에 등장한 드라마 미생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간신히 지금의 사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기성세대들에게 어필하고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움직임의 동력을 얻은 셈이다. 어쩌면 기성세대와 젊은세대간의 오랜 세대의 벽 두께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열 마디 말 중 한 마디 정도는 귀를 기울이게 만들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대단하신 입법도, 당장의 체감가능한 변화도 아닌 그저 자신들 세대들이 살아가는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공감대로서 나누길 바랬던 것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와버렸다.


...



사람들은 왜 국제시장에 열광하는가?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 연령대 중에 과연 이 영화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의 기성세대들을 칭찬한다. 당신이 살아온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미생이 지금을 사는 현실의 젊은이들에게 지금 사는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주고 때론 칭찬해주는 드라마라고 한다면 국제시장은 지금까지의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아온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말해주고 때로는 칭찬해주는 영화다. 관객들은 비록 자신의 삶과 완벽하게 닮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의 삶 중 극히 일부분, 영화 장면 중 극히 소량의 분량 속에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것이 영화의 결론에서 삶의 모든 부분을 일컬어 잘못 살지 않았다라는 키워드를 던짐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칭찬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들어주는 영화가 되어준 셈이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중 장년층 관객들은 정말 다양한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모든 관객이 전쟁에 참전하고 또 파독광부로 파견되는 인생을 살아왔을 리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그 시대를 살아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생이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국제시장은 기성세대로 하여금 저 시대에 살고 있었던 모든 아버지 들에게 우리는 지금 젊은 세대들이 고생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심한 고생과 핍박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마치 영상실록처럼 담아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 역시 마음속으로나마 지금의 젊은 세대 못지 않은 스팩타클한 젊은 시절을 살아왔다는 점을 회고하는 선에서 그칠 뿐이지 달리 이 영화로 인해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미생을 보는 젊은이들처럼 그들 역시 단지 이 영화로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를 살아왔던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대변하고 이해받을 지도 모를 마치 오래된 앨범 속 자신의 젊고 멋진 시절의 사진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 정도에 그칠 뿐이다.

 

얼마 전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 90년대에 나왔던 가수들의 명곡과 그 당시의 무대들을 그 당시의 가수들이 부르며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모처럼 TV앞에 모여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무엇인가? 무엇이 TV조선밖에 보지 않는 부모님들을 TV앞으로 끌어당겼을까? 그리고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지금의 10대들에게 90년대 가수들이 밀레니엄 가수들보다 더 나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만큼 음원은 폭발적이지 않았고, 부모님들은 무한도전이 끝난 뒤에 주저없이 TV조선으로 채널을 다시 돌렸을것이다 세대간 공감대 형성은 잠시간의 신기루는 가능할지언정 아직은 벽이 두껍고 차갑다는 것을 자각하는 정도에 그친 것을 보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국제시장에 열광하면 안되는가?

 

보수단체와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적는 뉴스미디어들이 잇따라 이 영화에 대해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촉구하며 기성세대를 인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인정이란 무엇일까? 기성세대들이 이 영화로 인해 무언가 변화가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미디어들이 이렇게 당신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부추기면 문제가 매우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지금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의 관계는 상위 1%가 나라 전체의 80%를 쓸어가고 남은 20%를 가지고 뻇느냐 빼앗기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현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사회적 지위 상 은퇴 후 자영업의 길로 들어선 대다수와 일부 회사에 남아 사원을 선발할 권력을 가진 임원이 되어 있거나 혹은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대부분 부동산 버블 때 끝물에 물려서 혹은 잘못된 주식투자나 금융기관의 트릭에 빠져 모아둔 재산을 까먹고 있는 세대들이다. 자신의 집값이, 주식자금이 곧 노후자금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언젠가 투자한 원금이라도 되돌아온다는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현실을 버티고 있다.

 

결국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공통된 부분은 회사 혹은 가게의 손익이 곧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을 가늠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내수가 침체되고 나빠질대로 나빠진 경제와 그에 따른 금리 하락, 그리고 치솟는 물가와 세금으로 인해 불안한 노후에 겁을 먹고 있으며 하도 집값 하락과 주식투자에 하소연 한 마디 못하고 자산을 털려본 경험이 있어서, 자기자산손실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피 같은 내 돈’


 

그런 기성세대들에게 보수 미디어들은 이 국제시장 영화에 가능한 큰 의미를 부여하도록 유도한다. 당신들은 이 영화를 통해서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고 지금을 살면서 그저 징징거리기만 하는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지금 그들이 받는 고통은 우리가 받은 고통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필할 것을 종용한다. 이쯤되고 보니 그냥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그로 인한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던 기성세대들을 동요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그때 당시도 마찬가지로 내 집을 갖는 것이 정말 어려운 시대였으며 젊은 시절에는 푼돈 받고 일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부당한 처우에도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만 하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 그리고 그 생각을 어떻게든 기성세대들에게 회상하도록 만들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하소연에 다시 한번 우리 때는 그거보다 더 했어라는 지극히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이 한마디의 파급효과는 세대간의 빈부격차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세대간 간극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그들의 권리 주장을 대신 막아줄 총알받이를 자청하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들은 당장 들어가는 자영업에서의 아르바이트 임금과 주휴수당에 대해 공론화되고, 집값 현실화와 부동산 정책을 외치며 빚을 내서라도 자신들의 집을 사주지 않고 버티는 젊은 세대들에 대해 내 재산을 가져갈 생각만 하는 도둑놈들이라는 적대적 감정을 갖게 됨으로서 문제 해결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인 기초경제의 반목을 만들어낼 것이다.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알바비가 아까워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다시금 젊은 세대들의 최저임금 현실화나 노동 환경 문제 개선에 대한 정책에 심정적인 반대가 이어지게 된다. 비정규직 문제는 그깟 고생 조금 하고 징징대는 꼬락서니로 보일 것이며 노동운동은 우리 때였으면 그냥 때려잡았어야 할 빨갱이들일 뿐이다. 이렇게 다시금 기성세대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변화는 결국 젊은 층도 기성세대도 아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빨대를 빨아대고 있는 상위 1%의 공고함만이 남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기성세대들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네가 겪었던 고생, 충분히 알아 

그런데 젊은 놈들은 너만큼 고생하지도 않고 저러고 돈을 달라고 하고 있잖아

그게 맞는걸까

적어도 너만큼은 고생을 겪게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네 젊은 시절이 덜 억울해지지 않겠냐고?

