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0. 6. 12. 03:34
긴 생머리를 '로망'이라고 표현하는 남자, 대략 그 비중이 절반 이상쯤 된다고 체감상으로도 실제 보도상으로도 표현되고 있을 만큼 이미 '대세'로 자리잡은 일반화된 여성관이 되었는데요. 이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나오고'만 있었지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뭔가 속시원하게 생각하고 답해주는 곳이 없더군요. 게다가 저는 개인적으로 긴 생머리에 대한 어떤 고집스런 로망도 없기에 더욱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화국 연구소의 주제는 다분히 '개인적인 호기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이번 시간에는 어째서 남자들이 긴 생머리에 열광하는 것인지 그리고 여성들은 과연 이런 남성들의 대세적인 취향을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연구는 개인 연구 결과이므로 어떠한 학술적 검증이 되지 않았으며 신뢰 여부는 본인 판단에 맡김을 밝혀둡니다.

우선 시초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기본적으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느 쪽이 먼저였던 간에 이 긴 생머리 패션은 생각보다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명'이 만들어져 여성들이 '헤어 스타일'을 임의대로 조절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긴 생머리 스타일이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기르면 된다는 생각을 보통 머리를 길러보지 않은 분들이 하시곤 합니다만, 정말 긴 생머리만큼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없는데요. 그런 고로 시초로 치자면 머리 스타일을 가위 혹은 무언가로 다듬기 시작하면서 생겨날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나마 모나리자의 헤어스타일이 가장 가까운 편


그래서인지 이 긴 생머리 스타일에 대한 자료를 고대 유물에서는 의외로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클레오파트라도 이른바 '이집트 파마'를 하고 있고, 미의 신 비너스도 그림상에서는 거의 웨이브에 가까운 긴 머리, 석고상으로는 장정구 파마(...)이므로 지금의 이상적인 긴 생머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지요. 이건 동양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부터 거의 현대에 가까운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머리는 한중일 대부분 땋거나 묶거나 땋아올리거나 하는 식으로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만큼 고대의 헤어스타일링 기술로는 긴 생머리를 지금처럼 예쁘게 다듬어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머리라는 게 길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르기만 한다고 해서 비단결처럼 차르륵하고 내려오지를 않죠. 더구나 단백질 영양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에는 머릿결이 더욱 안좋을수밖에 없었고 그냥 풀어놓고 있으면 금방 엉켜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발령 이전의 남성에게도 해당됩니다. 상투를 틀지 않으면 영양 상태가 부족한데다 머릿결이 여성보다 억셀 수밖에 없어 말 그대로 망나니머리가 될수밖에 없었을테니까요 (영화 왕의 남자가 거짓일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서양 문물의 유입 후 단발령도 내려지고 점차 여성들의 외모를 가꾸는 산업이 발달하면서 여성들이 그동안 꽁꽁 묶어왔던 머리를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특히 임시정부 이후 대거 들어온 미국 문화의 영향은 상당했는데요. 특히 여성들에게 영향을 끼친 부분이라면 '바비 인형' 문화일 것입니다. 이 바비 인형이라는게 사실 이상적인 미형을 보여줬다기보다는 서양 사람들의 일반적인 체형이나 스타일을 좀 더 스타일리쉬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는데요. 이 새로운 미적 가치가 동양쪽에 끼친 영향은 실로 놀라워서 지금까지 찰랑찰랑한 긴 머리라는 것을 에초에 본 적이 없는 (동양인의 신체적 한계로 인해)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바비 인형이 인기를 끈 게 아니라 바비 인형이 제시한 스타일이 끼친 영향을 말합니다) 이른바 바비 인형 신드롬은 동시대에 대거 유입된 헐리우드 영화에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착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초창기 바비인형은 긴 생머리가 아니었다고 하죠.


이러한 미형은 이른바 S라인이나 큰 키, 스커트에 어울리는 늘씬한 다리와 큰 가슴 등과 더불어 긴 생머리라는 키워드로서 여성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지게 되는데요. 물론 신체 라인이나 키, 다리라인 , 가슴 등의 키워드들은 타고나지 않는 한 동양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만, 이 긴 생머리라는 스타일은 후천적으로 극복이 될 것 같기도 한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 키워드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분야보다 특별히 많은 도전이 이루어진 미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도 스트레이트 퍼머 기술은 꾸준히 진보하고 있으며 머리 끝 부분의 영양을 보급하는 트리트먼트, 세럼 등의 상품들은 물밀듯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인 셈이죠. 그리고 이런 상품들은 대부분 동양권에 집중적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자 그럼 이야기를 원론으로 돌아와서 왜 이 스타일에 남성들이 열광했고 열광하고 열광할 예정인지에 대해 더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부분은 '지금까지의 스타일 즉 적게는 몇백년 많게는 몇천년동안 지속되어왔던 여성의 스타일에 대한 고정관념이 뒤집혔다는 것에 있습니다, 머리는 땋거나 말아 올리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고정관념 내에서 제한적으로 핀이나 장식 등으로 틀을 깨지 않은 악세서리 장식만으로 대표되던 헤어스타일에 대한 상식적 틀이 깨져버렸다는 점 그리고 그 깨어버린 스타일이 꽤 완성도가 놈았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몇 번을 강조합니다만 긴 생머리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미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죠.

긴 생머리 붐에 한 몫을 단단히 하신 분


이를 보는 남성들에게는 이른바 묶은 머리에 대한 미적 평가 가치가 하락함과 동시에 풀었음에도 단정하게 내려오는 머리에 대한 경이로움이 함께 자리잡게 됩니다.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그 긴 생머리를 묶어버리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은것도 이런 바탕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것은 이미 긴 생머리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닌 '이 사람이 여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필수요소'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태생적으로 스타일 변화에 둔감할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있어서 긴 생머리 이외의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아무리 예쁜 들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남성에게는 '스타일'이 아닌 '여성으로 인식하는 수단' 그 자체이기 때문이죠.

여기에 한가지 더 하자면 한중일 공통적으로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이른바 '순결'을 잃게 되면 머리를 말아 올리는 스타일이 꽤 오래도록 정착되어 왔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이마와 뒷목 위로 올라가지 않고 모두 아래로 향하고 있는 긴 생머리 스타일은 '순결'이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는 잠재의식도 긴 생머리 대세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서류적인 '증빙'이 가능한 사회가 되고 있지만 남성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관습적 상식은 쉽게 바뀌기 힘든 것이죠. 즉 긴 생머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여성의 헤어스타일이 대한 새로운 키워드를 제시한 것과 더불어 아직 '배우자'를 찾지 못한 순결한 처녀라는 키워드까지 함께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 올려 준다. 라는 말도 있었죠.


