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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09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5장-광신도는 왜 생기나요?
posted by RushAm 2013. 4. 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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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교가 없는데요.

요즘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개독'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만행들이 자주 보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과격행동이나 여행 금지된 국가에 가서 납치당하고, 과도한 전도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요. 왜 이들은 이렇게 광신도가 된 걸까요? 종교는 정말 실체가 있고 믿을만 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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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광신도라는 건 굳이 종교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죠? 뭔가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하거나 무분별하게 특정 사실을 신봉하고 추종하는 데에도 쓰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종교와는 관계가 없어요. 그럼 여기에서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요. 과연 저 종교인이 아님에도 광신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추종하는 그것도 종교인건가? 아니면 더 포괄적으로 종교라는 것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 말이죠.



한마디로 말하면 종교는 실체가 없는 것을 믿는 것에 기반해요. 모든 종교는 현재 실존하지 않는 것을 책이나 유물 등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어요. 따라서 종교는 굉장히 희미하면서도 또렷해야만 하죠. 실체가 없는 걸 믿어줄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언제나 이 종교라는 것은 '사물'이나 '서적', '음악' 등 뭔가 실체화된 것들에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이 강한데요.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셨겠지만, 결국 종교라는 것은 토템, 흔히 말하는 국지적 미신이나 우상 숭배라 불리우는 것들을 포괄할수밖에 없고 토템을 포함한다는 의미만으로 이미 종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권력'화 되고 '정치'화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광신도들이 생기는 이유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요? 일단 한번 들어보세요.


...


종교는 왜 필요했을까요? 인류는 태초부터 먹고 살기 바빴고 이미 지금도 먹고 사는 문제에서 크게 자유로운 나라는 몇 안되는데도, 오히려 종교는 못사는 나라일수록 더 굳건한 신앙심을 보이고 있다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해요 그렇다면 결국 답은 인류가 '못살기 때문에' 종교가 생겨났다고 보는 편이 좋을거에요. 인류는 태초부터 지구최강생물이 아니었고, 늘 생존의 문제와 싸워야 했던 생태계의 중간 이하급 약자였거든요. 근데 인류는 태초부터 다른 포유류보다 좀 더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어요. 바로 생존을 위해 다른 생물을 이용하는 '사육'의 능력과 무엇이든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해낼 수 있는 '상상력'이 그것이에요.



그래서 초기 종교는 중하위권 수준의 열악함을 인정하고 생태계의 강자를 숭배하는 이른바 '동물'이나 채집의 대상이 되는 산이나 강 등의 자연환경에 대한 토템 형태가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굉장히 원시적이고 주류 종교들에게 '우상 숭배'라며 비웃음을 당하고 있지만, 사실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은 주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결국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절대 강자를 숭배함으로서 자신의 신변과 인생을 구제받으려는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니까요. 뭐 딱히 실체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종교가 토템의 형태에서 지금의 주류 종교 형태로 진화하게 된 계기는 인류가 사냥과 채집에서 '경작'과 '사육'으로 삶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에요. 자연이 주는 선물을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자연을 이용해먹기 시작하면서 삶의 문제를 좌우하는 주체가 '인간 스스로'가 되어버리니 더 이상 '맹수'나 '자연'을 숭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거죠. 대신 새롭게 숭배해야 할 대상이 생긴 것이 바로 '날씨'였어요.



태양이 한껏 내리쬐면 날이 가물어버리고 경작물은 말라죽어버리죠. 고스란히 한해 농사를 망치게 되면 인류는 1년간 식량난의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강이 범람해서 농작물을 쓸어가버리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에는 뭐 말이 필요없을거고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식량 문제가 좌우될 '날씨'문제에 대해서는 인류가 스스로 개척하지 못할 것으로 어기고 절대적인 숭배를 하기 시작해요. 전 세계 모든 종교의 기초가 되는 이른바 '하늘'숭배의 시작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하늘'숭배의 문제점이 있었어요. 숭배할 대상이 없다는거에요. 하늘은 가본 사람도 없고 날씨가 왜 그렇게 변하는지, 날은 왜 갑자기 가물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홍수가 나버리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원인도 이유도 모르다보니 숭배를 한다고 해서 뭔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숭배를 하면서도 뭔가 아리송하단말이죠. 바로 이때부터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서 숭배하는 형태 즉 지금의 주류 종교가 태동하기 시작해요.


