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2. 8. 4. 13:02

 

 

가끔 빌보드는 이상한 일을 저지른다. 그만큼 순위변동이 심하고 신곡에 대한 열망이 너무 지나치다 보니 생긴 기현상인데. 다름아닌 '제 3세계'음악의 갑작스러운 약진이다. 이들 음악은 정말 어떤 음악 전문가도 예측한적이 없고, 전문적인 프로듀스를 거치지도 않았는데, 어떤 계기 (유명 아티스트가 트위터에 올렸다던지, 어떤 영화 음악으로 쓰였다던지) 가 있고 그 음악이 사람들에 귀에 박혀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면 그 곡은 바로 뜨게 된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셨을줄 알겠지만, 이렇게 뜬 음악은 거의 대부분 '후크송'이다..

 

우리나라는 후크송에 대해서 그 파급력은 인지하면서도 그 가치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후크송이 우리나라를 들었다 놨다 국민음악이 된 적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아직 이 후크송에 대해 지갑을 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빌보드는 좀 다르다. 음원 가격이 좀 싼 편이기도 했지만 후크송 역시 하나의 음악으로 싸든 비싸든 일단 그 한 마디의 반복성이 주는 음악적 가치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빌보드의 이같은 주기적인 사춘기는 그래서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이와 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 수순이 아직 '역대급'까지는 다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빌보드 뿐만 아니라 각국 챠트에서 고르게 눈에 띄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빌보드의 파급력은 단지 미국 국내시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팝이 거의 시망하다시피한 우리나라에서도 아마 지금부터 예시로 드는 곡들은 적어도 한번씩은 들어봤으리라 생각된다.

 

 

1. We No Speak Americano

 

 이 곡의 빌보드 차트 기록 

 

2. Macarena - Los del Rio

 

빌보드 챠트 기록은 굳이 볼 필요가 없다.

 

3. Alice DJ - Better Off Alone

 

폴란드랑 영국, 빌보드는 가볍게 씹어먹었던 곡

 

...

 

위 곡을 다 들어보았다면 이제 강남스타일 뮤비 다시 한번 보자

뱀발 : 뮤직비디오를 잘 보면 알겠지만 말타는 춤을 표현하기 위해 말 사육장을 간 것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장소가 '한국'에서만 갈 수 있는 장소들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풍경 (관광버스, 한국 지하철, 강변의 손뼉치며 걷는 파워킹 아줌마, 한강 오리보트, 강변 오리보트, 대중사우나와 문신남들, 대중탕) 들이 주를 이룬다. 전략적인 기획에서 나온 무언가는 아니었겠지만 외국인들이 박장대소를 치며 웃는 이면에는 단지 관광와서는 절대 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 (대중탕이나 관광버스 문화) 가 흥미롭고 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것이다. 게다가 싸이에다 노홍철, 먹어주는 미모의 현아까지 갖출건 다갖춘 셈

 

...

 

이들 곡들의 공통점은 곡 자체의 흡입력도 있지만 바로 뮤비가 주는 흡입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엠넷이 아이돌들 철봉오래매달리기 프로그램 채널이 되어버린지 오래지만 아직도 해외에서는 MTV에서 주구장창 뮤비만 틀어주고, 그 뮤비를 보고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이들 곡은 곡으로 귀를 사로잡고 받아든 눈길을 다시금 뮤비로 사로잡아 확실한 광고효과를 거두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물론 마카레나는 아무 전략없는 촌스러움이 역으로 먹힌 사례지만)

 

강남스타일은 이들 곡들보다 출발이 훨씬 더 순조롭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싸이가 가지고 있었던 음악 색깔에 화룡점정을 찍은 유건형의 편곡이 주는 신선함이 해외에서 먹히는 결정적 한방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후크송으로 나무랄데없는 곡이고, 반응도 좋다. 무엇보다 곡으로 귀를 사로잡고 뮤직비디오로 눈을 묶어두는 MTV식 전략이 비록 유튜브라는 다른 채널이지만 구사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로비게이의 어시.jpg

 

다만 지금의 상황을 너무 낙관할 필요는 없다. 마카레나의 대성공은 싱글을 내자마자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을 일으킨걸로 보이지만 사실 이 곡은 나온지 무려 1년만에 빌보드에 진입했다 물론 지금은 유튜브랑 아이튠즈의 시대라서 이보다 훨씬 적은 시간에 폭발할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포텐셜의 극한을 끌어내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리고 이 곡은 '곡'이 히트를 치고 '뮤비'가 화제가 된 곡이지 '싸이'라는 가수가 인지도를 얻고 있는 상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YG도 싸이도 이를 모를리 없고, 섣부른 낙관을 할리는 없다. 다만 지금 올림픽이 끝나고 난 다음 단물빠진 SM떡밥을 대체할 문체부에 귀에 들어가버리는 것이 우려스러울 뿐이다.

 

 

정부가 아무 짓거리것도 안해야 지금처럼 중간이라도 갈 텐데

posted by RushAm 2012. 8. 2. 10:22


급여, 흔히 월급이라고 하죠. 이 급여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혹시 제대로 알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급여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죠.

 

급여給與

1 .
돈이나 물품 따위를 줌. 또는 그 돈이나 물품.

2 .
[북한어] 동물에게 사료를 줌.

 

뜻 자체로 급여는 그냥 돈이나 물품 따위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댓가성에 대한 내용이 없죠. 뭐 다른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월급, 주급, 시급에 들어가는 給자는 공급하다는 의미로 어이없지만 대단히 공산주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번 뜻이 더 현실적이군요. 이 단어대로라면 우리는 북한의 배급에 의존하는 국민들처럼 회사의 급여가 아니면 '생존 자체가 안되는' 가축같은 의미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반면 영어의 경우는 어떨까요? 영어로 급여는 'pay'라고 합니다. 친숙하죠? 영어권 국가에서 물건을 살때도 이 단어를 분명 써본 경험이 있을겁니다. 이쪽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이들에게 월급은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받은 '대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급여에 비교하면 엄청난 의미적 차이가 아닐 수 없네요.

 

...

 

우리 사회에서 백수 즉 무직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습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자'라는 것은 '소비만을 하는 자', '생산하지 않는 자'라는 의미를 넘어 '밥버러지', '시간을 낭비하는 자 (잉여)'라고까지 불리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이 생산하지 않는 자, 시간을 낭비하는 자를 잉여라 부르며 괄시하고 심지어 사회 암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여러분들은 과연 무엇을 얻고 계십니까? 오늘 특별기획 취업 시간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자들과 그 사회분위기로 인해서 이득을 얻는, 또한 손해를 입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원론적으로 돌려보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 이며 '경제활동을 하는 시간'은 매우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깔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같은 인식 속에서 시간을 경제활동에 쏟지 않는 사람이나 조금 덜 쓰는 사람을 깔보거나 조롱하며 자신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경제시간과 환산하는 식으로 우월감을 표출하곤 하죠. 아마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가 유지되는 이유에는 이 우월감을 누리기 위한 방편적 기준이라는 점도 내면에 깔려있을지 모릅니다.

 

http://quadue.wordpress.com/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가 계속되는 것을 원하고 또한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쪽은 과연 어디일까요? 모든 논리는 이득을 보는 쪽과 그 이득을 보는 쪽을 위해 희생하는자, 그리고 손해를 보는 자로 나뉘어집니다. 여기에서 이득을 보는 쪽을 위해 희생하는 쪽은 '백수'가 되겠고요. 그리고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쪽이 바로 경제생활자가 됩니다. 물론 이득을 보는 쪽은 회사가 되겠죠. 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결과적으로 회사에 이득을 가져다주는걸까요? 그건 바로 '근로자의 시간에 대한 가치 절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경제활동에 쓰는 시간은 비싼 시간이고, 경제활동에 쓰이지 않는 시간은 싼 시간이다라는 논리는 결국 비싼 시간에 대한 급격한 수요를 야기합니다. 비싼 시간을 원하는 사람이 많고 그 비싼 시간을 주는 사람 (기업)이 적으면 자연스럽게 물가가 올라가게 되죠. 그러면 이 시간을 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더 낮은 가격에 많은 시간을 주는 사람에게 팔고 싶어할것이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더 낮은 가격을 부를 것입니다.

 

여기에 기업들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있지 않은 시간을 더 끼워주지 않으면 원래 사려고 했던 시간도 사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게 되는것이죠. 여기에서 당신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고민의 주체는 당신이 가치없는 시간을 가치있는 시간으로 바꾸는 대신 얻을 수 있는 것, 바로 '사회적 우월감'이고 또 하나는 당신이 원래 팔려고 했던 하루 8시간 정도의 시간을 팔 수 없게 되었을 경우 그 '사회적 우월감'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이같은 거래가 계속될 경우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사회적 통념상 가치있는 시간으로 보내지 않으면 돈이 술술 나가는 듯한 불안감에 몸을 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시간을 판 댓가를 받은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우월감에 대한 중독성도 더욱 심각해지게 되겠죠.

 

이 기회를 시간을 사는 자는 놓치지 않습니다. 더 낮은 가격에 더 많은 시간을 사려는 것은 물론, 당신의 시간 말고도 살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며 당신과의 거래를 얼마든지 끝낼 권리가 있다는 점을 어필하며 당신을 압박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 사회적 우월감이 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데에 더 많은 시간을 더 저렴한 가격에 그들에게 넘기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됩니다.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주는데에도 당신은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시간을 아주 조금이나마 가치있게 쓰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우왕 이제 키스도 할수 있네, 어썸!!

 

 

...

 

이런 과정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 야근과 연장근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비근로시간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아무 의미 없거나 지나치게 낮은 가치를 매기는 것으로 옭아맵니다. 기업은 이러한 분위기를 환영하는 것은 물론 도의적으로 조장하기에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는 편이 훨씬 기업에게 이득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야근과 연장근무, 그리고 그 연장근무로 인한 댓가가 형편없이 낮은 것에 분노하고 불합리함에 분통을 터뜨리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그 책임은 모두 회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회사에 주는 시간'이외의 시간에 대한 가치를 너무나도 떨어뜨렸음은 물론 그 시간을 회사에게 너무 싼 값이 주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참극입니다. 회사입장에서는 특별히 도덕성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당신들이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해 하등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의무도 법규정도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우리를 먹어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도 회사를 먹여살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요. 그러기에 회사가 우리에게 돈을 주는 고마운 단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사와 우리는 거래를 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회사에게 그들이 필요한 시간과 그 시간 안에 해낼 수 있는 업무 능력을 보여주는 댓가를 정당하게 받는 거래 관계입니다. 혹 그들이 더 많은 시간과 능력을 정당한 댓가 없이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응당 거부해야 하며 거부까지 갈 수 없다고 해도 응당 이게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불합리한것인지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하지 않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자'에 대한 가치절하를 중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퇴근 후'에는 누구나 백수가 됩니다. 그 백수가 되기 싫어서 회사에 남는 시간을 '기부'까지 해가며 억지로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회 구성원이야'라며 자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어필하며 '우월감'을 느낄 가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응당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호구'라는 단어처럼 당신은 회사에게 호구처럼 당신의 시간을, 인생을, 능력을, 존재 가치를 덤핑세일로 빼앗긴것과 다름없으며 그걸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하는것도 모자라 바보처럼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회사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의 하는 작태는 비단 우리가 연장근무에 관대한 사회분위기를 자초했다고 하더라 할 지언정 너무나도 치졸하고 비겁합니다.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자신들의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는 것은 이윤창출로는 완벽할지도 모르지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처음부터 거부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최악입니다. 굳이 윤리까지 들먹일 필요조차도 없을것입니다.