여성들의 스타일은 여성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법이죠. 남자는 사실 좀 그런 소소한 변화에 무뚝뚝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변화를 줘도 '진심으로'예쁘다는 감정을 느낀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렇기에 여성들은 긴 생머리라는 키워드에 구애받지 말고 보다 자신에게 더 잘 맞는 헤어스타일을 몇 번 많게는 몇십번의 실패를 통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찾아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긴 생머리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마치 명주실처럼 생겨서 잘 엉키지 않고 그냥 기르기만 해도 직모로 잘 내려오는 서양인들에게 적합한 헤어스타일이며 그들은 기본적으로 신체 비율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른바 '긴 생머리'가 어우러지는 체형을 만들기도 어렵지 않죠. 필연적으로 허리 라인과 다리 라인이 함께 갖춰져야만 그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머릿결 성질이나 인종적 체형이 다를 수 밖에 없는 동양권에서는 아무리 음식으로 인해 체형이 서구화된다 한들 이른바 바비인형의 황금비율을 자신의 몸에 재현하기도 그 체형을 타고나기도 힘겨운 것이 현실이니만큼 보다 자신의 체형이나 머리 형태 등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개성에 걸맞게 어우러지는 헤어스타일을 찾아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긴 생머리를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네요.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만, 만일 남자들이 긴 생머리를 좋아해서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당신이 가진 개성있는 아름다움이 아닌 단지 보편화된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춰진 점을 좋아하게 된 것으로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그 남자분에게 있어 당신이 가진 미적 경쟁력은 긴 생머리이며 이런 경우 더 잘 어우러진 긴 생머리 여성에게 빠져들 가능성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만일 네 긴머리 때문에 널 좋아했다고 말하는 남성분때문에 포기를 하기 힘들다면 그 남성분의 입장을 과감히 포기하시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 데에 주력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만일 그렇게 주변 남성을 포함하여 자타공인 자신에게 딱 맞는 베스트를 찾아내었는데 남자의 반응이 단지 '긴 생머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큰둥하다면 그 남자분은 '여자를 제대로 된 눈으로 보려 하지 않는'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판단은 물론 당사자들의 몫이겠습니다만,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여성이 자신만이 가진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에 베타적인 연인이 있다면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긴 생머리 스타일은 얼굴은 물론 그 스타일적 완성도로 인해 정말 많은 부분을 커버해주고 가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기 힘든 분들도 많으실 줄로 압니다만 그만큼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죽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 혹은 자신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임에도 보편적인 미형 기준으로 인해 희생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한번 더 상기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키가 작은 사람도 키가 큰 사람도, 통통한 체형도, 깡마른 체형도 제각각 빛을 낼 수 있는 개성적인 캐릭터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으니까요. 알은 깨어나기 전까지는 전부 똑같이 생긴 알이지만 그걸 깨고 나오면 아주 조금씩 서로 다른 녀석들이 태어나듯이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어나간다면 자신조차 몰랐던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해내고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보세요. 긴 머리를 자르고 더 어울리는,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찾아보세요. 당신의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당신의 진짜 예쁜 모습을 찾아내주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공화국 연구소 '남자는 왜 여자의 긴 생머리에 열광하나' 편을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0. 6. 7. 15:30
남자의 성 카테고리는 정말 오랫만이네요. 오늘은 사실 꽤 오래 전 연구를 끝냈던 짤막한 소재를 써볼까 합니다. 연구 결과가 상당히 부실해서 공개를 좀 꺼렸었는데 (얼마 전 마무리지어진 졸작 '여자 그 특별함에 대하여'시리즈 3번째에 포함되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대략 요즘 이런저런 문제로 업데이트가 부실해지고 있어서 사과의 뜻으로 올려봅니다.

스킨십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피부와 피부로 전해지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스킨십은 결코 일방적인 의사표시가 아닌데요. 일면 남성이 대부분을 주도하기에 여성이 이를 거부하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벌어지곤 합니다만, 스킨십은 과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남성보다는 여성이 '취득'해야할 정보가 훨씬 많다보니 모양새로서는 여성이 스킨십을 '당하는' 형태로 보여지게 될 뿐이죠.

자 그럼 이 스킨십에서 무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커뮤니케이션에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커뮤니케이션 스킨십을 통해 무엇을 얻고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공화국 연구소 이번 시간에는 스킨십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고합니다. 본 연구는 철저한 개인 연구 자료이므로 학술적 고증 여부는 철저하게 보는 이의 판단에 준합니다.

다들 처음에는 '손 잡기'부터 시작하는 스킨십, 그런데 이 손잡기 형태를 살펴보면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 분들의 손잡기 패턴은 보통 이렇죠.

그러다가 사이가 꽤 깊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소위 '깍지끼기' 로 바뀌게 됩니다.


사실 이 단순하기 이를 데 없어보이는 손잡기에 상당히 많은 키워드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대략 이 손잡기 패턴 하나만 보아도 스킨십이 가지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대해 상당 부분 이해가 가능합니다. 음, 아직 이해가 안가시는 분들을 위해 그림 하나 더 첨부해보겠습니다.


손바닥의 신체 장기부위 연결을 가상해서 만든 분포도입니다. 손목 부분에 가슴 쪽 즉 맥이 뛰는 부분과 더불어 생식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의학상으로도 손목 바로 위가 생식기혈입니다) 즉 흔히 깊어진 관계를 증명하는 '깍지끼기' 가 왜 깊어진 관계를 증명하는 것인지 이 분포도를 보면 간단히 설명이 가능한데요. 서로의 가장 민감한 정보를 담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직접적이지 않지만 간단히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여기에서 정보 교환이란 유전자 교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건강 상태 및 유전학적 상성 등의 정보교환입니다) 부분과 더불어 상호 보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호 보완적인 의미란 서로를 지키고 복돋아줌을 의미하는데요. 흔히 손이 찬 사람과 따뜻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 손 온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손 전체적으로 온도차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손 윗쪽이 특히 온도가 높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 정중앙에서 열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손이 차고 따뜻한 것과는 절대 관계가 없이 남녀간 절대적인 차이를 보이는 (건강할 경우) 부분이 있는데 앞서 문제가 되었던 손목 바로 위 즉 생식기 부분입니다. 남자는 이곳이 손 전체 온도에 비해 비교적 낮고 여성은 손 전체 온도에 비해 온도가 높다는 점이 그것인데요. 만일 이 온도차가 상호 보완적이 될 만큼 적당한 수준이라면 남녀는 손을 잡는 순간 극도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생식기쪽 건강이 좋지 않은 남녀의 경우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겠지요. 특히 여성의 생식기 온도가 낮다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손을 처음 잡을때부터 깍지끼기로 잡는 커플은 거의 없죠. 처음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손을 엇갈려서 잡는 첫번째 사진 형태가 일반적인데요. 이 손잡기는 손바닥에서 딱 손목 위 ...즉 생식기 부분만을 배제한 모든 부분이 접해 있습니다. 주로 접해 있는 부분은 위와 장...즉 '소화기 계통'이죠. 사실 몸 안에 있는 장기 중에 가장 많은 온도차를 겪는 장기라고 한다면 소화기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위가 차고 딱딱해져서 소화가 안되고 어떤 분은 장이 차가워져서 곤란함을 겪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남녀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 '속궁합'(생식기만을 한정하지 않는)을 가늠하기 위한 의식적인 행동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손을 잡기 전과 후의 인상이 변하는 것은 단지 '피부 감촉에 의한' 감정 변화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잘 모르던 부분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어 그것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서로의 인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패턴은 비단 손잡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음 단계인 Hug 나 Kiss에서도 마찬가지가 되죠. Hug에서 편안함이 아닌 갑갑함을 느꼈다면 맞닿은 서로의 신체 부위가 상호간 체온을 보완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위와 장이 뜨거운데 상대도 위와 장이 뜨겁다면 몸은 속으로 상당히 갑갑함을 느끼게 되죠. 기분좋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가진 그 무엇이 상대방으로 인해서 아주 적당하게 중화되는 감각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Hug에서 맞닿는 것도 대부분 소화기이며 Kiss 역시 입술의 온도 촉촉함 등의 건강상태는 한방의학적으로 소화기의 건강 상태를 나타낸다고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좀 복잡스런(?) Kiss 역시도 남녀 서로 제각각 가지고 있는 침 성분 속 소화 효소를 파악하거나 혀의 감촉 등 소화기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정보를 교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붉은 입술은 소화기 건강의 상징