태양의 신 호루스


하늘 숭배 이전의 종교 역시 강이나, 산 혹은 큰 동물들을 숭배하던 것이었기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얻기보다는 자기만족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면 숭배 대상이 하늘이 되고 이 하늘이 인류의 생존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도록 바뀜으로서 종교의 역할도 크게 바뀌기 시작해요. 예전에는 종교를 관장하는 제사장의 역할이 단지 어떤 숭배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정한 룰에 따라 숭배하는 것에 그쳤다면 이제는 그 숭배한 것에 대한 결과를 내야 하는 '책임론'이 대두되기 시작한거죠. 만일 제사장이 말한 대로 열심히 했는데 날씨가 안좋고 태풍이 몰아쳐서 결국 흉년이 들면 제사장은 그 책임을 져야만 했어요. 제사장은 '정성이 부족했다'는 식의 인지부조화적인 변명을 몇 차례 할 기회를 얻긴 하지만 아무런 바탕 지식이 없이 대자연을 예측하고 컨트롤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거에요.


제사장들에게 닥친 일대 위기는 그들을 스스로 진화시켰어요. 그들 스스로 신뢰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을테니까요. 하늘을 공부하고 날씨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언제 비가 내리고 언제 태풍이 몰아치며 언제 가뭄이 드는 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고스란히 문명화되기 시작하죠.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예측해낼 수 있을 정도까지 발전하고 나니 어느 정도 그들의 말이 적중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신뢰도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어요. 


그런데 당시 제사장들이 얻은 이 지식의 파급력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쏠쏠했다는것이, 결국 제사장의 말 대로 날씨가 예측되기 시작하면 하늘을 숭배하던 당시 종교 문화에 비추어볼 때 제사장은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굉장한 계급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거든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 부분인지라 제사장의 말이라면 껌뻑 죽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처지에 놓인 이상 제사장이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거죠. 제사장의 위치는 빠르게 권력화되어갔고 그들의 말은 곧 신의 전언이 되어 사람들을 컨트롤하기 시작해요. 그들에게 곡물을 비롯한 수많은 공물이 쌓이는 것은 당연했겠죠. 그렇게 쌓인 불로소득은 곧 부의 권력화를 낳게 되고 결국 제사장의 권력은 국가 통치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이 냥반입니다.


...


권력은 독점할 수 없어요. 필연적으로 투쟁을 낳게 되죠. 그 투쟁의 형태는 다른 나라의 침략일수도 있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봉기일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봉기를 일으키는데에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기존 왕권이 이미 종교 그 자체였고 사람들이 그 종교의 교리를 따르고 있는데, 다른 나라의 침략이건 내부에서 일어나는 봉기였던 간에 결국 왕에게 도전한다는 건 '신에 대한 반항'이 될 수 밖에 없었던거에요. 아니 그렇다고 아예 규정해버리는 편이 나았죠. 적어도 왕의 입장에서는 말이에요. 이른바 '대의론'이 시작된거에요.


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 종교를 더 복잡하고 숭고하게 만드는데에 최선을 다해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신격화하죠. 이에 왕들은 한술 더 떠서 아예 신은 없고 내가 바로 신이며 내가 죽어서까지 늬들을 통치할 것을 엄명하기까지 해요. 한번 깨진 힘의 균형은 좀처럼 회복될 조짐이 없이 계속 격차를 벌리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왕족들은 자신들을 보다 신격화시키기 위해 화장을 했으며 그들의 신화적 사상을 대중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여 구전시키기 시작해요. 물론 이 소설 내용은 터무니없고 비과학적이었지만, 당시 대중들의 우매한 지식 수준으로는 반박하기 힘들었을거에요.



절대적인 숭배와 충성을 다짐하고 그에 굴복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부당함을 설파하고 봉기를 이끌어내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이미 봉기는 '신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되어 버린 이상 봉기를 필요로 하는 쪽이든 침략을 하는 쪽이든 필연적으로 해야 했던 것은 '새로운 종교'의 주창이었어요. 구 종교와 신 종교의 충돌은 이렇게 침략과 침략사, 봉기와 국가 분열 등 여러 가지 역사를 낳게 되죠.