 

 

연장근무와 야근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없습니다. 근로계약상에 추가근무에 대한 조항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기업은 그래서 야근과 연장근무를 거리낌없이 시킵니다. 그리고 그 야근과 연장근무에 투입되는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미친 나치시대 파치즘적인 이념같은 병신논리를 설파합니다. 그리고 이 논리에 의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야근과 연장근무에 대한 정당한 수당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있습니다.

 

 

야근과 연장근무에 대한 지불은 법적으로 반드시 지불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처음부터 야근수당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기업에 던지는 추가근무시간에 대한 가치를 최대한 떨어뜨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이없게도 추가 근무 수당으로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아이구 우리 잉여시간 남아서 드린 것 뿐인데 돈까지 주시다니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라며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업은 당신의 시간을 더 싼 값에 사고 싶어하는 거지근성들로 가득한 놈들일 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에 맞서 절대 우리의 시간을 덤핑으로 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 '일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시간이 싸다고 생각하는데 기업이 우리 시간을 비싸게 사줄 리가 없을테니까요.

 

 

당신의 시간은 기업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잊지 마세요

 

 

특별기획 취업 - 누가 워커홀릭을 만드는가 : 야근 편을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2. 8. 1. 13:50

사카이 노리코라는 일본 아이돌 가수가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아이유급 가수인데, 근 10년간 솔로 아이돌의 한 축을 먹어주며 국민적인 인지도를 갖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아이돌을 은퇴한지 한참 지난 시기에 갑자기 '마약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그런데 체포되기 전, 즉 혐의가 확정되기 전까지 그녀에 대해 동정론을 보이던 언론과 여론은 경찰에 잡혀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비춰지자마자 태도가 180도 뒤바뀐다. 그녀가 예전 마약근절운동 홍보대사였던 점부터 뜬금없는 섹스비디오 파문 등 별 시시콜콜한 잘못들까지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마약관리법 위반은 사형이 구형되지 않지만 이미 그녀는 사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것과 다름없는 처지에 놓인것이다.

 

그런데 사카이 노리코의 이같은 급격한 몰락은 이미 예견되어있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비단 그녀 뿐만 아니라 언론들은 연예인 혹은 사회 주요층 인사들에 대한 블랙 소스들을 늘 수집하고 확보해두고 있으며 사카이 노리코의 캐릭터 스타일은 국민적 아이돌이라는 이면 속에 여성팬들의 안티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사카이 노리코는 폭발직전의 이 상황을 성실한 이미지로 근근히 극복해오며 자리를 지켰을 뿐, 안티를 극복해내지 못했기에 결국 단 한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티아라는 그룹 구성원 전원이 여성에 회사 소속 연예인들도 절대다수가 여성이었다. 초창기맴버에서 몇 번의 맴버교체 및 추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동등한 위치가 아닌 그룹 내 선후배 서열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생겼고, 그걸 이끌거나 중재할 구심점을 해줄 리더가 없거나, 있더라도 이런 사태를 초래할 만큼 역량부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만의 여성사회 속에서 그들만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집단따돌림 (정신적 폭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여성 음악팬들을 중심으로 조만간 그룹 전체가 가요계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 설은 왠만한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보다 훨씬 더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퍼지는 속도는 가히 연습생 포르노비디오 떡밥 못지 않은 수준인데, 이해하기 힘든 건 이 사건에 대한 관심도와 미디어의 기사 양산 갯수가 정도 이상으로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티아라라는 그룹이 상당한 수의 여성 안티팬을 보유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집중되고 그 여파가 좀처럼 사그러들줄 모르는 가운데, 몇몇 사람들과 미디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혀 주목할 가치가 없는 이 사건을 양산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다양한 억측과 개운치못한 뒷맛을 남길 사건이 될 전망이다. 남성 안티가 넘쳐나는 투애니원은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데, 남성팬이 적지 않은 티아라가 스캔들 한방에 나가떨어졌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걸그룹 = 삼촌팬'이라는 공식을 단번에 뒤집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유가 대세가 된 데에는 삼촌팬의 열렬한 지지도 있었지만 여성팬들이 그녀를 '이쁜척 재수없다고'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효했다.

 

 

그런데 이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번 사건은 굳이 티아라만이 아니라 여성이 다수인 집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성사회만의 서열구조에서 나오는 흔한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단지 그걸 '까발려졌'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사회 속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여성 다수인 사무실이나 학교 등의 타의적으로 조직된 집단에서 벌어지는 여성들만의 서열 싸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것은 분명 범죄에 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범죄라고 인식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계층은 현저히 적으며 도리어 왕따의 피해자의 원인제공에 의한 자연적 사회 순기능이라는 논리를 들어 그 자체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모순되었고 논리적으로 맞든 맞지 않든 거울처럼 보여지는 티아라의 이번 사건에 여성팬들이 등을 돌리고 돌을 던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행동이 정당하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티아라는 장사 밑천을 지키느라 거래처를 잃어버린 셈이 되고 말았으니까, 티아라는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 표면적인 인기는 유지할지언정 이미 케파를 맞추거나 투자금을 회수할 수준의 히트를 치기 쉽지 않아보인다. 여성팬들은 딱히 이번 사건으로 인해 티아라를 갑자기 미워하게 된 게 아니라 꽤 오랫동안 잠재적으로 그녀들에게 쌓여있던 것이 이번일을 계기로 터져나온, 이른바 준비된 스캔들이라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다. 앞으로도 티아라는 꾸준히 여성팬들에 의해 '불매 운동'을 직면해야만 할 것이고, 장사 밑천인 남성팬들을 서서히 잃게 되는 수순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듯 싶다.

 

 

이 사건은 사건의 본질이나 그에 따른 여론 재판 수준에 있어 남성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구석이 많다. 즉 이 사건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에 의해 설득당하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아이돌업계 전체에 시사하는 바는 그다지 크지 않을것 같다. 누군가의 악행으로 저질러진 사건이건 그 악행이 범법에 해당할만큼 중죄이건 아니건 관계없다. 그냥 여자아이돌은 여성팬을 늘 신경써주지 않으면 언젠간 패망한다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수칙 하나가 반복되었을뿐이다. 각 기획사들은 여자들 세계에서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어떤 특단의 대책을 심리학 자문위원을 초빙해서라도 하나쯤은 마련해두는 것이 어떨까?

posted by RushAm 2012. 7. 29. 16:07

(내용 누설 조금도 없습니다. 안심하고 읽어주세요.)

 

...

 

공포영화는 주로 신인감독들이 메이저 등용문 격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파이더맨 같은 월메이드급 블록버스터 영화와 더불어 이른바 '극장의 어트럭션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장르 중 하나인데요. 영화계가 도의적으로 이 공포라는 장르를 신인들에게 '배정'해주듯 뿌리다보니 특별히 공포라는 장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온 거장이 나오기 쉽지 않은게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그 신인들이 진자 파라노말 액티비티정도의 아이디어를 갖고 나오는것도 아닌 것 같고 말이죠.

 

무엇보다 공포영화는 '저예산'이라는 공식을 아예 고착화시켰다는 점이 한국 공포영화계가 스스로 자생할수 있는 여지를 막아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여름하면 납량특집 공포영화를 찾는 고정 객층이 발생하고 있고 그 파이를 영화계에서 영화꿈나무 육성을 위한 짬짜미성격으로 활용하고 있다면 영화계가 사립단체 스스로의 영달을 위해 결국 문화계를 이용해먹고 있는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거든요. 신인만 가득하니 그들끼리의 경쟁이 수준이 높을수도 없고 또한 메이저에서 공포영화 장르에 정착한다한들 얼라들과의 경쟁이 작품성 향상에 그리 많은 도움을 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공포영화 장르가 지금까지 신인 등용문으로서 얼마나 순기능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을 만큼 근 10년여간 이쪽 장르로 데뷰한 감독들이 지금와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지 않거니와 대부분 그대로 공포영화 파이를 먹는데에 안주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은 이 업계가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웰메이드 호러무비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발표한 '무서운 이야기' (2012 수필름) 가 가지는 영화계의 지금과 앞으로의 역할은 매우 무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공포라는 장르가 영화가 아닌 일종의 극장어트럭션화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 어트럭션에 익숙해져있는 관객들과 그 속에서 약간의 작품성이라도 건지고픈 감독들 사이에 달린 무게추 중심이 얼마나 균형감있게 잡힐 수 있을지에 대한 거의 마지막 실험이었다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한국 공포영화 웰메이드급이라 칭하기에 하등 부족함이 없는 영화 '기담'을 만들어낸 정범식 감독이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영화가 가진 무게감과 의미는 결코 하찮을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기대를 충분히 상회합니다. 신인 감독들이 가져오는 기상천외한 소재의 파격성도 없고, 유명한 배우들이나 인기절정의 아이돌 가수도 나오지 않으며, 사람을 난도질하는 고어물에 훨씬 못미치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평범한 소재 속에서 5인의 감독들은 각자 전혀 다른 세계관의 공포를 녹여냅니다. 그리고 그 영화 4개가 따로 놀지 않도록 영화를 완성시켜주는 민규동 감독의 훌륭한 짜임새 역시 놓치기 힘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죠.

 


각 에피소드 30분이라는 제한은 언뜻 쉬워보일수 있습니다. 1시간 30분동안 지루할 쓸데없는 스토리 다 쳐내고 사람들 소리지를 것들만 꽉꽉 채우면 깔끔하거든요. 롤러코스터로 치면 출발하자마자 계속 떨어지고 올라가고 휘고 한바퀴돌고 하는걸 끝까지 쉬지않고 반복하는것과 똑같습니다. 다 쏟아붓는거죠. 확실히 그러면 좀 있어보입니다. 밀도도 높고 만족도도 크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30분으로 축약하기에 심히 어려운 소재들을 훌륭하게 30분으로 마무리지으면서도 어트럭션처럼 사람을 놀래키는 연출을 극도로 아낍니다. 마치 자신들의 영화가 롤러코스터 취급받는 것을 꺼려하는 듯이 말이죠.

 

 

롤러코스터를 무서워하는 것과 공포영화를 무서워하는 감정은 모두 공포로 치완되지만 극단적으로 다릅니다. 롤러코스터는 타기 전에는 매우 긴장되고 공포스러우며 타는 도중에도 공포에 몸부림치다가도 결국 내린 뒤에는 공포는 간데없고 상쾌함만이 남지만 공포영화는 가슴에 뻐근한 왠지모를 찝찝함이 남게되기 마련이죠. 지금까지의 공포영화들은 너무 '납량특집'이라는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영화를 보며 맘껏 소리를 지르게 해주거나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역할만에 충실하도록 올라갔다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각본, 그리고 뒤끝이 남지 않는 부실한 전개와 결말을 살리지 못하는 연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매년 수많은 공포영화를 보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는 손에 꼽게 되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는 공포영화입니다. 그리고 공포영화로서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작품입니다. 무서운 이야기라는 작품 자체가 아닌 무서운이야기 작품 속 어떤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기억될 가치도 충분할 것입니다. 이 작품에 참여한 5인의 감독들을 기억해두신다면 앞으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단지 한 시즌만을 소화할 바캉스 상품이 아닌 언제든 두고 볼 수 있는 영화로서의 가치를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증받으실 수 있습니다.

