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2. 9. 3. 18:52

최근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기업이 얽힌 경제 관련 재판에서 흥미로운 판결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주식회사 코오롱과 듀퐁의 산업기밀 침해에 관한 소송인데,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듀퐁의 승리로 끝났다. 놀라운 사실은 이번 판결로 코오롱이 본안에서 패소시 듀퐁사에게 지불하기로 했던 원 소송 금액에 수십배를 호가하는 1조원 규모의 배상 책임을 물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이 소식을 들은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 소송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듀퐁' 법무자문 변호사 출신 판사와 듀퐁 본사에 가까운 지역에서 열린 재판을 들며 삼성에 이은 또 하나의 무역 패권주의에 의한 희생양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속사정을 뜯어보면 조금 다른 내용이 나온다. 판결의 요지는 듀퐁과 코오롱의 잘잘못을 판단하다가 배상 책임 금액이 부당하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코오롱은 법원이 명령한 '증거 보호' 의무를 위반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라고 생각했을 이메일 등의 증거를 재판기간 도중 모두 인멸했다고 한다. 이를 미국 법원은 이메일 서버 로그까지 분석하며 끈질기게 추적한 끝에 이를 고의적으로 인멸했다는 증거를 확보하여 가중처벌을 했다는거다.

 

(참조문서 : http://en.wikipedia.org/wiki/DuPont_v._Kolon_Industries)

 

왜 코오롱은 이런 미쳤다면 미친 짓을 한 걸까? 그건 지난 각종 경제사범들의 분식회계나 주가조작 등의 범죄에 대한 사법부의 판례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사법부는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사범 재판에 있어 재판기간 도중의 증거 인멸에 대해서는 증거 관리와 도주 우려에 대한 검찰측의 책임을 우선시하여 기업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증거가 나오지 않는 최저한도의 처벌만을 해왔던 것이다. 즉 이번 코오롱 재판이 국내 기업끼리의 마찰에서 이루어졌을 경우 실제 몇백억짜리 소송을 단돈 몇억 정도의 벌금으로 끝낼수도 있었다는 거다. 코오롱은 이런 관행에 익숙해졌고 증거 인멸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미국 법원은 이걸 용서하지 않았다.

 

...

 

애플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닌데, 애플은 잔치분위기고 삼성은 초상집이다. 그만큼 누가 봐도 이 게임은 삼성이 이길 줄 알았던 게임이었고 애플은 그만큼 긴장했다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 찌들 대로 찌들었다는 미국 법정이 삼성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법의 철저한 보호 속에서 자라난 싹이다. 국민들도 그들을 국가대표, 국위선양 등의 의미를 부여해가며 마르고 닳도록 빨아주었다. 사실 개도국에서 태어난 기업들이 세계화가 되기까지는 그런 과정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만 하는것도 사실이다. 소니나 도요타, 마츠시타 같은 기업들도 일본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었으니까.

 

 

그런데 삼성이 이미 그러한 응원이 필요없는, 더 이상 국민들에게 품질 낮은 내수를 사달라고 애걸복걸하거나 국가대표 이미지를 가지고 정에 호소하는 식의 마케팅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엄청나게 성장한 뒤에도 이를 계속해왔고 그에 따른 부수효과로 정부의 도에 넘치는 어시스트를 당연한듯이 받아내왔다는거다. 당연히 법은 그들에게 경제사범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한번 더 망설이는 관대함을 보여왔고, 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세계시장에서 어떤 품질적 경쟁력 없이 단지 번 돈 쏟아부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출혈짓거리로 거둔 성과를 근거로 자랑질을 해왔다.

 

 

코오롱의 패배, 그리고 삼성의 패배는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은 이번 재판 역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내수에서 끌어들인 돈과 특혜를 바탕으로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했을것이다. 그리고 그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들의 기업이 미국 내에서 경제인들의 경제 살리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특혜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기업을 뿌리내리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인성적인 부분과 정의로움에 있어서 한치도 성장하지 않은 채 돈만 디립다 끌어다 쓴 철부지로밖에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 패소로 인해 만천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사법부는 이에 책임감을 분명히 느껴야만 한다. 물론 삼성이 저지경이 된 걸 사법부 하나의 책임으로 모는 것은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일단 사법부가 잘못 키운 부분에 대해서 이 사단이 났으니 그 부분에 있어서 부모격인 사법부가 책임을 져야 옳지 않겠는가? 당신들이 미국 법원 판결 직전에 내린 국내 재판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준 것에 대해 반드시 미국이 옳았고 당신들이 부당했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고 지금 하려는 바도 아니다. 당신들은 그 건 이전에도 삼성이 꼬꼬마였을때부터 지금까지 애 취급을 하며 감싸지 않은 적이 없지 않은가? 언제까지 다 큰 애를 감싸고 돌 셈인가?

 

 

 

그렇게 키워준대도 별로 고마워하는것 같지도 않은데 ...

 

...

 

 

뭐 따로 우리 몰래 고마움의 증표라도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

 

 

posted by RushAm 2012. 9. 1. 22:49

법 판례에서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단어 중에 '심신미약'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가해자 혹은 피해자에게 모두 해당되는 부분인데, 한마디로 가해를 할 때나 피해를 당할 때나 아무튼 '약자'에게 관대하겠다는 법의 의지에서 파생된 단어 되시겠다. 가해자라고 하더라도 가해자가 심신이 미약하거나 경제적인 문제, 기타 외부 요인에 의해서 무형의 교사자가 발생하면 그 교사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살인범이 살인을 할때 스스로 살인을 모의하고 판단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해당 사건의 책임은 100% 피의자에게 돌아가지만 만일 그 사건이 취중에 일어났다면 사람이 술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고 판단해서 자의적인 판단이었다는 부분을 희석시키는 거다. 즉 이 범죄에 대한 가해 책임을 피의자가 100%이었다면 취했을 경우 피의자 70%에 술 30% 정도로 두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책정된 만큼 고스란히 피의자는 감형을 받게 된다,

 

 

반드시 술 핑게만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친고죄에 해당되는 폭력, 성폭력범죄에서 다양한 사례를 볼 수 있는데 단골로 볼 수 있는 것이 '게임이나 음란물'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기성세대들로부터 '유해매체'이미지를 벗지 못한 '서브컬쳐'의 범주에 속해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피의자의 일원으로 동의를 얻기 쉽다. 최근 주취폭력자의 강화 방침이 법조계로부터 나오면서 더 이상 술에게 죄를 묻기 힘들게 된 반면 아직 게임이나 음란물은 개인의 범주가 아닌 사회악으로 규정되는 분위기라서 더욱 그렇다.

 

해당 피의자가 진짜 음란물을 접했든, 게임을 접했든지에 대한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피의자로 몰리게 되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자신의 죄를 어떻게든 경감받거나 자신의 죄를 100% 시인하지 않는 쪽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 세태에서 100%인 자신의 피의 책임을 가장 많은 범위로 덜어줄 수 있는 사회 공적 매개체는 두말할것없이 음란물, 게임이다. 이는 판례도 정말 다양하게 나와있어서 설득도 쉽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피의자 60% 음란물 40%정도로 해서 10년 징역 받을 걸 6년으로 감형받았다면 피의자는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우리는 이 자극적인 뉴스멘트에 흥분해서는 곤란하다. '아오 저 변태새끼 결국 사고칠줄 알았어'라는 반응은 사회정의 구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야동이라는 단어에, 아동포르노라는 단어에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피의자는 웃게 된다. 명심하자.

 

우리는 아무리 아동포르노를 씹고 음란물을 씹어도 소용이 없다. 10년 받을 걸 여러분들이 흥분해주신 덕분에 6년으로 감형받은 피의자는 웃을 것이고 그렇다고 4년의 징역에 대한 죄목의 책임을 나눠받은 음란물이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특별히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인가? 누군가는 자신의 죄를 면피하려고 하고 있고 그 누군가는 그 면피를 하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조했다는 것이 된다. 그들은 왜 방조했을까? 당연하겠지만 그들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은 국가라는 범위 내에서 법 제도 하에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아이는 성폭력을 당했다. 아이는 특별히 국가에서 더 신경써서 보호해야 한다. 부모가 방조했다면 그 방조를 사전에 예방할만한 부모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체계가 있었어야 했다. 어린이집을 짓는다고? 보육교사를 늘린다고? 항상 국공립어린이집은 몇년을 기다려야만 들어갈 수 있을정도로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나불댈수 있는가?

 

술 핑게로 죄를 감해주고, 게임이나 음란물 핑게로 죄를 감해주는 배경에는 그 죄를 감면받은 피의자와 그 죄를 감면해준 수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싶어하는 국가간의 환상적인 패싱플레이가 함께한다. 언제쯤 우리는 이 사회가 가해자의 책임 중 일부를 져야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책임이 당연시될 때 비로소 이 사회의 범죄가 줄어들 수 있고 국가가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제쯤 이 나라 사람들은 알게 될 수 있을까?

 

요즘 뉴스를 보면 아직은 좀 머나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RushAm 2012. 8. 23. 17:48

(ex는 예시)

 

시급 : 1시간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시급 4580원 , 불어 독해 원어민 수준의 통번역 숙련자 모집

 

일급 : 하루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일급 5만원, 근무시간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 (20시)까지

 

월급 : 월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노력 여하에 따라 최대 월급 350만원까지 가져가시는 분도 봤어요

 

연봉 : 연 단위로 급여를 책정하여 지급

ex > 연봉 1800, 기본급 100만원, 연장, 주말, 특근 수당 50만원

 

여성 우대 : 여성 지원자를 우대하겠다는 뜻

ex > C,C++ VC,JAVA 안드로이드 경력 개발자 모집,  여성만 지원바람

 

 

 

 

(ps는 채용자의 속마음)

 

급여 추후협의 : 급여를 채용 후 책정하겠다는 의사표시

ps > 내가 보기엔 조뚜 아닌 일인데, 내가 주고 싶은 급여를 그대로 쓰면 아무도 안올거 같고 해서 일단 면접으로 불러내서 애가 절박하면 흥정해서 최대한 내가 원하는 급여까지 깎아야겠다.

