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04. 9. 26. 04:02
연예인의 대표주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역시 가수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 오죽하면 탤런트들조차도 멀티플레이어 아이돌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음반을 내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정도로 가수라고 하면 그야말로 누구나 주목받는 대중적인 우상이라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자신의 명예, 인기를 위해, 스타성을 위해, 그냥 가수라는 직업이 탐이 나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점차 한국 가요계의 경쟁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순수성을 가져야 할 가수라는 직업이 다른 직업 연예인 소속사의 사업 영역 확장으로 이용되고, 가창력보다는 쇼 프로그램에서의 재치와 얼마만큼의 TV 출연으로 인한 홍보 여부가 성공의 척도로 등장하면서 원래 그 무대에 있어야 할 재능 있는 수많은 유망주들이 홍대, 영화음악계를 전전한다. 우리나라 애니음악도 비슷한 맥략에서 그들의 도피처, 혹은 소위 밤무대라 불리우는 야간업소와 비슷한,
마이너리그의 개념으로서 성장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데뷰 때부터 메이저 음반 기획사의 홍보 수단으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는 옆나라의 애니음악과는 사뭇 다른 형태지만, 일본도 충분히 그러한 시기를 겪었다. 옆나라라고 해서 처음부터 애니 인프라가 높았던 것도 아니고, 지금도 애니음악이 대박흥행의 보증수표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다 반짝스타로서 생을 마감하는 가수들이 부지기수로 애니음악계를 거치는 것을 볼 때 애니음악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수준에서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정여진
이름으로 듣기에는 다소 생소한 이 가수, 우리가 항상 어떤 TV프로그램을 볼 때나 일반인이라면 스텝롤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이는 애니메이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열성적으로 정말 1초나 제대로 나올까 말까 하는 스텝롤을 바삐 읽어내려갈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 매니아가 아니라면 당연히 정여진이라는 이름은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가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듯, 그녀의 목소리는 누구나 어딘가에서 한번 정도는 들어봤던 것처럼 아련하게 우리 기억속에 남아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영화 체인지의 테마곡과, 투니버스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의 번안곡을 두루 맡기 시작하면서부터지만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애니음악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전설적인 보컬이라 불리울 만큼의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무려 27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녀의 애니메이션 데뷰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필자 본인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 전자인간 337, 똘이장군, 그레이트 마징가, 빨간머리 앤, 보물섬, 로보트 킹, 개구리 왕눈이,요술공주 밍키,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 시대를 유년기로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정말 정겨운 동요처럼 기억되고 있는 그 음악들이 모두 그녀의 보컬로서 불리웠던 것들이다. 그녀 나이 5세부터 시작된 애니음악 인생 27년, 어린아이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애니메이션계에서 제대로 된 음악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동안 그녀는 한번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고, 지금도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노래를 불러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녀가 불러 온 애니음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녀가 인정받기까지는 정말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선적으로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가 아동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의 권리 회복에 또한번 수 년이 걸렸다. 가수라는 직업, 연예인으로서 대중에게 존재가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공인이라는 개념이 매스미디어 도입 당시부터 굳어져 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귀천을 잣대질당하며 성장해왔던 음악들, 그 속에 애니음악이 있었다. 아직도 애니음악의 자체작곡 비중이 높지 않는 상태에서 수많은 애니음악 보컬들이 가수들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갖지 못하고 원곡 그대로 따라서 불러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에 이들의 음악성이 인정받기에는 아직 많은 어려움이 있고, 최근에서야 애니음악 업계 자체를 주목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가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보다 고취시키고자 마치 정치인이 득표유세를 하는 식으로 반짝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번안곡 가수라는 딱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애니음악인들에 대한 편견의 시각은 쉽게 나아지기는 힘들 것이다.

세상 일 쉬운 게 하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믿고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면서도 일의 귀천, 직업의 귀천을 매기고 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을 찾아 취업난 속에서도 사무직을 선호하는 사회, 음악계도 이러한 개념에서 1류 2류를 나누고 인기가 가늠되며, 사람들의 관심도
차이가 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애니음악을 하는 보컬들이 2류,3류라 칭할 정도로 가창력면에서 메이저 가수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메이저 가수들에게 정말 각양각색으로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새로운 음악장르를 지닌 곡들만을 부르게 했을 때 얼마만큼 그 곡들을 소화할 수 있을까? 팝, 발라드 가수가 힙합을 하면 자연스러워 보일 리가 없고, 록가수가 트로트를 부르면 트로트만의 감칠맛이 나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특별히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매 작품마다 애매모호한 곡 색깔을 가지는 애니음악들을 꾸준히 평균 이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가수가 그리 흔하겠는가? 매 레코딩때마다 듣도보지도 못한 희안한 음악들을 보컬로서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은 1류 2류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창력의 기준으로 평가가 불가능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중의 평가는 자신의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극명하고 때로는 매우 냉정하게 스타를 만들어내고 퇴물을 걸러낸다. 연예계를 치열한 격전지로 만드는 것은 연예인 본인들이 아닌 대중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연예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TV에 나와서 한번이라도 대중들에게 얼굴을 내밀고, 내밀었으면 자신의 얼굴이 한번에 기억될 수 있도록 소위 말하는 ‘끼’를 보여주어 존재를 각인시키는데에 열중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가요프로그램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다는 그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그 사실과 그들이 TV에 한번 더 나왔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일 뿐, 특별히 음악으로서 그들을 기억하기는 힘들다. 이렇듯 연예인들마다 각자의 정체성이 흐릿해지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장인이라 불리울만한 연예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표현하지 못할 아쉬움일 것이다. 연기를 겸하고 있는 가수, 연기자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출시했던 수많은 탤런트들, 그들이 과연 10년 후에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노래 잘했던 탤런트?, 연기 잘했던 가수?, 사람의 능력은 200%라는 오버 페이스 속에서도 언제나 1이라는 능력을 부여받으며 그것이 어떤 한 분야에 전부 투입되지 않고 분산되면 그 존재감은 희미해질 뿐이라는 것을 당장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전설이라는 의미가 현대에 와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로 최대한의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것은 연예인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의 누구라도 생각하고픈 인생의 성공이란 달디단 열매의 맛이 아닐까?, 그 성공이 부와, 명예 그리고 대중적 인기로 한정되기 보다는 가수로서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가수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를 바라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열망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에서 성공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가장 큰 행복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녀, 정여진처럼 말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9. 16. 00:15
가장 간단한 속담을 예로 들어도 두 마리 토끼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흔하게 쓰이고 있을 정도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어떤 부분이든 간에 본인 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아니 스스로에게 그렇게 주문을 걸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르지만, 두 가지 꿈을 쫓을 수는 없는 것이라 항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항상 소설, 드라마, 심지어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인생극장이라는 콩트를 통해 일탈을 즐기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사실 보통 고역이 아니다. 기자들은 기자들 나름대로 뭔가 기사를 흥미있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가야 하는데, 대체로 제작진들이 말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취약점을 보이는지,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드는 느낌은 올림픽 금매달을 따고 돌아온 유도 선수를 인터뷰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별히 평가절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작품에 대해 언론에게 밝히는 소견의 특색이 크게 없다는 것, 아무튼 보통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예술론’ 을 펼치는 사람과 ‘상업론’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 대중문화론’ 을 주창하는 식의 두 가지 정도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국내 제작진들의 대부분이 이마저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상품이건 손때가 묻는 발명품이건, 메이저 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한 작품이 있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만한 물건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본인의 작품 활동에 있어 ‘대회용’과 ‘대중성’은 철저하게 구분지으며 작품 세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가지 제약 모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만을 만들어서는 충족하지 못하는 것들, 즉 하나의 제약으로서 애니메이터의 가치관을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인프라가 넓지 않아서인지, 그런 고생을 겪고 싶어도 못 겪는, 이른바 ‘강제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제작자 지망생, 실제 제작진,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조차도 본인들의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작품 속에 십분 발휘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심미적 부분에 공을 많이 들여 국내 외 애니메이션 축제 기준에 걸맞게끔 작품성을 다듬은 후 그렇게 만들어진 ‘대회용’ 작품을 공개했을 때 ‘대중적인 흥행’을 노리기까지 한다.