 

공포영화는 그 자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훌륭한 영화 장르임에 다르지 않습니다. 신인감독들의 등용문으로 활용될만큼 가치가 없지도 않고 함부로 그딴곳에 쓸 수 있도록 허락되지도 않았습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만든 5인의 감독들은 그들의 작품 '무서운 이야기'를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낼 권리와 사명을 가졌음을 관객들에게 어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관객으로서 제대로 된 공포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에 대해 그들과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그들과

앞으로 더 많은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줄 그들의 계속되는 도전에 찬사를 보냅니다.

 

posted by RushAm 2012. 7. 19. 17:10

이 글은 대한민국에서 정규교육을 이수받고 있거나 혹은 이수받은 이후 이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인 민주주의의 시민 권리와 국가 혹은 유관기관 및 기업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고 자신이 왜 지금 이것을 하고 있어야 하며 이걸 하면 정말 제대로 앞길이 트이는지에 대해서 매우 불안해하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 쓰여질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회를 살아가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알고 계실만한 내용이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거나 흥미로운 내용이 되지는 않을 것 같으므로 '뭐야 이거! 다 아는 내용이잖아!'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기쁜 마음으로 구독을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가급적 어떤 정치적 성향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혹여 이 글이 정치적인 지적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제 글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치판 자체가 정상적인 꼬락서니가 아니기 때문이기에 느껴지는 착시이므로 너무 우려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본 상담 중 질문 내용은 실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글 형식에 따라 만들어진 픽션입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

저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내년이면 수능 세대가 되는데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학원에 가서 늦은 밤까지 공부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뭘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공부는 학원에서 더 먼저 배우고 학교에서는 잠만 잡니다. 솔직히 학교 안 다니면 안된다고들 하는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공부에도 별로 취미가 없지만 그냥 대학 못가면 안된다고 하길래 학원에서라도 열심히 공부하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다른 특기라도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것도 없고 그냥 공부해서 대학이나 잘 가야할것 같은데, 솔직히 고등학교도 그렇고 대학도 그렇고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왜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

저도 그랬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늘 생각했어요. 한번쯤은 다들 생각했을 거에요. '학교는 왜 다니는 걸까', '학교에서 다니는 지식이 과연 도움이 될까?', '정말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인생 나락으로 떨어지고 사람구실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

 

사실 학생이나 우리의 고민을 더 깊어지게 만든 건 이같은 질문들에 대한 어른들의 이중적인 태도에요. '학교에서 배운 지식 하나도 쓸모없어'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그래도 학교는 나와야해, 뒷구멍으로라도 나와야해' 라는 모순된 답변을 우린 수도 없이 들어왔고, 이에 최면이라도 걸린듯 어떤 이에게는 정말 지옥같고 어떤 이에게는 이보다 시간낭비일수가 없지만 어떤 이에게는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될수도 있는 학교라는 곳을 다니거나 졸업해왔어요.

 

 

 

물론 저도도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답을 시원스럽게 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앞서 예를 든 어른들과는 조금 이유가 달라요. 학교라는 곳은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고 필요없는 사람에게는 1분 1초가 지옥일뿐인 곳이거든요. 필자가 어떤 생각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학교를 다니거나 다니지 말라는 식으로 말해버린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악충수를 두거나 필요없는 사람을 지옥에 옭아맬수도 있어요. 한마디로 상투적이며 책임회피적인 이야기로 들려 미안하지만 결국 그 판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의 학교, 그리고 그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정부와 그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를 공유하며 자라난 이 사회 어느 누구도 학교에서 지금 자라나고 있는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생각과 고민의 기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있어요. 관심? 그거 대단할거 없지 않나요?. 학교가 뭔지,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인지를 경험론이 아닌 원론으로 설명해주고 스스로 판단하게끔 유도하는 게 전부에요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고요., 그런데 아직 이 세상에서 그런 노력의 흔적을 발견한 적이 없죠? 어느 누군가는 혹시 있는데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는다고 학생을 질책할지도 몰라요. 다만 그정도로 노력을 해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 맞을까요?

 

중퇴해서 후회한다는 기사는 많지만 중퇴해서 이렇게 성공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는데...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학생에게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스스로 해답을 찾고 결정하는 데에 있어 단 한발자욱만 내딛어도 될 때까지 문 앞으로 이끌어줄 좌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볼까 해요. 학생이 가진 의문의 본질과 이 사회가 잘 가르쳐주지 않는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학생들에게 지금 소속되어 있는 작은 사회 학교는 물론 그 학교를 축으로 결성된 공동체 사회에 대해 그들 스스로 판단하여 비판받을 수 있도록 있는대로 재료를 다 쏟아주고 싶어요. 그 첫 시간으로 지금 다니고 있는 혹은 다녔었던 학교는 대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해요.

 

우선 학교를 왜 다닐까에 앞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지금 학생이 학교를 다니는 것을 과연 누가 원하고 있을까에요. 학부모님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겠죠? 아무튼 학생이 학교에 다녔으면 하고 바래요. 그런데 그 분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학생이 학교를 어쨌든 졸업이라도 하고 어쨌든 입학이라도 시키려는 걸까요?

 

이 사회는 뭐 대단해보이지만 사실 그 조직의 건실함은 좀 많이 떨어져요. 왜냐하면 정말 단기간에 경제 발전을 급속도로 이륙한 나라가 내부를 건실하게 다져놓을 여유가 있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거거든요. 당연히 건실하지 못하면 어떨까요? 그래요 대충 하겠죠. 이 사회 엄청 대단해보이지만 진짜 대충 얽혀있어요.

 

 

당시 신분증인 도민증, 일단 한글도 없고...

 

 

이 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서 진짜 아무것도 없었을때 나라에서 제일 필요한 인력은 뭐였을까요? 물론 건설노동자도 필요했지만 그보다 필요한 건 이 나라의 기본적인 행정 체계를 갖출 수 있는 인력이 정말 많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자릴 원했고요. 문제는 이런 일자리는 지금이야 서류 쓰고 도장 찍고 하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허다했다는거에요.

 

이런 인력이 충분히 공급되려면 일단 학교가 많이 있어야했고 그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시켜야겠죠? 그런데 당시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10살 전후부터 든든한 인력이 되는 인재를 학교에 잘 보내려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교는 당시 국민들에게 '아이를 맡는다'는 개념으로 학교의 개념을 바꿔요. 즉 초창기 학교는 배움의 장이라기보다 양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죠. 아무튼 애들 밥이라도 먹이고 시간이라도 때워주니까 일단 학교 보내는 국민들이 적잖이 늘게 되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 어려운 시기에 왜 그리도 학교를 열심히 세우고 운영했을까요?

 

분단국가였고 휴전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정부가 직접 학교를 장악해서 어느 정도 북한과 대립되는 그리고 현 정부에 대한 홍보와 사상을 주입시킬 필요성이 있었던거죠. 그래서 당시 학교에서는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토씨 한 글자까지 빼놓지 않고 외우게 했던거에요. 학교가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를 잘 볼 수 있는 사례인거죠. 외우지 못하면 구타나 체벌이 그렇게 극심했다고 하네요. 대체 애국가와 국민교육헌장이 교육적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어요.

 

교련 수업도 같은 맥락...

 

 

어쨌든 이렇게 학교를 나오게 되면 싫든좋은 한글이랑 계산 정도는 깨치게 되요. 중학교 고등학교 정도 나오게 되면 적어도 공무원정도는 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갖추게 되죠. 믿기 어렵겠지만 예전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공무원 할 수 있었어요. 물론 지식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이른바 사상적인 것까지 모두 검증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근데 사회 체계가 제대로 안 잡혀서 그 체계 잡기 위해 뽑는 인력 선발에 그 기준이 뭐가 있겠어요? 에초에 뽑는 사람이 뽑히는 사람보다 학력이 더 낮은 경우도 허다했어요. 당연히 선발시험따윈 꿈도 못꾸죠 (누가 출제하겠어요) 그래서 그때는 그냥 어디 학교 나왔다고 하면 일단 어느 정도 배운 놈이라고 인정해주고 그 학력에 맞는 일자리를 주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만든 사회 체계가 튼실할리가 있나요? 당연히 엉망진창이고 몇 번의 치명적인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 그나마 좀 봐줄만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엉망진창이에요.

 

그러니까 학교는 우리가 필요로 해서 다니는 게 아니라 에초부터 정부가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키워내서 자기들이 써먹기 위해 세운 기관이에요. 30년 전만해도 전국 주산대회 열리고 모든 학교에서 주판을 가르쳤어요. 산업혁명이라는 70년대에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인문계를 누르고 명문가도를 달렸던 때가 있었어요. 모두 그 당시 정부의 경제 정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바뀌었어요, 적어도 국공립 학교라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고 보면 될거에요. 대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요즘 말하는 갑을 관계에서 학교가 갑이고 학생이 을이 아니라는거에요. 당연하겠지만 선생님들이 여러분들을 학교에 옭아매는 이유도 물론 여러분들을 매우 사랑하고 미래가 걱정되어서도 있겠지만 더 대의적인 부분에서 실 끝을 찾아가면 인사고과가 나오고 그 인사고과의 목적에는 당연히 국가정책상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서 이 사회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소비하고 또 생산하는 일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깔려있는거에요. 이 육성 계획에서 여러분이 이탈하면 선생님들은 정부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죠. 선생님들도 정부한테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거에요.

 

원하는 쪽이 을이 될 수 밖에 없으니 학교에 가기 싫은 학생이 학교에 다니길 원하는 학교와 그 위의 정부가 을이 되고 학생이 갑이 되긴 했는데, 왜 학교를 억지로 다니는 상황이 되었는지 이상하죠? 학교는 나오라고 하면서 대학교까지 나온 형 누나들이 실업자로 PC방에서 총질하는 모습 보면 뭔가 위화감도 느껴지고 그렇잖아요,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요?

 

 

그건 이 나라가 70년대 후반까지는 정부 주도로 5개년 경제 개발 정책 (사회교과서에서 배웠죠?) 같은 것들을 펼치면서 스스로 일자리나 산업의 흐름을 결정하고 기업들이 따라가는 식으로 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최신 경제 트랜드를 읽고 어떤 인력이 어떻게 공급되어야 하는지를 정부가 가장 먼저 꿰고 그걸 조절할 능력이 충만했어요. 그래서 계획에 맞춰 학교도 세우고 인력이 나오면 그만큼의 일자리가 이미 준비가 되는 선순환형태가 되었던거에요. 그러니까 그때는 진짜 학교만 가면 정부나 기업이 다 알아서 일자리 만들어놓고 기다리는 판국이었던거죠. 인력이 귀했고, 그래서 대학만 가도 월급이 엄청 높은 일자리 만들어놓고 모셔갈 지경이니 소 팔아서 서울대 보내도 투자금 손쉽게 회수 가능했던거에요.

 

그런데 80년대부터 근 30년동안 제대로 된 정부 주도 경제정책보다는 대기업이 스스로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바뀌게되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때 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을 세우기보다는 29만원을 벌기에 더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 같거든요.  암튼 정부가 대기업에 경제개발 주체를 넘겨주면서 대기업들은 정말 막강한 주도권을 갖고 급격히 이 나라에서 세력을 키워나가요. 그런데 그 키워나가는 주체가 국민들을 키워내야하는 의무가 있는 정부가 아니라 그런 의무가 있을 턱이 없는 기업이 되면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져요.

