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5. 1. 5. 14:32

작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드라마 미생, 그리고 2014년 연말부터 2015년 연초까지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국제시장 혹자가 말하듯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의 가혹함을 구구절절히 보여주며 당신은 아직 완생이 아닌 미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가혹했던 과거를 실제로는 가혹하지 않고 오히려 잘된 삶, 이른바 미생을 완생이었다고 최면을 거는 것 둘 다 모두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드라마이며 영화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선악은 없다. 만듦새라곤 형편없고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그 영화를 만들었다거나, 보는 사람들이 뭔가를 착각해서 쓸데없는 눈물을 흘리건 특별히 상관은 없다. 어쨌든 그 영화, 드라마로 인해 자살인구가 줄어든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나 그것들을 정치에 이용해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미생을 보지 않고, 국제시장을 보지 않고 말하는 자들을 위해 잠시 그 두 작품을 본 감상과 내가 정치인이라면 그 둘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 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 두 작품이 세대와 연령대가 비록 갈렸을지언정 대한민국을 열광시키고 있는거라면 분명 그것이 지금의 민심일것이며 그 민심 속에 문제의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미생에 열광했는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칭찬에 목말라있다. 칭찬이라는 물건은 하나도 듣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듣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고래마저 춤추게 만드는 마약이기 때문이다. 이 칭찬이라는 물건의 본질은 의외로 위로와 많이 닮아있는데 이른바 영혼없는 칭찬이 되지 않으려면 그 사람이 무엇에 가장 어려워하고 있으며 그 어려운 와중에 무엇을 해냈는지를 캐치해내야만 한다. 답정너 이론처럼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이 칭찬받고 싶은 분야가 반드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미생은 그런 젊은 세대들에게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칭찬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즉 이 작품 자체로 지금 고통받고 있는 각개각층의 젊은이들이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미생 만화 그리고 드라마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이 드라마와 만화가 잘 된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화제가 되고 있다는 부분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나 혼자 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나 뿐만 아니라 내 옆사람도, 윗사람도, 아랫 사람도, 부모가족들도 다 한번씩은 볼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그들로부터 그랬구나~ 네가 저렇게 힘들었구나 라는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일말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게 된다.

 

물론 이 드라마로 인해서 실제로 무언가가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건 이미 좌절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칭찬이 무척 고프다. 헛소리로 가득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따위에 너무나도 지쳐있다. 신기루 같은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활자공해 자기계발서에 신물을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론 당장 그들에게 긴급처방을 내리던 아니던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과 국가비전임에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이미 그것이 당장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당장 받을 수 있는 것, 비록 잠시 언 발에 오줌을 누는 정도의 따스함이겠지만 그마저도 급하기에 그들은 이 드라마로 인해 어렵게 얻은 반전의 찬스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왜 미생에 열광하면 안되는가?

 

문제는 이 드라마와 이 드라마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을 바라보는 정책 실무자, 즉 정부의 생각이다. 서두에도 말했듯이 이 드라마로 인해 무언가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이 드라마를 보고 진짜 무언가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를 가지기에는 이 드라마가 가지는 현실고증적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이 드라마로 인해 정부가 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매우 큰 거부감이 든다. 비단 모 언론이 멋대로 작명해버려 실제로 정부가 그렇게 작명한 것으로 굳어져버린 장그래법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말이다.

 

윤태호 작가가 ‘정부가 정말 만화를 다 보고 이 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반응을 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정부처럼 단순무식하고 보수적인 집단은 이 만화를 모두 정독하기도 어렵거니와 정독하려는 시도를 해서도 안된다. 이 만화 속의 세상과 그 만화가 가지고 있는 여론 파괴력에 중독되어 미생이라는 프레임에 완전히 갇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미디어가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도가니의 사례를 들며 이러한 미디어의 역할에 순기능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도가니방지법이 새로 제정되기는 했지만 도가니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당시 도가니 사건이 당시 법 체계가 허술해서 발생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미디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인기영합주의에서 벌어진 입법경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사법력의 강화에서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그래법의 탄생 배경 역시 이러한 국회의원들의 인기영합주의에서 나온 여론몰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으며 장그래법이라는 네이밍 자체에서 나오듯이 그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데에, 혹은 비정규직의 근속 기간을 늘리는한마디로 2년 안에 해고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에서 급조한 법이라는 점이 공분을 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들에게 어떤 계기로 인한 입법과 그로 인한 문제해결이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을 정도니까

 


입법은 특정 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편리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사법은 절대적 중립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개념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법을 입법하는 것 이상의 부담을 수반한다. 비록 지금의 사법체계가 지극히 한쪽에 치우치고 있어 특정 계층에 희생과 손해를 강요하는 체계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채로 오랫동안 굳어져있다면 그것은 이미 이득을 본 쪽에서 자신의 몫이라고 단정해버린 뒤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에는 단지 지금의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범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하는 매우 큰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그런 어려움에 직면한 가운에 등장한 드라마 미생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간신히 지금의 사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기성세대들에게 어필하고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움직임의 동력을 얻은 셈이다. 어쩌면 기성세대와 젊은세대간의 오랜 세대의 벽 두께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열 마디 말 중 한 마디 정도는 귀를 기울이게 만들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대단하신 입법도, 당장의 체감가능한 변화도 아닌 그저 자신들 세대들이 살아가는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공감대로서 나누길 바랬던 것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와버렸다.


...



사람들은 왜 국제시장에 열광하는가?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 연령대 중에 과연 이 영화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의 기성세대들을 칭찬한다. 당신이 살아온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미생이 지금을 사는 현실의 젊은이들에게 지금 사는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주고 때론 칭찬해주는 드라마라고 한다면 국제시장은 지금까지의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아온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말해주고 때로는 칭찬해주는 영화다. 관객들은 비록 자신의 삶과 완벽하게 닮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의 삶 중 극히 일부분, 영화 장면 중 극히 소량의 분량 속에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것이 영화의 결론에서 삶의 모든 부분을 일컬어 잘못 살지 않았다라는 키워드를 던짐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칭찬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들어주는 영화가 되어준 셈이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중 장년층 관객들은 정말 다양한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모든 관객이 전쟁에 참전하고 또 파독광부로 파견되는 인생을 살아왔을 리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그 시대를 살아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생이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국제시장은 기성세대로 하여금 저 시대에 살고 있었던 모든 아버지 들에게 우리는 지금 젊은 세대들이 고생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심한 고생과 핍박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마치 영상실록처럼 담아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 역시 마음속으로나마 지금의 젊은 세대 못지 않은 스팩타클한 젊은 시절을 살아왔다는 점을 회고하는 선에서 그칠 뿐이지 달리 이 영화로 인해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미생을 보는 젊은이들처럼 그들 역시 단지 이 영화로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를 살아왔던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대변하고 이해받을 지도 모를 마치 오래된 앨범 속 자신의 젊고 멋진 시절의 사진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 정도에 그칠 뿐이다.

