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04. 12. 4. 01:59
시청자들이 느끼는 방송국에 대한 이미지가 제각각이듯, 비교적 기술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적용되는 방송 스텝 채용에서도 각 사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각 사마다, 성우극회 연륜과 성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라디오부터 시작된 방송국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우극회의 역사와 그 영향력 탓에, 소속된 방송사별로 가치 판단 기준과, 선호하는 성우 스타일, 그리고 소속된 성우의 스타일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를 잘 참조하면 절대적이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나마 자신이 보다 유리한 공채를 고르는 입장에서 접근이 가능할 것이고, 성우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색다른 분류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 전국 대상 공중파 방송 3사 중 가장 양질의 장비를 사용하고 화질과 음질을 위한 투자에 있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MBC의 성우 경향은 ‘날카로움’으로 표현되곤 한다. 샤프니스가 강하고 음질에 잔상이나, 잡음이 없는, 그러면서도 느끼함이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목소리의 성우들을 주로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현재 방송사에서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우들과 MBC 전속으로 채용되어 활동중인 성우들의 목소리 특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고품질의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에 주력하여 한 때 관련 상을 휩쓸다시피 했던 MBC의 전력과, 언론 보도나 시사 프로그램 등 주로 강한 어조의 나레이션을 요구하는 성우의 역할 성향으로 인해 활동 영역이 최근까지 상당히 치
우친 결과가 지금의 MBC 성우극회가 가지는 그들만의 색깔과 성우관을 확립시켰다고 보여진다. 어디에서나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목적에 맞게 채용하는 것이 회사들의 방침이고, 또 그에 걸맞게 대비하는 것이 지망생의 역할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이미 보편적 성우 활동 영역이 제시된 최근에서도 그들의 성우 채용 성향이나 MBC성우극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성우들의 영향으로 그렇게 쉽사리 고유색깔과 가치관이 변할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성우 공채 시 제시되는 연기 예문이라든지, 실제 최종 합격자들과 최근에 새롭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MBC성우들의 목소리 성향이 기존의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는 점 등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타 방송사

MBC

칼이 날카롭고 무딘 정도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TV로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를 수 있다. 우리가 직접 보지 않는 이상 그 날카로움을 TV매체로서 가늠한다는 것은 때론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최근에는 많이 그 차이가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방송장비의 특성 상 MBC의 이런 방송적 특징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목소리라는 메체에 대해 특별히 연구된 자료도 없고, 성우분야에 대해서 지망생들이 접할 수 있는 학술적 자료나, 관련 교육기관도 대단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날카로움’이라는 기준에 대해서 대단히 모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칼의 보이는 느낌에 대한 예시를 들었던
바와 같이 자신의 목소리를 음향 기기를 통해 여러가지로 테스트를 해 보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올 수 있다.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생목소리와 기계적인 처리를 거친 마이크 입력 목소리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는 입력된 오디오 기기쪽 톤 설정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바뀌기 때문인데, 성우를 지망하는 지망생이라면 충분히 친숙할 거라 생각되는 마이크와 음향기기의 톤 설정을 MBC의 성향대로 보다 날카롭게(보통은 TRABLE 수치를 올리는 정도로 조절이 가능하다) 맞춘 후, 자신의 목소리를 한번 테스트해보자. 주로 ㅅ,ㅊ,ㅋ,ㅌ,ㅍ 발음에서 발음이 꺾이면서 지직거리는 잡음이 나게 되는데, 특별히 마이크 필터가 없을 때 나는 팝 노이즈를 제외하고, 노이즈가 강하면 강할수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목소리가 날카로운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MBC쪽를 생각하는 지망생들이 보기에는 이러한 MBC의 특성들이 하나의 제약과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이러한 연구가 절대적인 데이터 근거치를 기준으로 작성된 것도 아니고, 이런 부분들이 채용에서의 필터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역으로 유리한 부분을 찾는다고 생각하면 어떨지 싶다. 중국 고전 중 무술을 잘 하는 아들과 학문을 잘 하는 아들을 두는 것 못지 않게 그것이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을 잘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씨와 맹씨’의 이야기 ‘시의(時宜)’ 처럼 언뜻 위험요소로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그 확률이 절대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서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얼마만큼 시의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맞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지, 자신의 적성과 이상을 혼동한 채로 기준과 가치관이 없이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것만이 꿈을 이루는 유일한 길은 아닐 테니까. 자신이 보다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은 절대 꿈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어둠을 찾아다니는 반디불이 추해보이지 않는 것처럼...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1. 28. 02:33
잠깐!!
꽤 어처구니 없는 논쟁으로 홍역을 치른 작품이라는 것 이외에는 이 작품에 대해서 필자가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후기에 흔히 말하는 내용 누설 (예 :스포일러, 네타바레) 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필자의 후기 작성 모토이기도 하다.

누구냐!?
지난 여름 SICAF를 다녀오고 난 뒤에 발표된 국내 신작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가했던 비판과 관련해서 아주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다름아닌 윤인완,양경일 원작의 신 암행어사 (당시에는 애니메이션이 아직 논의되기 이전이었다)가 역사를 왜곡하고 위인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킨다는 의견으로 촉발된 이 논쟁은 결국 미결의 논쟁으로 남았고, 필자도 원작을 보지 않은 관계로 논쟁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그래왔듯 고전적인 캐릭터의 재창조와 새로운 스토리에 의한 스토리 재구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환영할 만한 매우 고무적인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논쟁이 어떤 생각과 관점에서 그러한 논쟁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극장판을 감상한 후에도 오히려 좀 더 과감한 수준에서 개연성을 보여주지 못함에 실망했을 뿐, 그 시도와 충분한 결과로서 이어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으로 본다.
흔히 게임, 애니메이션 등 문화컨텐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공공의 적으
로 ‘영등위’와 ‘YWCA’를 거론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이 그들의 생각 범위 내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창작자들이 괴로워하는 부분은 영등위나 YWCA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유저들의 예측할 수 없는 뒤통수치기가 원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만의 마인드를 갖지 못하고 이리 저리 휩쓸리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기에 문화계의 여론은 제주도의 유채꽃처럼 사방 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것 같다. 극장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인공의 이름이 실제 들었던 위인들의 이미지와 다르다는 점을 일일히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극장에서는 조용히 해야한다. (…)

