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09. 9. 29. 13:25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 싸움이 나거나 어느 한 쪽이 집단괴롭힘을 당했을 때 피해자 학생이 학교라는 조직 내 위협을 무릅쓰고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고하면 선생님의 대처는 크게 두 가지였다. 괴롭힌 가해자를 불러와 피해자 눈앞에서 체벌이나 구타를 하고는 갑자기 억지로 화애를 시키고 평화롭게 마무리시키는 것과, 일단 전후 사정을 듣고 (가해자를 따로 불러서 그쪽 이야기도 함께) 무자격 법조인이 되어 자기 가치관대로 판단하여 '니가 맞을 짓을 했다'는 식으로 무려 '교사'가 자의적 판단에 의해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가르치는 어이없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교사에게 불만을 가진다 한들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아직 학생의 권한으로 교사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교권침해'에 대한 우려로 제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라면 이유없는 전학 정도가 전부인데 전학생이 늘 환영받는 것도 아니고 타지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어려움과 더불어 '결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전학 자체가 해결책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포트'라는 역할은 그 자체가 사실 쉬운 역할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준비가 너무 소흘한데다가 에초 '인식'자체가 '중립'은 반드시 착한 결론이 나와야 한다고 '이솝우화'에서 새뇌시켜놓은 탓인지 언제나 '실리적'인 해결책보다는 '도덕적'인 해결책에 집착한 나머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잦다. 문제는 이 도덕적인 부분이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천대받고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도덕적인 무엇도 실리적인 근본도 없이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만 일을 판단하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의 이타적 개인주의가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예로 '군대'문제를 보면 그 이기심이 극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분명 자신이 그 군대라는 비효율의 극치인 시스템을 겪었음에도 그 부당함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비율이 훨씬 많다. 분명 도덕적으로는 없어져야 할 것이 '나만 당하는 건 억울하다'는 식의 감성이 결부되어 '우리 모두 다 같이 똑같은 불행을 맛봐야 공평하다'라는 마이너스적 사고방식이 팽배해있는 것이다. 서스펜스 드라마에서 범인이 마지막에 되뇌이는 대사 '왜 너희들만 행복하게 웃는 거야?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라는 지극히 사이코패스적인 정서가 생각 이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정부, 기업 그리고 취업 당사자들의 제각각의 문제점을 짚어보면서 느낀 것은 '이 문제는 절대 어느 한 쪽의 이해관계는 물론 삼자대면을 하더라도 끝이 안보일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것이다. 정부도, 기업도, 취업 당사자들도 이 문제를 접점에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직 '자신들만의 입장'만을 되뇌이고 있어 이 문제의 구심점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기가 참 힘들어보이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피해자이며 누가 가해자란 말인가? 이 문제는 대체 누가 희생을 하고 누가 이득을 봐야 해결이 된다는 것인가? 필자가 여기에서 어떤 결론을 낸다 한들 그 결론이 모든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사실상 가능한 일일까?

그래서 4부에서는 같은 취업난을 겪고 있고 사회적인 시스템과 정치적 상황이 많이 닮아있는 '일본'의 사례를 소개해볼까 한다. 지금부터 보여드리는 것들은 '일본'이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라는 성공 사례가 아니라 (일본 역시 취업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상태) 어디까지나 반면교사로서 참고하고자 하는 취지일 뿐이므로 '일본'을 특별히 찬양하거나 일본의 사회 시스템이 무조건 옳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사례를 통해 적어도 1,2,3부를 읽으시면서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지셨으리라 생각한 '아니 그럼 대체 누가 잘못했다는 거야!'라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 결론이 지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일본의 취업난은 기본적으로 '학력'중심의 사회가 아직 파괴되지 않고 건재함에 따른 '사회적 비효율성'이 가져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좋은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그 대학의 레벨이 평생 달고 다닐 레벨이 되어버리므로 능력에 관계없이 '나이'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는 시스템이 아직도 많은 기업에서 운영되고 있다보니 장수국가답게 정년이 길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주어지는 연봉이 결국 1인당 약 3~4명의 취업을 제한시킬 만큼의 인건비 낭비를 가져오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 비중을 더 이상 늘리기 어렵게 되는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짤리지 않기 위해' 나이가 들면 연봉이 깎이는 고용 유지 시스템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가 없다. 일본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이 들어갈 곳이 많아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수반되는 비용을 책임져야만 하는 기업과 정부의 의무가 존재한다. 