 


 

지금 필요한 건 마약이 아니라 항암제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의무와 부당함에 대해서는 겪기 전과 겪고 난 이후가 판이하게 다르다. 겪기 전에는 내 자신의 일로서 그 부당함을 타파하는데에 적극적이 되지만 정작 그것을 모두 겪고 이제 더 이상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이 된 다음에는 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내가 겪은 것보다 그 다음 사람이 덜 고생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 군대가 딱 그렇다. 아직도 술자리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더 부당하게 군생활을 했다는 것에 대한 자랑배틀이 벌어지고 군 문화 병영 개선에 대한 정책이 나오면 그들 중 일부는 당나라 군대냐며 그들의 처우가 자신이 있었던 때보다 나아지는 것에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단통법 실시가 공론화될 때, 이 법에 반대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실시 3개월이 지난 지금 단통법은 아직까지 큰 여론적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비교적 순항중이다. 여기에는 제 값을 다 주고 산 사람들과 제 값을 다 주고 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 값을 다 주고 산 사람들이 가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이번 단통법으로 인해 아무도 싸게 사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하면서 그동안 적대시했던 이른바 휴대전화 구입 능력자들이 손도 못쓰고 데꿀멍하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이 법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여론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미생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간극만을 집중 조명하며 비정규직이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환경만을 조명했다. 정규직이 된 수많은 동료들은 비정규직인 장그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던 차장급 간부는 비정규직인 장그래를 위해 사표까지 던지는 기행을 보인다. 드라마 혹은 만화의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픽션이라기에는 다소 힘빠지는 결말이다. 지금의 회사 환경이 주는 문제점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측은해하거나 혹은 차별하고 배척하는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측은하게 볼 정도로 비정규직의 처우가 형편없다는 데에 있다.

 

미생에서 그려지는 정규직의 모습은 정말 장그래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안정적인 모습이었는가? 정규직이라고 해서 장그래보다 더 일찍 퇴근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정규직이라고 해서 회사로부터 특별히 인격모독을 덜 당하거나 스트레스를 덜 받는 모습 역시 없었다. 어떤 정규직 사원은 아버지 환갑 가족여행을 회사의 어처구니없는 대우에 포기해야만 하고, 어떤 간부직원은 임신 출산하는 것과 아이를 보육하는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조차 조직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등 회사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옭아매는 어리석은 모습뿐이었다.

 

비정규직 장그래의 임금 통장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그들에게 낙은 단 하나, 비정규직보다 낫다는 단 하나의 우월감 뿐이다. 적어도 비정규직보다는 생존의 위협을 덜 받는다는 믿음 하나로 회사에 메여 있으면서 종신고용도 보장되지 않는 지금의 환경에서 무엇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지도 모르는 채로 회사가 자신을 갈아마시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이미 IMF를 겪었고 일본식 종신고용제 기업문화가 파괴된 이상 정규직이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정규직일 수 없다. 정규직을 고용함으로서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급여 이상으로 높지만 그만큼 정규직으로 일함으로서 회사로 인해 자신의 삶과 시간을 희생하는 비중 역시 비례해서 늘어날수밖에 없으니까 사실상 정규직 문제는 회사나 근로자 양쪽 모두에게 지금 시점에서 결코 메리트를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 향상이다.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반드시 정규직보다 동일 노동 대비 낮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법제화되어있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채용의 수요 공급 전권을 거머쥔 기업의 이익과 편리성에 의해 주물러지고 있는 것에 다르지 않기 떄문이다. 여기에는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람들의 유일한 엑스터시 비정규직보다 낫다라는 부분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회사가 준 마약 비정규직에 대한 지위적 우월감에 취해 정규직으로서의 권리 향상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스스로 꿰매버린 지금의 정규직과 기성세대 임원들의 반 상생적 관념 역시 일조하고 있다.

 


기업들은 달라진 경영 환경에서 비정규직이 필요하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이 만약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같은 임금이었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결국 그들은 달라진 고용 환경을 핑계로 단가가 하락할대로 하락한 비정규직을 더 싼 인건비로 채용할 수 있는 환경만을 바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과 품위 그리고 지금까지 회사에서 살아온 권력과 짬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발밑에 깔고 갈 정규직이 몹시도 필요한 사람들이다. 비정규직은 그런 정규직을 달래주기 위해 먹이는 사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것이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아먹을 정규직이 없으면 회사는 밑받침 뿌리가 없이 꼰대 간부들만이 설치는 망조 직전의 회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원이 하나도 없는데 대리가 어떻게 대리일 수 있으며 과장이 과연 지금의 과장이 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한층 한층 무너지면 사장은 더 이상 사장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온다. 아무도 일은 하지 않고 일은 할 줄 모르면서 시킬 줄만 아는 자들이 간부로서 돈만 받아가는 회사, 그런 회사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누구도 회사를 위해서 희생하지 않고 돈만 챙기고 책임감 없이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준비가 충만한 사람들로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한 회사가 말이다.

 


우리가 주장해야할 것은 전 인구의 정규직화가 아니다. 같은 임금이라도 보다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떤 회사든지 간에 내가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하고 쉬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인생의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미생을 보고 해결하겠다는 얼빠진 소리 대신에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느끼게 만드는 문제들을 철저하게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할것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부러워하는 만큼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부러워하는 상호간의 장단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데에 정부가 아닌 기업이 스스로 나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규직이 되어서도 인생 자기결정권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육아휴직과 안식년, 연차의 자유로운 사용 등 보다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시키는 무리수보다 단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파급효과만으로 말이다.


...

 

인생 자기결정권

 

지금의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의 적은 임금만으로는 결코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인생결정권을 갈아넣고서라도 정규직으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그런 그들에게 날아오는 혹독한 정규직 회사생활은 응당 견뎌야할 필수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저 그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밀려나면 더 나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못하고 심장에 고름이 쌓여가면서 말이다.


 


기성세대들은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영화 국제시장은 그런 그들에게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론들은 그런 기성세대들에게 젊은이들도 너와 같은 고생 정도는 거치고 너정도는 살게 해주어야 공평하지 않겠어? 그래야 네가 덜 억울할 것 아냐?라며 그들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공평하게 갈아넣는 것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며 유혹하고 있다.

 

전 국민이 인생 자기결정권을 포기하는 날이야말로 지금의 1%기득권 축제의 날이 될 것이다. 회사가 필요한 시기에 결혼하고 회사 일에 지장 없는 시기에 애를 낳고 애를 기르면서 회사 일에 지장이 없어야 하며 내가 몸이 아파도 회사에 나가야 하며 모든 일에 회사가 우선시되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나의 생활, 취미, 인생 철학, 가족과의 화목함 등이 하나 둘씩 회사에게 갈아먹히며 살아간 뒤에 남은 인생조차 보장해줄 필요가 없는 1%의 파라다이스 우리는 어쩌면 얼마의 돈을 주고서라도 살 수 없는 20 30 40대에 누려야 할 다시 못 올 그 순간들을 회사에 갈아먹히면서도 그에 대한 응당한 대가조차 외치지 못하고 숨죽여 살고 있지는 않았는가? 아니 그렇게 숨죽여 살도록 방치한 정부는 없었는가? 그렇게 숨죽여 사는 사람을 마음껏 갈아마실 수 있도록 해달라며 정부에게 침묵과 방관의 대가를 지불한 1%는 없었는가?





...

 

2015년의 대한민국은 인생 자기결정권을 헌법이 보장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거 어렵고 거창한 일 아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위 하 동일 노동을 했을 경우 동일 임금으로 임금 차등을 없에는 것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인생자기결정권이라는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권리, 내가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가치가 향상될 때 비로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것이다. 그것을 오롯이 희생하고 들어온 정직원에 대한 대우도 당장의 비정규직 차별로 인한 일시적인 우월감을 주고 갈아넣는 재료로 보는 지금의 시각보다는 훨씬 더 인간다워질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미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당한 기성세대들에게 고작 영화 한편으로 자기위안을 벌이라며 부추기는 작태는 때려치우고 적어도 몇십년간 정부를 믿고 하라는 대로 이 나라으 밑바탕에 자신의 인생을 갈아넣어준 기성세대들에게 OECD 사상 최고수준의 노인빈곤률로 되갚는 변태짓거리로 보답하는 짓거리보다 진정으로 그 인생 자기결정권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희생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야만 한다. 혹여 그들이 갈아먹힌 대가가 엉뚱한 새끼들한테 처먹혔다면 토해내게 만들어서라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세대간의 반목 조성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총구를 세대끼리 겨누게 만드는 작태는 이제 작작 집어치울때도 되지 않았는가?

