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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0 연속기획 '친일파' - 제 1부 : 광복은 종전이 아니었다. 4
posted by RushAm 2011. 2. 10. 18:25
지난 기성용의 세레머니로 인해 다시금 화두로 떠오른 '반일 감정'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이 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반일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분들이 속속 돌아가시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새삼 이 반일 감정에 대한 '원천지'에 대해 무척 알아보고 싶어졌다. 정말 이 반일 감정이라는 물건은 일제 강점기 당시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에 의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일제의 사악함을 잊지 않고 일본을 적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그러기에는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참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런 반일 감정에 비해 당시 나라를 팔아먹었던 친일파들은 이상하리만큼 청산이 어려웠고 심지어는 친일파 출신 대통령이 10년여간 독재를 지속했으며 일본 이름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지금 상황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갔다. 그래서 한번 찾아보고 생각해본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광복은 '종전'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광복을 '태평양전쟁'의 종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차세계대전'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일본이 '임진왜란'때처럼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가 일본에 당한 것 자체는 사실이긴 한데 전쟁에 패해서 식민지가 되었던 2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나 폴란드와는 좀 다른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일본은 '조선'을 반드시 칠 필요도 없었고 군사력으로 쳐서도 안됐다. 일본의 목적은 대륙 정벌이었는데, 기본적으로는 당시 조선과 맞짱을 떠서 이길 승산도 없었고 이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이순신에게 남해안에서 캐작살난 걸 아직 잊고 있지 않고 있었던데다가 그 전에 미국이랑 프랑스가 서해안에서 캐작살나는 걸 똑똑히 봤기때문에 일단 조선이랑 맞짱을 떠서 이길 자신도 없었고 이기더라도 반 이상 작살난 군대로 대륙정벌의 야망을 꿈꾸기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우리조상님들만랩쩔어주시던시절.jpg
그들의 전략은 우선 조선을 피 한방울 안흘리고 취하는 것에 모아졌다. 당연히 그러려면 정치 조직을 쥐어잡는 것에 집중할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주목한 쪽이 급작스럽게 10년도 아니고 3대 100년 권력을 갑자기 흥선대원군에게 빼앗긴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2인자로 전락한 안동 김씨는 흥선대원군 10년동안 그야말로 좃to the망했는데, 그들이 해왔던 온갖 정권비리 (벼슬을 돈으로 사고 파는) 나 나라에서 하는 고리사채업 (환곡) 제도를 속속 폐지 정비하면서 순조, 현종, 철종까지 이어지며 홍경래의 난, 임술 민란등으로 대표되는 민심 상실을 속속 회복해나가던 중이었기에 민초들의 지지율마저 높았던 흥선대원군 세력을 상대로 그들이 다시 정권의 주도권을 되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들에게 생긴 서포터가 바로 일제였다. 말이 좋아 대연정이지 역사상으로는 정말 대실패에 가까웠던 흥선대원군의 '안동 김씨 며느리 들이기' 는 결국 흥선대원군의 10년 이후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에 의해 개방의 빗장이 풀리며 속속 일제를 비롯한 타국과의 교류 조약이 체결되는 것으로 뒤통수를 맞게 된다.

(사실 명성황후의 개방 정책은 그렇게까지 나쁜 게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패착일수밖에 없다. 뭐 원인을 따지자면 흥선대원군 본인의 욕심 탓에 고종 즉위 이후 10년간 실권력을 휘두른 결과 고종의 정치 역량이 제대로 성장할 기회가 없어 결국 흥선대원군 이후 명성황후의 꼭두각시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때문이기에 뭐라 하소연할껀덕지가 없긴 하지만)

