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1. 6. 29. 17:55

중 편에서 이어집니다 - 못보신 분들은 클릭

동방신기의 데뷰는 잘 알려진것처럼 그룹명부터 아예 대놓고 동아시아 전반을 공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물론 보아 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랜기간 트레이닝을 거쳤고, 이제는 중2병에서 어느정도 탈출한 듯한 유영진 사단의 지금까지의 실패에서 얻은 역량을 모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런데 그렇게 많은 주목을 받으며 탄생한 동방신기는 이상하게 국내에서 초반 성적이 매우 좋지 못했는데요. 예상하셨겠지만 역시 동방신기의 초반 '기획 컨셉'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카펠라를 댄스에 접목, 이라는 동방신기 데뷰 컨셉은 많은 이들에게 조롱을 당했는데요. 이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욕심을 아직 포기하지 못했던 음악최우선주의 유영진의 거의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시장의 결과는 매우 차가웠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는 SG워너비를 필두로 가창력 있는 실력파 보이그룹이 거의 가요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노래 잘하는 잘생긴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들고 나와 이들과 부딪혔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승산은 저 먼 곳으로 사라진 셈이었죠. 기획이 그닥 좋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운도 잘 안따른 편이었습니다.

하필 얘들이랑 활동시기가 딱!


그래도 이들이 꾸준히 동방신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건, SM의 고정 팬덤 장악 능력으로 인해 적어도 손익분기점은 넘을 수 있을 만큼의 팬덤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SM의 팬덤은 굉장히 고착화가 되기 쉬워서 음반 판매량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주로 싱글보다는 앨범 위주의 활동을 해오며 '다작'을 자제했던 동방신기는 음반 하나를 1년에 한 번씩 내는 매우 희소성이 높은 신비주의 전략을 취하며 1년동안 꾸준히 하나의 음반을 팔아서 총판매량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성을 만들어나갑니다. 20만명의 팬이 있다고 해서 그 팬이 매번 음반 나올때마다 다 사는 건 아니지만 1년에 한번 나오는 음반이라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20만명 중 적어도 15만명은 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가요 랭킹에서는 보기 쉽지 않지만 최종 연간 판매 랭킹에서는 수위권을 차지하는 식의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소 기이한 활동 전략을 추구합니다.(이는 최근 슈퍼주니어의 국내 시장 활동 전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전략에서도 보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한국 원곡 위주로 전개하는 한편 SM재팬을 본격 설립 AVEX에 의지하지 않은 독자적인 홍보 활동을 전개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너무 처음부터 '멋을 부리고'나오며 초반 기반이 없으니 자금력을 이용한 소위 '돈으로 미는 마케팅' 을 일본에서 전개하게 되는데요.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실패', 이 전개 방식이 실패한 원인을 따져보자면 다른 기획 하나를 더 써야하기에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일본은 처음부터 멋 부리고 나온 가수'는 그 다음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지지를 보내지 않습니다. 지지를 보내봐야 그 이상 멋있어지지 않으면 흥미를 잃거든요.

일본에서 한국인은 손님이다. 그런데 그게 문화 콘텐츠를 파는 아티스트라면 일방통행이 될 수 없다. 일본인은 자신들에게 묻지도 않고 억지로 뭔가 강요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초기 동방신기가 딱 그랬다. 그들이 저런 초라한 무대에 섰다는것은 그만큼 인지도가 없어서이지 저게 '돈으로 밀지 않은 밑바닥'마케팅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동시기에 전국방송 TV 출연 빈도가 이를 말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소녀시대가 이를 벤치마킹해서 똑같이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골든디스크에 빛나는 유영진의 야심작 '오정반합' 직전까지 이 대대적인 푸쉬는 이어집니다만, 결국 좀처럼 늘지 않는 싱글 판매량에 한계를 느끼고 동방신기의 독자적 활동 노선을 포기합니다. AVEX에게 바톤이 넘어간 뒤에는 잘 아시는것처럼 시골 로컬 방송에서 농사 짓는 등 이른바 '바닥 긁기'를 하게 되는데요. 이를 두고 해외 나가서 굴욕을 당했다는 등의 비난도 있었지만 사실 일본의 연예계는 '직소퍼즐'과 같아서 다 완성된 걸 팔아봐야 소용이 없거든요. 일단 완성된걸 한번 시원하게 부수고 하나씩 조립하며 완성해나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상품이라는 것을 SM재팬은 몰랐고 AVEX는 알았다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어렵기만 했던 차이가 향후 동방신기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맙니다.

SM의 곡 위주로 거의 한계까지 푸시하였지만 유영진의 야심작이었던 오정반합까지 싱글판매 3만장을 넘기지 못하자 SM곡 위주의 푸시 전략도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 이들이 돈으로 밀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결국 SM의 곡으로 어떻게든 일본 시장에서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곡 자체의 호불호를 떠나 이미 접근 방식 자체에 문제가 더 컸었죠. 아무튼 음악부터 매니지먼트까지 거의 전권에 가까운 권리가 다시 AVEX로 넘어오고 AVEX는 철저하게 일본 바닥에 맞게 동방신기를 굴립니다. 이미 돈으로 열심히 밀어서 인지도는 있었지만 '관심도'가 떨어졌던 동방신기는 생각보다 적은 '바닥 구르기'를 거친 뒤 판매량을 급상승시키게 되죠. 아쉽지만 SM은 보아 때 이상으로 죽 쒀서 남 준 결과론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씁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웅재중의 해어스타일 변신과 함께 음반판매량도 쑥쑥 (?)


그 뒤로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그대로 일본 원곡을 대량으로 푸시받아 불과 2년만에 쟈니즈조차 눈깔고 피해가는 거물로 성장하게 되는데요. 그토록 동방신기를 통해 보아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던 SM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정반합 뒤로 반년이 채 안돼 골든 싱글을 배출한 동방신기는 그 후 꾸준히 10만장 이상 넘기며 순항하는데요. 잠시 한국에 돌아와 출시했던 미로틱이 한국에서 50만장이 넘게 팔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SM은 이 곡의 일본 성적에도 살짝 기대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10만장 이상 연속 기록을 가로막는 형국인것마냥, 미로틱 싱글의 일본 판매량은 9만장에 그치고 맙니다. 더 굴욕적인 것은 그 다음 싱글에서 일본 원곡으로 11만장을 팔았으며 그 뒤로 한번도 10만장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동방신기의 분열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점점 동방신기는 AVEX 산하에서 전설이 되고 있는데, 그 수많은 골든싱글 중 SM곡은 단 한곡도 없었으니 SM입장에서는 동방신기가 그대로 성장하는 걸 바라보고만 있기 힘들었던거죠.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잘 나가면 SM도 돈을 벌 수 있으니 좋은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좀 많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통상적으로 한국 가수가 일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그 일본 활동에 대한 '권리'를 함께 계약하게 되는데요. SM의 지금까지의 관행을 생각해볼때 아무리 좋은 계약을 이끌어냈다고 하더라도, 일본에 저작권이 있는 곡의 저작권수입까지 기대하긴 힘듭니다, 단지 동방신기 5인에 대한 소유권을 통해 그들이 부른 보컬에 대한 권리, 즉 저작인접권만을 받게 되는데, 이게 진짜 누구코에 붙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작다는 말이죠.

이런 식인데, 사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설명하자면 끝이 없으니 여기까지만...


즉 동방신기 5인에 대한 인물 초상권 (이들이 움직여서 만들어지는 수익)은 SM이 가지고 있으며 이들을 이용해서 만들어지는 2차 창작물에 대한 권리 (음반, 음악, 콘서트 등)는 AVEX에게 있게 됩니다, 그런데 동방신기의 일본 활동은 흔히 쟈니즈처럼 칸무리 방송 (그룹 이름을 걸고 만들어지는 인지도 방송) 은 고사하고 TV출연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흔한 기업 캠페인 행사나, 하물며 그들보다 훨씬 인지도가 낮은 쟈니즈 그룹들도 4~5개씩은 찍는 CM조차 거의 찍지 않는 등 철저히 신비주의적 아티스트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식이었는데요. 이게 AVEX의 전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활동은 SM에게 정말 돈이 거의 안가는 활동 체계였던 것입니다.

동방신기의 분열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SM은 동방신기의 제계약에 앞서, 계약 조건에 적어도 이같은 활동 주체를 앞으로 AVEX보다 SM이 주도하는 (일본 활동에 대한 돈을 더 챙기기 위해) 조항을 넣었을것이고 이에 동의한 측과 동의하지 못한 측이 갈라진거죠. SM이야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한 수순이었지만, 우선적으로 이들의 계약 조건에 동의하지 못한 맴버가 있었고 더 중요한 건 동방신기와 재계약을 한 들 이미 5인그룹 동방신기의 지금까지 쌓아온 인지도에 대한 권리는 AVEX에게 있었기때문에 SM이 협상하기에는 한층 불리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SM입장에서는 해체 후 재결성을 통해 아예 그룹을 리셋하고 SM의 소유권한을 더 강화한 계약을 맺고 싶었을것이고 AVEX는 당연히 지금까지 쌓아온 동방신기의 인지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것이죠.

화장품 사건으로 대표되는 동방신기 분쟁, 사실 이 화장품 사건이야말로 본질에 가장 근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JYJ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이 화장품 홍보 행사를 뛴 것이 SM의 '저작인접권' 즉 외부활동행사에 대한 수익배분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던 것. SM이 일본에 있어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동방신기의 '초상권'을 포기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 사건의 또 다른 관점에는 리더 유노윤호와 일본 인기 NO.1 영웅재중과의 대립이 있습니다. 영웅재중은 리더형 타입은 아니지만, 데뷰곡 HUG 작곡에 참여한 이력이나, 일본 활동 당시 보여줬던 부분을 보더라도 음악적 감각이 다른 맴버들보다 나은 측면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향후 동방신기가 나아가야할 음악적 방향성을 잘 알고 있었겠죠. 동방신기의 골든 싱글은 모두 일본 원곡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 활동에 있어 일본 원곡 위주로 AVEX나 기타 일본 매니지먼트를 통해 활동을 하는 편이 그룹의 미래를 위해 더 옮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점이 SM의 향후 동방신기의 음악 저작권을 필요로 했던 부분과 대치된 것입니다. 영웅재중의 이같은 성향은 SM의 음악최우선주의, 즉 유영진 사단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했죠. '늬들 음악으론 일본 시장에서 안돼!' 라고 대놓고 말하는 소속 가수를 가만 놔뒀을리가요.

이후 2명의 동방신기는 SM 원곡을 들고 당당히 일본 활동에 입성 28만장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 28만장이 과연 동방신기라는 타이틀의 재활용과 컴백효과에 따른 착시인지 아직 판단이 애매한 상황에서 본래 동방신기의 활동 주기였던 (분기별 뉴 싱글) 체계가 무너진 채 5개월이 넘도록 새로운 신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JYJ의 국내와 일본 활동을 막아가며 그들 방식대로 2명의 동방신기를 부양시키려 애쓰고 있지만, 영웅재중의 예언대로 SM은 일본에서까지 SM일 수 없었던 듯, 갖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특히 최근 있었던 오사카돔에서의 '파이팅 재팬' 콘서트에서의 최강창민의 발언이나, 무리하게 한국 가락을 넣은 편곡, 스크린의 태극 마크 등은 이들이 일본 시장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를 꿈꾸는 그대들에게...

SM엔터테인먼트는 음악최우선주의가 기본 모토입니다. 그렇다고 자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짬이 지금의 보아만큼 쌓이지 않았다면 자신의 '캐릭터 방향성' 즉 이미지 기획을 스스로 정하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창법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연습을 해왔던지 간에 다 버리시고 SM의 보컬 트레이닝 규칙에 맞게 가다듬을 준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오디션 단계에서 SM식으로 다듬는게 도저히 불가능할정도로 고착화된 창법을 가진 분들은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낙방을 각오하시는게 좋을것입니다. 재능도 재능입니다만, SM에 있어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말 잘듣는 유망주니까요.

댄스 위주의 가수를 꿈꾸시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팝핀, 브레이크 댄스 일단 다 접고 들어가시고 그냥 그 감각과 운동신경만을 꾸준히 유지시키세요. 음악최우선주의라는 점을 말씀드렸기때문에 댄스에 너무 집중하기보다 보컬을 무리없이 내지를수 있는 선에서 벨런스를 맞추시는 연습을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다 합쳐서 150밖에 못내신다면 과감히 노래 100에 댄스 50으로 맞추세요. 어차피 연습한 댄스 체계는 메이저 활동하시면 다 버릴 각오하시는게 좋습니다.

 SM는 모든 기획이 '음악'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선 이 그룹이 어떤 음악을 할 지를 정한 뒤 그에 맞춰 모든 것을 정하죠. 물론 말로는 대단히 당연합니다만, 이게 '스크립트'냐 '스팩트럼'이냐에 따라 매우 달라집니다. 즉 춤을 음악에 맞춰 추느냐, 춤을 인간이 추는 게 아니라 음악에 맞춰 튕겨오르는 '인간 레벨메터'가 되느냐의 차이인거죠. 이런 모습은 예전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살펴볼 수 있는 SM의 기본 성향 중 하나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시면서 아래 몇 가지 준비한 샘플 영상을 참조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


SM에 당신이 아티스트로 들어갔건, 아이돌 그룹 맴버를 생각하고 들어갔건, 작곡 편곡 프로듀서 인력으로 들어갔건지 간에 당신이 SM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 전부라는 것, 알아두세요. 승진이나 그룹 내에 다른 걸 해보고 싶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할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특히 음악적 가치관에 대한 반발이나, 활동 방향성,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 반발하는 법을 아예 잊고 들어가세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참 평화로운 회사일 것입니다.