어떻게!?
필자의 관점상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새로운 시도로서 진정한
창작물을 완성시켰다는 것, 극장판에서도 여실히 그들만의 색깔이 느껴지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고, 웅성거리게 만들고, 동요를 일으켰다는 점, 관객 수에 관계없이 많은 관객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는 점, 아직 완결이 되지 않은 원작의 스토리를 무리하게 짧은 시간에 담으려 하지 않고 적절한 결말로서 극장판만의 스토리를 마무리 지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실제로 원작 스토리를 맡은 윤인완이 이번 극장판 연출과, 제작에 얼마만큼 감수하고 참여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지금까지의 극장판 제작에서 가장 어렵고, 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 왔던 ‘스토리의 봉합’을 비교적 이상적으로 처리했다는 부분만큼은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관람 전부터 기대했던 오오타니 코우의 음악도 역시 기대한 대로 자신
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작품의 분위기를 보다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다. 오오타니 특유의 전투화면의 긴박함과 그렇지 않을 때의 음악적 완급 조절 능력은 이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튀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영상에 동화될 수 있는 음악으로 작품의 무게감을 보다 깊이있게 만들어주었다. 거기에 보는 내내 필자의 눈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던 OLM만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배경 작화, 이미 Figure17에서 그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었던 특유의 수채화풍 배경 작화는 다소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디지털 난무 효과 속에서도 충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별히 흠잡을 데 없는 캐릭터디자인과, 자칫 소흘해 질 수 있는 총기 등의 소품 디자인까지, 겉껍데기만으로 치장한 원더풀데이즈의 실패를 곱씹지 않으려는 듯, 그렇게 신 암행어사는 보는 이를 작품 속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어째서!?
솔직히 시무라 조지 감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어째서 이 사
람이 감독을 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이 든다. 제작상에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이 감독이 되었는지도, 얼마만큼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제작팀에서의 감독의 입지와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이 작품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스텝들을 무난히 이끌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프로중의 프로들이 모여 만든 작품이 보여 줄 수 있는 파괴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지만, 신 암행어사는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저한계선을 간신히 지키는 선에서 가치창조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어 필자로서는 굉장히 입맛이 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원더풀데이즈에서 드러났던 것과는 정 반대의 현상인데, 시무라 조지 감독 본인이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다소 부족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작품 전체적으로 느껴진다. 원더풀데이즈가 감독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과해서 작품을 무너뜨렸다면 이쪽은 그것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느낌, 물론 기우이며 필자만의 시점으로 본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비슷한 케이스로 최악의 스토리라인을 가진 지구소녀 아르주나를 제작진의 역량과 칸노 요코의 음악으로 평균 이상의 작품으로 그 가치를 끌어올렸던 것처럼, 신 암행어사도 무언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아래로 처지는 것을 간신히 끌어올려 정상 궤도로 진입시키려는 노력으로 완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다소는 쓸데없을 수도 있는 생각이 작품을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해외 진출한 운동선수 경기를 TV중계할 때라도 들어가는 자막만큼은 한국에서 따
로 만들어 로컬라이징에 최선을 다하는데 반해 신 암행어사는 판권이 일본으로 가 있고, 원작자 윤인완의 작품 활동 무대도 일본이라는 것은 자처하고서라도 지나치게 국내 로컬라이징에 성의가 없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순수 일본 제작 애니메이션이 들어와도 이 정도까지 성의를 느끼지 못할 만큼은 아닐텐데... 특별히 일본쪽 이권을 가진 업체들이 이것 저것 요구를 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대부분 손을 대야 할 부분을 배급사가 손을 대지 않았으며, 보컬 가수의 캐스팅과 테마곡 선정에도 워낙 얽혀 있는 업체가 많아서 그런지,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가장 크게 느껴졌던 부분은 믹싱, 성우의 연기 부분과 배경음악의 톤이 너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탓에 작품을 몰입하는 데에 있어 효과음과 성우의 연기 속에서 음악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어 작품 몰입과 흐름 파악에 나쁜 영향을 끼칠 정도로 심각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작품 사운드를 리샘플링하는데에 있어 자신들이 직접 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성우의 연기와 그 외적 요소들의 이질감은 맞지 않는 테트리스처럼 감상 내내 필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뭘 했지!?
평소에 필자는 국내 3D 애니메이션 업계를 보면서, (어디 3D 게임에
나 나올 법한 3D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서 그게 과연 팔릴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신 암행어사에서 너무 쉽게 드러나고 말았다. 많은 관객들은 그래도 3D 애니메이션만큼은 한국이 꽉 잡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겠지만, 스텝롤에서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쪽 3D애니메이션 제작진과 수많은 일본 3D 애니메이션 외주 제작진들의 명단을 보면서, 괜시리 허탈감이 느껴졌다. 3D를 완전히 2D와 다른 분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인식이 무척 아쉽기도 하고, 결국 실용적인 부분에서 우리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는 사실에 슬퍼지기도 했다. 3D로서 자신들만의 색깔을 강하게 추구하는 미국, 2D의 문화 가치를 더 높게 생각하는 일본에 비해 2D와 3D의 차이에만 신경 썼던 우리나라가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2D와 3D는 기술적인 처리방식만 다를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리얼리티를 띈다고 해도 인간에 가까워지려면 앞으로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진짜 인간 같은 그림이
나와서 움직이는 영화를 만들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면 파이날 판타지 더 무비는 벌써 스테디 셀러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실제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3D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 기술적인 부분에만 급급했던 우리나라는 결국 실제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에서 활용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고려 청자에다가 밥을 비벼먹을 수는 없었을 테니...
결국 윤인완의 원작을 제외하면 한일합작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작품이 되어버린 신 암행어사, 대한민국이 가장 자신있어했던 3D 분야가 괴멸하면서 정작 이제는 제대로 된 원작이 있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 문화계를 지원한답시고 TV에서 보고 들은 한류 열풍처럼, 남이 비벼놓은 밥을 떠먹여주기만 줄기차게 기다리는 한국 문화계 수뇌부들의 바보짓은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겠다.

시끄러!
전주비빔밥에는 약 20가지의 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어떤 재료가 맛
있고 어떤 재료가 맛없다고 해서 한 가지 재료가 다른 재료보다 많이 들어간다면 전주비빔밥의 맛은 사라진다. 무조건 20가지 재료를 밥과 섞는 다른 형태의 음식이 전주비빔밥과 같은 조리법으로 조리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전주비빔밥의 오묘한 맛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하물며 전주에서만 나는 나물과 고기를 쓰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똑 같은 비빔밥이라도 전주비빔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 아니던가, 오리지널리티라는 건 이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 속에서 신 암행어사라는 새로운 맛으로 기존 암행어사 박문수, 이몽룡의 고전을 완전히 잊게 해 줄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이 작품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준 셈이고, 적어도 필자에게는 충분히 이 작품으로서 일종의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미 소재의 바닥을 드러낸 일본에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우리 고전을 새로운 시각에 맞게 재구성하여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한다면 비단 우리나라가 메인프로듀스에서 주도권을 잃더라도 문화 컨텐츠의 세계적 흐름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주체로서 활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완전히 메인프로듀스쪽에서 손을 놓는 건 좋지 않다. 쌀 개방에 맞서는 농민들의 주장이 ‘최소한의 식량 자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라는 이유가 있듯이 문화, 애니메이션계에도 남의 도움 없이 우리들끼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는 일종의 자생력 정도는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신 암행어사처럼 거의 모든 부분을 포기하고 프리프로듀스만을 자급하는 형태가 계속된다면 이전 우리나라의 메인프로듀스쪽으로 급격하게 추가 기울어진 반쪽 세계 3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FTA가 되어 수입채소가 들어와도 김치는 역시 강원도 배추로 담아야 제맛이고, 전주에서 나는 나물로 비빈 진짜 전주비빔밥이 더 맛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피자가 맛있어도 피자 치즈로 밥을 비벼먹지는 말자, 아 참, 고려청자에는 더더욱 …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1. 27. 03:13
문학계에는 대형 메이저 신문사의 신춘 문예가 있듯이 성우 지망생들이 처음으로 두드리는 등용문도 메이저 방송사가 주최하는 전속 성우 공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실질적으로 성우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넓다고는 하나, 국내 성우 업계 사정상 ‘인지도’라는 부분에 있어서 초반부터 흔히들 기대하는 ‘프리랜서’ 활동을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사 공채를 택하는 이유는 안정적인 직장으로서의 의미도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프리랜서 활동을 위한 주춧돌을 마련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 운동선수들의 FA 대박을 노리는 것과 같은 맥략으로 보면 되겠다.

아직까지 성우의 그것은 ‘탤런트’의 그것과는 다르게 별도로 소속사가 관리해주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방송사 소속으로서 다른 방송직 사
원들과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치곤 한다. 비교대상으로 치자면 아나운서계를 들 수 있는데, 아직 성우계에 대한 소재를 잡은 영상 문화 메체가 나오지 않아서 딱히 예를 들기 어렵지만, 아나운서계라면 몇 년 전 방영된 ‘이브의 모든 것’ 이라는 드라마에서 자세히 보여주고 있으며 김효진씨가 아나운서에서 성우계로 전향하는 모습도 보여주면서 성우계의 방송사 내 입지와 활동 영역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드라마에서 볼 수 있듯, 처음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라디오, TV를 막론하고 공중파 전파를 탈 수 있다는 기회를 갖는 것 자체에 주력하는 수준이므로, 성우로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성우계에 대한 방송계의 시각은 막말로 ‘유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필요한 유닛이고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성우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어필해야만 보다 빨리 자신의 목소리를 공중파에 담을 기회가 빨리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아나운서계도 어떻게 보면 대부분 교과서적인 육성 과정에 의해서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인기 아나운서가 정해지고 성공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9시 뉴스앵커 자리는 아직도 MBC에서 오래 전에 이미 그 자리를 비웠던 엄기영 앵커를 다시 기용할 수 밖에 없는 사내 분위기, 그 속에서 서열이 보이지 않게 정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라는 인식이 방송사는 물론 시청자들까지도 함께 공감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우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선배 성우들, 공중파에서 듣기 힘든 비인기 성우들까지 거의 모든 선배 성우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귀가, 좋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좋은 목 이상으로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선배 성우의 성향과 닮았는지 생각해보고, 그들보다 얼마만큼 성우계에서 그 이상으로 잘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해보고,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인다면, 충분한 미래계획과 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대부분의 성우 지망생들이 기존에 나와있는 유명 애니메이션, 외화의 대본을 입수하여 그 외화,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 성우들의 연기를 비슷하게 흉내내거나, 그 캐릭터를 보고 연기를 연습하곤 하는데, 상당히 잘못된 연습 방법이다. 연습을 할 때는 국내에 방영되지 않았던 영화,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 영화에 나오는 출연진, 캐릭터들의 스타일을 스스로 이미지화 하는 훈련이 더 중요할 것이다. 성우계는 평생직업이다. 정년퇴임을 기대하다가는 본인이 늙어버리기 때문에, 운동선수들처럼 은퇴 후 빈자리를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따라가서는 자신의 입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스타일을 가지는 선배들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을 뛰어넘거나, 아니면 아직 국내 성우계에 없는 목소리, 자신이 아니면 이 캐릭터를 누구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없다고 확실히 판단되는 캐릭터가 적어도 3명 정도는 있어야 하며, 이는 추후 성우별 분석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어질 부분이기도 하다.