TV 문화 산업에 대한 특집을 논하는 프로그램, 마고 21의 오세암 제작진 인터뷰가 프로그램 중반부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을 논하는 단계에서 등장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제작진이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한국 애니메이션이니까 재미 없을거야! 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안 보는 걸 저희가 어떻게 합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정말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마고 21이 오세암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사람들이 많이 봐 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되려면 어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묻고 싶었다. 제일 가까운 SICAF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경쟁부분 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작들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극장에 걸릴 때, 어떤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단지 그림자놀이로, 단순 종이인형, 클레이, 흙으로 표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돈 7000원을 내고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그런 작품들은 비교 대상이 다르니 자처하고서라도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는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가 그렇게 모든 해외 상을 다 휩쓸었다고 광고에 홍보를 거듭하고 영화 프로그램에서 줄기차게 소개해도 전국 관객수 5만을 못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점도 없었단 말인가? 그들이 오세암을 두고 한 홍보 전략 중 ‘해외 수상작’ 이외에 다른 흥미 요소를 끌 수 있는 무엇이 있었는가? 모성애를 찾아 떠나는 두 남매? 그것이 정말 극단적으로 말해서 호쾌하게 날아다니며 불폭탄을 쏘는 건담류 로봇물에 빠진 남자어린이들, 남녀간의 진득한 순정물에 빠진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그것에 견주어 오세암을 택할 수 있을 정도로 흥행성, 흥미 요소가 많았을까? 아니 많았을거라 생각한건가? 자신들의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가치관을 반영하고, 해외 그랑프리에서 수상한 작품을 보고 진정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관객과, 그걸 만든 제작진, 그리고 그 작품에게 상을 준 심사위원 뿐일 것이다.