날씨를 종교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집트는 결국 나일강변의 이상기후로 인한 가뭄으로 인한 종교적 갈등으로 멸망했고 종교를 배척한 힘의 정복활동을 펼쳤던 로마 제국의 '로마 국교'정책도 결국 392년 로마 카톨릭을 국교로 개종하면서 멸망의 시작을 알렸는데요. 이 사이에 낀 인물 한 명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종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물이자 종교의 체계 자체를 송두리째 바꾼 인물... 


'예수'


...


그는 '신의 아들'이며 자신을 '신이 보낸 사람'으로 소개했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까지 숭배되던 모든 교리를 비판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교리가 옳다고 설파했어요.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행동이 종교 국가관에서는 결국 '반역' 행위였고 그를 반역자로 몰아가는데에 사회적 저항은 아무것도 없었죠. 저도 그와 같은 세대를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도를 새로운 교리로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시대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인류가 점차 학문에 눈을 뜨게 되면서 기존 종교가 가지고 있던 이른바 '독점적 지식'의 영역이 위협받기 시작했던 시기와 예수의 등장은 거의 정확히 맞물려요 신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대한 문제보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는 '철학'의 발전은 그 정점이었고 이 철학은 단지 철학으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고대 과학을 수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었어요. 특히 천문학의 발전은 고대 종교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죠.


그동안 그들에 의해 날씨가 조절된다고 믿었던 이집트는 공교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어요. 하지만 정말 수많은 사람들에게 뿌리가 박혀 버린 종교의 색깔을 빼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과 진통을 수반해야만 했죠. 과학적인 입증으로 종교의 허상이 발가벗겨지긴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숭배의 대상이 필요했고, 그 뒤로는 왕권의 연립 없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치하게 되는 역사가 시작되는거에요.


그렇게 인류에게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모양새'가 상식화되어 굳어지게 된 거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가 어떤 '모양'과 '철학'이 대단히 고착화되어있는것처럼 지금 보기에는 구교가 매우 비과학적이고 구태의연해보이지만 당시에는 그 철학이 지금의 종교 철학과 같은 수준으로 고착화되어 있었다는 거에요. 다시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의 종교에 대한 '관념'과 동떨어진 종교를 칭하는 '사이비'나 '이단'이라는 말로 배척하지만 정작 우리가 지금 상식화되어있는 종교 개념이 당시에는 '사이비'나 '이단'취급을 받았다는 거에요. 


한마디로 예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단'이었죠. 그는 그동안 실체가 없었던 하늘 숭배에서 실존 인물의 숭배로 종교의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 인물이었어요 이른바 '메시아론'은 지금도 그로 인해 만들어진 수많은 이단과 교주들이 자신들이 혹시라도 있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하게 되죠. 신약은 해석하기에 따라 예수 생존 당시 받았던 핍박이나 지금 사이비 교주들이 받는 핍박이나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예수의 전략은 '복고'전략이었어요. 예수는 뿌리박힌 '이집트'종교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종교의 뿌리를 자극하는 식으로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이집트의 멸망과 팔레스타인지역의 로마 수복으로 이렇다할 종교를 모두 배척당했던 그들에게 있어 이런 잠재된 원론적인 부분을 설파하는 예수는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진리였던거죠. 