즉 젊을 때 박봉으로 나라와 기업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다 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오또나'세대들의 요구이며 기업이나 정부 역시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적절한 보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는 젊은층 못지 않게 '오또나 세대'의 소비가 대단히 중요한데 일본 오리콘 챠트에서도 '엔카'의 판매량이 결코 젊은 음악에 뒤지지 않는 수준을 가지고 있고 디즈니랜드나 JR히가시니혼 등 소비, 서비스 업계는 물론 식품, 생활 업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오또나'라는 상품명을 대거 채용하여 이들의 소비력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 '오또나'세대들의 경제력이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취업난'을 가중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회사나 정부로부터 요구하고 있는 '나이에 걸맞는 높은 급여'에 대한 근거가 '가장'으로서 '자신은 물론 아내와 가족'들의 소비까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4인분의 인건비가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들은 4인분의 급여를 한 사람에게 지급하다보니 인건비 대비 채용 수를 줄일 수밖에 없고 표면적인 취업난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함정이 있는데 결국 4인분의 인건비에 대한 근거가 자녀들이 이미 만으로 20살이 넘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오또나'세대들의 경제적인 안정으로 인한 여유자금이 자녀들의 경제적 여유로 이어져 20대들이 '경제적 위기감,절박함'을 갖지 못하는 '자아태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일본 젊은이들은 계층별로 차이는 있겟지만 결국 부모세대들로부터 자신이 소비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돈을 원조받을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에 특별히 취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격증이나 기술을 취득할 동기부여를 갖지 못함은 물론, 이전처럼 대학에 레벨에 맞는 에스컬레이션이 이루어지지 않는 실용적 사회로 급격한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요구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그저 젊기만한 '인간'일 뿐인 게층이 점점 늘고 있고 이로 인해 기업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 개척에 따른 인력 수요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인적 자원 수준이 이에 따라가지 못해 '인력난'을 겪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일본의 게임 IT업계에는 최근 '한국'이나 '중국'쪽 젊은이들이 대거 취업비자를 받고 '프로그래머'나 '플래시 애니메이터'등 국내에는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분야의 인력들이 속속 취업되고 있으며 심한 곳은 거의 절반에 이르는 개발진들이 외국계 인력으로 구성될 만큼 일본에서는 이미 자국 젊은이들만으로는 세계흐름에 걸맞는 국가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극우신문들은 '외국계 인력이 자국 내 젊은이들의 취직 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식의 논평을 게재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기업들이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일부러 외국인을 뽑을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일본'의 취업난은 시장경제에서 유럽식 복지분배정책을 혼재함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탄생한 '니트'와 '히키코모리'같은 '취직 포기자'들의 양산이 불러왔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반드시 저같은 극단적인 표현에 속하는 계층이 아니더라도 결국 일본 젊은이들의 자기개발이나 삶에 대한 정산력의 평균치가 크게 높지 않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벌써 사회적으로 '쓰래기'로 분류되어 격리 차별되고 있을 이들 계층이지만 일본 정부와 기업은 결코 이들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지금은 경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외국인들을 쓰고 있지만 결국 지금처럼 '젊은이'들의 태만이 계속될경우 지금의 '오또나'세대처럼 사회를 주도하게 될 주도층의 국적이 대거 바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결국 자신들 위에 외국인이 군림하고 심한 경우 정계까지 외국인이 진출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을 테니까, 결국 지금의 오또나 세대들이 은퇴하고 그 주도권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이어받아 일본이라는 나라의 혜택과 자긍심을 상속받아주어야만 하는데 에초 이들이 사회 자체에 합류되기를 거부하고 있으니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이른바 '하프'세대들을 대거 일본 국민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와(이전에는 일본 역시 하프 세대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는데, 이는 선진국 출신 하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후진국 하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기 아이돌 그룹 속에서도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하프를 찾기 어렵지 않다.) 1세대와는 달리 다소 국가 정체성이 모호할 수 있는 재일교포 2~3세들의 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보면 과거 경제성장기, 일시적으로 사회 주도권을 '자이니치'에게 빼앗겼던 '자이니치 컴플랙스'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일본 사회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일본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니트나 히키코모리처럼 극도의 