 

인력은 부족하다는데, 채용은 안되던 시절...

 

정부는 더 이상 학교에서 사회에 맞는 인력을 급하게 키워낼 필요성도 없어졌고, 학교는 실이 끊어지니까 이도저도 아니게 되기 시작해요. 더구나 정치가 몇 번의 ㅄ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동안 기업은 신나게 돈을 벌어들이며 이 나라에 주도권을 잡아나갔고 경제 트랜드를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죠. 그 ㅄ같은 약 7년간의 시간동안 정부는 이 나라의 경제 트랜드에서 몇 년이나 뒤쳐지게 되요.

 

그러다보니 이 갭만큼 학교도 뒤쳐질수밖에 없죠. 기업은 컴퓨터할수 있는 인재를 원하는데 학교는 학생들이 아직 주판이나 튕기고 있었어요. 기업들은 당연히 이런 인재를 뽑지 않죠. 뽑을 의무도 없고요. 그런데 사실 컴퓨터를 하고 하지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이 경제의 주도권을 도덕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집단이 쥐게 되니까 이 권력을 남용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는지, 경제와 일자리에 대한 선순환개념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놔요. 필요한 인력을 뽑는게 아니라 뽑고 싶은 인재가 필요했던거죠.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기술을 배워서 직업을 갖기보다 고학력으로 고임금을 받는 화이트칼라가 되기 위해 인문계를 택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고, 회사들도 이렇다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전공이야 어떻든 고학력자를 많이 뽑는 식으로 바뀌어나가게 되요.

 

앞서 서두에 사회 조직이 진짜 대충 얽혀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게 왜그러냐면 바로 이 기업, 더 엄밀히 말해 그 안에 있는 기업 조직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되다보니 필요한 능력에 맞는 사람을 뽑기보다 '사적인 이익'에 필요한 인재를 추구하려는 성향이 생겨버린거에요. 같은 고향이나 같은 학교 출신을 더 우대하는 풍토가 생겼죠. 그런데 이게 같은 학교 나왔다고 하면 그 학교별로 사내에 파벌이 생기게 되고 당연히 어떤 능력제로 뽑은 인력들이 아니다보니 능력들이라곤 다들 고만고만해서 어느 파벌이 더 나은지에 대해서 승부가 잘 나지 않았어요.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결국 고등학교때 짱먹던 놈이 동창회에서도 으스대듯, 회사 내에서도 좀 먹어주는 명문학교 출신들이 더 어깨를 펴고 다니게 되요. 사람이라는게 공평함 속에서도 서열을 정하기 마련이거든요. (명문학교 나오면 배우는게 아주 쬐끔 낫긴 하지만) 이렇게 학벌이라는게 생기게 되요.

 

 

그리고 학교들은 점차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보다 그 대기업의 주력 파벌에 소속되기 위한 프리패스 발급, (졸업장)을 따기 위한 에스컬레이션의 역할을 하게 되는거죠. 당연히 학교가 뭘 가르칠 생각을 할 리가 없고, 학생도 뭘 배우려고 하기보다 턱걸이로라도 학교에 들어가고 졸업장을 따내서 편하게 취업하려는 생각만 하게 되요. 또 그게 됐다는것도 문제였고요.

 

정부는 경제에 관심이 없고, 기업은 정부에게 어떻게든 더 권리 따내려고 돈먹이고 있고 정치는 좋다고 그 돈 받고 정사에는 똥싸놓고, 기업 내에서는 생산직에는 인력부족에 서류에 도장찍는 일만 하는 화이트칼라만 잔뜩하고 능력있는 사원들보다 파벌좋은 사원이 더 잘나가니 회사가 잘 될 턱이 있을가요? 정부에게 따낸 권리를 이용해서 손쉽게 경제 주도권을 잡았던 회사들은 점점 ㅄ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ㅄ같은 상황이 알려지면 부도나니까 부도나기 싫어서 정부에게 없는 돈 털어서 바치고 정부는 부도나지 않는 방법이나 부도를 감추는 방법을 회사들에게 만들어줬어요. 금가는 벽에 페인트칠한다고 벽수리가 될까요? 결국 빵~ 하고 한국 경제는 무너지고 말아요.

 

 

 

IMF가 터진거죠.

 

그러고보니 증권거래소가 본격적으로 태동된 시기도 1980년대 초반이었네요.

 

벤처 기업이 약진하고 중공업이 속속 몰락했어요. 경제는 어려워졌고 실업자가 속출했으며 회사에서는 이미 파벌로 버텨내지 못하고 개개인의 능력으로 경쟁, 즉 평생직장이 아니라 짤리지 않는 경쟁을 해야 했던거에요. 벤처기업들이 요구하는 인력도 이전과 달랐죠. 문제는 이런 변화를 정부가 기업 스스로가 했다면 정부나 교육 부처가 조금이나마 예측이란 걸 하고 인재육성 차원의 교육제도를 손봤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변화가 우리손이 아닌 외국인 IMF에 의해 몇 년이나 계속되는 바람에 우리 정부는 이 생소한 변화에 감도 제대로 못잡고 해메게 되요.

 

IT산업이 뜬다고 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 학과가 난립해요. 게임 산업이 뜬다고 해서 게임학과가 난립하고 애니메이션 학과니 된장학과니 순결학과니 하는 이전에는 거의 볼 수가 없던 학과들이 대학에 잔뜩 생긴 것도 이때부터에요. 왜 이런 학과가 생겼고 그것도 초반에는 반짝이나마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불안해했거든요. 대학 간판으로 취업하던 시기가 너무 갑자기 끝나버리니까 뭘 어떻게 할지 감을 못잡고 방황하기 시작했던거에요.

 

대학들이 갑자기 등록금을 산더미같이 올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에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나갈 것을 계획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취업문이 막히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되자 대학으로 몰렸거든요. 대학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고등학교 이하 학교가 응당했어야 했던 취업이나 진학 진로에 대한 부분을 직접 맡아 해본답시고 ㅈㄹ하기 시작한거에요. 그런데 국가도 어떻게 못하는걸 일개 대학들이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요? 그 결과가 특이한 학과 개설 경쟁과 취업율 경쟁, 그리고 취업율을 높이기 위한 기업간의 산학제휴에 집중하게 되요. 대학 진학율은 덩달아 급증하게 되고 대학들은 그들의 미래를 볼모로 삥을 뜯듯 등록금을 올려댄거에요.

 

대학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대학을 욕할 필요가 없어요. 사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에초 학교를 산업에 이용해먹으며 정부가 인력 창출을 좌지우지하는 형태로 만들었던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정부주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으면 끝까지 그렇게 가던가, 기업에게 산업 전반을 넘겨주려면 교육제도도 함께 개편을 하던가 했어야 하는데 80년대 대기업으로 경제 주도권이 갑자기 넘어가고 난 뒤에는 돈세느라 교육제도 손보는건 신경도 안썼으니까요. 더 냉정하게 말하면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학교는 초, 중, 고등학교 모두 거의 변하지 않았아요. 아니 변화를 거부했죠. 그 결과가 지금의 꼬락서니에요.

 

지금의 학교는 80년대에서 정체되어있어요. 정부에 의해 조종되던 꼭두각시로 잘 작동하다가 80년대 정부가 관심이라는 실을 끊어버리면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어요. 지금의 어떤 정치인들도 민생을 살리니 경제를 살리니, 역사관이 어떻니 하는 이야기는 잔뜩 해도 학교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교육감에게 알아서 맡길 심산인건지 일언반구 말이 없어요. 이야기는 별다를거 없이 정부가 하던 거 마저 책임지라는데 그걸 할 사람이 아무도 없나보죠?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학생,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거 전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유난히 학교에서 사고치는 애들 많아지고 왕따가 많아지고 학교폭력이 심화되는거 그거 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아무런 확신이 없이 헛구호만 지껄이니까 생기는거에요. 학생 친구들이 가끔 교사들을 무시하고 대들고 그러는거 분명 그 자체로 잘못된거지만 학생들이 무시하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학교는 변화를 거부하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새로운 선생님들이 들어간들 그게 변하겠어요? 구정물에 깨끗한 물 한두방울 떨어뜨려서 정화가 될까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지금은 학생이 학교를 거부하고 새로운 학교를 요구한다고 해도, 어느 누구 하나 학생 편이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선생님들은 당연히 자신들 인사고과가 걸려있으니 학생이 어떤지는 관계없이 일단 학교에 묶어두기만 하려고 애쓸것이고, 학생의 부모님, (그러니까 학부모분들)은 지금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에 대한 불안함이랑 자신들이 겪었던 학생때와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이 뒤섞여서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은 학교를 쉽사리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학교를 신뢰하지도 못하니까 학생을 아침부터 새벽까지 잡들이듯 굴려가며 학원에 보내서 그분들도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대비를 시켜야만 안심이 되는거에요.

 

 

 

학생은 을이 아니에요. 정부는 학생이 학교를 잠자코 다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어른들은 그네들도 미래에 대한 답을 모르면서 여러분들을 과거 자신들의 경험에 속박하려 들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제 당당하게 요구해야 할 때에요. 우리가 왜 학교에서 잠을 자고, 학교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애쓰는지 분명하게 알아줄 것을 요구할 수 있어요. 학생이 정말 다니고 싶고, 다닐 만한 학교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해야 해요. 다닐만한 학교가 아닌데도 다닐 걸 강요하고 다니지 않을 경우의 불이익을 사회적 압박을 빌어 협박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불안해 대항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의 학교가 뭐가 잘못되었고 내가 그 잘못된 학교를 그만둘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만둔 학교를 대신할 제대로 된 학교를 요구할 권리가 분명 있다는거 꼭 기억하고 혹시 졸업하고 난 다음에 후배, 조금 먼 미래겠지만 학생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항상 머릿속에 두고 있길 바래요.

 

 

 

세상의 터닝 포인트가 반드시 지금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1장 

- 끝 -

posted by RushAm 2012. 7. 15. 14:03

 

 

많이 보셨을겁니다. 그리고 많이 불편하셨을 자료였을거라 생각합니다.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외국인 친구들이 이 자료를 보며 제게 이렇게 묻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헤이 Rusham~  내가 KOREA PR 이랑 REP KOREA는 배웠다고 그런데 KOREA IT는 어딜 말하는거지?'

 

...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이 자연스럽지 못한 삶의 질 양극화를 묵묵히 인정하며 이에 순응하고 적응하려고만 할 뿐 누구 하나 이 상황이 이상하다거나 다른 나라에 비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강제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처럼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가득한 채 매일 아침 사람들은 풀린 눈으로 삼각김밥이나 토스트 따위로 아침을 때우며 부지런히 지하철이나 버스에 올라 별로 다르지 않은 행선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요.

