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3. 12. 27. 14:18

도가니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의 소재가 매우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 소재가 매우 충격적이도록 느껴지게 만드는 데에는 무엇보다 감독의 역량과 배우의 연기, 각본과 편집이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는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화 그 자체의 완성도가 확보되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 변호인에 높은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이런 영화는 '공감대'라는 것을 반드시 밑바닥에 깔고 들어간다.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의 의로운 삶에 대해 조명하고 그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 영화가 도가니와 다른 점은 변호인의 경우 이미 노무현에 대한 '감동'을 어느 정도 안고 가고 있었던 반면 살인의 추억이나 도가니같은 사회 고발 영화의 경우는 사전에 관객들이 그 사건에 대해 인지하고 보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변호인은 굉장히 많은 잇점을 가지고 개봉한 작품이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공감대를 파고들었을 때 터질 수 있는 흥행 효과의 집대성을 우리는 최근 개봉한 '써니'의 흥행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


서태지가 오랜 공백을 깨고 솔로 1집을 내놓을 때 당시 음반사였던 '삼성뮤직'이 내놓은 캐치카피는 '태지가 듣고싶다'이다. 결국 변호인도 '노무현이 보고 싶다'라는 캐치카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부림사건이 얼마나 질이 안좋은 사건인지보다 노무현의 개인적 일대기를 더 많이 부각시키려 애썼고, 당시 서슬퍼런 전두환 정부의 학생 탄압 배경과 그의 부당함을 부차적으로 전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에 대한 전제조건 즉 '메시지 자체의 무결성'을 제외한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냐는 질문에 변호인은 딱히 '그렇다'라는 답을 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다. 서태지의 1집이 그 시끌시끌한 화제성과 판매량에 비해 곡 자체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노무현이라는 꺼풀을 하나 벗겨놓고 보면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서 감독이나 그외 스테프에게 좋은 평가를 줄 수가 없는 작품이다. 



디 워가 개봉할 당시에도 그랬다 사람들은 조금 최면에 걸린 듯이 마치 의무적으로 봐야 한다는 듯이 영화 한 편을 보는 데에 '나라를 위한다는'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영화를 경건한 마음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그 당시 디 워에 대한 영화에 대해 예술적인 평가절하를 했던 진중권은 집단최면에 걸린  자들에게 집중포화를 맞고 한동안 구설수에 시달린 바 있다. 필자는 변호인이라는 영화에 '디 워 보다 나을 것이 없는 영화'라는 평가를 주고 싶다. 디 워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처음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처럼 실화 그리고 노무현 그리고 민주주의 그리고 지금의 국민적 열망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영화적 완성도는 턱없이 부족하기 짝이 없다. 노무현이라는 재료는 매우 훌륭해서 아무 요리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으며 민주주의와 반공에 대한 반감성 그리고 현 정부에 대한 간접적 비판이라는 요리 레시피는 굳이 요리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훌륭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훌륭한 재료들을 요리로서 망쳤다고 보는 편이 합당할 것 같다.




충무로에 탄압받았던 인간 심형래를 위해 디 워를 보던 사람들과 지금 변호인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소소한 부분을 제외하면 큰 틀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그들은 영화가 주고 있는 너무나도 훌륭한 재료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기회에 감동하고 있다. 영화가 그 재료를 정말 훌륭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어서 지금의 좋은 결과를 내고 있느냐면 그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영화로 인해서 사람들이 작금의 현실을 인지하고 지금의 정부에 비판적 시각을 조금이라도 견지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영화는 영화 자체의 평가는 저 먼 곳으로 가 있고 오직 정치적 기준만으로 평점이 오락가락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굳이 변호인 영화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지금의 흥행이 진정 '영화를 잘 만들어서'라고 영화 관계자들이 자평할 수도 있다는, 따라서 앞으로의 영화계가 은밀하게 위대하게나 7번방의 선물처럼 영화의 완성도는 뒤로 하고 클리셰의 파괴력에만 집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다. 천만 관객이 들어서고 영화 산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에 좋은 재료빨로 거둔 성적에 자뻑하는 영화사 및 관계자들에게 일침이 분명 필요하다. 변호인의 흥행이 영화계가 그리고 제작자들이 샴페인을 터뜨릴 일로 자평하게 된다면 곤란하다. 변호인은 영화 그 자체로서 거둔 흥행 성적은 지금의 성적의 1/10도 될까말까하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




26년, 화려한 휴가같이 현 기득권에 맞서내는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변호인도 지금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실제 사건과 인물에 대한 감정과 평가를 벗겨낸 다음 영화만이 남았을 때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물론 기득권들이 아무도 영화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 만들어지는 한계는 명확하기에 26년이나 화려한 휴가는 주어진 조건에 비례해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정작 변호인의 경우는 국내 최고의 흥행배우와 국내에서 제일 핫한 배급사를 끼고 스크린 수 확보도 충분했으며 소문 역시 제대로 나 있었다. 변호인은 이렇게 잘 깔려진 멍석에 걸맞는 완성도를 보여줄 의무가 있었다. 감독은 인생 작품을 만든다는 각오로 임했어야 했고, 구성작가도 조금만 더 집중해서 만듦새를 다듬었어야 할 작품이다. 영화는 천만 관객을 말하고 있지만, 앞으로 이런 영화는 대충 만들어도 천만은 깔고 간다는 인식이 굳어진다는 현실이 무섭다. 앞으로의 영화판이 영화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소재싸움과 클리셰 전쟁이 될 거라는 생각, 그것은 결국 한국 영화의 일본 방화화를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일수록 더 잘 만들어야 한다.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어떤 사명을 가진 미디어일수록

그 사명에 의존해서 흥행을 기대하는 짓은 매우 위험하다.


손석희 뉴스는 '공정한 뉴스'에 앞서 '잘만든 뉴스'이다. 공정한 뉴스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공정하면서 잘 만든 뉴스'는 없었다. 만일 손석희 뉴스가 그저 공정하기만 했다면 지금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일수록 그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흥행으로 거둘 수 있는 모종의 정치적 목적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영화에게 맡기는 것도 좋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 자체는 별도로 두고 냉정하게 나누는 문화가 자리잡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