이쯤 되서 나오는 의문 한 가지, 말씀드린 대로 서로간의 건강이나 장기의 온도 차이로 인한 속궁함 정보를 교환하는 스킨십에 대해 어째서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만, 사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까지는 남녀 공히 공통적인 관점에서 스킨십을 설명했다면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남녀간의 차이를 두고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여성은 본능적으로 민감합니다. '여자의 육감'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적어도 생존적인 관점, 보호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남성보다 한층 현명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부족해지는 것이 이른바 위기 돌파에 필요한 추진력인데 이 부분을 주로 사회에서 남성이 담당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냐면 이것이 스킨십에 대한 오해와 그로 인한 갈등이 빛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스킨십을 정보 교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정보라는게 사실 꼭 만져봐야 하는 촉감에 의존할 필요가 없죠. 오감이라고 하는 눈,귀,코 등의 촉감보다 훨씬 민감한 감각들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오감에 한해서 그 우수성(시력이나 청각능력, 후각능력의 개인차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곳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하는 분석 범위가 여성에 비해 남성이 현저하게 좁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건 기능적 차이에 의거한다기보다는 부여된 생물학적 책무에 따른 것인데요. 남자야 직접 생명을 품고 살지 않지만 여성은 직접 생명을 잉태해야만 하는 책무가 있기 때문에 몇 배는 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정보를 분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앞서 손잡기나 여타 스킨십에서 보여주는 음양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단순하고 낮은 레벨에서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즉 남자는 여자를 '여자'라고 인식하고, 여자는 남자를 '남자'라고 인식하는 단계를 말하는데요. 실제로 남장 여자나 여장 남자, 트랜스젠더 등 시각적으로 판단이 어려운 표본을 촉각과 청각을 배제한 채로 구분해내는 실험에서 여성은 대체로 잘 구분해내는 반면 남성은 단지 시각과 후각만으로는 전혀 구분해내지 못합니다. 즉 여성은 이성을 보다 꼼꼼하게 체크하는 분석 능력이 탁월한 반면 남성은 비교적 직관적인 정보만을 습득한다는 것이죠.

범인을 구별해내는 것에 있어서는 능력적 차이가 없습니다만...


이렇듯 고작 상대가 이성인지 동성인지조차 판단해내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무디다보니 남성은 시각이나 후각, 청각만으로도 모자라 촉각을 통해 어떻게든 상대방이 '여성' 즉 내 유전자를 통해 생명이 잉태 가능한 존재임을 확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하게도 '남성과 다른 신체적 차이'에 근거하게 되고 그렇기에 남성은 보다 큰 가슴이나 잘록한 허리라인, 목선, 쇄골뼈, 엉덩이라인, 늘씬한 허벅지나 다리라인 등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정 부위에 대한 스킨십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단지 '성별 확인'이라는 지극히 쉬운 판단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남자 입장에서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보니, 스킨십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는 것도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라고 볼 수는 없겠죠. 생물학적으로도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반면 여성은 시각 이외에도 후각이나 청각만으로도 성별 확인은 물론 '자신에게 걸맞는 이상적인 인물'인지에 대한 부분까지 충분히 본능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후각의 민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요. 흔히 불쾌한 땀냄새나 몸에서 나는 아주 작은 채취로도 시각 조건 없이 사람을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이니 오감이 얼마나 민감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따라서 굳이 촉감까지 쓸 필요가 없이 대부분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고 그래서 스킨십에 대한 욕구가 남성에 비해 현저히 적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듯 스킨십 보기를 돌같이 하던 여성도 스킨십 욕구가 상당히 급격하게 올라가는 시기가 있는데, 다름아닌 '성 관계 직후'입니다. 성관계 직전에 스킨십 욕구가 극도로 올라가는 남성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부분인데요. 물론 이때 나타나는 스킨십에 대한 목적은 남성의 그것처럼 성별 판독이 아닌 '보호본능'에 의거한 '보호요청'행동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유전자를 받은 직후부터 10개월간의 고독한 싸움이 이어질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임신 여부와는 관계없이) 상당히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여성은 약하다는 인식으로 인해) 그로인해 내 옆에 있는 남성의 신체적 강함을 신경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 스킨십은 상당히 차분하게 이루어지는데요. 남성의 등을 쓰다듬거나 팔근육을 만지작거리거는 등 지극히 '강함'과 관계가 깊은 부분에 집중적으로 스킨십이 이루어집니다. 흔히 나오는 'Hug'에 대한 요청도 이와 관계가 깊죠.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함으로서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에 대한 안정감을 확보하는 본능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여기에 비교적 스킨십에 있어서 '피동적'인 부분도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여성들은 남성의 손길이 '강탈'이 아닌 '인정'에 코드가 맞춰져 있을 경우 '직접 움직여 만지는 것'이 아닌 '만져지는 것'에 의해 스킨십 욕구를 충족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만지거나 (눈물을 엄지로 닦아줄때처럼) 하는 등 기본적으로 여성이 '공통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여성성'을 인정받는 형태의 스킨십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즉 가슴이 나오거나 다리라인이 여성스럽거나 하는 등의 보편적인 요소가 아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적인 여성성에 대한 피동적 스킨십 욕구가 있다는 것인데요. 흔히 '머리를 새로 하거나' 새로 악세사리를 샀거나 새 옷을 입었거나 하는 등의 변화를 남성에게 알아주길 바라는 점도 이와 같은 맥략일 것입니다.



늘 쓰고 나면 느끼는 사실입니다만, 연구하면 할 수록 남녀간의 다른 부분은 끝이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다른 부분이 빚어내는 본능적인 부분도 지켜보다보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데요. 반드시 알고 있지 않아도 되는 '본능'적인 부분에 대해 너무 이성적으로 혹은 베타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냥 '본능에 충실해'라는 조금은 솔직한 감성으로 살아가보는 것이 어떨지 싶습니다. 모르고 있는 채로 있는 것보다 조금은 알고 가는 것도 인생에 있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이 세상에 선천적인 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유 없는 본능도 있을 수 없죠. 다만 그게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인지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책임이 '사회'에 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 있는지가 갈라질 뿐입니다. 선천적인 욕구를 사회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억제해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사회가 치루어야 할 댓가가 될 것이며 후천적으로 생겨난 피해 요인에 대해서는 비단 사회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까지 영향을 끼친 직접적인 영향 요인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없던 게 갑자기 생겨나기 시작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게 됩니다. 그 원인 제공자가 해야 할 일은 그 원인을 없에는 일이 되어야 하지 그 원인의 해당 당사자를 사회악으로 구분해 묻어버리려는 면책이 우선시되어서는 안되겠죠. 현대사회에서 대체 무엇이 미개한 것인지 과연 그게 미개하다는 새뇌로 끝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일인지에 대해 되새겨보며 공화국 연구소 '남자의 스킨십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09. 10. 25. 13:43
글 무지하게 깁니다. 긴 글 읽기 싫으신 분들을 위해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 글은 '일본의 성 문화에 대한 오해와 진실'과 연관되어있습니다.

