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1. 6. 25. 22:36
상 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 못보신 분들은 클릭

그들이 HOT의 '실패'에서 깨닫게 된 실패 원인은 놀랍게도 '기획의 미숙함'이 아니라 기획은 완벽했으나 그 완벽한 기획을 제대로 소화해주지 못한 유망주들의 실력 부재였습니다. 물론 아무리 지난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 SM의 이같은 판단이 반드시 잘못된 결과론을 도출하기도 애매합니다. 사실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책임이 아닌 SM, 나아가서는 가요 시장 전반에 있었거든요. 아직 대한민국은 아이돌 시장을 어떻게 소비해야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SM은 그런 아이돌 시장이 이미 안정화되었다는 전제 하에 너무 기획을 완벽하게만 짜내려고 했으며 그런 치밀한 기획을 접해보지 않았던 유망주들이 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소화할 리가 없었던거죠. 다시말해 시장, 유망주, 기획사 모두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기때문에 시간을 두고 같이 성장시켜야 했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획은 완벽하다'라는 SM의 편식성 자아도취로 인해 아이돌 시장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난 천재니까...


그 한계를 매우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 바로 HOT의 해체입니다. 얼핏 보면 계약분쟁만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사실 일부 SM맴버들이 '회사에 남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계약분쟁으로 치부하기에 어려운 감이 있는데요. 이들 5명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행보를 보면 각각 롹커(...), 소프트팝가수 (이상 SM에 잔류한 문희준, 강타) 1인 기획사 창업 후 브리티시 팝, 힙합 음악, 댄스 위주 보컬 (이상 잔류하지 않은 토니안, 이재원, 장우혁) 입니다. 눈치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류하지 않은 3인의 음악적 행보가 SM이 지금 현 시점까지 해왔던 음악적 색깔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우선적인 문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단지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게 해준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SM은 HOT의 표면적 성공을 기반으로 꽤 빠른 시점에 주식회사로 전환 코스피에 상장을 하게 되는데요. 이 상장이라는게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공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만, 냉정히 보면 결국 '회사'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아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경영상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업계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애착이 없이도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이 회사를 소유해서 내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경영권 방어'가 안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의 수익을 위해 무조건 생산적인 활동만을 해야하고 지출을 줄여 순익을 높이는 활동을 강요받게 되는데요. 바로 이 점이 SM전체 조직의 분위기를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리더 문희준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사회비판적인 음악 코드와 강한 전사의 이미지라는 HOT의 기획은 문희준의 솔로 데뷰로 이어졌고 HOT의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소프트팝 음악을 추구했던 강타의 잔류는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SM이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과 크게 차이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은 3인은 일단 당시 시점에서 해오던 음악도 아니었고 그들의 음악을 뒷받침할 기획 인력도 없었습니다. 즉 추가 투자가 필요했던 사안이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들이 요구했던 부분은 '가수로서의 재계약'이 아닌 '일정 지위 이상의 승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가수로서 활동은 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추구하는 후배들을 SM 내에서 키워내는 새로운 파트를 맡고 싶다는 것이었죠. 이들의 요구는 기획사에 소속되어 5년 이상 활동한 가수로서는 지극히 당연할수밖에 없는 요구였습니다만, SM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음악을 기획할 자금도 그들을 중역급에 가까운 대우를 해주며 신인을 키우는 역할을 부여해줄 생각도 없거니와 결정적으로 'SM의 기획 가능한 권리'를 독점하고 싶어했던 경영진을 위시한 실무진들의 몽니가 자칫 아이돌들의 은퇴 후 승진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정착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문희준의 솔로 데뷰가 지속적인 안티팬만 양산하자 SM은 아무미련없이 문희준을 포기한다. 그의 군입대는 안티팬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군 제대 후 2008년 싸이더스 소속으로 신보를 냈을 당시...


SM은 돈을 많이 안주거나 노예계약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신인으로 입사해서 열심히 SM이 하라는 대로 기획에 발맞춰 꼭두각시짓 하고 난 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동네 피자집도 3년 이상 배달일 열심히 하면 매니저 승진의 기회가 있기 마련인데, SM은 적어도 가수들에게 있어서 '회사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무진 참여'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기획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프로듀서를 하던 사람들 즉 유영진 라인이 독점할수밖에 없었고 그 아래에서 아무리 강타나 문희준이 선배급 대우를 받으며 승진을 한 들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신인을 기획하거나 키워내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HOT의 해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를 알고서도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쪽이 SM에 남았고 이에 반기를 든 3인이 박차고 나간 것이 되는 셈인데요, 물론 세간에 알려진대로 불공정한 계약 관행 역시 문제가 되었겠습니다만 그 이전에 사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SM 5년차로서 그에 걸맞는 지위 상승과 연봉을 요구했고 승진도 안시켜줄거고 돈도 지금 이상 더 줄 생각이 없다는 SM의 입장이 이들과 대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승자박에 가까웠던 SM의 HOT에 대한 오판은 이후 SM의 행보에 있어 갖은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데요. 우선 4집부터 과감하게 시행한 실력파 아이돌의 육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이는 물론 그렇게 나온 아웃풋이 상품성이 너무 떨어졌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더 큰 문제점은 그렇게 키워놓은 결과 자신들의 능력과 경력을 내세워 '상관 대우'를 요구하는 빌미가 된다는 점이었죠. SM은 이후 5년 주기를 꾸준히 지키는 한편,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티스트형' 유망주를 멀리하는 등 철저하게 아이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유닛형 유망주만을 선발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냥 기획한 대로 잘 소화해주는 유망주가 필요할 뿐 음악적 역량을 키워 새로운 음악 포멧을 추구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을 아티스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죠.