‘이웃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최근작이라고 볼 수 있는
‘모노노케 히메’ 를 상영하기 전 모 잡지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필자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작품 세계를 지금까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빼놓지 않고 계속 구상했고, 그 동안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을 너무나도 만들고 싶었다.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기에 나는 이제 은퇴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가 토에이, 니폰 애니메이션을 거처 지브리 스튜디오에 오기까지 그의 애니메이션 인생 40년동안 그가 그만의 색깔로서 그만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아마노 요시타카처럼 데뷰 때부터 천재적인 감성과 타츠노코의 지원 하에 자신의 작품관을 마음껏 펼쳐 성공을 거둔 예도 있고, 그 이외에도 곤조의 아이콘 ‘고토 케이지’의 키디 그레이드처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 어떤 애니메이터들일지라도, 흥행성에 기초를 둔 작품 속에서 해외 수상을 거둔 적은 있어도, 해외 수상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흥행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 때에는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작품에 임하며, 이것이 흥행이 되는지에 여부는 관계없이 본인의 자아만족,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카타르시스적 보상 차원에서 접근한다. 즉 애니메이터들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 예술적인 작품을 만드는 행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필자는 이러한 부분을 애니메이터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비애라고 생각하고 있고,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보다 작품성이 다듬어지고 자신이 표현하고픈 것들을 보다 날카롭고 능숙하게 빈틈없이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걸 극복하고, 처음부터 소신껏 자신들의 색깔을 가득 담아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결코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치고는 본인들이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김기덕 감독이 메이저 영화 그랑프리에서 두 차례나 감독상을 받게 된 게기의 작품들이 흥행면에서 어떤 성적을 보였는지를 한번쯤은 깊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강가에 흐르는 도랑도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 양 갈래에 흐르는 물의 양이 다르기 마련인데, 어째서 세 갈래로 가는 물길이 같기를 바라는가? 욕심을 부리지 마라, 자신이 만든 만큼 씨를 거두게 되는 것은 아무리 이 세상이 타락하고 변했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불변의 진리다.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시하고 배척당한다고 탓하지 말고, 그 이전에 오세암에 모여든 10만 관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다. 관객 하나 하나는 당신들에게 있어 흥행성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단지 숫자로 표현되는 입장관객수에 일회일비하지 말고, 그들에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렇다면 당신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고 울분을 토했던, ‘한국 애니라서 무시당하고 상영관이 제대로 없었다는 실패의 변’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치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 온 사람들, 그들에게는 자신만이 표현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이 분명 한 가지씩은 있다. 사실 대부분은 그것을 자신이 애니메이터라는 직함을 가진 직후부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그것이 작게는 같은 팀, 후원사의 사장님, 넓게는 세계적 그랑프리의 심사위원, 나아가서는 많은 수의 애니메이션 관객들에게 그것을 보이고, 그 속뜻을 함께 나누고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서 작품 활동에 임한다. 애니메이션도 결국 사람이 만든 작품을 사람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자신과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0%가 아니듯이 어느 누군가는 당신의 생각을 표현한 그 작품에 만족하고 당신에게 지지를 보낼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너무 성급하게 삼키지 말고,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가 자신이 가진 생각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것 그 이외에는 없다면 진심으로 그 이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제작에 전력을 쏟아라, 유명한 1인 독립 애니메이터 신카이 마코토가 그랬듯 만들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도와준다면 그걸 배워서라도 혼자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정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굳이 타국 작품들과의 차별성만을 강조하여 적대시하고 어렵게 갈 필요는 없다. 산을 오르는데 누군가가 먼저 간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버리고 새로 어려운 길을 닦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일본 애니메이션도 처음에는 디즈니를 의식하기에 바빴고, 스퀘어의 파이날 판타지도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조금씩 우리만의 색깔을 보여주면 된다. 굳이 우리만의 색깔을 가득 집어넣고, 일본색, 미국색을 피하기에 급급하지 말자. 관객들은 아무리 일본, 미국과 똑같은 동화, 똑같은 타이틀을 걸어 놓아도 같은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르는 걸 구분해내듯이 충분히 구별할 수 있으며 , 지금 당장 우리만의 작품을 위해서 머리싸매고 고민해도 지금 당장은 답이 나올 턱이 없고, 사실상 그 답이 나온다 해도 관객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신경쓰지 말고 손이 가는대로 범작이 나오든, 평작이 나오든 줄기차게 한번 만들어보자. 한국영화가 성공가도 이어가는 중에 전부 볼만한 대작들만 가득한 게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평작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범작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문화다. 그 속에서 조금씩 사람들에게 한국 애니만의 참맛을 알려주면 어떨까? 맛있는 달고나를 더욱 달게 만들어주는 건 쓰디쓴 소다라는 것을 말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9. 15. 00:27
"만화주제가라 부르면 촌스럽다 하고 애니메이션 오프닝이라 부르면 감탄하더라."
신해철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얼마 전에 했던 이야기다. 저 말이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음악성이 아닌, 단순히 불리우는 정도에 따라서 가치판단이 달라져야만 하는 국내 애니음악계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창희.
여행스케치 1기 맴버, 투니버스 입사 후 우연한 게기로 인해 애니음악을 맡게 된 이후,
지금까지 이쪽 음악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곡가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는 영혼기병 라젠카의 음악을 맡았던 ‘신해철’의 경우처럼 단순히 기존 가요 장르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사람들은 ‘음악은 좋은데, 이건 애니음악 같지 않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처럼 애니음악아라는 것은 현 대중음악에서 쉽게 활용되고 있는 대분류 장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의 음악적 색깔과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전문 작곡가가 필요한 부분이며, 실질적으로 이 부분에서 두각을 보인 작곡가가 바로 이창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초창기 음악도 사실 ‘애니음악’이라 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음악들이 많았고, 본인 특유의 음악성을 살리기 보다는, 원곡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언뜻 들으면 살짝 리믹스 해놓은 정도에 그치는 수준의 곡들이 많았지만, 점차 이창희 본인이 애니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하고, 애니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음악적 색깔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특별히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없었던 애니음악 분야이기에, 애니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애니음악을 완성시키는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나디아 여는 노래’, ‘카우보이 비밥 마무리 노래’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지금까지 원곡을 번안하던 수준에 그쳤던 투니버스 애니음악에 대해서 시청자들의 반응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박완규’가 불러주었던 ‘카우보이 비밥 마무리 노래’는 이후 박완규가 따로 음반에 수록하면서, 애니 음악이 완성도가 충분히 향상되고 있음을 대중에게 알리는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미소의 세상’, ‘정글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마무리 노래’ 등 보다 애니음악이라는 미묘한 장르에 잘 부합되는 색깔의 곡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 팬들의 높은 지지 속에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음악 음반 'WE' 프로젝트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지금에 이른다.

이제는 ‘만화인의 노래’라는 공식적인 시상 행사까지 가지게 될 정도로 하나의 독창적인 분야로 인정받게 된 애니음악 분야, 이제는 보다 음악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곡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팬들을 즐겁게 한다. 또한 이창희씨 이외에도 애니음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하는 유망한 신인 작곡가들이 많아진다는 사실 역시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국내 애니메이션’이 시장점유율이 낮고, 이제는 나오지도 않는데, 왜 애니음악계를 성장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인과 의견충돌이 있었던 적이 있다. 항상 ‘케이크를 먹을 일이 없기 때문에 생크림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생크림을 사 두면 언젠가 케이크를 만들 일이 있을 때 쓸 수 있다’라는 인식이 비단 애니음악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필히 요구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얼터너티브 음악이 당장 국민 정서에 안맞기 때문에 출시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 보다는 ‘얼터너티브 음악을 하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이 늘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라틴어로 ‘농사짓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항상 씨를 뿌려두지 않으면 원하는 작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중에게 외면 받을 분야에 대한 시각을 다르게 보자. 그 속에 그들만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화 코드가 있을 것이고, 그 문화 코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언제 늘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농사가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는 아무도 모르듯이 말이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8. 25. 05:49
일본 드라마에 대한 필자의 기존 고정관념이란 실로 무서웠다. 에초에 실사라는 매체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드라마라는 하나의 확고한 선을 그어두지 못한 채, 매체의 대세를 따라서 다분히 애니메이션 스토리 같은 이야기들을 억지로 드라마에 끼워 맞추는 지나친 환타지 지상주의를 추구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 평가를 하려 하는, 그것도 비교적 호평을 해주려고 하는 워터 보이즈를 이야기함에 있어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이 녀석을 보게 된 게기도 사실 투니버스에서 정규 방영을 결정하지만 않았더라도 인연이 없을 뻔했다. 수많은 멀티채널시대에 무심코 채널을 돌리는 채널전환중독자들이 꽤 많은 이 시대에, 자신이 원하는 방송에서 오랫동안 채널이 멈추기도 정말 어려운 세상이 되었기에 필자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너무나도 좋아하는 노래가 다름아닌 대한민국 TV에서 흘러나오는 통에, 그대로, 그 곡이 끝날 때까지 채널을 고정시켰다. 福山雅治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虹(무지개), 사실 이 곡을 알게 된 게기는 아주 우연히 구입한 싱글 때문이었지만, 이것이 특정 드라마의 마무리 음악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그때 처음 알았다. 엔딩곡이 막 끝난 후, 정신을 차린 후에야 이제 워터 보이즈 첫 방영이 막 끝난 후 엔딩곡임을 확인했고,이렇게 순전히, 엔딩곡이 마음에 들어 보게 되었는데...