성우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고, 많으며, 이미 성우가 된 사람도 그 수만큼 많다. 문화 컨텐츠에서 필요한 배역은 한정되어 있고, 사람들이 매년 수많은 지망생들이 공채되는 탤런트 중 극히 1%만 기억하듯이 성우를 쓰는 문화컨텐츠 제작자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향유하는 문화 소비자들 중 성우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고 즐기는 사람은 0.1%에도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의미한다. 타고난 목소리를 지녔다고 해서, 모두 100% 성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탤런트들은 쇼 프로그램에 나와서, 춤을 추거나 화려한 입담을 펼쳐서 대중의 인기와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지만, 성우가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성우가 되려는 사람들이라
면, 자신이 성우로서 가질 수 있는 가치, 어떤 영화배우의 목소리는 지금 하고 있는 성우보다 확실히 내가 더 잘 할 수 있다거나,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컨셉에 맞는 목소리를 캐스팅된 현 성우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야만이 그나마 치열한 성우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성우 지망생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자아도취증이다. 자신이 그들보다 실제로 잘하는지를 자신과 영향력이 없는 제 3자의 판단에 맡기고 보다 냉정한 평가를 받는 것이, 자기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 보다 만족도도 높고,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보다 더 빨리 찾을 수 있다. 목소리가 좋다는 주변의 칭찬만으로 성우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한해에도 정말 수백 수천씩 쏟아지는 게 성우계이다. 목소리가 좋다는 개념을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기준으로 잡는다면 그것이 가장 위험한 발상이며, 문화컨텐츠에는 듣기 거북한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가 듣기 좋은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 못지 않게 많다는 것을 항시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부터라도 목소리에 대한 개념적 가치관을 성우 지망생이라면 본인 스스로 바꿀 필요가 있다. 가수 선배들이 ‘아 생각해보면 가수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후배들에게 가수 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는 거짓말이지만, 성우 선배들이 ‘목소리 좋다고 성우 하는 거 아니에요’라는 말은 몇 백번을 곱씹고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우는 연기자이다. 연기자라면 누구나 주인공을 꿈꾸듯, 성우도 주연급, 비중있는 역할, 보다 많은 대사를 맡아 연기하기를 원한다. 성우 지망생들도 항상 머릿속에서는 공중파에서 대 활약을 펼치며,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메이저급 성우가 되는 것을 꿈꿀 것이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성우의 모습을 뒤따르려는 성향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성우는 프로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역할, 자신이 좋아하는 연기, 자신이 좋아하는 목소리만을 추구해서는 흔히 하는 말로 ‘밥그릇’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수많은 선배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보여야만 하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상상만 해도 두려운 실력파 후배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방송사에 어필할 수 있을 만큼의 개성, 독자성을 가질 수 있다면, 흔히 말하는 ‘평생 직장’, ‘프리랜서의 매력’ 을 향유할 수 있는 꿈 속의 성우 모습을 갖춘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 특히 방송 관련해서는 ‘자신이 유리하다’라는 판단은 통하지 않는다. 방송만큼 완벽주의가 팽배한 곳은 없다. 그야말로 완벽함, 그것을 꾸준히 생활처럼, 언제나 하던 것처럼 유지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방송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 때문에 주변에서 방송 일, 성우를 하겠다고 하면, 그건 제대로 성공해도 수명을 깎고, 성공을 못해도 수명을 깎는 진퇴유곡의 길이라고 늘상 강조하곤 하지만 그것을 알고서도 한 발자국 내딛으며 그런 지옥 같은 무한경쟁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는 만족감에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또 인간이라는 동물이 아닐까? 인간의 본능적 고소공포를 극복한 자만이 그 짜릿한 번지점프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Am -
posted by RushAm 2004. 11. 25. 23:11
한때 ‘부분모델’이라는 직업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다. ‘이해영’이라는 연예인이 다리 부분모델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IMF이전 버블경제가 충천할 때 CM의 범람으로 CM자체가 하나의 문화키워드로서 인정 받기 시작할 무렵이라, CM에만 등장하는 직업, ‘부분모델’이라는 직업이 주중 저녁에 방영되는 와이드 쇼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했다. 한번쯤 그들이 주목받을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었다면, 그들의 독특한 직업관 만큼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부분모델만의 비애도 느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만큼 자신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방송을 구성하는 유닛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직업들, 성우라는 직업도, 새삼스레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근래 이전에는 그저 제작진 명단에 끼어 있는 정도에 그쳤고, 성우들의 활동 영역도, 영화의 배우 목소리를 대신하거나, CM의 하이틴 스타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보조역할로서 활용되곤 했다. 그래서 아직 우리 사회에서 ‘성우’를 하나의 연기자로서 인정하고 연예인적 가치를 부여하기에는 오랜 시간동안 인식 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만큼 최근 불고 있는 성우들의 아이돌화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이다. 좀 재미있는 건 그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당사자들이 특별히 보수적인 기성세대가 아닌 일반적으로 가수나 탤런트를 좋아하고 적극적인 팬 활동을 하는 1~20대의 젊은층이라는 점이다.

일본 문화 개방과 그에 따른 관심의 증가, 최근에 불고 있는 저변 확대에 힘입어 점차 대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성우계, 필자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창조자로서 바라보고, 그들을 다분히 주관적으로 느낀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필자가 특별히 성우계에 지인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육성 시스템, 전문적인 노하우 등을 글에 담을 수는 없겠지만, 다분히 관찰자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연구해본 자료들, 그리고 성우들마다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필자의 눈으로서 바라보고, 때로는 냉정한 비평도 담아볼 생각이다.

미리 밝혀둘 것은 필자는 성우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성우를 실제로 만나본 적도 거의 없고, 성우계에 아는 지인도 없으며, 특별히 성우를 지망하는 지망생도, 지망생이 되었던 경력도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대부분의 내용은 필자 개인적으로 업계를 지켜보고 생각해 두었던 연구 논문격의 가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컬럼이 실제 성우계와 성우 육성에 비추어 얼마만큼 현실적인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도 모르는 일이므로 혹시라도 계실, 이 글에 기초해 성우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시려는 분이 있으시다면 말리고 싶다. 어디까지나 제멋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니까, 굳이 이 글을 남에게 보일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닌 만큼, 그야말로 제멋대로, 필자 생각대로 아무런 가식 없는 순수한 의견 제시 차원에서 써 볼 생각이고 보시는 분들도 오랜지주스의 오랜지 100% 성분 표시를 보듯이 봐 주시면 크게 무리 없을 것 같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1. 7. 03:38
대한민국에서는 애들을 가르칠 때 1등을 하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흔히 이 두 가지 육아방식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곤 한다. 부모들에게 과연 저 1등이 어떤 1등을 말하는 것인지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은 ‘공부’일 것이고, 일본의 ‘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본다면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게끔 하는 예절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대신 할 수 있을 텐데, 언뜻 극단적으로 빗나가 보이지만, 이 둘은 가치관적으로 ‘개성’ 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무시당하면서 자라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차후 성장교육에 따른 결과가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개성이라는 것이 장점으로서 인정받는 세상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션, 외모로서의 개성이 개성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논해지는 개성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은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약간의 일탈 정도를 개성으로서 인정할 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범위를 벗어나면 개성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 된다. 이러한 분류법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며, 다수권력으로 인한 소수무시 현상이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개성을 논하고 개성을 추앙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라는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진정한 ‘개성’에 얼마나 익숙해 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의상, 외모, 해어스타일 등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진정한 개성일까? 그렇다면 세계 오지에 있는 마오리족의 짐승 관절뼈를 이용하여 코뼈를 뚫어 꿰어 장식을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 이미 아프리카쪽은 하도 메스컴에 많이 나와서 무뎌졌다고 치고, ‘뉴기니’ 쪽에 있는 입술 늘리기 종족이라든지, 목 늘리기 종족들이 과연 실제로 ‘신기함’을 넘어서 우리가 흔히 연예인으로서 추앙할 수 있는 진정한 ‘개성’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지금 한창 인기를 얻는 가수 ‘비’가 입술의 표면적이 30cm이상 늘어나는 장식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으며 ‘개성파’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편견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제로 속으로는 전혀 ‘평범함’에 벗어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아량이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세상의 편견이 사라지고 개성이 존중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너무나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단지 보기 좋은 개성만이 개성이고, 인간 본질이 아닌 인간을 덮고 있는 부차적인 차이를 개성이라 한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과, 신체적 차이를 보이면,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갖거나, 마치 종교계처럼 남의 생각을 잘못된 것이라 치부하며 부정하기에 바쁘다. 진짜 개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어째서 지역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권은 색깔론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가수 팬클럽끼리 싸우고, 문화 심의라는 잣대로 즐길 권리가 필터링되고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여성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설문해본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내용 중, ‘자신이 임신하고 있는 아이가 신체적 기형아라는 것
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설문에 대한 결과가 있었는데, 설문 참여자 중 과반수 이상이 ‘낙태’를 생각하며 나머지 의견 중에서도 ‘운명, 혹은 의무감으로 키운다’라는 등의 의견이 대다수, 별 생각 없이 그냥 키운다는 의견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나서 사회에서 받을 차별과 불행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불행을 겪을 바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이를 위해 좋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고, 다소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전생에 지은 죄’라고 생각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부모들 중 진심으로 ‘아이가 살아가며 느낄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필자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겉모습 속에는 ‘자식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은 본인들’이라는 생각이 앞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자식이 다른 사람들과 태어나는 조건이 다르다고 해서 특별히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어차피 주어진 조건에 적응해 살아간다는 조건에 있어서 태아에게는 비교적 공평한 조건이 부여되는 것일 테니까, 특별히 태아로서 열등감을 느낄 여유따위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부모는 다르다. 부모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자식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이유로 쉽게 낙태를 결정하지만, 속으로는 일반적인 사람의 형태와 다른 자식을 키우며, 사회의 평균적이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고, 또한 두려웠을 것이다.