 

얼마 전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 90년대에 나왔던 가수들의 명곡과 그 당시의 무대들을 그 당시의 가수들이 부르며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모처럼 TV앞에 모여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무엇인가? 무엇이 TV조선밖에 보지 않는 부모님들을 TV앞으로 끌어당겼을까? 그리고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지금의 10대들에게 90년대 가수들이 밀레니엄 가수들보다 더 나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만큼 음원은 폭발적이지 않았고, 부모님들은 무한도전이 끝난 뒤에 주저없이 TV조선으로 채널을 다시 돌렸을것이다 세대간 공감대 형성은 잠시간의 신기루는 가능할지언정 아직은 벽이 두껍고 차갑다는 것을 자각하는 정도에 그친 것을 보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국제시장에 열광하면 안되는가?

 

보수단체와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적는 뉴스미디어들이 잇따라 이 영화에 대해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촉구하며 기성세대를 인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인정이란 무엇일까? 기성세대들이 이 영화로 인해 무언가 변화가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미디어들이 이렇게 당신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부추기면 문제가 매우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지금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의 관계는 상위 1%가 나라 전체의 80%를 쓸어가고 남은 20%를 가지고 뻇느냐 빼앗기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현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사회적 지위 상 은퇴 후 자영업의 길로 들어선 대다수와 일부 회사에 남아 사원을 선발할 권력을 가진 임원이 되어 있거나 혹은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대부분 부동산 버블 때 끝물에 물려서 혹은 잘못된 주식투자나 금융기관의 트릭에 빠져 모아둔 재산을 까먹고 있는 세대들이다. 자신의 집값이, 주식자금이 곧 노후자금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언젠가 투자한 원금이라도 되돌아온다는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현실을 버티고 있다.

 

결국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공통된 부분은 회사 혹은 가게의 손익이 곧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을 가늠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내수가 침체되고 나빠질대로 나빠진 경제와 그에 따른 금리 하락, 그리고 치솟는 물가와 세금으로 인해 불안한 노후에 겁을 먹고 있으며 하도 집값 하락과 주식투자에 하소연 한 마디 못하고 자산을 털려본 경험이 있어서, 자기자산손실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피 같은 내 돈’


 

그런 기성세대들에게 보수 미디어들은 이 국제시장 영화에 가능한 큰 의미를 부여하도록 유도한다. 당신들은 이 영화를 통해서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고 지금을 살면서 그저 징징거리기만 하는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지금 그들이 받는 고통은 우리가 받은 고통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필할 것을 종용한다. 이쯤되고 보니 그냥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그로 인한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던 기성세대들을 동요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그때 당시도 마찬가지로 내 집을 갖는 것이 정말 어려운 시대였으며 젊은 시절에는 푼돈 받고 일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부당한 처우에도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만 하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 그리고 그 생각을 어떻게든 기성세대들에게 회상하도록 만들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하소연에 다시 한번 우리 때는 그거보다 더 했어라는 지극히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이 한마디의 파급효과는 세대간의 빈부격차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세대간 간극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그들의 권리 주장을 대신 막아줄 총알받이를 자청하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들은 당장 들어가는 자영업에서의 아르바이트 임금과 주휴수당에 대해 공론화되고, 집값 현실화와 부동산 정책을 외치며 빚을 내서라도 자신들의 집을 사주지 않고 버티는 젊은 세대들에 대해 내 재산을 가져갈 생각만 하는 도둑놈들이라는 적대적 감정을 갖게 됨으로서 문제 해결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인 기초경제의 반목을 만들어낼 것이다.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알바비가 아까워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다시금 젊은 세대들의 최저임금 현실화나 노동 환경 문제 개선에 대한 정책에 심정적인 반대가 이어지게 된다. 비정규직 문제는 그깟 고생 조금 하고 징징대는 꼬락서니로 보일 것이며 노동운동은 우리 때였으면 그냥 때려잡았어야 할 빨갱이들일 뿐이다. 이렇게 다시금 기성세대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변화는 결국 젊은 층도 기성세대도 아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빨대를 빨아대고 있는 상위 1%의 공고함만이 남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기성세대들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네가 겪었던 고생, 충분히 알아 

그런데 젊은 놈들은 너만큼 고생하지도 않고 저러고 돈을 달라고 하고 있잖아

그게 맞는걸까

적어도 너만큼은 고생을 겪게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네 젊은 시절이 덜 억울해지지 않겠냐고?

 


 

지금 필요한 건 마약이 아니라 항암제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의무와 부당함에 대해서는 겪기 전과 겪고 난 이후가 판이하게 다르다. 겪기 전에는 내 자신의 일로서 그 부당함을 타파하는데에 적극적이 되지만 정작 그것을 모두 겪고 이제 더 이상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이 된 다음에는 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내가 겪은 것보다 그 다음 사람이 덜 고생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 군대가 딱 그렇다. 아직도 술자리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더 부당하게 군생활을 했다는 것에 대한 자랑배틀이 벌어지고 군 문화 병영 개선에 대한 정책이 나오면 그들 중 일부는 당나라 군대냐며 그들의 처우가 자신이 있었던 때보다 나아지는 것에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단통법 실시가 공론화될 때, 이 법에 반대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실시 3개월이 지난 지금 단통법은 아직까지 큰 여론적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비교적 순항중이다. 여기에는 제 값을 다 주고 산 사람들과 제 값을 다 주고 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 값을 다 주고 산 사람들이 가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이번 단통법으로 인해 아무도 싸게 사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하면서 그동안 적대시했던 이른바 휴대전화 구입 능력자들이 손도 못쓰고 데꿀멍하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이 법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여론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미생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간극만을 집중 조명하며 비정규직이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환경만을 조명했다. 정규직이 된 수많은 동료들은 비정규직인 장그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던 차장급 간부는 비정규직인 장그래를 위해 사표까지 던지는 기행을 보인다. 드라마 혹은 만화의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픽션이라기에는 다소 힘빠지는 결말이다. 지금의 회사 환경이 주는 문제점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측은해하거나 혹은 차별하고 배척하는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측은하게 볼 정도로 비정규직의 처우가 형편없다는 데에 있다.

