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본의 성 문화에 대한 오해와 진실'과 연관되어있습니다.
군가산점 문제, 김신명숙, 이화여대, 여성부에 이어 또 하나의 떡밥이 요즘 거의 매일 보이다시피 하고 있네요. 테마는 '야동 보는 남자'인 것 같은데 글을 읽어보면 대체 뭘 어쩌라는건지 알 길이 없는 글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런 글이다 보니 답글도 산으로 가고 있을 수밖에요. 건전한 토론장이 되기에는 떡밥이 너무 쉬었습니다. 오래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발점이 되는 글들이 나타내는 주장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포장에 덮칠이 거듭된 글을 아무리 정독한들 제대로 된 답글이 나올리가 없고 그런 글에서 핀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글에 걸맞는 답글을 쓸 턱이 없겠죠.
결국은 너무나도 간단한 이유이지만 그 이유가 왜 생겼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녀는 서로 너무 모르고 있고 서로 알려는 노력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논란은 자기중심적인 결론밖에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언제나 핀포인트는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문제가 생길때 마다 눈 앞의 문제만 해결하려 하거나 남자에 맞춰 혹은 여자에 맞춰 자신의 성격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연애강좌의 설득에 놀아나기도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연애의 기술을 가르치는 강좌에 사람이 미어터지는 것을 보면 그저 어떻게든 자신을 감추고 속이려고만 할 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내 사람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번 공화국 연구소에서는 남자들이 왜 야동을 보게 되었는지와 더불어 다른 나라의 사례 비교를 통해 유독 우리나라에서 남녀간의 몰이해와 이에 따른 성 갈등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연구해볼까 합니다. 철저히 개인 연구 자료이므로 어떤 학술적인 근거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신뢰 여부는 읽는 분의 판단에 맡기고 있음을 밝혀둡니다.
야동은 한국뿐만 아니라 주산지(?)인 일본과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유럽 각 국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품입니다. 미디어 형태는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비주얼 형태로 성욕을 만족시키는 상품은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야화, 일본의 우키요에 등에서도 볼 수 있죠. 이게 어떤 예술성을 지녔던지 간에 직 간접적으로 욕구만족을 위해 쓰였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쪽 관련 상품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특히 남성 타킷의 성욕 해소를 위한 상품은 과거부터 꽤 오랫동안 이어져온 셈이죠. 물론 실시간 야동도 있었습니다. 사극에서 보는 '혼례잔치 초야'를 훔쳐보는 창호지 구멍은 말이 좋지 몰카나 다를 바 없었던거죠.
그런데 과거의 이런 부분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몰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화던 신방훔쳐보기던 그냥 레포츠일 뿐 그 자체가 어떤 목적성을 띄거나 성적 몰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던 것이죠. 과거에는 한창 성욕이 폭발할 시기인 14세에 장가를 들었으니 에초 지금처럼 성욕이 쌓여 오갈 데 없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위험이 적었을 테니까요. 조선시대의 남녀칠세부동석은 이런 저런 문제를 낳았습니다만 성징이 활발한 시기를 알고 일찍 장가를 들이는 문화가 만들어짐으로서 성교육적인 측면은 물론 성 정체성이나 관념에 있어서도 비교적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잇점도 있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에는 남존여비사상으로 인해 성 문화가 그다지 신사적이지 못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성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는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통제받는 상황보다는 훨씬 열려있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가 '남성의 성욕'에도 단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남성의 성욕은 '1차적'즉 관계 자체에 집중하여 그 관계에서 끝난다고 어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실제로는 여성의 복잡한 감성에 뒤지지 않는 복잡한 감성이 남성의 성에도 얽혀 있습니다. 여성이 관계 자체 이외에도 관계 전과 후의 단계가 중요하듯이 남성에게도 원래는 여성과는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감성적으로 느끼는 바는 거의 일치하는 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사실 현실에서 충족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처럼 남성에게 남성다움이라는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는 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어려운데다 실제로 이를 충실히 따라줄 여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여성들이 남성에게 가지는 성적 단계에 대한 불만 중 하나가 (여성이 원하는 복잡한 단계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지 않고 관계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는 남성이 많지 않듯이 남성의 그 복잡한 무엇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여성 역시 찾기 힘든 것입니다.