바다 이야기는 좀 하고 넘어가자, SM 소속 가수 중 최초로 유영진 사단에 '개긴'뒤 재계약 불발과 소속사 이적 이후 전설적인 수준의 찌질한 방해공작은 이미 잘 알려져있지만, 그녀가 왜 SM에 개겼는지, 왜 그 개김에 SM이 발끈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위키에도 언급이 안되어있다) 가수였던 아버지에 의해 오랫동안 트레이닝된 그녀만의 독창적인 창법은 흔히 SM창법이라 불리는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이를 유영진 사단이 자신의 기획에 맞게 맞춰나가면서 창법 개조를 거부한 바다측과 트러블이 잦았다고 한다. 자신의 기획과 음악에 대한 프라이드가 하늘을 찔렀던 당시의 유영진 사단에게 있어 이런 행위는 하극상과 다름없게 받아들여졌고, 결국 메인 보컬의 탈퇴라는 흐름을 감수한 채 SES와 바다 모두를 떠나보내는 강수를 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다 한 사람만으로 SM, 특히 유영진 사단의 성향을 적나라하게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보아!

보아는 이런 어수선한 환경 속에서 기획된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연하겠지만 HOT의 사례에서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는 SM의 철학이 모두 집대성된 최초의 작품이자 (좋지 않은 의미에서)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죠. 당연하겠지만, 보아가 일본에 진출한다는 의미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일본 진출과 귀결되어 있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300만장 싱글기록 우타다 히카루의 800만장 앨범신기록 등이 팡팡 터저나오며 음반 시장이 급폭발하던 당시 일본 시장은 SM이 소박만 치더라도 한국의 몇 배 이상의 돈을 벌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요. 특히 아직도 음반협회에서 MP3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내수 음반 시장의 급격한 침체 역시 그들을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계기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보아는 '유영진'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안고 출발할수밖에 없었는데요. 지금으로 치면 중2병이라도 걸린 듯한 유영진의 '사회비판'에 대한 집착은 보아의 데뷰곡 ID PEACE B의 실패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문제는 유영진이 진짜 10대를 제대로 분석하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가사와 곡을 쓸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고, 그런 곡이 10대들에게 음악적으로라도 어필이 되었냐면 그쪽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보아는 데뷰때부터 각종 구설수에 시달리며 기획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집니다. 보아는 후속곡 '사라'로 SM의 거의 사력을 다한 푸쉬를 통해 명예회복에 성공하지만, 예정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일본 진출 준비에 전력을 쏟게 되죠. 준비를 하면서 간간히 국내에서의 신곡 활동을 겸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보아의 멘탈 손상이 극심하다고 판단했을것으로 본 SM은 외부노출을 극도로 꺼린 채 AVEX와 공동으로 제 2의 육성에 돌입합니다.


이 보아의 육성 과정 역시 SM의 아이돌 육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1999년 데뷰 이후 2년 이상의 공백기를 거친 2001년 일본 데뷰까지 2년간의 공백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제 2차 트레이닝이 그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SM의 육성 기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음악적 감각과 댄스 실력, 아이돌 컨셉 소화 능력까지 포함해서 2년을 넘기기 힘들었습니다만, (악명높았던 SES의 트레이닝기간도 2년 전후) 보아의 경우 투자 금액과 트레이닝 기간이 비약적으로 길어져버린 것이죠. 댄스나 음악에 대한 감각 등 기초 트레이닝 과정 2년에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어 능력이나 예능 개그 연습, 간단한 단막극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연기까지 복합적으로 손을 대는 과정 2년이 다시 포함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길어진 트레이닝 기간이 정설이 된 이유는 보아의 기하학적인 성공 사례 때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죠.

여기에 보아가 SM의 육성 과정에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아이돌'의 데뷰기준 연령대를 높인 대신 육성시작연령대를 대폭 낮추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10대 초반부터 육성을 시작하는 조기육성이 향후 재능 계발 측면에서 효과적인 부분이 분명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생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죠. 단체 합숙과 끝없는 연습, 절대적인 서열 체계의 엄격함 속에서 자라나는 유망주들은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서열 체계 속 상하관계에 훨씬 더 익숙해지고 맙니다.