 

인생 자기결정권은 임금 몇십 %정도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가격에 팔지도 말아야 한다.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정규직 근무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라, 비정규직만 못한 정규직의 대가를 임금차이로 퉁치고 인간으로서의 인생을 너무 쉬이 포기하지 말지어다.

 


모쪼록 새해에는 그대들의 인생이 오롯이 그대들의 것이길 바란다.



2015.1.5

Rusham

posted by RushAm 2014. 12. 19. 03:24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밝혀둘 것은 본인의 정치 성향은 통합진보당이랑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새누리당과도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는 꼭 어느 한 쪽의 정치성향을 택하지 않으면 반대편 적으로 모는 이상한 이분법 적대적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꼭 누군가를 지지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있고 이러한 압박감이 국민 모두를 알 수 없는 의무감으로 이끌어 1번을 찍게 만드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자처하고 아무튼 본인은 이 둘을 모두 지지하지 않지만 무당파도 부동층도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나서 시작하고자 한다.


1. 정당해산심판청구는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고 그 주체가 대한민국 법무부가 될 수 밖에 없어서 다소의 논란거리는 있지만 적어도 이들이 누군가의 아버지처럼 초법적 사태를 일으키는 건 분명히 아니다. 나 역시 새누리당과 지금의 정권을 그다지 좋게 보고 있지는 않지만 정당해산심판 청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분명히 법적으로 보장이 되어 있는 나라다. 그것을 단지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 만일 이게 문제가 된다고 한다면, 진즉에 정당해산심판청구의 기초가 된 위헌정당 해산제도라는 것 자체가 없어졌어야 했지만 그 또한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자체를 가지고 지금의 정권이 해산 청구 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인 쪽으로 비판을 몰아가서는 매우 답이 나오기 곤란하다. 문제는 그 내막이고 실체다. 통합진보당이 대표적으로 놓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코너에 몰리니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2. 그렇다면 정당해산심판청구의 이유가 무엇인가?


위헌정당 해산제도에 대해서 먼저 자세히 알아보자




위헌정당 해산제도란 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하려는 비민주적 정당의 조직적 활동으로부터 헌법 질서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헌법 보장 제도를 말한다. 방어적 민주주의에 기반을 둠으로써,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거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것을 막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헌정당이란 크게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될 수 있다 '비민주적 정당'과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정당'을 두고 있다. 통합진보당이 여기에 해당되는지를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시점에는 헌법재판소가 그에 상응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다.


법무부가 내세우는 통합진보당 해산의 근거는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에 따르고 있다. 여기에서 이석기 의원과 RO조직원의 내란음모와 RO조직의 실체성에 대해 항소심 무죄를 받은 상태다. 뭐 그들이 실제로 내란음모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지 아무튼 판결이 그렇게 나왔다. 그런데 법무부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통합진보당'이라는 당에서 '내란음모'라는 키워드가 나왔으니 이는 앞서 위헌정당 해산제도의 두 가지 키워드 중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 에 그 의의를 두고 이들 정당을 해산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우선 지금은 법무부가 내세우는대로 RO조직과 내란음모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게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이 충분히 갑론을박을 하고 계시기때문에 이 단락에서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다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 에서 '행위'라 함은 실제로 이루어진 어떤 실체적 진실에 근거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긴급조치를 발동한다던지 계엄령을 선포한다던지 등의 행위 역시 사실상 이 나라가 독재정권이 한 번도 없었다는 역사적 기록대로라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를 실제로 보여주었던 당시 여당들이 있었다.


그들 스스로 이 소송이 촉발된 이유가 '내란음모' 사건 즉 '음모', 다시말해 '범죄사전공모'에 있었다면 이것을 과연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인지가 이번 소송의 가장 큰 핵심사안이 될 것이다. 거기에 그 '범죄사전공모'라는 이른바 추상적 공모를 '행위'로 간주했을 때 통합진보당의 모든 당원들이 당론으로서 이를 정하고 행위에 옮기는데 동조하고 협조했다는 증거가 나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 행위가 실체화된 사건으로서 한 번 이상의 시도 및 성공 혹은 실패 사례로서의 사건 기록이 있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바로 지금 사례가 그나마 없어서 세계에서 탈탈 털어서 고작 세 개 나온 정당해산심판청구 사례 중 하나인 독일의 사례 때문이다. 독일에서 정당해산심판청구에 의해 해산된 독일 공산당은 내부에 스파르타쿠스라는 내란음모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통합진보당이랑 비교가 되는데 사실 무려 60여년 전의 냉전시대 국가와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 자체도 다른 사람들 말마따나 기가 찰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그들은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단 반란 재연


독일 공산당의 전신이자 독일 공산당이 창설된 이후에도 내부 조직으로 활동해왔던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 공산당이 창설된지 1년만인 1919년에 스파르타쿠스단 반란 사건을 실제로 일으켰다가 실패한 전력이 분명히 있다. 즉 한국의 헌법으로 계산해봐도 '행위'로서 치부할 만한 피할 수 없는 증거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그 행위가 정당해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지금의 통진당 해산 청구처럼 단지 계획 단계의 증거들을 가지고 몰아부치는 식의 진행이 되었지만 적어도 모양새에 있어서는 해산의 명분을 갖춘 셈이 되므로 독일은 이 역사에 다른 나라가 뭐라고 할 지언정 나치의 흑역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흑역사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는 당당함을 갖출 수 있다.


일단 지루하기 짝이 없는 팩트는 이렇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지금 입을 열고 있는 누구도 헌법재판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더욱 관심을 갖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헌법재판관이 아닌 자들이 떠들고 있는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통합진보당 해산의 필요성'이다. 



3. 정말 통합진보당은 해산청구를 해야 할 만큼 무쓸모한 정당인가?


