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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29 중학생 자살 사건, 면피와 권력, 반칙이 점철된 비극 6
posted by RushAm 2011. 12. 29. 14:41
사람이 죽었다,



그냥 중학생이 아닌, 사람이 죽었다는 것,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생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풍경은 그닥 다양하지 못하다. 기성세대들은 '우리 땐 그렇게 커도 문제 없었다'며 지금의 나약한 젊은이들의 근성을 질타한다. 젊은 세대들은 학교 폭력에 대한 무관심과 청소년 보호법 등을 원인으로 들며 가해자들에게 보다 강력하고 직접적인 처벌을 가해야한다는 강경론이 대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일부는 '왕따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회적 주류 학설을 들며 소수의 부적응자에 대한 보호가 어디까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론이 속속 나오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부터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산 자들이 터진 입이라고 떠들어대는 이야기에 나 역시 망자를 위한다는, 그리고 앞으로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있게 될 망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터진 입을 좀 놀려볼까 한다. 

학교는 학생을 가르치는 기관이기 전에, 기본적으로 '미성년자'의 '위탁 보호'기능이 우선된다. 즉 미성년자는 어떻게든 보호받아야 할 존재임이 법에 명시되어 있고 그들은 이 사회에서 보호자가 언제나 잘못된 판단으로 현 사회에 대한 무지나 권리 부족으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보호자는 1차적으로 가족 구성원 중 양육권을 가진 사람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학교는 법적으로 부여된 시간 동안 이들의 신변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책임을 지니게 된다. 중학교는 법적으로 반드시 다녀야만 하는 '의무교육'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학교는 학교가 정해놓은 '방과 시간' (여기에는 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학교를 파하고 집 대문까지 들어오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에 이 학생의 신변에 이상이 없도록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학교를 오는 도중에 등교를 위한 교통수단인 버스가 고장을 일으켜 학생이 다쳤다면 이는 버스회사와 학교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게 되며 책임의 범위는 학교가 더 많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등교길처럼 '책임'을 나눌 수 없다. 학교 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100% 학교의 책임이다. 법적으로 그들이 책임을 나눌 수 없도록 그들은 학교 내에 들어오는 잡상인을 포함한 모든 출입자를 통제할 권한과 그에 따른 노력을 해야만 한다. 학생이 철봉을 하다 다쳤으면 치료까지 모든 과정을 학교가 진행하고, 철봉 기구의 다친 원인을 파악해서 안전이 검증될때까지 모든 조치를 취해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법적으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라고 강제적 의무조항을 부여받지 않으면 설립될 수 없고, 제 1양육권자인 부모로부터 미성년자를 의무 위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들이 그런 책임을 지는 것을 모를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하면 어떤 일이든 학교 내에서 벌어진 좋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은폐하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학교 폭력에 의한 자살이 정말 '학교 폭력'에 의한 자살로 수사가 종료되었다면 이를 책임져야 하는 건 가해자 학생이 아니라 학교가 되기 때문이다. 그 책임 범위를 산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 무슨 형태로든 피해자, 가해자 모두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가장 막중한 의무가 뒤따른다. 학교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고 귀찮아하고 있다. 그러길 거부하며 그 책임을 경감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사건,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한 학교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미디어는 이 사건을 부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형사사건으로 다루지 않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피해자는 미성년자인데 가해자가 성년인게 아니니까, 둘 다 미성년자이며 책임은 100% 학교에 있다. 이건 변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어떤 행동을 했건, 무슨 일이 있었건, 가해자가 어떤 일을 벌였던지 그 둘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가해자의 행동에 분노하고 그가 받는 솜방망이 처벌에 분노하시는 분들도 많으신걸로 알지만, 지금은 가해자를 처벌해서는 안된다. 그 역시 부모라는 제 1양육권자의 법적 위탁을 받은 학교에서 이런 일을 벌였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당장 사건의 본질인 '100% 학교 책임'을 흐리는 보도를 그만두었으면 한다. 지금 미디어는 빵셔틀을 비롯, 학교 폭력, 게임, 심지어 빈부갈등과 세대갈등까지 들먹이며 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반성을 강요하고 있다. 구역질나지 않는가?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학교 대신 그들의 죽음에 대해 간접적인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해야 하는가? 이는 결국 학교 그들의 책임을 무마하고 싶어하는 학교를 관장하는 그 위에 누군가들이 벌이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다.

애들을 잘못 가르치는 부모, 애들 기 살려주는 부모, 그게 뭐가 잘못일까? 아이 교육을 대신 해주겠다고 데려가는 곳이 학교다. 부모가 '학교에서 애들 때리지 말라'고 가르쳐야 할 하등의 의무는 없다. 그 부모가 가르치는 방법과 철학은 전적으로 그 부모의 자유다. 다만 학교는 다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는 전제는 전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부분이다. 지금까지 학교 이미지, 위상, 실적같은 지극히 학교를 운영하는 자들의 배때기 기름칠에만 여념이 없어 학생들의 성적과 학군에만 관심을 가졌던 그들이 과연 '학교'라는 곳에서 가르쳐야 할 인성교육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학교는 이미 학생을 위한 기관이 아니게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가해자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 자주 들리는데, 심지어 '청보법'을 폐지해서 직접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나오는 걸 보면 참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다시 말하지만 피해자만 미성년자인게 아니라 가해자도 미성년자이긴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피해자를 보호하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여론에는 정말 극명한 시대적 세대적 불통이 자리잡고 있다.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와 이를 피부로만 느낄 뿐 속으로 곱씹지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벌이는 충돌이다.