남성의 단계는 그 형태로 보자면 여성의 그것을 역할을 바꾸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여성이 시작하기 전에 어루만짐이나 나지막한 대화 등을 나누며 다소 천천히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즐기듯이 남성 역시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데요. 여성을 천천히 살펴보고 싶거나 차분한 마음으로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이른바 느린 관계를 더 선호하는 것은 남성의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좀 더 덧붙여 남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에게 모성애를 느끼게 되는데, 환한 얼굴로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모습이나, 관계 후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슴에 품어주는 등 이런 저런 판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은 성과 관련되어서는 상당히 연약해지기 때문에 (신체적이 아닌 감성적인 연약함) 평소 지쳐있거나 억눌렀던 우울함 등이 해금되며 감성에 표출되기도 하며 이는 일시적인 패닉이 아닌 대단히 자연스러운 감성의 발산입니다.
영화 왕의 남자를 보면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가 표현되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 장면이 남성의 이런 단계적 감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거나 조용히 무릎을 베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와 아들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모성애와 관련된 감성입니다. 특히 연산군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이런 감성이 훨씬 결핍되어 있었기도 했지요. 여성이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도 모성애가 발휘되는 이유는 남성에게 있어 그 모성애가 더없이 소중한 감성충족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며 남성은 때문에 여성의 모성애를 갈망하고 끝없이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지금의 남성들은 현대사회에서의 고정관념 주입으로 인해 이런 모습을 여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성향이 짙어지는 한편 이런 모습의 자신을 보듬어주기를 바라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하며 대부분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후자를 억누르기 때문에 이런 감성이 표출되지 않고 잠재되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또 한편의 욕구불만으로 표출되게 되는데 이것이 남성이 성적으로 과격해지게 되는 원인이 되거나 혹은 스스로 이런 감성을 포기하고 1차적인 성욕 해소에 집중하는 것으로 바뀌는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요. 이런 문제가 복잡하게 결부되어 야동이 예전처럼 '문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점차 '본격적인 성욕 충족'의 수단으로서 사용되게 되고 시장 역시 이에 맞춰 갈수록 성욕 해소 목적에만 치우친 상품들만을 만들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상품들은 성 관념이 확립될 시기인 14세 전후의 청소년들에게 유입이 되고 '남성의 성'은 그냥 '1차적인 관계'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잘못된 역할론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죠. 남성은 1단계 이외에도 정말 많은 성적 판타지와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장 뇌리에 깊게 박히는 1단계만을 반복 학습하게 됨으로서 향후 실제 관계에 있어서도 역할이 1단계에 한정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반복될 경우 당연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이런 저런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우리가 기본필수요소를 오랫동안 적정량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지듯이 감성적인 부분 역시 오랜 기간 충족되지 못하게 되면 상당히 문제가 생깁니다. 유아성폭력은 흔히들 '유아성애'라는 정신병이 1차 관계와 결부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사실상 그 이전의 억눌러왔던 부분들이 정신적 외상을 일으켜 이를 벌충하기 위해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하며, 흔히 성적 취향이 SM이나 동성애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는 일면에는 이런 감성적인 충족 결핍을 1차 관계의 다양성으로 충족시키려는 비뚤어진 관점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는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나 직업 여성들을 돈으로 산 상품으로 어기려는 그릇된 시각부터 심한 경우 1차 성욕마저 결핍되어 성범죄를 일으키거나 그 성범죄마저 감성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성범죄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할 대상까지 손을 뻗히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야동 때문에, 성욕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는 짐승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전혀 부도덕하지 않은 남성들의 감성이 사회적인 변화로 인해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데다가 사회가 반 강제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감정을 1차 성욕으로 싸잡아 풀어내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광우병이 초식 동물에게 육류를 먹여서 생겨난 것처럼 에초 1차 성욕으로 풀어낼 수 없는 감성을 1차 성욕으로 일원화시켜 풀려고 하니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죠. 인간은 아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욕구가 급격히 결핍되면 이성적인 판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니까요.