 

미생에서 그려지는 정규직의 모습은 정말 장그래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안정적인 모습이었는가? 정규직이라고 해서 장그래보다 더 일찍 퇴근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정규직이라고 해서 회사로부터 특별히 인격모독을 덜 당하거나 스트레스를 덜 받는 모습 역시 없었다. 어떤 정규직 사원은 아버지 환갑 가족여행을 회사의 어처구니없는 대우에 포기해야만 하고, 어떤 간부직원은 임신 출산하는 것과 아이를 보육하는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조차 조직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등 회사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옭아매는 어리석은 모습뿐이었다.

 

비정규직 장그래의 임금 통장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그들에게 낙은 단 하나, 비정규직보다 낫다는 단 하나의 우월감 뿐이다. 적어도 비정규직보다는 생존의 위협을 덜 받는다는 믿음 하나로 회사에 메여 있으면서 종신고용도 보장되지 않는 지금의 환경에서 무엇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지도 모르는 채로 회사가 자신을 갈아마시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이미 IMF를 겪었고 일본식 종신고용제 기업문화가 파괴된 이상 정규직이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정규직일 수 없다. 정규직을 고용함으로서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급여 이상으로 높지만 그만큼 정규직으로 일함으로서 회사로 인해 자신의 삶과 시간을 희생하는 비중 역시 비례해서 늘어날수밖에 없으니까 사실상 정규직 문제는 회사나 근로자 양쪽 모두에게 지금 시점에서 결코 메리트를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 향상이다.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반드시 정규직보다 동일 노동 대비 낮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법제화되어있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채용의 수요 공급 전권을 거머쥔 기업의 이익과 편리성에 의해 주물러지고 있는 것에 다르지 않기 떄문이다. 여기에는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람들의 유일한 엑스터시 비정규직보다 낫다라는 부분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회사가 준 마약 비정규직에 대한 지위적 우월감에 취해 정규직으로서의 권리 향상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스스로 꿰매버린 지금의 정규직과 기성세대 임원들의 반 상생적 관념 역시 일조하고 있다.

 


기업들은 달라진 경영 환경에서 비정규직이 필요하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이 만약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같은 임금이었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결국 그들은 달라진 고용 환경을 핑계로 단가가 하락할대로 하락한 비정규직을 더 싼 인건비로 채용할 수 있는 환경만을 바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과 품위 그리고 지금까지 회사에서 살아온 권력과 짬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발밑에 깔고 갈 정규직이 몹시도 필요한 사람들이다. 비정규직은 그런 정규직을 달래주기 위해 먹이는 사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것이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아먹을 정규직이 없으면 회사는 밑받침 뿌리가 없이 꼰대 간부들만이 설치는 망조 직전의 회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원이 하나도 없는데 대리가 어떻게 대리일 수 있으며 과장이 과연 지금의 과장이 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한층 한층 무너지면 사장은 더 이상 사장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온다. 아무도 일은 하지 않고 일은 할 줄 모르면서 시킬 줄만 아는 자들이 간부로서 돈만 받아가는 회사, 그런 회사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누구도 회사를 위해서 희생하지 않고 돈만 챙기고 책임감 없이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준비가 충만한 사람들로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한 회사가 말이다.

 


우리가 주장해야할 것은 전 인구의 정규직화가 아니다. 같은 임금이라도 보다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떤 회사든지 간에 내가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하고 쉬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인생의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미생을 보고 해결하겠다는 얼빠진 소리 대신에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느끼게 만드는 문제들을 철저하게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할것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부러워하는 만큼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부러워하는 상호간의 장단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데에 정부가 아닌 기업이 스스로 나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규직이 되어서도 인생 자기결정권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육아휴직과 안식년, 연차의 자유로운 사용 등 보다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시키는 무리수보다 단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파급효과만으로 말이다.


...

 

인생 자기결정권

 

지금의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의 적은 임금만으로는 결코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인생결정권을 갈아넣고서라도 정규직으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그런 그들에게 날아오는 혹독한 정규직 회사생활은 응당 견뎌야할 필수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저 그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밀려나면 더 나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못하고 심장에 고름이 쌓여가면서 말이다.


 


기성세대들은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영화 국제시장은 그런 그들에게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론들은 그런 기성세대들에게 젊은이들도 너와 같은 고생 정도는 거치고 너정도는 살게 해주어야 공평하지 않겠어? 그래야 네가 덜 억울할 것 아냐?라며 그들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공평하게 갈아넣는 것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며 유혹하고 있다.

 

전 국민이 인생 자기결정권을 포기하는 날이야말로 지금의 1%기득권 축제의 날이 될 것이다. 회사가 필요한 시기에 결혼하고 회사 일에 지장 없는 시기에 애를 낳고 애를 기르면서 회사 일에 지장이 없어야 하며 내가 몸이 아파도 회사에 나가야 하며 모든 일에 회사가 우선시되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나의 생활, 취미, 인생 철학, 가족과의 화목함 등이 하나 둘씩 회사에게 갈아먹히며 살아간 뒤에 남은 인생조차 보장해줄 필요가 없는 1%의 파라다이스 우리는 어쩌면 얼마의 돈을 주고서라도 살 수 없는 20 30 40대에 누려야 할 다시 못 올 그 순간들을 회사에 갈아먹히면서도 그에 대한 응당한 대가조차 외치지 못하고 숨죽여 살고 있지는 않았는가? 아니 그렇게 숨죽여 살도록 방치한 정부는 없었는가? 그렇게 숨죽여 사는 사람을 마음껏 갈아마실 수 있도록 해달라며 정부에게 침묵과 방관의 대가를 지불한 1%는 없었는가?





...

 

2015년의 대한민국은 인생 자기결정권을 헌법이 보장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거 어렵고 거창한 일 아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위 하 동일 노동을 했을 경우 동일 임금으로 임금 차등을 없에는 것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인생자기결정권이라는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권리, 내가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가치가 향상될 때 비로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것이다. 그것을 오롯이 희생하고 들어온 정직원에 대한 대우도 당장의 비정규직 차별로 인한 일시적인 우월감을 주고 갈아넣는 재료로 보는 지금의 시각보다는 훨씬 더 인간다워질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미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당한 기성세대들에게 고작 영화 한편으로 자기위안을 벌이라며 부추기는 작태는 때려치우고 적어도 몇십년간 정부를 믿고 하라는 대로 이 나라으 밑바탕에 자신의 인생을 갈아넣어준 기성세대들에게 OECD 사상 최고수준의 노인빈곤률로 되갚는 변태짓거리로 보답하는 짓거리보다 진정으로 그 인생 자기결정권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희생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야만 한다. 혹여 그들이 갈아먹힌 대가가 엉뚱한 새끼들한테 처먹혔다면 토해내게 만들어서라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세대간의 반목 조성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총구를 세대끼리 겨누게 만드는 작태는 이제 작작 집어치울때도 되지 않았는가?