군가산점 문제, 김신명숙, 이화여대, 여성부에 이어 또 하나의 떡밥이 요즘 거의 매일 보이다시피 하고 있네요. 테마는 '야동 보는 남자'인 것 같은데 글을 읽어보면 대체 뭘 어쩌라는건지 알 길이 없는 글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런 글이다 보니 답글도 산으로 가고 있을 수밖에요. 건전한 토론장이 되기에는 떡밥이 너무 쉬었습니다. 오래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발점이 되는 글들이 나타내는 주장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포장에 덮칠이 거듭된 글을 아무리 정독한들 제대로 된 답글이 나올리가 없고 그런 글에서 핀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글에 걸맞는 답글을 쓸 턱이 없겠죠.

결국은 너무나도 간단한 이유이지만 그 이유가 왜 생겼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녀는 서로 너무 모르고 있고 서로 알려는 노력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논란은 자기중심적인 결론밖에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언제나 핀포인트는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문제가 생길때 마다 눈 앞의 문제만 해결하려 하거나 남자에 맞춰 혹은 여자에 맞춰 자신의 성격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연애강좌의 설득에 놀아나기도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연애의 기술을 가르치는 강좌에 사람이 미어터지는 것을 보면 그저 어떻게든 자신을 감추고 속이려고만 할 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내 사람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번 공화국 연구소에서는 남자들이 왜 야동을 보게 되었는지와 더불어 다른 나라의 사례 비교를 통해 유독 우리나라에서 남녀간의 몰이해와 이에 따른 성 갈등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연구해볼까 합니다. 철저히 개인 연구 자료이므로 어떤 학술적인 근거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신뢰 여부는 읽는 분의 판단에 맡기고 있음을 밝혀둡니다.

야동은 한국뿐만 아니라 주산지(?)인 일본과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유럽 각 국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품입니다. 미디어 형태는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비주얼 형태로 성욕을 만족시키는 상품은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야화, 일본의 우키요에 등에서도 볼 수 있죠. 이게 어떤 예술성을 지녔던지 간에 직 간접적으로 욕구만족을 위해 쓰였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쪽 관련 상품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특히 남성 타킷의 성욕 해소를 위한 상품은 과거부터 꽤 오랫동안 이어져온 셈이죠. 물론 실시간 야동도 있었습니다. 사극에서 보는 '혼례잔치 초야'를 훔쳐보는 창호지 구멍은 말이 좋지 몰카나 다를 바 없었던거죠.


그런데 과거의 이런 부분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몰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화던 신방훔쳐보기던 그냥 레포츠일 뿐 그 자체가 어떤 목적성을 띄거나 성적 몰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던 것이죠. 과거에는 한창 성욕이 폭발할 시기인 14세에 장가를 들었으니 에초 지금처럼 성욕이 쌓여 오갈 데 없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위험이 적었을 테니까요. 조선시대의 남녀칠세부동석은 이런 저런 문제를 낳았습니다만 성징이 활발한 시기를 알고 일찍 장가를 들이는 문화가 만들어짐으로서 성교육적인 측면은 물론 성 정체성이나 관념에 있어서도 비교적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잇점도 있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에는 남존여비사상으로 인해 성 문화가 그다지 신사적이지 못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성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는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통제받는 상황보다는 훨씬 열려있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가 '남성의 성욕'에도 단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남성의 성욕은 '1차적'즉 관계 자체에 집중하여 그 관계에서 끝난다고 어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실제로는 여성의 복잡한 감성에 뒤지지 않는 복잡한 감성이 남성의 성에도 얽혀 있습니다. 여성이 관계 자체 이외에도 관계 전과 후의 단계가 중요하듯이 남성에게도 원래는 여성과는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감성적으로 느끼는 바는 거의 일치하는 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사실 현실에서 충족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처럼 남성에게 남성다움이라는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는 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어려운데다 실제로 이를 충실히 따라줄 여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여성들이 남성에게 가지는 성적 단계에 대한 불만 중 하나가 (여성이 원하는 복잡한 단계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지 않고 관계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는 남성이 많지 않듯이 남성의 그 복잡한 무엇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여성 역시 찾기 힘든 것입니다.

남성의 단계는 그 형태로 보자면 여성의 그것을 역할을 바꾸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여성이 시작하기 전에 어루만짐이나 나지막한 대화 등을 나누며 다소 천천히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즐기듯이 남성 역시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데요. 여성을 천천히 살펴보고 싶거나 차분한 마음으로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이른바 느린 관계를 더 선호하는 것은 남성의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좀 더 덧붙여 남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에게 모성애를 느끼게 되는데, 환한 얼굴로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모습이나, 관계 후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슴에 품어주는 등 이런 저런 판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은 성과 관련되어서는 상당히 연약해지기 때문에 (신체적이 아닌 감성적인 연약함) 평소 지쳐있거나 억눌렀던 우울함 등이 해금되며 감성에 표출되기도 하며 이는 일시적인 패닉이 아닌 대단히 자연스러운 감성의 발산입니다.

영화 왕의 남자를 보면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가 표현되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 장면이 남성의 이런 단계적 감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거나 조용히 무릎을 베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와 아들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모성애와 관련된 감성입니다. 특히 연산군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이런 감성이 훨씬 결핍되어 있었기도 했지요. 여성이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도 모성애가 발휘되는 이유는 남성에게 있어 그 모성애가 더없이 소중한 감성충족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며 남성은 때문에 여성의 모성애를 갈망하고 끝없이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지금의 남성들은 현대사회에서의 고정관념 주입으로 인해 이런 모습을 여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성향이 짙어지는 한편 이런 모습의 자신을 보듬어주기를 바라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하며 대부분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후자를 억누르기 때문에 이런 감성이 표출되지 않고 잠재되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또 한편의 욕구불만으로 표출되게 되는데 이것이 남성이 성적으로 과격해지게 되는 원인이 되거나 혹은 스스로 이런 감성을 포기하고 1차적인 성욕 해소에 집중하는 것으로 바뀌는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요. 이런 문제가 복잡하게 결부되어 야동이 예전처럼 '문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점차 '본격적인 성욕 충족'의 수단으로서 사용되게 되고 시장 역시 이에 맞춰 갈수록 성욕 해소 목적에만 치우친 상품들만을 만들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상품들은 성 관념이 확립될 시기인 14세 전후의 청소년들에게 유입이 되고 '남성의 성'은 그냥 '1차적인 관계'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잘못된 역할론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죠. 남성은 1단계 이외에도 정말 많은 성적 판타지와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장 뇌리에 깊게 박히는 1단계만을 반복 학습하게 됨으로서 향후 실제 관계에 있어서도 역할이 1단계에 한정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반복될 경우 당연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이런 저런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우리가 기본필수요소를 오랫동안 적정량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지듯이 감성적인 부분 역시 오랜 기간 충족되지 못하게 되면 상당히 문제가 생깁니다. 유아성폭력은 흔히들 '유아성애'라는 정신병이 1차 관계와 결부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사실상 그 이전의 억눌러왔던 부분들이 정신적 외상을 일으켜 이를 벌충하기 위해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하며, 흔히 성적 취향이 SM이나 동성애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는 일면에는 이런 감성적인 충족 결핍을 1차 관계의 다양성으로 충족시키려는 비뚤어진 관점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는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나 직업 여성들을 돈으로 산 상품으로 어기려는 그릇된 시각부터 심한 경우 1차 성욕마저 결핍되어 성범죄를 일으키거나 그 성범죄마저 감성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성범죄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할 대상까지 손을 뻗히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야동 때문에, 성욕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는 짐승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전혀 부도덕하지 않은 남성들의 감성이 사회적인 변화로 인해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데다가 사회가 반 강제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감정을 1차 성욕으로 싸잡아 풀어내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광우병이 초식 동물에게 육류를 먹여서 생겨난 것처럼 에초 1차 성욕으로 풀어낼 수 없는 감성을 1차 성욕으로 일원화시켜 풀려고 하니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죠. 인간은 아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욕구가 급격히 결핍되면 이성적인 판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니까요.