뼈를 묻으실 생각으로 들어가시는 분들물론 몇십년씩 있는데도 승진이 안되진 않습니다. 당신은 후배 가수를 둘 수 있고 존경받는 선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존경받는 선배가 될 수 있어도 존경받는 프로듀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승진을 할 수는 있지만, 보다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지는 않는다는 것, 선배는 될 수 있어도 선생님은 될 수 없다는 점 꼭 알고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공화국 연구소 - 아이돌 기획사 열전 'SM엔터테인먼트'편을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1. 6. 25. 22:36
상 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 못보신 분들은 클릭

그들이 HOT의 '실패'에서 깨닫게 된 실패 원인은 놀랍게도 '기획의 미숙함'이 아니라 기획은 완벽했으나 그 완벽한 기획을 제대로 소화해주지 못한 유망주들의 실력 부재였습니다. 물론 아무리 지난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 SM의 이같은 판단이 반드시 잘못된 결과론을 도출하기도 애매합니다. 사실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책임이 아닌 SM, 나아가서는 가요 시장 전반에 있었거든요. 아직 대한민국은 아이돌 시장을 어떻게 소비해야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SM은 그런 아이돌 시장이 이미 안정화되었다는 전제 하에 너무 기획을 완벽하게만 짜내려고 했으며 그런 치밀한 기획을 접해보지 않았던 유망주들이 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소화할 리가 없었던거죠. 다시말해 시장, 유망주, 기획사 모두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기때문에 시간을 두고 같이 성장시켜야 했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획은 완벽하다'라는 SM의 편식성 자아도취로 인해 아이돌 시장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난 천재니까...


그 한계를 매우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 바로 HOT의 해체입니다. 얼핏 보면 계약분쟁만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사실 일부 SM맴버들이 '회사에 남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계약분쟁으로 치부하기에 어려운 감이 있는데요. 이들 5명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행보를 보면 각각 롹커(...), 소프트팝가수 (이상 SM에 잔류한 문희준, 강타) 1인 기획사 창업 후 브리티시 팝, 힙합 음악, 댄스 위주 보컬 (이상 잔류하지 않은 토니안, 이재원, 장우혁) 입니다. 눈치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류하지 않은 3인의 음악적 행보가 SM이 지금 현 시점까지 해왔던 음악적 색깔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우선적인 문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단지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게 해준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SM은 HOT의 표면적 성공을 기반으로 꽤 빠른 시점에 주식회사로 전환 코스피에 상장을 하게 되는데요. 이 상장이라는게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공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만, 냉정히 보면 결국 '회사'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아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경영상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업계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애착이 없이도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이 회사를 소유해서 내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경영권 방어'가 안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의 수익을 위해 무조건 생산적인 활동만을 해야하고 지출을 줄여 순익을 높이는 활동을 강요받게 되는데요. 바로 이 점이 SM전체 조직의 분위기를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리더 문희준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사회비판적인 음악 코드와 강한 전사의 이미지라는 HOT의 기획은 문희준의 솔로 데뷰로 이어졌고 HOT의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소프트팝 음악을 추구했던 강타의 잔류는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SM이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과 크게 차이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은 3인은 일단 당시 시점에서 해오던 음악도 아니었고 그들의 음악을 뒷받침할 기획 인력도 없었습니다. 즉 추가 투자가 필요했던 사안이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들이 요구했던 부분은 '가수로서의 재계약'이 아닌 '일정 지위 이상의 승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가수로서 활동은 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추구하는 후배들을 SM 내에서 키워내는 새로운 파트를 맡고 싶다는 것이었죠. 이들의 요구는 기획사에 소속되어 5년 이상 활동한 가수로서는 지극히 당연할수밖에 없는 요구였습니다만, SM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음악을 기획할 자금도 그들을 중역급에 가까운 대우를 해주며 신인을 키우는 역할을 부여해줄 생각도 없거니와 결정적으로 'SM의 기획 가능한 권리'를 독점하고 싶어했던 경영진을 위시한 실무진들의 몽니가 자칫 아이돌들의 은퇴 후 승진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정착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문희준의 솔로 데뷰가 지속적인 안티팬만 양산하자 SM은 아무미련없이 문희준을 포기한다. 그의 군입대는 안티팬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군 제대 후 2008년 싸이더스 소속으로 신보를 냈을 당시...


SM은 돈을 많이 안주거나 노예계약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신인으로 입사해서 열심히 SM이 하라는 대로 기획에 발맞춰 꼭두각시짓 하고 난 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동네 피자집도 3년 이상 배달일 열심히 하면 매니저 승진의 기회가 있기 마련인데, SM은 적어도 가수들에게 있어서 '회사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무진 참여'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기획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프로듀서를 하던 사람들 즉 유영진 라인이 독점할수밖에 없었고 그 아래에서 아무리 강타나 문희준이 선배급 대우를 받으며 승진을 한 들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신인을 기획하거나 키워내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HOT의 해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를 알고서도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쪽이 SM에 남았고 이에 반기를 든 3인이 박차고 나간 것이 되는 셈인데요, 물론 세간에 알려진대로 불공정한 계약 관행 역시 문제가 되었겠습니다만 그 이전에 사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SM 5년차로서 그에 걸맞는 지위 상승과 연봉을 요구했고 승진도 안시켜줄거고 돈도 지금 이상 더 줄 생각이 없다는 SM의 입장이 이들과 대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승자박에 가까웠던 SM의 HOT에 대한 오판은 이후 SM의 행보에 있어 갖은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데요. 우선 4집부터 과감하게 시행한 실력파 아이돌의 육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이는 물론 그렇게 나온 아웃풋이 상품성이 너무 떨어졌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더 큰 문제점은 그렇게 키워놓은 결과 자신들의 능력과 경력을 내세워 '상관 대우'를 요구하는 빌미가 된다는 점이었죠. SM은 이후 5년 주기를 꾸준히 지키는 한편,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티스트형' 유망주를 멀리하는 등 철저하게 아이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유닛형 유망주만을 선발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냥 기획한 대로 잘 소화해주는 유망주가 필요할 뿐 음악적 역량을 키워 새로운 음악 포멧을 추구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을 아티스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죠.

바다 이야기는 좀 하고 넘어가자, SM 소속 가수 중 최초로 유영진 사단에 '개긴'뒤 재계약 불발과 소속사 이적 이후 전설적인 수준의 찌질한 방해공작은 이미 잘 알려져있지만, 그녀가 왜 SM에 개겼는지, 왜 그 개김에 SM이 발끈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위키에도 언급이 안되어있다) 가수였던 아버지에 의해 오랫동안 트레이닝된 그녀만의 독창적인 창법은 흔히 SM창법이라 불리는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이를 유영진 사단이 자신의 기획에 맞게 맞춰나가면서 창법 개조를 거부한 바다측과 트러블이 잦았다고 한다. 자신의 기획과 음악에 대한 프라이드가 하늘을 찔렀던 당시의 유영진 사단에게 있어 이런 행위는 하극상과 다름없게 받아들여졌고, 결국 메인 보컬의 탈퇴라는 흐름을 감수한 채 SES와 바다 모두를 떠나보내는 강수를 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다 한 사람만으로 SM, 특히 유영진 사단의 성향을 적나라하게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보아!

보아는 이런 어수선한 환경 속에서 기획된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연하겠지만 HOT의 사례에서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는 SM의 철학이 모두 집대성된 최초의 작품이자 (좋지 않은 의미에서)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죠. 당연하겠지만, 보아가 일본에 진출한다는 의미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일본 진출과 귀결되어 있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300만장 싱글기록 우타다 히카루의 800만장 앨범신기록 등이 팡팡 터저나오며 음반 시장이 급폭발하던 당시 일본 시장은 SM이 소박만 치더라도 한국의 몇 배 이상의 돈을 벌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요. 특히 아직도 음반협회에서 MP3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내수 음반 시장의 급격한 침체 역시 그들을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계기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보아는 '유영진'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안고 출발할수밖에 없었는데요. 지금으로 치면 중2병이라도 걸린 듯한 유영진의 '사회비판'에 대한 집착은 보아의 데뷰곡 ID PEACE B의 실패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문제는 유영진이 진짜 10대를 제대로 분석하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가사와 곡을 쓸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고, 그런 곡이 10대들에게 음악적으로라도 어필이 되었냐면 그쪽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보아는 데뷰때부터 각종 구설수에 시달리며 기획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집니다. 보아는 후속곡 '사라'로 SM의 거의 사력을 다한 푸쉬를 통해 명예회복에 성공하지만, 예정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일본 진출 준비에 전력을 쏟게 되죠. 준비를 하면서 간간히 국내에서의 신곡 활동을 겸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보아의 멘탈 손상이 극심하다고 판단했을것으로 본 SM은 외부노출을 극도로 꺼린 채 AVEX와 공동으로 제 2의 육성에 돌입합니다.


이 보아의 육성 과정 역시 SM의 아이돌 육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1999년 데뷰 이후 2년 이상의 공백기를 거친 2001년 일본 데뷰까지 2년간의 공백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제 2차 트레이닝이 그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SM의 육성 기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음악적 감각과 댄스 실력, 아이돌 컨셉 소화 능력까지 포함해서 2년을 넘기기 힘들었습니다만, (악명높았던 SES의 트레이닝기간도 2년 전후) 보아의 경우 투자 금액과 트레이닝 기간이 비약적으로 길어져버린 것이죠. 댄스나 음악에 대한 감각 등 기초 트레이닝 과정 2년에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어 능력이나 예능 개그 연습, 간단한 단막극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연기까지 복합적으로 손을 대는 과정 2년이 다시 포함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길어진 트레이닝 기간이 정설이 된 이유는 보아의 기하학적인 성공 사례 때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죠.

여기에 보아가 SM의 육성 과정에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아이돌'의 데뷰기준 연령대를 높인 대신 육성시작연령대를 대폭 낮추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10대 초반부터 육성을 시작하는 조기육성이 향후 재능 계발 측면에서 효과적인 부분이 분명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생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죠. 단체 합숙과 끝없는 연습, 절대적인 서열 체계의 엄격함 속에서 자라나는 유망주들은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서열 체계 속 상하관계에 훨씬 더 익숙해지고 맙니다.

HOT 맴버가 아닌 보아가 서열 1위인 이유...


이는 SM에 있어 두 가지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데요. 우선 육성 과정에서 SM에 절대적인 충성도를 주입시켜 향후 재계약이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데에 드는 장벽을 대폭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첫 번째이고, 잘 알려져있지 않은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생활 통제, 즉 아이돌의 순수무결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이돌 윤리 기준은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과거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나 폭력에 연루된 증거 등 윤리의식에 반하는 과거가 적발될 경우 아이돌로서 살아남기 힘든 풍토가 (당시까지는)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생활 전반을 통제함으로서 데뷰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문제점을 사전 예방하고자 하는 포석이 있었던 것이죠. 일본이야 아이돌이 스캔들을 일으키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시스템입니다만, 에초 계약 자체가 일방적인 육성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국의 계약 조건에서는 그런 조항을 넣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에초 소속 정규직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상품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 쪽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보아'의 성공 전후,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SM의 주식시장상장을 전후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SM의 육성 체계가 급작스럽게 늘어난 시기가 보아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뒤라고 가정한다면 2002년 후반 정도가 되는데요. 문제는 이 때까지 정상적인 흐름으로 국내 시장을 노리던 SM의 보이그룹 걸그룹 라인이 급작스럽게 '해외 경쟁력이 있는' 소수정예 라인으로 수정되면서 국내용 아이돌로 키워지던 아이돌이 떨이처리되듯 쏟아져나오게 되는데요. 보아 라인이었던 다나, SES라인이었던 밀크, HOT-신화 라인이었던 블랙비트가 속속 데뷰를 빙자한 '정리'가 되면서 SM의 유망주라인은 새 판을 짜게 됩니다.

SM의 잃어버린 역사로 남아있는 그들...블랙비트


사실 그냥 키우던 애들을 더 키워서 해외진출시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블랙비트의 경우 이미 5년 이상 육성이 끝난 상태였고 그밖의 그룹 역시 그 시점에서 나이가 20줄을 넘긴 데뷰 시기가 꽉 차버린데다, 그렇게 머리가 굵어진 애들을 추가적인 비용과 시간을 들여 육성시키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해외 진출하는 데에 있어 국내용 이상의 포텐셜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옮은 판단이었던 역사적인 오판이었건 말입니다.

그리고 SM이 가질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고민은 '보아'라는 거대한 떡밥에 비해 SM이 가진 실속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인데요. 사실상 AVEX 산하의 이른바 '아무로 - 하마사키 - 코다'라인을 탔던 보아의 후광 탓에 SM이 보아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이 거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보아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곡들은 대부분 일본 원곡인데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곡 역시 스웨덴 리메이크곡 NO.1 .... 음악 최우선주의를 표방했던 SM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음에 분명했을테죠. 게다가 유영진의 곡 메이킹 능력 역시 이전의 불안한 중2병 때와는 달리 보아의 NO.1앨범을 기준으로 점점 완숙함을 보이고 있는 시점이었기때문에 진정 '지분 100%'를 가지고 '자신들이 만든 곡'을 내세워 일본 시장을 공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 했습니다. 물론 속사정을 살펴보면 보아의 성공에도 이렇다할 저작권료 수익같은 것이 대부분 AVEX좋은 일만 시켜버린 상황에서 SM에 돈이 돌지 않으니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해외진출'을 위시한 투자금 추가 유치를 끌어낼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기존 라인을 다 버리는 모험수를 감행하며 그룹 하나를 데뷰시킵니다. 지금까지 AVEX나 BING을 벤치마킹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쟈니즈 냄새가 풀풀풍기는 5인조 보이그룹이 ....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RushAm 2011. 6. 1. 06:47
대한민국에 이른바 '아이돌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된지도 벌써 십수년이 지났습니다. 아이돌 주기 5년을 계산하면 벌써 시대가 세 번 바뀐 셈인데요. 10년이 넘어가고, 속속 그 아이돌이 일본에 진출해서 성공 가도를 달릴 만큼 (자기들딴에는) 세계적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하는 일면에는 이 산업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이돌을 아티스트와 동일시한 잣대로 평가하거나 팬덤에 의해 음반 시장이 일부 연령대로 치우처버리게끔 방치하기도 하는 부작용이 산적해있기도 하죠.