즉 감성적인 결핍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보니 위험 수준에 이를때까지 방치되다가 결국 일을 그르치거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1차 관계에 대한 지식 뿐인 현실에서 갈 곳 없는 감성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을 마치 깜깜한 밤에 벽을 더듬거리며 전기스위치를 찾듯이 계속 빗나가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은 결코 정답에 근접할 수 없으며 1차 성욕은 물론 그로 인해 파생된 SM 등 성적 취향의 경우는 오히려 외부자극으로 인해 이런 감성을 억누르는 식이기 때문에 이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마약이나 SM이나 결국 뇌 도파민 분비를 통해 감성의 이상폭발을 억제하는 역할이므로 자극에 적응되고 더 많은 자극을 요하게 되는 중독성마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죠. 당연하겠지만 이로 인한 범죄는 더욱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 게속 새로운 게 생겨나는 이유는 그 누구도 이를 해소할 방법을 알려주지도 찾아보려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그저 남자는 짐승처럼 성만 밝힌다는 또 하나의 사회적 무덤을 만들어 남자의 마지막 하나의 감성마저 묻어버리려 할 뿐이었으니까요.
정리하면 지금의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단계적 성욕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남성상에 휩쓸린나머지 이러한 욕구를 제대로 요구하지 못함은 물론 어떤 욕구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부분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여성 지위가 상승함과 더불어 남성의 역할론이 대두되며 이른바 '자존심'이 정신적인 삶의 질보다 우선시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때문에 약 4개에서 많게는 6단계에 이르는 남성의 성욕은 대부분 이런 성장 과정에서 속으로 은폐되고 금지되며 성장하고 이렇게 은폐된 성욕은 1차적 성욕 즉 직접적인 관계에 모두 몰려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몰리게끔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회는 남성이 이런 식으로 타고난 감성을 은폐시키며 살고 있는 것에 대한 미봉책으로 1차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성욕을 충분히 풀어주기 위해 포르노, 즉 야동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집창촌을 법적으로는 불법으로 정하고 현실에서는 묵인하는 등 지극히 사회 체제를 현상유지시키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죠. 이전과는 용도가 완전히 달라진 야동은 그 용도에 맞게 자극성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에전의 기방처럼 단순히 성적인 욕구만이 아닌 남자의 다친 마음까지 어루만져주던 모습은 지금의 집창촌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관계를 사고 파는 1차 성욕 배출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쯤해서 1차 2차 3차로 나누어지는 남성 성욕의 정체란 무엇인지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남자는 1차적으로 관계에 대한 성욕을 가집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1차 성욕에만 집중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 역시 관계에 있어서는 우선 전희부터 떠올린 후 그 다음을 생각하듯 남성에게는 우선 이 1차 성욕이 시작되지 않으면 다음 성욕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현실에서 보여주는 남자의 성욕은 단순하게 여성의 신체에 대한 육식동물같은 열망이 아니라 포괄적인 성욕의 제 1단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2차 성욕입니다. 남성은 여성과 육체적으로 이어지게 되면 감정적으로 상당히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여성의 자궁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있습니다만 아무튼 남성에게는 1차 성욕이 시작되면 2차 성욕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한층 차분해지고 솔직해지며 그동안 차마 남자로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약한 이야기라던지,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서러운 이야기라던지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남성 스스로도 놀랄 만큼 손쉽게 발산됩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 가까워질때의 편안함이 남성을 사회적인 남성상에서 잠시 벗어나 솔직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만들어주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 과정은 거의 모든 남자들에게 있어 이미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남자는 첫 관계부터 이미 '여성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사회적 책임을 부여받고 도저히 자신의 2차 성욕에는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의 만족도에 모든 신경을 곤두서게 되는 것이죠. 이미 '강한 남자'라는 타이틀이 남자들을 옥죄고 있는 현실에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2차 성욕은 당연히 감춰져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1차 관계에 집중하는 지금 문화에서는 이런 생각이나 대화를 나눌 틈 없이 1차 관계에서 오는 신경적 쾌락만이 머릿속에 가득해질 뿐이죠.