즉 감성적인 결핍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보니 위험 수준에 이를때까지 방치되다가 결국 일을 그르치거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1차 관계에 대한 지식 뿐인 현실에서 갈 곳 없는 감성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을 마치 깜깜한 밤에 벽을 더듬거리며 전기스위치를 찾듯이 계속 빗나가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은 결코 정답에 근접할 수 없으며 1차 성욕은 물론 그로 인해 파생된 SM 등 성적 취향의 경우는 오히려 외부자극으로 인해 이런 감성을 억누르는 식이기 때문에 이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마약이나 SM이나 결국 뇌 도파민 분비를 통해 감성의 이상폭발을 억제하는 역할이므로 자극에 적응되고 더 많은 자극을 요하게 되는 중독성마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죠. 당연하겠지만 이로 인한 범죄는 더욱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 게속 새로운 게 생겨나는 이유는 그 누구도 이를 해소할 방법을 알려주지도 찾아보려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그저 남자는 짐승처럼 성만 밝힌다는 또 하나의 사회적 무덤을 만들어 남자의 마지막 하나의 감성마저 묻어버리려 할 뿐이었으니까요.

정리하면 지금의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단계적 성욕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남성상에 휩쓸린나머지 이러한 욕구를 제대로 요구하지 못함은 물론 어떤 욕구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부분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여성 지위가 상승함과 더불어 남성의 역할론이 대두되며 이른바 '자존심'이 정신적인 삶의 질보다 우선시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때문에 약 4개에서 많게는 6단계에 이르는 남성의 성욕은 대부분 이런 성장 과정에서 속으로 은폐되고 금지되며 성장하고 이렇게 은폐된 성욕은 1차적 성욕 즉 직접적인 관계에 모두 몰려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몰리게끔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회는 남성이 이런 식으로 타고난 감성을 은폐시키며 살고 있는 것에 대한 미봉책으로 1차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성욕을 충분히 풀어주기 위해 포르노, 즉 야동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집창촌을 법적으로는 불법으로 정하고 현실에서는 묵인하는 등 지극히 사회 체제를 현상유지시키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죠. 이전과는 용도가 완전히 달라진 야동은 그 용도에 맞게 자극성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에전의 기방처럼 단순히 성적인 욕구만이 아닌 남자의 다친 마음까지 어루만져주던 모습은 지금의 집창촌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관계를 사고 파는 1차 성욕 배출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쯤해서 1차 2차 3차로 나누어지는 남성 성욕의 정체란 무엇인지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남자는 1차적으로 관계에 대한 성욕을 가집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1차 성욕에만 집중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 역시 관계에 있어서는 우선 전희부터 떠올린 후 그 다음을 생각하듯 남성에게는 우선 이 1차 성욕이 시작되지 않으면 다음 성욕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현실에서 보여주는 남자의 성욕은 단순하게 여성의 신체에 대한 육식동물같은 열망이 아니라 포괄적인 성욕의 제 1단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2차 성욕입니다. 남성은 여성과 육체적으로 이어지게 되면 감정적으로 상당히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여성의 자궁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있습니다만 아무튼 남성에게는 1차 성욕이 시작되면 2차 성욕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한층 차분해지고 솔직해지며 그동안 차마 남자로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약한 이야기라던지,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서러운 이야기라던지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남성 스스로도 놀랄 만큼 손쉽게 발산됩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 가까워질때의 편안함이 남성을 사회적인 남성상에서 잠시 벗어나 솔직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만들어주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 과정은 거의 모든 남자들에게 있어 이미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남자는 첫 관계부터 이미 '여성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사회적 책임을 부여받고 도저히 자신의 2차 성욕에는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의 만족도에 모든 신경을 곤두서게 되는 것이죠. 이미 '강한 남자'라는 타이틀이 남자들을 옥죄고 있는 현실에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2차 성욕은 당연히 감춰져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1차 관계에 집중하는 지금 문화에서는 이런 생각이나 대화를 나눌 틈 없이 1차 관계에서 오는 신경적 쾌락만이 머릿속에 가득해질 뿐이죠.


3차 성욕은 여성에게서 느낍니다. 이런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지 않고 보듬어주고 토닥여주고 격려해주는 어머니같은 모습을 여성에게서 발견하길 원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자신이 여성을 아프게 하고 있거나 나만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성을 터부시하는 사회일수록 심해지는 강박관념)을 하는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지으며 받아들이는 모습에 또 다른 감성을 느낍니다. 이것은 새디즘과 비슷해보이지만 상당히 다릅니다. 새디즘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더 아픔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3차 관계는 그 목적부터 다르니까요 아마 현실에서 가장 많이 결핍을 느끼는 성욕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실제로 여성의 절대적인 협력이 없이는 결코 충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차 성욕은 '인정'입니다. 만일 관계가 첫 관계였다면 남자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런 일을 해버렸는데 여자가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지금의 여자 기분이 정말 너무나도 궁금해지는 것이죠. 여기에서는 남자가 어떤 질문을 하고 여자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감성은 직후 여성이 자신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때 안정됩니다. 남자가 관계 후 지쳐 나가떨어지더라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여전히 남자를 신뢰하고 있다는 마음을 표현한다면 남성은 극도의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가까워졌다가 갑자기 멀어질 경우 여자가 자신으로부터 떠나갈것을 매우 걱정하게 되는데 이런 남은 불안까지 안정시켜주는 것이 마지막 성욕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신가요? 흔히 알려진 여성들의 복잡한 성욕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물론 남성 역시 여성들의 그 복잡한 성욕을 모두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남성 역시 모든 성욕을 여성들에게 충족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무모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그것에 비해 에초 실체조차 알려지지도 않았던 남성의 성욕과 그에 관한 감성은 이루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그것이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요. 남성들이 수많은 1차 성욕을 대신 충족할 수 있는 것들에서 성욕을 착실히 만족시키고 있습니다만 누구나 느끼는 충족 후의 허탈함은 바로 1단계에서 바로 이어지는 2단계 이후의 성욕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려진것처럼 남자는 1차적인 성욕만을 충족할 수 있어도 살 수 있는 성별이었다면 이미 여성과의 관계는 종말을 맞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요. 단지 여성과의 관계가 1차 성욕에 있어 성기에 주어지는 자극이 더 현실적이어서일까요? 이미 감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상품들이 차고 넘치는데 어째서 남자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여성을 갈망하는걸까요?