그래서 공화국 연구소에서는 지난 '대한민국 아이돌 산업을 말한다' 시리즈에 이어 기획사 개별적인 특징과 속성 등을 가능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분석한 '아이돌 기획사 열전'시리즈를 마련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SM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오해가 있으실까봐 덧붙입니다만, 이 기획은 특정 기획사를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철저한 개인 연구에 의해 알게 된 내용들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연구 내용을 인용, 배포하는 등의 문제에 있어 필자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만, 공화국 연구소는 '블로그 기사'가 아닌 개인 연구 자료이므로 다른 포스팅에 비해 텍스트량이 매우 많다는 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서태지와 '아이돌'

아이돌의 원류는 언제부터인가의 논쟁은 사실 너무 무의미합니다. 그 형태만 달랐을 뿐 아이돌이라는 존재는 대한민국 음악계에 언제든 있었거든요. 다만 그 형태가 조금씩 달랐고 그 형태에 따라 어떤 그룹은 살아남고, 사라지는 '대중의 선택'에 의한 생존전쟁을 벌였을뿐입니다. 일례로 10대 문화의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거의 90년대 초반을 양분했던 잼이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밀려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체생산'능력이었는데요. 서태지와 아이들은 신아이레코드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기획사 없는 단독활동, 그러니까 음반 찍어내는 것만 대행했을 뿐, 거의 모든 활동 기획이나 전략, 작사 곡 등의 컴포징에 이르기까지 그룹 내에서 자체생산을 해냈습니다. 실질적인 데뷰무대였던 특종 TV연예에서 이들에게 내린 혹평은 어찌보면 당연했는데요. 이들은 이전 잼이나 소방차등이 보여줬던 아이돌의 계보가 아닌 아티스트의 계보를 아이돌과 섞으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다름아닌 서태지가 혼자 다 해먹을 수 있게 만든 시대적 변화, 1인 작곡, 연주가 가능한 시스템 '컴퓨터 음악(MIDI)'가 있었습니다.


작곡의 상징을 콩나물 던지기에서 신디사이저로 바꾼 혁명의 중심, 기존 밴드들이 이에 반발했던 이유는 지금의 기가샘플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형편없는 미디악기 음질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가진 아날로그적 노하우와 향후 밴드없는 하드레코딩 환경 변화에 따른 밥줄의 위협에 대한 럿다이드식 저항이 아니었을까?


예전 음반 녹음은 그야말로 라이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반주를 직접 마스터링 녹음을 처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능한 실제연주를 따오는 게 관례였죠. 언제나 음반사는 실력있는 세션을 보유해야만 했고, 가수들은 그 세션들을 선배로 극진히 모시는 이른바 '딸랑딸랑'을 해야만 녹음하고 음반 낼 수 있는 이른바 '세션의 권력'이 대세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권력을 제대로 보유할 수 없었던 군사정권시절의 핍박에 저항한 저항음악가들의 선택이 바로 '포크송', 즉 1인 연주가 가능한 음악이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합니다. 어쨌든 기타만 칠 줄 알아도 귀하신 몸이었던 시절이라는 겁니다.

서태지의 경우는 이 기타 하나로 먹고 살 수 있는 엘리드 계보를 걸었습니다만, 시나위 출신의 정통파 록 기타리스트가 솔로 데뷰로 꺼내든 게 록이 아닌 빠른 비트의 '컴퓨터 음악'이었다는 점이 기성 가수들에게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한 음악이 록 음악과 거리가 멀기도 했습니다만, 무엇보다 그동안 록 음악계는 물론 전통적으로 가창력을 중시한 음악계에서 '랩'이라는 음표없는 음악을 추구한 점과 그 음악 자체가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나머지 현지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한 마디로 장르불명의 조잡스러움이 묻어났다는 점이 그것이었죠. 아무리 서태지가 천재였다 한들 1인 작곡 체계는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했고, 아무래도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만 하다보니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음악을 들여오면서 벌어진 '표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야 음원들이 웨이브 기반으로 실제 연주와 진배없는 수준으로 높아졌지만 당시의 사운드캔버스로 대표되는 컴퓨터 음악은 시나위 시절부터 아날로그에 익숙해져 있던 서태지의 감성으로서는 창작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죠.

그는 아이돌이 아니었지만, 본의아니게 아이돌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다.


흔히 음악계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뷰가 가져온 센세이션은 생각보다 많은 파생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들의 데뷰, 그리고 그 데뷰에 대한 음악계의 상반된 평가,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끼친 영향은 그들의 은퇴를 전후해 그들이 만들어놓은 밥상을 어떻게 먹는지 혹은 뒤집어 엎는지에 대한 큰 대명제가 갈리게 되는데요. 그가 하는 음악을 인정하고 필요한 일부분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음악에 활용했던 세력과, 그의 음악을 극렬히 비판하며 그가 추구했던 방향성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쪽 그리고 그의 음악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계승하여 발전시킨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당시 추구했던 그들의 방향성을 꾸준히 추구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죠. 오늘 이야기하게 될 SM엔터테인먼트도 그 당시 갈라저나온 커다란 줄기로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축입니다.

HOT의 위대한 유산

서태지의 음악이 미국, 일본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본다면, SM엔터테인먼트는 그가 추구했던 음악 중 미국적 음악 코드에 한국적 대중화를 위해 입혔던 'JPOP'의 감성코드에 주목합니다. 굉장히 트랜디하면서도 랩과 잘 어울리며 자극적이지 않아 부담없이 귀에 잘 들어오는 음악을 추구하죠. 재미있는 건 이런 JPOP의 감성 자체는 AVEX나 BEING 등 그야말로 90~00년대를 쓸어버리던 기획사에서 나온 코드였지만, 정작 이들이 일본을 통해 들여온 건 그들의 음악적 감성이 아닌 쟈니즈의 아이돌 시스템이었다는 것인데요. 한마디로 음악성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돌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SES가 일본 진출 당시 기술적 자문을 하기도 했던 BEING계열 소속 故 사카이 이즈미


무조건 외모를 중시하던 당시의 아이돌 선발 시스템에서 나름 수준 높은 음악을 추구하고 싶었던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노래실력을 갖춘 유망주는 생각보다 잘 모여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외모와 노래 실력은 상반되는 케이스가 많았고, 좀 실력이 있다 싶은 녀석은 아이돌 그룹에는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을테니까요. 게다가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컨셉이 아이돌스러운 POP음악 이라는 난점이 작용하고 있어 그 음악에 걸맞는 보이스 컬러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주 노래를 잘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지금까지의 '잘 한다'는 기준과 상당히 다른, 그러니까 당시 기준으로 다른 가수들의 창법을 흉내내면서 자라온 가수 지망생들이 아닌 그냥 백지 상태에서 가르칠 수 있는 다이아몬드 원석이 필요했던 것이죠.

사실 예전부터 최근까지 쟈니즈의 보이 그룹에서 '노래 담당'을 따로 두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요. 아이돌이 노래를 반드시 잘해야한다는 고정관념도 없을 뿐더러, 아이돌이 완성도 높은 음악을 할 필요성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입니다) 이유는 물론 노래를 잘하는 아이를 뽑으면 '큰 틀'에서의 기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죠. 원래 아이돌이라는 것은 어떤 컨셉 (미소년 집단, 짐승남, 시크한 도시남자 등) 을 잡게 되면 그 컨셉에 걸맞는 맴버를 모집하고 그 맴버들은 짜여진 컨셉에 걸맞는 활동만 펼쳐주면 그만입니다. 당연하겠지만 이 컨셉의 거의 대부분은 외모와 댄스실력인데요. 그런데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전제조건을 달게 되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냥 외모만 맞춰 오디션보고 캐스팅하는 게 아니라 일단 외모를 맞춘 뒤에 얘가 노래를 잘 못하거나 보컬 색깔이 안맞거나 하면 탈락을 시켜야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뽑았는데 컨셉에 적응을 못하거나 (가창력 좋은데 춤까지 잘추는 애들은 정말 드물죠) 하면 데뷰 스케줄부터 삐걱거리는 등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 자명하니까요.

그런데 SM엔터테인먼트는 이런 잠재적 불안요소를 떠안아가면서까지 음악성을 갖춘 아이돌에 목을 맸던 것일까요? 그것은 SM엔터테인먼트가 한국의 쟈니즈가 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존재 '유영진'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수만 회장과 함께 사내 종신계약 이사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음악최우선주의'라는 방향성을 지금까지의 행보 속에서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었는데요. 본인 스스로가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생활을 시작하기도 했고, 전자음악에 대한 인식이나 수준이 낮을 때부터 꾸준히 밀어봤던 분야일테니, 이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음악만을 중시한 나머지 아이돌이 본연의 색깔을 잃은 보컬그룹이 되지 않도록 음악적 완성도는 높이되 가능한 초창기 기획했던 '컨셉'을 최대한 살리고, 그 방향성을 끝까지 고수하는 음악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초창기 SM의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이 당시에는 '연습생'이라는 개념보다는 직접적인 캐스팅에 의한 속성 데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연습 기간은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었고, 어떤 그룹의 형태를 기획하고 그 그룹의 피스를 몇 개로 나눈 다음 그 조각에 맞는 인재를 찾아나서는 오디션이나 캐스팅 작업을 통해 완성시키는 방식이었죠. 눈치채셨겠지만, 이는 일본의 고전적이고도 정평이 나 있는 아이돌 기획 시스템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초창기 SM은 사실상 일본 아이돌 생산 시스템을 상당 부분 벤치마켕한 흔적을 곳곳에서 조금씩 찾아볼 수 있었죠.

하지만 조금 아쉽게도 유영진은 그런 음악적 욕심과 더불어 '아이돌 그룹에 대한 이해'를 양립시켜 '작곡'과 '프로듀싱'을 함께 맡아야만 했던 어려움이 존재했고, 이런 초창기의 열악한 환경은 그의 성향을 매우 고지식하게 만들어놓고 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SM을 있게 한 그룹으로 꼽히는 HOT의 경우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의야해하실줄로 압니다만, 일단 들어보세요

HOT 기획 당시 유영진은 HOT를 기성 세대를 비판하는 개김성 강한 5명의 악동으로 컨셉을 잡고 각종 음악 컨셉 등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컨셉은 데뷰곡 전사의 후예의 예상치못한 초반 대 부진에서 비롯된것처럼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요. 생각했던것만큼 당시의 10대들은 그런 심각한 가사에 공감하거나 열광해주지 않았습니다. 위키에서는 전사의 후예가 표절 시비로 인해 제대로 인기를 얻을 기회가 없었다는 주장도 보입니다만, 이런 문제를 포함한 기획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려진 대로 이들의 학창시절은 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고 한다. 전사의 후예는 타이틀에서 가해자의 이야기를 연상시키지만 내용은 피해자를 시사하고 있다. 만일 이들이 가해자의 악동적 이미지를 그대로 곡에 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말할것도 없이 학교폭력미화라는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을 먹지 않았을까?


이같은 예상치못한 결과에 대해 유영진은 일단 데뷰 앨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일단 후속곡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에 2집을 내놓을 것을 준비하게 되는데요.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아무 전략없이 내놓은 캔디가 대박을 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리더 문희준의 이미지를 보시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거친 느낌의 그룹으로 기획되었던 그들이기에 이런 말랑말랑한 곡이 어울리지도, 시장에 통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인데요.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의 아이돌 시장은 그야말로 '애들다운' 곡이 더 먹히는 시대였고 그들이 내세운 문희준의 거칠고 와일드한 캐릭터보다 부드러운 보컬의 강타를 중심으로 한 캔디가 더 쉽게 받아들여진 당연한 역사가 쓰여져버린 것이죠.

HOT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기획사 SM입장에서는 정말 얻어걸렸다 싶을 만큼 기획 차원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유영진이 내놓은 전사의 후예가 실패하고 SM소속이 아닌 외부 작곡가 장용진에 의해 만들어진 캔디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룹 전체 기획이 대중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음을 반증했던 것이죠. 물룐 표면상의 성공은 기획사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겠습니다만, 장기적으로 실패한 기획 속에 얻어걸림을 바란다는 것은 기획사 입장에서는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시장은 언제나 요행을 바라는 자에게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유영진은 HOT의 1집의 실패 원인을 '시장의 미성숙'과 '컨셉의 난해함이 불러오는 소화력 부족'으로 본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와 SM은 1집의 이같은 빗나간 성공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2집에서는 10대들의 사회적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부각시킨 '늑대와 양'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결과는 방송금지처분 그리고 곡 자체가 가진 난해함 탓에 매우 심각한 수준의 실패를 맛보고 맙니다. 지난 1집의 성공에 의한 엄청난 버프가 있었음에도, 실제 기획 자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냉담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여기에 후속곡으로 나온 '장용진'의 '행복'이 2집의 포텐셜을 모두 가져가버렸다고 평가될 만큼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SM과 유영진은 HOT의 지분을 장용진 한 사람에게 빼앗기다시피할만큼 기획사로서의 두 번째 실패를 맛보고 맙니다, 이후 장용진은 HOT음반에서 그 이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데요. 석연치않은 표절 시비가 있었고 표절 원곡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만큼 모호한 부분으로 봐서 사실상 HOT에서 타의적으로 배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장용진이 직접 보컬로 참가한 듀엣 '동자'


이후 HOT는 이 '행복'의 성공이 남긴 후유증을 제대로 치루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는데요. 유영진은 두 번의 기획 실패로 이미 모호해질대로 모호해진 HOT의 기획 컨셉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의미였는지 모를 3집 열맞춰를 내놓았지만 어이없게도 행복에서 이미 한번 데인 '표절' 시비가 본격적으로 붙으며 더 크게 데이고 맙니다. SM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한번 데인 일을 반복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며,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유영진의 곡이 이런 일에 휩싸였다는 점은 많은 부분을 시사합니다. 그만큼 HOT가 처음 가진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기획사 내부에서도 대단히 무리를 했다는 점이 첫번째이고 유영진 본인 역시 세 번째마저 실패했을 경우 자신의 음악 철학과 지금까지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 두번째이죠. 그 역시 3집에 이르러 HOT의 초창기 기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에 대해 '성공에 관한 본격적인 의구심'을 가졌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HOT맴버들의 자작곡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요. 그의 철학 상으로 기획형 아이돌에게 작곡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습니다만, 완고하게 자신의 철학을 밀어붙였던 1,2집이 연속으로 실패하게 되자 립싱크나 악보를 못 읽는 실력없는 아이돌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조금씩 수용하고 기획에 반영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해서 강타가 작곡한 빛은 이전 장용진의 캔디나 행복에 비해 음악적 색깔만 유사할 뿐 완성도면에서는 합창 교향곡 멜로디 샘플링에 대거 의존한 곡이 된 것을 비롯 자작곡이라고 발표된 곡들이 대부분 음악적으로 평가할 가치가 없을 만큼 불안정한 결과가 나오고 맙니다. 당시 이들이 보여준 '오판'은 3집 직전 다소 애매하게 나온 2.5집격에서 발표된 유영진의 'We are the future'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한층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는데요. 이 곡은 열맞춰, 늑대와 양, 전사의 후예와 코드를 공유하면서도 음악 감각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대중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령 실패했더라도 이미 가지고 있는 '컨셉'을 지킨다는 것이 아이돌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백청강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곡으로 꼽았던 'We are the future'


이 곡이 어떻게 보면 HOT가 기존에 가진 기획 컨셉을 유지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 셈이 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SM은 이 당시부터 HOT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접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HOT의 원래 기획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 엄두를 못냈던 것인지, 4집에 이르러서는 앨범 수록곡 전곡과 프로듀싱을 맡겨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고 기획의 주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HOT는 이후 가뜩이나 불안해진 기획 정체성과 함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맴버들의 아무런 철학이 없는 무미건조한 음악 성향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기획 주체가 사라진 아이돌 그룹의 말로는 볼 필요도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죠.