의지박약자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미 최저점 기준이 '상식의 바닥을 뚫고' 지나갈 만큼 낮아진 시점에서 사회 분위기 상 인정되는 '평균치'가 높을 이유가 없는 만큼 일본 젊은이들의 이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낮을 수밖에 없고 특히 타국의 젊은이들과 비교해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진작에 '자국의 미래'가 젊은 세대들에게 있음을 급격한 노령화 사회와 학벌위주의 파벌사회에서 가져온 패착을 겪으며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하토야마 정권에 이르러 더욱 파격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출산 장려 정책과 우리나라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파견직 사원 제도 단계적 철폐, 실질적 인력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전문학교 (우리나라의 2년제 대학에 해당)의 권한 확대 및 지원 강화, 지금의 젊은 층들에게 좀 더 많은 혜택을 가져다 줄 '연금 제도 개편' 등 젊은 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는 데에 있어 정부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많은 유인책을 쏟아내고 있다. 재미있는 건 정부가 '취업 유인책'은 다수 쓰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인 '취업 촉진책'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어떤 문제에 있어서 '정부'가 해야할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선을 분명하게 그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에게 채용을 늘릴 것을 정부 입장에서 압박한다던지 무조건 정부 실적을 위해 실업율을 수치상으로 줄이기 위한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사실상 '일자리가 없어서'취업이 안되는 게 아닌 인력의 질적 문제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젊은층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데에 있어 불안함을 느끼는 요소들 (비정규직 문제, 출산에 따른 자녀육성비용, 학력차별)을 없에주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역할론은 '책임 회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문제 해결에 있어 주도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를 구분시켜 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인 것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일본 젊은이들의 '능력'향상에 기대하기 보다는 선진국형 인재 육성 시스템을 속속 도입하여 '완성된 인재를 운용하는'게 아닌 '인재를 키우는'회사로 개념을 탈바꿈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다른 능력은 없더라도 이른바 '야루키'라 불리우는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다 높게 평가하는 문화가 점차 자리잡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재 채용 시스템 역시 기존의 서류전형 위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각을 서술하도록 자체적인 '문항'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주먹구구식 위압적인 면접 분위기를 탈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면접을 볼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매년 새롭게 기획하여 반영하고 그 결과를 분석 계승시키는 등 제한된 파이 안에서 보다 효율적인 인재 발굴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차피 네가 다른 곳에서 무엇을 배웠던지 우리 회사에 들어오면 전혀 새로운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나가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네가 과거에 뭘 했는지보다는 지금부터 뭘 해나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는 게 이들이 새로운 인사 철학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학벌 위주와 파벌 중심의 시스템이 바뀌기까지는 워낙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가 느리기 진행되는 일본의 사회 시스템 상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기업들은 언젠가 세대교체가 완료되고 이러한 가치관이 뒤바뀔 것을 지금부터 하나 하나 천천히 준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국가적으로 강제하는 최저임금 제도를 마련하지 않고 따로 위원회를 만들어 그 지역의 물가와 지역 세금 등을 종합해 어디까지나 경제 지표의 일환으로서 공표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전국적으로 일원화시키는 것이 아닌 지역별로 차등화된 최저임금이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는 사업장을 찾기도 이에 대한 불만을 갖는 것을 보기 힘들다. 일본의 물가를 생각해볼 때 물론 10년간의 장기불황을 거치면서 전혀 오르지 않은 시급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한학기 등록금은 약 40만엔 정도인데 일본에서 매일 8시간씩 주 5일 근무로 받을 수 있는 평균적인 아르바이트 월 수입이 22만엔 정도이므로 흔히 도쿄 도심지역에서 혼자 살 때 드는 월세 5만엔과 식비 등을 생각해 볼 때 조금만신경을 쓰면 매월 10만엔 가량은 저축이 가능하다. 