이 부분에서는 최근 일본의 변화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성 문화 역사는 알려진 대로 대단히 오랩니다. 우리나라에서 터부시되었던 역사 만큼을 그들은 터부시하지 않은 역사로서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짐승같은 삶이라거나 그렇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아무리 시작이 거지 발싸개같은 문화라도 100년이 넘게 인간 사회에서 지속된 문화는 틀림없이 고유의 철학이 생기게 됩니다. 독일 병사들이 해골을 차고 놀거나 돼지 방광에 물을 채워 걷어차던 놀이에서 파생되었다는 축구가 지금은 인생의 축소판, 각본없는 드라마로 불리는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문화던 오랜 시간 다수의 사회 구성원을 통해 롱런하게 되면 이를 연구하는 학자도 생기게 되고 그 학자들에 의해 깎이고 다듬어집니다. 성 문화라고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남성의 성, 여성의 성을 연구하면서 성에 있어서의 남성의 역할, 여성의 역할 대신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과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놓는 데에 집중해 왔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물론 이들 역시 야동 공화국(?)답게 1차 성욕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불만 계층이 늘어나고 있는 피해가기 힘든 현대사회의 병폐가 없는 게 아닙니다만 적어도 이들은 이게 왜 심각한지 알고 그에 맞는 처방전을 업계 나름대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죠. 앵? 야동 공화국에서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시는 분들도 게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들어보세요.

다소 민감한 이야기입니다만 일본 도쿄에는 성매매 단속에 밀려 일본으로 건너온 직업여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요. 이들은 대부분 취업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취업비자를 내줄 턱이 없겠죠) 들어오기 때문에 정식 업소에 취직이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주로 전화를 통한 출장서비스에 가입하여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형태의 서비스를 통해 영업을 하고 있는데요. 대체로 일본 여성에 비해 요구하는 금액도 적은 편이고 아시겠지만 상대적으로 일본 여성에 비해 외모가 앞서기 때문에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이유는 바로 '일본어'입니다. 직업여성들은 일본에 와서 일본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유는 간단하죠. 어차피 1차 성욕만을 풀어줄거면 언어는 아무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그렇게만 영업을 해왔던 그들은 일본에서도 똑같이 단지 1차 성욕만을 제공하고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일본 남성들은 이들에게 관계 도중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왔고 이들은 전혀 대답을 하지 못했으며 남성들은 '2차 성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불만이 쌓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대거 외면하기 시작했는데요 최근에는 이런 이유로 업계에서 다시금 일본 여성들에게 밀려 영업 수익을 제대로 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영화 '러브콜랙션'시리즈 중 '달과 체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류 감독에 의해 정말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현실을 스케치하듯 그린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인데요. 이 영화 시나리오 후반부 짧은 에피소드 형태로 '출장 직업여성'이 등장합니다. 영화라서 다소 로맨틱하게 표현했을수도 있고 모든 일본의 직업여성이 그렇다는 보장도 없습니다만 남자는 여자를 '산'것이 아니라 성을 포함한 진심어린 위로를 받기 위한 카운셀러로서 맞이하고 직업여성 역시 이에 충실히 응합니다. 물론 1차 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계산적입니다만 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의 여자가 되어 위로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역할을 해주는 거죠. 이 작품에서 주인공도 무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고생을 털어놓으며 울먹입니다. 그런 주인공의 이야기를 여자는 모두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렇지 않을 거라고 위로해주죠. 이런 문화는 비단 직업여성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라면 나이를 막론하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우리나라의 성 문화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죠.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야동이 이른바 '질질 끈다'라고 표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성 행위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성이 접해 있는 그 시간을 오랫동안 차분히 즐기기 때문에 이른바 '빨리 좀 보여주고 빨리 좀 끝내자'는 한국의 추세에 전혀 들어맞지 못하는 것이죠.

하나 더 하죠. 일본의 오타쿠들이 자주 드나드는 메이드 카페, 풍속업계 중 가장 높은 단가를 가지고 있는 캬바쿠라, 가상 연애를 즐기게 해주는 연예 시뮬레이션 게임의 공통점이 뭘까요? 다음아닌 '1차 관계'를 제공하지 않고 남성으로 하여금 성욕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관점에서는 대체 '만지지도 못하고 안지도 관계를 갖지도 못하는' 메이드카페에 왜 그리도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인지 분명 이해하기 어렵겠습니다만, 분명 그들은 어떤 부분에서 1차 관계에 진배없는 가치를 가진 자신의 욕구 하나를 해소했으며 그 댓가를 지불할 뿐이죠. 단지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식혀주는 것이나 자신을 기억해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서비스의 형태에 요점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억눌러오고 있던 것을 그들은 당연한 삶의 권리로서 돈을 주고서라도 사서 당당하게 해소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현실의 여자에게 그것을 바라기에는 여성의 지위도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복잡한 감성에 대한 이해를 하기 꺼려하는 여성들에게 감성을 해소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음을 이미 자각하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죠. 이런 업소를 이용하는 계층은 미혼 남성만이 아닙니다. 이미 결혼 20년을 넘긴 중 장년층은 물론 무려 노년층까지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지금의 부부 관계에서 어떤 부분의 결핍을 느꼈기에 이 곳을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 매매'가 아닌 업소에서 보수적인 기성세대들까지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듯 일본의 남성들은 물론 사회적으로 1차 성욕에 집중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마련되고 있지만 결코 자신이 가진 다양한 감성을 포기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체면을 깍지 않는 선에서 비밀리에 충족하고 있을 뿐이죠. 여기에 한술 더 떠 이를 공개적으로 즐기는 오타쿠들은 변태가 아니라 차라리 순수한 쪽입니다. 아직 자신이 가진 감성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니까요. 과연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는 사회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선에서 자신의 감성을 다양한 수단으로부터 채워나가며 살아가는 오타쿠 중 어느쪽이 더 이상한걸까요? 일본에서 흔히 사회악으로 인식되고 있는 오타쿠가 저지르는 범죄율과 같은 표본에서 일반인이 저지르는 범죄 확율 중 어느 쪽이 높은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오타쿠들의 범죄율은 상상이상으로 적습니다. 뭔가 모순되었군요 이상하지 않나요?

생각같아서는 허구언날 보는게 변태적이고 폭력적인 것만 보고 사니까 감성도 공격적이고 타락적으로 변해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됩니다만 사실 이들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감성을 다 충족하고 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모든 범죄는 '사회에 대한 열등감과 불만'에서 발생합니다. 오히려 1차 성욕으로 다른 감성을 억누르며 자신을 억지로 다스리는 현대인들 중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범죄가 훨씬 많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죠. 단지 1차 성욕만을 채울 수 있는 것에 만족할 것을 종용당하며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남성상에서 벗어나는 남성의 감성이 무시된 채로 그냥 잃어버린 채로 갈곳 없는 감성을 단지 1차 감성에 쏟아야만 하는 세상이 되고 그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야동이 만들어지고 후세 역시 그 야동을 통해 세상의 룰을 배우고 자신에게 내제되 었는 수많은 성욕 감성을 죽여나가는 지금의 현실이 과연 얼마나 행복함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의 성을 터부시했던 역사는 어쩔 수 없다 치겠지만 그 사상이 지금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고 현대사회에 고정관념과 성적 역할부여까지 강요하게 만드는 현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안좋은 문화라도 100년 이상 지속되면 철학이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터부는 반대입니다. 터부는 시작할때는 정말 그럴싸해보입니다. 왠지 인간답게 사는 것 같고 성서에 더 가까워지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터부는 안좋은 문화와는 달리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썩어들어갑니다. 사자가 초식동물을 죽여 고기를 먹는 것을 사자는 절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은 그것이 자연의 섭리네 약육강식이네 심지어는 초식동물이 불쌍하다는 동물보호론까지 별개 다 나오는 법인데요. 하물며 인간이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나오는 감성을 정말 갖은 궤변으로 터부시에 성공했다 한들 그것이 단지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을 막기만 한 댐에 불과했다면 언젠간 댐은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터부를 지키기 위해 댐을 높게 쌓으면 쌓을수록 물은 썩어가고 악취를 풍기게 되며 댐의 의미는 점차 사라져갈 뿐입니다.