즉 태아는 태어날 때의 부여 받은 조건을 스스로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비관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자라나
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비관적이라 느끼게 되는 것이 맞다. 다시 말해 부모들이 흔히 기형아 낙태에 대한 의견으로 말하는 ‘자식을 위해’, ‘의무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라는 말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그저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하다. 필자의 이런 의견에 엄청나게 반발할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반발을 하기 이전에, 장애아 출산에 대한 경험을 해볼 확률이 높지 않은 이상 그것을 체험으로서 이해하기는 힘들고 그냥 한번쯤 자신이 장애아의 부모가 된다는 가정 하에 이 문제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똑똑히 생각해보라. 당신들은 일반적인 정상아를 키우면서 겪는 고생보다 비정상아를 키우는 고생이 더 힘들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낙태 혹은, 숙명, 의무감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말이다. 부모들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단어 ‘정상’, 그들은 남들, 그리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형태에 반하는 생김새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부모들이 똑같이 겪는 고생보다 더 한 육아고통을 더 받는 것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과 인생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진정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일말의 망
설임이 있을 리가 없다. 의무감, 운명 같은 구차한 변명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으며, 장애우로서 고통받는 생활의 불편함보다,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잃고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 더욱 큰 불행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이 키우는 동안, 즉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 태아의 나이가 30대를 넘기기 전에 죽는 부모를 보기는 드물 뿐더러, 굳이 이유를 들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부모들에게는 절대 자식이 가질 비관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오히려 자식이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그리고 보다 한층 더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아이를 보다 사랑으로 감싸며 키워낼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낙태를 택하는 수많은 부부들이여, 단지 본인들을 위한 판단을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덧칠하지 마라, 당신들은 이미 ‘정상인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짐과 동시에 그 아이가 가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특별한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당신들은 아이가 장성하여 세상의 차별을 받을 것을 겁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가 일반적이지 못한 육아고통으로 점철될 것과, 자신들이 일반적인 인간의 형태가 아닌 자식을 키운다는 세상의 편견을 견디어 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두려웠다면 에초에 태어날 것을 이미 포기했을 것인데, 당신들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이 넘칠 정도로 충만한 상태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 증거로 잘 될 장군감 아이는 울음소리도 우렁차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우렁차게 울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는데 부모들 스스로 세상에 대해서 그 아이를 가진 자격에 대한 겁을 집어먹지 마라, 아이는 태어나면서 큰 울음소리로 ‘부모님, 저는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나갈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만일 태어나면서 말을 못하는 성대이상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그 아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 어떤 아이보다 우렁찬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명 들릴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태어날 아이를 축복으로 맞아들이자, 모든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도 축복 받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한글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생겼을 법한, 아니면 최근 일본문화개방의 영향으로 생겼는지도 모를 일본어를 그대로 직역한 듯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중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라는 표현이다. 자신과 다르고, 다수의 형태를 가진 인간의 형태와 다른 행동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단지 겉에 걸치는 치장을 개성의 전부로서 치부하고, 진정 절대다수의 형태와 다른 ‘개성’이라 추켜세워주어야 할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평범과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것이 지금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 선천적 장애아, 혹은 동성연애자, 트랜스젠더 그리고 평범함을 거부하고 진정 다른 파격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칭해 주었던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집어치워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고교를 자퇴하거나 혹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길을 소신있게 택하는 인터넷 만화가, 비주류 애니메이터, 아마추어 게임제작자, 독립영화감독, 등 사회에서 커리어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부심과 꿈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그들을 사회의 이단아, 혹은 사회 부적응자 따위로 부르기에는 그들의 열정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제 그들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보는 건 어떨까?, 남들과 다른 그것이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될 수는 없어도 남에게 없는 그 무언가를 가졌다는 가치에 대한 자부심,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존중으로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그 존중을 자신이 수혜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1. 1. 19:16
흔히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하지만, 필자는 그 스승이라는 단어에 심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스승은 교사, 강사와는 분명 다른 표현이며, 그냥 지식이 많아서 가질 수 있는 칭호는 절대 아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나라 교사들이 듣기 원하는 대로 아무 의미없이 그들이 불러달라는 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짜 사심 없는 학생을 위한 교육을 해도 스승이라는 칭호가 나가기가 힘든데 지금 하는 짓들이 정말 학생들을 위한 짓들인지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다니는 어처구니없는 지식인들의 기침 한 번으로 좌지우지될만큼 교육이 무게감 없는 돈 잔치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나라가 불황이니까 슬슬 삐걱거리던 부분이 하루에도 몇 개씩 망가지
기 시작하는데, 그걸 고치는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기계가 삐걱거리면 기름치면 끝이지만, 인간이 삐걱거리는데는 약도 뭐도 없는 게 사실이다. 이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라지만 세상이 아무리 추악해도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그런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을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인재로서 가르쳐야 할 교육계가 하는 작태가 이지경이니 이미 교육계의 휘하를 한참 벗어난 필자이지만, 그것을 한참 떠나서 이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꿈과 미래를 볼모로 유치한 싸움을 진행중인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어째서 교육자,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정부가 저다지도 현 실정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저렇게 매번 대립하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어째 저들은 20년을 넘게 싸워도 합의점을 못 찾는지, 인간성을 떠나서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지금까지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친다고 으스대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현안으로 대립하고 있는 문제점이 그렇게 해결이 힘든 문제인지
를 우선 곰곰히 뜯어보자, 지금 크게 두 가지 현안으로 교육계는 싸움터가 되고 있는데,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나는, 고교 평준화에 따라 학생 선발 방식에서 변별력을 갖지 못한 자료로서 선발이 어려워진 학교들이 암묵적으로 자행해온 고교 등급제 적용에 따른 국정감사 적발 사건, 다른 하나가 지금 한창 시끄러운 사립학교법 개정이다. 뉴스, 그리고 각종 언론에서 이 두 가지를 하도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고 첨예하게 두 의견이 대립해서 뭐 하나 새로운 대안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정말 저게 그렇게 해결이 힘든 일인가? 하고 새로운 관점보다는 그 두 가지 입장 중 한 쪽 편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 식으로 여론이 조성되고 있는데, 이래서는 몇백년이 흘러도 해결이 될 리가 없다. 교육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말 현명하고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방안을 제시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교사도 인간이고, 학력이 높다고 논리적이지 않다. 대학생들중에서도 수능시험문제패턴만 연구해서 머리가 굳어버린 사람들도 있고,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시험 체제에서 선발된 모든 인력들은 이미 머리가 굳어서 새로운 생각은 하지 못하는 돌머리가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나오는 의견이 진정 논리적이고, 범국민적인 여론을 이끌 만큼 체계적인가? 그런데 아직도 해결이 안나고 대립만 하고, 고작 한다는 게, 올해만 어찌어찌 넘기고 내년에 다시 이야기해보자, 라니 그게 정말 문제해결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냉정하게 보자, 과연 저 문제가 어려운건가? 언론에서 하도 어렵게 써서 여기에서 아무리 쉽게 풀어써도 이쪽이 더 어려워보일 지경이겠지만, 한번 들여다 보자, 자세히 보면 시간차가 있지만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는 매우 커다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
학’에 얽힌 문제라는 것이다. 고교등급제를 시행한 학교 리스트를 자세히 보면 그 중에 어디를 봐도 국.공립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교등급제가 적발된 대학들도 사립, 교육법에 반기를 든 것도 사립이다. 지금 한창 논쟁이 일고 있는 사학개정법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학에 대한 문제라는 것은 법 자체에 친절하게 명시되어 있으니, 이 두 가지 문제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본다. 그럼 왜 ‘사학’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 답은 생각외로 단순하다. Give & Take가 안 되고 있어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게 또 무슨 소리냐, 우리나라의 교육법은 국. 공립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소속된 전 교육기관에 영향력을 끼친다. 비단 교육법뿐만 아니라, 개인, 기업 등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법률 (헌법, 국가기본법) 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민법 속에서도 예외나, 치외법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이러한 우리나라의 법 체계가 법망만 복잡하게 만들 뿐 실제 실효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법 체계를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교육게에 들이대려 하니 기계에게나 어울릴 법한 글들로 하나하나 인권을 침해하듯 사학 운영을 간섭하고 있으니 사학들이 반발을 하는 거다. 개인으로 치면 오늘 아침은 뭘 먹어야 하고 점심은 뭐 먹어야 하고 저녁은 뭘 먹어야 한다.라는 걸 법으로 명시해두고 편식을 하거나 밥을 남기면 범법자가 되는 셈인데. 사학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고 거슬리는 시어머니식 참견을 견디지 못하는게 당연하고. 교육계는 교육계대로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일정한 도가 있는 법이라며 사람을 가르치는 건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니만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도리고 이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결국 싸움이 일어나고 만다.