 

인생 자기결정권은 임금 몇십 %정도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가격에 팔지도 말아야 한다.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정규직 근무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라, 비정규직만 못한 정규직의 대가를 임금차이로 퉁치고 인간으로서의 인생을 너무 쉬이 포기하지 말지어다.

 


모쪼록 새해에는 그대들의 인생이 오롯이 그대들의 것이길 바란다.



2015.1.5

Rusham

posted by RushAm 2012. 8. 21. 04:15

<?>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도전중인 취업준비생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라는 곳은 지금까지 제가 있었던 학교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대학을 처음 고르고 공부를 할 때는 제가 직접 학교를 고르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던 공부를 멈추고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었잖아요. 근데 회사를 보면 짤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상사에게 조아리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아요. 싫은 소리도 함부로 못하고, 대체 회사라는 곳은 어떤 곳인건가요? 회사에 들어가면 특정 사람들에게 내 인생을 저당잡혀 살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

 

먼저 회사는 한자어에요.

모일 회에 일 사짜를 써서 모여서 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원래 의미 그대로 회사는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을 말해요. 이 단어에는 지금 학생이 지적했던 조직의 상하관계에서 일과 관계없는 불필요한 머리 조아림의 의미도 담겨있지 않고 싫은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억압적인 카스트 관계도 뜻에 포함되지 않아요. 한마디로 지금의 회사라는 곳은 말만 회사지 전혀 다른 조직이 되어있다는 결론이 되죠.

 

공동체 사회에서 회사 즉 모여서 일한다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했어요. 왜냐하면 모여서 일을 하면 보다 큰 일을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게 되니까 가내수공업 수준의 일이 뭉쳐저 하나의 산업화를 이루게 될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영국 산업 혁명 이전에는 지금의 명품 잡화 브랜드들의 전신이었던 1인 회사 시스템 이른바 자영업 형태가 거의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사회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던거죠.

 

몇백년에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세계적인 명품 잡화 브랜드들도 대부분 이런 작은 가내수공업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닥치듯 벌어진 영국의 산업 혁명은 이런저런 문명의 발달에 의해서 이루어지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모여서 대량생산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서 발로된 것이었다고 해도 무방했을거에요. 식민지는 늘어났고 원자재 물자는 늘어났는데, 이 원자재만을 판매하기에는 너무 이해타산이 맞지 않았고 이를 일종의 촉매제라고 판단한 자본가들이 사람들을 모아서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조직 체계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한게 현대 회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자본가에 의해서 회사가 설립되고 그 뒤에 노동자를 모으는 과정 자체, 그리고 본디 왕권주의 국가였고, 수많은 식민지를 노예처럼 거느렸던 영국이 만들어놓은 이 회사 조직의 근간이 건전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공화정이 되었어도 입헌군주제의 반쪽 공화정이 된 영국 계급사회가 뿌리뽑힐리 없었죠. 당연히 자연스럽게 회사를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지 않아요. 임금 체불이나, 질 떨어지는 음식을 배식하는 정도는 양반이고 생산 라인 천정 높이를 허리를 펼 수 없는 높이로 맞춰서 쉴 틈을 주지 않는 등의 일화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이렇다할 토를 달 수가 없었어요. 이미 사회는 가내수공업만으로 먹힐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기때문에 이 회사에서 내가 쫒겨나게 된다면 가족을 부양할 길이 막막했던거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아무 기준도 없이 던져진 공화정의 첫 정치적 시험 모델에 의한 희생양들이었던 셈인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이 그 자본을 노동력으로 환산해서 노동자에게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다보니 당연히 자본을 가진 사람의 카스트가 더 높게 형성될수밖에 없고, 자본을 가지지 않은 노동자들은 이에 대항할 수 없었던거에요.

 

그래서 노동자들은 불만을 가진 다른 노동자들과 모여 한 목소리를 내고 집단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본에게 맞서게 되는데 이게 지금의 노동조합, 즉 노조의 원형이에요. 당연하겠지만 자본가는 자신이 투자한 자본이 노동자들에 의해서 시간에 맞춰 더 불어나지 않으면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 권력과 같은 눈높이에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노동 조합의 요구는 당연히 자본가가 돈을 버는 데에 우리의 노동력이 더 높은 가치를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거에요. 임금 인상 혹은 근로시간 단축이 핵심인거죠. 우리의 노동시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 주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던가 지금과 똑같은 돈을 줄 거면 노동시간의 가치가 더 비싸졌으니 우리는 그만큼 더 적은 시간을 일할거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요. 사실 지금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노사간 협상 쟁점은 큰 틀에서 보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이 두 가지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마치 사필귀정처럼 이 산업 혁명 속에서 엽기적인 형태로 희생당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이후 세계 최고의 퍼주기식 보상 복지 정책을 누리게 되요. 국가경제의 발전에 대한 지분 요구가 가능했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가피한 과거가 있었으니까요. 그 유명한 영국병의 등장 역시 이같은 반인륜적인 지주들의 산업 혁명에 따른 댓가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치룬 어쩔 수 없는 역사였을거에요. 그런데 이 영국병이 생길만큼 복지가 나아졌다고 해서 회사 내의 전통적 계급사회의 잔재가 완전히 걷혔다고 말하기는 힘들었죠.

 

영국병 창궐로 인해 노동자와 지주 계급이 한번 뒤집힌 후에야 간신히 잡힌 양측의 평등 균형으로 모든 게 해결되었을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어요. 세계 금융의 중심인 영국 은행들은 복지 리스크가 심해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는 자국 기업에 더 이상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지 않았고 기업은 부실해졌으며, 노동자들은 부실한 기업 속에서 제조업 노동자를 업신어기는 등의 자체적 카스트를 만들어버리고 말죠. 자본가 카스트가 몰락하고 노동자에게 권리가 돌아왔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했던 건 결국 자기들 내에서의 차별을 통한 우월감 조성이었다는거죠. 한마디로 입헌군주제를 포기하지 않는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성공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몰라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살기 좋다며 칭송받는 유럽의 복지는 끔찍한 희생에 대한 자연스러운 보상이었어요.