그런데 그가 주창하는 종교는 이미 과학으로 부정당한 '날씨'얘기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집트의 종교가 완성되었을때에 주창되던 '사후 세계'를 좀 더 각색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죠. 한마디로 당시 과학은 물론이고 향후 어떤 과학으로도 증명하기 힘든 부분을 교리의 핵심으로 만들었던 최초의 인물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문제, 이른바 '개인주의'를 교리로서 융합시킨 종교를 만든 사람이 되는 거에요. 이 두 가지가 융합하면 결국 '사후 세계를 위해 지금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귀결되는데, 결국 이 한 마디로 축약될 수 있는 논리가 많은 사람들을 지금까지도 매료시키고 있는 거죠.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해 지금까지 나오는 모든 종교는 '사후 세계'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아요. 이는 결국 종교 이외에 어떤 과학으로도 사후 세계 즉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마치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신의 등장이 '날씨'에 대해 알지 못하는 지식을 독점하여 민중을 선동하는 식으로 종교를 이용했다면 기원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종교의 대한 철학이나 개념은 결국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과학적으로 아직 증명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논하고 있는 유일한 '가설'이라는 점을 '떡밥'으로 내세우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의 종교는 생명공학, 그리고 진화론과 대척점에 있을 수 밖에 없어요. 날씨의 비밀이 까발려지면서 망했던것처럼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죽는지가 교리 설득의 최후의 보루일수밖에 없는 종교계는 이를 적대시하는 것이 당연할수밖에요. 종교계는 언제나 자신들의 논리가 인류의 발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지식을 배척해오면서 살아남아왔던 것이 실존하고 있는 역사이며 지금은 그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삶과 죽음과 관련된 연구를 종교적인 이름으로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존립성을 지켜나가고 있는거에요.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제 진짜 광신도 얘기


종교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종교 전쟁의 맥락은 무엇이었을까요? 결국 말이 '성전'이지 결국 모양새는 침략전쟁이거든요. 종교는 어느 나라에서나 그 나라의 존엄성을 가늠하는 절대적 위치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21세기가 와서도 인도에서 관광객조차 먹으면 안될 음식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대부분의 종교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포교에 목적을 두고 있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타락한 십자군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권과 정복사업을 정당화하는 추악한 모습이 대부분이에요. 특히 이런 모습은 전혀 문명이 발전되지 않은 원주민 인디언들의 대륙을 구 대륙 사람들이 침략해서 정복할 때 주로 신격화되곤 하죠.


이따위 신화도 있어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한창 남미와 북미를 털어먹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로마 교황청으로 쫄래쫄래 달려가서 '우리가 저 땅 먹었으니까 우리 영토라고 선언해줘'라고 떼를 쓴 거였어요. 로마 교황청은 어이없게도 잔혹한 학살과 문화 말살의 참혹한 정복전쟁을 거친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그들의 식민지로 선언해주죠.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카톨릭'이 정작 보편적 가치인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자들의 손을 들어줬다는거에요. 


그들은 식민지를 미개의 세계로부터 구원한 '메시아'라는 주장을 펼쳤어요. 누가 봐도 그 나라의 문화를 말살하고 영토를 늘리기 위한 확장 사업에 불과한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서 말이죠. 사실 이는 포장 그 자체가 아니라 아직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에게 정복자들인 자신을 '신'으로 포장시키기 위한 부분도 포함되요. 토템 신앙조차 가지지 못했거나 그 문명의 학술적 발전이 더딘 자들에게 카톨릭 같이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류가 수정되고 다듬어지며 새로 쓰여진 빈틈이 비교적 적은 완벽한 소설을 읽어주면 훨씬 설득이 쉬웠을 테니까요. 마치 이집트 파라오가 그랬던것처럼 정복자 그들 스스로가 신이 됨으로서 정복활동과 식민지 노예화를 손쉽게 거둘 수 있는 그들로서는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었을거에요.


교황 옆에 앉은 사람은 무솔리니라는 사람이에요. 우와 교황이 상대할 정도면 참 훌륭한 사람이겠죠?


너무 먼 얘기라 잘 이해가 안간다고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역사는 얼마든지 있어요. 민족의 시조 단군 할아버지를 보세요. 탄생 신화가 환인이라는 신이 곰이 사람이 된 여자 환웅과 결혼해서 낳은 사람이 단군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이게 진짜냐 거짓이냐는 집어치우고 왜 이런 얘기가 생겼을까요? 우리나라 대한민국 반도에는 단군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요? 아니었을거에요. 우리 할아버지는 단군보다 훨씬 더 오래 전 사람이었을수도 있어요.


단군은 외지인이었어요. 외지인은 아무래도 원주민들보다 문명도 더 앞서있었고 원주민들이 보기에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그들을 우러러볼 수 밖에 없는 위치적 한계도 있었죠. 그런데 이 원주민들이 본능적으로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한 개김성만큼은 투철했을거거든요. 뜬금없이 족장도 있고 부족 체계로 잘 돌아가고 있는 곳에 외지인 불청객이 떡 하니 와서 '이제부터 내가 늬들 지도자다'라고 선언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바보가 있을라고요.


