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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05 공화국 신년사 – 미생과 국제시장 8
posted by RushAm 2015. 1. 5. 14:32

작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드라마 미생, 그리고 2014년 연말부터 2015년 연초까지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국제시장 혹자가 말하듯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의 가혹함을 구구절절히 보여주며 당신은 아직 완생이 아닌 미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가혹했던 과거를 실제로는 가혹하지 않고 오히려 잘된 삶, 이른바 미생을 완생이었다고 최면을 거는 것 둘 다 모두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드라마이며 영화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선악은 없다. 만듦새라곤 형편없고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그 영화를 만들었다거나, 보는 사람들이 뭔가를 착각해서 쓸데없는 눈물을 흘리건 특별히 상관은 없다. 어쨌든 그 영화, 드라마로 인해 자살인구가 줄어든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나 그것들을 정치에 이용해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미생을 보지 않고, 국제시장을 보지 않고 말하는 자들을 위해 잠시 그 두 작품을 본 감상과 내가 정치인이라면 그 둘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 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 두 작품이 세대와 연령대가 비록 갈렸을지언정 대한민국을 열광시키고 있는거라면 분명 그것이 지금의 민심일것이며 그 민심 속에 문제의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미생에 열광했는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칭찬에 목말라있다. 칭찬이라는 물건은 하나도 듣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듣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고래마저 춤추게 만드는 마약이기 때문이다. 이 칭찬이라는 물건의 본질은 의외로 위로와 많이 닮아있는데 이른바 영혼없는 칭찬이 되지 않으려면 그 사람이 무엇에 가장 어려워하고 있으며 그 어려운 와중에 무엇을 해냈는지를 캐치해내야만 한다. 답정너 이론처럼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이 칭찬받고 싶은 분야가 반드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미생은 그런 젊은 세대들에게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칭찬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즉 이 작품 자체로 지금 고통받고 있는 각개각층의 젊은이들이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미생 만화 그리고 드라마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이 드라마와 만화가 잘 된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화제가 되고 있다는 부분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나 혼자 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나 뿐만 아니라 내 옆사람도, 윗사람도, 아랫 사람도, 부모가족들도 다 한번씩은 볼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그들로부터 그랬구나~ 네가 저렇게 힘들었구나 라는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일말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게 된다.

 

물론 이 드라마로 인해서 실제로 무언가가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건 이미 좌절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칭찬이 무척 고프다. 헛소리로 가득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따위에 너무나도 지쳐있다. 신기루 같은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활자공해 자기계발서에 신물을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론 당장 그들에게 긴급처방을 내리던 아니던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과 국가비전임에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이미 그것이 당장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당장 받을 수 있는 것, 비록 잠시 언 발에 오줌을 누는 정도의 따스함이겠지만 그마저도 급하기에 그들은 이 드라마로 인해 어렵게 얻은 반전의 찬스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왜 미생에 열광하면 안되는가?

 

문제는 이 드라마와 이 드라마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을 바라보는 정책 실무자, 즉 정부의 생각이다. 서두에도 말했듯이 이 드라마로 인해 무언가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이 드라마를 보고 진짜 무언가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를 가지기에는 이 드라마가 가지는 현실고증적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이 드라마로 인해 정부가 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매우 큰 거부감이 든다. 비단 모 언론이 멋대로 작명해버려 실제로 정부가 그렇게 작명한 것으로 굳어져버린 장그래법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말이다.

 

윤태호 작가가 ‘정부가 정말 만화를 다 보고 이 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반응을 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정부처럼 단순무식하고 보수적인 집단은 이 만화를 모두 정독하기도 어렵거니와 정독하려는 시도를 해서도 안된다. 이 만화 속의 세상과 그 만화가 가지고 있는 여론 파괴력에 중독되어 미생이라는 프레임에 완전히 갇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미디어가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도가니의 사례를 들며 이러한 미디어의 역할에 순기능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도가니방지법이 새로 제정되기는 했지만 도가니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당시 도가니 사건이 당시 법 체계가 허술해서 발생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미디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인기영합주의에서 벌어진 입법경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사법력의 강화에서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그래법의 탄생 배경 역시 이러한 국회의원들의 인기영합주의에서 나온 여론몰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으며 장그래법이라는 네이밍 자체에서 나오듯이 그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데에, 혹은 비정규직의 근속 기간을 늘리는한마디로 2년 안에 해고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에서 급조한 법이라는 점이 공분을 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들에게 어떤 계기로 인한 입법과 그로 인한 문제해결이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을 정도니까