 

 

 

영국으로부터 비교적 이른 독립을 완성한 미국의 경우는 영국과는 문제가 조금 달랐어요. 바로 흑인이라는 존재였죠.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노동력은 포기할 수 없었는데, 이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줄 생각은 에초에 없었어요. 18세기 초 진즉에 흑인 노예 해방을 단행했던 서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표면적인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고 그나마 '공화정'하에서 이루어진 노예 해방 선포가 사회적 강제성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미국의 거의 모든 산업에서의 '하찮은 일' 즉 노동자 계급은 흑인들 차지가 되어있었고 암묵적으로 공고해진 인종차별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거죠. 당연히 미국의 노동운동은 흑인들의 해방운동과 권리 찾기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해야했던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이 영국처럼 원활하게 될 리가 없었어요. 에초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평등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팽패했죠. 이렇게 한번 떨어진 인식은 자본가들을 기고만장하게 했고 미국에서는 수많은 노동 운동과 노조가 자본가들에 의해 힘으로 탄압을 받게 되요. 노조는 폭력으로 제압당하기 일쑤였고, 법은 이를 제제할 어떤 장치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의도적인 방관을 일삼았어요. 처음부터 노동자의 계급을 최하층으로 규정했으니 이들을 구제할 생각이 없던 게 당연했던거죠.

 

생동성 실험 알바 해보신 분 있나요? 그런데 이들이 맞는 건 백신이 아니라 매독균이에요.

 

그런데 미국이 금융위기와 대공황을 거치면서 와그너법이 제정되었고 노동자의 권리가 일면 상승하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의 질떨어지는 노동은 흑인들 차지였어요. 이게 영국이랑 다른 점은 에초 영국은 뭐가 어찌되었던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한 노동자의 권리 찾기에 주력했지만 미국에서의 노동자들은 에초 다른 인종이라는 어떤 넘사벽의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권리를 찾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흑인을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흑인이 백인의 영역 즉 '지주'의 영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흑인은 노동자가 될 수 있지만 사장은 될 수 없고, 도시의 시장도, 대통령도 될 수 없도록 하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들끼리 살게 만들었던 게 미국의 인종차별이었어요.

 

임금 문제로 까불다간 태워죽였다네요.

 

미국이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마틴루터킹의 공민권과 더불어 짐크로 법이 폐지되면서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되었어요. 아니 법으로 인종차별을 허용했던 게 폐지되었다고 보는게 맞죠. 미국은 아예 흑인들의 사회적 차별을 법적으로 허용했던 나라였어요. 그런데 이게 풀렸다고 자본가들의 '그들만의 리그'만들기가 사라진것은 아니었어요. 인종차별이 사라지니까 이제는 인종 차별에 가난까지 더해 아예 가난한 계층이 자신들의 계층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것을 제한하는 시스템을 구상하기에 이르러요. 한마디로 부자인 사람들은 계속 부자일 수 있도록, 정치와 경제가 유착관계를 벌여 서로 공존할 수 있도록 기부와 혜택을 주고 받게 된 거죠. 금융자본의 독점으로 인한 일하지 않는 자들의 부의 축적, 지금의 99%운동도 여기에서 촉발되었던 거에요.

 

 

 

 

 

왜 이렇게 장황하게 다른나라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는지 아직 잘 모르시겠다고요?

 

그건 우리나라의 회사라는 곳이 애석하게도 이처럼 전혀 다른 노동운동의 과정과 결과를 가진 영국과 미국의 가장 안좋은 부분을 따와서 합쳐놓은 형태가 되어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의 회사는 미국의 시스템을 베이스로 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에초 단일민족이라서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자본가들은 일단 노동자 계층을 만들고 그들이 절대 자본가를 넘볼 수 없는 갖가지 사회적 제한 장치를 만들어두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하는 순간 자본가들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흑인들을 탄압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처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거죠.

 

그런데 이런 미국 시스템을 베이스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 회사가 롤 모델로 삼았던 기업들은 대부분 일본 기업들인데요. 일본은 입헌 군주제이기때문에 의미적으로 매우 닮은데다, 처음 문물을 받아들인 영국의 기업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영국의 노동자 착취와 그에 따른 보상으로 파격적인 복지 혜택을 내세운 후유증까지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고, 회사 내 자발적 계급사회 구축까지 거의 완벽한 영국식 모델을 정착시킨 나라인거죠. 그런데 이 모델을 이미 미국식 베이스로 사회 문화를 짠 한국에 짜맞추다보니 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가 아닌 나라에서 회사 내 계급사회를 볼 수 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낮은 노동자를 차별하는 미국식 노동자 차별의 잔재가 남아있으니까 계급별로 서로 차별하고 차별당하며 그것을 당연시하는 어처구니없는 회사 문화가 정착되어버리고 말아요. 여기에 그 계급사회의 위에 있는 자본가들은 그 계급사회와 철저하게 선을 긋고 계급사회와 별도의 사회를 구축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미국의 인종차별에서 촉발된 문화를 정착시키기까지 했어요.

 

 

 

아휴 더러운 비정규직 새끼들과 같은 자리에 앉기 싫어요~!

 

우리나라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가르치면서도 회사 내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계급화시키고 비정규직은 일용직, 파견직을 계급화시키고 차별해요. 대학생들이 벌이는 무개념 행동들 중에 학교 청소용역노동자들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동영상이 간혹 화제가 되는데 바로 이런 기형적인 문화가 낳은 현상인거죠. 그렇게 차별하면서 얻은 계급의 최정점에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게 만든 자본가들에 의해 명예퇴직을 당하거나 임금피크제로 더 이상의 계급 상승을 억제당하고 말죠. 그렇게 사회는 반복될거에요.

 

우리나라의 회사들은 미국과 영국 혹은 일본의 자본가와 노동가가 만든 회사 문화 중 자본가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서 섞은 회사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회사 문화는 백약이 무효에요. 영국이나 일본은 입헌군주제라는 배경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 내 계급체계를 타파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할 수 없는 완전한 공화국 사회이고, 미국의 노동자 권리 상승 모델을 가져오기엔 에초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에서 촉발되었던 그들의 사정과는 전혀 다른 상황일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의 모델로도 지금의 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한국 회사 문화가 만든 사회의 우울한 단면인거죠.

 

1960년데 짐크로 법이 폐지되고 노동조합의 권리가 높아지자 미국의 마피아는 이 노동조합들을 장악하며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어요. 한때 미국 정부는 마피아를 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노조의 활동에는 짤없이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동 운동은 인명이 죽어나갈만큼 매우 과격했었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회사 내 갈등에 대해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가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사실상 방조하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지도 몰라요. 노동자는 범법자라는 인식도 아마 여기에서 촉발되었겠죠.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데도 말이에요. 설마 그때 미국의 부패한 경찰들과 자본가들처럼 지금 정부가 자본가들에게 돈을 받고 노조 탄압을 묵인했을리는 없을거에요. 암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회사는 모일 회, 일 사로 만들어진 단어에요 영어로는 COMPANY인데, 이것도 모여서 일한다 혹은 모인다라는 의미 이상을 담고 있지는 않아요. 모여서 일을 하는데에 처음부터 계급이 있고 가져가는 이익이 정해져 있을리는 없어요. 자본의 가치만큼 시간과 인생을 들여 쏟는 노동의 가치도 그에 버금가죠.