3차 성욕은 여성에게서 느낍니다. 이런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지 않고 보듬어주고 토닥여주고 격려해주는 어머니같은 모습을 여성에게서 발견하길 원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자신이 여성을 아프게 하고 있거나 나만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성을 터부시하는 사회일수록 심해지는 강박관념)을 하는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지으며 받아들이는 모습에 또 다른 감성을 느낍니다. 이것은 새디즘과 비슷해보이지만 상당히 다릅니다. 새디즘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더 아픔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3차 관계는 그 목적부터 다르니까요 아마 현실에서 가장 많이 결핍을 느끼는 성욕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실제로 여성의 절대적인 협력이 없이는 결코 충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차 성욕은 '인정'입니다. 만일 관계가 첫 관계였다면 남자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런 일을 해버렸는데 여자가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지금의 여자 기분이 정말 너무나도 궁금해지는 것이죠. 여기에서는 남자가 어떤 질문을 하고 여자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감성은 직후 여성이 자신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때 안정됩니다. 남자가 관계 후 지쳐 나가떨어지더라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여전히 남자를 신뢰하고 있다는 마음을 표현한다면 남성은 극도의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가까워졌다가 갑자기 멀어질 경우 여자가 자신으로부터 떠나갈것을 매우 걱정하게 되는데 이런 남은 불안까지 안정시켜주는 것이 마지막 성욕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신가요? 흔히 알려진 여성들의 복잡한 성욕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물론 남성 역시 여성들의 그 복잡한 성욕을 모두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남성 역시 모든 성욕을 여성들에게 충족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무모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그것에 비해 에초 실체조차 알려지지도 않았던 남성의 성욕과 그에 관한 감성은 이루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그것이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요. 남성들이 수많은 1차 성욕을 대신 충족할 수 있는 것들에서 성욕을 착실히 만족시키고 있습니다만 누구나 느끼는 충족 후의 허탈함은 바로 1단계에서 바로 이어지는 2단계 이후의 성욕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려진것처럼 남자는 1차적인 성욕만을 충족할 수 있어도 살 수 있는 성별이었다면 이미 여성과의 관계는 종말을 맞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요. 단지 여성과의 관계가 1차 성욕에 있어 성기에 주어지는 자극이 더 현실적이어서일까요? 이미 감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상품들이 차고 넘치는데 어째서 남자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여성을 갈망하는걸까요?
이 부분에서는 최근 일본의 변화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성 문화 역사는 알려진 대로 대단히 오랩니다. 우리나라에서 터부시되었던 역사 만큼을 그들은 터부시하지 않은 역사로서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짐승같은 삶이라거나 그렇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아무리 시작이 거지 발싸개같은 문화라도 100년이 넘게 인간 사회에서 지속된 문화는 틀림없이 고유의 철학이 생기게 됩니다. 독일 병사들이 해골을 차고 놀거나 돼지 방광에 물을 채워 걷어차던 놀이에서 파생되었다는 축구가 지금은 인생의 축소판, 각본없는 드라마로 불리는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문화던 오랜 시간 다수의 사회 구성원을 통해 롱런하게 되면 이를 연구하는 학자도 생기게 되고 그 학자들에 의해 깎이고 다듬어집니다. 성 문화라고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남성의 성, 여성의 성을 연구하면서 성에 있어서의 남성의 역할, 여성의 역할 대신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과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놓는 데에 집중해 왔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물론 이들 역시 야동 공화국(?)답게 1차 성욕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불만 계층이 늘어나고 있는 피해가기 힘든 현대사회의 병폐가 없는 게 아닙니다만 적어도 이들은 이게 왜 심각한지 알고 그에 맞는 처방전을 업계 나름대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죠. 앵? 야동 공화국에서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시는 분들도 게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들어보세요.