절대 이 놈들이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드라마도 특별히 다른 청춘 학원물 드라마와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다소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스토리에, 억지로 짜맞춘 듯한 급조된 진행,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인공과 히로인의 애정 삼각관계 등, 식상한 요소들은 고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드라마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필자 스스로 이 드라마에 어느 누구 이상으로 과대하게 즐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필자만이 이 드라마를 특별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을까? 지금 막 종영하면서 매 화마다, 눈물까지 날 정도로 몰입하게 만든, 그러나 다른 사람과는 달리 평소 일본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던 필자를 열광하게 만든 워터 보이즈 드라마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

어느 나라나 입시는 존재하지만 입시지옥이라는 단어는 동아시아 3개국 이외에는 특별히 그 단어가 어울리는 나라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매년 50만명가량의 새로운 고 3학생들이 수능과 입시를 치루고, 성공한 사람과 실패자로 나뉘어지는 한바탕의 배틀로얄을 치룬다. 군중 심리라는 것이 심리학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듯, 우리는 월드컵 때, 빨간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조소하고, 그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 스스로도 소외감을 느꼈던 것처럼, 보이지 않은 이 사회적 공동체라는 것은 무서우리만큼 우리의 심리 깊은 곳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파고들어 자리잡고 있다.
OECD국가중 가장 많은 교사 1인당 담당 학생 수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우리 교육 12년동안 지속적으로 ‘개성’이라는 본능을 짓밟는다. 1등만능주의와, ‘공부’라는 공통적 목표를 향하여, 함께 그룹에 합류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끝으로, 끝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가르쳐왔던 선생들과 부모, 그리고 사회 그들에게 배운 대로 충실하게 또 하나의 청춘이 단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공식대로 살아가며, 어째서 1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 채로 지고 마는 젊음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가장 설레이고 가슴 터질 것 같은 감동적인 순간들을 있는지조차 모른 채로 스스로 즐거운 인생이라는 가치관조차 잃은 채 누구나 같은 삶을, 복사된 종이인형처럼 살아가고 있다.

필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워터 보이즈의 갖가지 명장면들, 왠만한 사람들은 어째서 그 부분이 그렇게 즐겁고, 감동적일 수 있는지 의야해한다. 어째서 저들이 저토록 저런 일에 필사적인지, 마지막 공연을 하기 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버리는 주인공이 왜 그토록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싱크로나이즈를 하고 싶어하는지를 모른다.

당신은 고등학교 때 축제라는 이벤트에 대한 추억이 있는가? 혹은 전혀 인정 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손가락질할지도 모르는 외도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가 ‘외도’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을 외도라고 외치지 않고 ‘나만의 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지금도 정말 후회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는가? 필자는 정말 아무 죄도 없이 자신들의 사는 길을 선택할 기회를 금지 당한 채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잘 사는 방법의 교과서대로, 그들이 원하는 인재들만을 뽑기 위한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나게 놀아난 우리나라의 청춘들이 정말 눈물 나게 안타깝다. 자신이 진정 어려운 학창 시절 속에서도 학교 내에서 ‘즐거움’이라는 추억을 남기지 못하고 졸업이 순도 100% ‘해방’이라는 코드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우리나라 학교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워터 보이즈의 그들만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특이한 일들을 학창시절 때 도전했고, 그들처럼 교감, 그리고 교장실에 처 들어가서 내가 하고싶은 것이 무언지 당당하게 이야기했으며, 결국 누구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축제 때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던 그것으로 당당하게 전교생, 그리고 방문자들에게 가장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노라고, 그리고 지금 아직 늦지 않은 젊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교장실 문은 절대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다 학생과로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예의를 갖추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에 대해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라, 생각 없는 교장들이 많은 세상이라서 그것이 어떻게 그들에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자신의 인생관을 부정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경험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데에 있어 가장 소중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리고 용기가 있다면, 같이 할 친구가 있다면 자신의 인생, 그리고 젊음, 가치관이 아무리 남들과는 다르고,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마이너하다 하더라도 당당하게 도전하라, 단지 그것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자라난 교사들을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그걸 해보지 못한 교사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인생에서만큼은 당신들에게 배워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운이 좋았건 그대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간에 성공의 단맛을 느꼈다면 그 순간 누구의 신경도 쓰지 말고, 누가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누구의 가르침도 듣지 말고 오로지 젊음이 시키는 대로 마음껏 기뻐하고, 마음껏 성취감을 즐겨라, 그 성취감에 중독된 당신은 다시금 그 성공의 맛을 보기 위해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을 당당히 제끼고 당신만의 인생을 누구보다 당당하게, 누구도 모르는 즐거움을 홀로 간직한 채로, 누구보다 제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 드라마가 고전이 되어서 시중에서 접하기도 쉽지 않을 때가 오겠지만 한번쯤은 보라, 당신도 이 드라마를 보고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나온다고 해서 당신은 이 드라마가 일본에서 제작될 당시 의도된 본래의 목적, 우리나라보다 몇 배는 최악이라 말할 수 있는 일본의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고, 또 보낸 후의 사람들을 이러한 환타지로서 대리만족을 시키면서, 자신의 학창시절을 한탄하고 나이를 먹어버린 현실을 후회하며 흘리는 눈물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워터 보이즈의 그들과 똑 같지 않더라도 그들이 직접 교육위원회, 교장, 교감이라는 사회권력층과 싸우며 그들을 변화시키는 기쁨, 그것은 그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단지 환타지일 뿐이지만, 그걸 실제로 도전해본 사람들에겐, 아무리 다시 봐도 지나치지 않을, 바로 살아온 젊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담을 좀 하자면, 필자가 이 드라마를 정말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워터 보이즈의 드라마
주연을 맡은 5인들의 정말 훌륭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연기였다. 주인공 ‘신도 칸쿠로’의 야마다 다카유키(山田孝之)도 나름대로 어려운 ‘우유부단한 전형적인 일본형 주인공’의 역할을 잘 소화해내기도 했지만, 필자의 눈길을 끈 건 ‘타테마츠 노리오 역의 모리야마 미라이(森山未來)였다. 사실 딱 보면 그렇게 굉장히 잘 생기지도 못했고, 날카로운 눈매, 약간 건실하지 못한 인상 등 호감이 가는 부분은 조금도 없지만, 이 녀석이 일단 연기를 하기 시작하면 보는 이의 인상을 완벽하게 바꾸어놓는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 성격이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일본인들은 이게 어렵다) 그는 최소한 이 드라마에 나올 때만큼은 그야말로 ‘타테마츠 노리오’였다.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에 갖는
애정이 남달라서 이 정도의 연기를 더 잘 해내는 연기자가 있을 수도 있고 필자가 침을 튀겨가면서 설명한 모리야마의 연기가 객관적으로 그다지 잘한 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왠지 앞으로 더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둘 중 하나가 교통사고라든지 병 등으로 제 명에 못 죽는 한이 없는 한 저 모리야마 미라이라는 배우는 내가 죽을 때까지 지켜보고 인연이 닿으면 한번쯤은 만나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 ‘미라이 (未來)’와 같이 함께 새롭게 즐겨볼 수 있는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이런 착각까지 하게 할 정도로 보기만해도 즐거운, 워터 보이즈의 단연 빛나는 빛이었다. 그걸 아는 일본도 그에게 일본 TV 드라마 아카데미 어워드 ‘남우조연상’을 안겨주지 않았는가? 전문가들의 눈도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워터 보이즈 2가 방영되고 있다는 소식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 뒤로 어떻게든 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필자, 어찌되었든 누구나 차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도 안되게 기쁘고, 설레고, 추억할 수 있는 이런 기분을 정말 소중히 하고픈 순간순간들이다.
앞으로 언젠가, 또 다른 삶을 살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이런 기분을 느끼며 추억하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쁘고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 필자 스스로, 소망해본다. 언젠가는 워터 보이즈, 이들의 도전으로 남자가 싱크로를 하는 게 이상한 세상이 아닌, 여자가 싱크로를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런 세상을 만들 거라고 ...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이상하고, 사람들이 조소해도, 끝까지 웃으며 언젠간 그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 가장 멋지고 즐거운 일이었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겠다고...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8. 8. 01:29
SICAF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개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과연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무얼 박람회로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조그마한 의구심이 지금은 기대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매년 관객은 눈에 띌 정도로 증가하고 있고, 언제나 흥행에 중심에 서 있는 작품들이 아닌 예술적, 감성적 작품들로 구성된 인디 상영회도 매회 매진이다. 메가박스라는 고품질 영화관에서 SICAF를 유치할 정도로 박람회 자체에 대한 인지도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만족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듯 해서 흐뭇한 기분이다.