 

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높은 근무시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고도 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총생산량이 OECD근무시간 하위권을 맴도는 국가에 한참 못미치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이걸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만스럽더라도 이 나라에 태어난 게 잘못이라며 애써 관대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누구의 책임인 것일까요? 설령 사회를 몽땅 뽑아 갈아버리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는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휴가 - VACATION

 

예전에는 여름휴가 겨울휴가로 나뉘던것이 이제는 연차, 월차라는 이름으로 굳이 여름이나 겨울에 몰아쓰지 않고 1년 12달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 자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바뀐 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 이 휴가 그렇게 잘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 쓰지 못하고 1년을 허비하여 버리거나 이연되는 경우가 허다하죠 (이연이 되긴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일단 일이 바빠서입니다. 대기업들이 프로젝트별로 부서가 나뉘다보니 어느 한 쪽이 결원이 발생하면 프로젝트가 올스톱되는 직렬형 조직구조가 되어 자신이 빠지면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거나 이후 인사고과나 실적 경쟁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경쟁 심리가 근로자를 옥죄는 점도 한몫하고 있죠.

 

이에 파생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로인해 '휴가'를 윤택하게 자신만의 것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고 살게 된다는 점입니다. 휴가는 그냥 쉰다고 쉬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위하는 취미생활이나 목표 등과 연계해서 활용해야 하는데 1년이래봐야 12일, 이걸 몽땅 한번에 붙여서 쓴다고 해도 12일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하나 짜는 것도 힘들거든요. 우리나라 여행사들이 내놓는 상품들이 대부분 주마간산식의 풀어내는 숙제같은 여행 코스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짧은 휴가 기간에 여행이라는 것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죠.

 

 

주.마.간.산

 

 

여행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여행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관광지를 가서 그 관광 명소를 보고 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현지에 머물면서 현지인들의 삶을 지켜보고 현지인들의 먹고 입고 자는 모습을 익히는 것이 여행의 본질적인 의미라는 것은 우리나라와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고 공통적으로 통하는 여행의 본질이죠. 우리나라의 여행 사진은 각 관광 명소와 자기 자신이 같이 찍힌 사진이 대부분이지만, 외국의 여행 사진은 대부분 '현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를 흉내내려고 현지인들과 사진을 찍으려 시도하다가 험한 꼴을 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는데요. 당연하지만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려면 최소 한 달 정도는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휴가는 총 12일, 여권을 만들거나 비자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독을 푸는 마지막날을 빼면 이틀이 날아가서 열흘 남짓입니다. 게다가 모처럼 큰 마음먹고 떠나는 여행이니 가능하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자랑거리를 가져오고 싶은 마음에 '한 국가' 혹은 '한 문화권 (종교)'이 아닌 주어진 시간동안 정말 많은 나라들을 가보는 것을 목표로 삼곤 하죠. 그렇게 10일간의 유럽일주 계획이 짜여지고 우리는 그 여행동안 여행지에서 단돈 1달러에 살 수 있는 엽서에 나온 명소들에 자신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을 몇 장 쥐게 되는 것으로 만족을 강요당합니다. 당연히 이런 여행이 만족스러울리가 없죠.

 

 

비단 여행뿐만 아니라 어떤 여가 활동도 단 12일만에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휴가는 마치 12일동안 전쟁을 치르듯 스파르타식으로 벌이는 또 하나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죠. 여행은 대부분의 시간을 '이동'에 투자해야만 하고, 적어도 석달은 배워야 진정한 참맛을 알수 있는 수많은 레포츠들은 12일이라는 시간적 제한에 걸려 속성, 또 속성이 되어가고 우리는 석 달동안 편하게 즐기며 배워야만 하는 것들을 단 12일만에 배워내는 지옥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모처럼의 휴가가 아까우니까 뭔가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더욱 이를 악물고 말이죠.

 

 

휴가 다녀왔어요.jpg

 

누가 이 악물고 벌이는 12일간의 유럽일주, 레포츠를 위한 지옥훈련을 하고 싶을까요? 더구나 위 그래프에서 보듯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근로시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누적 피로량을 고려해봤을때 12일간의 강행군같은 휴가를 견딜 만한 체력적 여유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없어질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휴가를 휴가답게 즐기는 것보다, 일과 속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데에 더 익숙해지고 일과의 피로를 푸는 데에 휴가를 사용하는 비중을 점차적으로 늘려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휴가를 쓰는 법에 점차 미숙해져만 가고, 휴가 그 자체가 일 이상으로 피곤하게 된다면 결국 득을 보는 것은 어디일까요? 삶의 질은 마치 최면에 걸린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흘러가기만 하는 세월이 될 것이고 우리는 인생을 또 다른 누군가의 뒤치닥거리를 위한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것에 모두 쏟아부어야만 합니다.

 

회사에게 묻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회사, 다시말해 회사에서 돈을 제일 많이 가져가는 사람들을 위해 살라며 강요하고 회사에 쓰기로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을 가져가는 걸 당연시할 생각입니까? 언제까지 생존을 볼모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세상을 바꿔가면서까지 사람들을 쥐어짜서 자신들의 일방적인 잇속 분배를 당연시하는 파시즘적 사고방식을 고착화시킬 생각인가요?

 

휴가는 당신이 회사로부터 따내는 게 아닙니다. 휴가는 당신이 회사에게 지불하지 않은 가치입니다. 회사가 그걸 거저 달라고 한다고 함부로 줄 만한 게 아닙니다. 당신은 그걸 지불함으로 인해서 정말 소중한 순간을 같이 보내는 등의 인생의 추억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고 한계까지 도달한 심신이 결국 망가져 병을 불러올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는 그런 당신에게 어떤 형태로도 잃어버린 추억과 건강을 보상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

 

 

기타같은 현악기는 조율이 끝난 뒤에는 항상 기타줄을 모두 풀어놓고 연주할때마다 매번 번거롭게 다시 조율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팽팽하게 조율해놓은 채로 두게 되면 현이 늘어나게 되고 다음 연주할때는 그보다 더 팽팽하게 조일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 약해져 끊어지기 때문이라는데요.

 

휴식은 단지 잉여나 백수라는 이름으로 손가락질 받을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기계처럼 제 몫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해서 폐기될만한 무인격체도 아닙니다.

당신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일개미가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이며 당신답게 살다 당신답게 갈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의미의 휴식과 인생의 밀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보다 자기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인정받을 인생을 위해서 말입니다.

 

 

 

휴가 편을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2. 7. 14. 02:52

결국 방통위가 m-voip를 제한해도 괜찮다고, 아니 괜찮도록 법까지 수정해주시는 걸로 일단락이 났다, 사람들은 방통위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지만, 사실 방통위만 그렇다고 까이는 것도 방통위 입장에선 억울하기 그지없을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정부산하기관 중 어느 하나 국민들 편을 들어주는 대의적인 정책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입차들이 가지고 오는 크루즈 컨트롤이나 방향제어 헤드라이트 그리고 이번 K9에서 보여준 차유리에 속도표시되는거, 그거 다 현기차가 옵션 만들어서 팔 수 있기 전까지 도로교통법으로 금지했던 것들이다, 사유는 물론 '국민들의 안전에 위해가 되기 때문이고 국내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안맞는다는 국내 실정과 국민들의 안전이 현기차가 옵션을 만드는 순간 일거에 해결이 되어버렸다는 건데... 물론 이게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방통위만 특이하게 통신사업자들이랑 붙어먹는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기 때문이다. 특정 산업 유관기관이면 무조건 해당 주력사업 기업 편으로 흐르게 되는걸 당연시하는게 사실이니까.

 

몇년전까지만 해도 운전 시야를 가려 사고를 유발할수 있다는 이유로 불법이였던 HUD 그런데 K9 출시를 기념해서 불법이었던 이게 슬그머니 해금되어 최첨단기술을 마침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땡큐 현기차!(??)

 

그런데 이 논리는 최첨단 IT를 선도한다는 기업이나 그 기업들을 관장한다고 내놓은 것 치고는 좀 부실하다. 사실 망중립성 어쩌고 나오는거 어려워서 못들어주겠고 결론은 '사업권 침해'라는 거 아닌가? 자기들은 음성 통화와 데이터 통신 사업을 하고 있는데, 데이터 통신을 이용한 업체 중 하나가 '음성 통화' 서비스를 시작하니까 가뜩이나 몇조원을 방통위에게 처발라서 주파수사업권 따낸 이통사들이 '재들이 편법으로 우리 밥그릇 뺏어요 그렇게 돈 처받았으면 막아주셔야죠 뿌우~' 라고 방통위에게 아양 반 협박 반을 날린거고 당연히 (?) 방통위는 받은 게 (??)있으니 서비스를 제한한거다 (여기서 우린 방통위가 주파수를 팔면서 이통사들에게 얼마나 많은 밀약을 했는지를 잠시나마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국민들에게 설득이 되느냐에 문제가 남는다. 이통 3사에 대한 여론은 별로 좋지 않다. 언제나 뭐만 있다하면 사업 망할것처럼 울부짖으면서도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면 사상 최고 실적을 올리며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실적을 올린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는 꼬락서니를 몇년째 보고 있으니 아무리 우매한 국민이라도 여론이 좋아질리 없잖은가, 그런데 여기에 이통사가 내놓은 논리는 '우리는 3사로서 정당하게 돈을 내고 음성사업자권을 산, 한마디로 세금 내고 서비스하는 업체고 쟤들은 그게 아니니까 돈 받은 만큼 쟤들 막아줘'라는 논리를 펼쳤다. 그리고 데이터 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음성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65요금제 이상으로 제한한다는 발표도 곁들였다. 이통사들은 이마저도 조금 찝찝했는지 m-voip가 얼마나 망 부하를 심각하게 초래하는지를 역설하려다 데이터 실제 부하율 공개를 요구하자 데이터 성격별 집계가 기술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우며 살짝 꼬리를 내리기도 했다 (근데 65요금제에서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m-voip 용량은 어떻게 계산하고 있는것인가?)

 

SKT가 아무리 국내에서 하는 짓이 병신같아도 그 개처럼 벌어들인 돈이 수천조니까 일단 돈빨로만 밀어붙여도 국제시장에서 구매력 (혹은 호구력) 은 큰 편이다. 돈 가진 사람 잘 안해주는 나라 없으니까,

일단 그들의 논리가 모두 맞다라는 가정 하에 이 글을 풀어볼까 한다. 비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음성 통화지만 음성 통화를 이미 하고 있는 사업자의 데이터망이므로 자신들이 서비스를 제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논리도 받고 m-voip로 인해 음성 통화 수익이 줄어들 경우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 결국 추가적인 시설 투자가 불가능해 국내 모바일 통신 시장의 경쟁력을 크게 저하시킬 수 있다는 논리도 가소롭기 그지없지만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리고 지금부터 그들이 m-voip를 막기 위해 내세운 논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그걸 또 받아준 방통위는 얼마나 노골적인지, 그리고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꼬집어볼까 한다.