 


입법은 특정 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편리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사법은 절대적 중립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개념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법을 입법하는 것 이상의 부담을 수반한다. 비록 지금의 사법체계가 지극히 한쪽에 치우치고 있어 특정 계층에 희생과 손해를 강요하는 체계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채로 오랫동안 굳어져있다면 그것은 이미 이득을 본 쪽에서 자신의 몫이라고 단정해버린 뒤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에는 단지 지금의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범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하는 매우 큰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그런 어려움에 직면한 가운에 등장한 드라마 미생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간신히 지금의 사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기성세대들에게 어필하고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움직임의 동력을 얻은 셈이다. 어쩌면 기성세대와 젊은세대간의 오랜 세대의 벽 두께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열 마디 말 중 한 마디 정도는 귀를 기울이게 만들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대단하신 입법도, 당장의 체감가능한 변화도 아닌 그저 자신들 세대들이 살아가는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공감대로서 나누길 바랬던 것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와버렸다.


...



사람들은 왜 국제시장에 열광하는가?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 연령대 중에 과연 이 영화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의 기성세대들을 칭찬한다. 당신이 살아온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미생이 지금을 사는 현실의 젊은이들에게 지금 사는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주고 때론 칭찬해주는 드라마라고 한다면 국제시장은 지금까지의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아온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말해주고 때로는 칭찬해주는 영화다. 관객들은 비록 자신의 삶과 완벽하게 닮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의 삶 중 극히 일부분, 영화 장면 중 극히 소량의 분량 속에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것이 영화의 결론에서 삶의 모든 부분을 일컬어 잘못 살지 않았다라는 키워드를 던짐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칭찬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들어주는 영화가 되어준 셈이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중 장년층 관객들은 정말 다양한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모든 관객이 전쟁에 참전하고 또 파독광부로 파견되는 인생을 살아왔을 리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그 시대를 살아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생이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국제시장은 기성세대로 하여금 저 시대에 살고 있었던 모든 아버지 들에게 우리는 지금 젊은 세대들이 고생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심한 고생과 핍박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마치 영상실록처럼 담아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 역시 마음속으로나마 지금의 젊은 세대 못지 않은 스팩타클한 젊은 시절을 살아왔다는 점을 회고하는 선에서 그칠 뿐이지 달리 이 영화로 인해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미생을 보는 젊은이들처럼 그들 역시 단지 이 영화로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를 살아왔던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대변하고 이해받을 지도 모를 마치 오래된 앨범 속 자신의 젊고 멋진 시절의 사진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 정도에 그칠 뿐이다.

 

얼마 전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 90년대에 나왔던 가수들의 명곡과 그 당시의 무대들을 그 당시의 가수들이 부르며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모처럼 TV앞에 모여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무엇인가? 무엇이 TV조선밖에 보지 않는 부모님들을 TV앞으로 끌어당겼을까? 그리고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지금의 10대들에게 90년대 가수들이 밀레니엄 가수들보다 더 나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만큼 음원은 폭발적이지 않았고, 부모님들은 무한도전이 끝난 뒤에 주저없이 TV조선으로 채널을 다시 돌렸을것이다 세대간 공감대 형성은 잠시간의 신기루는 가능할지언정 아직은 벽이 두껍고 차갑다는 것을 자각하는 정도에 그친 것을 보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국제시장에 열광하면 안되는가?