자 그럼 이런 판국인데 왜 Give & Take가 나오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사학법의 적용과, 공익성이 있는 인력양성사업이라는 이유로 국공립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대학 인력 양성 국가 주도 프로젝트를 사학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면서, 국공립에 들어가는 국가 예산을 사학에도 똑같이 자금 지원을 비롯한 각종 혜택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제 혜택은 물론이고 직접적인 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교육부는 돈 들인 만큼 말을 들으라고 하는 거고 사학은 돈으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맞서는 셈이다.
이러한 문제가 지금까지 질질 끌 만큼 해결책이 없느냐, 세상 모든 분쟁에서 해결책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그 해결책이 중립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바라보자면 조금 어렵지만, 한쪽이 한쪽을 잠식하는 식의 반쪽짜리 해결책으로는 근본적으로 어림없으며 다시금 그 문제가 화자되고 불씨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보다 제 3의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다른 분야처럼 대충 해결하면서 추이를 지켜볼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한시가 급한, 그러면서도 나라
의 꿈과 미래가 걸려있는 교육 문제이니 만큼 문제 해결은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앞서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이야기해보았는데,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이냐? 너무 무거운 주제 분석치고는 김이 빠지는 해결책이긴 하지만, 간단한 방법이 있다. Give & Take가 되지 않는다면, Give도 하지 말고 Take도 바라지 않으면 된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경쟁만큼 좋은 것도 없지 않겠는가? 교육계와 사학이 서로 아무런 분쟁 없이 협력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갈라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가 더 달리기가 빠른지를 입으로 논하면 끝이 없다. 제일 좋은 방법은 정확한 규격의 트랙에서 서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건 마라톤을 시키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경주를 시켜보면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선 사립대학들이 뉴스에 나오는 대로 의사
의 아들, 돈 있는 집안, 강남권 고교, 강남권 집안, 교수의 선발 전권 행사 등의 문제점을 교육부가 태클을 걸고 있어서 말썽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엔 이 문제에 대해서 교육부는 문제를 삼아서는 안된다. 사학이란 돈을 벌어야 운영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정신으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선심성 경영으로서는 절대 학교를 유지할 수 없고 일부, 혹은 전체적으로 기업 정신에 입각한 경영이 불가피하다. 사학은 사학이다. 운영자 입장에서는 돈을 벌어야 교수 월급도 주고, 학생들 가르칠 건물도 짓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사장은 운영자금을 비축하고 개인 유용할 수 있는 부를 축적할 수도 있는것이다. 교육부는 사학에까지 국가기관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공무원 윤리강령을 들이대면 안된다. 그들이 고교등급제로 학생을 뽑건 어떤 기준으로 기부입학을 받건 국가기관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개인기관으로서 기업에 적용되는 상법을 적용해서 세금을 포탈했다든지등을 적발하는 선에서 국가의 개입은 끝나야 한다. 지금 국가는 교육법, 상법을 둘 다 적용함으로서 문제를 키우고 있고 해결이 안 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데, 사학에게 거는 기대, 즉 Take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사학도 나름대로 교육 철학이 있고 경영 철학도 존재한다. 기업에서는 사장이 보스인데 보스한테 누군가가 위에서 이것저것 간섭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정말이지, 정부와 교육부는 서민의 상식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Take를 바라지 않는데 Give를 할 필요는 없다. 교육부는 일체 학생선발권, 교육 관련 운영에 대한 모든 권리를 사학에 보장해주는 대신 교육 관련 예산 배정을 끊으면 된다. 물론 BK21 등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인재육성사업 역시 사학에서 모두 철수시키고 국공립에만 국가 에산과 각종 인재육성사업을 집중시키면 지금의 교육부가 관할해야 할 영역이 훨씬 간편해지고 각종 사업, 법 적용도 쉬워지며, 분쟁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줄어들 것이다. 국공립이 국가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사학은 사학 나름대로 사학쪽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자체 인재 육성 연합 사업을 구축할 여력이 충분하다. 요즘 뉴스 보니까 사학쪽 단합이 너무 잘 되고 있던데, 그 나이 많으신 분이 단결해서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열정을 봤을 때, 이쪽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가령 이런 문제제기가 나올 수도 있다. ‘아니 그럼 사학쪽에 소속된 학교에 들어가고 싶은 집안 가난하고, 아버지 직업 시원찮고, 백도 없는 학생들은 사학에 들어가는 걸
포기해야 합니까? 학력이 재산인 대한민국에서 사학에 못 들어가는 것은 사회, 계층간 갈등을 심화시킬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할 수험생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꽤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학에 대한 우리나라의 지지도가 꽤 높은 편이니까…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사학측에서 주장하고 있는 학교 운영 방식은 학교를 경영한다는 측면에서는 굉장히 좋은 방식이지만, 인재 육성 방식에서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아버지가 의사라고 아들도 반드시 의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 전에 의대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 중, 그리고 지금 의사의 꿈을 가지고 의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소질’로 의사직을 택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버지가 정치인, 기업인, 혹은 돈이 많다고 아들이 반드시 공부를 잘 한다고 볼 수도 없고, 고액과외, 좋은 학원, 강남에 살고, 강남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전부 공부를 잘하고 뭔가 공부를 잘 하는 피가 흐르는 건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학이 반드시 이런 학생들로 정원 100%를 채우는 건 아니지만, 기업이 실적으로서 주주들에게 어필하듯 학교는 학생들의 학력으로서 전 세계 학계에 어필하는 것이 정설이므로 사학의 지금 선발 방식은 만일 필자가 이야기한 대로 교육계가 지원을 끊고 또한 프로젝트에 대한 간섭도 끊는다면, 학교 자체적인 위상 측면에서 저런 선발 방식은 지속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교육계 휘하에 있는 국공립의 방식이 이상적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고교평준화가 절대적인 정책이 아니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분명 강남권 소속 학교가 전부는 아니지만 마치 야구로 따지면 이승엽의 56개 홈런과 메이저리그 알랙스 로드리게스의 56개 홈런은 가치가 다르듯 분명 학력이라 불리우는 수능 잘 보는 방법의 노하우 차이는 분명 있는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그 수능과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대학에서 전공 위주로 배우는 것과는 큰 격차가 있고 실제 활용이 거의 안된다고는 하지만, 문과를 제외한 이과와 공과에서는 수학적인 기초지식이 뛰어나지 않으면 실제로 수강이 어려울 정도로 커리큘럼이 빡빡하게 구성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교육부가 실시하는 정책으로 얼마나 실제 우리나라 과학 기간 인력계를 살찌울 인력이 탄생할지는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각각 장단점이 있는 서로의 정책을 서로 인정하고 한번쯤은 경
쟁을 시켜보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서로의 정책이 맞다고 싸우기만 하다가 서로 섞여서 사학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가난한 집 학생을 아무 이득 없이 적선하듯 입학시키거나, 국공립에서 어설프게 사학의 위상을 따라간다는 명목 하에 공무원 집안, 교사 집안, 교수 집안, 정계 인사의 집안 자제들을 입학시키는 서로에게 다분히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촌극들을 이제 그만 끝내고 서로 자신들만의 색깔을 가지고 각자 평행선처럼 열심히 각자의 정책만으로 승부를 내 보라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서로 섞이면서 싸우는 일로 20년, 200년을 하나같이 해결 못하고 계속 유망한 새싹이 방치되어 말라버리고 썩어버리는 현실보다는 한번쯤은 교육계도 자극이라는 것을 받아서 입으로만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지 말고 교육자들이라면 교육자들 답게 자신들만의 철학으로 승부를 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10년 정도면 각자 배출한 인재가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가 답이 나오고 그때쯤이면 어느 쪽이 맞는지 보다 정직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니까…

