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05. 1. 20. 22:20
이 작품을 보기 전에 필자가 생각했던 것은, ‘과연 미야자키가 이 작품을 얼마나 손댔을까?’하는 단순한 의문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 카피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3년’이라고 써 놓았지만, 사실 고양이의 보은에서도 홍보할 때 단지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리타 히로유키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마케팅에 더 많이 써먹었던 전력(?)이 있는 배급사이기 때문에, 실제로 미야자키씨의 근황에 대해서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터라 별다른 선입견 없이 편하게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오해...
미야자키 감독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옛날 할머니가 전해
주시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던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그런 분위기가 풀풀 풍겨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의 지난 글에 있는 미야자키에 대한 언급에도 나와있듯이 그가 진정 만들고 싶었고 그의 색깔이 가득 담겨있는 작품은 다름아닌 97년작 모노노케 히메부터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그의 작품을 꾸준히 보아 온 사람들이라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평성너구리전쟁 폼포코, 붉은 돼지에서도 충분히 그가 표현하고 싶은 키워드를 읽을 수 있었겠지만, 진정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표현한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였다고 본인 스스로가 밝혔던 전례가 있고, 결과적으로 번복한 셈이 되었지만 그 작품 발표 직후 마지막 작품으로서 은퇴를 발표하기도 했던 만큼 그의 작품 세계관은 최근에 들어서야 그의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왜 은퇴를 번복했을까? 이미 그가 은퇴를 선언한지도 8년이 다 되어가는데 은퇴작이라 공언했던 모노노케 히메 이후 공식적으로 작품이 두 개나 더 나왔다. 그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은퇴를 만류했나? 답은 의외로 쉽다. 필자의 지난 오세암 포스트에서도 언급했듯 애니메이터들은 보통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좋게 말해서 실험적인 작품)의 경우는 흥행성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미야자키도 모노노케 히메 개봉 전 인터뷰에서 그러한 점을 충분히 강조하며 본인은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관객들은 언제나 제작자의 생각과 반대로 움직인다고 누군가가 말했듯,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의 극장판 작품 중 첫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게 되는데, 의미상으로 당시 전세계적인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타이타닉과의 흥행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거두자 이래적으로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미야자키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건 국제적 수상을 거두기 시작한 것도 모노노케 히메 이후부터라는 점인데, 미야자키는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 대중성, 작품성으로서 크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 후로, 은퇴를 번복하고 제 2의 제작자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은 듯 이전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특별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하 하울)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두고 미야자키의 본래 작품관이 훼손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랬으니까...

과연...
명예가 크게 실추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은퇴를 번복하게 만들 만큼 그에게는 아직 그의 애니메이션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게다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니 그
자신감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으리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작품관으로서 그것이 인정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특히나 데즈카 오사무를 바라보며 그에게 가장 큰 반감을 가진 채로 성장해왔던 애니메이터 미야자키에게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노노케 히메 이후의 작품들부터는 대중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작품성의 초점을 작품 자체가 아닌 미야자키 본인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광고 카피에서 나왔듯 베니스 영화제가 원래 김기덕 감독의 ‘빈 집’에 감독상을 준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대중적인 흥행성보다는 감독이 말하는 작품의 키워드를 잘 이해한 후 작품성을 평가하는 평가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딱히 수상이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을까? 하울...은 미야자키의 그 어떤 작품보다 미야자키다운 작품으로서 세상에 공개되었고, 그 부분을 감수하고 본다면 충분히 키워드 전달에 있어서 매우 이상적인 작품으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들이 대부분 평론가들의 ‘밥’이 되곤 하는데, 그만큼 평가가 다양해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의 결론이 나오게끔 만들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작품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각종 장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실로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직 사람들은 미야자키를 잘 몰랐으니까, 아니 그 전에 미야자키가 착각을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

착각...