 

보수단체와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적는 뉴스미디어들이 잇따라 이 영화에 대해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촉구하며 기성세대를 인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인정이란 무엇일까? 기성세대들이 이 영화로 인해 무언가 변화가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미디어들이 이렇게 당신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부추기면 문제가 매우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지금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의 관계는 상위 1%가 나라 전체의 80%를 쓸어가고 남은 20%를 가지고 뻇느냐 빼앗기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현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사회적 지위 상 은퇴 후 자영업의 길로 들어선 대다수와 일부 회사에 남아 사원을 선발할 권력을 가진 임원이 되어 있거나 혹은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대부분 부동산 버블 때 끝물에 물려서 혹은 잘못된 주식투자나 금융기관의 트릭에 빠져 모아둔 재산을 까먹고 있는 세대들이다. 자신의 집값이, 주식자금이 곧 노후자금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언젠가 투자한 원금이라도 되돌아온다는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현실을 버티고 있다.

 

결국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공통된 부분은 회사 혹은 가게의 손익이 곧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을 가늠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내수가 침체되고 나빠질대로 나빠진 경제와 그에 따른 금리 하락, 그리고 치솟는 물가와 세금으로 인해 불안한 노후에 겁을 먹고 있으며 하도 집값 하락과 주식투자에 하소연 한 마디 못하고 자산을 털려본 경험이 있어서, 자기자산손실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피 같은 내 돈’


 

그런 기성세대들에게 보수 미디어들은 이 국제시장 영화에 가능한 큰 의미를 부여하도록 유도한다. 당신들은 이 영화를 통해서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고 지금을 살면서 그저 징징거리기만 하는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지금 그들이 받는 고통은 우리가 받은 고통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필할 것을 종용한다. 이쯤되고 보니 그냥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그로 인한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던 기성세대들을 동요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그때 당시도 마찬가지로 내 집을 갖는 것이 정말 어려운 시대였으며 젊은 시절에는 푼돈 받고 일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부당한 처우에도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만 하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 그리고 그 생각을 어떻게든 기성세대들에게 회상하도록 만들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하소연에 다시 한번 우리 때는 그거보다 더 했어라는 지극히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이 한마디의 파급효과는 세대간의 빈부격차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세대간 간극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그들의 권리 주장을 대신 막아줄 총알받이를 자청하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들은 당장 들어가는 자영업에서의 아르바이트 임금과 주휴수당에 대해 공론화되고, 집값 현실화와 부동산 정책을 외치며 빚을 내서라도 자신들의 집을 사주지 않고 버티는 젊은 세대들에 대해 내 재산을 가져갈 생각만 하는 도둑놈들이라는 적대적 감정을 갖게 됨으로서 문제 해결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인 기초경제의 반목을 만들어낼 것이다.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알바비가 아까워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다시금 젊은 세대들의 최저임금 현실화나 노동 환경 문제 개선에 대한 정책에 심정적인 반대가 이어지게 된다. 비정규직 문제는 그깟 고생 조금 하고 징징대는 꼬락서니로 보일 것이며 노동운동은 우리 때였으면 그냥 때려잡았어야 할 빨갱이들일 뿐이다. 이렇게 다시금 기성세대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변화는 결국 젊은 층도 기성세대도 아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빨대를 빨아대고 있는 상위 1%의 공고함만이 남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기성세대들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네가 겪었던 고생, 충분히 알아 

그런데 젊은 놈들은 너만큼 고생하지도 않고 저러고 돈을 달라고 하고 있잖아

그게 맞는걸까

적어도 너만큼은 고생을 겪게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네 젊은 시절이 덜 억울해지지 않겠냐고?

 


 