터부가 인간을 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지금 제가 보는 터부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잘 되는 것들이 없습니다. 결국 개방된 사회에서조차 서로의 성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고 한쪽은 아예 그걸 알아가려는 데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잘못된 성 역할론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그것이 결코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아님에도) 감성들이 반강제적으로 억눌러지고 갈곳 없는 감성이 엉뚱한 곳으로 표출됩니다. 이런 감성이 쌓여 정신적인 외상을 가져오고 심지어는 1차 성욕에서 충족되지 않는 감성을 충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동원하거나 심지어는 이성을 잃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태어나는 2세들은 단지 자신의 성이 1차 성욕에만 한정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인식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아예 처음부터 닫아버리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 무엇보다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단 한번밖에 없을 수도 있는 그것을 금지도 아닌 아예 배우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자라나는 끔찍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남성의 이런 모든 성욕을 여성들이 모두 풀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여자의 그것을 모두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한계이니까요. 다만 적어도 다른 누군가도 아닌 남성 스스로가 이런 감성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 채 멍하니 1차 성욕에만 모든 것을 풀기 위해 애쓰는 것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성의 다양한 성의 형태는 서적으로도 많이 출시되었고 연구도 많이 되어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남성은 여성을 만족시킨다는 출처불명의 의무감으로 인해 이러한 정보를 가능한 충실하게 습득하고 이해하려 '고민'만큼은 하고 있으니까요. 아직 이해까지는 머나멀게만 느껴지지만 말입니다.

여성들에게 당장 남성의 성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것은 지금 단계에서는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관심'만큼은 가졌으면 합니다. 남자로서 내 여자가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마음처럼 여성 역시 내 남자가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바랄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남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여보여면 어떨까요? 이 작은 노력 하나로 만들어지는 변화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남자가 야동을 왜 보는지, 무엇이 부족해서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그것을 보는지, 어째서 1차적인 관계 쾌락에만 집착하는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본다면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유'는 조금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생을 함께 할 내 남자의 일이 결코 남의 일은 아니겠지요?



남자도 무척 섬세하고 예민합니다.
강하지만 내 여자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남자라고 해서 단지 신경적인 쾌락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호흡을 맞추며 시간을 즐기는 것을 사실 더 좋아합니다.
남자답다라는 단어에 새뇌당해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건전하고 감성적인 성적 판타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이런 모습이 진정 남자답고 자연스러운 진짜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RushAm 2009. 10. 25. 08:05
일본에서 넘어온 수많은 소문과 그 소문을 속속 확인시켜주는 각종 매체들에 의해 형성된 일본에 대한 이미지 중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일본은 성에 대해 대단히 개방된 나라다'라는 것입니다. 워낙 관련 매체와 사건, 사고들이 잘 알려져있고 공교롭게도 시중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일본 책들에서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고 있죠. 일부 사실이며 일본 정부도 이를 인정하고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를 쓰고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 가부키쵸는 사진 촬영이라도 좀 할라치면 코반이 제지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요. 물론 영업상의 보호 문제도 있겠습니다만 만일 기자나 인터넷 블로그를 운영중인 외국인일 경우 사진이 결정적인 이미지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의 이 산업은 최소 20년 안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부도 이쪽 산업의 사회적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뿌리를 뽑으려 들기보다는 해외로 이미지가 굳어지지 않도록 외국인들에게만큼은 철저히 노출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각 지역별 야쿠자들이 운영하는 전화출장 업계와 인터넷으로 운영되는 콜걸 서비스까지 막기에는 일본 정부의 능력상 역부족에 가깝습니다. 벽이 갈라져 새는 댐을 팔로 막는 무모한 짓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을테니까요.

자 그렇다면 이런 나라의 성에 대한 관념은 이런 산업의 수준 만큼이나 전체적으로 하향평준화되어있을까요? 일부 사람들에게서 돌고 있는 소문대로 일본 여자들은 조금만 친해져도 스스럼 없이 성관계에 관대한걸까요? 뻔한 답변이 되겠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NO! 입니다. 일본이 그런 오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관계의 내용'에 있지 '관계까지 가는 과정'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가 다른거냐고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한 일 양국간의 결정적인 시각차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의 일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한 오해가 왜 빗나갔냐면 우리나라의 '성 문화'에 대한 관점으로 일본을 똑같이 치부했기 때문인데요. 흔히 남녀가 커플이 되고 결혼을 하고 관계를 가지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관계를 가지기 직전까지의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게 치부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결국 이런 레이스는 '관계'에 이르러서는 남녀 모두 신경전이 극한까지 온 상황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긴장이 풀리고 한쪽은 목적성, 한쪽은 신경전에 대한 필요성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리는 거죠. 에초 우리나라의 성 관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한쪽은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한쪽은 '도달하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검증하고 경계'하는 데에만 거의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남녀 모두 결국 '성 관계'의 허불허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신경을 곤두세우기 때문에 정작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는 인성과 관련된 성교육과 인식의 성숙도의 평균치가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결국 수많은 커플들이 정말 어이없게 '우린 너무 익숙해졌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수도 없이 해어짐을 거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커플의 최종목적지'를 처음부터 정해놓았기 때문이죠.

일본의 성관계에 대한 인식은 조금 다릅니다. 성관계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관계는 커플이건 결혼한 부부이건 '현재진행형'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순결에 대해서 크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성관계 자체가 '커플'이라는 의미에서는 큰 비중이 없기 때문이죠. 이들은 '성관계'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라는 더 큰 범주의 카테고리가 더 중요하며 성관계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관계에 있어서도 '관계 그 자체'에 집중하거나 흥분하여 이성을 잃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일상에서 대화하듯 '관계'를 가지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당히 천천히 그리고 정말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그 시간을 여유를 두고 충분히 즐기려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모습이 한국에서 보기에는 '성을 가볍게 어긴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니 저렇게 성관계가 생활화 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문란한 사회인거야?'라는 오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결국 시각차입니다. 이들이 성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성이라는 부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위험성을 내포해버린 탓이죠. 성관계 자체에 큰 의미를 두는 사회에서 이들의 성 의식은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이들이 이상한건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커플 관계일때는 단계별 미션의 최종단계처럼 어겨지는 성, 부부가 되어서는 의무방어전이라 불리울 만큼 관계 그 자체에 의미를 집중하는 우리나라의 성이 과연 불편하지 않은 진실이 되어주고 있는 것인지도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듯 싶네요.