SICAF가 내세우는 대한민국 애니메이션의 우수함에 있어서 제일 선두로 내세우는 것은 신동헌 화백의 ‘홍길동’, 과, 진로소주로 대표되는 애니메이션의 시초가 일본보다 앞섰으며 당시 퀄리티로서는 일본은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난히 내세우고 있다. 에초에 원론부터 틀렸다. 1940~50년대 분명 애니메이션은 있었다. 필자도 당시를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자료를 조금만 뒤져보면 공식 메이저 작품이 아니더라도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껄떡쇠(확실치 않음)’으로 당시 미군에서 나오는 폐 OHP 필름을 양잿물로 지워서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는 뜻깊은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미국, 유럽의 애니메이션 역사 연표를 보면 최초의 애니메이션이 무엇이었는지, 아마추어부터 잘 알려진 작품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데에 반해, 우리나라는 아직도 잘 알려진 작품으로서 그것을 대체하려 한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축제에서 어느 누구도 ‘아톰’이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24년 조선 총독부의 요청 하에 제작된 ‘우편의 여행’ 을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밝히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애니메이션 관계자들만이 기억하고 있는 전문가용 지식이며 일본인들은 대중적인 작품만을 기억하기에 아직 ‘철완 아톰’이 최초의 작품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지만, SICAF는 과연 우리나라 최초의 애니메이션이 무엇으로 기록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출품된 작품들 중 흥행성을 생각하지 않은 인디 작품을 제외하고, 철저히 투자받고 그에 상응하는 흥행을 이루어야만 하는 영리 목적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검정고무신’ ‘왕후 심청’ ‘망치’ ‘해적 마테오’ ‘그리스 로마 신화’ … 필자는 작품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작품에 대한 심각한 걱정이 앞선다.
아이들을 타킷으로 잡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아이들도 엄연히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소비층이며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저 애니메이션들 중 그들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몇 개나 되는냐는 것이다.

우선 검정 고무신을 보자, 1970년대 한창 유행했던 트위스트 추는 그 당시 디자인 그대로 이루어진 교복을 입고 나오는 중학생들의 모습, 시골 들마루에서 수박을 먹거나 개울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 이보다 더 ‘영등위 영감님’ 들의 비위에 잘 맞는 애니가 또 있을까? 애니를 보는 건 그 영감님들도 아니고 당신들이 주장하는 엄마 아빠 어렸을적을 두런두런 이야기해주는 어른들도 아니다. 그들이 타킷이라고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21세기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란 말이다. 그들이 살아오면서 겪지도 않은 1970년대에 대한 트위스트와 검정 고무신의 향수를 느끼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라고 만든 것인지 한번쯤은 제작진, 혹은 영등위, 문화관광부에 묻고 싶다.

왕후 심청, 은 ‘홍길동’ 부터 시작된 조선시대 컴플랙스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다. 물론 사극의 인기는 한, 중, 일 공통적으로 계속되고 있고 일본만 해도 신선조가 등장하는 막부말 시기에 대해서 꾸준히 작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홍길동부터, 의적 임꺽정, 왕후 심청에 이르기까지 과연 무엇을 ‘창작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을까? 조선시대 컴플랙스에 빠져 있는 애니메이션들의 공통된 특징은 ‘원작은 원작으로서 남겨둘 수 있는 재창조의 자세’가 없다는 데에 있다. 그저 원작 소설만을 보고 어떻게든 원작 소설에 비등할 정도의 화면 재구성에만 힘쓸 뿐 어느 누구도 시나리오를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원작 있는 작품에 무슨 시나리오고 기획이냐는 소리인데, 일본에서 제작되는 수많은 작품들이 전부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시나리오 파트가 분명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에초에 창작하는 데에 있어서 ‘애니메이션은 그림’ 이라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은 이제 단지 ‘소설’을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만족하는 단계는 훨씬 지났으며 그것도 이미 흥행으로서 흥미를 끌 단계가 한참 지난 고전중의 고전을 전혀 일말의 흥미 요소 첨가 없이 그대로 재현한 작품을 봐 줄 아량과 여유는 없어진 지 오래다.

그래도 희망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면 '망치' 정도랄까? 망치는 ‘원작’ 이 만화계에서는 고전 축으로 평가받는 10년 사이클이 이미 지난 작품이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으로 응용하기에는 앞서 필자가 제시한 ‘새로운 작품’ 의 요건에 충족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제작진은 이를 깨닫고 새로운 캐릭터와 새로운 스토리 라인, 탄탄한 화면 연출과, 그레이트 에코라는 필살기를 등장시켜 새로운 시대를 사는 관객들의 요건에 충족하는 충분한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다. 항간에는 ‘원작 훼손’의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에 그 작품을 볼 사람들의 눈과 귀를 충족시키는 것이 제작자가 할 일이니만큼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분명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관객들로부터 얼마만큼의 흥행 성적을 거둘지는 미지수이나, 분명 작품 자체의 흥행성이 존재하는 만큼 '오세암'에 그것과는 다른 상당한 수준의 개가를 올리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기대를 갖게 만들어 주고 있다.