그렇다고 미야자키가 어떤 분의 말처럼 갑자기 ‘오시이 마모루’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시이 마모루가 처음부터 자기 생각대로 작품을 만들어 오면서도 비주얼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자신의 키워드를 사람들로 하여금 읽을 수 있도록 작품 활동을 펼쳤다면 미야자키는 비
주얼의 아름다움보다는 비단 자신의 키워드와 맞지 않더라도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 형식에 자신의 키워드를 느낄 듯 느끼지 못할 듯하게 섞어 내놓았다. 마치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오시이 마모루는 시각적인 부분을 강조한 순수 양식 요리를 내놓았다면, 미야자키는 한국식 굴비구이를 내놓으면서 스리슬쩍 일본식 고추냉이를 함께 내온 격, 사실 오시이 마모루의 경우는 필자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두 감독의 현재까지의 행보에 대해서 섣불리 어느 쪽이 잘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 해도 공각기동대로 대표되는 오시이 마모루의 키워드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적극적인 매니아층과 이번 작품 ‘하울’의 모든 키워드를 이해할 수 있는 미야자키 골수팬의 수는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에 하고 싶은 키워드를 담아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애니메이터 인생을 걸만큼 값진 일이겠지만, 한편으로 그 값어치만큼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꽤나 회의적인 부분일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들이 평론가들로 하여금 ‘제멋대로식’의 키워드 해석을 낳았듯이 ‘하울’도 이제는 미야자키식의 키워드를 읽어보는 재미를 즐겨보면 어떨지 싶다, 필자도 미야자키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하울’을 보고 이후 수많은 감상문을 보면서 필자의 생각과 많이 다른 해석을 내놓으시는 분들이 많았기에 굳이 필자의 해석이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읽을 거리 정도로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이후부터는 필자의 키워드 분석이므로 내용 누설이 치명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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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길...
많은 사람들이 하울…을 비판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캐릭터의 성장 과정을 담아서 좀 더 깊은 감동을 이끌어낸다든지, 마법의 세계관을 좀 더 심오하게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생각을 갖게끔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캐릭터성을 살려서 훌륭한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미야자키 본인이 너무 기고만장한 나머지 ‘이래도 볼거냐!’라는 식으로 던져놓고 관객들을 우롱했다는 등의 평가가 많았다. 항간에는, 최악의 졸작을 만회하려면 빨리 차기작을 내놓은 후에 은퇴하라 라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실망감이 그가 이전에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와 지지율만큼 대단한 듯 한데. 사실 쓰신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필자는 그 감상문들을 읽으면서 조금 웃었다. 새로운 것, 새로운 것 항상 주문을 외우듯이 그것을 찾으면서도 정작 가장 큰 범주 내에서의 새로운 것에는 베타적이고 지독한 보수성을 보이는 사람들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의 의도와는 다르게 많은 관객들은 결과적으로 월트디즈니가 만들어 놓은 가장 큰 틀 안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작품’을 추구하려 했고 그것에 부합되지 않으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작곡을 예로 들자면 이미 만들어놓은 드럼 베이스 내에서 이미 만들어진 장르의 형태 (록이라든지 R&B, 발라드 등) 내의 규칙에 부합하여 만든 곡들도 물론 창작곡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에 부합하지 않은 새로운 음악의 형태가 비교대상격인 인기장르를 기준으로 삼을 때 음악적 흐름이 지저분하다든지, 음악적 운율이 살지 않는다든지 하는 비판을 하는 것과 같은 이
치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서 창작자의 눈을 버리고 보아야만 한다. 나라면 저렇게 안 만들고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더 재미 있을 텐데, 라는 평가는 평가가 아니라 창작 간섭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창작자로서의 비판이 아닌 관객으로서의 비판을 해줬으면 한다. 전문가 비평이라는 타이틀은 깊이 있고 보다 일반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함께 직시해주는 날카로운 부분임에 분명하지만 커다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넓은 범주의 시각만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니까, 요리는 맛보는 사람마다 맛이 다르고 미식가들이라고 싫어하는 요리가 없는 것도 아니며, 요리의 대가들은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맛 이외의 맛은 전부 맛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게 실제 요식업계에서 일어나는 우물 안 행태이지 않는가, 진정 새로운 맛과, 새로운 볼거리를 찾고 싶다면 보는 사람들이 생각의 넓이를 보다 넓히고 실질적인 고정관념이 없는 눈으로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해외 여행을 다니면서 현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서둘러 김치봉지를 꺼낸다면 그 순간 당신은 반쪽 여행을 한 셈이나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 Rush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