 

사람이 모여요. 같이 일을 하기로 해요 제각각 재능이 다르죠. 누군가는 경영을 잘하고 누군가는 힘이 세서 일을 잘하고 누군가는 언변이 좋아서 영업을 잘해요. 이 셋의 능력 중 어떤 게 비싸고 어떤게 싼 능력인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어요. 당연히 그 셋 중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자신과 다른 두 사람의 능력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고요.

 

수익이 생기면 수익을 배분해야 해요. 당연하겠지만 처음에 돈을 만지게 되는 건 경영쪽을 잘하는 친구겠죠. 그 순간 권력이 생겨요.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에게 지금 100원의 수익을 올렸지만 사실은 10원밖에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속이거나 혹은 100원의 수익을 지금 올렸지만 회사가 조금 더 크기 위해서는 이걸 지금 당장 나누는것보다 일단 회사의 공동자산으로 해두고 나중에 더 크게 불려서 나눠갖기로 해요.

 

 

그런데 이 돈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경영을 담당하는 친구만 알게 될 수 밖에 없으니 경영을 담당하는 친구는 회사 사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 즉 다른 친구들에게 수익이 잘 돌아가지 않는 쪽으로 꾸며내거나 혹은 서류와 법적인 절차를 통해 회사 자체의 공동 자산에 대한 소유권 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바꾸기도 해요. 이렇게 되면 다른 친구들에겐 회사에서 나온 이익에 대해 내가 생각한 만큼의 돈만 주면 되지만 나는 회사가 내고 있는 수익 대부분을 먹을 수 있게 되는거죠. 다른 두 친구는 평생 경영하는 친구가 정해놓은 돈만 받으며 살게 되지만 경영하는 친구는 정말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 부를 축적한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혹시라도 이런 불공평하고 떳떳하지 못하게 번 돈을 의심할까봐 이 돈 중 일부를 정부에게 나눠주고 이들이 내가 가진 비밀을 알지 못하게끔 하는 한편, 이 친구들이 나한테 반항을 하면 불법적인 수단을 써서 막아도 내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게 되요. 자신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싶었던거에요.

 

 

...우리나라에서 회사라는 존재는 이미 모여서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영을 하고 돈을 가진 사람이 일방적인 권력을 가지고 모여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평등권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게끔 시스템을 손본데다가 다른 나라에서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삼았던 파격적인 복지 정책이나 정부 차원의 차별 금지법 신설조차도 자본으로 막는 이기주의의 극이 어디인지를 잘 보여주는 최악의 집단이에요.

 

갑이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될 줄이야...

 

...우리나라의 정부라는 존재는 회사가 이런 최악의 집단이 될 때까지 방조했고, 당신의 가족 부양과 노후를 도의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정책을 많이 써가면서 기업이 당신의 가족과 노후를 볼모로 당신을 착취할 수 있도록 꾸준히 어시스트를 하고 있어요. 국민에게 서비스를 한다며 당신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자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서비스 마인드로 당신을 좌절에 빠뜨리는 최악의 집단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콤비에요.

 

 

당신은 취업을 해서 회사라는 집단에 들어가는 동시에

이런 새끼들이랑 평생 싸워야만 하는거에요.

 

...

 

당신은 지금 당신의 생활을 위해서 고맙게도 돈을 주는 자선단체에 봉사를 하기 위해 입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능력을 응당 필요로 하는 조직과 그 조직의 돈을 필요로 하는 당신 사이에서 그 능력을 두고 거래를 위한 흥정을 해야 해요. 그것이 취업이라는 작업인거죠.

 

대부분의 채용 공고에는 그들이 원하는 당신의 연봉이 쓰여져 있지 않아요. 철저하게 감추죠. 당신은 그 공고에 써 있는 '이력서에 반드시 희망 연봉 기재'라는 항목을 보고 얼마를 기재해야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요. 왜 이 녀석들은 자기들 패는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내 패는 먼저 보고 사기도박판 장난질을 일삼으려 하나? 이런 회사는 면접 안 봐도 뻔하다라는 당당함으로 맞서야죠

 

 

입사한 뒤에도 언제나 당신은 계약 당시 약속했던 것들이 잘 지켜지는지,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째서 제대로 지키지 않는지, 내가 계약 사항을 위반한 사실이 없는 만큼 당신들도 계약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내 능력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세요. 그들은 '인맥'이니 '이 업계는 좁다'는 식으로 자신들에게 어느 정도 봉사를 하지 않으면 업계에서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려 이직을 어렵게 만들거라는 협박을 일삼을거에요. 만일 그런 이유로 타사 이직을 제한하고 평판을 떨어뜨린다면 충분한 자료를 수집해서 경찰에 신고하세요. 직장내 협박 공갈로 충분히 처벌받은 사례가 있어서 고소가 쉬울 거에요. 같은 예로 직장 내 계급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신적 폭력 행위도 충분히 처벌 판례가 있으니까 그런 느낌이 감지가 되는 즉시 권리를 찾으면 될거에요.

 

...라는 생각은 반드시 머릿속에 두고 취업을 준비하세요. 잠시 분위기에 휩쓸려서 회사 조직의 거대함에 잠시 물들어버릴지라도 나는 이 회사에 고용되어 생계에 대한 목숨이 걸린 일을 하는게 아니라 회사와 난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엮이는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사에 아쉬워함을 버리세요. 회사는 지금 필요없는 인력을 국가가 억지로 강요해서 뽑아놓고 돈 주는 게 아니라구요. 아니 설령 국가가 억지로 강요해서 뽑는다고 해도 그 강요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인거에요. 회사는 면접이라는 작업부터 당신의 멘탈을 통째로 갉아먹으며 너 따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지만 니가 운이 좋아서 이 회사의 녹을 받아먹게 되었으니 고마운줄 알라는 식으로 당신이 가진 능력을 극한으로 폄훼할거에요. 절대 휘둘리시면 안되요.

 

 

 

 

 

끔찍하지만 건투를 빌게요.

 

 

 

당신의 삶에

승리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3장

- 끝 -

 

posted by RushAm 2009. 9. 24. 08:44
본격 공채 시즌이 다가오면서 취업난 기사들이 또다시 재생산되고 있다. 안 봐도 읽혀진다. 대기업 공채 작년에 몇 분의 몇 수준으로 축소되고 어디는 몇십대 몇 경쟁율, 토익시험에 매달리는 SKY도서관 풍경 취재하고, 조중동은 또 높아진 취업자들의 눈과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교차취재할것이다.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취업난이지만 이미 이쯤 반복되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충분히 파악할 법한 취업시장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팩트에 접근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진짜 들어봐야 할 취업 준비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볼 생각은 안하고 자신들 머릿속에서 인터뷰 다 끝낸 편견 가득한 상식을 기사에 담는데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설문 형태의 20세기적인 단순 데이터 조사도 여전하다.