필자는 이번 SICAF에 참가한 작품들 중, 작품 자체로서 흥행성을 신경쓰지 않는 작품을 제외한 모든 제작자들이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볼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작품 제작자이기 이전에 돈을 받고 돈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프로이다. 애니메이션이 예술이고 게임이 예술이라는 예술론을 펼치기 이전에, 이미 돈을 받고 돈이 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면, 아니면 굳이 영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자신이 만드는 작품이 어떤 사람들에게 보여질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만들어야 한다. 흔히들 한국과 일본은 애니메이션 업계로서 30년의 문화적 격차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문화적 격차는 실력이나 작품, 시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작품 자체로서 지나간 과거만을 추구한다면 애니메이션 자체가 이미 30년 늦은 세계를 보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직도 잘 알려진 원작에 의존하거나 혹은 이미 지나버린 세계를 재구성하는 안일한 생각만을 한다면 모두 규격봉투에 싸서 버려라! 당신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어야지 지나간 세상, 에초에 본 적이 없고 볼 가능성도 없는 세상을 그려서는 안된다. 에초에 애니메이션은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항상 상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신작’이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작품이 되려면 ‘신작’이라는 타이틀에 대해서 제작자 본인들 스스로 부담감을 가지고 작품 활동에 임해야 한다. 창작 활동은 뼈를 깎는 고통이며 그런 고통 없이 만든 작품에 대해서 열광할 사람은 없다. 그 누구라도 ‘복원작’에 대고 신작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데즈카 오사무는 2003년을 애니메이션에 담았고, 한국의 ‘신동헌’은 1470년을 애니메이션 화폭에 담아냈다. 이걸 극복하는 데에는 앞으로 수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아직도 1970년대, 혹은 조선시대에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시점이 멈추어서는 곤란하다. 시계가 가는 만큼,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시계도 움직였으면 한다.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봐 줄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6. 13. 03:39
국내에도 물론 존재하고 있지만, 활동에 있어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활동하려는 그들의 성향 탓인지는 몰라도 존재 자체에 대해서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국내 동인(흔히 말하는 ‘만화 계열’ 동인 이 아님)들과는 달리, 비교적 아마추어 시장에 대한 기초 토양이 잘 갖추어진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인들의 메이저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학 장르, ‘라이트 노벨’ 은 순수문학에서 잘 시도되지 못하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충분한 수익 체계를 가질 수 있는 그야말로 아마추어들만이 할 수 있는 톡톡 튀는 소재로서 승부하는 치열한 격전지의 이름이 되고 있다. 시장 구성원들도 라이트 노벨에 대한 구매 인식이 충분히 자리잡고 있으며, 이 라이트 노벨은 우리 나라의 인디 밴드 음반과 같이 아주 독특한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색다른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디’라는 것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들은 그들이 얻는 지지도를 감안하고서라도 소설 자체는 메이저급 이상의 집필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종종 평가되곤 한다. 소재를 잘 못 택했을 뿐, 소설 자체의 구성이나 기본적인 가치관은 전혀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작품 세계관을 펼친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들의 개인주의성향만큼이나 작품에 대한 개성이 강한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이채롭다.

이들이 써 낸 소설을 잘 살펴보면 ‘애니메이션 스토리’같은 느낌이다. 최근 읽고 있는 더블브리드나, 천국에 눈물은 필요없어 의 경우는 물론이고, ‘풀 메탈 패닉’, ‘마부라호’, ‘마법사 오펜’, ‘슬레이어즈’, ‘부기팝은 웃지 않아’, ‘키노의 여행’ 등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원작 소설이 전부 라이트 노벨로서 그 시초를 띄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보다 명확해진다.

라이트 노벨은 이처럼 이제 막 문화에 대한 자기 성찰을 시작한 젊은이들의 문화 코드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 세대가 바뀌고 나면 또 어떤 라이트 노벨이 등장할 지 알 수 없는 것이며, 분명한 건 라이트 노벨은 메이저 소설을 즐기게 된 기성세대들이 읽는다면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장르로서 계속 그 명맥을 이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라이트 노벨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장르가 점차 태동되고 있다. 아직 작가라는 직함이 어색한 풋내기 유망주들이 써낸 소설들이, ‘통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또한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메이저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들은 크게 ‘순정 연애류’ 와 ‘판타지’로 나뉘어지고 있고, 나름대로의 시장도 충분히 개척한 상태다.

하지만 필자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현 라이트 노벨 체계는 다소 기형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훌륭한 데뷰 공간이 있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스스로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출판업계는 어떤가? 철저하게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것들만 추려내서, 출판하며 가격도 라이트 노벨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메이저급에 필적하는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라이트 노벨이 성장하건 성장하지 않건 간에 책만 많이 팔리면 그걸로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히 라이트 노벨을 장려하거나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조금도 없다.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작품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라이트 노벨 기준에도 못 미치면서 작가에 대한 대우나, 작품의 흐름을 메이저들과 함께 하려 하는 성향을 보인다. 흔히 기성세대들이 말하는 ‘건방진’ 행태를 보이는 것인데, 라이트 노벨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인 ‘독창적인 스토리라인’을 갖지 못하고, 기존에 나와 있는 작품관을 가져와서 재창조하거나, 특정 만화 작품의 스토리 구성을 소설에 활용하는 등의 창작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한다.


사태가 이쯤 되다 보니, 국내 라이트 노벨은 라이트 노벨로서는 이래적으로 밀리언 셀러가 한 달에도 몇 번씩 나오고 있음에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당 부분 비판을 받고 있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한때 대학입학과 관련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었던 라이트 노벨 작가 ‘귀여니’를 비롯하여 세계관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판타지 소설들을 만들어 낸 작가들, 귀여니의 성공으로 갑작스레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소위 ‘싸가지 미소년 할렘’ 세계관의 계승만을 일삼고 있는 수많은 귀여니 아류 소설들, 아마추어들의 자유로운 작품 시장이 될 수 있었던 라이트 노벨은 이렇듯 국내에서는 곪아 가고 있다.