물론 일본과 한국과의 환율과 물가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일본의 높은 물가는 대부분 특정 산업 (외식업과 택시 등) 즉 삶에 있어 '대안'이 있는 부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관리에 따라 체감물가는 훨씬 낮아질 수도 있는 시스템이므로 물가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즉 길어도 한 학기와 방학기간동안 투잡 쓰리잡처럼 무리를 하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등록금을 내 힘으로 해결하는 게 결코 어렵지 않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일본은 이처럼 '젊은 층이' 부모의 도움 없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 가능한 사회라는 것이 한국과 다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저임금 제도 자체보다는 아르바이트 임금 저하의 원인이 되는 부실한 자영업은 즉각 퇴출될 수 있는 정부측의 강력한 규제시스템과 더불어 '수고'에 따른 지불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적 인식이 있기에 시급에 대한 정부의 강제안이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전문학교 등 이른바 이름값이 없는 학교들의 노력으로 기업들의 '학벌'에 대한 인식이 엷어지고 있다는 점과 정부가 주도적으로 지방의 특성화된 대학을 집중 육성하여 도쿄 중심의 명문대 권한을 전국으로 분산시키려는 노력을 오래 전부터 거듭해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한국에서는 한국 내부의 시스템을 일본에 그대로 투영하는 잘못된 관점으로 인해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는 사람'이나 '유학을 다녀온 사람을 채용하는 기업'이나 모두 한결같이 '도쿄대', '와세다대', ' 케이오대' 등 명문 대학들만을 선호하고 그 이외에는 지잡대로 치부하는 성향이 짙은데 일본 내부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와세다나 게이오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않고 콧대만 높은 나머지 시대에 역행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점 놈아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처럼 서울대라면 듣보잡학과마저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닌 철저하게 학과별로 특화된 명문들이 전국 각지에 존재한다.

생물학계 관련 논문 수에서는 도쿄대가 따라올 수 없는 위상을 확보한 큐슈 대학과 황우석 박사가 관련이 있어 잘 알려진 홋카이도 대학, 그리고 도쿄에 있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지잡대로 치부되고 있는 히토츠바시 대학은 에초 도쿄대 경영학부가 독립하여 만들어진 세계적인 권위의 경영 대학이다. 당연하겠지만 일본 내 해당 분야에서는 이들 대학들이 와세다나 게이오같은 명문 대학의 그것을 한참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해당 기업 역시 이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으며 위 사례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각 분야별로 도쿄 인 대학들 못지 않은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지방대학들이 즐비하다. 이로 인해 도쿄의 인구는 1천 400만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편이지만 전체 인구 1억 4천만에 비하면 10%안팎에 불과하다. 도쿄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홋카이도나 큐슈 지방의 인구는 평균 500만을 넘고 있고 각 현(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단위) 별로 인구 200만 이상의 대규모 도시를 인접 도시 포함 최소 2~3개 이상 보유하고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전체 인구의 30%가 서울에 몰려 있는 비중적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이런 저런 사례들을 살펴보았지만 결국 이들이 공통적으로 취하는 키워드는 한 가지, '결국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들어가고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이므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인식 하에 자연스럽게 파생된 부분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중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같은 시작점에서 각도가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결국 엄청나게 멀어지게 되는 직선처럼 작은 시작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인간을 중시하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부, 기업,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사회는 결국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서로 낮은 곳을 향해 끌어내리고 밟아 떨어뜨리기만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사회, 국가는 결국 내부에서의 싸움이 아닌 전 세계 국가 경쟁력을 동반 하락시키는 나비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결코 단순한 집안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은 한 가지 '아 저들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사람 취급도 못받을 녀석들이겠구나'라는 것 뿐이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나라는 히키코모리를 구제할 생각보다는 사회로부터 낙오지로 낙인찍고 격리하는 데만 열심히니까, 책임은 그들 가족에게만 있을 뿐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에초 정부조차 사회의 패배자들에게는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데, 사회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려 들까? 그런데 일본은 '자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이 어떻게든 사회로 나와 국가의 주축이 되어주도록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춰주는 데에 많은 예산을 할애하고 있다. 국가는 '자국민'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집단이니까, 어느 누구는 좀 성공하고 돈도 좀 벌었고 사회에 적응도 잘 했고 세금도 그만큼 내주니까 정부로서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어느 누구는 '노력이 부족해'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으면 이들은 그저 패배자로 정부조차 '자랑스러운 자국민'이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패배자'로만 대우해주고 있으니 사회적 인식이 바뀔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결국 '윗물이 썩은 탓'이다.