새누리당은 항상 당론으로 통합진보당을 비판해왔다 그 키워드는 '빨갱이 정당', '북한을 찬양하는 정당', '태극기를 걸지 않고 애국가도 부르지 않는 정당' 이라는 사유다. 이런 정당이 국회에 있어서는 되느냐는 것이 그 논리다. 대부분의 새누리당 지지자들도 이 논리에 동감하고 지지를 보내고 있고 굳이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아니더라도 이들 논리에 동감하는 사람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정당 해산의 사유가 될까? 앞서 서술한 위헌정당 키워드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비민주적 정당'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정당'


새누리당은 자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정당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내막은 어찌될지언정 파시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누리당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귀를 살펴보자




새누리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보수적 가치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자기혁신과 희생 그리고 책임정신을 ...(후략)




보다시피 새누리당은 자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정당이다. 자 그렇다면 정당은 어떤 조직인가 정당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 추진하고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자발적 조직이다(정당법 제2조)


자발적 조직이라는 정의를 썼다. 많은 국민들이 착각을 하고 있지만 자발적 조직이라 함은 국가가 법적으로 돈을 주든 말든 상관없는 자유로운 조직임을 의미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얼마든지 1인으로 정당을 만들 수도 있고 정당법에 의한 활동을 할 수 있다. 이 정당의 정의 그리고 자유에 있어서 국회의원이 몇 명 있는지, 그리고 그 국회의원 수에 따라서 세금을 받고 있는지 못 받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당법은 부칙으로 세금을 받고 있는 정당에게는 특별한 제약이나 별도의 정의를 만들어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을 하나의 정당이라고 생각해보자 참고로 필자의 방에는 365일 태극기가 걸려 있다. 아래집 아저씨는 국경일에는 반드시 발코니에 태극기를 계양한다. 그 아래집에 사는 젊은 부부의 집에서는 태극기를 계양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필자는 애국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고 아래집 사람은 빨갱이가 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은 '개인의 사조직'이며 국민의 강제 의무를 제외하고 난 뒤에는 국가보다 우선하는 조직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정당을 '국가 조직'으로 보는 시각에서 문제가 출발한다. 정당은 '그들의 집'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발적 조직'이라고 정당법이 정해놓았다. 국가한테 허가받고 설립하는 조직도 아니며 누구나 조직할 수 있고 해산할 수 있다. 하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당이 많다보니 정당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그들로 인해 이 정당에 대한 이미지가 막대하게 왜곡되어 아마 지금의 통진당에 대한 논리적 오류가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통합진보당이 '국회'에 출석했을 때 애국가를 제창하지 않았다거나 '국회'에 걸려있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우리는 저 태극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내립시다' 라고 주장했다면 적어도 새누리당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사조직'은 정치적 제도장치가 발휘되지 않는 곳이다. 그곳에서 하는 공식 행사에 애국가를 불러야 할 이유도 태극기를 걸어야 할 의무도 특별히 없다. 


사기업과 사조직이 팀을 만들어 맞서는 스포츠 경기에 국민의례가 있는 나라.


어쩌면 야구 경기 시작하기 전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하는 미친 짓 때문에 벌어지는 집단적 착각이 불러온 최면 효과가 아닐까 하는데 새누리당이 당 내부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건다고 해서 새누리당이 '이 나라에 필요한 정당'임을 그것만으로 증명할 수 없듯이 통합진보당이 '당내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태극기를 걸지 않는다고 해서 '이 나라에 필요하지 않은 정당' 이라는 결론에 봉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방에 365일 태극기가 걸려 있다고 해서 국경일에만 골라서 태극기를 거는 아래집 아저씨보다 내가 더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될 수 없다. 그것은 한낱 국가적 상징물로서 대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치 성향이란 애국가나 국기 정도로 알아챌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에 맡길 부분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있는 정당이 과연 누구를 말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독일군 기총수가 벙커에 숨어 있다가 연합군에 포위되자 웃으며 미국 만세를 외치다 다급하게 미국의 국가를 부르며 자신이 독일 사상이 아님을 강렬하게 어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합군은 그의 모습에 연민을 느껴 그를 풀어주지만 그는 곧바로 독일군에 합류하여 그를 살려준 연합군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


자 여기까지는 어떻게 이해해주실 분들이 조금은 생길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마 여기까지 이해를 하시던 분들도 '북한을 찬양하고 북한의 정책에 동조하는 정당'이라는 키워드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빨갱이 정당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오랜 기간 터부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당이 진짜 빨갱이 정당인지를 떠나서 우리나라에 빨갱이 정당이 있어서는 안될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말하는 대한민국에 빨갱이 정당이 있어서는 안될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국회라는 조직은 국가정책 및 법을 입법하는 중요한 조직이므로 국가 안보와 관련된 정책이 발의될 수도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빨갱이, 즉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자들은 있어서는 안된다'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그런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서 내부를 혼란시켜서 내란을 일으킬 기반을 마련하고 그 틈을 타서 북쪽 애들이 우리를 꿀꺽 해먹을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첫번째 주장에 대해 필자는 단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다.




'그럴거면 이북 5도청은 왜 만들어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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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이북5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 헌법상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며 그들을 김씨 일가가 불법으로 정치적 조직을 만들어서 점령하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헌법 상으로 극우 사이트에서 누차 인용되듯 북쪽은 '우리 땅'이며 우리가 신경쓰고 관리해야 하며 어떻게든 우리의 영향력을 더 넓혀야 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 것도 엄연히 국민 그리고 국가가 국회의원에게 부여한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어떤 지식이든 한쪽의 사상에 얽매여 편중되어서 채득한 지식과 양쪽 귀를 열고 양쪽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인 스테레오 타입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이 헌법대로 이북 5도를 도청까지 만들어가며 확실한 우리나라로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면 이들 이북 5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하는 제안이 한쪽으로 편중된 이념이 아닌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성이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우리 땅이니까 헌법이 정한 우리 땅이지 않은가?


일베가 그리는 대한민국 지도

대한민국 19대 국회의원 중에 이북 5도를 우리나라 영토라고 심정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북한을 진심으로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심지어 극우들은 대한민국 지도에서 이북 5도는 아예 그리지도 않는데...일베에서는 심지어 전라도까지 대한민국 땅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이며 이북 5도를 우리나라 땅으로 헌법에 규정한 나라라면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시궁창이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북 5도를 지역구 차원에서 현재 상황과 의견,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국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과연 대한민국에 큰 손해를 안겨다줄 일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적어도 아예 이북 5도를 (지역구가 아니라는 이유로 ) 심정적으로 우리나라 영토라고 고려조차 안하고 있는 대다수의 국회의원들보다 이북 5도의 현제 상황과 앞으로의 대처 방안에 대해서 국회에서 누구보다 더 확실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이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통합진보당은 그 정당 구성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당 자체의 존립 차원에서 그런 이유로 한국 정치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당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그들의 정책이 이북에 있는 김씨 세습 불법 통치 세력의 의견과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빨갱이로 입을 틀어막고 처단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1차적으로 지금의 국회의원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단 6석의 국회의원이 294명의 국회의원들을 모두 회유해서 북한에 유리한 정책에 동조토록 만드는 밀알이 될 만큼 지금의 대한민국 이념이 허투르지 않다. 다수당인 새누리당이 6명 소수당의 국회 내의 분란을 막지 못한다는 것도 우습거니와 행여 6명에게 294명이 당했다는 것은 그닥 동정을 받을 수도 정당화할 수도 없는 창피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그들이 이런 일을 막기 위해 6명을 국회에서 몰아내려고 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국가정체성이 마치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에 속아넘어가는 거마대학생만 못한 모레알 수준이라는 것이 인증될까봐 겁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다.


통합진보당이 북한의 정책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면 그대로 두는 게 맞다. 이북 5도 대표로서 이만한 당이 없다. 만일 그들의 정책이 북한의 정책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쪽수로 일축시켜라, 그들이 국회 내에서 물을 흐리려 한다면 얼마든지 국회선진화법으로 저지해야 할 것이다. 혹 그들이 국회의원으로서 정녕 해서는 안될 범국가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면 법으로 엄히 다스리면 될 일이다. 김일성을 찬양한다면 개소리하지 말라며 입을 다물게 만들어라 그게 민주주의이며 이북 5도를 우리 영토로 인정한 헌법에 기반한 국회의 참모습일것이다. 