아마추어들에게 채찍은 너무 이른 수단이다. 그들은 한 명이라도 그들의 소설을 읽어주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확실한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성장 기회를 주고, 독자가 한 명 한 명 늘어갈 때의 기쁨과, 라이트 노벨 작가로서 출판사의 압박 없이 자유로운 창작 활동의 즐거움을 충분히 누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그들을 이용하려는 출판사들의 농간에 의해 채 그것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로 작가로서의 생명이 급격히 짧아지고 있다.

어떤 작품이 100만부 이상 팔리게 되면, 작가는 다음 작품에도 100만부를 팔기 위해서 그 작품의 세계관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품을 만든다. 여기에는 출판사의 알력도 들어가며 작가 본인이 급격히 보수적으로 변하게 되는 부분도 분명 영향을 끼친다. 문제는 이것이 아마추어 시절에 맛을 들이게 되면 이후 독자들이 새로운 작품을 원할 때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소설계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 작가들을 보라, 10년 전부터 인기 작가의 대열에 올라왔었던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드라마 스타일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아류작들만을 양산해 내다가, 시장에서 퇴출당하고 있는 모습을… 국내 소설계의 위기는 이런 아주 사소하지만 큰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라이트 노벨은 그 나름대로 소설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굳이 라이트 노벨을 시작하려는 새내기들이 메이저 소설을 동경해서 그들의 세계로 몸만 들어가서 어설픈 소설로서 자멸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 소설을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그들의 그런 열정이 아깝다는 이야기이고, 그저 돈만 밝히는 출판사의 농간에 채 피우지도 못하고 얽매여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우며, 칭찬만을 들어도 2% 부족할 시기에 수도 없는 인신 공격과 비판만을 받으며, 채 소설 쓰는 맛을 느끼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써야 하는 우리 나라의 자칭 라이트 노벨 작가들과, 참신한 소재임에도 능력을 인정 받지 못하고 피눈물 속에 작가의 꿈을 접어야만 하는 수많은 숨은 유망주들의 능력이 아깝게 느껴진다.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4. 6. 9. 23:18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문화 메체들로부터, 단순히 일방적인 정보 흐름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듣고, 보고, 느껴보고 최대한 그 내용, 그 서사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부분을 찾으려 애쓴다. 음악의 취향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좌절과 실연을 많이 겪은 사람들일수록 힙합과, 펑크 등 내용을 강하게 전달하는 음악을 선호하고, 오히려 그런 걸 별로 겪지 않은 사람들일수록 발라드와, 일반적인 팝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발라드와, 팝의 가사는 전부 거짓말이다.’라는 논리를 펴곤 한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이라고는 말 하기 어렵다. 다만, 발라드와 팝은 세상의 밝은 단면을 강조하는데 반해, 펑크와 힙합은 다소 세상의 어두운 단면을 많이 노래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상황이 정말 좌절스러울 때, 그 좌절스러움을 알아주는 음악이 있어, 그 음악에 대한 인상이 남아 나중에 치료되었을 때도 그 음악을 다시 찾게 되는 현상이다. 즉 자신이 지금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음악적 취향이 갈린다고 할 수 있겠다.

아! 이건 내 노래야…라고 말 할 수 있는 노래가 있다면 좋은 것이다. 그 노래 자체가 자신의 심정을 다 표현하지는 않아도, 본인이 그 이상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충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세상에는 아직 자신을 상징하는 음악을 찾지 못해, 좌절에 끝에 서서 결국 끝을 맛보고야 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만일 그들에게 말 한마디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더라도, 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 노래가 있었다면, 그들은 다시금 끝에서 반대편을 향해 달리고 싶은 생각을 할 수 있었으리라…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다. 우리나라가 결코 많은 인구와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가 아님에도, 자기 자신을 노래한 음악을 찾을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H.O.T가 10대들의 음악을 정말 정확하게 대변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신문상에서 나오는 10대의 고민을 노래로 담았을 뿐이다. 진정 10대가 말하고 싶었던 걸 대신 말해주었던 가수가 누가 있었을까? 그런 음악이 있었다면, 고작 성적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안타까운 일이 과연 일어났을까? 20대는 어떤가? 우리나라 록 가수, 팝 가수 중에, 그들의 남모르는 비애를 위로해줄 노래가 과연 있느냐는 것이다. 30대, 40대 그들의 외로움을 정말 마음속 깊이 위로해줄 수 있는 그런 노래가 우리나라에 있다면 고개 숙인 아버지, 우울증에 걸린 주부들은 없을지도 모른다.