다소 민감한 이야기입니다만 일본 도쿄에는 성매매 단속에 밀려 일본으로 건너온 직업여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요. 이들은 대부분 취업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취업비자를 내줄 턱이 없겠죠) 들어오기 때문에 정식 업소에 취직이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주로 전화를 통한 출장서비스에 가입하여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형태의 서비스를 통해 영업을 하고 있는데요. 대체로 일본 여성에 비해 요구하는 금액도 적은 편이고 아시겠지만 상대적으로 일본 여성에 비해 외모가 앞서기 때문에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이유는 바로 '일본어'입니다. 직업여성들은 일본에 와서 일본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유는 간단하죠. 어차피 1차 성욕만을 풀어줄거면 언어는 아무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그렇게만 영업을 해왔던 그들은 일본에서도 똑같이 단지 1차 성욕만을 제공하고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일본 남성들은 이들에게 관계 도중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왔고 이들은 전혀 대답을 하지 못했으며 남성들은 '2차 성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불만이 쌓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대거 외면하기 시작했는데요 최근에는 이런 이유로 업계에서 다시금 일본 여성들에게 밀려 영업 수익을 제대로 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영화 '러브콜랙션'시리즈 중 '달과 체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류 감독에 의해 정말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현실을 스케치하듯 그린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인데요. 이 영화 시나리오 후반부 짧은 에피소드 형태로 '출장 직업여성'이 등장합니다. 영화라서 다소 로맨틱하게 표현했을수도 있고 모든 일본의 직업여성이 그렇다는 보장도 없습니다만 남자는 여자를 '산'것이 아니라 성을 포함한 진심어린 위로를 받기 위한 카운셀러로서 맞이하고 직업여성 역시 이에 충실히 응합니다. 물론 1차 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계산적입니다만 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의 여자가 되어 위로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역할을 해주는 거죠. 이 작품에서 주인공도 무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고생을 털어놓으며 울먹입니다. 그런 주인공의 이야기를 여자는 모두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렇지 않을 거라고 위로해주죠. 이런 문화는 비단 직업여성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라면 나이를 막론하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우리나라의 성 문화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죠.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야동이 이른바 '질질 끈다'라고 표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성 행위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성이 접해 있는 그 시간을 오랫동안 차분히 즐기기 때문에 이른바 '빨리 좀 보여주고 빨리 좀 끝내자'는 한국의 추세에 전혀 들어맞지 못하는 것이죠.
하나 더 하죠. 일본의 오타쿠들이 자주 드나드는 메이드 카페, 풍속업계 중 가장 높은 단가를 가지고 있는 캬바쿠라, 가상 연애를 즐기게 해주는 연예 시뮬레이션 게임의 공통점이 뭘까요? 다음아닌 '1차 관계'를 제공하지 않고 남성으로 하여금 성욕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관점에서는 대체 '만지지도 못하고 안지도 관계를 갖지도 못하는' 메이드카페에 왜 그리도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인지 분명 이해하기 어렵겠습니다만, 분명 그들은 어떤 부분에서 1차 관계에 진배없는 가치를 가진 자신의 욕구 하나를 해소했으며 그 댓가를 지불할 뿐이죠. 단지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식혀주는 것이나 자신을 기억해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서비스의 형태에 요점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억눌러오고 있던 것을 그들은 당연한 삶의 권리로서 돈을 주고서라도 사서 당당하게 해소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현실의 여자에게 그것을 바라기에는 여성의 지위도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복잡한 감성에 대한 이해를 하기 꺼려하는 여성들에게 감성을 해소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음을 이미 자각하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죠. 이런 업소를 이용하는 계층은 미혼 남성만이 아닙니다. 이미 결혼 20년을 넘긴 중 장년층은 물론 무려 노년층까지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지금의 부부 관계에서 어떤 부분의 결핍을 느꼈기에 이 곳을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 매매'가 아닌 업소에서 보수적인 기성세대들까지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듯 일본의 남성들은 물론 사회적으로 1차 성욕에 집중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마련되고 있지만 결코 자신이 가진 다양한 감성을 포기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체면을 깍지 않는 선에서 비밀리에 충족하고 있을 뿐이죠. 여기에 한술 더 떠 이를 공개적으로 즐기는 오타쿠들은 변태가 아니라 차라리 순수한 쪽입니다. 아직 자신이 가진 감성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니까요. 과연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는 사회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선에서 자신의 감성을 다양한 수단으로부터 채워나가며 살아가는 오타쿠 중 어느쪽이 더 이상한걸까요? 일본에서 흔히 사회악으로 인식되고 있는 오타쿠가 저지르는 범죄율과 같은 표본에서 일반인이 저지르는 범죄 확율 중 어느 쪽이 높은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오타쿠들의 범죄율은 상상이상으로 적습니다. 뭔가 모순되었군요 이상하지 않나요?