그 중 일본과의 을사조약은 부당하기 그지없는것으로 유명한데, 뭐 하나 아쉬울 게 없었던 조선에게 왜 이런 조약이 강제될수밖에 없었는지는 두말할필요없이 정권 내 핵심 세력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다수결은 아니었지만, 신하들이 허위보고를 하더라도 짬이 높고 쪽수만 많으면 대세가 되던 시절이었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일본이 이를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 정권 핵심은 놓쳤어도 나름의 세력과 정 2품 정도의 참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안동 김시 세력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정권을 조금씩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신들이 정권을 되찾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최면술사 일제의 작품이었지만, 그에 놀아나 한치 앞을 못보고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일본이든 뭐든 나라를 팔 작정을 진즉부터 했던 매국노 (당시에는 아직 권력침탈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친일파까진 아니었다) 시조 늙은이들의 노망짓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왜 우리나라 첫 개항지가 부산이 아니라 강화도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지 않은가?
왜 일본이 이렇게 번거로우면서도 장기적인 방법을 택했는지는 당연히 일본이 국제 정서에 더 밝았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직접 조선과 전쟁을 선포하면 조선은 당연히 청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해 필사 저항할것임에 자명했고 청나라가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은 당연히 그 청나라와 인접해있는 유럽에도 소식이 전해지는 건 당연했다. 1차 대전으로 전쟁이라면 아주 치를 떨던 유럽에 전범 이미지를 주는 것은 향후 정복계획에 있어 상대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미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만국평화의회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그들은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침탈을 어떻게든 '내전'으로 위장할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직접 침탈보다 내분을 유도하는 식의 장기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헤이그 특사의 비극을 모두 잘 배웠을 것이다.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열사는 본회의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일제의 부당함을 설파했지만 그에 대한 의회의 반응은 단지 '조선이 불쌍하다' 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헤이그 특사의 실패 원인은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일제가 영국과 짜고 방해공작을 펼쳤다거나 미리 의회를 구워삶았다는 식의 설이 당당히 교과서에 나오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만국평화의회는 조선의 상황, 즉 일본이 연루되어 이는 아주 특수한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네이티브가 아니었던 이위종 열사가 그걸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고도 생각하기 힘들다. 결국 이 만국평화의회는 조선의 상황을 단지 '두 가지 정치 세력이 부딪힌 정치 내분 정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이 의도했던 바와 맞아떨어진다.(누가 봐도 사실 고종과 안동 김씨의 정치권력다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테니, 이는 이후 일제의 비교대상으로 지목되었던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가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았는지를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처음부터 이를 계산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헤이그 특사가 실패하고 일제의 침략을 침략으로 인정받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외세에 국가를 내주면서까지 내 배때기에 기름을 끼게 만들겠다'는 친일파의 시조들이 벌인 초딩짓 때문이었음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이는 정말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이 얼마나 세계정복을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인데, 결국 이 당시 일본 편을 들었던 영국은 일본이 '설마' 4억 인구의 영국을 칠 거라고는 꿈도 못꾼 채 방심했다가 캐발렸다. 만일 일본이 처음부터 조선과의 '전쟁'으로 첫 단추를 끼웠다면 영국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만큼 일본을 얕보았을리가 없었을것이다. 만국평화의회에서 발언권이 한층 불리해질것임은 물론이었다.)

이런 이유로 세계사에 대한민국 침략사는 전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8월 15일이 종전이 아닌 해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권을 빼앗긴 거라고 교과서에도 나와있듯이 말이다. 본격 전쟁은 청일전쟁, 러일전쟁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청나라가 캐발린 이유는 조총 때문도 아니고 청나라가 병신이어서도 아니라 우리나라가 정말 맘먹고 상대국 침략전쟁 일으킨다고 치면 정말 잘나갈수밖는 천혜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옛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 알겠지만 수도가 국내성, (즉 지금의 신의주를 기준으로 압록강 상류쪽 꼭지점 부근) 눈앞에는 압록강과 옆에는 백두산을 필두로 한 개마고원이 떡 버티고 있다. 농성에는 이민한 곳이 없다. 이 곳을 베이스로 전쟁을 일으키면 아무리 대군이라도 침략 루트는 제한적일수밖에 없고 상대국은 소모전 빼고는 딱히 답이 없게 된다.(고구려의 후손 발해민족이 옛 고구려의 그 광대한 영토를 되찾는데는 채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신생국이 불과 1세기도 안되는 기간에 얻은 영토치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러일전쟁은 두만강 끝자락, 청일전쟁은 압록강 끝자락, 바다를 끼고 있으니 옆구리 치기도 안되니까 대군이 아무리 많아도 정체만 될 뿐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천혜의 요지를 일본이 군사로 내리누르려 했다면? 청일전쟁으로 군사력을 전부 압록강 근처까지 대치하던 와중에 가뜩이나 개김성으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았던 조선 국민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신중하게 정권을 차츰 침탈해가는 것은 물론 공포 정치를 통해 이렇다할 분란을 일으킬 것을 적절히 차단했어야 했다. 물론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친일파의 시조분들의 혁혁한 친일 행적 덕분임은 역사에 너무나도 잘 나와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국제재판소에서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상 판정을 받기가 힘이 든 이유도 이 전쟁의 직접적인 책임에 대한 회피를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각종 증거들을 일본이 속속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침략전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첫번째이고 두 번째가 국제법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각종 조약 문서 때문이다. 물론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시발점은 누차 강조하듯 '친일파 시조'분들의 절대적인 공적임에 다르지 않다. 즉 친일파들의 한치 앞을 내다보지 않으신 눈 앞의 권력욕으로 인해 벌써 3대 아니 5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이 한 짓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못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옛 이야기'일 뿐이라며 애써 후손의 면책을 주장하시는 친일파의 후손분들에게 우린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