 

근무기간 추후협의 : 근무 기간을 채용 후 결정하겠다는 의사표시

ps > 상태 봐서 괜찮은 애 싸게 부리게 되면 오래 묶어둘거고 안그런거면 맘대로 짤라야겠다.

 

근무시간 추후협의 : 근무 시간을 채용 후 결정하겠다는 의사표시

ps > 끝나는 시간이 늦으면, 추가수당 달라고 하면 안되니까 적당히 갈궈서 당연한걸로 만들어야하고 좀 일찍 끝나면 일찍 끝난만큼 시급 깎아서 주고싶다.

 

학력무관 : 채용에 있어 학력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

ps > 학력 높은 머리 굵은 애들 괜히 연봉 많이 달라고 하니까 고졸애들이랑 하향평준화시키고싶다.

 

신입 : 해당 직종 관련 경력이 없는 순수 신입 인력을 뜻함

ps > 데려와서 가르치는 시간동안 수습임금주고 안되면 짜르지 뭐

 

경력 : 해당 직종 관련 경력이 있는 숙련자 인력을 뜻함

ps > 어떻게든 거저먹고싶다.

 

군필자 우대 : 병역을 필한 남성을 우대하겠다는 뜻

ps >  군대갔다온 놈들이 후임부리듯 부려도 군말없지 갈궈도 개념차고

 

 

 

(그밖에 난해한 사례)

 

정해진 이력서 양식을 다운받아 작성해서 이메일로 보내주시오라고 써있으면서 해당 사이트내 온라인 지원을 허용한 경우 = 주로 인력 아웃소싱이나 헤드헌팅 회사들이 벌이는 병신짓 + 자사 헤드헌팅 실적 과시용, 쿵짝을 맞춰주는 것이 필요하나, 전문업체들이라고 해서 피드백이 성실한것은 아님

 

근무 시작일이 오늘부터 말일까지인데 채용기간이 말일까지인경우

(ex : 채용공고 등록일 8월 24일, 근무기간 8월 22일~8월 31일 , 이력서 접수기간 8월 31일까지)

= 근무기간이랑 채용기간을 혼동한 사례로 채용담당자나 업주가 그닥 제정신이 아닐 수 있으므로 주의

 

분명 여긴 알바사이트인데, 정직원만 모집한다고 알바 할 사람은 꺼지라는 내용의 채용공고가 올라온 경우 = 정직원 사이트에 아무리 올려도 도무지 채용이 안되는 직종인데, 조건은 허용범위 이하라서 알바나 전전하는 애들 좀 이용해서 싸게 후려먹으려는 심리이므로 어지간히 급한게 아니라면 정규 취업은 가급적 제대로 된 취업전용사이트를 이용할 것

 

 

 

공화국 사회교과서 4부가 곧! 업데이트됩니다

ps > 당분간은 별 예정없다는거지 뭐

 

posted by RushAm 2012. 8. 21. 04:15

<?>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도전중인 취업준비생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라는 곳은 지금까지 제가 있었던 학교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대학을 처음 고르고 공부를 할 때는 제가 직접 학교를 고르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던 공부를 멈추고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었잖아요. 근데 회사를 보면 짤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상사에게 조아리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아요. 싫은 소리도 함부로 못하고, 대체 회사라는 곳은 어떤 곳인건가요? 회사에 들어가면 특정 사람들에게 내 인생을 저당잡혀 살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

 

먼저 회사는 한자어에요.

모일 회에 일 사짜를 써서 모여서 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원래 의미 그대로 회사는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을 말해요. 이 단어에는 지금 학생이 지적했던 조직의 상하관계에서 일과 관계없는 불필요한 머리 조아림의 의미도 담겨있지 않고 싫은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억압적인 카스트 관계도 뜻에 포함되지 않아요. 한마디로 지금의 회사라는 곳은 말만 회사지 전혀 다른 조직이 되어있다는 결론이 되죠.

 

공동체 사회에서 회사 즉 모여서 일한다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했어요. 왜냐하면 모여서 일을 하면 보다 큰 일을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게 되니까 가내수공업 수준의 일이 뭉쳐저 하나의 산업화를 이루게 될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영국 산업 혁명 이전에는 지금의 명품 잡화 브랜드들의 전신이었던 1인 회사 시스템 이른바 자영업 형태가 거의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사회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던거죠.

 

몇백년에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세계적인 명품 잡화 브랜드들도 대부분 이런 작은 가내수공업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닥치듯 벌어진 영국의 산업 혁명은 이런저런 문명의 발달에 의해서 이루어지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모여서 대량생산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서 발로된 것이었다고 해도 무방했을거에요. 식민지는 늘어났고 원자재 물자는 늘어났는데, 이 원자재만을 판매하기에는 너무 이해타산이 맞지 않았고 이를 일종의 촉매제라고 판단한 자본가들이 사람들을 모아서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조직 체계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한게 현대 회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자본가에 의해서 회사가 설립되고 그 뒤에 노동자를 모으는 과정 자체, 그리고 본디 왕권주의 국가였고, 수많은 식민지를 노예처럼 거느렸던 영국이 만들어놓은 이 회사 조직의 근간이 건전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공화정이 되었어도 입헌군주제의 반쪽 공화정이 된 영국 계급사회가 뿌리뽑힐리 없었죠. 당연히 자연스럽게 회사를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지 않아요. 임금 체불이나, 질 떨어지는 음식을 배식하는 정도는 양반이고 생산 라인 천정 높이를 허리를 펼 수 없는 높이로 맞춰서 쉴 틈을 주지 않는 등의 일화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이렇다할 토를 달 수가 없었어요. 이미 사회는 가내수공업만으로 먹힐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기때문에 이 회사에서 내가 쫒겨나게 된다면 가족을 부양할 길이 막막했던거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아무 기준도 없이 던져진 공화정의 첫 정치적 시험 모델에 의한 희생양들이었던 셈인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이 그 자본을 노동력으로 환산해서 노동자에게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다보니 당연히 자본을 가진 사람의 카스트가 더 높게 형성될수밖에 없고, 자본을 가지지 않은 노동자들은 이에 대항할 수 없었던거에요.

 

그래서 노동자들은 불만을 가진 다른 노동자들과 모여 한 목소리를 내고 집단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본에게 맞서게 되는데 이게 지금의 노동조합, 즉 노조의 원형이에요. 당연하겠지만 자본가는 자신이 투자한 자본이 노동자들에 의해서 시간에 맞춰 더 불어나지 않으면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 권력과 같은 눈높이에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노동 조합의 요구는 당연히 자본가가 돈을 버는 데에 우리의 노동력이 더 높은 가치를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거에요. 임금 인상 혹은 근로시간 단축이 핵심인거죠. 우리의 노동시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 주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던가 지금과 똑같은 돈을 줄 거면 노동시간의 가치가 더 비싸졌으니 우리는 그만큼 더 적은 시간을 일할거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요. 사실 지금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노사간 협상 쟁점은 큰 틀에서 보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이 두 가지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마치 사필귀정처럼 이 산업 혁명 속에서 엽기적인 형태로 희생당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이후 세계 최고의 퍼주기식 보상 복지 정책을 누리게 되요. 국가경제의 발전에 대한 지분 요구가 가능했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가피한 과거가 있었으니까요. 그 유명한 영국병의 등장 역시 이같은 반인륜적인 지주들의 산업 혁명에 따른 댓가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치룬 어쩔 수 없는 역사였을거에요. 그런데 이 영국병이 생길만큼 복지가 나아졌다고 해서 회사 내의 전통적 계급사회의 잔재가 완전히 걷혔다고 말하기는 힘들었죠.

 

영국병 창궐로 인해 노동자와 지주 계급이 한번 뒤집힌 후에야 간신히 잡힌 양측의 평등 균형으로 모든 게 해결되었을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어요. 세계 금융의 중심인 영국 은행들은 복지 리스크가 심해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는 자국 기업에 더 이상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지 않았고 기업은 부실해졌으며, 노동자들은 부실한 기업 속에서 제조업 노동자를 업신어기는 등의 자체적 카스트를 만들어버리고 말죠. 자본가 카스트가 몰락하고 노동자에게 권리가 돌아왔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했던 건 결국 자기들 내에서의 차별을 통한 우월감 조성이었다는거죠. 한마디로 입헌군주제를 포기하지 않는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성공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몰라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살기 좋다며 칭송받는 유럽의 복지는 끔찍한 희생에 대한 자연스러운 보상이었어요.

 

 

 

영국으로부터 비교적 이른 독립을 완성한 미국의 경우는 영국과는 문제가 조금 달랐어요. 바로 흑인이라는 존재였죠.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노동력은 포기할 수 없었는데, 이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줄 생각은 에초에 없었어요. 18세기 초 진즉에 흑인 노예 해방을 단행했던 서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표면적인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고 그나마 '공화정'하에서 이루어진 노예 해방 선포가 사회적 강제성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미국의 거의 모든 산업에서의 '하찮은 일' 즉 노동자 계급은 흑인들 차지가 되어있었고 암묵적으로 공고해진 인종차별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거죠. 당연히 미국의 노동운동은 흑인들의 해방운동과 권리 찾기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해야했던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이 영국처럼 원활하게 될 리가 없었어요. 에초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평등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팽패했죠. 이렇게 한번 떨어진 인식은 자본가들을 기고만장하게 했고 미국에서는 수많은 노동 운동과 노조가 자본가들에 의해 힘으로 탄압을 받게 되요. 노조는 폭력으로 제압당하기 일쑤였고, 법은 이를 제제할 어떤 장치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의도적인 방관을 일삼았어요. 처음부터 노동자의 계급을 최하층으로 규정했으니 이들을 구제할 생각이 없던 게 당연했던거죠.

 

생동성 실험 알바 해보신 분 있나요? 그런데 이들이 맞는 건 백신이 아니라 매독균이에요.

 

그런데 미국이 금융위기와 대공황을 거치면서 와그너법이 제정되었고 노동자의 권리가 일면 상승하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의 질떨어지는 노동은 흑인들 차지였어요. 이게 영국이랑 다른 점은 에초 영국은 뭐가 어찌되었던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한 노동자의 권리 찾기에 주력했지만 미국에서의 노동자들은 에초 다른 인종이라는 어떤 넘사벽의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권리를 찾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흑인을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흑인이 백인의 영역 즉 '지주'의 영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흑인은 노동자가 될 수 있지만 사장은 될 수 없고, 도시의 시장도, 대통령도 될 수 없도록 하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들끼리 살게 만들었던 게 미국의 인종차별이었어요.