HOT가 SM에 남긴 유산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SM 최초의 성공작'이 아닌 '최초의 실패작'이라는 상징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해서 SM이 정말 오랫동안 벤치마킹했던 일본의 '캐릭터형 아이돌' 시스템이 국내에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점을 HOT의 실패로 인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요. 이후 SM은 선행 기획 후 해당 그룹에 맞춘 퍼즐 맞추기 형태의 일본식 아이돌 기획 시스템 노선을 대폭 수정하기에 이릅니다만, 문제는 HOT의 기획 실패를 통해 그들이 분석한 실패 원인이 한국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기획 차원의 반성이 아닌 완벽한 기획에 대한 유망주들의 소화력 부족으로 기획이 가진 포텐셜이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는 지극히 책임회피적인 결론을 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유영진을 비롯한 SM이 날고 긴다 한들 이제 막 아이돌 시장이 태동하려는 한국 시장에서 당시 그들은 풋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에도 그들이 가진 음악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한국 시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본의 성향과는 상당 부분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만 SM은 자체적인 기획 노선을 한국 성향에 맞게 최적화하기보다는 그들의 기획 성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유망주들의 육성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쪽을 택하게 되죠. 이러한 그들의 이기적인 고집이 향후 SM 그리고 아이돌 시장의 기획 판도를 어떻게 바꾸게 될 지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中편에 계속...
posted by RushAm 2011. 2. 28. 19:37
우리나라는 언제나 해외에서 좀 잘나간다 싶으면 혈통주의를 내세워 우리편으로 만들면서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은 같은 혈통임에도 철저하게 다른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이충성, 추성훈,하인스워드, 김초롱까지 잘하면 내편 못하면 남의 편이라는 식의 모순된 논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매우 단순한데. 결국 이들 교포들은 거의 대부분 '언론'에 의해 띄워졌고 또다시 '언론'에 의해 사그러들었다는 것이다. 왜 이들은 몸소 지면을 할해해가면서까지 이들을 띄웠다가 떨어뜨리고 또 다시 띄울 한국계를 물색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들이 교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온도차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아주 치졸하고 비겁한 이유가 있었다.

재미교포와 재일교포 우린 누구를 더 의식하고 있었는가?
지난 1,2,3부를 통해서 친일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역시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 행적'과 그 행적이 결국 국민들의 흑역사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와 증언이라는 것을 여러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들은 국내 정권을 직, 간접적으로 휘어잡고 친일 언론들의 지원사격을 받아가며 대한민국 여론이 겨누는 화살의 방향을 자신들이 아닌 쪽으로 바꾸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대한민국 땅에서 그들은 언제까지고 무적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정말 오랜 기간 공들여 만들어왔고 그 효과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권력이 쎄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국경 밖까지 영향력을 끼치긴 힘들다.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수준은 매년 그 바닥을 뚫고 국격에 어울리지 않는 후진적인 수준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다시말해 그들이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철권을 휘둘러도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국적, 혹은 한국 국적이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자신들의 역사적 진실을 은폐할 북풍이나 일풍 같은 수단을 이용해 여론조작을 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백날 북한의 위협이 어쩌고 해도 국내 밖에 있는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는 국제 미디어에 견줌을 당하게 되면 신빙성을 잃기 십상이었으니까...

이집트 혁명에 있어 무바라크의 언론통제가 먹히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
그 중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다름아닌 '재일교포'다. 재일교포의 원류는 바로 한국전쟁 이전 일제침략기 당시 '강제이주'를 당하며 일제침략기를 몸소 겪은 세대들 중에서도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고 볼 수 있는 침략기 1세대다. 이들은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이주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정권이 이미 친일파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이들이 한국에 들어올 경우 이미 반민특위를 비롯 독립유공자 입을 꿰매놓은 정국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북한 주민들이 남한에 와서 자신들의 정권이 지금까지 남한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듯이, 재일교포들의 보다 생생한 증언들은 친일파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목줄기를 찌르는 칼끝과 다름없었으리라.

재일교포는 이후 이승만정권의 일풍과 더불어 그냥 '일본이 좋아서 한국을 버린 매국노'정도의 이미지로 취급당하며 대한민국 사회 본류에서 철저히 배척당한다. 이런 핍박 속에서도 그들이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 그리고 2세대 3세대까지 이어지면서 그들의 애국심이 이상적으로 높게 형성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재일교포 중 대부분은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거나 혹은 그들을 지원했던 계층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 정부의 이후 행보와 북한의 움직임, 일본이 전쟁 물자를 대면서 이어지는 미국의 의도 등을 제 3자의 눈으로 정확히 꿸 수 있었던 입장에 있었기도 했다. 물론 이승만의 거짓 일풍, 북한의 도발 등의 원인 역시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거의 모든 북한 관련 보도는 일본 언론을 인용한다. 물론 모든 보도를 다 인용하지는 않는다.
일본에 당시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 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기십만명에 이른다. 동시기 대한민국의 인구 분포를 생각해보면 적어도 원내 의석은 확보할 만큼의 세력을 얻을 수 있는 적지 않은 인구다. 그래서 이들이 '일시'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계층이 만 단위가 넘어간다는 것은 정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으니까, 물론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이들의 개별적인 입국까지 제한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입국 자체의 인원수를 고의적으로 제한하거나 이들이 귀국을 하더라도 사회적 활동을 하기 힘들 정도로 도의적인 '차별'이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이들이 원내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게끔 보이지 않는 손을 작동시킨다. 물론 국민적인 캠페인을 통해 이들 재일교포에 대한 '반민족적 감정'을 고취시켜왔을 것이다. 물론 추성훈과 이충성이 당했다고 하는 그 암묵적인 차별 역시 이에 의한 잔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던 와중 매우 이례적인 사례가 생겨난다. 바로 '롯데그룹 신격호'라는 존재, 사회적 활동이 극도로 제한적이었던 당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자금력이 아무리 세다고 한 들 정부에서 대놓고 막기 시작하면 출자는 고사하고 구멍가게 하나 못내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음에도 롯데는 이미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아무 무리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이른바 '외회모으기'전략에 편승, 사업자금 명목으로 외화를 합법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창구역할을 할 기업이 필요했던 정권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부분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가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 롯데를 설립할 수 있었던 데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가 이미 '일본'국적을 취득한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재벌을 논할때 언제나 '깜빡'할 만큼 존재감이 미미한 '롯데', 왜 존재감이 미미할수밖에 없었는지, 혹은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정권이 매번 의도적으로 막았는지, 아니면...역시 돈이었는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재일교포'의 제한적 입국 조건은 다름아닌 '재일한국인'이 아닌 '일본 국적을 취득한 한국계 일본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최근에는 정권 자체적인 터치가 그다지 없어 입국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사회적 본류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한국 국적을 버려야만 한다. 추성훈이 유명해진 건 사실 유도협회의 석연치않은 판정이 있었던 당시가 아니라 이미 국적을 바꿔 부산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 직후였고, 이충성이 아직 재일교포였을 당시에 실력을 떠나 그를 주목했던 언론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풍토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게다가 이들이 '재일교포'였을 당시 이루어졌다던 교묘한 '알력'과 '차별'그리고 그러한 차별 사실이 이루어지던 당시가 아닌 그들이 이미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일본인이 된 이후 밝혀진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일본 국적의 일본인이 아니면 사회 본류에 합류할 수 없는 이 개같은 환경이 만들어질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참정권'과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된 친일파들의'일풍공작'과 깊은 연관이 있다. 사실 이들이 재일교포로서 한국에 들어올때와 일본 국적을 취득한 뒤에 한국에 돌아올 때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완전히 엇갈릴수밖에 없는데, 즉 재일교포는 말 그대로 '한핏줄'이 되지만 일본 국적을 취득한 이상 '일본인'이고 남의 나라 남의 시민이라는 여론이 팽배해지게 되며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어도 언제든지 그들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여론적 약점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다. 한마디로 찍소리만 내면 쏴버리겠다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같은 의미로 한순간에 애국자에서 돈벌러 온 외국인으로 전락한 추성훈
이 정도의 패널티를 감수하고 한국 사회의 본류에 합류한다고 해도 절대 합류할 수 없는 불가침영역이 생긴다. 아직 우리나라는 국내거주 외국인의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투표나 출마는 고사하고 심지어는 특정 후보에 지지를 표명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깝다. 만일 이들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재일교포인 채로 한국에서 활동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어떨까? 당연히 한국 국적을 가진 이들은 얼마든지 투표는 물론 선거운동과 출마까지 가능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친일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겨우 백년대계를 거치며 독립운동가1세대들을 싹쓸이하는데 성공했는데 그 명맥을 해외에서 꾸준히 이어온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애국심) 세대들이 정치판에서 새 바람을 일으킬 경우 겉잡을수가 없게 된다. 겨우 잠재워놨던 친일파 색출 여론이 들끓게될것은 물론이고 이들에 의해 그간 벌여왔던 일풍과 북풍이 깡그리 거짓이었다는 것이 까발려지는데다가 이후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일풍과 북풍을 활용할 어떤 근거도 만들 수 없는, 즉 당장의 패배는 물론이고 이후 재기를 모색할 수 있는 역전의 가능성마저 남김없이 빼앗겨버리는 최악의 사태를 각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친일파 세력은 이같은 '사회 전반적인 참여 제한'과 더불어 재일교포와 국민들과의 교류로 인해 발생되는 새로운 여론이 확산되지 못하게끔 만드는 일종의 보험을 들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그들의 '국적' 이른바 '쪽바리 이미지'다. 이미 일본 국적을 택한 사람은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을 침략한 역사가 있는 일본 국적을 택해 일본을 위해 산다는 식의 이미지를 심는다. 그런데 이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풍이 먹혀들지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지금에서 쪽바리 드립으로 그들을 쥐어잡기에는 역부족일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또 하나의 보험을 들게 되는데...

국민 누구도 북한 출신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만큼은 막고 싶어할 것이라는 걸 친일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친일파들은 그렇게 자신들을 '차선'이 아닌 '차악'이미지로 집권을 계속해왔으니까...
재일한국인을 포함한 일본 거주 외국인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자이니치'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외국인을 통칭한다. 일제침략기 당시 일본에 강제이주한 재일교포들은 한반도 전국 각지에 적을 둔 사람들이었는데 바로 이 부분이 친일파가 이들의 돌발행동에 대처할 보험으로 활용될 이른바 '출신 성분'론의 기초가 된다. 다시말해 니가 진짜 남한 출신인지 북한 출신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는 아주 포괄적인 북풍을 일으킬 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재일교포 출신 기업가가 정치에 참여한다고 치자 대중적인 인기도 높고 당선 가능성도 높은데다가 공약으로 '친일파의 완전 청산'을 들고 나와 여론으로 친일파 행적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게 된다면? 이미 일본에 충분히 자리잡을 여건이 되는 그를 친일파가 공격할 건덕지는 별로 없다. 이미 정보력에서 친일파가 한참 뒤지는 데다가 까발리는 쪽이 까발려지는 쪽에 비해 논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를 위한 보험이 바로 '출신 성분', 즉 그런 그를 '북한 출신'으로 몰아붙이거나 심할 경우 '북한과 내통한 조총련계'로 몰아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진짜 북한 출신인지 조총련과 관계가 있는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금의 일본에서 자이니치의 구분법, 즉 남한 북한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일종의 사회적 약점을 역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는 건덕지를 만드는 것이다. 성분드립이 시작되면 아무리 그가 친일파 청산을 외친다한들 그의 모든 발언은 신뢰도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북한의 공작'을 받고 '정권을 무너뜨려 북한의 침략 발판을 마련하는' 공작원의 공작으로밖에 치부되지 않게 된다. 아무리 국민들이 친일파 청산이 급해도 북한과 내통하는 인사를 정치권에 넣어줄리가 없다는 것을 지난 몇십여년간 북풍을 활용해왔던 북풍 종결자 친일파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인 것이다.

모순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일본 국적으로 바꾼 뒤에도 여전히 정체성은 한국에 쏠려 있는 이유, 그런 그들을 일본 국적으로 바꾸었다며 매국노라고 욕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모순투성이다. 어느 한 쪽이 반드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는 한 성립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확실한데, 그게 과연 누구일까? 확실한 것은 자이니치는 한국에서 매국노라고 불리건 불리지 못하건 별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지만, 그들을 그렇게 부르도록 만드는 세력은 그들을 매국노로 매도하며 사회의 주류에 합류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본다는 것 정도일까?