왜 대한민국 거대여당이 고작 6석 얻은 통진당 나부랭이에게 쫄아서 쫒아내지 못해 안달을 내는 것인가? 당신들이 할 일은 그들이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게 아니라 그들이 국회에서 주장하는 것을 당신들이 더 좋은 주장으로 반박하여 그들의 입을 닥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들이 하는 짓은 '아 귀찮아, 우리 일하기 싫으니까 그냥 쟤들 꺼지라고 해'라는 태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내에서 누군가가 RO조직을 결성했거나 내란음모죄를 저질렀거든 그 국회의원을 제명시키고 법에 따라 그 '국회의원'을 처벌하면 될 일이다. 마치 누구 한 명이 국가에 죄를 저지르면 삼족을 멸하는 중국 삼국시대처럼 그 당의 국회의원 몇 명이 중대한 범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 당을 뿌리째 뽑아 없에겠다는 발상은 그래서 매우 전 근대적이고 위험하며 그 논리에 동조하는 자들을 지극히 겁쟁이로 보이게 만들기 충분하다.


...


작금의 이런 모든 발상은 '귀차니즘'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학창 시절에 주입된 것 이상의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을 점점 귀찮아하고 있다. 그러니까 통합진보당이 빨갱이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냥 빨갱이라는 몇 가지 키워드만 있으면 그냥 빨갱이구나 하고 당연히 사라져줘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놀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가세한다. 그들은 정책과 확고한 이념을 더욱 더 열심히 연구하고 이끌어나가서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굳건한 나라를 만드는 데에 힘을 써야 하는데, 북한보다 10배 많은 국방비를 쓰는 나라가 북한군의 노크 두 번에 전군이 패닉에 빠지고, 북한 소행이라면 뭐든지 용서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앵무새처럼 북한에게 당했다며 국민들에게 동정표를 호소하고 있는 실정, 여기에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정당과 맞서서 우리의 이념이 훨씬 우수하다는 정책대결로서 이기려 드는 것조차 귀찮아 그냥 빨갱이 낙인 찍고 내쳐버리는 방바닥 긁는 폐인보다 게을러빠진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한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러니 부탁 좀 하자 지금의 대한민국이 북쪽을 강제점거하고 있는 저 허튼 새끼들의 정치, 군사, 이념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싶지 않다. 그러니 국회의원들이여, 대한민국 정부여, 그들을 당신의 능력으로 이겨내라! 비겁자처럼,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처럼 정신승리하듯 그들을 내치는 것으로 당신들의 능력을 발휘했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지금의 북한이 틀렸고 지금의 북한보다 우리가 더 강하고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받고 싶지 않다. 그런 식으로 증명하는 걸 지금 우리 세대에서는 '찌질하다'라는 표현으로 가장 저급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취급을 받기가 싫다.


필자도 사실 통합진보당 그들의 정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다. 그러니 부디 여야 국회의원들이여 찌질하게 빨갱이 딱지 붙이고 소문내서 쫒아내는 찌질이짓좀 그만하고 정책 대 정책으로 그들의 정책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국회에서 즈려밟아줘라, 같은 의미로 우리나라 군대가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한미연합훈련이고 전작권 연장이나 대북전단 풍선 따위가 아니라 우리 힘으로 능히 북한의 도발을 언제든 막아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과 그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찌질하지 않은 방법이지 않겠는가? 북한에게 해킹을 당했다면 '북한이라 어쩔 수 없었쩌염 뿌잉뿌잉' 해대는 액티브 엑스 같은 싸이코짓 말고 북한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막강한 보안 체계를 갖춰서 두번 다시는 북한이 해킹은 커녕 들어올수조차 없도록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 이 나라를 위한 길이 아니겠냐는거다.



보수단체들이 정말 좋아하는 이론 중의 하나가 '메기 이론'이다. 국민들을 어떻게 하면 더 부지런하게 일시켜먹고 쥐어짤 수 있을까에 악용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필자는 통합진보당과 같은 존재가 지금의 정치판에서 어장 속 메기같은 존재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국회에 있는 그대들이여, 자신들을 미꾸라지라고 생각하고 고작 한마리의 메기한테 먹힐까봐 벌벌 떠는 인간들인가? 당신들이 몽땅 잡아먹히든 말든 우리에겐 지금 그 메기가 필요하다. 어차피 당신들은 어장 속에서 긴장 없이 죽어가며 대한민국이라는 어항의 물을 썩게 만들 존재들일테니까 말이다. 우린 그때 되면 메기 따위에 겁먹지 않는 참치급을 어장에 넣을 생각이다. 당신들이 미꾸라지가 아닌 참치라는 것을 증명해보라, 우리나라가 북한 따위에게 지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증명해보라, 한낱 북한 정책에 동조하는 정당에게 정책으로 국회에서 맞서서 이기는 것 자체가 의미없을 정도로 처참히 즈려밟아줘라, 우리는 당신들이 도망치듯 정신승리하듯 통합진보당을 링아웃시키는 것보다 그런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보고싶다, 그 편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북한 이념으로부터 보다 확실히 대한민국 이념의 우수함을 알릴 수 있는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끝으로


사실 이북 5도는 우리나라 영토이기에 친북성향의 통합진보당같은 당은 비록 이념이 다를지라도 일단 우리나라 영토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우리나라 국회에 들어와도 그 정당성이 성립된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다문화 민족들을 위해 이자즈민과 같은 국회의원도 필요할 것이다. 비록 그 이념적인 측면에서 사실 통합진보당보다 개인적으로 더 의심스러운 새터민 출신 국회의원들도 어쨌든 이 땅에서 그들이 사는 권리를 대변하기 위한 대표 자격으로 국회 입성 자격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우리나라 땅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나라 땅을 침탈했으며 우리나라에 끔찍하게 피해를 입혔고 행정적으로도 헌법적으로도 도무지 우리나라 땅이라고 할 수 없는 완전 남중의 남인 일제를 찬양했던 자들과 그 후손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제 역사를 찬양하는 자들이 국회와 행정 요직에 왜 필요한지 왜 앉아있어야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대표하며 

누구를 위해 그 곳에 있는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2014년 12월 19일 11시 32분 추가한 내용


네덜란드에 '자선・자유・다양성당' (Partij voor Naastenliefde, Vrijheid & Diversiteit) 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이들이 공약한건 12세와의 섹스, 아동 포르노 수간, 공연음란을 합법화, 포르노출연16세부터, 12세 이상부터 가벼운 마약 복용, 16세 이상부터 마약 복용의 자유화였다. 이 정당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대로 정당해산심판청구 소송이 올라왔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정부여당 법무부가 아니라 '시민들'이 소송을 걸었다.


네덜란드 법원은 이 소송에서 '자선・자유・다양성당'을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하고 소송을 기각했다. 이 당은 2006년에 선거에 나가기 위해 네덜란드 선거법에 따라 출마를 위한 시민 성명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시민들은 이들 당을 외면했고 이 당은 단 한번도 선거에서 당선은 커녕 출마조차 해보지도 못한 채 2010년 국민의 외면에 의해 해산되었다.