 

임금 문제로 까불다간 태워죽였다네요.

 

미국이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마틴루터킹의 공민권과 더불어 짐크로 법이 폐지되면서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되었어요. 아니 법으로 인종차별을 허용했던 게 폐지되었다고 보는게 맞죠. 미국은 아예 흑인들의 사회적 차별을 법적으로 허용했던 나라였어요. 그런데 이게 풀렸다고 자본가들의 '그들만의 리그'만들기가 사라진것은 아니었어요. 인종차별이 사라지니까 이제는 인종 차별에 가난까지 더해 아예 가난한 계층이 자신들의 계층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것을 제한하는 시스템을 구상하기에 이르러요. 한마디로 부자인 사람들은 계속 부자일 수 있도록, 정치와 경제가 유착관계를 벌여 서로 공존할 수 있도록 기부와 혜택을 주고 받게 된 거죠. 금융자본의 독점으로 인한 일하지 않는 자들의 부의 축적, 지금의 99%운동도 여기에서 촉발되었던 거에요.

 

 

 

 

 

왜 이렇게 장황하게 다른나라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는지 아직 잘 모르시겠다고요?

 

그건 우리나라의 회사라는 곳이 애석하게도 이처럼 전혀 다른 노동운동의 과정과 결과를 가진 영국과 미국의 가장 안좋은 부분을 따와서 합쳐놓은 형태가 되어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의 회사는 미국의 시스템을 베이스로 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에초 단일민족이라서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자본가들은 일단 노동자 계층을 만들고 그들이 절대 자본가를 넘볼 수 없는 갖가지 사회적 제한 장치를 만들어두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하는 순간 자본가들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흑인들을 탄압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처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거죠.

 

그런데 이런 미국 시스템을 베이스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 회사가 롤 모델로 삼았던 기업들은 대부분 일본 기업들인데요. 일본은 입헌 군주제이기때문에 의미적으로 매우 닮은데다, 처음 문물을 받아들인 영국의 기업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영국의 노동자 착취와 그에 따른 보상으로 파격적인 복지 혜택을 내세운 후유증까지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고, 회사 내 자발적 계급사회 구축까지 거의 완벽한 영국식 모델을 정착시킨 나라인거죠. 그런데 이 모델을 이미 미국식 베이스로 사회 문화를 짠 한국에 짜맞추다보니 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가 아닌 나라에서 회사 내 계급사회를 볼 수 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낮은 노동자를 차별하는 미국식 노동자 차별의 잔재가 남아있으니까 계급별로 서로 차별하고 차별당하며 그것을 당연시하는 어처구니없는 회사 문화가 정착되어버리고 말아요. 여기에 그 계급사회의 위에 있는 자본가들은 그 계급사회와 철저하게 선을 긋고 계급사회와 별도의 사회를 구축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미국의 인종차별에서 촉발된 문화를 정착시키기까지 했어요.

 

 

 

아휴 더러운 비정규직 새끼들과 같은 자리에 앉기 싫어요~!

 

우리나라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가르치면서도 회사 내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계급화시키고 비정규직은 일용직, 파견직을 계급화시키고 차별해요. 대학생들이 벌이는 무개념 행동들 중에 학교 청소용역노동자들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동영상이 간혹 화제가 되는데 바로 이런 기형적인 문화가 낳은 현상인거죠. 그렇게 차별하면서 얻은 계급의 최정점에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게 만든 자본가들에 의해 명예퇴직을 당하거나 임금피크제로 더 이상의 계급 상승을 억제당하고 말죠. 그렇게 사회는 반복될거에요.

 

우리나라의 회사들은 미국과 영국 혹은 일본의 자본가와 노동가가 만든 회사 문화 중 자본가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서 섞은 회사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회사 문화는 백약이 무효에요. 영국이나 일본은 입헌군주제라는 배경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 내 계급체계를 타파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할 수 없는 완전한 공화국 사회이고, 미국의 노동자 권리 상승 모델을 가져오기엔 에초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에서 촉발되었던 그들의 사정과는 전혀 다른 상황일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의 모델로도 지금의 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한국 회사 문화가 만든 사회의 우울한 단면인거죠.

 

1960년데 짐크로 법이 폐지되고 노동조합의 권리가 높아지자 미국의 마피아는 이 노동조합들을 장악하며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어요. 한때 미국 정부는 마피아를 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노조의 활동에는 짤없이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동 운동은 인명이 죽어나갈만큼 매우 과격했었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회사 내 갈등에 대해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가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사실상 방조하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지도 몰라요. 노동자는 범법자라는 인식도 아마 여기에서 촉발되었겠죠.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데도 말이에요. 설마 그때 미국의 부패한 경찰들과 자본가들처럼 지금 정부가 자본가들에게 돈을 받고 노조 탄압을 묵인했을리는 없을거에요. 암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회사는 모일 회, 일 사로 만들어진 단어에요 영어로는 COMPANY인데, 이것도 모여서 일한다 혹은 모인다라는 의미 이상을 담고 있지는 않아요. 모여서 일을 하는데에 처음부터 계급이 있고 가져가는 이익이 정해져 있을리는 없어요. 자본의 가치만큼 시간과 인생을 들여 쏟는 노동의 가치도 그에 버금가죠.

 

사람이 모여요. 같이 일을 하기로 해요 제각각 재능이 다르죠. 누군가는 경영을 잘하고 누군가는 힘이 세서 일을 잘하고 누군가는 언변이 좋아서 영업을 잘해요. 이 셋의 능력 중 어떤 게 비싸고 어떤게 싼 능력인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어요. 당연히 그 셋 중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자신과 다른 두 사람의 능력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고요.

 

수익이 생기면 수익을 배분해야 해요. 당연하겠지만 처음에 돈을 만지게 되는 건 경영쪽을 잘하는 친구겠죠. 그 순간 권력이 생겨요.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에게 지금 100원의 수익을 올렸지만 사실은 10원밖에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속이거나 혹은 100원의 수익을 지금 올렸지만 회사가 조금 더 크기 위해서는 이걸 지금 당장 나누는것보다 일단 회사의 공동자산으로 해두고 나중에 더 크게 불려서 나눠갖기로 해요.

 

 

그런데 이 돈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경영을 담당하는 친구만 알게 될 수 밖에 없으니 경영을 담당하는 친구는 회사 사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 즉 다른 친구들에게 수익이 잘 돌아가지 않는 쪽으로 꾸며내거나 혹은 서류와 법적인 절차를 통해 회사 자체의 공동 자산에 대한 소유권 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바꾸기도 해요. 이렇게 되면 다른 친구들에겐 회사에서 나온 이익에 대해 내가 생각한 만큼의 돈만 주면 되지만 나는 회사가 내고 있는 수익 대부분을 먹을 수 있게 되는거죠. 다른 두 친구는 평생 경영하는 친구가 정해놓은 돈만 받으며 살게 되지만 경영하는 친구는 정말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 부를 축적한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혹시라도 이런 불공평하고 떳떳하지 못하게 번 돈을 의심할까봐 이 돈 중 일부를 정부에게 나눠주고 이들이 내가 가진 비밀을 알지 못하게끔 하는 한편, 이 친구들이 나한테 반항을 하면 불법적인 수단을 써서 막아도 내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게 되요. 자신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싶었던거에요.

 

 

...우리나라에서 회사라는 존재는 이미 모여서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영을 하고 돈을 가진 사람이 일방적인 권력을 가지고 모여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평등권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게끔 시스템을 손본데다가 다른 나라에서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삼았던 파격적인 복지 정책이나 정부 차원의 차별 금지법 신설조차도 자본으로 막는 이기주의의 극이 어디인지를 잘 보여주는 최악의 집단이에요.

 

갑이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될 줄이야...

 

...우리나라의 정부라는 존재는 회사가 이런 최악의 집단이 될 때까지 방조했고, 당신의 가족 부양과 노후를 도의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정책을 많이 써가면서 기업이 당신의 가족과 노후를 볼모로 당신을 착취할 수 있도록 꾸준히 어시스트를 하고 있어요. 국민에게 서비스를 한다며 당신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자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서비스 마인드로 당신을 좌절에 빠뜨리는 최악의 집단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콤비에요.

 

 

당신은 취업을 해서 회사라는 집단에 들어가는 동시에

이런 새끼들이랑 평생 싸워야만 하는거에요.

 

...

 

당신은 지금 당신의 생활을 위해서 고맙게도 돈을 주는 자선단체에 봉사를 하기 위해 입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능력을 응당 필요로 하는 조직과 그 조직의 돈을 필요로 하는 당신 사이에서 그 능력을 두고 거래를 위한 흥정을 해야 해요. 그것이 취업이라는 작업인거죠.

 

대부분의 채용 공고에는 그들이 원하는 당신의 연봉이 쓰여져 있지 않아요. 철저하게 감추죠. 당신은 그 공고에 써 있는 '이력서에 반드시 희망 연봉 기재'라는 항목을 보고 얼마를 기재해야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요. 왜 이 녀석들은 자기들 패는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내 패는 먼저 보고 사기도박판 장난질을 일삼으려 하나? 이런 회사는 면접 안 봐도 뻔하다라는 당당함으로 맞서야죠

 

 

입사한 뒤에도 언제나 당신은 계약 당시 약속했던 것들이 잘 지켜지는지,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째서 제대로 지키지 않는지, 내가 계약 사항을 위반한 사실이 없는 만큼 당신들도 계약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내 능력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세요. 그들은 '인맥'이니 '이 업계는 좁다'는 식으로 자신들에게 어느 정도 봉사를 하지 않으면 업계에서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려 이직을 어렵게 만들거라는 협박을 일삼을거에요. 만일 그런 이유로 타사 이직을 제한하고 평판을 떨어뜨린다면 충분한 자료를 수집해서 경찰에 신고하세요. 직장내 협박 공갈로 충분히 처벌받은 사례가 있어서 고소가 쉬울 거에요. 같은 예로 직장 내 계급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신적 폭력 행위도 충분히 처벌 판례가 있으니까 그런 느낌이 감지가 되는 즉시 권리를 찾으면 될거에요.