5부에서 계속....
posted by RushAm 2011. 2. 17. 00:14
1부에서 언급했던 친일파 시조급 인사들의 혁혁한 공로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과 피해, 그리고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 아니 이어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누구보다 친일파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가 정말 우울한점이 대한민국 근대사에 대해서 친일파가 아닌 분들보다 친일파 새끼들이 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근대사에 대해서는 예전 박통시절도 아닌 이상 조금만 찾아보면 외국인의 손에 의해 보다 객관적으로 서술된 자료를 정말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친일파는 이에 대한 나름의 동기 부여가 될 만한 이유가 있다. 역사를 충분히 바닥에 붙은 먼지까지 훑을 만큼 충분히 알아야 자신들을 변호할 수 있으니까, 일본이 역사 연구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이유도, 중국이 동북공정을 위해 역사학자들을 열심히 구워삶는 이유도 다 '뭘 좀 알아야'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냥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라며 역사 교과서를 천대시하는 대한민국 학원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친일파들은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사실 '일본이 나쁘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여기에 두 가지의 속임수가 있다는 걸 반드시 인지해야만 한다. 하나는 지난 번 글에서 밝힌 대로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친일파라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본을 씹음으로서 '친일'이라는 단어적 의미에 대한 회피와 희석을 노리는 것이 첫번째이며 두 번째는 '역사에 드러나있는 대로 일제의 침략과 그로 인한 전 국민, 국토의 피폐화의 대한 책임이 100% 일본에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이제부터 차차 짚어보도록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봉 부통령과 1954년 월드컵 예선전부터 추진했던 한일전, 그리고 정권 내내 꾸준히 주장해왔던 이른바 '반일 정신'은 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 '개과천선'의 이미지를 가져다주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가 경력에 어울리지 않은 광복 이후 친일파와의 정치적 결탁은 누구 하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었지만 (특별히 드러내지 않아도 이미 국민들 대부분이 세대가 같기 때문에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김영삼 대통령의 IMF를 기억하듯이) 의외로 4.19까지 이렇다할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정권을 잡은 뒤 열심히 '자신들의 반일 성향'을 어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은 성골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 정권 말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렇듯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을 지원사격해주면서까지'반일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대표팀 숙소에 삶은 계란 준 에피소드도 있었다. 사실 그렇게 유명해질만한 일화도 아니건만...


우선 앞서 언급한 대로 국민들에게 '친일파'에 대한 이미지를 하루바삐 벗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아쉽게도 정이 넘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러한 거짓 개과천선을 믿어버린 채로 지지를 보내게 되는데 물론 여기에는 그들의 개과천선과 더불어 앞서 언급했던 '북한의 위협'을 언급했던 것이 주효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들을 구제해줄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생긴 친일파에 대한 반감을 돌리기 위한 방편, 즉 빨갱이 후보가 당선되면 이북이 다시한번 남한을 공격하게 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정권을 정당화하며 국민들을 위협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그들의 정권이 굳이 투표 조작을 하지 않더라도 지지율이 오를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렇듯 계속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는데 1960년까지 연임하며 한국전쟁으로 벌어들인 각종 국제적인 이득 조항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내수 시장을 팽창시켜나간다. 이른바 미국의 고도성장최전성기라 불리우는 이 시대에 가뜩이나 한국전쟁 휴전협정 성과를 내세워 재선에 성공한 (미국은 어쨌든 임기 내 종전 업적을 남기는게 킹왕짱임) 아이젠하워에게 있어 틈만나면 반동이니 뭐니 북한을 자극하며 자신들의 정권을 지켜나가려는 친일파들이 달가워보일리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미국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듯한 이 시대 친미파의 교과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헛기침 한방에 바로 쫄아주시는데 공교롭게도 문제의 아이젠하워와 재임 기간을 같이한 이승만은 그 뒤 재임 기간 내내 북풍을 활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된다.

소련 덕분인지는 몰라도 종전 후에는 나름 ㅎㄷㄷ한 리즈시절도 누렸던 북한..


이승만은 가뜩이나 불안한 내정을 바로잡을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북풍'이 사라지자 정치적 입지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사실 미국의 간섭을 무시하고 멋대로 북풍을 이용할수도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군사력으로는 북한과 단독으로 맞서서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나몰라라'하는 상황에서 정말 북한이 재침공이라도 하게되면 정권이고 뭐고 다 끝장나게 생겼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대신할 것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일본'이다. 즉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반일 감정이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극도로 심했던 시기는 다름아닌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자신과 반대편에 서 있던 독립운동가 정치세력을 규탄하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일본을 싫어하게 만든다. 우리나라가 일제침략기를 거친 것도, 지금처럼 못살게 된 것도 다 일본 탓이다. 남북전쟁을 부추겨 중간에 무기중간도매로 엄청난 이익을 챙겨 경제부국이 된 야비한 국가다라고 일부 진실을 섞어 일본을 철저하게 호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독립운동가 세력의 '일제침략기에 대한 친일파 책임론'을 회피하고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한 포석임에 다르지 않았지만 사실 이승만 정권에는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다. 군사력으로는 북한이나 일본이나 밀리긴 마찬가지였지만, 좀 건드리면 우리를 바로 작살낼 수 있는 힘을 보유했고 그 힘이 닿는 사정거리에 있던 북한과는 달리 일본은 당시 전범국으로 발이 묶여 아무리 도발해도 우리나라를 공격해오지 않을 거라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심지어 한국전쟁기간중에도 일본의 침략을 걱정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재임기간 내내 일본의 재침략 가능성을 제시하며 일풍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해먹는다.

이승만이 무려 한국전쟁 당시부터 임기말까지 이용해먹었던 일풍의 근거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장면, 내용을 보면 이승만의 일풍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러한 일풍은 윤보선 이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 의해 다시 '북풍'을 이용하는 쪽으로 변화되며 정말 타이밍 좋게 이승만이 사망한 직후인 1965년부터 미국의 압박에도 거의 진척이 없었던 한일협정이 재개되는 한편 침묵하던 북한이 도발을 즉시 개시하며 박정희의 재임기간 16년간 무려 29건의 진실과 거짓이 섞인 북풍 도발이 기록된다. 정계에 빨갱이 색출 작업이 재개되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북한 도발은 윤보선과 김대중과의 대결이 시작되었던 1967~71년사이에 집중되었다.

이렇듯 거의 1,2,3공화국 대한민국의 경제부흥기 정권의 핵심을 틀어쥐며 대한민국에 뿌리를 박은 친일파와 그의 후손들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이들은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이 가능한 '반일 감정'을 더 많이 가져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잊을 만 하면 일제침략기를 들먹이며 종군위안부 문제를 뉴스에 올린다.(동아일보가 대표적) 그리고 가능하면 일제의 만행이 좀 더 이슈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이승만이 그랬듯, 자신들의 차악과 개과 천선 이미지와 더불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이 일제의 만행보다 더 작게 비춰지길 원하며,  그 시기의 모든 국민적 고통에 대한 책임을 일제에 전가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실 부분이 있다. 바로 뉴라이트라는 조직의 존재 의미다.  뉴라이트는 일본의 우익교과서를 지지하며 위안부를 부정하는 등, 그야말로 대놓고 친일임을 과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들이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인데, 이들이 지원하는 뉴라이트의 활동을 보면정말 친일파들이 국민들에게 개과천선의 이미지를 심고 있는 것이 맞느냐는 반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뉴라이트의 주요 먹이 '역사교과서' 문제 그들은 사실 가능하면 일본의 만행에 대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적힌 역사교과서가 채택되길 바란다, 사실 역사교과서가 의무교육이 되길 바라는 쪽은 친일파쪽이 더 적극적인데. 단! 가능한 만큼 일제강점기의 만행들은 대부분 일본의 책임이라고 기록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뉴라이트를 이용해 '일본 강점기를 옹호하고 변론하는' 기자회견을 몇 번이고 갖는 것이다. 이러면 국민들은 발끈해서 국사 교육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가능하면 일제에 대해 더 크게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의 친일 행각보다 일제의 악랄함이 더 크게 부각될것임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실 뉴라이트는 모로 보나 바로 보나 친일파의 정실(?)이라고 보긴 힘든 구석이 많다 그들의 성분 상 가문 단위의 친일 전력도 별로 없고 일부 맴버를 제외하면 정말 어디에서 뭐하다 나왔는지 모를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의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들이 대체 지금와서 친일을 해서 대체 무슨 이득을 볼 수 있냐는 것, 아무리 친일파가 빽이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들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사회생활하면서 이념이 다른 사람과 섞이기 두고두고 어렵다는 것을 각오한 이들의 무모함은 마치 자살폭탄테러에 뛰어드는 인간폭탄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이 부분에서 답이 이미 나온 셈인데. 그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을 싫어하게 만드는' 즉 일본을 주적으로 만들게끔 공작하는 공작원들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이들의 활동 내용, 즉 일본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키는 데에 전력을 쏟는다는 것. 바로 이 코드가 일본의 극우랑 맞아떨어져. 일본의 극우들과 연합해 교과서를 만들거나 일본의 극우들의 활약에 동조함으로서 뉴라이트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의 극우 이미지가 되는데, 이로 인해서 뉴라이트가 득을 보는 것은 사실 거의 없다시피한다. 하지만 뉴라이트로 인해 일본을 주적으로 돌려 일제침략기에 대한 책임을 연신 일본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성공한 댓가로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친일파 청산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던 진성 친일파들은 아주 짭짤한 재미를 본다. 이들에게 있어 뉴라이트는 총알받이... 친일파들에게 자금을 받아 알바를 뛰는 소모품일 뿐인 것이다.

친일파는 종군위안부를, 일본 극우는 요코다 메구미를 주기적으로 이용해먹는다.


뉴라이트의 활동은 일본 극우와 맥을 같이한다. 일본 극우 역시 젊고 유능하며 사회적 명망이 있는 인사들을 대거 지원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한국에서는 뉴라이트가 그 젊고 유능하며 친일파들의 스폰서를 받는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세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역할은 가짜 친일파가 되는 것, 가능하면 과거 친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지금 와서 당시의 일본을 지지하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나가는것, 그래서 다시금 일제강점기가 일어나고 당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등의 저항이 잇따라 실패로 돌아간 원인에 대한 책임을 모두 일제에게 싸잡아 떠넘기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며 권력을 쥐고 후에 있을 자신들의 후손에게 닥칠 친일파 책임론을 회피하기 위한 친일파들의 중장기 방안인 것이다.


4부에서 계속
posted by RushAm 2011. 2. 11. 16:59
1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시작되는 친일파들로 인한 우리나라 근현대 흑역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굴욕적 일제 전범 보상 판결에서 절정을 이룬다. 중요한 점은 광복 이후의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3년 이상 정권을 잡았던 세력 중 어느 하나 친일파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벌인 행적은 실로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무려 친일파로서 '독재'까지 쌍으로 지랄을 해대는 통해 국민들은 둘 중 어느쪽부터 잡아야 할지 감을 못잡았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이른바 '친일파 권력층'은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이봐 우리들보다 나쁜 놈들이 훨씬 더 많다구)

그 대상은 다름아닌 공산당이다. 북괴라는 단어보다 공산당이라는 단어가 주적으로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말 한마디 잘못 한 죄로 해괴한 짓을 당했지만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세상에 이름을 남긴 이승복군 덕분이리라, 아무튼 이 공산당의 존재 그리고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불리는 한반도 내전, 이 내전 속에서 우리는 북한이라는 주적을 얻었다. 왜 주적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북한의 수장이 저지른 일로 인해 북한 주민 전체를 적시했던 게 불과 20년전 이야기였다. 그만큼 친일파들은 적이 필요했다. 나라가 평화로우면 그동안 평화롭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지도층의 책임을 묻게 되니까... 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동안에는 언제나 한국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여야만 했다. 국민들은 이미 끝난지 한참 지난 전쟁을 아직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라는 점을 강조하는 국가 지도층 때문에 언제나 북한에 벌벌 떨어야 했다. 친일파 권력층들은 '차악'의 이미지로서 북한을 일단 막고 난 다음에 생각해보자는 식의 정치 키워드를 국민들에게 던졌고 국민들은 그에 철저하게 놀아났다.

군대가 모병제가 되면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건 누구보다 정부 본인들이 제일 잘 안다. 예산 집행을 하는 당사자들이니까, 그런데 왜 안할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공식적으로 줄어든, 혹은 줄어들 것으로 확정 발표한 군 복무 기간은 다 합쳐 10개월이 넘는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3년동안 페지안을 포함해 갑자기 늘어난 복무기간이 6개월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시작전 통제권을 돌려받기로 한 2011년인데 왜 이명박이 미국에게 전작권 받는 것을 4년 연기한걸까? 참여정부 막바지 노무현이 김정일을 만나고 국방부장관들이 활발하게 협의하던 '종전'선언 문제가 왜 갑자기 쏙 들어가고 참여정부 5년동안 아무일 없었던 서해안에 왜 두 번이나 폭격이 있었던걸까?

6.25 당시의 자료사진....이 아닌 2010년 말 연평도


그들은 모병제가 되면 안된다. 군 복무기간도 줄어들어선 곤란하다. 전작권도 미국이 계속 쥐고 있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종전 선언'이 이루어지면 친일파들은 끝장이다!

군 복무기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국가가 이미 '이 나라는 전쟁의 위험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즉 나라가 평화로우면 내정의 비리, 그리고 과거사 청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 당연히 친일파에게 그 화살이 날아올수밖에 없다. 모병제가 되면 훨씬 위험하다. 지금이야 거의 대부분의 남자, 즉 누군가의 아들이나 오빠 남동생, 가족의 일원이 '군대'라는 것을 감으로서 아직 이 나라가 군대가 필요한 나라라는 점을 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군대라는 키워드는 전국민화되었고, 언제나 시기적절하게 군 관련 가산점같은 팩트에 벗어난 정책을 쥐었다 놨다 하는 식으로 여론을 들끓게 만들어 군대에 대한 관심과 국가 위기 상황을 고취시키는 것이 가능했는데 만일 모병제가 되어 가고 싶은 사람만 가게 되면 전국민적인 키워드 '군대'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하락할 것이고, 그 다음은 뻔하지 않은가? 종전 선언은 아예 '전쟁 끝'이니 친일파들에게는 '인생 끝'이나 다름없다.