우와 우리는 하늘의 자손이었어!


단군이 만약 여기에서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하고 점령했다면 아마 실패했거나 성공했더라도 수많은 반란에 시달려 결국 터를 잡기가 어려웠을거에요 (단군할아버지는 일단 터를 잡긴 성공했잖아요. 노래가사에도 있듯이) 사실 역사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 단군이 친화정책을 먼저 쓴 다음 자신을 신격화해서 스스로 왕이 되는 철학 정책을 취했는지, 강력한 문명으로 압도하여 무력으로 공포정치를 취한 다음 이를 미화시키기 위해 신화를 써서 역사를 왜곡시켰는지는 말이에요. 확실한 건 그들은 '신화'를 남겼고 그들은 '종교'를 이용해서 외지인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한반도를 정복했고 최초의 왕으로 기록하게끔 만들었다는거에요. 참 훌륭한 사람이네요


이런 역사는 단군에서 끝나지 않아요.. 단군이 먹었던 땅은 엄밀히 말하면 요동 반도지 지금의 남한 지역은 아니거든요. 남쪽으로 가보면 그 뒤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기죠, 삼국 시대 여기에서 시작되는 고구려의 동명왕 신화도 환인이 등장했던 단군 신화랑 크게 차이가 없이 어쨌든 하늘의 사람이 낳은 아들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죠. 인물만 조금 바뀌어있고 그들이 활동하던 활동 무대가 요동 반도가 아니라 도읍지인 압록강을 낀 국내성 일원이라는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죠. 과연 이런 말도 안되는 신화를 대체 왜 만들었을까요? 그냥 1대 왕이 되었다. 라고 기록하기엔 뭔가 역사적으로 앞뒤가 안맞았거나, 뭔가 감추고 싶은 역사가 있었을수도 있겠죠? 혹은 자신들을 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했어야 할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던가요.


백제의 건국은 사람이 거의 없는 땅에 나라를 세운 셈이니 신화가 없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박혁거세 역시 아무런 지역 배경이 없는 외지인이었으니까 이런 신화가 필요했는지도 몰라요.


건국 신화는 결국 침략 전쟁을 미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에요. 콜럼버스의 달걀은 유명하지만 그가 아메리카를 정복하느라 수많은 인디언들이 학살되었다는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종교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끌 수 있어요. 다만 그들 자체가 국가를 세우려 들지 않아요. 이집트의 교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그들은 왕권과 연합하여 그들이 '왕을 임명'하는 역할을 하게 되죠. 신이 그를 왕으로 만들었으므로 국민들은 이 왕을 따르는 것으로서 신을 추앙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의 논리를 설파하는 것인데 지금으로 보면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보이는 이런 의식이 국민들에게 너무나도 잘 먹혔고 그 순간 왕은 곧 '신'이 만들어주는 것이며 이 나라는 신을 위해 지켜야 하는 나라가 되는 거에요. 


그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이기는 것은 왕(신)을 위한 것이요. 그들이 다른 민족에 의해 침략당하는 것은 우리의 신을 모독당하는 것이므로 신을 위해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상은 왕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안정적인 권력을 선사했어요. 종교는 그때부터 이미 정치화되었고 권력에 빌붙어왔으며 이를 결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죠. 심지어 지금까지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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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라일수록 종교에 대한 신념이 두터운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가난하기 때문'이에요. 가난하면 할수록 먹고 사는 문제에 더 민감해지고 그럴수록 돈을 주고 배워야 하는 지식보다는 돈을 주지 않고 배울 수 있는 지식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많은 종교들이 세운 미션스쿨들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죠. 왜냐, 사람은 가난하면 할수록 생명공학이니 뭐니 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보다 단지 '농사' 즉 먹고 사는 문제에 더 집중할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결국 고대 이집트처럼 숭배 대상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데에 주저함이 없게 되니까요.


그들이 종교에 빠지게 되는 또 하나는 '현생'에 대한 비관이에요. 지금의 종교는 모두 '사후 세계'와 '좋은 환생'을 미끼로 걸고 있어요. 현생이 어렵고 비관적인 사람은 육체적인 자살을 선택하거나 종교에 귀의하므로서 사상적인 자살을 택하는거죠. 물론 이런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일수록 압도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고 가난한 나라에서 종교가 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거에요.