생각같아서는 허구언날 보는게 변태적이고 폭력적인 것만 보고 사니까 감성도 공격적이고 타락적으로 변해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됩니다만 사실 이들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감성을 다 충족하고 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모든 범죄는 '사회에 대한 열등감과 불만'에서 발생합니다. 오히려 1차 성욕으로 다른 감성을 억누르며 자신을 억지로 다스리는 현대인들 중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범죄가 훨씬 많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죠. 단지 1차 성욕만을 채울 수 있는 것에 만족할 것을 종용당하며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남성상에서 벗어나는 남성의 감성이 무시된 채로 그냥 잃어버린 채로 갈곳 없는 감성을 단지 1차 감성에 쏟아야만 하는 세상이 되고 그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야동이 만들어지고 후세 역시 그 야동을 통해 세상의 룰을 배우고 자신에게 내제되 었는 수많은 성욕 감성을 죽여나가는 지금의 현실이 과연 얼마나 행복함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의 성을 터부시했던 역사는 어쩔 수 없다 치겠지만 그 사상이 지금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고 현대사회에 고정관념과 성적 역할부여까지 강요하게 만드는 현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안좋은 문화라도 100년 이상 지속되면 철학이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터부는 반대입니다. 터부는 시작할때는 정말 그럴싸해보입니다. 왠지 인간답게 사는 것 같고 성서에 더 가까워지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터부는 안좋은 문화와는 달리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썩어들어갑니다. 사자가 초식동물을 죽여 고기를 먹는 것을 사자는 절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은 그것이 자연의 섭리네 약육강식이네 심지어는 초식동물이 불쌍하다는 동물보호론까지 별개 다 나오는 법인데요. 하물며 인간이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나오는 감성을 정말 갖은 궤변으로 터부시에 성공했다 한들 그것이 단지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을 막기만 한 댐에 불과했다면 언젠간 댐은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터부를 지키기 위해 댐을 높게 쌓으면 쌓을수록 물은 썩어가고 악취를 풍기게 되며 댐의 의미는 점차 사라져갈 뿐입니다.
터부가 인간을 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지금 제가 보는 터부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잘 되는 것들이 없습니다. 결국 개방된 사회에서조차 서로의 성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고 한쪽은 아예 그걸 알아가려는 데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잘못된 성 역할론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그것이 결코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아님에도) 감성들이 반강제적으로 억눌러지고 갈곳 없는 감성이 엉뚱한 곳으로 표출됩니다. 이런 감성이 쌓여 정신적인 외상을 가져오고 심지어는 1차 성욕에서 충족되지 않는 감성을 충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동원하거나 심지어는 이성을 잃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태어나는 2세들은 단지 자신의 성이 1차 성욕에만 한정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인식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아예 처음부터 닫아버리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 무엇보다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단 한번밖에 없을 수도 있는 그것을 금지도 아닌 아예 배우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자라나는 끔찍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남성의 이런 모든 성욕을 여성들이 모두 풀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여자의 그것을 모두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한계이니까요. 다만 적어도 다른 누군가도 아닌 남성 스스로가 이런 감성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 채 멍하니 1차 성욕에만 모든 것을 풀기 위해 애쓰는 것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성의 다양한 성의 형태는 서적으로도 많이 출시되었고 연구도 많이 되어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남성은 여성을 만족시킨다는 출처불명의 의무감으로 인해 이러한 정보를 가능한 충실하게 습득하고 이해하려 '고민'만큼은 하고 있으니까요. 아직 이해까지는 머나멀게만 느껴지지만 말입니다.
여성들에게 당장 남성의 성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것은 지금 단계에서는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관심'만큼은 가졌으면 합니다. 남자로서 내 여자가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마음처럼 여성 역시 내 남자가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바랄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남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여보여면 어떨까요? 이 작은 노력 하나로 만들어지는 변화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남자가 야동을 왜 보는지, 무엇이 부족해서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그것을 보는지, 어째서 1차적인 관계 쾌락에만 집착하는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본다면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유'는 조금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생을 함께 할 내 남자의 일이 결코 남의 일은 아니겠지요?
남자도 무척 섬세하고 예민합니다.
강하지만 내 여자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남자라고 해서 단지 신경적인 쾌락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호흡을 맞추며 시간을 즐기는 것을 사실 더 좋아합니다.
남자답다라는 단어에 새뇌당해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건전하고 감성적인 성적 판타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이런 모습이 진정 남자답고 자연스러운 진짜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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