 

...라는 생각은 반드시 머릿속에 두고 취업을 준비하세요. 잠시 분위기에 휩쓸려서 회사 조직의 거대함에 잠시 물들어버릴지라도 나는 이 회사에 고용되어 생계에 대한 목숨이 걸린 일을 하는게 아니라 회사와 난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엮이는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사에 아쉬워함을 버리세요. 회사는 지금 필요없는 인력을 국가가 억지로 강요해서 뽑아놓고 돈 주는 게 아니라구요. 아니 설령 국가가 억지로 강요해서 뽑는다고 해도 그 강요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인거에요. 회사는 면접이라는 작업부터 당신의 멘탈을 통째로 갉아먹으며 너 따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지만 니가 운이 좋아서 이 회사의 녹을 받아먹게 되었으니 고마운줄 알라는 식으로 당신이 가진 능력을 극한으로 폄훼할거에요. 절대 휘둘리시면 안되요.

 

 

 

 

 

끔찍하지만 건투를 빌게요.

 

 

 

당신의 삶에

승리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3장

- 끝 -

 

posted by RushAm 2012. 8. 19.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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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4살 청년입니다. 유권자가 된지 꼭 4년째 되어가는데요. 주변에서 투표를 해야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88만원 세대이고 99%인건 분명한데요. 그렇다고 우리 입장을 반드시 대변해주는 정당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공약이 나오고는 있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죠. 대체 투표할 곳은 어디인가요? 그리고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봐야만 할까요?

 



<!?>



저도 몰라요. -_-

 

...

 

정치가 밥 먹여준다는 책도 있었고 실제로 청년실업에 관심을 가지는 후보도 많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서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던 사람들이 당선되고 나서 서민 생활이 정말 눈에 띄게 나아졌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거에요. 정치라는건 생각보다 그렇게 단순하게 '소원수리'를 하듯 간단히 내가 원하는 바가 정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 미리 말해두고 시작해야겠어요.

 

사실 소원수리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정치는 '내가 가난한 것'을 구제해줄 수 없어요. 내가 가난하면 일단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죠. 그렇게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먹을 거나 입을 것, 살 집을 살면 해결이 되요. 다행이도 우리나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전보다는 많이 선진화되어서 이제는 이런 개인적인 부분을 정치에 의존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이 가난한 것을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 그 자체를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방해하거나 얻을 수 있는 기대수익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 즉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대부분 옮겨가있어요. 흔히 말하는 서민 정당, 부자 정당이라는 말이 요 근래 5년 정도에서 부쩍 등장했고, 특정 집단을 대변한다는 청년당이나, 녹색당 등의 이색정당이 등장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아요.

 

 

물론 이러한 세분화된 방향성을 가진 정당이 다수 나오고 제각각의 논조를 이 나라가 나아가는 데에 모두 조금씩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선진화된 정치가 맞아요. 그런데 아직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지 고작 5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이런 짧은 이력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인식 부족으로 돌아오게 되요. 언론들의 유력정당 중심의 보도 행태도 있지만, 이들 정당의 활동이 그 정당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거든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정당의 존재와 그 정당의 방향성이 자신에게 꼭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투표 당일에는 유력정당에게 표를 던져요. 그중에는 누가 봐도 정책적으로 전혀 색깔이 맞지 않는 극빈층이 부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력정당에게 투표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과연 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후진적인 발상을 가지고 있어서 유력정당의 사탕발림에 넘어가기만 했던 것일까요? 정말 항간에 말대로 부자정당에게 투표하면 나도 언젠가 부자가 되었을때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요? 그건 이미 사람들이 특정 집단을 타깃으로 한 청년당이나 녹색당에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부정할 수 있는 논리에요 한마디로 지금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지금 현실'에 대한 부분을 걱정할 뿐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청년당이나 녹색당의 한계점은 '지금 당장'우리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지 않다는 거에요. 그들은 '미래'를 이야기하며 우리 아들 딸들이 이 나라에서 살 때 좀 더 쾌적한 환경과 청년 시절 좀 더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자고 역설하죠. 얼핏 청년당은 지금 청년들의 핍박받는 문제점을 당장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직설적인 키워드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이 적어질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과연 '내가 곧 미래에 부자가 될 것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부자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말이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노인들이라고 무조건 보수정당 편이라는 생각만큼 위험한것도 없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세분화되고 있는 과도기 속에 있지만 아직도 프레임을 좀 더 크고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디테일해질 수 없거든요. 그것은 지금 유력정당이 점차 양강체제로 좁혀지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반증되는 셈인데요. 만일 유력정당의 어떤 후보가 서민을 위한 정책, 어떤 공약을 내세우고 그것을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를 한다면 너무 단순한 시각이죠.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치는 그렇게 세세한 공약을 하나하나씩 지켜나가는 정치가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편이 나은가'를 선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에요.

 

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 대선이라는 정치행동이 본격적으로 국민 손에 돌아온 직후 처음 뽑힌 대통령은 5공인사 노태우였어요. 많은 사람들은 유권자들과 서로의 욕심 때문에 야합을 하지 못한 김대중, 김영삼을 비난했죠. 그러나 사실 진정 유권자들이 변화를 바랬다면 그들이 야합을 해내는 여부에 관계없이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을거에요. 투표는 정치권이 야합을 하느냐 마느냐에서 정해지는 게 아니라 결국 국민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거니까요. 야합을 했다고 해도 이겼을지에 대해서는 만약이 없겠습니다만, 아무튼 당시 국민들은 결국 노태우를 원했다는 결론이 나오는거에요.

 

물론 그게 어떤 속임수를 쓴 결과였더라도 말이죠.

 

 

노태우 정권이 부패하고 여당으로 출마한 김영삼과 야당으로 출마한 김대중이 다시 맞붙었을때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오게 되요. 다들 현정권의 부패에 분노했지만 결국 다시 여당으로 출마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세웠죠.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생각보다 그들의 부패가 '현실'에서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는 거에요. 세금이라는 제도의 무서운 점은 공동책임이기 때문에 내가 낸 금액을 가지고 부정축제를 벌인다는 느낌이 잘 와닿지 않는다는 데에 있죠. 난 세금을 1년에 200만원 정도 내는데 그들은 2천억 가까운 부정축제를 벌인다면 그게 진짜 내 돈으로 한다는 느낌이 안오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까지 기업들이 경제 성장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소비되면서 실제 체감 경제가 별로 나쁘지 않았고, 나빠졌다가도 금새 회복되는 국면이었기 때문에 더욱 현실 빈곤을 느끼는 계층이 없었던데다, 내수소비에 대한 각종 규약을 풀면서 오히려 내수경기는 훨씬 좋아지게 되요. 이른바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두텁게 생기는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라는거죠.

 

그래서 국민들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까지 그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간에 '일단 나한테 피해가 없었다'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에게 표를 던졌어요. 그 표의 의미는 단순해요 '지금 현실이 좋다'라는 거죠. 즉 정권이 교체된다는 의미는 지금 사는 삶의 가치관이 바뀐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데, 워낙 고도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불안한 경제상황을 맛봤던 세대들이라 그런지 요즘도 옛날 못살던 시절 회상하면서 진짜 세상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곧잘 듣게 되곤 하는데요. 바로 이 관점 '지금도 밥 안 굶고 안 춥고 사는데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냐'라는 생각이 '보수적인 관점'을 낳게 되고 지금에 안주할 수 있게, 다시말해 지금을 잃지 않게 해줄 수 있을 듯한 '보수를 표방하는 유력정당'에 표를 던지게 되는 거에요.

 

 

또한 그들은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젊은이들을 질타하는 한편 고도경제성장시기의 고통스러운 노동자 시절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어하지 않는 이중적인 생각 또한 가지고 있어요. 지금에 만족하는 만큼 옛날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는게 속내인 셈이죠

 

 

그러던 것이 이 IMF를 계기로 사람들이 처음 이 정치가 자신의 지갑에 들어오는 돈에까지 영향을끼칠 만큼 심각해졌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그들은 여당 대신 참 오랫만에 야당을 택하죠. 자신의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손해가 나면 국민들은 '머무르면 안된다'라고 생각하고 '머물지 않는 쪽'을 택해요. 몽골족이 모래폭풍의 위험을 느끼면 게르를 철거해서 옮기듯, 지금에 머물면 내 지갑이 계속 털리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이런 생각이 아쉽지만 유권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진보 인식의 한계에요. 사실 지금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넓게 보면 이와 큰 차이가 없잖아요.

 

그런데 진보쪽으로 정권교체가 된 다음 김대중 정부 시절 이루어졌던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에서는 모두 보수진영이 압승을 거두게 되요. 사람들은 IMF를 서둘러 극복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 임기 초기 1~2년간 대량 실직과 소비 감축, 금모으기 운동같은 범국민적 극복 노력 등으로 매우 피곤해진 상태였어요.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그리고 대통령 선거의 차이점은 대통령은 정말 멀~리 있는 듯한 존재를 뽑는 느낌이라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나라의 운명, 나라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한편, 국회의원이나 지방선거는 바로 우리 동네, 더 가깝게라면 바로 내 삶의 질과 관련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에 대한 관점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그것과는 또 다르거든요. 국회의원이나 지방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결국 경제 극복에 대한 피로그 극심하니까 나 좀 챙겨주라, 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에요. 복지에 대한 요구가 이때부터 있었던거죠.

 

 

제...제발 그만! 멈춰줘어어!!

 

IMF가 일찌감치 졸업된 후유증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정말 많은 변화가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큰 불안은 '노후에 대한 불안'이었어요. IMF 이전까지 일본식 '종신고용'정책을 고수하던 기업들이 속속 구조조정을 통해 종신고용 보장을 철회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회사에만 노후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이때 그 유명한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그룹 AIG 띠링띠링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계 민영보험회사들이 진출해서 이 불안심리를 노리고 한끗발 날리기도 했었어요. 지금은 망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그당시만 해도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는 심리도 심리지만 가능하면 '더 안정적으로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보수적인 심리가 더 강했어요. 생활수준이 갑자기 너무 떨어지니까 브레이크를 걸고 싶은 마음이 정치계의 보수를 찾게 만든 원동력이 된 거에요. 여러분들이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를 대할 때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아요. 굳이 국회에 의석이 몇 명 채워져야 정권에 힘이 실리니 어쩌니 하는 그런 바보같은 힘 논리는 그냥 대선에서 끝나야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적지 않거든요.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자치선거는 오히려 대선보다 정권교체가 훨씬 힘들고 10선이상의 의원이 나오기도 하는거에요.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거죠.