전작권 4년 연기는 좀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왜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게 4년 더 맡아달라고 했을까? 그것도 아주 절묘한 숫자 4년... 이명박의 임기는 2013년 3월에 끝난다 . 그리고 전시작전통제권 종료 시점은 2015년 12월, 원래 환수 예정은 2011년 즉 지금 환수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된 거다. 참고로 19대 총선은 2012년, 대통령 선거도 2012년, 그리고 다음 지방선거는 2014년에 열린다. 그 다음 총선은 2016년에 열리는데 보통 추세대로라면 4월에서 5월 사이 늦봄에 열린다. 2015년 그것도 12월 끝자락까지 연기한 속사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2011년에 전작권 환수가 되어버리면 2012년 총선 대선은 당연히 친일파에게 불리할수밖에 없다. 만일 대선에서 지고 총선에서도 패배해서 다시금 친일파들이 정권을 빼앗기게 되면 반격할 만한 근거를 만들어야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기까지 채 2년이 안걸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야당이 껀수를 만들어 대통령을 쳐야만 한다. 전작권은 그에 대한 보험이다. 그리고 그 반격이 성공하는 정점에 2014년 지방선거와 2016년 총선이 있다. 그 뒤로는? 누가 당선되더라도 레임덕 확정적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말년이 어땠는지 생각해보자


전작권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해보자, 북한이 우리나라가 정말 짜증나고 미워서 혹은 심심해서 천안함을 치고 연평도를 포격했다고 하면 크게 오산이다. 그 이후 북한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보면 목적이 너무 확연히 보인다. 결국 북한은 '미국'이 목적이었지 한국을 도발해서 전쟁 분위기 고취시키고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더 심하게 말하면 북한 머릿속에 대한민국은 아웃 오브 안중이다. 우리가 북한에 쌀을 몇만톤을 줘도 미국에게 협상 한번 이끌어내는게 북한 입장으로서는 국익이 훨씬 도움이 된다. 북한은 어떻게든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야만 하는데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보다 별로 없다는 것이 북한으로서는 치명적이다. 미사일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가장 가까운 미국령인 괌까지의 거리 절반에도 못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시작전통제권, 즉 북한이 우리나라를 공격할 때 군대를 움직일 권한은 '미국'에 있다. 이 전작권덕분에 주한미군의 숫자는 언제나 고정이다. 적어도 작전에 투입될 만한 병력은 주둔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경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전작권을 쥐고 있는 한 우리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곧 미국을 공격하는 것이 된다. 자국민 군대가 상당수 주둔하고 있으니까 (미군이 가지는 전작권은 60만 육군이 모두 미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북한이 우리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을 자극해 미국을 북한이 원하는 협상 테이블로 부를 수 있는 차임벨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친일파는? 전작권을 미국이 계속 갖게 됨으로서 북한이 우리나라를 수시로 필요에 따라 '공격'하게 만들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공격당하면? 당연히 그때마다 좀 느슨해질 뻔 한 반공 감정을 일시에 고취시킬 수 있으니까... 전작권은 미국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북한이 우리나라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며 그 효과를 대선과 지방선거, 그리고 총선의 시기에 영향을 끼쳐 향후 정치전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5년을 연장하기로 합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국 보호는 커녕 오히려 더 위험을 초래하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기 밥줄이 나라의 안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가훈을 몇 대째 이어오고 계시는 친일파 입장에서야 그게 아니겠지만 말이다.

지난 6.2선거 직전 조중동 1면보도행태...



이 전작권으로 인해 북한의 공격이 있을까봐 늘상 벌벌떠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이 북한으로부터 공격받을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나라 중 하나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북한의 군사 도발 움직임에 민감하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북한의 별 시덥잖은 동정을 보도한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일단 오키나와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사정거리가 좀 긴 미사일을 개발하면 오키나와를 폭격함으로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이벤트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첫번째이다. 사실 두 번째가 중요한데, 북한의 이같은 위협, 어찌 보면 단지 전작권이 있다는 핑게로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남한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자국의 자위대 권한을 확대할 명분을 얻는 것이 그것이다. 아직도 일본은 1%의 극우들이 사실상 미디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권력을 독식하고 있는 체계가 무너지지 않고 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격상시켜 일본이 예전 다이쇼 시대의 위상을 되찾는 것이다. 그것이 굳이 세계정복 야망의 부활 같은 해석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군국주의 부활로 자신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층과 후손들이 일본 땅에서 더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부활? 말은 거창하게 해도 사실 밥그릇 싸움일 뿐 얘들도 별거 없다.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는 6.25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정말 북한이 우리나라를 깡그리 먹고 싶어서 전쟁을 일으켰을까? 정말 북한을 단지 정치적 색깔이 같다는 이유로 소련이 그 많은 대량의 군사물자를 지원해준걸까? UN군중 가장 많은 수가 참전한 미군이 정말 평화유지군의 명목으로 온 걸까?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그는 임시정부에서 그 화려한 사상 덕분에 한번 탄핵당한 경력이 있고 김구 선생 암살 사건으로 민심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들의 색출 작업이 본격화되는 등 자신의 대통령 자리는 물론 정치 생명까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6.25 이후 그는 4.19가 있기까지 무려 10년여동안 대통령직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 배경에는 인혁당 사건을 통해 전 국민들에게 종전 대신 전시상태라는 공포감을 심어주어 주적 감정을 북한으로 집중시키는 가운데 반민 특위를 해체함으로서 자신에게 돌아올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최근 무죄 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사건이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죽산 조봉암 선생은 소련의 컨트롤로 북한이 남침을 기획한 것과 이승만을 앞세워 소련과의 대리전을 펼치려 했던 6.25의 진실을 잘 알고 있던 인물로 북한의 위협보다 친일파의 청산을 주장했던 독립운동가 세력의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북한의 남침을 적절히 이용해서 정치생명을 연장하고 친일파 색출을 늦추려는 이승만과 대치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부에서 계속...
posted by RushAm 2011. 2. 10. 18:25
지난 기성용의 세레머니로 인해 다시금 화두로 떠오른 '반일 감정'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이 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반일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분들이 속속 돌아가시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새삼 이 반일 감정에 대한 '원천지'에 대해 무척 알아보고 싶어졌다. 정말 이 반일 감정이라는 물건은 일제 강점기 당시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에 의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일제의 사악함을 잊지 않고 일본을 적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그러기에는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참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런 반일 감정에 비해 당시 나라를 팔아먹었던 친일파들은 이상하리만큼 청산이 어려웠고 심지어는 친일파 출신 대통령이 10년여간 독재를 지속했으며 일본 이름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지금 상황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갔다. 그래서 한번 찾아보고 생각해본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광복은 '종전'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광복을 '태평양전쟁'의 종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차세계대전'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일본이 '임진왜란'때처럼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가 일본에 당한 것 자체는 사실이긴 한데 전쟁에 패해서 식민지가 되었던 2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나 폴란드와는 좀 다른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일본은 '조선'을 반드시 칠 필요도 없었고 군사력으로 쳐서도 안됐다. 일본의 목적은 대륙 정벌이었는데, 기본적으로는 당시 조선과 맞짱을 떠서 이길 승산도 없었고 이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이순신에게 남해안에서 캐작살난 걸 아직 잊고 있지 않고 있었던데다가 그 전에 미국이랑 프랑스가 서해안에서 캐작살나는 걸 똑똑히 봤기때문에 일단 조선이랑 맞짱을 떠서 이길 자신도 없었고 이기더라도 반 이상 작살난 군대로 대륙정벌의 야망을 꿈꾸기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우리조상님들만랩쩔어주시던시절.jpg
그들의 전략은 우선 조선을 피 한방울 안흘리고 취하는 것에 모아졌다. 당연히 그러려면 정치 조직을 쥐어잡는 것에 집중할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주목한 쪽이 급작스럽게 10년도 아니고 3대 100년 권력을 갑자기 흥선대원군에게 빼앗긴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2인자로 전락한 안동 김씨는 흥선대원군 10년동안 그야말로 좃to the망했는데, 그들이 해왔던 온갖 정권비리 (벼슬을 돈으로 사고 파는) 나 나라에서 하는 고리사채업 (환곡) 제도를 속속 폐지 정비하면서 순조, 현종, 철종까지 이어지며 홍경래의 난, 임술 민란등으로 대표되는 민심 상실을 속속 회복해나가던 중이었기에 민초들의 지지율마저 높았던 흥선대원군 세력을 상대로 그들이 다시 정권의 주도권을 되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들에게 생긴 서포터가 바로 일제였다. 말이 좋아 대연정이지 역사상으로는 정말 대실패에 가까웠던 흥선대원군의 '안동 김씨 며느리 들이기' 는 결국 흥선대원군의 10년 이후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에 의해 개방의 빗장이 풀리며 속속 일제를 비롯한 타국과의 교류 조약이 체결되는 것으로 뒤통수를 맞게 된다.

(사실 명성황후의 개방 정책은 그렇게까지 나쁜 게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패착일수밖에 없다. 뭐 원인을 따지자면 흥선대원군 본인의 욕심 탓에 고종 즉위 이후 10년간 실권력을 휘두른 결과 고종의 정치 역량이 제대로 성장할 기회가 없어 결국 흥선대원군 이후 명성황후의 꼭두각시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때문이기에 뭐라 하소연할껀덕지가 없긴 하지만)

그 중 일본과의 을사조약은 부당하기 그지없는것으로 유명한데, 뭐 하나 아쉬울 게 없었던 조선에게 왜 이런 조약이 강제될수밖에 없었는지는 두말할필요없이 정권 내 핵심 세력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다수결은 아니었지만, 신하들이 허위보고를 하더라도 짬이 높고 쪽수만 많으면 대세가 되던 시절이었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일본이 이를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 정권 핵심은 놓쳤어도 나름의 세력과 정 2품 정도의 참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안동 김시 세력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정권을 조금씩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신들이 정권을 되찾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최면술사 일제의 작품이었지만, 그에 놀아나 한치 앞을 못보고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일본이든 뭐든 나라를 팔 작정을 진즉부터 했던 매국노 (당시에는 아직 권력침탈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친일파까진 아니었다) 시조 늙은이들의 노망짓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왜 우리나라 첫 개항지가 부산이 아니라 강화도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지 않은가?
왜 일본이 이렇게 번거로우면서도 장기적인 방법을 택했는지는 당연히 일본이 국제 정서에 더 밝았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직접 조선과 전쟁을 선포하면 조선은 당연히 청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해 필사 저항할것임에 자명했고 청나라가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은 당연히 그 청나라와 인접해있는 유럽에도 소식이 전해지는 건 당연했다. 1차 대전으로 전쟁이라면 아주 치를 떨던 유럽에 전범 이미지를 주는 것은 향후 정복계획에 있어 상대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미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만국평화의회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그들은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침탈을 어떻게든 '내전'으로 위장할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직접 침탈보다 내분을 유도하는 식의 장기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헤이그 특사의 비극을 모두 잘 배웠을 것이다.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열사는 본회의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일제의 부당함을 설파했지만 그에 대한 의회의 반응은 단지 '조선이 불쌍하다' 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헤이그 특사의 실패 원인은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일제가 영국과 짜고 방해공작을 펼쳤다거나 미리 의회를 구워삶았다는 식의 설이 당당히 교과서에 나오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만국평화의회는 조선의 상황, 즉 일본이 연루되어 이는 아주 특수한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네이티브가 아니었던 이위종 열사가 그걸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고도 생각하기 힘들다. 결국 이 만국평화의회는 조선의 상황을 단지 '두 가지 정치 세력이 부딪힌 정치 내분 정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이 의도했던 바와 맞아떨어진다.(누가 봐도 사실 고종과 안동 김씨의 정치권력다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테니, 이는 이후 일제의 비교대상으로 지목되었던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가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았는지를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처음부터 이를 계산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헤이그 특사가 실패하고 일제의 침략을 침략으로 인정받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외세에 국가를 내주면서까지 내 배때기에 기름을 끼게 만들겠다'는 친일파의 시조들이 벌인 초딩짓 때문이었음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이는 정말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이 얼마나 세계정복을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인데, 결국 이 당시 일본 편을 들었던 영국은 일본이 '설마' 4억 인구의 영국을 칠 거라고는 꿈도 못꾼 채 방심했다가 캐발렸다. 만일 일본이 처음부터 조선과의 '전쟁'으로 첫 단추를 끼웠다면 영국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만큼 일본을 얕보았을리가 없었을것이다. 만국평화의회에서 발언권이 한층 불리해질것임은 물론이었다.)