지금 필요한 건 마약이 아니라 항암제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의무와 부당함에 대해서는 겪기 전과 겪고 난 이후가 판이하게 다르다. 겪기 전에는 내 자신의 일로서 그 부당함을 타파하는데에 적극적이 되지만 정작 그것을 모두 겪고 이제 더 이상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이 된 다음에는 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내가 겪은 것보다 그 다음 사람이 덜 고생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 군대가 딱 그렇다. 아직도 술자리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더 부당하게 군생활을 했다는 것에 대한 자랑배틀이 벌어지고 군 문화 병영 개선에 대한 정책이 나오면 그들 중 일부는 당나라 군대냐며 그들의 처우가 자신이 있었던 때보다 나아지는 것에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단통법 실시가 공론화될 때, 이 법에 반대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실시 3개월이 지난 지금 단통법은 아직까지 큰 여론적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비교적 순항중이다. 여기에는 제 값을 다 주고 산 사람들과 제 값을 다 주고 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 값을 다 주고 산 사람들이 가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이번 단통법으로 인해 아무도 싸게 사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하면서 그동안 적대시했던 이른바 휴대전화 구입 능력자들이 손도 못쓰고 데꿀멍하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이 법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여론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미생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간극만을 집중 조명하며 비정규직이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환경만을 조명했다. 정규직이 된 수많은 동료들은 비정규직인 장그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던 차장급 간부는 비정규직인 장그래를 위해 사표까지 던지는 기행을 보인다. 드라마 혹은 만화의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픽션이라기에는 다소 힘빠지는 결말이다. 지금의 회사 환경이 주는 문제점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측은해하거나 혹은 차별하고 배척하는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측은하게 볼 정도로 비정규직의 처우가 형편없다는 데에 있다.

 

미생에서 그려지는 정규직의 모습은 정말 장그래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안정적인 모습이었는가? 정규직이라고 해서 장그래보다 더 일찍 퇴근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정규직이라고 해서 회사로부터 특별히 인격모독을 덜 당하거나 스트레스를 덜 받는 모습 역시 없었다. 어떤 정규직 사원은 아버지 환갑 가족여행을 회사의 어처구니없는 대우에 포기해야만 하고, 어떤 간부직원은 임신 출산하는 것과 아이를 보육하는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조차 조직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등 회사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옭아매는 어리석은 모습뿐이었다.

 

비정규직 장그래의 임금 통장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그들에게 낙은 단 하나, 비정규직보다 낫다는 단 하나의 우월감 뿐이다. 적어도 비정규직보다는 생존의 위협을 덜 받는다는 믿음 하나로 회사에 메여 있으면서 종신고용도 보장되지 않는 지금의 환경에서 무엇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지도 모르는 채로 회사가 자신을 갈아마시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이미 IMF를 겪었고 일본식 종신고용제 기업문화가 파괴된 이상 정규직이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정규직일 수 없다. 정규직을 고용함으로서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급여 이상으로 높지만 그만큼 정규직으로 일함으로서 회사로 인해 자신의 삶과 시간을 희생하는 비중 역시 비례해서 늘어날수밖에 없으니까 사실상 정규직 문제는 회사나 근로자 양쪽 모두에게 지금 시점에서 결코 메리트를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 향상이다.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반드시 정규직보다 동일 노동 대비 낮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법제화되어있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채용의 수요 공급 전권을 거머쥔 기업의 이익과 편리성에 의해 주물러지고 있는 것에 다르지 않기 떄문이다. 여기에는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람들의 유일한 엑스터시 비정규직보다 낫다라는 부분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회사가 준 마약 비정규직에 대한 지위적 우월감에 취해 정규직으로서의 권리 향상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스스로 꿰매버린 지금의 정규직과 기성세대 임원들의 반 상생적 관념 역시 일조하고 있다.

 


기업들은 달라진 경영 환경에서 비정규직이 필요하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이 만약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같은 임금이었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결국 그들은 달라진 고용 환경을 핑계로 단가가 하락할대로 하락한 비정규직을 더 싼 인건비로 채용할 수 있는 환경만을 바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과 품위 그리고 지금까지 회사에서 살아온 권력과 짬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발밑에 깔고 갈 정규직이 몹시도 필요한 사람들이다. 비정규직은 그런 정규직을 달래주기 위해 먹이는 사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것이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아먹을 정규직이 없으면 회사는 밑받침 뿌리가 없이 꼰대 간부들만이 설치는 망조 직전의 회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원이 하나도 없는데 대리가 어떻게 대리일 수 있으며 과장이 과연 지금의 과장이 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한층 한층 무너지면 사장은 더 이상 사장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온다. 아무도 일은 하지 않고 일은 할 줄 모르면서 시킬 줄만 아는 자들이 간부로서 돈만 받아가는 회사, 그런 회사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누구도 회사를 위해서 희생하지 않고 돈만 챙기고 책임감 없이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준비가 충만한 사람들로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한 회사가 말이다.