그 사이 수험생들은 자신의 여건에 맞게 학교를 선택하면 된다. 사학
에 못간다고 해서 학벌주의 사회에서 뒤쳐진다는 이야기는 사실 설득력이 없다. 연세대 고려대가 아무리 이미지 개선을 해도 아직 서울대를 한국사회 인지도에서 이기지 못했다. 암울한 순위이긴 하지만 전 세계 대학 순위에서 하위권에 있는 서울대 아래에 있는 것이 연고대인 건 확실하다. 이공계도 마찬가지다. 비교가 참 힘들지만 대외적 인지도측면이나, 명성, 그리고 실제 인재 육성 프로그램으로 인한 학문 수준에서 한양공대와 포항공대가 아무리 홍보를 해도 사람들 뇌리에는 카이스트가 그들과 항상 함께 인지되어 있다. 아무리 민간 자격증이 돌풍을 일으켜도 기업에서 인정받는 건 국가공인 자격증 이상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기에서 하나 분명한 것은 최소한 사학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 고교등
급제, 기부입학, 교내 비리를 가지고 고발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사학을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것을 모두 감수하고 들어간다는 것이며 이미 사학도 그걸 감수할 만큼의 학생만을 뽑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일은 없다. 자식을 사학에 보낸 학부모들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기부금 내는 것 법적으로 제약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지금 문제를 제기하고 분노하는 쪽은 교육부와 국공립, 그리고 대한민국 1% 이외에 대다수의 서민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리그를 펼치게끔 놔두면 최소한 교육계에서 일어나는 차별 역차별 하는 건 사라지니, 저쪽에서나 이쪽에서나 불만이 들릴 턱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방식대로 문제해결이 된다면, 수험생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교등급제에 찬성하고 사립학교 개정법에 반대하는 사학파들은 사학으로 고교등급제에 반대하고 사립학교 개정법에 찬성하는 교육부파들은 국공립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선택권도 좁아지지 않고 머리아프게 사학이나 국공립이냐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강남 특권, 교육 비리 등의 짜증나는 뉴스를 더 이상 안 봐도 되니 얼마나 세상이 상쾌해지겠냐는 것이다. 다소 이야기가 생략된 감이 있지만,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사학법개정논란도 필자가 제기한 해결방법으로 충분히 불식 가능하다. 사학의 존립을 우선하는 방향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그것이 대학교이건 고등학교이건 약간의 정책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맥략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경쟁이라는 것은 굉장한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발전할 수 있게 만들어준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너무나도 간단한 진리를 모른 채 싸우는 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다. 두 명의 훈장
선생님 중 어느 쪽에 배울지를 결정하는데 먹물을 튀기며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두 훈장 밑에서 배울 학도들이 있을까? 지금의 교육계는 그런 싸움을 벌이면서도 반 강제적으로 학생들을 책상에 묶어두고 먹물튀기며 서로 검게 물들어가는 선생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육자라면 먹물을 튀기며 서로를 더럽히며 싸우기보다는 붓에 먹물을 묻혀 서로가 가진 지식으로서 기량을 겨루는 것이 어떨까? 학생들은 두 훈장 중 어느 쪽이든 갈 것이고, 어느 훈장이 잘 가르치는지는 학도들이 장성해서 어떤 인물이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법이다. 세상 사는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를 잊어버리고 어려운 말들이나 늘어놓으면 지식인이라 착각하고 살면서 실제 하는 행동들은 초등학생만 못한 현 교육계에 필자는 혀가 차일 뿐이다. 제발 부탁이니 자신들만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이제 막 자라나는 깨끗한 꿈나무들에게 먹물을 튀겨 더럽히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옛말에 근묵자흑, 더러운 걸 가까이 말라 하였듯이...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10. 4. 10:48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일본인이 야구로서
는 제일 알아준다는 리그를 보유한 미국에서 자국민이 가지고 있는 기록을 깨버린 것,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자국인이 아닌 용병, 게다가 그들이 항상 경외시하는 아시아 황인계 선수가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점을 미국 내에서 그렇게 달가워할 리가 없다. 굳이 미국의 반응을 어렵게 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치로에 대한 의견은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분분하게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이국에서 날아든 스포츠 뉴스에 의견을 내는 사람들은 평소 정치계 뉴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글들을 다수 쏟아내기 시작한다. 단지 이치로=일본인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을 뿐인데, 이러한 공식 하나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종군위안부, 독도, 교과서, 신사참배’까지… 물론 정치계에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야구 좋아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실제로 통계를 보면 국내 프로야구 관객들이 3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사회 구성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나올법도 한 글들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이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나라가 특히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사회 전반적으로 경쟁자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로 물어뜯고 견제하는 나라는 넓게 볼 필요도 없
이 바로 좌 우, 중국과 일본이다. 이들의 경제, 정치, 역사적 활동에 대해 서로 예의 주시하고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국익에 반하거나 상징적으로 불편한 활동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국가적 성명을 내곤 한다. 이런 나라들에 대해서 각 나라의 국민들은, 각양각색의 기준들 들어 자신들의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주장이 서로 맞물리면서 국민적인 감정도 좋아질 기미가 없다. 최근에는 일본이 잠잠한 반면, 중국쪽이 고구려사 왜곡을 비롯한 각종 파상공세로 대한민국과의 수교에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양국 분위기가 좋지 않은 흐름을 띄고 있고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비판도 활발한 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살펴볼 부분이 있다. 중국의 최근 외교정책을 흔히 우리나라에서 표현하기를 ‘오버한다’, ‘부풀린다’, ‘터무니 없는 논리’다는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과거, 고구려의 자료가 분명히 나와있음에도 억지주장을 펼쳐 그것을 부정하거나, 기록을 삭제하는 등, 어린애가 떼를 쓰는 식의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취하고 있는 부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중국이라는 존재에 염증을 느끼는 것 같다.
솔직히 이런 녀석들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냐마는...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과, 이치로의 대기록 수립에 대한 우리나라의 반응과 다른 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인이 현 중국 영토에서 살았고 유목민족이라는 이유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는 중국과 이치로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지금까지 일본이 저질렀던 모든 죄를 들어 그의 기록이 하찮은 것이었음을 증명하려 하고, 혹시라도 그가 제일교포가 아닌지를 사돈에 팔촌, 증조에, 고조까지 조사해가며 뒤적거리는 사람들, 그의 옛 소속팀이었던 오릭스에서의 타격 코치가 한국계 제일교포라는 것을 찾아내서 자랑스럽다는 칭호까지 붙여가며 이치로의 일본인으로서의 기록을 무마시키려는 언론들…

스포츠, 특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리우는 야구에서의 기록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리그가 커질수록 데이터 야구를 펼치는 감독이 많아진다는 점은 이를 잘 반증한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선수 중 천재라고 안
불리웠던 사람은 없다. 천재들에 싸움, 프라이드의 홍수속에서 보다 자신만의 프라이드를 드러내려 애쓴 그이다. 그를 뒤에서 서포터해준 것은 일본인일지 모르지만, 그가 아파서 안타를 대신 처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일본 국기를 몸에 두르고 국가대표의 심정으로 메이저리그를 뛴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애국심이 많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메이저리그라는 무대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열리고 있어도, 전세계 몇십개국에서 가장 야구를 잘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인 프로 리그라는 점을 깊이 상기해야 한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자국민 출신 선수가 좋은 성적을 보인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다만 프로 스포츠에서, 자국민이 잘 한다는 이유로 자국기를 들고 가서 흔들며 자국 만세를 외치는 것이 과연 선수들을 위한 그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박찬호 선수가 국내 첫 메이저리거로서 겪은 수많은 아픔들은 본인 스스로가 성적을 제대로 못 낸다는 본인 자책이 아닌 본인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이었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국가대표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축구에서도 태극전사라는 수식어는 없어진 지 오래다. 요즘은 왠만해서는 유니폼에 태극기를 붙이는 걸 보기 어렵다. 축구협회의 앰블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국가대항전이라는 의미도 클럽축구의 그것처럼 각 나라의 축구협회 소속팀이라는 이름으로서 대결이 이루어진다. 원래 스포츠는 전쟁이라 표현될 만큼 잔혹한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는 어쩔 수 없는 개인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이
상의 의미는 사치다. 리그 내 팀을 옮기는 건 선수인생 중 부지기수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보다 나은 리그로 옮기는 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 민족적 자존심, 종교적 갈등으로 수없이 초래되었던 전쟁들은 이제 미국이라는 나라의 욕심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진 지 오래이며, 국가간 대립은 FTA와 수교로 인해서 완화되고 있고, 경제라는 선의의 경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 국가간의 모습이다. 물론 세세하게 나누어 볼 수 있는 각 국가간의 불편한 관계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각 국가 원수를 비롯한 외교 전문가들이 해결할 문제이며 조금 더 나아가서 범국민들이 뜻을 모아 해결할 문제이다.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에게 국수주의라는 새로운 족쇄를 채우지 말자, 보아라는 가수가 한 일간의 감정을 녹이는 역할은 ‘기대 효과’이지 보아가 절대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숙명’이 아니라는 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 해외 빅리그에 진출한 이천수에게 ‘선수 개인적으로’ 혹은 ‘스포츠로서’ 그를 응원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국위선양’, ‘국가대표로서 한국인의 위대함을 대신 보여주고 와라!’라는 식의 생각은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권에서는 요즘 과거사 청산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친일 행적이 있는 정치인들을 색출해내어 그 죄가 후손이 저지른 것이 아닐지라도 그 사실만큼은 숨지기 않고 명확이 드러내자는 취지의 정책이다. 하지만 가령 어떤 정치인의 아버지가 일본군 순사부장을 지냈던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를 심판하는 건 국민들이지 그 법으로서 그를 심판할 수는 없다. 그는 현행법상으로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당시를 살면서 친일 행적을 벌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보인다면 국가적으로 그가 필요하고 시대가 그를 원한다면 그 사람의 능력적 가치를 통하여 충분한 활동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국민들의 지지로서 자신의 직책이 결정되는 자리이기에 이러한 정책이 쉬이 통과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치로의 신기록 수립으로 수많은 일본인 유명인사들 중 한국인이 많다라는 일본 대내외적인 공공연한 사실을 들어 이치로의 과거 증조, 고조까지 뒤지고 있는데, 별로 먼지가 나올 구석은 없어 보인다. 판매부수와 관계된 키워드라면 개코같이 찾아내는 국내 스포츠 언론들이 이치로가 군국주의 관련된 일부의 증거라도 발견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나오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에초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치로의 일본인으로서 세운 기록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시점으로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변칙적으로 우리나라의 반일 감정이라는 크나큰 설득력 향상 아이템이 존재하지만, 리그, 프로 스포츠에 국수주의를 들먹이며 논쟁을 벌이는 에너지 낭비는 이제 없어야 하지 않을까? 박찬호와 이치로의 한일 투타 맞대결보다, 이제는 메이저리그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팬으로서의 여유를 찾을 때가 아닌가 싶다.