이런 이유로 세계사에 대한민국 침략사는 전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8월 15일이 종전이 아닌 해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권을 빼앗긴 거라고 교과서에도 나와있듯이 말이다. 본격 전쟁은 청일전쟁, 러일전쟁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청나라가 캐발린 이유는 조총 때문도 아니고 청나라가 병신이어서도 아니라 우리나라가 정말 맘먹고 상대국 침략전쟁 일으킨다고 치면 정말 잘나갈수밖는 천혜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옛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 알겠지만 수도가 국내성, (즉 지금의 신의주를 기준으로 압록강 상류쪽 꼭지점 부근) 눈앞에는 압록강과 옆에는 백두산을 필두로 한 개마고원이 떡 버티고 있다. 농성에는 이민한 곳이 없다. 이 곳을 베이스로 전쟁을 일으키면 아무리 대군이라도 침략 루트는 제한적일수밖에 없고 상대국은 소모전 빼고는 딱히 답이 없게 된다.(고구려의 후손 발해민족이 옛 고구려의 그 광대한 영토를 되찾는데는 채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신생국이 불과 1세기도 안되는 기간에 얻은 영토치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러일전쟁은 두만강 끝자락, 청일전쟁은 압록강 끝자락, 바다를 끼고 있으니 옆구리 치기도 안되니까 대군이 아무리 많아도 정체만 될 뿐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천혜의 요지를 일본이 군사로 내리누르려 했다면? 청일전쟁으로 군사력을 전부 압록강 근처까지 대치하던 와중에 가뜩이나 개김성으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았던 조선 국민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신중하게 정권을 차츰 침탈해가는 것은 물론 공포 정치를 통해 이렇다할 분란을 일으킬 것을 적절히 차단했어야 했다. 물론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친일파의 시조분들의 혁혁한 친일 행적 덕분임은 역사에 너무나도 잘 나와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국제재판소에서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상 판정을 받기가 힘이 든 이유도 이 전쟁의 직접적인 책임에 대한 회피를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각종 증거들을 일본이 속속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침략전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첫번째이고 두 번째가 국제법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각종 조약 문서 때문이다. 물론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시발점은 누차 강조하듯 '친일파 시조'분들의 절대적인 공적임에 다르지 않다. 즉 친일파들의 한치 앞을 내다보지 않으신 눈 앞의 권력욕으로 인해 벌써 3대 아니 5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이 한 짓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못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옛 이야기'일 뿐이라며 애써 후손의 면책을 주장하시는 친일파의 후손분들에게 우린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2부에서 계속...
posted by RushAm 2010. 7. 28. 22:15
카메론 디아즈가 최근 80년간 한 사람만 살도록 하는 제도인 결혼은 미친 짓이고 적어도 5년마다 한 번씩은 연애 상대를 바꾸어야 한다는 등 자신의 남성 편력을 밝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그녀의 발언은 그녀의 현재 입지만큼이나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데요. 너무나도 해묵은 논쟁인 결혼 제도의 정통성과 정당성부분부터 남성에 대한 기준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한 정의를 내려버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이같은 발언은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녀가 굳이 자신의 남성 편력을 언론에 밝히게 된 이유와 목적이 너무 뻔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Cameron Diaz arrives at the French premiere of the film Night and Day in Bordeaux, France on July 23, 2010.   UPI/David Silpa Photo via Newscom

개인적인 권리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오히려 현대에 오면 올 수록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주관이 점차 떨어진다는 연구 보고가 있습니다. 즉 사람이 연애 상대를 고를 때 그 상대가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보다 그 상대로 인해 자기 자신의 평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더 많이 신경쓴다는 것이죠.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상이 호리호리한 미소년에서 근육질의 짐승남으로 1년에도 몇 번씩 바뀌는 이면에는 자신의 주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이성을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이른바 '사회적 명품'으로 치부하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즉 언론 혹은 그 외에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의 직 간접적 발언에 의해 사회적으로 '대세'를 타고 있는 남성상을 자신의 옆에 둠으로서 현 사회 흐름에 발빠르게 대처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DNA적으로 내제되어 있는 개성적인 이성관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죠.

이는 남성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은데요. 흔히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는 '예쁘면 된다'는 남성의 이성관 속에는 정말 복잡하고 세세한 제각각의 이성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흔히 '예쁘긴 한데 내 타입은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 사실 이 말 속에는 남성의 속내가 감추어져 있는데요. '예쁘긴 한데'는 이른바 '통속적 평가'이며 뒤에 붙은 '내 타입은 아니다'라는 말에 본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생긴 이유 역시도 보편적 이성관에 근거하는데요. 미디어 혹은 일반적으로 남성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보편적인 이상형, 즉 외모로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연예인이 그 보편적인 이성관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남성들은 이 보편적인 이상형이 가장 이상적인 미인형이라는 새뇌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주입받게 되고 결국 주관적인 평가 기준을 점점 잃어가게 되는 것이죠. 언제나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예쁘냐?"다음으로 듣는 질문 '연예인 중에 누구 닮았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보편적 이성관은 현대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미디어나 설득력 있는 인물의 발언으로 확대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의외로 둘 중에 이성관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물의 발언 쪽입니다. 영향력 있는 인물을 들자면 흔히 연예인을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꼭 연예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데요. 기본적으로 자신이 '동경'할 수 있을 만큼 롤 모델로서의 가치가 있는 인물 즉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혹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주로 영향을 끼치는 대상으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상적인 존재로서 '인기 연예인'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만 4살 이상의 나이차이가 나는 손윗사람 (대체적으로는 학교 선배 정도) 역시 연예인 못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이들의 발언은 과연 정말 '인생 선배'혹은 '성공한 롤 모델'로서의 참고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이를 가늠하기 전에 우선 그들이 과연 내 나이때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그들도 보다 나이가 어린 시절에는 이른바 '주관'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던 시절이 있을 텐데요. 그들이 그 시기에 지금의 보편적인 사회적 기준에 맞춰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스스로 고민하고 해답을 찾았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옵니다. 즉 그들 역시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을 주입받고 자신만의 기준을 가열차게 부정당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고, 지금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시키고 있을 뿐인것이죠.

사회적 진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대를 거듭하며 전해지는 보편적 가치관이 사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타고나는 개성적인 이성관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상당한 비극인데요. 당연하겠지만 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타고난 주관을 짓눌러서 얻은 어떤 것이라도 자신에게 꼭 맞는 만족감을 가져다 줄 가능성은 희박하며, 그에 회의감이 들더라도 이미 보편적 가치관에 길들여진 이상 또 다른 보편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 이외에 스스로에게 어떤 처방도 내릴 수 없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카메론 디아즈는 결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녀는 보편적 가치관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주관적 기준을 한 톨도 남김없이 버렸고 그로 인해 자신은 어떤 행복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마치 자신의 인생이 '정당했다는 듯'이 설파하고 있다는 점은 구역질이 날 지경입니다. 자신이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불행한 삶을 사회적 가치로 정당화하고 그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릇된 가치관을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여론으로 고착화하려는 자세는 단지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자유를 넘어 지극히 의도적이고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말 마음 깊숙히 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사회에서 그 사람의 외모, 능력, 재력, 배경, 미래상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든지 신경쓰지 마시고요. 인간의 DNA는 의외로 똑똑해서 자신에게 맞는, 그래서 평생을 함께해도 될 만한 사람을 절대 그냥 지나치게 두지 않거든요. 사람을 평가할때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듣고 생각하고 그래서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연애상식, 이성을 고르는 법 같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지식은 전부 잊은 채로 보고 듣고 느끼시길 바랍니다. 이성을 고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듣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그 무언가를 잠재의식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니까요.

'결혼은 미친짓'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결혼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만, 모든 사람이 결혼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닌것이죠. 저 말을 굳이 수정하자면 '결혼은 때때로 미친 짓이 될 수도 있다' 정도겠네요. 5년 이상 연애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80년동안 살아도 여전히 인생의 동반자로서 행복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현대사회에서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전 근대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만은 아니겠지요 오히려 현대사회에 최적화되었다고 자부하는 5년 연애론자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신만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더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불행하지 않은 사람을 넌 사실 불행한거라고 우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답니다.

가진 자들이 누군가를 탓할 리가 없는 것처럼...
지금 행복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비판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카메론 디아즈는 그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행복하지 않은 자들의 동반자살론에 귀를 기울이는 건 이제 그만두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 사회를 자신들의 삶에 맞게끔 바꾸어나가더라도
그래서 그 보편적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더라도

결국 인생은 내가 행복하면 장땡이니까요.
posted by RushAm 2010. 6. 12. 03:34
긴 생머리를 '로망'이라고 표현하는 남자, 대략 그 비중이 절반 이상쯤 된다고 체감상으로도 실제 보도상으로도 표현되고 있을 만큼 이미 '대세'로 자리잡은 일반화된 여성관이 되었는데요. 이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나오고'만 있었지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뭔가 속시원하게 생각하고 답해주는 곳이 없더군요. 게다가 저는 개인적으로 긴 생머리에 대한 어떤 고집스런 로망도 없기에 더욱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화국 연구소의 주제는 다분히 '개인적인 호기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이번 시간에는 어째서 남자들이 긴 생머리에 열광하는 것인지 그리고 여성들은 과연 이런 남성들의 대세적인 취향을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연구는 개인 연구 결과이므로 어떠한 학술적 검증이 되지 않았으며 신뢰 여부는 본인 판단에 맡김을 밝혀둡니다.

우선 시초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기본적으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느 쪽이 먼저였던 간에 이 긴 생머리 패션은 생각보다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명'이 만들어져 여성들이 '헤어 스타일'을 임의대로 조절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긴 생머리 스타일이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기르면 된다는 생각을 보통 머리를 길러보지 않은 분들이 하시곤 합니다만, 정말 긴 생머리만큼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없는데요. 그런 고로 시초로 치자면 머리 스타일을 가위 혹은 무언가로 다듬기 시작하면서 생겨날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나마 모나리자의 헤어스타일이 가장 가까운 편


그래서인지 이 긴 생머리 스타일에 대한 자료를 고대 유물에서는 의외로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클레오파트라도 이른바 '이집트 파마'를 하고 있고, 미의 신 비너스도 그림상에서는 거의 웨이브에 가까운 긴 머리, 석고상으로는 장정구 파마(...)이므로 지금의 이상적인 긴 생머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지요. 이건 동양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부터 거의 현대에 가까운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머리는 한중일 대부분 땋거나 묶거나 땋아올리거나 하는 식으로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만큼 고대의 헤어스타일링 기술로는 긴 생머리를 지금처럼 예쁘게 다듬어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머리라는 게 길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르기만 한다고 해서 비단결처럼 차르륵하고 내려오지를 않죠. 더구나 단백질 영양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에는 머릿결이 더욱 안좋을수밖에 없었고 그냥 풀어놓고 있으면 금방 엉켜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발령 이전의 남성에게도 해당됩니다. 상투를 틀지 않으면 영양 상태가 부족한데다 머릿결이 여성보다 억셀 수밖에 없어 말 그대로 망나니머리가 될수밖에 없었을테니까요 (영화 왕의 남자가 거짓일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서양 문물의 유입 후 단발령도 내려지고 점차 여성들의 외모를 가꾸는 산업이 발달하면서 여성들이 그동안 꽁꽁 묶어왔던 머리를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특히 임시정부 이후 대거 들어온 미국 문화의 영향은 상당했는데요. 특히 여성들에게 영향을 끼친 부분이라면 '바비 인형' 문화일 것입니다. 이 바비 인형이라는게 사실 이상적인 미형을 보여줬다기보다는 서양 사람들의 일반적인 체형이나 스타일을 좀 더 스타일리쉬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는데요. 이 새로운 미적 가치가 동양쪽에 끼친 영향은 실로 놀라워서 지금까지 찰랑찰랑한 긴 머리라는 것을 에초에 본 적이 없는 (동양인의 신체적 한계로 인해)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바비 인형이 인기를 끈 게 아니라 바비 인형이 제시한 스타일이 끼친 영향을 말합니다) 이른바 바비 인형 신드롬은 동시대에 대거 유입된 헐리우드 영화에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착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초창기 바비인형은 긴 생머리가 아니었다고 하죠.


이러한 미형은 이른바 S라인이나 큰 키, 스커트에 어울리는 늘씬한 다리와 큰 가슴 등과 더불어 긴 생머리라는 키워드로서 여성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지게 되는데요. 물론 신체 라인이나 키, 다리라인 , 가슴 등의 키워드들은 타고나지 않는 한 동양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만, 이 긴 생머리라는 스타일은 후천적으로 극복이 될 것 같기도 한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 키워드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분야보다 특별히 많은 도전이 이루어진 미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도 스트레이트 퍼머 기술은 꾸준히 진보하고 있으며 머리 끝 부분의 영양을 보급하는 트리트먼트, 세럼 등의 상품들은 물밀듯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인 셈이죠. 그리고 이런 상품들은 대부분 동양권에 집중적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자 그럼 이야기를 원론으로 돌아와서 왜 이 스타일에 남성들이 열광했고 열광하고 열광할 예정인지에 대해 더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부분은 '지금까지의 스타일 즉 적게는 몇백년 많게는 몇천년동안 지속되어왔던 여성의 스타일에 대한 고정관념이 뒤집혔다는 것에 있습니다, 머리는 땋거나 말아 올리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고정관념 내에서 제한적으로 핀이나 장식 등으로 틀을 깨지 않은 악세서리 장식만으로 대표되던 헤어스타일에 대한 상식적 틀이 깨져버렸다는 점 그리고 그 깨어버린 스타일이 꽤 완성도가 놈았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몇 번을 강조합니다만 긴 생머리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미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죠.

긴 생머리 붐에 한 몫을 단단히 하신 분


이를 보는 남성들에게는 이른바 묶은 머리에 대한 미적 평가 가치가 하락함과 동시에 풀었음에도 단정하게 내려오는 머리에 대한 경이로움이 함께 자리잡게 됩니다.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그 긴 생머리를 묶어버리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은것도 이런 바탕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것은 이미 긴 생머리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닌 '이 사람이 여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필수요소'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태생적으로 스타일 변화에 둔감할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있어서 긴 생머리 이외의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아무리 예쁜 들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남성에게는 '스타일'이 아닌 '여성으로 인식하는 수단' 그 자체이기 때문이죠.

여기에 한가지 더 하자면 한중일 공통적으로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이른바 '순결'을 잃게 되면 머리를 말아 올리는 스타일이 꽤 오래도록 정착되어 왔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이마와 뒷목 위로 올라가지 않고 모두 아래로 향하고 있는 긴 생머리 스타일은 '순결'이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는 잠재의식도 긴 생머리 대세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서류적인 '증빙'이 가능한 사회가 되고 있지만 남성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관습적 상식은 쉽게 바뀌기 힘든 것이죠. 즉 긴 생머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여성의 헤어스타일이 대한 새로운 키워드를 제시한 것과 더불어 아직 '배우자'를 찾지 못한 순결한 처녀라는 키워드까지 함께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 올려 준다. 라는 말도 있었죠.