보는 바와 같이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정당 해산 심판도, 그 정당을 해산할 수 있는 주권도 국민에게 있다. 지금 이 판결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것을 특정 계층이 빼앗아 독점하려고 했고 결국 성공했다는 것에 있다. 이번 정권은 국민들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빼앗아가고 있는데, 앞으로 또 무엇을 빼앗으려 들지 벌써부터 두렵다. 


우리는 어쩌면 이제 그것들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보장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




작작좀...

posted by RushAm 2014. 10. 14. 00:11

단통법에 많이 놀란 사람들이 폰을 전혀 사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방통위원장은 삼성폰이 비싸면 중국폰을 사라고 일갈합니다. 단통법을 발의한 정치인들은 오늘 국감에서 '단통법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갑자기 해외직구 전자제품에 대한 전파인증을 개인이 수입하는 개개인마다 받도록 의무화하여 최대 3300만원까지 인증요금을 내게 만들 것이라는 새로운 정책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게 굴러간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작 이 법을 만든 사람들 즉 정부여당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방통위, 소비자와 통신업체 그리고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이 모두 동상이몽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요즘 많이 어렵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돌아가셨는지 살아계신지 알 길이 없고 무디스는 삼성의 신용등급을 가차없이 내려버렸으며 삼성의 분기순수익 실적은 전분기 반토막이 났습니다. 삼성이 어려워진 이유는 주력상품이었던 디스플레이 제품군, 특히 TV와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수익성 악화가 큰 원인이라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진단하고 있는데요. 삼성이 야심차게 밀었던 커브드 UHD TV는 소치, 월드컵, 아시안게임이라는 3대 스포츠 메인 이벤트를 모두 흘려보내는 동안 판매실적특수를 전혀 누리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국내에서 그동안 성능면에서 독보적인 인정을 받던 추세에서 벗어나 성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스마트폰 교체 수요가 많이 줄었고 후발주자라고 할 수 있는 LG와 팬택이 공격적인 저가 공세를 내세우면서 삼성의 점유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 추세가 이어지게 되는 거죠. 특히 신제품 출시 컨벤션 효과가 줄어든 게 컸는데, 이젠 삼성도 가격 경쟁에 뛰어들은 마당에 사람들이 아무도 출시 당시에 비싼 가격에 폰을 사지 않는 바람에 신제품 출시 효과도 미미해진데다 신제품들의 차별 요소 (갤럭시 기어 등) 이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구매력을 당기지 못하는 자체적인 패인까지 겹쳐 더 이상의 실적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이미 미국 등 해외에서 즉시 체감을 하기 시작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삼성이 퇴로가 막힌 셈이 되고 말았는데요. 중국 시장에서는 샤오미의 급성장으로 점유율을 뺏기고 있고 미국 시장에서는 아이폰의 예상밖 대호조로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본진 즉 한국 내수 시장에서마저 수익성이 악화되면 삼성은 앞으로 더 이상 실적 개선에 대한 새로운 이슈 즉 투자자들을 삼성전자 주식에 묶어둘 떡밥이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되죠. 실제로 이를 반영하듯 150만원에 육박했던 삼성전자 주가는 불과 최근 3개월만에 110만원대로 급락하며 천문학적인 돈이 증발해버리고 마는데요.



재미있는건 이미 삼성의 실적 위기론이 이미 갤럭시 S5출시 당시였던 지난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표면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그때 캐치할 사람들은 중국 시장에서 샤오미에 털리고 있는 상황을 리얼타임으로 접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S5의 판매량이 부진하다는 소문과 프라임 모델 출시로 인해 신뢰성을 잃고 조급해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굳어져있는 상태였죠. 여기에서 내수 시장마저 충성스런 고객들이 출시 초기 컨벤션 효과는 커녕 꿈쩍도 하지 않아주는 대신 LG와 팬택은 신제품이 나름 호평을 받기 시작하며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삼성 구하기에 나선 정부는 먼저 만만한 팬택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오랜 기간 워크아웃 위기에도 통신사 보조금을 포함한 뻥튀기 출고가 정책으로 회사를 유지해왔던 팬택의 자금줄을 막는 결정적인 한방 '통신사 영업정지'를 먹임으로서 팬택을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보내버렸죠. 방통위가 그동안 통신사와 잘도 쿵짝을 맞추다가 정색하듯 갑자기 내놓은 이통사 영업 정지 강수는 이통사는 콧방귀도 안뀌었지만 정작 이해상관당사자가 아닌 팬택은 절망했습니다.





이통사 영업 정지가 삼성 구하기인 증거는 바로 영업 정지 당시에 통신사 광고 흐름입니다. 당시 KT가 다소 주춤하고 LG와 SKT가 점유율 싸움을 하던 와중이었는데, LG의 영업정지 기간 중에 SKT가 갤럭시 S5의 조기 출시 즉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다) 라는 귀족 마케팅을 벌어기 시작합니다. 이는 SKT가 영업 정지 기간을 앞두고 갤럭시 S5를 최대한 많이 팔아치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죠. 이런 흐름은 이후 SKT가 영업 정지를 기간 중에 LGT도 똑같이 맞불을 놓음으로서 S5를 주력으로 팔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거의 그와 동시에 팬택 위기론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우연일까요? 그리고 이미 이러한 팬택 죽이기는 삼성이 2013년말 팬택의 주식을 10%가량 매수하면서 제 3주주로 올라서면서부터 예상되었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팬택을 죽이면 팬택이 갖고 있던 점유율이 삼성으로 흡수될 거라는 예상은 생각 외로 보기좋게 빗나가고 맙니다. 방통위도 삼성도 당황스러운 결과가 나온 것이죠. 정 반대로 이 이통업체 3사의 영업정지 기간 전후의 파급효과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2월부터 5월까지 삼성의 의도대로 국내 휴대폰 시장 점유율을 일정 부분 회복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만, 정작 그 이동통신 3사의 영업정지 기간 즉 귀족마케팅이 끝난 직후부터 다시 삼성의 국내 휴대폰 시장 점유율은 회복한 만큼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반사이익을 얻은 쪽은 여전히 귀족마케팅을 벌이며 고가 프리미엄 정책을 취하던 삼성이 아니라 팬택과 가성비 경쟁을 하던 LG전자였던 것이죠.



LG전자는 일전 팬택이 하던 정책에 대기업이 주는 안정적인 이미지와 G2, G3의 잇따른 호평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 많은 보조금을 포함한 가격정책을 펼치면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7월에 이르러서는 무려 29%까지 올라서는 괴력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4월부터 7월까지 단 3개월동안 10%초반에 머물렀던 점유율을 무려 두배 가까이 끌어올린 셈이니 어느 정도의 파괴력이었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으시겠죠? 시장이 특별히 삼성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LG를 미친듯이 팔아제끼고 있었다는 게 됩니다.