 

정치라는건 보기에는 무슨 복잡한 파워게임처럼 보이지만 큰 흐름을 보면 단순하고 알기 쉬워요. 노무현이 당선된 것은 2002년 월드컵에서 뜨게 된 열망 즉 '뭔가 더 나아지고 싶다' 라는 욕망이 진보의 요구로 이어져 노무현이 당선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더불어 집값과 바닥을 친 경제의 고속성장드라이브라는 진보적 요구가 거대했다고 볼 수 있어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역사적 사실로는 우리당의 과반으로만 기록되어있지만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은 텃밭인 TK PK를 빼앗기지 않았죠.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TK PK의 지역경제는 당시 최악이었음에도 그 원흉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재신임했다는 거에요.

 

사람들이 보수를 찾게 되는 이유는 '너무 많은 성장으로 내실을 다질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너무 많은 추락으로 인해 그 추락을 멈추고 현상유지라도 하고 싶다'라는 심리가 있을 때도 있어요. 역시 '지금을 사는 나만 피해가면 된다'라는 이기주의에서 발로된 발상인데요. TK PK의 경제가 떨어진 이유를 제공한 사람들이 다시 당선되는 이유는 단지 지역주의와 당의 유착관계라고만 보기는 어려워요. 그들은 당 이름이 아니라 당이 가진 이미지 코드 '보수'가 필요했던 것 뿐이거든요.

 

내가 국밥 좀 먹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그의 보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이런 보수에 대한 열망은 급격한 사회체계 변화를 추구했던 노무현을 대신해 이명박을 대통령에 올리게 되요. 이명박의 이미지는 단순히 경제를 살리는 이미지였다기보다는 서울시장 당시 '성장'을 멈추고 '국민의 삶의 질'에 집중한다는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거든요. '청계천'이 가지는 의미는 처음으로 서울시가 고가도로따위에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도시환경개선에 돈을 썼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이는 고 건 전 시장이 추진했던 하늘공원, 선유도 공원 등으로 대표되는 서울도심녹화사업과 닮아있는데 다만 하늘공원은 개장 첫날 인파가 마구 몰릴만큼 이슈화되지 않았던거고 청계천은 한달 남짓은 각종 이슈로 뉴스에 매일 오르내렸던 게 차이라면 차이일수도 있지만요.

 

이런 이미지, 국민들은 이명박에게 지표상의 경제성장을 기대한 것이 아닌 진정한 보수처럼 급속성장을 잠시 멈추고 내정을 챙기는 모습을 기대했던거에요. 노무현 정권이 아무리 경제를 살렸다고 지표를 들이대도 소용이 없었던 이유가 그거였거든요.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 당시 복지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았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IMF가 준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자존심 스트레스에 지쳐있었고 이명박이 가진 보수의 힘을 원했어요. 그 뒤로 두 번의 지방선거와 두번의 국회의원 선거 모두 한나라당과 현 새누리당이 과반을 차지한 것은 이런 보수의 대한 열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죠. 사람들은 지금 피부로 느끼는 경제가 아무리 힘들어져도 여당을 찍을 수밖에 없어요. 희망을 잃으면 잃을수록 '아 어서 이 상황을 타개하자'라는 진보적인 생각보다 '더 떨어지고 싶지 않다 이 이상은 악몽이야'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 쉬우니까요.

  

 

 

머리가 더 복잡해지지는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옹색하지만 결론을 내볼게요.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유력 정당들이 가장 못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당 내의 다양한 세력을 용서하는 능력이에요. 보수정당 내에서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다할 소신을 발휘하기 힘들어요. 그 반대로 진보정당 속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하고 있죠. 그럴 바엔 상대 당으로 꺼지라는 식의 이분법적 선긋기도 쉽게 볼 수 있어요.

 

사실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진보 속의 보수, 보수 속의 진보에요. 그들은 한쪽으로 입장이 쏠려있지 않아서 어떤 사안을 보다 중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죠. 아주 보수적인 정책이 나온다고 한다면 이 정책을 마냥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말 국민에게 필요한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할 여지를 갖어야 할 세력이 바로 이 세력이에요. 이 세력은 고정되어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떤 정책이든 사실 당리당략이라는 껍질을 까고 알맹이를 본다면 생각이 집단적으로 일치할 수는 없기때문이죠. 양쪽 당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분명 나와야 정상이에요. 그게 사람이 만든 집단의 기본적이고도 기본적인 순리인거죠.

 

이런건 말이 안되는거에요.

 

이들이 목소리를 올바르게 낼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먼저 변해야겠죠. 정치가 변하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그 기본적인 집단의 순리를 따라가면 되요.

 

5천만이 넘는 국민들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딱 두 가지 목소리만으로 대표할수도 없죠. 지금의 양강 구도는 정말 5천만 국민들이 딱 두가지 목소리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중에서는 단지 정치에 대한 외부적 인식 주입으로 인해 자신의 소신과 관계없이 대세를 따르듯 떠밀려 합류한 사람들도 분명 있다는 거죠. 투표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식이 되는데 그들의 대표가 그러지 말라고 바라는 건 모순이겠죠. 콩심은데 콩 나고 그렇게 떠밀리듯 다른 생각에 합류해서 뽑힌 정치인들이 이분법적 논리를 중단할 수는 없을거에요

 

그렇다고 지금부터 어려운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요. 매니페스토, 그거 지키는 사람 별로 없어요. 단지 이 사람이 '보수'인지 '진보'인지만 잘 구분하시고 내가, 이 마을이, 이 도시가, 이 나라가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쳐진 사람들을 보듬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해서 그 판단에 따라 보수나 진보에게 표를 던지시면 될 거에요.

 

무소속 후보의 당선이 많아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만 주의하실 점이 있어요. 어떤 당이나 후보는 이 보수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보수도 진보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정치를 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정치는 그들 스스로의 꿈이 이루어지지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들이 진짜 보수인지 아닌지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언론이 장악되었다고요? 진보성향언론들이 왜곡한다고요? 그거 아무 상관 없어요. 내 생각이 올바르면 보수언론 속에서도 진실을 볼 수 있고 진보언론속에서도 수구를 찾아낼 수 있어요. 아무리 보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보를 빨갱이라고 싸잡아도,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를 죄다 수구친일파라고 몰아세워도 앞서 말했지만 집단이라는 것은 결코 일원화될 수 없거든요. 단체가 개개인의 사상을 100% 일치시키도록 만드는건 불가능한거죠.

 

왜냐하면 진보정당이든 보수정당이든 말이죠. 지금 나와 있는 유력정당들은 자신들의 세를 불리기 위해서 덕지덕지 가져다 붙인 사람들이 한트럭이라 그 정당의 이름이 보수 혹은 진보를 대표하기 이미 힘든 지경이에요. 지금의 보수정당에 있는 사람들을 당이 가진 보수적 이미지만으로 뽑아서도 안될것이고 진보 정당에 있는 사람을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 당 이름이 가진 진보 성향을 믿고 뽑아서는 안된다는 말이에요.

 

결국 보수정책을 기대했던 보수정당은 가장 보수적이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죠.

 

 

물론 지난 10년의 정권도 아주 진보적이라고 보기 힘들었어요.

 

 

보수가 필요하면

보수적인 사람을 찍어서

그가 보수적인 생각을

이 도시, 이 나라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고


진보가 필요하면

진보적인 사람을 찍어서

그가 진보적인 생각을

이 도시, 이 나라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정치 참여이며

투표로 이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원칙

 

 

투표는 꼭 해주세요.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니까...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2장 

- 끝 -

posted by RushAm 2012. 8. 10. 15:00

앞서 양학선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고 그 글 속에서 김연아를 인용했던 적이 있다. 내용은 말 그대로 스폰서가 정작 필요할 때 붙는 게 아니라 이미 선수가 모든 걸 이룬 다음에 뜯어먹기 식으로 들러붙는다는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었다. 어떤 식이든 이미 우량주가 되어 손실이란 걸 볼 일이 없는 주식에만 투자하는데 익숙해있는 이 나라의 기업들이 기부나 스폰서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기에 벌어진 참상이긴 했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에 아쉬운대로 이런 후진적 투자 개념을 좀 뒤바꿀만한 실험작이 지금 막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손연재다.

 

 

 

손연재에 대해서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 그리고 어제 약간의 예선을 통해 잠시나마 논란이 줄긴 했어도 아직 그 지원 여부와 그녀의 성적이 갖는 의미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는 목소리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만큼 그녀는 한국 스포츠 역사, 특히 이 스폰스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상징적인 실험을 하는 중이며 그 실험이 일찍이 있었던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실험이었기에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스러울수밖에 없다.

 

손연재는 아무런 실적이 없었던 이른바 '유망주'때부터 대단히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녀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 유망주로서 가지는 포텐셜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상품 가치'에 있었다. 귀여운 외모, 뛰어난 텔런트 안티가 생기기 어려운 국민여동생 이미지, 남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리듬체조라는 종목의 특수성 등, 그녀는 굳이 체조라는 종목의 선수가 아니더라도 경제가치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오바로크된 기업들 이름에 주목하자

 

그녀에게 돈이 몰리기 시작한다. 물론 그 자금이 모두 그녀의 육성에 쓰인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체조 실력 향상에 필요한 모든 지원 환경이 다른 종목 선수와 비교해 극단적으로 향상될수밖에 없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손연재는 대한민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이전에 아무런 실적이 없는 종목에 아무런 실적이 없는 선수를 단지 '육성'에 목적을 두고 대기업이 투자를 감행한 첫 사례라는 의미가 있다.

 

 

이는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돈지랄 육성방식과 흡사하다, 이런 게 가능한 건 우리나라나 일본의 국력과는 사실 관계가 없고, 대부분 스폰서의 힘이다. 우리가 흔히 아사다마오가 이런 환경에서도 김연아를 못이긴 것을 비웃지만 우리는 김연아가 나왔어도 김연아 빙상장 하나 건립에 아직도 망설이고 있으니...