 

 

1. 음성통신과 데이터 통신의 상관관계

 

우리의 요금제를 한번 살펴보자 스마트폰 요금제를 기준으로 보통은 다음과 같은 패키지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1. 음성 통화 정액 (시간 단위 종량)
2. 단문, 장문 전송 서비스 정액 (정해진 과금액 하에서의 종량)
3. 데이터 요금 (무제한 혹은 주어진 용량 하에서의 종량)
4. 기타 부가 서비스

 

등이며 이게 스마트폰에서는 패키지 형태로 묶여있는 방식, 그렇지 않은 요금제에서는 별도로 과금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34,44,54요금제 등이 제각각의 조건별로 이 4개 서비스가 정해진 양 만큼 사용할 수 있는 패키징이 되어있는 형태이며 표준 요금제라고 해도 어차피 m-voip를 사용하려면 1번만을 이용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3번을 함께 사용해야 하므로 사실상 차이는 없다

 

통신사가 주장하는 것은 3번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에서 1번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 내용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그런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요금제 중 모든 항목이 종량화되어있는 34요금제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음성 150분
2. 단문 장문 전송 서비스 3000원 상당
3. 데이터 100mb
4 기타 부가서비스

 

이미 통신사는 34서비스에서는 m-voip 사용을 제한하고 있기에 정당한 비교는 될 수 없지만, 일단 이 요금제에서 통신사가 침해당했다는 1번의 경우 150분이라는 계약 조건이 있다. 즉 1번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4요금제에서 150분 이상을 데이터 통신 (와이파이는 통신사께 아니므로 제외) 으로 사용한 초과분에 대해서만 부과할 수 있다. (물론 이는 1번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m-voip만을 사용했을 때에 가능한 계산이다) 왜냐하면 이미 통신사는 1번 사업을 하는 데에 있어 150분이라는 통화량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1번 사업권의 침해는 150분 이상을 넘지 않으면 주장할 수 없다

 

물론 데이터 내의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통신사의 주장은 분명 1번 사업을 하고 있고 3번 사업의 서드파티쯤 되는 기업이 1번을 넘보고 있으니 막아달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서드파티의 서비스권 이전에 우리가 받아야 할 '통신량'에 대한 정액제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 34요금제의 경우 150분, 더 비싼 요금제일 경우 더 많을 수 있다. 당연히 서드파티를 제한하기 전에 우리가 1번이든 3번이든 뭘 쓰든 상관없이 150분이라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권리다. 왜 데이터와 음성 사용량을 동일시하냐고 묻는다면 통신사의 논리가 처음부터 데이터가 음성 사업권을 침해한다는 병신같은 논리를 펼쳤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모자라 아이패드까지 팔고 싶었던 이통사들이 내놓은 태블릿 요금제, 이 요금제에는 음성 통화가 아예 서비스되지 않는다. 왜냐 전화기가 아니기때문에, 그렇다면 이 태블릿 요금제에서는 m-voip를 사용해도 통신사 차원에서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굳이 이 요금제를 쓰지 않더라도 그냥 패킷만 쓴다고 한들 막을 원칙 자체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태블릿요금제에서도 m-voip를 막을 채비를 마친듯하다.

 

게다가 통신사가 이런 논리를 펼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1번 종량과 3번 종량의 환산치와 통합치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권이다. 통신사가 주장하는 대로 음성통화 사업권이 데이터 통신 서드파티로 인해 침해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통신사가 처음에 저 요금제를 내놓을 당시부터 음성 150분, 데이터 100메가가 아니라 250포인트 중 데이터 250메가, 혹은 음성 250분을 자유롭게 복합적으로 쓸 수 있도록 요금제를 미리 손봐놨어야 했다. 이렇다면 분명 데이터 서비스가 음성통화 서비스와 같게 되어 m-voip서비스를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음성통화량을 깎을 수도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서드파티가 m-voip 서비스를 하는 것이 그들의 영업권 침해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지 않았다. 왜? 끼워파는게 훨씬 돈이 되니까... 남은 통화량 다 안쓰고 남은 문자 다 안쓰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그렇게 해도 남은 통화나 문자는 이월되지 않고 더 많이 쓰는 쪽으로 몰아주는 서비스를 해서 손해를 보기 싫었으니까, 그들은 스스로 무덤을 판 거다.

 

 

반드시 1종 선택! 이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정부에게 떠밀리다시피 하며 내놓은 선택형요금제가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이유는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음성통화가 가진 가치가 엄청나가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데이터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음성과 데이터를 통합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음성의 가치가 이미 그들 속에서(만) 높아질대로 높아졌기때문에 음성 대비 데이터를 엄청나게 많이 줄수밖에 없고, 그러면 사람들은 음성을 아무도 안쓰고 데이터를 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양손에 꽃을 들고 밥을 먹으려고 하니 그게 되겠는가?

 

 

2. 그들은 왜 통합하지 않았는가?

 

통신사들이 남은 종량 이월이나 각 항목별 통합제로 관리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우리가 쓰는 요금제가 바로 저 4개항목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까발려지기 싫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에 예로 든 34요금제 예시에서 3만 4천원을 기준으로 얼마가 들어가는지를 살펴보자

 

1. 음성 150분 (초당 1.8원으로 계산) 16200원
2. 단문 장문 전송 서비스 3000원
3. 데이터 100mb (0.5kb당 0.025원으로 계산) 5000원
4. 기타 부가서비스 9천원+a ??

 

일단 1부터 3만 합치면 24200원이 나온다 중요한건 저 요금은 원가가 아니라 그들의 순익이 모두 포함된 실제 서비스되고 있는 종량 요금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나온 24200원은 그대로 소비자가로 봐도 무방하며 이익이 충분히 발생된 금액일것이다. 그렇다면 약 9천원여의 돈이 4번 부가서비스에 할당되었다는 이야기일까?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불필요한 부가서비스를 끼워팔기한 독과점법에 위반되는 사실일텐데, 끼워파는 부가서비스의 면면을 보면 아무리 봐도 그정도만큼의 가치를 보여주는 부가서비스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이 9천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무튼 통신사는 이미 24200원으로 적정 수준(?)의 이익을 거둔 상황에서 추가적으로 9천원의 어떤 사업과 그에 따른 이익을 얻은 셈이 된다. 물론 이런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알기에 따분한 사실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아는 사람만 아는 거랑 모르는 사람들이 아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 아직도 휴대폰 매장에서 노인이랑 주부들 낚는 폰팔이들이 쓰는 수법의 함정을 모르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낚이고 있는지조차 모른채 낚이는 실정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럴 리가 없는 대인배같은 대기업들이 조장했다는 게 드러나버린다는 것 자체가 역풍을 맞는다는 거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질리도록 국민들에게 (죽는 소리)를 해댔으니까...

 

 

사실 얘들도 정부 시책에 맞춰서 모듈형 요금제를 내놓는다던지 맞춤조절 요금제를 내놓는다던지 별짓을 다해왔다. 그런데 그 어떤 요금제에서도 '데이터'와 '음성'을 상호 교환해서 쓸 수 있는 형태는 없었다. 왜일까? 통신사들은 m-voip를 허용하고 안하고가 중요한게 아니기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1.8원으로 책정하고 있는 그 가격 자체를 내리기 싫은거다, 지금처럼 비싸게 받고 팔고 싶은데, 세상은 변하고 있고 m-voip는 가격하락을 부추길것이다. 예전의 유선전화가 그랬고 지금의 국제전화가 그렇다. 이젠 이동통신의 차례가 오니 발악을 하는거다. (우리 계속 부자로 있고 싶다고)

 

 

 

음성 통화 사업자로서 어떤 형태로든 이미 계약한 통화량을 쓰는 것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자신들이 통합해서 관리하지 않았으면서 통합된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통신사와, 현행 상으로는 사업권 침해가 될 수 없는 사안임에도 m-voip 제한을 자율적으로 허용한 방통위, 그들은 그들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m-voip가 왜 자신들의 사업권을 침해하는지 스스로 증명해내지도 못하고 있고 그걸 그렇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닌 통신사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이다. 스스로 패착을 저지른 자에게 그닥 자비롭지 못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어찌하여 돈많은 기업들에게는 이렇게도 자상하고 친절한지 모를 일이다.

 

 

난 분명히 글을 쓰고 있는데 느낌은 벽하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벌서부터 든다

아마도 부질없는 짓이라는 반증이리라...

 

 

 

뱀발

 

SKT는 조만간 데이터망을 이용한 음성 통화 서비스인 VOLTE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만일 이 사업 내용이 사실이라면 SKT는 m-voip를 제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신사가 된다. 다만 그걸 미리부터 제한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어디까지나 VOLTE서비스를 시작한 다음, 그것도 VOLTE가입자에게만 한정해서 m-voip를 제한할 권리가 그제서야 생길 뿐이다.

 

게다가 SKT는 VOLTE요금제를 완전 통합하는 것이 아닌 VOLTE에서 발생되는 음성 통화에 대해 별도 시간 과금을 할 예정인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LTE망에서 데이터 패킷을 깎으며 통화를 하는데 그 통화하는 시간 만큼 별도의 요금이 부과되는 체계인 것이다. 이런 요금제 내놔도 이게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에 가지는 자신감일 테지만, 참 뭐라 할 말이 없는 기업이다. 

 

 

 

posted by RushAm 2012. 5. 30. 03:59

운전하시는 분들에게 김여사는 그야말로 공포의 존재입니다. 뭐 굳이 사례를 들지 않아도 너무 보편화되었을 정도니까요. 이미 유머사이트에서는 정기적으로 김여사들의 웃지 못할, 혹은 아주 끔찍한 사고들이 정기적으로 올라올만큼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왜 김여사라는 존재 즉 운전이 미숙한 여성운전자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정말 여성들은 운전을 못하는 것일까요? 맞다면 왜 여자들은 운전을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화국 연구소 여자 그 특별함에 대하여는 참 오랫만에 여성 운전 미숙자, 통칭 '김여사' 에 대해 연구해볼까 합니다. (병원신세 끝내고 나니 새로운 꼭지가 생각 안나서 무덤 속 꼭지를 파낸 걸로 보이신다면 착각입니다.)

 

 

김여사의 조건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면 여성운전자 = 김여사 라는 발상은 매우 위험합니다. 물론 항간에 알려진 대로 여성의 공간감각 능력 등의 차이로 인해 주차나 차선 변경 등에 대한 스킬적인 차이가 분명 존재하긴 합니다만, 사실 운전 스킬이라는 것은 주차나 차선 변경이 전부는 아니고 김여사라고 불리우기 아까운 운전 실력을 가진 여성 운전자도 적지 않다는 것은 여성운전자의 선천적 운전 스킬 부족론을 일축시키기에 충분하니까요.

 

한마디로 김여사는 '여자'라서 운전을 못하는게 아니라 '여자'일수록 '김여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뿐입니다. 이게 무슨 모순된 말이냐고 버럭하시기 전에 한번 들어보세요.

 

여성은 경험에 의한 판단보다는 이론적인 판단을 중시합니다. 여자학우와 대학생활을 같이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자들의 학문을 접근하는 방식은 남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요. 여성들은 책을 달달 외우다못해 찢어 씹어먹을 기세로 일단 '이론'을 완벽하게 마스터하는 방식에 무척 익숙해져 있습니다. 특히 이런 현상은 고학력일수록, 운동 부족일 수록 좀 더 심해집니다. 경험이 부족한 부분을 이론으로 채우려는 욕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여자는 아니기에 거기까진 잘 모르겠네요). 문제는 이게 여자들이 '좋아서'하는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외우고, 줄치고 책갈피해두고 형광펜칠, 줄치는 볼펜은 4색으로...