기성세대들이 겪은 학교폭력은 단순하다. 어려운 시절, 언제나 학교 혹은 교실에서 싸움 잘하고 권력을 잡았던 아이는 주로 '못사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가난의 컴플랙스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학교 내의 권력에 집착했고 악바리처럼 체력을 키워 힘으로 그들을 제압한다. 그럼 '잘사는 집 아이'들은 어떤가? 하도 거친 세상이다보니 밖에 나가 뛰어놀게하기보다는 부모의 과잉 보호로 체력을 키울 틈이 없이 샌님으로 자라기 부지기수다, 이들은 '못사는 아이' 일진들의 이른바 '밥'이 된다.

기성세대들은 이런 학교폭력의 사회적 포지셔닝에 대한 은근한 환상과 카타르시스를 추억한다. '재수없는 잘난척하는 잘사는 집 아이'들을 통쾌하게 혼내주는 일진의 모습에서 다 같이 못사는 사람들은 '힘의 균형'이 맞춰지는 안도감을 가졌을것이다. 못사는 아이는 학교에서만큼은 최고로 군림하며 자신의 컴플랙스를 해소했으며 잘사는 집 아이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이같은 순기능을 통해 사회화되며 보다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대다수의 제 3자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처지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착각하는 것은 지금의 학교폭력은 그 당시 기성세대들과는 많이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당시에는 학교에 '어른들의 권력'이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내 아버지'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난 일진의 밥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들만의 힘의 균형이 있었다. 아버지가 국방부 장관이라고 해서 내가 일진에게 맞으면 일진이 가중처벌을 받는 그런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는 '어른들'의 권력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권력'이 된다. 그리고 학교와 사회는 그런 권력의 세습화를 위해 고군분투를 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잘사는 집 학생을 부르는 감미로운 선생님의 말투와 못사는 집 아이를 부르는 선생님의 비속어섞인 무시성 호출에 익숙해지고, 학교는 학생이 뭘 했는지보다 그 학생의 학부모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학생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는 데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런 환경이 오랫동안 고착되는 가운데 이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자신의 권력이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세습되었다는 이른바 (빽)의 힘을 인지하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빽)을 갖지 않은 자들에 대한 과시욕으로 이어지게 된다. 잘 사는 아이가 가지게 된 권력 과시에서는 못 사는 약자에 대한 배려 따윌 배울 기회 따윈 없다. 내가 가진 게 최고이며 많이 가지면 더 많은 권력을 내 마음대로 이기적으로 휘둘러도 괜찮은 사회라는 것을 조기교육을 통해 깨달을 뿐이다. 물론 제 3자들 역시 그런 힘의 불균형을 간접 채득하며 그런 불균형한 사회 체계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다. 이게 과연 학교폭력에 의한 순기능으로 볼 수 있을까?

(빽)이 없는 아이 입장은 어떨까?

내가 분명 (빽)있는 아이보다 더 힘이 세고 싸움도 잘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반칙을 한다. 아이들 싸움에 부모가 낀다. 우리 부모는 재네 부모에게 진다. 내가 만약 저 빽 있는 아이를 때려서 옥수수라도 몇개 날아가면 우리 집은 망할지도 모른다. 선생님도, 학교도 그 아이 편이다. 내가 아마 다 잘했고, 저 녀석이 다 잘못했다고 해도 내 손을 들어줄 쪽은 아무도 없다. 경찰에 신고해볼까? 애들 싸움이라고 무시당한다. 엄마에게 말해볼까? 아마 아무것도 못해줘서 미안하다며 또 우시겠지...



이번에 자살한 그 아이는...

학교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들만이 학생으로서 경쟁하지 못하게 하는
힘의 불균형과
어른들의 반칙 플레이

그리고 그런 그들의 기를 살려주는
저열한 교사들과

자신들의 책임이 뭔지 알면서도
회피하기 급급한 학교...

그 학교에게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그러지 못하는 정부

그 정부 하에 있는 경찰권력의 무관심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상황을 동일시하려고만 하는
벽창호같은 부모세대들의 몰이해...

그리고

그 더러운 힘의 균형이 무너진 사회가 이미 깊이 세습되어
권력을 가진 자의 편이 되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같은 반 학생들 모두와...


혼자 싸워나갔던 것이다.



얼마나 외로운 싸움이었을지 상상이 가는가?





이런 싸움을 하는 아이들이 지금 그 아이 뿐이었겠는가?





더 못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