한국은 '대학'이라는 취업 매개체를 위해 고등학생, 좀 심한 경우 초,중학생때부터 이른바 좋은 라인을 타기 위해 노력한다. 인서울이 반드시 좋은 취업을 보장해주는 시대가 아닌 시대임에도 어쨌든 아직 확율은 미미하게나마 그쪽이 조금 더 있으니까, 일단 학과나 전공과는 상관없이 대학 타이틀을 따내기 위해서 노력한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졸업할때 조금이라도 기업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학점을 열심히 따고 B가 나오면 학교에 돈을 좀 더 주는 한이 있더라도 재수강을 신청하며 대학의 배를 불려준다. 토익 역시 실질적인 영어실력이 어떻게 느는지보다는 일단 점수를 잘 내기 위해 쪽집게 학원에 몇백만원씩 투자하고 기업에 따라 봉사활동이나 해외어학연수, 인턴 등의 활동 역시 게을리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모든 게 '학생 자발적으로 생각한 자기개발' 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학창시절에는 선생님에 의해 대학생때는 교수님에 의해 그리고 기타 취업 준비할때는 기업에 의해 '지시받은 부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어쨌든 궁극적인 GOAL이 '취업'이 된 현실에서 결국 취업으로 가는 한단계 한단계를 내비게이션 받은 셈인데, 이 내비게이션을 모두 철저히 수행한 학생들조차 '취업 티켓'을 거머질 수 없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왜 정부가, 회사가, 학교가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취업이 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시작되는 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수동적인 자기개발에 익숙해지도록 만든 학교와 익숙해진 학생이 할 수 있는 건 사회가,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밖에 없었고, 이런 내비게이션이 결국 취업 시장의 언벨런스를 가져온 것이다.

우선 정부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부가 지금까지 하는 일은 '정부보조 기술교육'과 '노동부'에서 주관하는 취업 촉진 정책, 그리고 교육 정책 정도가 전부인데 이게 모두 손발이 안맞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정부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정권 내에 어떻게든 수치적인 취업율을 높이는'게 문제가 아니라 취업의 질이라는 말을 없에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최근 언론들이 요구하는 '취업의 질적 측면'을 향상시키자는 구호에 따른 것인데, 그 질이라는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 결국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준하는 대우가 되는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즉 정부는 임금 문제를 제외하고 적어도 이 회사에 들어와서 내가 어느 정도 노력만 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어도 정부가 뒷받침해줄 수 있는 4대 보험이나 출산휴가, 유급휴가, 임금 문제, 야근수당 문제를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기업을 막론하고 모두 일원화시키는 정책적 일관성 유지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내가 직원수 10명 이하의 신생 벤처기업에 들어가더라도 정해진 시간만 근무할 수 있고, 야근을 하게 될 경우 야근수당을 정해진 대로 지급받고, 유급, 출산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만일 이게 모든 기업에 있어 적용되기 힘든 무리한 정책이라면 정책 자체를 손봐야 한다. 어떤 기업은 정해진 정부안대로 하고 어떤 기업은 무시하는 풍토가 계속되는 지금의 현실이라면 앞으로 정부가 어떤 좋은 정책을 내세우더라도 따르는 기업만 계속 따르게 되고 그 따르는 기업의 사정에 맞는 선심성 정책만을 남발하게 되는 정부와 그 정책을 따르는 기업만을 선호하게 되는 일자리의 질적 가치 악순환이 반복될것임이 자명하다.

정부는 국민과 기업 사이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고 무엇보다 '인권'적인 문제에서 정책을 만들어야만 한다. 즉 지금의 경제 상황에 맞는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떤 정책을 써야하는지를 고민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취업 문제만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중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기업'의 목소리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정부의 '국민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달콤한 정책' 을 따라야 하는 데에 대한 부담을 하소연하고,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지금의 최저임금제도와 비정규직 보호법을 유지하면 기업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정부는 이에 귀를 기울여 아직 노동 환경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대부분 동결시키고 최저임금 제도를 폐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는 등 '기업의 입맛'을 맞춰주기 위해 열심히다. 왜냐하면 그들 정권은 5년 단임이고 성과를 낼 수 있는 건 국제적으로 수치가 드러나는 'GDP', '국가경제순위' 정도일테니까, 정부마저 수치적 성적지상주의를 보여주고 있으니 윗물이 썩었다고 보는 게 옮겠다. 여기에는 아직도 70년대식 '수치적 경제'살리기 떡밥이 먹혀 휘둘리는 서민 유권자들의 무지도 한몫을 하고 있지만 지금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니까 이 이야기는 깊게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즉 정부는 지금 기업에게 끌려가야만 하는 정부의 위상을 역전시켜야 하는 대업을 치루어야 하지만 자신들의 정권 내 성적과 무시할 수 없는 정치자금에 대한 보상 의무감으로 인해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국민의 희생'을 택하여 어떻게든 이 문제를 자신의 정권이 아닌 차기정권으로 넘기고 5년동안 잡은 정권이 누리게 해주는 특혜만 열심히 취하는 체리피커틱한 생각만이 가득하다. 게다가 이 문제를 건드린다고 해서 누구 하나 지지해주는 쪽도 없기 떄문에 더더욱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조중동의 서민들 선동이 한 몫 한다) 그러나 이런 하소연은 '정부'가 할 수 있는 변명조차 되지 못한다. 정부의 위상을 기업 아래에 있게 만든 건 다름아닌 정부 자신들이니까, 해결 역시 전적으로 정부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 정책에 대해 기업 혹은 자영업쪽에서 예상되는 불평 중 하나가 '형평성'이라는 단어다. 대기업 기준으로 만들어진 복지 정책이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장에 적용되기에는 너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지키지 못한다는 법규는 대기업이 보장하는 '출산휴가'나 '4대보험'이 아닌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등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운용되고 있는 물가와 OECD에 맞는 삶의 질적 최저한계선'에 맞게 규정된 부분을 못지키겠다는 하소연하고 있다. 그걸 지키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단다. 정부 말대로 하면 회사 문 닫아야 하고 가게 문 닫아야 한단다. 정부의 반응은 '아 그러면 일단 생각좀 해보겠소'라고 몇개월째 고민만 해댄다. 무려 '삶의 질'을 최우선시해야 하는 정부가 '삶의 질'과 관련된 최저기준법을 가지고 '고민'씩이나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출산휴가나 4대보험 등 정부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만든 몇 가지 법은 현실에 맞게 손질이 가능하다. 기업에 지나친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현실에 맞지 않게 노동자들에게만 유리한 법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정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직접 현 경제 수준과 물가 수준을 수치적으로 분석해 만든 '이 나라에서 살기 위한 최저생활기준'에 관련된 법은 깨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민의 대상조차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만들어놓은 지금의 물가 수준과 경제 수치가 기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되니까, 결국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경제의 블랙홀로 스스로 끌고 들어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 경영자로서는 최악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만일 '최저생활기준'과 관련된 '최저임금'과 '비정규직'과 관련된 법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사업자'라면 기본적으로 '경영'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장논리에 의해 퇴출되어야 함이 옮다. 이쪽이 경제 전반의 건전성 향상에도 좋다. 정부가 정한 최저생활기준과 관련된 수치는 단지 인권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경제 수치 (물가)를 감안해서 정해진 수치이므로 중소기업은 물론 자영업자들이라 할지라도 '경영 상의 패착'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최저임금이 높은 만큼 시장의 물가도 그만큼 높기 때문에 자영업자든 중소기업이든 시장에서 벌이들일 수 있는 수익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만큼의 수익을 벌어들이지 못했다면 그것은 경영의 문제이지 최저임금법때문이 아닌 것이다. 물가가 오른 만큼 최저임금법도 오르고 자영업자라면 물가가 오른 만큼 같은 물량을 팔았을 때 돌아오는 수익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은 당연할테니까 즉 그들의 수익이 이전에 비해 줄었다면 그것은 최저임금이 높아진 탓이 아니라 예전에 10개 팔던 게 8개밖에 팔리지 않았거나, 같은 업계에 진출하는 매장이나 공장이 그만큼 늘어 출혈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던지 둘 중 하나다. 이는 자연스러운 자유경제체제의 순기능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영업자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진출은 인정하면서도 퇴출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냉정해져야 한다. 생존권은 '자영업'에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현재의 식당처럼 특정 업계 자영업자나 공장 비율이 국민소득과 인구 대비 너무 방대해져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들은 자유경쟁 시대에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선택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정부가 예외없이 인식시켜야 한다. IMF로 인해 현존하는 자영업자들의 대부분은 '자영업에 대한 아무런 연구나 분석, 포부'없이 그저 가진 능력이 없이 퇴직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이런 경쟁력 없는 자영업자들은 결과적으로 시장경제에서 생존경쟁력이 대부분 저조할수밖에 없다. 게다가 '20세기 기업의 후진적 복지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세대들이기에 이들이 고용자들에게 대하는 대우는 현실에 맞지 않는 전 근대적인 발상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도 답답한 부분이다.