그래프를 보시면 LG전자가 마의 점유율 20%를 돌파한것이 바로 5월인데요 바로 이 5월에 그 문제의 단통법이 국회에서 논의되었고 5월 22일 상정하기에 이릅니다. (거 타이밍 한번 참), 이 법의 핵심 문제점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말씀해주셨던 대로입니다만, 결국 이 법의 핵심은 방통위원장의 '비싸면 중국폰 사라' 발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삼성 LG 어느쪽도 단통법 시행 이후에 기존에 고수하던 고가 출고가격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는데요 여기에서 가격을 내려버리면 통신사 몫이 지금 더 커져서 이득이 많아지건 어쩌건 간에 프리미엄 이미지를 날려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거죠. 이는 LG도 그닥 바라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때문에 출고가에 통신사 마진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중국산폰이 최근 인기를 끌게 되는 것이죠. 이들은 에초부터 우리나라 통신시장의 출고가 마진 시스템에서 매우 자유로웠기 때문에 상상이상의 출고가를 형성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방통위원장의 이 발언은 소비자가 아닌 업계에게 일갈하는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 첫번째 의의이며 그 속에 숨은 의미는 방통위원장은 정작 이 법을 그닥 원한 게 아니었을수도 있다는 추리가 가능합니다.



방통위는 사감 기관입니다. 즉 통신사가 문제를 일으켜주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지는거죠.



여기에 오늘 있었던 국회의원들의 발언에서 모든 의혹이 풀리게 됩니다.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다'라는 발언이그것이죠. 국회의원들은 나이가 많습니다. 즉 꼰대, 폰팔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객이 아닐 수 없는 바로 그 계층입니다. 그들은 폰을 비싸게만 사봤을 뿐 싸게 사본 적이 아마 없을겁니다. (뭐 사실 직접 돈주고 살 일도 없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어떤 법이 바뀐다고 한다면 자신들의 입장을 기준으로 법이 바뀌어야지 다른 사람의 입장을 기준으로 자신을 포함한 동연령대 계층이 끌려가는 정책은 절대 만들지를 않죠. 그렇게 해서 나온 정책이 단통법인 것입니다. 이 법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제값 다 주고 산 호갱 소비자가 박탈감을 갖지 않게끔 하는 법임과 동시에 국회의원들의 의도대로라면 이러한 법을 시행함으로서 갤럭시 S3 17만원 사태 이전처럼 삼성의 폰들이 고가 정책을 취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이후 느낄 박탈감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하고 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삼성 폰이 이 법으로 분명 잘 팔릴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거죠. 


그런데 그건 그들처럼 돈이 썩어나는 인간들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지 실제 폰을 사고 활용하는 서민들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미 폰에 대한 원가는 시장이 혼탁해지면서 바닥티끝까지 드러나버린 상황인데 서민들이 예전처럼 안심하고 비싸게 사도 나중에 가격 방어가 될 거라는 떡밥만으로 지금 삼성 폰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만의 세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편협적인 시각이라는 거죠. 결국 이 법은 그들이 바라던 삼성도 살리지 못하고 국민들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야말로 꼰대스러운 법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예상대로 삼성보다는 LG가 훨씬 더 많은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 의원님들의 정책은 절반의 성공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통신사 영업정지부터 단통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삼성을 살리고자 하는 최근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단통법이 잘 안먹힌다는 이야기가 현실화됨과 동시에 정치권에서 나온 방안은 어이없게도 단통법 이후 급증하고 있는 해외 직구를 사실상 막는 건바이건 전파인증비용 청구 법안을 들고 나왔는데요. 여기에는 그동안 내수 차별이라 지적되어왔던 TV등 대형가전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간 삼성전자에서 부진했던 사업부문만을 골라서 챙겨준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직구를 막으면 삼성 폰 사주겠지?


해외에서 그들의 역량에 바닥을 드러내며 이제 더 이상의 성장세를 기대하기 힘든 기업 삼성이 해외에서 고전하며 까묵은 자금줄을 국내 내수 시장을 강제로 법안까지 발의해가며 털어먹도록 밥상을 차려주는 행태를 보면서 대체 삼성이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하길래 저러는지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뭐가 어찌 되었건 이제 그만들 좀 하십시요. 삼성이 지금까지 기업윤리로서의 잘잘못까지는 자처하고서라도 이런 판국에서 당신들과 삼성간의 기브앤테이크를 지키는 딜짓꺼리는 보기가 참 역겹습니다. (역겹지 않은 적도 없지만 뭐 특히 좀 ...)



어떻게 한 명도 은혜를 갚지 않는 사람이 없는건지...



posted by RushAm 2014. 10. 10. 14:43

음악에 있어서 서태지는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있나요? 그의 음악이 매우 완성도가 높았다거나 그의 음악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역사적인 한 획을 그었다는 점도 그의 평가를 높이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이른바 '마르코 폴로'가 아닐까 합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이제껏 시도된 적이 없는 음악을 가져왔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소개했으며 그 소개하는 방법이 우연하게도 별 거부감 없이 먹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죠. 사실 이게 매우 어려운 게 뭐냐면 우리나라에 이제껏 없었던 음악이 대중적으로 성공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어떤 마법을 부렸던 서태지는 그걸 해냈고 그래서 지금까지 어쩌면 수많은 음악계의 마르코 폴로가 있었을지언정 서태지만이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죠.



제가 서태지를 '마르코 폴로'라고 표현한 것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서태지는 외국에서 보고 배우고 느낀 그 음악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는 도중에 기억에서 소실되었던 부분이 있을수도 있고 어쩌면 그 문화에 완벽하게 동화되지 못한 다소 어정쩡한 감성에 버무려져 이도저도 아닌 말도 안되는 음악이 나왔을 수도 있죠. 이 부분에서 서태지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표절 문제도 있었고, 장르 자체에 대한 순수성 구현 측면이나 그가 추구하는 패션 코드까지 고루고루 비판을 당했죠. 서태지는 이러한 비판 속에서도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제법 강력한 힘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소격동 공개의 화제성을 보면 말이죠. (비록 그것이 음악적인 이슈에 한정된 이야기만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의 등장 때마다 그에게 정말 많은 기대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믿고 듣는 그 자체보다는 아마도 이번엔 어떤 '한국에 없던 새로운' 것을 보여줄까' 가 아니었을까요? 그런 이미지는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가치가 '음악성'이 아닌 '참신성'에 무게를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꽤나 큰 부담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사회가 떠밀었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롤, '음악계에 저항하고',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며', '그와 동시에 서태지다운 위상을 갖출만한 흥행'까지 해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한때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고 흥행과 새로움에 대한 벨런스 조절에 간혹 실패하기도 하는 고충을 겪기도 했죠.