많은 나라들이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지면서 종교의 영향력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개독이니 뭐니 하며 기독교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들은 그럴수록 절박해지게 되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안된다고, 마치 나라를 빼앗기는 듯한 위기감을 갖게 되죠. 특히 그 종교에서 충분한 지분 (나라로 치면 벼슬) 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그 위기감은 더욱 팽배해질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더욱 종교를 폐쇄적이고 광신적으로 만들어 결속력을 다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죠. 종교가 이단이면 이단일수록 사이비면 사이비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극심해져요. 


다른 의미로는 봉건주의 국가를 소망하는 자들의 욕구 충족에 이용되기도 하지만요.


결국 지금의 종교는 예수가 만들어낸 소설 '신약'에 기반을 두고 그 신약에 별 시덥잖은 메시지에 의미를 두고 그것을 해석한 자들을 지도자로 한 수많은 교파들이 서로 자신의 해석이 맞

다며 싸우고 있는 형국이거든요. 그런데 정작 그 소설은 빠르게 발전하는 생명과학에 의해 속속 거짓임이 까발려지고 있고, 사람들은 점차 먹고 살기 좋아지면서 종교에 관심이 멀어지고 있어요. 그들의 해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원전이 워낙 비과학적이고 부실한지라 정작 형체가 분명했던 종교가 점차 신기루적이고 뜬구름잡는 교리로 변질되고 있어 믿는 사람만 믿을 수 있는 억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고요. 


예수님의 친구.jyp


그래서 그들은 다른 종교를 공격해요. 적어도 '종교를 믿을 가능성'만큼은 있는 자들을 자신들의 종교로 끌어들이는게 종교를 아예 안 믿는 사람들을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쉽거든요.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불교에 대한 테러나 불교 비방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죠. 종교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서로 뺏고 빼앗는 와중에 신도는 점점 줄어들고 마치 졸아붙는 냄비 물마냥 최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게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종교에요.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을 엄한 교리로 옭아매고 광신도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말이죠.


그들은 그나마도 모자랐는지 '국가적으로 종교를 잘 믿는' 국가를 골라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해요. 여행 제한 국가도 아량곳하지 않고 말이죠.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들은 그렇게 해야 하며 성서에 그렇게 하라고 쓰여있다고 나와 있다며 말이에요. 또 한편으로는 특정 목사를 예수님의 친구라며 추앙하기도 하고, 특정 교주를 메시아라며 추앙하기도 해요.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범죄도 어마어마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죠.




우리는 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할까요?


종교는 마음의 양식이에요.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요? 네 맞아요. 독서랑 똑같아요. 종교는 아주 잘 쓰여진 소설을 제각각의 시점으로 읽으며 그 소설에서 얻을 게 있는 사람들은 얻고 얻을 게 없는 사람은 얻지 않아도 되는 아주 자유로운 조직이 되어야만 해요. 왜냐하면 그냥 소설일 뿐이거든요. 누가 봐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비현실적으로 미화하면서까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사람이 쓴 소설이고, 그 소설이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곁들여지면서 덧붙여지고 멋대로 수정되어가며 원전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지경까지 이른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참고하면서 읽으면 될 거에요.


그 소설에는 좋은 말이 많아요. 우리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말들 많죠. 그런데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고 심지어 죽어서까지 잘 된다는 식의 논리로 현세계의 많은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하며 심지어는 빼앗기고 당하면서까지 살 필요는 절대 없다는거에요. 그저 '책 참 잘 봤습니다, 이 책으로 전 인생에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는 의미의 기부금을 낼 수는 있지만 말이에요. 



삼국지 떡밥 나오면 별의별 해석 다 나오는 거랑 다를 게 없어요. 그 해석들이 저자별로 제각각 다른 내용을 통해 책으로 나온 게 벌써 한트럭이잖아요. 성서나 불경도 크게 다를 바 없어요. 종파 역시 그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임일 뿐이고요.



...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여러분의 인생, 삶과 죽음은 여러분거에요.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을 다른 누군가에게 바치지 마세요.



...그게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

 

 


공화국 사회교과서 제 5장-광신도는 왜 생기나요 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