 

 

하지만 대기업이 처음으로 육성에 관여해서 돈을 썼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왔던 그들의 보수적인 마인드가 손연재에게만 아무 대가없는 기부성이 될 리가 없다. 손연재는 스폰서를 받은 만큼 미미하게나마 꾸준히 성적을 높여야 함은 물론 가지고 있는 기존의 좋은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갈 만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광고도 제한적으로 촬영해야만 하고 훈련 장면을 자주 보여주는 식으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도 최소화해야 했다.

 

이렇게 아낀 이미지는 런던올림픽이 임박한 때부터 폭발적으로 소모하기 시작한다. 대기업 스폰서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손연재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데에 참가하는 것이다. 즉 지금 미디어들이 보여주고 있는 손연재에 대한 도가 지나친 노출과 기대감 조성은 실제로 손연재에 대해 국민들의 기대가 높은 데에 대한 후속보도가 아니라 대기업 스폰서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방송사와 미디어들의 의도적인 손연재 붐업 동참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쇼 타이틀 : 휘센 리드믹 올스타 2011 갈라쇼

 

이처럼 참 대단하신 스폰서의 힘은 전혀 엉뚱한 피해자를 낳기도 한다. 다름아닌 신수지다. 그녀가 주장하고 있는 전국체전에서의 편파판정, 발목 부상이 악화되어 재수술이 필요한 사람이 보여준 스포츠 댄스 실력의 아이러니함, 이런 것들이 과연 그녀의 올림픽 출전 여부와 그에 따른 체조계의 관심 분산을 우려한 자들의 영향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까? 체조계 자체가 이미 스폰서에 끌려다닐만큼의 천문학적인 자금 이동이 있었던것일까?

 

 

...

 

 

손연재의 목표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미디어도 속시원히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실제로 스폰서들 역시 이번 런던 대회에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섣부르게 정해두는 것을 꺼린다. 만일 성적을 정해두었다가 손연재가 그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두게 되면 국민들의 관심은 손연재로부터 급격하게 멀어지며 식어갈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 이미지 역시 건재한 만큼 투자금 손실에 대한 위험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도 우려를 불식시킨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손연재의 스폰서 손익 분기점 대비 성적 기준이 실제 성적에서 도달하지 못할 경우 일어날 일들은 생각보다 훨씬 끔찍할 수도 있다. 스폰서는 이탈할 것이고 이탈한 만큼 투자에 익숙한 손연재의 성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가능성은 훨씬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줄기차게 찍은 CF의 수만큼 그녀가 성적을 제대로 거두지 못할 경우 벌어질 여론악화에 대해 이미 이탈한 스폰서들이 지금처럼 그녀의 이미지에 실드를 쳐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언론들은 일제히 그녀에게 관심을 끊고 등을 돌릴것이다.

 

박태환은 최근 삼성과의 스폰서 계약이 끊겼다. 금메달이 계약 조건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예전 김연아가 현 손연재 소속사에서 이탈했을 당시 벌어졌던 것과 유사할 것으로 생각되는 여론의 악화가 걱정스럽다. 김연아의 경우는 유망주때 충분한 관심과 스폰서를 받지 못한 사례인데다 한국인으로서는 나오기 힘든 넘사벽의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스폰서 이탈에 따른 엄청난 여론 보복에 시달렸다. 손연재는 이에 더해 그녀의 성장 과정에 대한 대기업의 지분이 걸려 있는 상황이므로 이러한 여론 보복이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그녀에 대한 일찌기 유래없는 풍부한 지원을 시기하는 여론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마냥 잠재되어 있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손연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스포츠 산업에서 정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성장 과정에 대한 투자라는 엄청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다시는 이런 바람직한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을 만나보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손연재의 실패는 그만큼 스폰서들의 투자 눈높이를 한층 높여줄 것이고 이는 채 빛도 보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유망주가 더욱 많아짐을 시사한다.

 

 

모굴스키 유망주로 IB스포츠와 계약한 최재우

 

비록 가진 포텐셜만으로 이런 실험을 이끌어낸 것은 아니지만 손연재의 이번 실험은 손연재 본인은 물론이고 한국 스포츠 산업에 들어오는 자금의 선진화 여부를 가늠할 운명을 짊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무겁다. 이번 실험이 비록 손연재의 외모나 상품가치 등 다소 빗나간 관점에서의 접근도 있었지만 한국 스포츠 산업이 결과 중심이 아닌 그 과정에 투자하는 풍토를 큰 손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손연재라는 어린 소녀 한 명에게 한국 스포츠 산업의 미래를 맡길 생각은 없다. 그녀는 그저 스스로의 성공을 위해 성적을 내주기만 하면 될 것 같다. 다만, 그녀가 박태환이나 지금의 김연아처럼 스폰서가 빠져나갈때 나올 수 있는 여론의 역풍을 견뎌내야만 할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고작 소녀 한 명에게 한국 스포츠 산업의 미래를 맡겨야만 하는 한심한 스포츠 산업 풍토도 역겹긴 마찬가지다.

 

 

지금 손연재를 보고 손연재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쪼록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녀가 어떤 성적을 거두고 앞으로 스폰서가 빠져나간 뒤에 어떤 스캔들과 여론이 의도적으로 특정 세력에 의해 조장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중심을 잡고 휩쓸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가 어떤 성적을 거두건, 그 성적을 거두기까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어떤 특별대우가 있었던 지 간에 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떤 특별대우를 받은 것도 아니고 국민들에게 좋은 성적을 담보로 빚을 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받은 특별대우라는 것는 비교대상이 된 다른 선수들의 처우가 경제 규모에 비해 훨씬 열악한 것이지 에초 우리나라가 이 정도 경제력을 갖춘 상황에서 응당 받을 수 있는 대우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복잡한 심정이지만, 손연재, 그녀의 선전을 바란다.

그리고 조금 더 순수하게 그녀의 선전을 기원할 수 있는 복잡하지 않은 사회가 되길 바란다.

 

 

하다못해 스포츠만이라도...

posted by RushAm 2012. 8. 7. 23:23

금메달을 따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떤 기업은 아파트를 지원한다고 나섰고 어떤 기업은 전화통화에서 자사의 인스턴트 라면 상표가 나왔다는 이유로 라면을 평생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이 라면 업체를 향해 '라면 홍보하려고 꼼수부린다, 지원이 너무 박하다, CF를 찍게 하지' 라는 식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선수에게 어떤 댓가 없이 지원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네티즌들은 그 속내가 괴씸하다며 비난하고 있지만 그 비난하고 있는 네티즌들 중에 양학선에게 지금까지 10원 한장 지원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금메달을 땄다는 이유로 양학선을 감싸고 돌며 뒤늦은 주인의식을 갖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방법이나 접근 자체가 약간 빗나간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떤 형태로든 선수를 스폰스하는 것은 홍보효과를 노리던 말던 굉장히 힘든 결정을 요한다. 문제는 그 시기다. 지금 기업들을 비난할 포인트는 라면이라는 금액적 가치가 낮은 현물 지원 여부가 아니라 바로 양학선이 금메달을 딴 직후에 대부분의 스폰이 쏟아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해는 한다. 힘든 결정이라는거, 그런데 당신들은 그 힘든 결정에서 너무 몸을 사리다가 떡고물만 바라는 추잡한 모양새를 보여버리고 말았다.

 

양학선 선수가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올림픽이 개최되기 꽤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그리고 양학선이 금메달을 노릴 만한 유망주라는 사실은 이미 2010년 세계선수권대회때부터 체조계에 차고 넘치도록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이 어린 유망주가 가정 형편에 신경쓰지 않고 운동에 전념하도록 아주 작은 스폰의 손길을 내민 기업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올림픽 시작하기 직전까지 훈련수당을 집에 입금해야만 했다.

 

저 배경과 저 메달들을 보고 기업들이 망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비인기종목이다. 여홍철이라는 훌륭한 선수가 있었고 그가 은메달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여홍철은 국민적 영웅이 되지 못했다. 오심에 울었던 양태영 선수와 그 난리통속에서 은메달을 딴 김태은 선수는 올림픽이 끝난 직후 관심에서 멀어져버리고 말았다. 기업이 걸 수 있는 건 금메달 뿐이었고 그마저도 홍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만큼 주판튕기기가 시원스럽지도 못했을것이다. 

 

그래서 기업들의 이번 지원은 그 동기가 불순하기 짝이 없다. 물론 안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그런데 이미 역사적인 금메달을 딴 지금까지도 큰 손, 이른바 돈이 넘쳐나는 대기업들이 양학선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처음 있는 일이니 얼마나 주판을 신중하게 튀겨야겠는가? 에초에 반드시 스폰을 해야할 사회적 의무도 없고 말이다. 어떻게든 투자한 만큼 남겨먹어야하는데 답이 안나오니까...

 

...

 

양학선 이전에 '김연아'가 그랬다. 김연아는 주니어때부터 피겨 전문가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는 최고의 유망주였고 이미 세계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 등의 시니어 무대에서도 기대 이상으로 성장해주면서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직전까지 김연아를 공식적으로 스폰한 큰 손기업은 K모은행이 거의 유일했고, 금메달 직전에 세계를 거의 씹어먹을 수준으로 성장한 뒤에서야 하이트진로, 매일유업 그리고 삼성전자가 달라붙어서 콩고물을 털어먹기 바빴다. 지금 김연아가 스폰을 받고 광고를 찍고 있는 기업들 중 그녀가 연습장이 별로 없어서, 스케이트 살돈이 없어서 고생했던 과거에 관심을 갖고 나서서 투자했었던 기업은 없었다. 피겨는 그 이전에도 이렇다할 스타가 없는 비인기종목이자 무관심종목이었으니까 당최 샘플이 없으면 뭐 하나 하지도 못하는 ㅄ들이 주판 튕기기를 간단히 끝냈을리가 없었을테니 말이다.