- Am -
posted by RushAm 2004. 9. 26. 04:02
연예인의 대표주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역시 가수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 오죽하면 탤런트들조차도 멀티플레이어 아이돌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음반을 내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정도로 가수라고 하면 그야말로 누구나 주목받는 대중적인 우상이라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자신의 명예, 인기를 위해, 스타성을 위해, 그냥 가수라는 직업이 탐이 나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점차 한국 가요계의 경쟁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순수성을 가져야 할 가수라는 직업이 다른 직업 연예인 소속사의 사업 영역 확장으로 이용되고, 가창력보다는 쇼 프로그램에서의 재치와 얼마만큼의 TV 출연으로 인한 홍보 여부가 성공의 척도로 등장하면서 원래 그 무대에 있어야 할 재능 있는 수많은 유망주들이 홍대, 영화음악계를 전전한다. 우리나라 애니음악도 비슷한 맥략에서 그들의 도피처, 혹은 소위 밤무대라 불리우는 야간업소와 비슷한,
마이너리그의 개념으로서 성장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데뷰 때부터 메이저 음반 기획사의 홍보 수단으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는 옆나라의 애니음악과는 사뭇 다른 형태지만, 일본도 충분히 그러한 시기를 겪었다. 옆나라라고 해서 처음부터 애니 인프라가 높았던 것도 아니고, 지금도 애니음악이 대박흥행의 보증수표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다 반짝스타로서 생을 마감하는 가수들이 부지기수로 애니음악계를 거치는 것을 볼 때 애니음악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수준에서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정여진
이름으로 듣기에는 다소 생소한 이 가수, 우리가 항상 어떤 TV프로그램을 볼 때나 일반인이라면 스텝롤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이는 애니메이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열성적으로 정말 1초나 제대로 나올까 말까 하는 스텝롤을 바삐 읽어내려갈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 매니아가 아니라면 당연히 정여진이라는 이름은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가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듯, 그녀의 목소리는 누구나 어딘가에서 한번 정도는 들어봤던 것처럼 아련하게 우리 기억속에 남아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영화 체인지의 테마곡과, 투니버스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의 번안곡을 두루 맡기 시작하면서부터지만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애니음악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전설적인 보컬이라 불리울 만큼의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무려 27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녀의 애니메이션 데뷰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필자 본인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 전자인간 337, 똘이장군, 그레이트 마징가, 빨간머리 앤, 보물섬, 로보트 킹, 개구리 왕눈이,요술공주 밍키,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 시대를 유년기로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정말 정겨운 동요처럼 기억되고 있는 그 음악들이 모두 그녀의 보컬로서 불리웠던 것들이다. 그녀 나이 5세부터 시작된 애니음악 인생 27년, 어린아이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애니메이션계에서 제대로 된 음악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동안 그녀는 한번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고, 지금도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노래를 불러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녀가 불러 온 애니음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녀가 인정받기까지는 정말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선적으로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가 아동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의 권리 회복에 또한번 수 년이 걸렸다. 가수라는 직업, 연예인으로서 대중에게 존재가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공인이라는 개념이 매스미디어 도입 당시부터 굳어져 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귀천을 잣대질당하며 성장해왔던 음악들, 그 속에 애니음악이 있었다. 아직도 애니음악의 자체작곡 비중이 높지 않는 상태에서 수많은 애니음악 보컬들이 가수들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갖지 못하고 원곡 그대로 따라서 불러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에 이들의 음악성이 인정받기에는 아직 많은 어려움이 있고, 최근에서야 애니음악 업계 자체를 주목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가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보다 고취시키고자 마치 정치인이 득표유세를 하는 식으로 반짝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번안곡 가수라는 딱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애니음악인들에 대한 편견의 시각은 쉽게 나아지기는 힘들 것이다.

세상 일 쉬운 게 하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믿고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면서도 일의 귀천, 직업의 귀천을 매기고 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을 찾아 취업난 속에서도 사무직을 선호하는 사회, 음악계도 이러한 개념에서 1류 2류를 나누고 인기가 가늠되며, 사람들의 관심도
차이가 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애니음악을 하는 보컬들이 2류,3류라 칭할 정도로 가창력면에서 메이저 가수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메이저 가수들에게 정말 각양각색으로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새로운 음악장르를 지닌 곡들만을 부르게 했을 때 얼마만큼 그 곡들을 소화할 수 있을까? 팝, 발라드 가수가 힙합을 하면 자연스러워 보일 리가 없고, 록가수가 트로트를 부르면 트로트만의 감칠맛이 나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특별히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매 작품마다 애매모호한 곡 색깔을 가지는 애니음악들을 꾸준히 평균 이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가수가 그리 흔하겠는가? 매 레코딩때마다 듣도보지도 못한 희안한 음악들을 보컬로서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은 1류 2류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창력의 기준으로 평가가 불가능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중의 평가는 자신의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극명하고 때로는 매우 냉정하게 스타를 만들어내고 퇴물을 걸러낸다. 연예계를 치열한 격전지로 만드는 것은 연예인 본인들이 아닌 대중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연예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TV에 나와서 한번이라도 대중들에게 얼굴을 내밀고, 내밀었으면 자신의 얼굴이 한번에 기억될 수 있도록 소위 말하는 ‘끼’를 보여주어 존재를 각인시키는데에 열중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가요프로그램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다는 그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그 사실과 그들이 TV에 한번 더 나왔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일 뿐, 특별히 음악으로서 그들을 기억하기는 힘들다. 이렇듯 연예인들마다 각자의 정체성이 흐릿해지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장인이라 불리울만한 연예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표현하지 못할 아쉬움일 것이다. 연기를 겸하고 있는 가수, 연기자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출시했던 수많은 탤런트들, 그들이 과연 10년 후에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노래 잘했던 탤런트?, 연기 잘했던 가수?, 사람의 능력은 200%라는 오버 페이스 속에서도 언제나 1이라는 능력을 부여받으며 그것이 어떤 한 분야에 전부 투입되지 않고 분산되면 그 존재감은 희미해질 뿐이라는 것을 당장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전설이라는 의미가 현대에 와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로 최대한의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것은 연예인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의 누구라도 생각하고픈 인생의 성공이란 달디단 열매의 맛이 아닐까?, 그 성공이 부와, 명예 그리고 대중적 인기로 한정되기 보다는 가수로서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가수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를 바라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열망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에서 성공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가장 큰 행복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녀, 정여진처럼 말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9. 16. 00:15
가장 간단한 속담을 예로 들어도 두 마리 토끼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흔하게 쓰이고 있을 정도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어떤 부분이든 간에 본인 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아니 스스로에게 그렇게 주문을 걸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르지만, 두 가지 꿈을 쫓을 수는 없는 것이라 항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항상 소설, 드라마, 심지어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인생극장이라는 콩트를 통해 일탈을 즐기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사실 보통 고역이 아니다. 기자들은 기자들 나름대로 뭔가 기사를 흥미있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가야 하는데, 대체로 제작진들이 말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취약점을 보이는지,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드는 느낌은 올림픽 금매달을 따고 돌아온 유도 선수를 인터뷰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별히 평가절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작품에 대해 언론에게 밝히는 소견의 특색이 크게 없다는 것, 아무튼 보통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예술론’ 을 펼치는 사람과 ‘상업론’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대중문화론’ 을 주창하는 식의 두 가지 정도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국내 제작진들의 대부분이 이마저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상품이건 손때가 묻는 발명품이건, 메이저 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한 작품이 있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만한 물건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본인의 작품 활동에 있어 ‘대회용’과 ‘대중성’은 철저하게 구분지으며 작품 세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가지 제약 모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만을 만들어서는 충족하지 못하는 것들, 즉 하나의 제약으로서 애니메이터의 가치관을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인프라가 넓지 않아서인지, 그런 고생을 겪고 싶어도 못 겪는, 이른바 ‘강제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제작자 지망생, 실제 제작진,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조차도 본인들의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작품 속에 십분 발휘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심미적 부분에 공을 많이 들여 국내 외 애니메이션 축제 기준에 걸맞게끔 작품성을 다듬은 후 그렇게 만들어진 ‘대회용’ 작품을 공개했을 때 ‘대중적인 흥행’을 노리기까지 한다.