 


우리가 주장해야할 것은 전 인구의 정규직화가 아니다. 같은 임금이라도 보다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떤 회사든지 간에 내가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하고 쉬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인생의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미생을 보고 해결하겠다는 얼빠진 소리 대신에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느끼게 만드는 문제들을 철저하게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할것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부러워하는 만큼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부러워하는 상호간의 장단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데에 정부가 아닌 기업이 스스로 나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규직이 되어서도 인생 자기결정권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육아휴직과 안식년, 연차의 자유로운 사용 등 보다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시키는 무리수보다 단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파급효과만으로 말이다.


...

 

인생 자기결정권

 

지금의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의 적은 임금만으로는 결코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인생결정권을 갈아넣고서라도 정규직으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그런 그들에게 날아오는 혹독한 정규직 회사생활은 응당 견뎌야할 필수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저 그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밀려나면 더 나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못하고 심장에 고름이 쌓여가면서 말이다.


 


기성세대들은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영화 국제시장은 그런 그들에게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론들은 그런 기성세대들에게 젊은이들도 너와 같은 고생 정도는 거치고 너정도는 살게 해주어야 공평하지 않겠어? 그래야 네가 덜 억울할 것 아냐?라며 그들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공평하게 갈아넣는 것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며 유혹하고 있다.

 

전 국민이 인생 자기결정권을 포기하는 날이야말로 지금의 1%기득권 축제의 날이 될 것이다. 회사가 필요한 시기에 결혼하고 회사 일에 지장 없는 시기에 애를 낳고 애를 기르면서 회사 일에 지장이 없어야 하며 내가 몸이 아파도 회사에 나가야 하며 모든 일에 회사가 우선시되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나의 생활, 취미, 인생 철학, 가족과의 화목함 등이 하나 둘씩 회사에게 갈아먹히며 살아간 뒤에 남은 인생조차 보장해줄 필요가 없는 1%의 파라다이스 우리는 어쩌면 얼마의 돈을 주고서라도 살 수 없는 20 30 40대에 누려야 할 다시 못 올 그 순간들을 회사에 갈아먹히면서도 그에 대한 응당한 대가조차 외치지 못하고 숨죽여 살고 있지는 않았는가? 아니 그렇게 숨죽여 살도록 방치한 정부는 없었는가? 그렇게 숨죽여 사는 사람을 마음껏 갈아마실 수 있도록 해달라며 정부에게 침묵과 방관의 대가를 지불한 1%는 없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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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대한민국은 인생 자기결정권을 헌법이 보장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거 어렵고 거창한 일 아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위 하 동일 노동을 했을 경우 동일 임금으로 임금 차등을 없에는 것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인생자기결정권이라는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권리, 내가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가치가 향상될 때 비로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것이다. 그것을 오롯이 희생하고 들어온 정직원에 대한 대우도 당장의 비정규직 차별로 인한 일시적인 우월감을 주고 갈아넣는 재료로 보는 지금의 시각보다는 훨씬 더 인간다워질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미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당한 기성세대들에게 고작 영화 한편으로 자기위안을 벌이라며 부추기는 작태는 때려치우고 적어도 몇십년간 정부를 믿고 하라는 대로 이 나라으 밑바탕에 자신의 인생을 갈아넣어준 기성세대들에게 OECD 사상 최고수준의 노인빈곤률로 되갚는 변태짓거리로 보답하는 짓거리보다 진정으로 그 인생 자기결정권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희생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야만 한다. 혹여 그들이 갈아먹힌 대가가 엉뚱한 새끼들한테 처먹혔다면 토해내게 만들어서라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세대간의 반목 조성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총구를 세대끼리 겨누게 만드는 작태는 이제 작작 집어치울때도 되지 않았는가?

 

인생 자기결정권은 임금 몇십 %정도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가격에 팔지도 말아야 한다. 인생 자기결정권을 희생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정규직 근무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라, 비정규직만 못한 정규직의 대가를 임금차이로 퉁치고 인간으로서의 인생을 너무 쉬이 포기하지 말지어다.

 


모쪼록 새해에는 그대들의 인생이 오롯이 그대들의 것이길 바란다.



2015.1.5

Rus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