 

 

기업들에게 고한다. '스폰'이란 그 선수가 얻은 걸 나눠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 선수가 아주 어릴때부터 가능성만을 보고 그 선수가 정상급 기량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함께 뛰고 움직여주는 것을 우리는 보통 스폰이라고 말한다. 지금 스폰이라는 이름 자체를 더럽히면서 모든 걸 완성한 양학선에게 콩고물 털어먹을 궁리만 하는 역겨운 행태야말로 국민들이 제대로 보고 일침을 가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리고 국민들에게 고한다. 기업들만 탓할 것도 아니다. 우리도 잘한 게 별로 없다. 비인기종목에게 뭐 하나 해준 것도 없으면서 금메달을 따오면 우리편, 못따면 죄인이라는 마인드가 몇십년째 그러지 말자는 캠페인만 벌일뿐 별로 나아진게 없다. 선수촌을 세금으로 운영한다고 그들이 우리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인드라도 가질 셈인가? 당신들이 인기 비인기 종목을 막론하고 아주 작은 가능성부터 관심을 가져준다면 기업들은 주판을 튕길 필요가 없다. 우리가 직접 돈을 내서 지원해주는것보다 작은 데서부터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선수들에게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금메달을 딴 양학선을 본다. 그의 과거도 이제서야 되짚어본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그를 칭송하고 기업들도 지금의 그에게만 돈을 준다. 그래서는 안된다. 지금 선수촌에는 양학선 이상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인재들이 외적 요인으로 인해 그 미래를 부정당하고 있는 선수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양학선의 지금에 투자하고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양학선의 과거에 스폰을 하고 관심을 가져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과거를 살고 있는 수많은 선수들에게도 양학선과 같은 관심을 가져줄 필요가 있다.

 

스포츠 강국은 금메달의 과거에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출발한다.

금메달의 영광을 나눠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민들과 기업 모두

과거가 없이 금메달이 만들어질거라는 모순된 욕심을 이제 버리는 것은 어떨지 싶다.

 

 

posted by RushAm 2012. 8. 5. 08:02

축구의 인기가 예전만 못했(었)다 2002 월드컵 이후 축구의 인기는 점점 시들해졌고,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국대 경기에 가슴을 졸이지 않게 되었(었)다. 표면적인 성적은 떨어졌지만 한국 축구는 계속 강해져만 갔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한낱 평가전 정도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 어려울 정도로 시청율마저 곤두박질쳤다.

 

왜 그랬을까? 예전에는 우리가 참 실력은 좋았는데, 이상하게 큰 대회만 나가면 편파판정을 당하거나 선수들이 몸이 굳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채 뭔지 모를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왔기에 '도대체 우리나라는 언제 제 실력으로 맞붙는가'라는 탄식 속에서 항상 남들 앞에서 제 실력을 잘 못내는 답답한 아들을 둔 부모 마음처럼 타들어갔었다. 1948년 눈물이 멍든 가슴팍으로 떨어져 젹신 쓰라림부터 시작된 역사가 그랬다. 우린 늘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고, 답답했으며 억울했다.

 

 

그런데 2006년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이같은 평가는 사라졌다. 우리는 스위스전의 그 마지막 편파판정을 끝으로 더 이상 제 실력보다 낮은 평가를 받지도, 강대국의 성적을 위한 정해진 대본의 희생양이 되지도 않았다. 당당히 원정 16강 진출자로서 축구 강국이 되어 있었다. 스타 플레이어도 있었고 팀 전원을 유럽파로 맞춰낼 수도 있었다. 더 이상 이변의 주인공이 아닌 제 실력으로 승부하는 축구 강국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정작 축구 강국이 되니 마냥 안타까워 감싸고만 싶었던 아들이 불쑥 커버린것처럼 더 이상의 보호본능이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린 더 이상 승리에 절박하지 않았다. 이기면 즐겁지만 져도 더 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월드컵 16강전 당시 우루과이 수아레즈의 골은 완벽했으며 우린 사력을 다한 후회없는 경기를 펼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의 패배를 안타깝고 억울해하지 않았고 축구를 외면했다. 더 이상 안타까워해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불의로운 승부는 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올림픽은 분위기가 심상치않았다. 축구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상하게 각 종목의 몇몇 선수들이 실력에 반하는 억울한 일을 당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분노했다. 이 분노는 금방 식는 듯 했지만 차분하게 사람들 마음속에 쌓여가고 있었다. 식어갈만하면 또 한명의 억울한 희생자가 나왔다. 억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좀 선진국이 되었다고 믿었던 우리나라는 스포츠 외교에서 여전한 후진성을 보이며 약소국의 기억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만다.

 

 

 

아 우린 억울해도 아직 세계에 당당하게 말해줄 만한 힘이 없구나

우리가 우릴 스스로 못지키는구나

 

 

사실을 알건 알지 못하건 이런 사실은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쌓여갔다.

그리고 오늘 그 악의 결정체와 약소국의 설움을 기억해낸 울분이 카디프시티에서 맞부닥쳤다..

 

사진제공 : 스포츠조선(www.sportschoson.com)

 

사람들은 전반 초반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설마 영국이, 개최국 영국이, 자존심 강한 그 영국이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절박했다. 절박함은 사람들을 악마로 만든다. 그들은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이겼어야 했던 모양이다.

 

전반 중반 우리나라가 한 골을 넣으며 앞서갈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실력으로 승부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던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패널티킥이 판정되는 순간부터 경기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다. 이 경기는 그 순간부터 그냥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영국보다 나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이성적 룰이 어긋나버렸다. 영국은 이기려는 마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심판과 선수들을 악독하게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그 악에 당할 처지였다. 패널티킥을 막아낸 정성룡과 그 정성룡이 부상을 당해 실려나가는 모습을 본 그 순간 이미 이 경기는 축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번 올림픽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가슴속에 차분히 쌓아둔 국민들의 마음도, 뛰는 선수들의 마음도 똑같았으리라...

 

 

 

 

 

'이 새끼들...이기고 싶다!'

 

 

 

 

 

사진제공 : 스포츠조선(www.sportschoson.com)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국 관객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아마 티비를 시청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빛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 경기는 더 이상 스포츠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다. 이미 스포츠로서 누더기가 되어가기 직전인 올림픽, 그걸 알면서도 표면적인 성공을 위해 묵인했던 영국이었다. 우리는 바로 직감했다. 이 경기마저 지면 우린 이 누더기같은 올림픽의 억울한 패전국으로 영원히 기록될지도 모른다고...

 

사진제공 : 스포츠조선(www.sportschoson.com)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손은 떨렸고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은 옥죄여왔고 입은 마르다못해 타들어갔으며 체온이 떨어져 오한이 오기 시작했다. 뛰는 선수도 응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오랜만에 10년 전의 이탈리아라는 거대한 악을 향해 싸우던 태극전사들을 응원했을때처럼, 우리는 응원에 힘을 주었고 120분동안 그라운드에서 혹은 TV앞에서 모두 함께 뛰었다.

 

악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심판은 언제부터인가 정상적인 판정을 하기 시작했다. 영국 선수들은 급격히 지쳐갔고 스포츠의 세련됨이 사라진 경기는 이미 그 가치를 잃은 채 난투극의 처절함만이 남았다. 그렇게 누군가는 이 승부를 가져가야 했던 그 상황에서 우리는 이 새끼들을 결국 이겼다.

 

사진제공 : 연합뉴스 (www.yonhapnews.co.kr)

 

 







축구는 이래서는 안된다. 어떤 이념적 울분에 대한 대리전이 되어서도 안되고 다른 외부 요인이 승부에 개입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우리나라의 축구 실력은 진보할 수 없고 전 세계에 우리가 강팀임을 어필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열기가 식으면 거짓말처럼 축구의 인기는 사그러들지도 모른다.

 













 

사진제공 : 스포츠조선(www.sportschoson.com)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축구인것을...

 

사진제공 : 스포츠조선(www.sportschoson.com)

 

그래서 난 여전히 축구가 좋다.

posted by RushAm 2012. 8. 4. 13:02

 

 

가끔 빌보드는 이상한 일을 저지른다. 그만큼 순위변동이 심하고 신곡에 대한 열망이 너무 지나치다 보니 생긴 기현상인데. 다름아닌 '제 3세계'음악의 갑작스러운 약진이다. 이들 음악은 정말 어떤 음악 전문가도 예측한적이 없고, 전문적인 프로듀스를 거치지도 않았는데, 어떤 계기 (유명 아티스트가 트위터에 올렸다던지, 어떤 영화 음악으로 쓰였다던지) 가 있고 그 음악이 사람들에 귀에 박혀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면 그 곡은 바로 뜨게 된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셨을줄 알겠지만, 이렇게 뜬 음악은 거의 대부분 '후크송'이다..

 

우리나라는 후크송에 대해서 그 파급력은 인지하면서도 그 가치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후크송이 우리나라를 들었다 놨다 국민음악이 된 적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아직 이 후크송에 대해 지갑을 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빌보드는 좀 다르다. 음원 가격이 좀 싼 편이기도 했지만 후크송 역시 하나의 음악으로 싸든 비싸든 일단 그 한 마디의 반복성이 주는 음악적 가치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빌보드의 이같은 주기적인 사춘기는 그래서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이와 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 수순이 아직 '역대급'까지는 다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빌보드 뿐만 아니라 각국 챠트에서 고르게 눈에 띄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빌보드의 파급력은 단지 미국 국내시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팝이 거의 시망하다시피한 우리나라에서도 아마 지금부터 예시로 드는 곡들은 적어도 한번씩은 들어봤으리라 생각된다.

 

 

1. We No Speak Americano

 

 이 곡의 빌보드 차트 기록 

 

2. Macarena - Los del Rio

 

빌보드 챠트 기록은 굳이 볼 필요가 없다.

 

3. Alice DJ - Better Off Alone

 

폴란드랑 영국, 빌보드는 가볍게 씹어먹었던 곡

 

...

 

위 곡을 다 들어보았다면 이제 강남스타일 뮤비 다시 한번 보자

뱀발 : 뮤직비디오를 잘 보면 알겠지만 말타는 춤을 표현하기 위해 말 사육장을 간 것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장소가 '한국'에서만 갈 수 있는 장소들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풍경 (관광버스, 한국 지하철, 강변의 손뼉치며 걷는 파워킹 아줌마, 한강 오리보트, 강변 오리보트, 대중사우나와 문신남들, 대중탕) 들이 주를 이룬다. 전략적인 기획에서 나온 무언가는 아니었겠지만 외국인들이 박장대소를 치며 웃는 이면에는 단지 관광와서는 절대 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 (대중탕이나 관광버스 문화) 가 흥미롭고 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것이다. 게다가 싸이에다 노홍철, 먹어주는 미모의 현아까지 갖출건 다갖춘 셈

 

...

