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5. 19:09
사람이 식물과 다른 점은 식물은 어떤 정해진 조건만 갖춰주면 크는 것은 알아서 잘 하는 반면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몸만 커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사 표현과 외면으로 표출되는 내면을 함께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가 없냐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대화나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아니라 당장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고 생각해보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누가 만들고 누가 먹을 쌀을 생산해줄 것이며 반찬의 원료는 누가 만들어줄 것인가? 아니 좀 더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 지금 여러분들이 이 글을 보고 있는 모니터와 컴퓨터의 전기는 누가 생산해낸 단 말인가? 한마디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걸 서로 합의 하에 잘 해나가기 위해 돈을 만들고 그걸 교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으며 서로가 가진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기 위해 예의라는 것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 즉 예의는 사람이 사는 데에 있어서 자유를 억압하고 기를 죽이는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살아가기 위해 혹은 살아가기 편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국영수 못지 않게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 예의 라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서양에도 매너라는 표현이 있으며 문명과 동떨어진 뉴기니 원주민들조차 자신들만의 의식을 통해 예를 갖춘다. 그래야만 내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고 상대방이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사람이 성장했다는 것은 이 예의를 모두 배워 이제 더 이상 그 예의를 모르기 때문에 무례한 행동을 했을 때 부모라는 이름의 보호자가 AT필드를 쳐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의라는 게 스무살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탑재되는 것이 아니라 스무살까지의 삶 동안 꾸준히 지속적으로 몸에 베고 정신에 박히고 심장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걸 우리는 '다 컸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요즘 스무살을 넘긴 사람들 중에는 도무지 20년이라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시간 동안 도대체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건 굳이 스무살만을 예로 들 필요가 없다. 전체적으로 정체되어 있다. 8살 어린이도 도무지 8살의 정신상태로는 안보이는 일이 허다하고 학생들은 학생대로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마치 실내에서 관상용으로 길러지는 토마토마냥 물만 먹고 영양제만 듬뿍 발려 때깔들은 점점 좋아지는데 이게 도무지 상품가치가 없어보이는 것과 비슷하다랄까? 흙밭에서 비바람 맞아가며 세상에는 4계절이 있고 비도 오고 눈도 내리고 바람도 분다는 걸 좀 알아야 알이 실해질텐데 이들에게는 그럴 생각도 그럴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애니콜 리포터 사건 역시 도무지 크지 않은 아이들이 벌인 참극이다. 흔히 미취학 아동들을 가리켜 '집안에서 군림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내가 먹고 싶은건 뭐든 다 가져다주고 하자는 건 다 해주고 싫다는 건 다 커트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가정에서는 이 미취학 아동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자들이 십수년간 몸만 키워 주민등록증을 얻어 어른대접을 요구하며 이 사회에 속속 진출하고 있으며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단지 수천년동안 반복되왔던 '기성세대들이 걱정하는 버릇없는 젊은이'의 개념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미취학 아동의 생떼는 '젊은이들의 변화 요구'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법적인 권리를 갖추고 있고 누구도 이들을 강제할 수 없다. 자 이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단지 눈에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피부에 와닿을 만큼 이들의 생떼는 범위가 점점 광범위해지고 있는데 이를 제지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다. 언제까지 이들로 인해서 20년을 헛되이 하지 않은 젊은이들까지 세대째 싸잡아 비난을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건 부모들의 책임이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일이 커져버렸다. 이제 그들은 이미 성인이다. 성장 과정이 어떻든 관계없이 그들이 직접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후 벌어지는 어떤 사회적 현상으로 인한 불이익이 일어날지언정 그것이 법적으로 불합리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본인들이 직접'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건 부모들이 대신해줄 수도 이미 부모들이 모두 자신들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프로로서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미션을 받고 한 일이라면 그 일이 잘못되었을때의 책임은 주최측이 아니다. 이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만일 삼성이 주최측으로서 모든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면 나이제한을 두지 않았겠지만 분명 대학생이라는 충분히 성년에 가까운 나이제한을 둔 만큼 이번 일의 책임을 기업 혹은 부모 등 '제 3자'로 흐리지 않기를 바란다. 모쪼록 이 사건이 '한 톨의 조작 없이' 모두 까발려지길 간절히 바란다. 리포터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책임조차 모르고 갔을 20년 묵은 미취학 아동들은 그걸 충분히 각오해야만 한다.