일어나 있는 사람을 목말 태워주는 사회가 아니라 쓰러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얼마나 많이 줄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국가와 그 국가를 이루는 사회적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인생 누구나 운이 좋아서 한방에 성공하는 운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패배 후 재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도 좁다. 다운 당했을 때 일어서도록 응원은 커녕 그냥 쓰러진 김에 그대로 죽으라는 듯 위에서 찍어 누르는 듯한 느낌마저 드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카드빚 남발해서 신용불량자 된 사람의 부채를 탕감해주자는 게 아니라,(일본도 개인의 빚은 국가가 보증을 대신해줄 뿐 결국 평생을 걸쳐 수입의 일정 부분 이상을 채무 탕감을 위해 써야 한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채용조차 되지 않고 아예 패배자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결국 한강다리에 오르고 팔목을 긋고 승합차에 연탄불을 피우게 만들도록 사지로 몰지 말라는 이야기다. 수능에 실패한 학생이 학교에서 뛰어내리고, 신입사원 제한 연령을 넘어선 구직자가 강물에 투신하고, 사오정 정리 해고된 실직 가장이 서울역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현실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게 '재기'대신 '끝'이라는 절망감을 안겨준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의 일이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일본 젊은이들에 비하면 우리나라 젊은이들 정말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 비록 그 노력이 다소 빗나가고는 있지만 적어도 삶에 대한 의지와 정신력, 자기 개발에 대한 열정만큼은 어느 나라 못지 않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들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의 정부와 사회는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젊음의 에너지가 넘처흐르는 이들을 독려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 돈을 숭배하도록 전도하고 있다. 일본 정부나 기업에 비한다면 행복해서 각기춤이라도 추고 있어야 할 이들이 결국 행복에 겨운 나머지 본연의 역할도 잊고 머릿 속에 자신들의 욕심만이 가득한 채 젊은이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선생님' 처럼 우리 의지대로 정부와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돈 이상으로 가장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다른 나라에 가서 그와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어딜 가든 '자국민'이상으로 이방인을 우대하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맞을 짓을 햇건 뭘 했건 어떤 이유로든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사회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재도전할 기회를 박탈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4부작 비정규직, 88만원 세대, 청년실신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의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에게 제시하고 싶은 키워드는 'challenge' 다. 언제든 도전할 수 있는 국가, 사회, 그리고 스스로가 도전에 인색하지 않은 인생을 만들어 가길 희망한다. 물론 사회 역시 사회 초년생의 첫 도전이든 한번 쓰러졌던 사람의 리벤지이건 이를 색안경 없이 수용해주는 사회가 되어주어야 하며 국가 역시 이미 사회에 진출해서 동력으로 활동중인 사람 못지 않게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다시금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재도전할 기회를 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수능을 볼 때도 20대에 입사 시험을 볼 때에도 고 3이라는 신분, 30대를 목전에 둔 '신입사원 연령 제한'이라는 칼날에 가로막혀 '다음은 없다'는 절박함 속에 매회 모든 것을 건다. 자신의 꿈에 먼저 도전한 다음에 생각해봐도 좋을 사람들까지 '나중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젊은 시절을 모두 취업 활동에 바친다. 지금의 취업난은 절박함을 강요당한 이들의 누구도 원치 않은 필요 이상의 공급이 빚어낸 참극이다.

이 척박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88만원 세대 젊은이들이여 힘들겠지만 그래도 도전해보자, 그리고 언제든 그 도전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를 만들자, 그리고 그 도전을 응원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북돋아주는 정부가 되어주길 기대해보자,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지 않은가? 대한민국이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일본을 비롯한 그 어느 나라 젊은이들보다 훨씬 열정적이고 뜨거운 젊음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대들의 식지 않는 젊음이 아름답다!
힘내라 대한민국 젊은이들이여~!

- 끝 -

비정규직, 88만원 세대, 청년실신, 취업난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목차

1부 (정부) 편
2부 (기업) 편
3부 (학생) 편
4부 (일본)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