TV 문화 산업에 대한 특집을 논하는 프로그램, 마고 21의 오세암 제작진 인터뷰가 프로그램 중반부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을 논하는 단계에서 등장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제작진이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한국 애니메이션이니까 재미 없을거야! 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안 보는 걸 저희가 어떻게 합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정말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마고 21이 오세암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사람들이 많이 봐 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되려면 어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묻고 싶었다. 제일 가까운 SICAF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경쟁부분 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작들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극장에 걸릴 때, 어떤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단지 그림자놀이로, 단순 종이인형, 클레이, 흙으로 표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돈 7000원을 내고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그런 작품들은 비교 대상이 다르니 자처하고서라도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는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가 그렇게 모든 해외 상을 다 휩쓸었다고 광고에 홍보를 거듭하고 영화 프로그램에서 줄기차게 소개해도 전국 관객수 5만을 못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점도 없었단 말인가? 그들이 오세암을 두고 한 홍보 전략 중 ‘해외 수상작’ 이외에 다른 흥미 요소를 끌 수 있는 무엇이 있었는가? 모성애를 찾아 떠나는 두 남매? 그것이 정말 극단적으로 말해서 호쾌하게 날아다니며 불폭탄을 쏘는 건담류 로봇물에 빠진 남자어린이들, 남녀간의 진득한 순정물에 빠진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그것에 견주어 오세암을 택할 수 있을 정도로 흥행성, 흥미 요소가 많았을까? 아니 많았을거라 생각한건가? 자신들의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반영하고, 해외 그랑프리에서 수상한 작품을 보고 진정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관객과, 그걸 만든 제작진, 그리고 그 작품에게 상을 준 심사위원 뿐일 것이다.

‘이웃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최근작이라고 볼 수 있는
‘모노노케 히메’ 를 상영하기 전 모 잡지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필자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작품 세계를 지금까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빼놓지 않고 계속 구상했고, 그 동안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을 너무나도 만들고 싶었다.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기에 나는 이제 은퇴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가 토에이, 니폰 애니메이션을 거처 지브리 스튜디오에 오기까지 그의 애니메이션 인생 40년동안 그가 그만의 색깔로서 그만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아마노 요시타카처럼 데뷰 때부터 천재적인 감성과 타츠노코의 지원 하에 자신의 작품관을 마음껏 펼쳐 성공을 거둔 예도 있고, 그 이외에도 곤조의 아이콘 ‘고토 케이지’의 키디 그레이드처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 어떤 애니메이터들일지라도, 흥행성에 기초를 둔 작품 속에서 해외 수상을 거둔 적은 있어도, 해외 수상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흥행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 때에는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작품에 임하며, 이것이 흥행이 되는지에 여부는 관계없이 본인의 자아만족,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카타르시스적 보상 차원에서 접근한다. 즉 애니메이터들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예술적인 작품을 만드는 행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필자는 이러한 부분을 애니메이터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비애라고 생각하고 있고,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보다 작품성이 다듬어지고 자신이 표현하고픈 것들을 보다 날카롭고 능숙하게 빈틈없이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걸 극복하고, 처음부터 소신껏 자신들의 색깔을 가득 담아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결코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치고는 본인들이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김기덕 감독이 메이저 영화 그랑프리에서 두 차례나 감독상을 받게 된 게기의 작품들이 흥행면에서 어떤 성적을 보였는지를 한번쯤은 깊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강가에 흐르는 도랑도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 양 갈래에 흐르는 물의 양이 다르기 마련인데, 어째서 세 갈래로 가는 물길이 같기를 바라는가? 욕심을 부리지 마라, 자신이 만든 만큼 씨를 거두게 되는 것은 아무리 이 세상이 타락하고 변했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불변의 진리다.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시하고 배척당한다고 탓하지 말고, 그 이전에 오세암에 모여든 10만 관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다. 관객 하나 하나는 당신들에게 있어 흥행성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단지 숫자로 표현되는 입장관객수에 일회일비하지 말고, 그들에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렇다면 당신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고 울분을 토했던, ‘한국 애니라서 무시당하고 상영관이 제대로 없었다는 실패의 변’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치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 온 사람들, 그들에게는 자신만이 표현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이 분명 한 가지씩은 있다. 사실 대부분은 그것을 자신이 애니메이터라는 직함을 가진 직후부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그것이 작게는 같은 팀, 후원사의 사장님, 넓게는 세계적 그랑프리의 심사위원, 나아가서는 많은 수의 애니메이션 관객들에게 그것을 보이고, 그 속뜻을 함께 나누고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서 작품 활동에 임한다. 애니메이션도 결국 사람이 만든 작품을 사람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자신과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0%가 아니듯이 어느 누군가는 당신의 생각을 표현한 그 작품에 만족하고 당신에게 지지를 보낼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너무 성급하게 삼키지 말고,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가 자신이 가진 생각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것 그 이외에는 없다면 진심으로 그 이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제작에 전력을 쏟아라, 유명한 1인 독립 애니메이터 신카이 마코토가 그랬듯 만들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도와준다면 그걸 배워서라도 혼자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정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굳이 타국 작품들과의 차별성만을 강조하여 적대시하고 어렵게 갈 필요는 없다. 산을 오르는데 누군가가 먼저 간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버리고 새로 어려운 길을 닦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일본 애니메이션도 처음에는 디즈니를 의식하기에 바빴고, 스퀘어의 파이날 판타지도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조금씩 우리만의 색깔을 보여주면 된다. 굳이 우리만의 색깔을 가득 집어넣고, 일본색, 미국색을 피하기에 급급하지 말자. 관객들은 아무리 일본, 미국과 똑같은 동화, 똑같은 타이틀을 걸어 놓아도 같은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르는 걸 구분해내듯이 충분히 구별할 수 있으며 , 지금 당장 우리만의 작품을 위해서 머리싸매고 고민해도 지금 당장은 답이 나올 턱이 없고, 사실상 그 답이 나온다 해도 관객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경쓰지 말고 손이 가는대로 범작이 나오든, 평작이 나오든 줄기차게 한번 만들어보자. 한국영화가 성공가도 이어가는 중에 전부 볼만한 대작들만 가득한 게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평작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범작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문화다. 그 속에서 조금씩 사람들에게 한국 애니만의 참맛을 알려주면 어떨까? 맛있는 달고나를 더욱 달게 만들어주는 건 쓰디쓴 소다라는 것을 말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9. 15. 00:27
"만화주제가라 부르면 촌스럽다 하고 애니메이션 오프닝이라 부르면 감탄하더라."
신해철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얼마 전에 했던 이야기다. 저 말이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음악성이 아닌, 단순히 불리우는 정도에 따라서 가치판단이 달라져야만 하는 국내 애니음악계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창희.
여행스케치 1기 맴버, 투니버스 입사 후 우연한 게기로 인해 애니음악을 맡게 된 이후,
지금까지 이쪽 음악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곡가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는 영혼기병 라젠카의 음악을 맡았던 ‘신해철’의 경우처럼 단순히 기존 가요 장르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사람들은 ‘음악은 좋은데, 이건 애니음악 같지 않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처럼 애니음악아라는 것은 현 대중음악에서 쉽게 활용되고 있는 대분류 장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의 음악적 색깔과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전문 작곡가가 필요한 부분이며, 실질적으로 이 부분에서 두각을 보인 작곡가가 바로 이창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초창기 음악도 사실 ‘애니음악’이라 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음악들이 많았고, 본인 특유의 음악성을 살리기 보다는, 원곡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언뜻 들으면 살짝 리믹스 해놓은 정도에 그치는 수준의 곡들이 많았지만, 점차 이창희 본인이 애니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하고, 애니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음악적 색깔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특별히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없었던 애니음악 분야이기에, 애니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애니음악을 완성시키는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나디아 여는 노래’, ‘카우보이 비밥 마무리 노래’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지금까지 원곡을 번안하던 수준에 그쳤던 투니버스 애니음악에 대해서 시청자들의 반응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박완규’가 불러주었던 ‘카우보이 비밥 마무리 노래’는 이후 박완규가 따로 음반에 수록하면서, 애니 음악이 완성도가 충분히 향상되고 있음을 대중에게 알리는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미소의 세상’, ‘정글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마무리 노래’ 등 보다 애니음악이라는 미묘한 장르에 잘 부합되는 색깔의 곡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 팬들의 높은 지지 속에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음악 음반 'WE' 프로젝트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지금에 이른다.

이제는 ‘만화인의 노래’라는 공식적인 시상 행사까지 가지게 될 정도로 하나의 독창적인 분야로 인정받게 된 애니음악 분야, 이제는 보다 음악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곡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팬들을 즐겁게 한다. 또한 이창희씨 이외에도 애니음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하는 유망한 신인 작곡가들이 많아진다는 사실 역시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국내 애니메이션’이 시장점유율이 낮고, 이제는 나오지도 않는데, 왜 애니음악계를 성장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인과 의견충돌이 있었던 적이 있다. 항상 ‘케이크를 먹을 일이 없기 때문에 생크림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생크림을 사 두면 언젠가 케이크를 만들 일이 있을 때 쓸 수 있다’라는 인식이 비단 애니음악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필히 요구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얼터너티브 음악이 당장 국민 정서에 안맞기 때문에 출시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 보다는 ‘얼터너티브 음악을 하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이 늘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라틴어로 ‘농사짓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항상 씨를 뿌려두지 않으면 원하는 작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중에게 외면 받을 분야에 대한 시각을 다르게 보자. 그 속에 그들만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화 코드가 있을 것이고, 그 문화 코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언제 늘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농사가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는 아무도 모르듯이 말이다.

- Rush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