 

이들 곡들의 공통점은 곡 자체의 흡입력도 있지만 바로 뮤비가 주는 흡입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엠넷이 아이돌들 철봉오래매달리기 프로그램 채널이 되어버린지 오래지만 아직도 해외에서는 MTV에서 주구장창 뮤비만 틀어주고, 그 뮤비를 보고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이들 곡은 곡으로 귀를 사로잡고 받아든 눈길을 다시금 뮤비로 사로잡아 확실한 광고효과를 거두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물론 마카레나는 아무 전략없는 촌스러움이 역으로 먹힌 사례지만)

 

강남스타일은 이들 곡들보다 출발이 훨씬 더 순조롭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싸이가 가지고 있었던 음악 색깔에 화룡점정을 찍은 유건형의 편곡이 주는 신선함이 해외에서 먹히는 결정적 한방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후크송으로 나무랄데없는 곡이고, 반응도 좋다. 무엇보다 곡으로 귀를 사로잡고 뮤직비디오로 눈을 묶어두는 MTV식 전략이 비록 유튜브라는 다른 채널이지만 구사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로비게이의 어시.jpg

 

다만 지금의 상황을 너무 낙관할 필요는 없다. 마카레나의 대성공은 싱글을 내자마자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을 일으킨걸로 보이지만 사실 이 곡은 나온지 무려 1년만에 빌보드에 진입했다 물론 지금은 유튜브랑 아이튠즈의 시대라서 이보다 훨씬 적은 시간에 폭발할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포텐셜의 극한을 끌어내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리고 이 곡은 '곡'이 히트를 치고 '뮤비'가 화제가 된 곡이지 '싸이'라는 가수가 인지도를 얻고 있는 상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YG도 싸이도 이를 모를리 없고, 섣부른 낙관을 할리는 없다. 다만 지금 올림픽이 끝나고 난 다음 단물빠진 SM떡밥을 대체할 문체부에 귀에 들어가버리는 것이 우려스러울 뿐이다.

 

 

정부가 아무 짓거리것도 안해야 지금처럼 중간이라도 갈 텐데

posted by RushAm 2012. 8. 2. 10:22


급여, 흔히 월급이라고 하죠. 이 급여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혹시 제대로 알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급여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죠.

 

급여給與

1 .
돈이나 물품 따위를 줌. 또는 그 돈이나 물품.

2 .
[북한어] 동물에게 사료를 줌.

 

뜻 자체로 급여는 그냥 돈이나 물품 따위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댓가성에 대한 내용이 없죠. 뭐 다른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월급, 주급, 시급에 들어가는 給자는 공급하다는 의미로 어이없지만 대단히 공산주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번 뜻이 더 현실적이군요. 이 단어대로라면 우리는 북한의 배급에 의존하는 국민들처럼 회사의 급여가 아니면 '생존 자체가 안되는' 가축같은 의미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반면 영어의 경우는 어떨까요? 영어로 급여는 'pay'라고 합니다. 친숙하죠? 영어권 국가에서 물건을 살때도 이 단어를 분명 써본 경험이 있을겁니다. 이쪽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이들에게 월급은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받은 '대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급여에 비교하면 엄청난 의미적 차이가 아닐 수 없네요.

 

...

 

우리 사회에서 백수 즉 무직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습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자'라는 것은 '소비만을 하는 자', '생산하지 않는 자'라는 의미를 넘어 '밥버러지', '시간을 낭비하는 자 (잉여)'라고까지 불리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이 생산하지 않는 자, 시간을 낭비하는 자를 잉여라 부르며 괄시하고 심지어 사회 암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여러분들은 과연 무엇을 얻고 계십니까? 오늘 특별기획 취업 시간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자들과 그 사회분위기로 인해서 이득을 얻는, 또한 손해를 입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원론적으로 돌려보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 이며 '경제활동을 하는 시간'은 매우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깔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같은 인식 속에서 시간을 경제활동에 쏟지 않는 사람이나 조금 덜 쓰는 사람을 깔보거나 조롱하며 자신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경제시간과 환산하는 식으로 우월감을 표출하곤 하죠. 아마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가 유지되는 이유에는 이 우월감을 누리기 위한 방편적 기준이라는 점도 내면에 깔려있을지 모릅니다.

 

http://quadue.wordpress.com/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가 계속되는 것을 원하고 또한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쪽은 과연 어디일까요? 모든 논리는 이득을 보는 쪽과 그 이득을 보는 쪽을 위해 희생하는자, 그리고 손해를 보는 자로 나뉘어집니다. 여기에서 이득을 보는 쪽을 위해 희생하는 쪽은 '백수'가 되겠고요. 그리고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쪽이 바로 경제생활자가 됩니다. 물론 이득을 보는 쪽은 회사가 되겠죠. 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결과적으로 회사에 이득을 가져다주는걸까요? 그건 바로 '근로자의 시간에 대한 가치 절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경제활동에 쓰는 시간은 비싼 시간이고, 경제활동에 쓰이지 않는 시간은 싼 시간이다라는 논리는 결국 비싼 시간에 대한 급격한 수요를 야기합니다. 비싼 시간을 원하는 사람이 많고 그 비싼 시간을 주는 사람 (기업)이 적으면 자연스럽게 물가가 올라가게 되죠. 그러면 이 시간을 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더 낮은 가격에 많은 시간을 주는 사람에게 팔고 싶어할것이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더 낮은 가격을 부를 것입니다.

 

여기에 기업들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있지 않은 시간을 더 끼워주지 않으면 원래 사려고 했던 시간도 사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게 되는것이죠. 여기에서 당신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고민의 주체는 당신이 가치없는 시간을 가치있는 시간으로 바꾸는 대신 얻을 수 있는 것, 바로 '사회적 우월감'이고 또 하나는 당신이 원래 팔려고 했던 하루 8시간 정도의 시간을 팔 수 없게 되었을 경우 그 '사회적 우월감'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이같은 거래가 계속될 경우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사회적 통념상 가치있는 시간으로 보내지 않으면 돈이 술술 나가는 듯한 불안감에 몸을 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시간을 판 댓가를 받은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우월감에 대한 중독성도 더욱 심각해지게 되겠죠.

 

이 기회를 시간을 사는 자는 놓치지 않습니다. 더 낮은 가격에 더 많은 시간을 사려는 것은 물론, 당신의 시간 말고도 살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며 당신과의 거래를 얼마든지 끝낼 권리가 있다는 점을 어필하며 당신을 압박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 사회적 우월감이 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데에 더 많은 시간을 더 저렴한 가격에 그들에게 넘기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됩니다.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주는데에도 당신은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시간을 아주 조금이나마 가치있게 쓰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우왕 이제 키스도 할수 있네, 어썸!!

 

 

...

 

이런 과정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 야근과 연장근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비근로시간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아무 의미 없거나 지나치게 낮은 가치를 매기는 것으로 옭아맵니다. 기업은 이러한 분위기를 환영하는 것은 물론 도의적으로 조장하기에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는 편이 훨씬 기업에게 이득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야근과 연장근무, 그리고 그 연장근무로 인한 댓가가 형편없이 낮은 것에 분노하고 불합리함에 분통을 터뜨리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그 책임은 모두 회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회사에 주는 시간'이외의 시간에 대한 가치를 너무나도 떨어뜨렸음은 물론 그 시간을 회사에게 너무 싼 값이 주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참극입니다. 회사입장에서는 특별히 도덕성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당신들이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해 하등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의무도 법규정도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우리를 먹어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도 회사를 먹여살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요. 그러기에 회사가 우리에게 돈을 주는 고마운 단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사와 우리는 거래를 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회사에게 그들이 필요한 시간과 그 시간 안에 해낼 수 있는 업무 능력을 보여주는 댓가를 정당하게 받는 거래 관계입니다. 혹 그들이 더 많은 시간과 능력을 정당한 댓가 없이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응당 거부해야 하며 거부까지 갈 수 없다고 해도 응당 이게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불합리한것인지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하지 않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자'에 대한 가치절하를 중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퇴근 후'에는 누구나 백수가 됩니다. 그 백수가 되기 싫어서 회사에 남는 시간을 '기부'까지 해가며 억지로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회 구성원이야'라며 자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어필하며 '우월감'을 느낄 가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응당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호구'라는 단어처럼 당신은 회사에게 호구처럼 당신의 시간을, 인생을, 능력을, 존재 가치를 덤핑세일로 빼앗긴것과 다름없으며 그걸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하는것도 모자라 바보처럼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회사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의 하는 작태는 비단 우리가 연장근무에 관대한 사회분위기를 자초했다고 하더라 할 지언정 너무나도 치졸하고 비겁합니다.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자신들의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는 것은 이윤창출로는 완벽할지도 모르지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처음부터 거부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최악입니다. 굳이 윤리까지 들먹일 필요조차도 없을것입니다.

 

 

연장근무와 야근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없습니다. 근로계약상에 추가근무에 대한 조항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기업은 그래서 야근과 연장근무를 거리낌없이 시킵니다. 그리고 그 야근과 연장근무에 투입되는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미친 나치시대 파치즘적인 이념같은 병신논리를 설파합니다. 그리고 이 논리에 의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야근과 연장근무에 대한 정당한 수당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있습니다.

 

 

야근과 연장근무에 대한 지불은 법적으로 반드시 지불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처음부터 야근수당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기업에 던지는 추가근무시간에 대한 가치를 최대한 떨어뜨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이없게도 추가 근무 수당으로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아이구 우리 잉여시간 남아서 드린 것 뿐인데 돈까지 주시다니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라며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업은 당신의 시간을 더 싼 값에 사고 싶어하는 거지근성들로 가득한 놈들일 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에 맞서 절대 우리의 시간을 덤핑으로 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 '일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시간이 싸다고 생각하는데 기업이 우리 시간을 비싸게 사줄 리가 없을테니까요.

 

 

당신의 시간은 기업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잊지 마세요

 

 

특별기획 취업 - 누가 워커홀릭을 만드는가 : 야근 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