성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 때문에 높이 추앙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일본의 성 관념입니다. 동성들끼리라도 알몸이 되면 서로 친근해지고 말문이 쉽게 열리는 것처럼 남녀관계도 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말문을 열고 그동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나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털어놓기도 하고 힘든 일이 있었을 때는 위로를 주고받기도 하는 것이죠. 서로 알몸이 되어있고 하나가 되어있는 상황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결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은 충분히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계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관계를 가지면서 갖는 감정적 교감의 시간을 중시하는 것이 일본의 성 문화가 가진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문화는 이른바 뒷세계라 불리우는 '풍속업계'에도 잘 드러납니다. 물론 이쪽 업계도 예전과는 달라서 이른바 '성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업소들이 업계를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만,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실체는 '쾌락'이 아닌 '위안'입니다. 이들은 여자의 성을 판매한다는 생각보다는 그 여자의 시간을 판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들의 경험담은 정말 다채롭습니다. 물론 '관계'를 가진 경험이 제일 많지만, 뜬금없이 술자리를 같이 하자며 이런 저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 부여잡고 울먹이며 신세한탄하는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들까지 정말 다양한 사례들을 듣게 되죠. 직업여성들은 이런 사람들을 성 관계를 포함하여 그 시간만큼은 그사람의 편이 되어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위로해주며 가능한 그 시간만큼은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위안'은 '위로'와 '안정'으로 결국 남자가 가진 모든 욕구불만을 해소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것도 일종의 영업기술 중 하나입니다만, 어쨌든 일본의 풍속업계는 결코 성 그 자체만으로 돈을 지불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개념이 확고합니다. 앞서 설명했듯 일본의 성 관념은 관계 그 자체에 무게를 두지 않기 때문에 업계도 이에 발맞추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죠.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서 일본은 정말 성이 문란한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한국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가 정답이 되겠습니다. 물론 일본 여성들이 성에 대해 관대하다는 것도 편견에 가까운데요. 최근 일본 잡지에서 발췌한 설문조사 기록을 보면 '애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 쪽이 절반을 넘었다는 부분이 이런 편견을 가중시키기도 합니다만, 이건 여성들이 성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 그 자체에 의미를 크게 두지 않는을 뿐 일본 여성들이 혜프다는 증거로 치부할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성에 의미를 크게 두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끼치는 사회적 영향은 생각만큼 크지 않거든요, 성의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 한국이 자신있게 우리는 성이 문란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성에 의미를 크게 두지 않는 일본이 다른 나라의 기준으로 단정지어지는 혜픈 여성 이미지에 발끈할 자격도 충분합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사람의 성숙도 차이일 뿐 보편적 사회기준이 어떤지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요.

한국처럼 정말 오랜 시간동안 절차와 의식을 거쳐야 하는 게 아니라 조금만 꼬시면 성관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이른바 '단계 단축론'도 있는데 관계 자체를 떠나서 일본의 성 문화처럼 '속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로 인정받는 게 과연 흔히 생각하듯 마냥 쉽게 생각할 부분은 아닙니다.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을 뿐 이들에게 있어 관계를 갖는다는 의식 전체가 가지는 무게감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거든요.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들 중에 '마음속을 좀체로 털어놓지 않는다',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연 이들에게 '후련하게 속을 털어놓고 그 고민을 진심으로 위로해주는'관계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정말 수많은 단게를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들에게 있어 성이란 내가 내 치부를 드러내고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도 결코 그가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하여 돌아서지 않고 어루만져주고 위로받을 수 있는 관계에 다다랐음을 의마합니다. 형태만 다를 뿐 과정에 있어 특별함은 없습니다. 이 관게가 만들어지기가 쉬울리가 없겠죠 일본 사회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일본에 차고 넘칠만큼 수은 동정남 문제와 이로 인한 AV오타쿠들의 양산은 일본 역시 한국 그 이상으로 이성간의 관계가 극적으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관점대로 성 그 자체만을 두고 보았을 때는 분명 일본의 성은 문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풍속업소도 정말 다양한 형태로 성업중이며, 여성들이 관계 자체에 그다지 큰 무게감을 부여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죠. 실제로 관계를 시작하는 연령대는 점차 어려지고 있고, 일부 여성들에 의해 다양한 이성 관계를 만들어가며 성 자체를 즐기는 계층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다만 이들의 이런 면면들은 거리낌없이 모두 드러나 있고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통계 수치도 비교적 정확하며 설문 조사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해 솔직하지 못한 답변을 하는 계층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이미 드러나 있고 정확하게 그 사회의 실상을 수치로 반영하고 있는 쪽과 도대체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쪽 중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편견은 무섭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속담만큼 최악의 속담이 또 있을까요? 007 언리미티드에서 표현된 한국 배경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킨 이유는 '감독'이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고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린 그렇지 않아'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 누구보다 '한국'이란 나라에 오래 살고 있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는 1억이 넘는 인구가 있고 정말 인간 쓰래기라고 불릴 만한 사람부터 인간냄새 풀풀 풍기는 인정 넘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며 단일국가로는 100년 가까이, 영토역사로는 몇천년 가까운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여지는 일본의 모습이 일본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며칠 여행을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미 한국 사회에 젖어든 사람이 바라본 시각으로 쓴 저서에서 읽어낼 수도 없고 영화나 드라마로도 모두 볼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도 않으니까요. 우리나라가 가진 모든 색깔을 한 마디로 축약해 낼 수 없듯 일본이란 나라도 편견으로 솏아낼 수 있을 만큼 작지 않습니다.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를 보던 잠깐 볼 수 있었던 일부분이나 한국의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의 기준으로 평가된 잣대로 그 나라를 평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세 뼘 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이 세상은 넓어 터졌으니까요.

끝으로 10년쯤 전에 '사계절출판사'에서 출시한 '논리 시리즈'에서 나온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합니다. (기억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명칭이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었다 이 나그네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가 돈도 부족했다. 길을 가던 도중 갈림길에 섰는데, 한쪽은 밤골로 통하는 길이었고 한쪽은 샘골로 통하는 길이었다. 옳거니 두 마을 중 좀 잘 사는 마을로 가면 잘 얻어먹을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나그네는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노인에게 물었다.

'배고픈 나그네입니다. 어느 고을로 가야 잘 얻어먹을 수 있겠는지요'

노인은 대답했다
'두 고을 모두 인심은 후하지, 그런데 한쪽 고을은 올해 풍년이 들었고 한쪽은 흉년이 들었다네'

나그네는 생각했다. "아 그러면 풍년이 든 고을로 가야 더 잘 얻어먹을 수 있겠구나."

그때 한 뚱뚱한 사람이 걷고 있는 도중에도 먹을 것을 입에서 떼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나그네가 물었다.
'저 사람은 어느 고을 사람이오?'

노인이 대답한다.
'아 저 사람은 밤골 사람이지'

뚱뚱한 사람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빼빼 마른 노인이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그네가 물었다.
'저 사람은 어느 고을 사람이오?'

노인이 대답한다.
'아 저 사람은 샘골 사람이지'

나그네는 생각했다.
'그렇군 밤골로 가야겠어 밤골 사람들은 풍년이 들어서 모두 잘 먹어서 저렇게 뚱뚱한것일테니까'

나그네는 밤골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노인이 혀를 찬다.

"쯧쯔 샘골로 가야 잘 얻어먹을 텐데 똥꾸멍이 찢어질정도로 가난한 밤골로 가다니 아까 그 사람은 밤골에서 제일 뚱뚱한 사람이고 뒤따라나온 노인은 샘골에서 가장 마른 사람인데 한 사람을 보고 그 고을의 전체를 판단하다니 정말 어리석은 나그네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