서태지도 나이를 먹으며 젊을때처럼 모든 것, 즉 새로움과 저항성, 그리고 흥행성을 모두 갖춰낼 만큼의 역량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모양입니다. 그 시점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저항성과 새로움을 버리지 않고 과거에 묻어두며 내 인생에서 해왔던 그 음악이 옳았고 내 인생은 옳은 길을 가고 있었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분기점이 되는 곡이 바로 이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



소격동에 대한 곡 소개에서도 그는 새로움을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내 음악, 그리고 내 삶에 대한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의미를 담아냈다고 이야기하고 있죠. 그는 이제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젊은이의 우상이기보다 자신의 좋았던 '우리들만의 추억'을 소개하고 내 인생을 노래하는 가수로, 혹은 자신의 음악 인생을 부정당하지 않고 보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치 왕년에 잘 나갔음을 큰 소리로 떠드는 1호선의 술취한 군복 아저씨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소격동 곡 공개에 있어서도 아이유 버전을 먼저 공개한 이유 역시 아이유가 최근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아이유로 인해서 김창완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음악 인생이 다시금 조명받고 인정받게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그녀를 욕심내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공교롭게도 예전에 비해 그가 추구하던 음악 인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칭송보다는 비판의 말을 더 많이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의 사적인 생활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수도 없고 사회적으로 그에게 과도하게 요구된 다양한 롤에 치여 벌인 실수들에 의한 당연한 비판들도 산재합니다. 그는 이들에 정면으로 맞서며 이제 자신의 음악 인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로서의 인생을 살게 될 모양입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음악적 꼰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도 있겠습니다만 그에게 요구하는 그의 팬들에 요구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단지 그때를 추억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서태지 팬들은 사생활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서태지를 비방 비판하는 사람들과 싸워왔습니다. 서태지의 음악은 훌륭하고 서태지는 여전히 역사에 남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반론을 열심히 펼치며 서태지와 아이덴티티를 공유한 자신을 변호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서태지는 그들이 이렇게 싸워오고 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이제 대중보다는 지금까지 함께 해준 팬들을 위해, 더 작게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 자기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기 시작햇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서태지는 안티와의 싸움에 지친 팬들에게 '너희들이 내 팬으로서 더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내가 더 당당해질게', '내 음악인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너희 대신 증명해줄게' 라고 음악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와 아이덴티티를 팬들은 그 음악을 듣고 '그래 내가 서태지를 좋아해온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어'라고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겠죠. 그들 역시 서태지처럼 단지 '서태지를 좋아했던 인생'만이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어떤 새로운 힘을 얻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새로움이 없는 서태지의 이번 음악은 어쩌면 지금까지 가수들이 해오지 않았던 혹은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음악을 음악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로서 말이죠. 그는 변했지만 어쩌면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사람이 변해가는 방법으로서 새로운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말이죠. 그것 또한 새로움이라고, 당신들의 인생에서 더할 나위없이 신선하고 참신한 그 무언가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팬들에게 행복을 기원해드리겠습니다 

 

... 뭐 이미 충분히 행복하시겠지요? :)


posted by RushAm 2014. 8. 11. 11:42

요즘 TV를 보시면 가장 많이 보이는 광고 중 하나는 바로 삼성전자의 신형 스마트폰 갤럭시 S5 광대역 LTE-A광고입니다. 마술 쇼를 컨셉으로 한 외국인 마술사가 휴대폰을 가지고 성능을 이용한 마술을 부린다는 것이 주요 내용인데요. 이 광고는 순간의 찰나에 동영상을 다운받을 수 있다는 성능을 부각시켜 제품의 특징을 내세우는데는 성공한 매우 훌륭한 광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 외국인을 썼는가에 대한 부분인데요.



이유는 매우 간단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가장 강한 경쟁상대이자 카피캣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애플과 매우 닮은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애플이 전 세계 공통 광고 정책을 취하는 만큼 삼성전자 역시 전세계 공통 광고 전략을 취한다는 것이고 외국인 모델 기용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동시 송출되는 만큼 불가피한 것일 텐데요.


그런데 과연 삼성전자는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외국인 모델을 쓴 바로 그 광고를 해외에도 동시에 방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일단 삼성모바일에서 공개한 글로벌 광고는 이건데요.




다음은 프랑스입니다.


다음은 호주


다음은 네덜란드..


이 세 개의 광고는 완벽하게 동일한 광고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언어만 달리 해서 서비스되고 있죠. 여기까지만 보면 얼추 애플을 흉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삼성전자는 애플처럼 대인배는 못되는지 몇몇 자신들이 매우 중요한 마켓쉐어라고 어기고 있는 국가에서는 로컬 광고를 내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먼저 보실 것은 이탈리아입니다.



글로벌 광고가 아니네요? 당연히 이 광고는 이탈리아에서만 방영됩니다. 내래이션은 당연히 이탈리아어이며 화면 곳곳에 나오는 이탈리아어와 아이가 쏟는 밀가루 포장지에서 보이는 이탈리아어로 봐서 이 광고는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이탈리아인'이 나오는 '이탈리아' 로컬 광고임에 틀림이 없는데요. 로컬 광고란 이처럼 그 나라 사람들이 등장해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팔기 위한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걸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삼성이 제일 신경쓰고 있는 미국에서 방영되는 바로 이 광고죠.


(자막은 유튜브 유저가 입힌 것입니다)

배경은 당연히 미국의 곳곳을 로케이션했으며 등장인물도 모두 미국인으로 보입니다. 내래이션은 당연히 미국 느낌이 물씬 나는 미국식 영어, 내용 역시 미국인들의 생활상 그대로를 전하고 있으며 굳이 아이폰과의 비교광고를 선택한 전략은 별 관계없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이 광고는 어디까지나 미국에 사는 미국인들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광고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서두에서는 갤럭시S5의 최신 모델 광고를 보여드렸으니 비교를 위해 예시를 들었던 갤럭시 S5 같은 모델의 국내 광고를 보여드리죠. 이 광고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몇 명이 나오는지 우리나라 배경이 몇 개가 나오는지 한국인이 몇 명이나 나오는지 한번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광고를 삼성전자가 우리나라에만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광고는 이 작품 그대로 일본에서도 쓰인 바 있죠. 다만 왜 이게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페이지 마지막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왜 삼성전자는 이런 광고를 내보내는 것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광고에 외국인이 나오고 외국 배경이 나오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판단했던 것일까요? 혹은 이럴 수도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전 세계적인 기업이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많이 쓴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당연히 삼성모바일이 제작한 글로벌 광고를 틀었어야 맞지 않을까요? 시장이 중요해서 글로벌 광고가 틀기 곤란했다면 이런 식의 광고를 한번도 아니고 예전부터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런 심리적 저항 움직임은 아직 없어 보입니다. 이게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죠?


삼성전자가 이런 식이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양대 대기업인 현대자동차도 이 추세에 가세했습니다. 최근 나오는 광고를 한번 감상해보시죠.



이런 컨셉의 광고를 굳이 외국인이 찍어야 했는지, 이 광고를 글로벌 광고로 쓸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도 굳이 이래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겠네요. 그리고 이 광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과연 어떤지도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자동차는 같은 아반떼 광고에 얼마 전까지 한국 체조선수 양학선을 광고모델로 썼을 만큼 우리나라 모델 기용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죠. 이런 현대자동차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소비자들의 별다른 저항이 없는 한 이런 광고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TV에서 보여질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왜 우리는 외국인이 나오면 무조건 좋아할거라고 생각하는지, 외국인이 나오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줄 거라는 꼰대적인 마인드와 또 그 마인드가 먹힐 만한 시장이라고 치부당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들이 돈을 주고 구매하는 물품에 광고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특별할 것이 없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은 광고의 소비자이며 광고에서 우리가 무시당하는 이미지를 심지어 외국계기업이 아닌 자국 기업이 저지르고 있다면 분명히 이는 응당 배척해내야 할 사안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갤럭시 S5의 일본 현지에서 방영되었던 광고 몇 개를 소개해드립니다.







생각난김에 하나 더 보여드리죠. 이번엔 중국의 갤럭시 S5 광고입니다. 앞서 제가 이야기한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광고라고 생각해서 소개해드립니다.





이제 판단은 여러분들에게 맡기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