그들이 고용자들에게 말하는 말 중 대부분은 '우리 때에는...'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결국 자신들이 실직 이전 상사에게 굽실거렸던 굴욕에 대한 보상을 자영업자의 업주로서 고용자들에게 그대로 보상받으려는 이른바 '사장 대우'를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이들은 아무것도 안하는 '사장'에 대한 이미지가 굳어져 경영 부실에 대한 책임이나 노력을 거의 하려 하지 않고 IMF당시 실직의 원인을 제공했던 정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식으로 생존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계층은 경제의 건전성에도 수치적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정부는 '최저임금'과 관련된 어떠한 요구도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노동 환경을 희생하여 얻는 수치적 경제 효과는 결국 인력의 질적 저하라는 악순환을 통해 다시금 정부에게로 그 화살이 돌아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배경에는 '세금'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결국 최저임금을 하향조절한다면 세금을 줄이는데에도 손을 대야하는데 지금까지 세금이 줄어들었다는 뉴스는 한번도 들린 적이 없지 않은가?

이는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법인과 사업자들에게 아주 '공평하게'적용되어야 한다. 경영 개선에 대한 노력이나 시장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 등 경쟁에서 도태되는 기업은 과감하게 퇴출시켜야 한다. 이게 불공평해보이는가? 대한민국은 이게 당연한 국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자유경쟁은 자유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은 당연할테니까 말이다. 이미 취업 준비생들은 이런 경쟁을 과하다 싶을 만큼 치루면서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인재를 생산해내기 위한 자정노력이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주고 있는데 어째서 법인과 사업자들만이 이러한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미 취업자들은 기업들이 정한 '최저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는 등 능동적으로 움직이는데 어째서 법인, 사업자들은 최저기준에 미달되어도 지금 위치에서 꿈쩍도 안하고 먹여 살려달라고 (사업자 자격을 유지시켜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가? 정부는 이들에게 아주 공평한 절대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기업, 사업자는 퇴출시켜 양질의 기업과 우량한 사업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정한 '최저생활기준'가지고 불평하는 기업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정부가 속속 진행하는 '근로환경개선'에도 보다 유연해질것이며 시장의 건전성도 향상될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장의 기형적인 포화가 원인인 자영업자들의 경영 환경 개선에 대한 해결책도 이쪽 이외에는 근본적인 답이 전무하다.

정부의 이같은 정책 기조가 유지되고 기업들이 '불평'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지지 않는 '절대권'의 가치를 갖게 된다면 장,단기적으로 뿌리박혀있는 취업난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노동자의 삶의 질도, 시장경제의 건전성도 모두 잡을 수 있는 보기에는 참 단순한 이것이 안되는 이유가 결국 정경유착에서 나온 패착때문이었다니 한숨이 나오지만 이는 현 정부의 무능함을 탓하기 전에 그런 정부를 택한 국민들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최근 50여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젊은 층의 투표율 증가였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젊은층에서 '정치'가 결코 자신의 삶과 인생에 무관하지 않음을 지난 정권에서 뼈아프게 절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부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그 정부를 만들어가는 것이 다름아닌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말자, 우리나라 시스템은 어쩔 수 없이 한번 뽑으면 5년동안 국민들이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도중에 결과를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만큼 심각한 문제를 투표일만 가까워오면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뽑을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참가하지 않거나 단지 내가 뽑은 사람이 당선되는 것이 폼새가 난다는 이유로 (이런 이유로 현 정권을 지지하고 현 집권당을 지지하는 젊은 층을 정말 수도없이 많이 봐왔다) 아무 생각없이 투표하는 세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정부편에서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취업난'에 대한 해답이다.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생각하고, 그 생각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회가 나를 바꾼다는 것 잊지 말아주기를 꼭 당부하고 싶다. 그리고 아울러 '정권 연장'과 '표', '정치 자금'을 위한 정부가 아닌 '나라를 위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어주길, 그리고 앞으로 그런 정부가 나와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비정규직, 88만원 세대, 청년실신, 취업난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목차

1부 (정부) 편
2부 (기업) 편
3부 (학생) 편
4부 (일본)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