여성들은 '학습'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론에 메달리는 집중력을 보일 수 있는건 다름아닌 '생존권' 이 걸린 곳에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른바 '모성의 힘'이라 불리는 그 힘이 작용하기 때문인데요. 한마디로 그들은 '시험', '면접' 등 단기간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리는 '단판 승부'에 위기감을 느끼고 느낀 만큼 고통을 이겨내며 노력을 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들이 통계학적으로 토익시험, 수능, 면접 등등에 통계학적으로 남성보다 성적이 높게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문제는 이게 '면허시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면허시험은 진짜 말그대로 'FM'대로만 하면 만점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그런 시험이고, 이런 시험이라면 사실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훨씬 유리합니다. 근데 이게 유리하다고 쓰긴 해도 여성들이 이걸 즐거워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은 다 똑같아서 엄청난 양의 이론을 달달달 머릿속에 구겨넣고 외우는 작업이 선천적으로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는 그걸 못견딜 뿐이고 여자는 그걸 특수한 상황에서 견디는 것 뿐이지 고통은 똑같거든요. 여자들은 일단 이론 시험을 만점에 가깝에 받고 기능과 주행 시험을 마치 리듬 액션 게임의 족보를 외우듯 달달달 외웁니다. 몇 초 후에 브레이크, 몇 초 후에 엑셀, 몇 미터 가서가 아니라 그 코스의 소나무가 어떻게 보일 때 핸들을 튼다든지 뭐 이런 것들 말입니다.

 

 

운전을 무슨 컴퓨터가 도로 정보를 스캔하듯 꼼꼼하게 머릿속에 구겨넣고 틀에 맞추듯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왠만한 고성능 컴퓨터라도 오버히트로 뻗어버립니다. 하물며 사람이 그걸 한다면 그 스트레스가 어느정도일지는 말이 필요없겠죠. 여성들에게 처음부터 운전은 이미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는 인식이 박혀버린 채로 면허를 따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집 앞을 맴도는 것 이외에는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요. 왜냐하면 머릿속에 면허시험장 주행시험 도로 이외의 도로 정보가 디테일하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그 외의 도로는 그냥 난파선이 표류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세계가 되는 거죠. 만들어지지 않는 길이니까요.

 

 

실제 도로에는 기준이 되는 표지판도 없고, 소나무도 없고 몇 미터를 가서 핸들을 틀어도 차가 제 위치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에 익숙해지기 위해 가로수 개수를 세거나, 기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 인식하는 데에 집중하죠 (와이퍼의 세번째 나사 같은 거) 상황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다른 차들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차들은 움직이고 있으니까 기준이 될 수가 없거든요. 남자들은 다른 자동차를 보고 '사람'으로 인식하지만 이런 여자들은 다른 자동차는 그냥 '없거'나 '하나의 사물'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그 사물이 갑자기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일 경우 그들은 '위험'을 느끼고 돌발행동을 하게 되는거죠.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김여사의 패턴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 패턴의 함정은 '초보운전자'라는 점이죠. 다시말해 여자에 국한시키긴 했지만 '남자'의 경우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사례인데다, 초보 딱지를 뗸다면 대부분 해결이 됩니다. 특별히 여성이 취약하긴 해도 극뽁이 가능하다는 건데요. 문제는 이 초보 딱지를 뗀 지 한참 지났을듯한 여성운전자들도 극복하지 못하는 김여사의 조건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여사의 조건 2

 

여성들은 '단판 승부'에 강점을 보인다는 점을 말씀드렸죠? 이 강점은 실제로 강한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능력이라는 점도 위에서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운전면허시험은 이러한 여성들에게 꽤 유리합니다만 그렇다고 여성들의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건 아니죠.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것은 한 번에 붙는다고 하더라도 들어가는 '스트레스' 및 '정신적 외상'은 남성에 몇 배에 이릅니다. 문제는 이런 '스트레스'가 운전면허 시험이 끝나고 초보운전 딱지를 뗀 후 운전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운전', 다시말해 '운전하는 환경'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김여사들을 표현하는 이미지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짙은 선글라스와 흰 면장갑이 있죠. 면장갑을 끼는 이유는 손등이 햇볕에 그을리는 것, 즉 자외선에 손피부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선글라스는 운전석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자외선에 눈이 자극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운전석은 여성들이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데에 그닥 좋은 장소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피할 방법'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죠. 대부분의 김여사들은 미숙한 운전일때의 습관으로 앞으로 다소 쏠린 운전 자세를 하고 있기때문에 얼굴피부가 자외선에 그대로 노출되어버리니까요.

 

 

여자들에게는 이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닌겁니다. 피부미용과 노화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여성들이니만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피부가 노출된다는 것은 정말 화가 치밀어오르지만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스트레스를 감내해야할 초인적인 신경을 발휘해야 한다는 거죠. 운전은 익숙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시간 운전을 하면서 받게 되는 외모에 대한 히스테릭은 스스로의 멘탈에 심각한 손상을 야기하며 이 손상을 커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게다가 여성들의 운전은 '목적지'에 대한 부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남자와 차이가 있는데요. 예를 들어 '장보기를 위한 마트에 이동' 이 운전에 목적이라면 남자의 경우 일단 운전석에 앉으면 목적지에 대한 부분보다는'자동차를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에 대해 더 신경을 쓰는 반면 여성은 '목적지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을 집중할 뿐 자동차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목적지에 대한 부분을 먼저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일종의 '스트레스'가 되죠. 여성들은 암기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암기에 따른 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었죠? 목적지 즉 '마트'에서 살 물건들을 메모해뒀다면 메모를 잘 챙겼는지, 마트에 주차장은 좁지 않을지, 마트에서 가까운 층의 주차장은 비어있을지 같은 아주 쓸데없는 고민들을 잔뜩 머릿속에서 뱅뱅 돌립니다. 당연하지만 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죠. 한마디로 여성들은 운전석에 앉는 상황은 어떤 상황이든 '그닥' 유쾌한 상황은 아닌것입니다.

 

그 스트레스 정도가 심하면 심할 수록 패닉상태가 되며 돌발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아지는데요. 김여사 에피소드들이 반드시 '돌발행동'에서 초래된것들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김여사들의 자세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김여사의 자세

 

운전= 스트레스 라는 공식은 이미 여성들에게 깊게 인식되어 있습니다만 글머리에 말씀드렸듯 여성들이 특별히 이걸 잘 견딘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즐기는 건 아닙니다 괴로운 건 똑같이 괴롭거든요. 그래서 여성들은 이 괴로움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하는데요. 다름아닌 '수다'입니다.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 세대들이 명절날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괴로움 속에서도 스케줄 중간이 아닌 스케줄을 끝마친 다음에 후유증이 오는 이유는 바로 일 중간중간 나누는 수다로 인해 일할 당시에는 몸이 아프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죠.

 

굳이 이런 고통스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여성들은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수다'로 풉니다. 이 수다는 단순히 스트레스를 푸는 차원을 넘어서 신체적인 '통각'을 완화시키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가져오는데요. 그래서 어머니들은 명절날 그 괴로운 노동 속에서도 중간에 쓰러지거나 병이 나지 않고 명절을 끝마친 후에야 근육통이나 요통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수다'의 기능이 흔한 '진통제'의 기능이 아닌 '환각제', 좀 더 순하게 말하면 '뇌에서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느끼는 부분'을 차단하는 역할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즉 내가 이 고통스러운 곳에서 일을 하면서 근육이나 뼈를 손상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는 거죠. 여성분들이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능력에는 이러한 부분이 꽤 크게 작용합니다. 스트레스가 평소 많은 여성일수록 수다가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요. 운전하는 여성들은 마치 '명절 스트레스'에 버금가는 이 '운전 스트레스'를 견딜 방책으로 '수다'를 택합니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수다 없이 운전을 아예 못하는 분들도 허다합니다. 옆에 누군가를 반드시 태워야 하거나 그 대상이 없으면 운전 시작부터 끝까지 '휴대폰'을 이용해서라도 이 '수다'를 스트레스 해소 방안으로 활용하는데요.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여성의 경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운전을 하는 기능적 제한에 의한 부분 이외에도 또 하나 내가 '운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어버린다는 치명적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운전은 고통이며 스트레스이고 그걸 견디기 위해 '수다'를 사용하는데, 이 수다에는 일종의 환각작용이 있어서 자신이 그 고통스러운 '운전'이라는 것에서 일순 해방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드렸듯 여성의 운전은 'FM'즉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데이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성향이 강한데 여기에 그 수다라는 환각제가 주입되게 되면 이 데이터를 불러들여 운전에 반영하는 기능이 상당히 약해지게 됩니다. 이후부터는 동물적인 감각, 즉 운전 '숙련도'에 의해 운전을 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데요. 운전 방식을 대부분 데이터에 의존하는 여성들의 운전 방식 상 이 단계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초보' 이하의 운전 스킬로 운전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들의 운전 경력, 아니 일반적으로 면허를 딴 사람이라고는 상상할수 없는 기상천외한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악셀과 브레이크를 잘못 밟았다거나 사고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김여사는 여성 운전자 모두를 통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전 면허를 딸 때부터 지금까지 운전 그 자체가 전쟁이고 스트레스인 사람, 피부의 자외선 노출에 따른 노화에 신경쓰는 사람, 그 모든 최악의 조건을 가진 자동차의 운전석을 앉는 것이 스트레스의 궁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스트레스를 견디기 싫어서 어떻게든 '차 안에서의 수다'라는 환경을 만들어 자신이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차를 몰고 나와 이 세상 위에서 벌이는 거의 대부분의 상황일 것입니다.

 

운전 그 자체가 스트레스라 느끼고 있고 피부가 자외선에 노출되는 것이 싫으며 목적지의 일이 신경쓰여 운전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한다면, 본인이 스스로 운전을 하는 것보다 좀 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을 권장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피할 방법을 찾는다며 '수다'를 택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고통을 줄이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심한 경우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운전은 자유를 주는 대신 다른 사람의 제한적인 자유를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 '룰'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공화국 연구소 - 김여사 그 특별함에 대하여 를 마칩니다.

posted by RushAm 2012. 3. 20. 02:41
얼마전 김태희 반대 시위가 국내 주요 뉴스와 다큐멘터리에 보도되는 등 일본의 젊은 극우들 이른바 ‘넷우익’의 활동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새로 들어온 젊은이들의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신선함 없이 예전에 했던 주장 그대로 ‘독도는 일본 땅’이고 ‘동해는 당연히 일본해’이며 ‘종군위안부는 일본으로 돈벌러 온 매춘부’라는 주장은 무려 40여년이 넘어서까지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넷우익의 입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일본 극우들은 어떻게 역사의식이 옅고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세계화에 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한마디로 극우따위엔 관심도 없을) 일본 젊은이들을 극우화로 구워삶는데 성공했던 것일까? 비결이 있다면 바로 ‘증거’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일제침략기 당시 관련 서류 등의 증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쪽은 두말할것도 없이 일본의 극우일 테니까, 그들은 특별히 역사를 왜곡할 필요가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 혹은 유리한 해석이 가능한 증거들만 추려 젊은이들을 간증시키는데 쓰고도 한 트럭은 남을 만큼 증거가 넘쳐난다.