뱀발. 이건 미수다의 루저 사건과는 팩터가 전혀 다르다. 미수다는 녹화방송이고 방송 내용의 책임자는 작게는 치프 프로듀서 크게는 편성국장이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삼성이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견학을 간 게 아니라 삼성이 돈을 주고 그들에게 현장 분위기와 대회 내용을 전달하라는 미션을 내린 것이다. 삼성이 김연아 호텔에 찾아가라고 시켰다던지, 사적으로 금메달리스트들의 휴대전화번호를 따라고 하지 않는 한 모든 돌발적 행동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다. 게다가 리포터라는 직책은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미디어적 가치를 지닌 내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위치를 갖는다. 그것이 설령 미니홈피에 게재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비공개 글쓰기가 가능한 게시판에서 공개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은 이미 리포트적 성격을 지니는 셈이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삼성은 분명히 자발적인 이성적 판단히 가능한 연령대를 뽑았고 이들이 선발 과정에서 잘못되어 기업 이미지에 손해를 입었을지언정 이들이 개인적인 행동으로 촉발된 개별적 피해까지 모두 감싸줘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국영수 못지 않게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 예의 라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서양에도 매너라는 표현이 있으며 문명과 동떨어진 뉴기니 원주민들조차 자신들만의 의식을 통해 예를 갖춘다. 그래야만 내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고 상대방이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사람이 성장했다는 것은 이 예의를 모두 배워 이제 더 이상 그 예의를 모르기 때문에 무례한 행동을 했을 때 부모라는 이름의 보호자가 AT필드를 쳐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의라는 게 스무살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탑재되는 것이 아니라 스무살까지의 삶 동안 꾸준히 지속적으로 몸에 베고 정신에 박히고 심장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걸 우리는 '다 컸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요즘 스무살을 넘긴 사람들 중에는 도무지 20년이라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시간 동안 도대체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건 굳이 스무살만을 예로 들 필요가 없다. 전체적으로 정체되어 있다. 8살 어린이도 도무지 8살의 정신상태로는 안보이는 일이 허다하고 학생들은 학생대로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마치 실내에서 관상용으로 길러지는 토마토마냥 물만 먹고 영양제만 듬뿍 발려 때깔들은 점점 좋아지는데 이게 도무지 상품가치가 없어보이는 것과 비슷하다랄까? 흙밭에서 비바람 맞아가며 세상에는 4계절이 있고 비도 오고 눈도 내리고 바람도 분다는 걸 좀 알아야 알이 실해질텐데 이들에게는 그럴 생각도 그럴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애니콜 리포터 사건 역시 도무지 크지 않은 아이들이 벌인 참극이다. 흔히 미취학 아동들을 가리켜 '집안에서 군림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내가 먹고 싶은건 뭐든 다 가져다주고 하자는 건 다 해주고 싫다는 건 다 커트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가정에서는 이 미취학 아동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자들이 십수년간 몸만 키워 주민등록증을 얻어 어른대접을 요구하며 이 사회에 속속 진출하고 있으며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단지 수천년동안 반복되왔던 '기성세대들이 걱정하는 버릇없는 젊은이'의 개념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미취학 아동의 생떼는 '젊은이들의 변화 요구'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법적인 권리를 갖추고 있고 누구도 이들을 강제할 수 없다. 자 이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단지 눈에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피부에 와닿을 만큼 이들의 생떼는 범위가 점점 광범위해지고 있는데 이를 제지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다. 언제까지 이들로 인해서 20년을 헛되이 하지 않은 젊은이들까지 세대째 싸잡아 비난을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건 부모들의 책임이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일이 커져버렸다. 이제 그들은 이미 성인이다. 성장 과정이 어떻든 관계없이 그들이 직접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후 벌어지는 어떤 사회적 현상으로 인한 불이익이 일어날지언정 그것이 법적으로 불합리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본인들이 직접'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건 부모들이 대신해줄 수도 이미 부모들이 모두 자신들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프로로서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미션을 받고 한 일이라면 그 일이 잘못되었을때의 책임은 주최측이 아니다. 이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만일 삼성이 주최측으로서 모든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면 나이제한을 두지 않았겠지만 분명 대학생이라는 충분히 성년에 가까운 나이제한을 둔 만큼 이번 일의 책임을 기업 혹은 부모 등 '제 3자'로 흐리지 않기를 바란다. 모쪼록 이 사건이 '한 톨의 조작 없이' 모두 까발려지길 간절히 바란다. 리포터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책임조차 모르고 갔을 20년 묵은 미취학 아동들은 그걸 충분히 각오해야만 한다.
이 정도면 이미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각오를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뱀발. 이건 미수다의 루저 사건과는 팩터가 전혀 다르다. 미수다는 녹화방송이고 방송 내용의 책임자는 작게는 치프 프로듀서 크게는 편성국장이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삼성이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견학을 간 게 아니라 삼성이 돈을 주고 그들에게 현장 분위기와 대회 내용을 전달하라는 미션을 내린 것이다. 삼성이 김연아 호텔에 찾아가라고 시켰다던지, 사적으로 금메달리스트들의 휴대전화번호를 따라고 하지 않는 한 모든 돌발적 행동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다. 게다가 리포터라는 직책은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미디어적 가치를 지닌 내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위치를 갖는다. 그것이 설령 미니홈피에 게재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비공개 글쓰기가 가능한 게시판에서 공개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은 이미 리포트적 성격을 지니는 셈이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삼성은 분명히 자발적인 이성적 판단히 가능한 연령대를 뽑았고 이들이 선발 과정에서 잘못되어 기업 이미지에 손해를 입었을지언정 이들이 개인적인 행동으로 촉발된 개별적 피해까지 모두 감싸줘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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