여성들의 스타일은 여성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법이죠. 남자는 사실 좀 그런 소소한 변화에 무뚝뚝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변화를 줘도 '진심으로'예쁘다는 감정을 느낀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렇기에 여성들은 긴 생머리라는 키워드에 구애받지 말고 보다 자신에게 더 잘 맞는 헤어스타일을 몇 번 많게는 몇십번의 실패를 통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찾아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긴 생머리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마치 명주실처럼 생겨서 잘 엉키지 않고 그냥 기르기만 해도 직모로 잘 내려오는 서양인들에게 적합한 헤어스타일이며 그들은 기본적으로 신체 비율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른바 '긴 생머리'가 어우러지는 체형을 만들기도 어렵지 않죠. 필연적으로 허리 라인과 다리 라인이 함께 갖춰져야만 그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머릿결 성질이나 인종적 체형이 다를 수 밖에 없는 동양권에서는 아무리 음식으로 인해 체형이 서구화된다 한들 이른바 바비인형의 황금비율을 자신의 몸에 재현하기도 그 체형을 타고나기도 힘겨운 것이 현실이니만큼 보다 자신의 체형이나 머리 형태 등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개성에 걸맞게 어우러지는 헤어스타일을 찾아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긴 생머리를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네요.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만, 만일 남자들이 긴 생머리를 좋아해서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당신이 가진 개성있는 아름다움이 아닌 단지 보편화된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춰진 점을 좋아하게 된 것으로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그 남자분에게 있어 당신이 가진 미적 경쟁력은 긴 생머리이며 이런 경우 더 잘 어우러진 긴 생머리 여성에게 빠져들 가능성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만일 네 긴머리 때문에 널 좋아했다고 말하는 남성분때문에 포기를 하기 힘들다면 그 남성분의 입장을 과감히 포기하시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 데에 주력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만일 그렇게 주변 남성을 포함하여 자타공인 자신에게 딱 맞는 베스트를 찾아내었는데 남자의 반응이 단지 '긴 생머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큰둥하다면 그 남자분은 '여자를 제대로 된 눈으로 보려 하지 않는'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판단은 물론 당사자들의 몫이겠습니다만,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여성이 자신만이 가진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에 베타적인 연인이 있다면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긴 생머리 스타일은 얼굴은 물론 그 스타일적 완성도로 인해 정말 많은 부분을 커버해주고 가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기 힘든 분들도 많으실 줄로 압니다만 그만큼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죽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 혹은 자신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임에도 보편적인 미형 기준으로 인해 희생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한번 더 상기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키가 작은 사람도 키가 큰 사람도, 통통한 체형도, 깡마른 체형도 제각각 빛을 낼 수 있는 개성적인 캐릭터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으니까요. 알은 깨어나기 전까지는 전부 똑같이 생긴 알이지만 그걸 깨고 나오면 아주 조금씩 서로 다른 녀석들이 태어나듯이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어나간다면 자신조차 몰랐던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해내고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보세요. 긴 머리를 자르고 더 어울리는,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찾아보세요. 당신의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당신의 진짜 예쁜 모습을 찾아내주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공화국 연구소 '남자는 왜 여자의 긴 생머리에 열광하나' 편을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0. 6. 7. 15:30
남자의 성 카테고리는 정말 오랫만이네요. 오늘은 사실 꽤 오래 전 연구를 끝냈던 짤막한 소재를 써볼까 합니다. 연구 결과가 상당히 부실해서 공개를 좀 꺼렸었는데 (얼마 전 마무리지어진 졸작 '여자 그 특별함에 대하여'시리즈 3번째에 포함되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대략 요즘 이런저런 문제로 업데이트가 부실해지고 있어서 사과의 뜻으로 올려봅니다.

스킨십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피부와 피부로 전해지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스킨십은 결코 일방적인 의사표시가 아닌데요. 일면 남성이 대부분을 주도하기에 여성이 이를 거부하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벌어지곤 합니다만, 스킨십은 과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남성보다는 여성이 '취득'해야할 정보가 훨씬 많다보니 모양새로서는 여성이 스킨십을 '당하는' 형태로 보여지게 될 뿐이죠.

자 그럼 이 스킨십에서 무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커뮤니케이션에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커뮤니케이션 스킨십을 통해 무엇을 얻고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공화국 연구소 이번 시간에는 스킨십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고합니다. 본 연구는 철저한 개인 연구 자료이므로 학술적 고증 여부는 철저하게 보는 이의 판단에 준합니다.

다들 처음에는 '손 잡기'부터 시작하는 스킨십, 그런데 이 손잡기 형태를 살펴보면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 분들의 손잡기 패턴은 보통 이렇죠.

그러다가 사이가 꽤 깊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소위 '깍지끼기' 로 바뀌게 됩니다.


사실 이 단순하기 이를 데 없어보이는 손잡기에 상당히 많은 키워드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대략 이 손잡기 패턴 하나만 보아도 스킨십이 가지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대해 상당 부분 이해가 가능합니다. 음, 아직 이해가 안가시는 분들을 위해 그림 하나 더 첨부해보겠습니다.


손바닥의 신체 장기부위 연결을 가상해서 만든 분포도입니다. 손목 부분에 가슴 쪽 즉 맥이 뛰는 부분과 더불어 생식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의학상으로도 손목 바로 위가 생식기혈입니다) 즉 흔히 깊어진 관계를 증명하는 '깍지끼기' 가 왜 깊어진 관계를 증명하는 것인지 이 분포도를 보면 간단히 설명이 가능한데요. 서로의 가장 민감한 정보를 담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직접적이지 않지만 간단히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여기에서 정보 교환이란 유전자 교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건강 상태 및 유전학적 상성 등의 정보교환입니다) 부분과 더불어 상호 보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호 보완적인 의미란 서로를 지키고 복돋아줌을 의미하는데요. 흔히 손이 찬 사람과 따뜻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 손 온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손 전체적으로 온도차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손 윗쪽이 특히 온도가 높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 정중앙에서 열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손이 차고 따뜻한 것과는 절대 관계가 없이 남녀간 절대적인 차이를 보이는 (건강할 경우) 부분이 있는데 앞서 문제가 되었던 손목 바로 위 즉 생식기 부분입니다. 남자는 이곳이 손 전체 온도에 비해 비교적 낮고 여성은 손 전체 온도에 비해 온도가 높다는 점이 그것인데요. 만일 이 온도차가 상호 보완적이 될 만큼 적당한 수준이라면 남녀는 손을 잡는 순간 극도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생식기쪽 건강이 좋지 않은 남녀의 경우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겠지요. 특히 여성의 생식기 온도가 낮다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손을 처음 잡을때부터 깍지끼기로 잡는 커플은 거의 없죠. 처음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손을 엇갈려서 잡는 첫번째 사진 형태가 일반적인데요. 이 손잡기는 손바닥에서 딱 손목 위 ...즉 생식기 부분만을 배제한 모든 부분이 접해 있습니다. 주로 접해 있는 부분은 위와 장...즉 '소화기 계통'이죠. 사실 몸 안에 있는 장기 중에 가장 많은 온도차를 겪는 장기라고 한다면 소화기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위가 차고 딱딱해져서 소화가 안되고 어떤 분은 장이 차가워져서 곤란함을 겪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남녀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 '속궁합'(생식기만을 한정하지 않는)을 가늠하기 위한 의식적인 행동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손을 잡기 전과 후의 인상이 변하는 것은 단지 '피부 감촉에 의한' 감정 변화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잘 모르던 부분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어 그것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서로의 인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패턴은 비단 손잡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음 단계인 Hug 나 Kiss에서도 마찬가지가 되죠. Hug에서 편안함이 아닌 갑갑함을 느꼈다면 맞닿은 서로의 신체 부위가 상호간 체온을 보완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위와 장이 뜨거운데 상대도 위와 장이 뜨겁다면 몸은 속으로 상당히 갑갑함을 느끼게 되죠. 기분좋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가진 그 무엇이 상대방으로 인해서 아주 적당하게 중화되는 감각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Hug에서 맞닿는 것도 대부분 소화기이며 Kiss 역시 입술의 온도 촉촉함 등의 건강상태는 한방의학적으로 소화기의 건강 상태를 나타낸다고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좀 복잡스런(?) Kiss 역시도 남녀 서로 제각각 가지고 있는 침 성분 속 소화 효소를 파악하거나 혀의 감촉 등 소화기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정보를 교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붉은 입술은 소화기 건강의 상징


이쯤 되서 나오는 의문 한 가지, 말씀드린 대로 서로간의 건강이나 장기의 온도 차이로 인한 속궁함 정보를 교환하는 스킨십에 대해 어째서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만, 사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까지는 남녀 공히 공통적인 관점에서 스킨십을 설명했다면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남녀간의 차이를 두고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여성은 본능적으로 민감합니다. '여자의 육감'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적어도 생존적인 관점, 보호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남성보다 한층 현명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부족해지는 것이 이른바 위기 돌파에 필요한 추진력인데 이 부분을 주로 사회에서 남성이 담당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냐면 이것이 스킨십에 대한 오해와 그로 인한 갈등이 빛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스킨십을 정보 교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정보라는게 사실 꼭 만져봐야 하는 촉감에 의존할 필요가 없죠. 오감이라고 하는 눈,귀,코 등의 촉감보다 훨씬 민감한 감각들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오감에 한해서 그 우수성(시력이나 청각능력, 후각능력의 개인차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곳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하는 분석 범위가 여성에 비해 남성이 현저하게 좁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건 기능적 차이에 의거한다기보다는 부여된 생물학적 책무에 따른 것인데요. 남자야 직접 생명을 품고 살지 않지만 여성은 직접 생명을 잉태해야만 하는 책무가 있기 때문에 몇 배는 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정보를 분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앞서 손잡기나 여타 스킨십에서 보여주는 음양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단순하고 낮은 레벨에서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즉 남자는 여자를 '여자'라고 인식하고, 여자는 남자를 '남자'라고 인식하는 단계를 말하는데요. 실제로 남장 여자나 여장 남자, 트랜스젠더 등 시각적으로 판단이 어려운 표본을 촉각과 청각을 배제한 채로 구분해내는 실험에서 여성은 대체로 잘 구분해내는 반면 남성은 단지 시각과 후각만으로는 전혀 구분해내지 못합니다. 즉 여성은 이성을 보다 꼼꼼하게 체크하는 분석 능력이 탁월한 반면 남성은 비교적 직관적인 정보만을 습득한다는 것이죠.

범인을 구별해내는 것에 있어서는 능력적 차이가 없습니다만...


이렇듯 고작 상대가 이성인지 동성인지조차 판단해내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무디다보니 남성은 시각이나 후각, 청각만으로도 모자라 촉각을 통해 어떻게든 상대방이 '여성' 즉 내 유전자를 통해 생명이 잉태 가능한 존재임을 확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하게도 '남성과 다른 신체적 차이'에 근거하게 되고 그렇기에 남성은 보다 큰 가슴이나 잘록한 허리라인, 목선, 쇄골뼈, 엉덩이라인, 늘씬한 허벅지나 다리라인 등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정 부위에 대한 스킨십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단지 '성별 확인'이라는 지극히 쉬운 판단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남자 입장에서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보니, 스킨십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는 것도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라고 볼 수는 없겠죠. 생물학적으로도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반면 여성은 시각 이외에도 후각이나 청각만으로도 성별 확인은 물론 '자신에게 걸맞는 이상적인 인물'인지에 대한 부분까지 충분히 본능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후각의 민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요. 흔히 불쾌한 땀냄새나 몸에서 나는 아주 작은 채취로도 시각 조건 없이 사람을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이니 오감이 얼마나 민감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따라서 굳이 촉감까지 쓸 필요가 없이 대부분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고 그래서 스킨십에 대한 욕구가 남성에 비해 현저히 적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듯 스킨십 보기를 돌같이 하던 여성도 스킨십 욕구가 상당히 급격하게 올라가는 시기가 있는데, 다름아닌 '성 관계 직후'입니다. 성관계 직전에 스킨십 욕구가 극도로 올라가는 남성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부분인데요. 물론 이때 나타나는 스킨십에 대한 목적은 남성의 그것처럼 성별 판독이 아닌 '보호본능'에 의거한 '보호요청'행동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유전자를 받은 직후부터 10개월간의 고독한 싸움이 이어질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임신 여부와는 관계없이) 상당히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여성은 약하다는 인식으로 인해) 그로인해 내 옆에 있는 남성의 신체적 강함을 신경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 스킨십은 상당히 차분하게 이루어지는데요. 남성의 등을 쓰다듬거나 팔근육을 만지작거리거는 등 지극히 '강함'과 관계가 깊은 부분에 집중적으로 스킨십이 이루어집니다. 흔히 나오는 'Hug'에 대한 요청도 이와 관계가 깊죠.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함으로서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에 대한 안정감을 확보하는 본능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여기에 비교적 스킨십에 있어서 '피동적'인 부분도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여성들은 남성의 손길이 '강탈'이 아닌 '인정'에 코드가 맞춰져 있을 경우 '직접 움직여 만지는 것'이 아닌 '만져지는 것'에 의해 스킨십 욕구를 충족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만지거나 (눈물을 엄지로 닦아줄때처럼) 하는 등 기본적으로 여성이 '공통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여성성'을 인정받는 형태의 스킨십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즉 가슴이 나오거나 다리라인이 여성스럽거나 하는 등의 보편적인 요소가 아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적인 여성성에 대한 피동적 스킨십 욕구가 있다는 것인데요. 흔히 '머리를 새로 하거나' 새로 악세사리를 샀거나 새 옷을 입었거나 하는 등의 변화를 남성에게 알아주길 바라는 점도 이와 같은 맥략일 것입니다.



늘 쓰고 나면 느끼는 사실입니다만, 연구하면 할 수록 남녀간의 다른 부분은 끝이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다른 부분이 빚어내는 본능적인 부분도 지켜보다보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데요. 반드시 알고 있지 않아도 되는 '본능'적인 부분에 대해 너무 이성적으로 혹은 베타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냥 '본능에 충실해'라는 조금은 솔직한 감성으로 살아가보는 것이 어떨지 싶습니다. 모르고 있는 채로 있는 것보다 조금은 알고 가는 것도 인생에 있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이 세상에 선천적인 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유 없는 본능도 있을 수 없죠. 다만 그게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인지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책임이 '사회'에 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 있는지가 갈라질 뿐입니다. 선천적인 욕구를 사회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억제해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사회가 치루어야 할 댓가가 될 것이며 후천적으로 생겨난 피해 요인에 대해서는 비단 사회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까지 영향을 끼친 직접적인 영향 요인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없던 게 갑자기 생겨나기 시작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게 됩니다. 그 원인 제공자가 해야 할 일은 그 원인을 없에는 일이 되어야 하지 그 원인의 해당 당사자를 사회악으로 구분해 묻어버리려는 면책이 우선시되어서는 안되겠죠. 현대사회에서 대체 무엇이 미개한 것인지 과연 그게 미개하다는 새뇌로 끝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일인지에 대해 되새겨보며 공화국 연구소 '남자의 스킨십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