교복을 입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노래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가수들이 종종 보인다. 자신이 가수라는 점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가수들은, 한번쯤 깊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곡으로서 위로를 받아, 세상에 대한 눈을 다시 뜨게 되었다는 것 만큼 보람 있는 일이 있을까? 가수들은 그런 신성한 직업이라는 것에 비해서, 녹음실에서도, 라이브 콘서트에서도 정말 혼을 담아서 노래하는 것을 보기가 정말 힘들다. 자각하는 가수들을 보기도 아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70년대 민중가수들은 억압받는 국민들을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었던 노래들을 줄기차게 불러 주었다. 그래서 정말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껍데기 민주주의 지옥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민중 가요를 함께 열창하며, 삶의 희망을 키워 왔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죽어야 할 이유가 거의 없을 텐데 사람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청산가리를 찾고 목을 매어버린다. 이유가 무엇인가? 점차 개인주의화 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이 좌절할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다면, 70년대 그 악몽과도 같던 시절의 젊은이보다 더욱 불행한 현실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가수들이여, 저작권 인식이 확실한 일본의 젊은이들을 빗대어 부럽다고 외치기 전에 그들이 얼마만큼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수많은 곡들 중 한 곡이라도 누군가에게 인생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라,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신 있게 자신들을 상징하는 곡을 말 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라 (마이붐이라는 유행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본인들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말하기 이전에 본인들이 가수로서 듣는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생각해보아라.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생각이 날 때까지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부르며 생각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사람들 노래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들 그들만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대신 노래 불러줄 수 있는 가수가 될 수 있을 테니…
- RushAm -
posted by RushAm 2000. 4. 7. 09:17
따뜻한 봄바람에 얼음이 녹듯, 움추리던 몸이 풀린 게임 제작사들의 행보가 최근 빨라지고 있다. 새로운 타이틀의 클로즈, 오픈 베타를 앞두고 있거나, 겨울 방학동안 공개 테스트를 마치고 봄의 시작과 동시에 상용화를 진행하는 등 밀린 빨래를 하듯이 돌아가는 업계를 보면 활기가 넘처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방학이 끝나고 본격적인 비수기에 접어든 PC방과 타이틀별 동시접속율 하락이 두드러지면서 상장 혹은 상장 예정에 있던 회사들이 각종 지표 하락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도 함께 볼 수 있다. 최근 코스닥 상장에서 또 한번의 고배를 들이킨 윈디소프트가 대표적으로, 뒤이어 드래곤플라이와, 엠게임도 상장 계획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게임 타이틀의 거품이 빠지고 실질적 최저한계점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요즘같은 시기가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자생의 길을 모색하는 제작사들의 움직임에서 점차 그 스케일이 커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행보는 다름아닌 해외 진출 러시다. 최근 벅스 게임에서 사명을 변경한 예당 온라인이 서비스중인 '오디션'이 싱가폴을 비롯한 대만, 말레이시아에 진출하여 게임의 한류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기대이상의 성과를 보이자, 한국의 KT격인 배트남 국영 기업 VTC와 제휴, 배트남 시장 장악에 나섰다는 소식에 이어 그라비티도 에밀클로티클의 동남북아시아 전역에 대한 판권을 확보, 싱가폴 현지 인포콤 아시아홀딩스와의 제휴를 통한 진출을 필두로 동남아, 오세아니아 대륙의 각 국에도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외에도 아직 대내외적으로 공개되지는 않고 있으나, 일부 제작사들이 해외 시장을 겨냥한 특화 킬링 타이틀을 준비중으로 알려지고 있어, 국내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는 여름 방학 특수 시즌이 오기 전까지는 해외 진출 관련 뉴스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언론은 대부분 '게임계에도 이제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 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다. 언제부터인가 월드컵 4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가위상상승의 상징이 되고 있는 한류라는 단어는 스케일이나 가시적인 효과 측면에서 직접적인 효과에 대한 성과 규모를 비교적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어, 월드컵 4강이 가져올 경제 효과같은 간접 추상적 지표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예로부터 무역 흑자에 대한 심각한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기에 국민실물경기보다 나라경제를 우선시하는 여론형성에 대한 국가의 정책결정이 수월하게 이루어진 바탕이 되어주곤 했기에, 어떤 찬사보다, 한류라는 찬사가 보다 여론에게 효과적인 어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직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들은 고질적인 병폐를 버리지 않고 있어, 기업의 해외 진출 성공에 찬사를 보내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한류스타들은 대부분 국내 인기의 몇배 이상을 해외에서 누리고 있다. 국내의 스타임에도 이들을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은 해외의 팬들보다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미국, 영국의 팝스타와, 일본의 뮤지션들도 해외 진출을 하지만, 결코 해외 투어가 자국 콘서트보다 비중이 높은 경우는 드물 만큼 자국 팬들이 우선시되지만 우리나라에서 배용준, 보아, 이병헌을 해외의 그들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기업화되고 이익이 눈에서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득단체들은 자국보다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쪽으로 투자와 지원을 돌리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자동차, 삼성, LG전자등 대부분 초창기 품질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지 못하던 시절 꾸준한 자국 상품의 내수 촉진운동을 통해 성장한 회사들이 세계적으로 품질 경쟁력을 갖게 된 지금 내수 가격을 수출가의 많게는 2배 이상 폭리를 취하는 식으로 대대적인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이 지금 체감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해외 수출을 하고 있는 중견급 이상의 기업들 중 해외 수출보다 국내 내수에 보다 좋은 가격 정책과 서비스를 하는 기업은 희귀한 편이다. 아무리 꽃이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지만 그 뿌리를 박고 있는 건 엄연히 땅일텐데, 땅에서 뽑혀 나가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온라인 게임 강국이라는 타이틀에 힘입어서인지, 해외 진출 기업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제작사들이 몇 년 전부터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타이틀은 라그나로크, 국내 온라인 게임 중 가장 많은 국가에서 즐기고 있는 게임이 되고 있는 라그나로크는 그러나, 초창기 국내 시장을 외면한 채 해외 시장의 파이 키우기에 주력한 나머지 뒤를 생각하지 않은 주먹구구식 사업 제휴로 결국 덩치가 커진 일본 현지 유통사 건호의 모기업 격인 소프트뱅크에 매각되는 수모를 겪었다. 유저들이 국내 게임계의 국치일이다. 한국 게임의 상징을 빼앗겼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이어질 만큼 이 사건은 게임계 전반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준 사건으로 지금까지 화자되고 있다. 거기에 중국 진출 러시를 주도했던 게임들이 프리 서버 및 복제 업체들의 난립과 정부까지 시장에 개입하여 국내 제작사들이 기름지게 만든 시장 토양에서 노골적으로 밀어내는 통에 실제 거품이 걷힌 수익은 오히려 적자 성과로 드러나는 등 한류라는 타이틀과 수출 흑자, 해외 진출이라는 대외적 타이틀에 집착한 나머지 뒤를 생각하지 않은 불도저 정책으로 자멸하는 제작사들을 이후로도 수없이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경험들이 후발 제작사들로 하게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토대가 되어줄 수 있겠지만, 그걸 알기까지 치른 희생적 대가는 참담한 수준이었으며, 애석하게도 아직 우리나라의 여론과 언론, 그리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한류'와 '무역흑자' '해외진출'에 대한 환상을 깨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아직까지도 대외적인 수출 성과가 현지의 여러가지 상황과 더불어 주식 상장 등 제작사 내부 사정과 맞물려 2~3배씩 부풀려지는 게 아직까지 고처지지 않는 악습적 관행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국내 시장 주체자들에게 복잡한 기분과 함께 걱정을 쉽게 떨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걱정들이 부디 기우에 그치길 바라마지 않지만, 게임 업계의 해외 진출 러시가 제작사에게 보다 안정적인 로열티 위주 수익원으로 자리잡게 되어 타이틀의 라이프사이클이 길어지고 신작 개발에 대한 투자가 그만큼 더뎌지게 되며 해외와의 직접적인 수익 차이가 서비스의 차별로서 이어지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덧붙여 본다. 내수 유저들은 기업들이 해외 진출하는 자금을 한없이 지원해주는 문전옥답이 아니다. 국내에서 극한까지 수익모델을 만들어 PC방과 유저들을 쥐어짜고 해외 투자에 실패하고, 그에 대한 만회를 위해 또 다시 국내 시장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970년대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국내 게임 산업, 저질 문화라는 국가적인 핍박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설움 속에 성장한 문화이던가, 세계 정상급을 자랑하는 해외 시장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척박한 토양에 한숨을 쉰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다. 그런 토양에서 온라인에 편중되었든 어찌되었든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게임업계가 되지 않았는가? 정말 어렵게 얻은 주권을 지키자, 땅에서 점점 멀어지는 꽃은 햇볕에 말라 죽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