이들은 어떻게 젊은이들을 설득하는 것일까? 어차피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불타 없어지거나 훼손이 심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팩트만을 겨우 증명할만한 자료만이 남아있을 뿐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구체적인 정황이 기록된 비디오나 사진 자료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는 않고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외부로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알려진 사실과 그에 따른 근거자료에 대해서는 해석하기에 따라 자신들에게 유리한 유권해석이 가능한데,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종군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에 일본이 개입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종군위안부 모집에 있어 관여하지 않았다 = 과정상의 강제에 대한 책임이 없다)

‘종군위안부 모집에 일정 금액 이상의 비용이 해당 위안부쪽으로 지급되었다’
(처음부터 돈을 제시했고 그 뒤에 사람이 왔다 = 돈이라는 조건을 알고 왔다)
(이미 지불된 기록이 있다 =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은 돈을 이미 받았음에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 종군위안부는 일본이 직접 모집에 관여하지 않았고,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다.
극우쪽 해석 = 종군위안부는 매춘부다.


극우가 늘 그렇듯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단어를 선정해서 외부의 적에 대한 공격과 내부의 결속력을 노리려는 것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니 그렇다고 치지만, 일단 극우가 가진 증거들이 모두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면 해석 자체에 대한 논리는 사실상 무결하다. 일본 젊은이들은 이에 빠져든다, 자극적인 단어에 끌려서 들어오면 실제로 그에 연관된 (논리적으로는) 무결한 증거가 나오고 있으니 실제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들은 마치 오움진리교에 빠지듯 극우의 논리에 매료될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진요가 생기는 기본적인 매커니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 그렇다면 이들 극우에 맞서는 우리나라의 태도는 과연 어떨까? 유명한 ‘지곤조기’가 사실이든 오해든 관계없이 우리나라는 몇 년 전의 몇 년 정도를 제외하면 단 한번도 일본에게 전범국으로서의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는 액션을 취한 적이 별로 없다 국민들에게 언제나 일본을 싫어하게 만들어야 했던 친일파 기득권들이 정작 일본이 어떤 액션을 취하면 그것을 적당히 ‘유감 표명’선에서 봉합하느라 진땀을 빼는 이중적 소극성을 보여 왔다. 어째서일까?

동해

아마도 우리나라 외교쪽이 가장 등한시하고 있고 또 어려워하고 있는 문제라고 한다면 동해와 독도 등 이른바 전 세계 표준 지명 문제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 ‘광고전’의 양상으로 벌어졌던 이 대결구도가 최근에 와서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고증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오히려 이 ‘증거’대결이 ‘근현대’ 역사쪽의 고증으로 기울어지면서 외교부의 대응이 지나치리만큼 조용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동해’에 대한 증거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본해에 대한 증거가 없다. 지금 일본이 하는 것은 대대적인 홍보처럼 보이지만 사실 몇십년 뒤를 내다본 일종의 '증거만들기'인 셈이다.


지금의 동해에 과거 명칭에 관련된 자료 중 절반 이상이 조선해로 표기되어있다. 일본은 여기에 조선이 멸망하고 이후 일본의 강점기가 있는 동안 일본해로 정해졌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민국은 왜 조선해 명칭을 주장하며 대응하지 않았던 것일까? 진실은 모른다. 다만 조선해가 되면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나라의 이득이 될 것을 신경쓰는 세계에 둘도 없는 친일파 집단만이 저지를 수 있는 시나리오라는것은 이미 일본 내 재일교포사이에서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이야기다. 사실이라면 덕분에 우리는 분쟁지역이 될 수가 없는 당연한 우리 영해를 일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며 베타적 경제수역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항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국민에게 적지 않은 피해와 굴욕감을 맛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일본이 일본해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하고 있다. 일본이 만일 일본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순간 그들의 ‘조선해 명칭 포기’ 사건을 증거로 들고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정부는 지금까지도 강원도가 아닌 경상북도 행정으로 확실한 남한땅임을 못박을 수 있는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일본과 줄기차게 이슈화를 만들지만 정작 동해 명칭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말을 아끼고 있다.


종군위안부

친일파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관료’였다. 친일파들은 일제 치하에서 자신들이 관직을 얻기를 원했다. 많은 재산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그들은 일본의 행정 정책을 직접 수행하는 (중앙관료가 아닌 지방자치) 역할을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일제 치하를 찬양하는 국민적 캠폐인’과 일본의 2차대전 지원을 위한 조선인 병역 차출 등의 인적관리 부분이었다. 지금의 동사무소, 구청 등 마을 단위로 국민을 직접 상대해야만 하는 곳에는 일본인보다 친일을 했던 조선인을 배치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종군위안부가 소집이 된다고 하면 이 모든 사람들이 일본 군사(?)나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모양새를 보였을까? 일단 정황을 보면 ‘모든’이라는 전제는 조금 거리가 있는데, 현재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보면 ‘결혼’을 한 여성은 차출되지 않는다 라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 차출에 ‘결혼 여부 확인’이라는, 조금 모순되는 이 증언은 결국 차출의 주체가 우리가 상상하는 ‘일본군’에게 강제로 질질 끌려가는 위안부의 모습이 아닌 ‘동사무소’에서 도장을 받고 트럭에 태워 출발하는 모습으로 치완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시 마을 단위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친일파들의 친일 행각이 혁혁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조용하던 마을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는 소문이 돈다. 조선인 남자가 마을을 돌며 바람을 잡는다. 아낙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모집책을 맡은 조선인 남자가 돈을 받고 조선인 여성 모집 인원 할당을 받았다는 소문부터 그 남자에 의해 일본에 건너가면 굶지 않고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까지, 일부는 할당을 채우지 못한 조선인 남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기도 하고 일부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서류를 작성하기도 했다는 소문들이 떠다닌다. 그리고 그녀들은 너나할것없이 종군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젊음을 희생당하고 말았다. (사진은 목포 친일파 관료들의 청년독립꾼 체포 장면으로 내용과 직접적 관계는 없음)



일본 극우가 주장하는 종군위안부에 대한 표현 ‘매춘부’, 단어 자체에 대한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고 살펴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증거가 가진 파급효과가 어디에 뻗어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의 친일파들은 당시 각 지역 행정 관료로서 종군위안부를 모집하고, 그녀들을 일본에 넘기는 모든 과정에 개입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일본으로부터 그 대가까지 받았음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단지 친일을 했다는 기록 자체를 넘어서 그동안 친일파들이 주장해오며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선택 ‘차악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받았던 피해의 원흉을 일본이 아닌 ‘친일파’가 주가 되는 대역전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단순한 인명 사전 편찬이 아닌 일제강점기 피해 자체에 대한 책임을 묻는 타깃이 일본에서 한국의 친일파로 넘어간다는 것은 친일파에게 있어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신대 문제와 종군위안부를 뒤섞어내려는 시도들 역시 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전적인 일본의 책임으로 하기 위한 일환이다. 덕분에 우리는 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제대로 구분조차 못한 채 뒤섞인 정보로 갑론을박까지 벌여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강점기 당시 마을 단위 행정을 맡았던 친일파들이 일본으로부터 대가를 받았다는 사실과 위안부의 소집과 관리 파병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모든 행정 처리에 있어 일본은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증거는 일본 극우들에게는 ‘자발적으로 온 매춘부’라는 타이틀을 만들어주는 훌륭한 재료로, 친일파들에게는 공개되어서는 절대 안되기에 공론화되는 것을 목숨걸로 막아야 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증거를 보고 일방적인 새뇌역사교육에 배신감을 느낀 채 극우가 되어갈 것이다.

처음에 제시한 팩터 항목과 극우쪽의 주장을 이쪽에 대입하여 다시 살펴보자

‘종군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에 일본이 개입하지 않았다’
(모집하는 과정에 있어 한국어가 미숙한 일본인보다 조선어에 능한 조선인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일본인은 모집 과정에서 이미 신뢰를 잃어 같은 조선인이라는 믿음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종군위안부 모집에 일정 금액 이상의 비용이 해당 위안부쪽으로 지급되었다’
(종군위안부 모집 금액의 구체적인 예산 항목이 알려지진 않았다. 적어도 당시 친일파들이 모집하는 데에 있어 ‘자금적 동기’가 없이 했다는건 지금 기준에서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친일파는 돈과 권력에 환장한 쓰래기들이니까.)

(예산 항목중에 할머니들 몫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행정에 의해 모집된 그녀들에게 지급될 돈은 당연히 행정기관을 거쳐서 지급되어야만 했기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녀들은 지급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촌극은 1970년대 정부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고 국고로 환수하는 사건을 통해 재현되면서 다시금 확인사살을 해준다.)

= 종군위안부는 일본이 직접 모집에 관여하지 않았고,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다.
극우쪽 해석 = 종군위안부는 매춘부다.
친일파 해석 = 일제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 우리도 피해자며 최악은 일본이다.

이분들은 근로정신대 피해자일까, 위안부 피해자일까?



이런 진실을 알고 있고 그 진실이 증언으로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친일파는 지금 어떻게해서는 독립 1세대, 종군위안부 1세대의 사망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가능한 일본 극우와 프랜들리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국민들로 하여금 반일 감정을 부추기면서도 일본과 동반자 형태를 유지해나가며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주장을 전범국 일본이 아닌 친일파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가며 일본을 침소봉대하는 데 주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의 종군위안부 1세대들에게 꾸준한 지원을 해주면서 이 모든 게 일본 탓이라는 개념을 주입하여 공식석상에서 꾸준히 일본을 향한 소송을 거는 액션과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도록 유도해야만 한다. 물론 그러한 액션은 반드시 ‘친일파’에 대해 관심이 쏠렸을때 적절하게 화살을 일본으로 돌리는 데에 활용될 것이다.

왜 뉴라이트들은 손수 일본의 극우를 대표하는 발언이나, 교과서를 편찬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과거를 빨리 ‘정의’해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서 일본 극우와는 긴밀한 친분관계를 통해 ‘증거’를 공개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한편,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발심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친일파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그래서 총알받이이며 일본 젊은 극우들의 한국판이다. 그들의 보호 속에 오늘도 진성 친일파, 매국노 새끼(이들에게 후손이란 표현은 사치다) 들은 100년전 그들의 에비어미들처럼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덜 익은 스테이크를 썰며 핏빛 와인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에 대해 알고 이들을 이 사회에서 어떻게 뿌리뽑아내야할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들에 의해 현재진행형이 되고 있는 국가를 손에 쥐고 벌이는 사리사욕 잔치로 인한 피해를 두고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콩 심은데 절대 팥이 나올 리 없다.



친일파 그리고 그들이 했던 갖은 행적과 그 결과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구질구질한 과거를 꺼내는 것도 아니오 미래로 나아가는 데에 발목을 잡는 것도 아니며 정치인들이 대의를 펼치거나 국운이 뻗어나가는 데 방해를 놓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세계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친일파들의 사리사욕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역사교육을 바로잡고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당당하게 사과받을 수 있는 것과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세계무대 속 강소국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지진이나 쓰나미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뿌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조금만 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연속기획 '친일파' - 끝 -


posted by RushAm 2012. 1. 30. 19:30
아마 이 글이 올라왔을 즈음에는 전 병원에 있을 것 같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병실에서 이런저런 치료를 받고 있겠죠.

그런 관계로 최소 2달 이상 이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오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봐야 새해 들어 글 하나 안썼습니다만...)

연재는 다 마무리시켰지만, 혹시라도 새 글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노파심에 적어놓은 글입니다.

100명이 넘게 구독해주고 계신것에 비해 별로 성실하지 않은 업데이트라 매번 죄송했습니다.

...

혹시 2달이 지나서도 새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조용히 북마크에서 지워주셔도 좋습니다.
블로그 폐쇄는 하지 않습니다. 아마 안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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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부족한 블로그 찾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