HOT 맴버가 아닌 보아가 서열 1위인 이유...


이는 SM에 있어 두 가지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데요. 우선 육성 과정에서 SM에 절대적인 충성도를 주입시켜 향후 재계약이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데에 드는 장벽을 대폭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첫 번째이고, 잘 알려져있지 않은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생활 통제, 즉 아이돌의 순수무결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이돌 윤리 기준은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과거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나 폭력에 연루된 증거 등 윤리의식에 반하는 과거가 적발될 경우 아이돌로서 살아남기 힘든 풍토가 (당시까지는)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생활 전반을 통제함으로서 데뷰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문제점을 사전 예방하고자 하는 포석이 있었던 것이죠. 일본이야 아이돌이 스캔들을 일으키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시스템입니다만, 에초 계약 자체가 일방적인 육성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국의 계약 조건에서는 그런 조항을 넣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에초 소속 정규직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상품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 쪽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보아'의 성공 전후,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SM의 주식시장상장을 전후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SM의 육성 체계가 급작스럽게 늘어난 시기가 보아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뒤라고 가정한다면 2002년 후반 정도가 되는데요. 문제는 이 때까지 정상적인 흐름으로 국내 시장을 노리던 SM의 보이그룹 걸그룹 라인이 급작스럽게 '해외 경쟁력이 있는' 소수정예 라인으로 수정되면서 국내용 아이돌로 키워지던 아이돌이 떨이처리되듯 쏟아져나오게 되는데요. 보아 라인이었던 다나, SES라인이었던 밀크, HOT-신화 라인이었던 블랙비트가 속속 데뷰를 빙자한 '정리'가 되면서 SM의 유망주라인은 새 판을 짜게 됩니다.

SM의 잃어버린 역사로 남아있는 그들...블랙비트


사실 그냥 키우던 애들을 더 키워서 해외진출시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블랙비트의 경우 이미 5년 이상 육성이 끝난 상태였고 그밖의 그룹 역시 그 시점에서 나이가 20줄을 넘긴 데뷰 시기가 꽉 차버린데다, 그렇게 머리가 굵어진 애들을 추가적인 비용과 시간을 들여 육성시키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해외 진출하는 데에 있어 국내용 이상의 포텐셜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옮은 판단이었던 역사적인 오판이었건 말입니다.

그리고 SM이 가질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고민은 '보아'라는 거대한 떡밥에 비해 SM이 가진 실속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인데요. 사실상 AVEX 산하의 이른바 '아무로 - 하마사키 - 코다'라인을 탔던 보아의 후광 탓에 SM이 보아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이 거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보아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곡들은 대부분 일본 원곡인데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곡 역시 스웨덴 리메이크곡 NO.1 .... 음악 최우선주의를 표방했던 SM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음에 분명했을테죠. 게다가 유영진의 곡 메이킹 능력 역시 이전의 불안한 중2병 때와는 달리 보아의 NO.1앨범을 기준으로 점점 완숙함을 보이고 있는 시점이었기때문에 진정 '지분 100%'를 가지고 '자신들이 만든 곡'을 내세워 일본 시장을 공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 했습니다. 물론 속사정을 살펴보면 보아의 성공에도 이렇다할 저작권료 수익같은 것이 대부분 AVEX좋은 일만 시켜버린 상황에서 SM에 돈이 돌지 않으니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해외진출'을 위시한 투자금 추가 유치를 끌어낼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기존 라인을 다 버리는 모험수를 감행하며 그룹 하나를 데뷰시킵니다. 지금까지 AVEX나 BING을 벤치마킹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쟈니즈 냄새가 풀풀풍기는 5인조 보이그룹이 ....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RushAm 2011. 6. 1. 06:47
대한민국에 이른바 '아이돌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된지도 벌써 십수년이 지났습니다. 아이돌 주기 5년을 계산하면 벌써 시대가 세 번 바뀐 셈인데요. 10년이 넘어가고, 속속 그 아이돌이 일본에 진출해서 성공 가도를 달릴 만큼 (자기들딴에는) 세계적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하는 일면에는 이 산업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이돌을 아티스트와 동일시한 잣대로 평가하거나 팬덤에 의해 음반 시장이 일부 연령대로 치우처버리게끔 방치하기도 하는 부작용이 산적해있기도 하죠.


그래서 공화국 연구소에서는 지난 '대한민국 아이돌 산업을 말한다' 시리즈에 이어 기획사 개별적인 특징과 속성 등을 가능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분석한 '아이돌 기획사 열전'시리즈를 마련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SM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오해가 있으실까봐 덧붙입니다만, 이 기획은 특정 기획사를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철저한 개인 연구에 의해 알게 된 내용들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연구 내용을 인용, 배포하는 등의 문제에 있어 필자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만, 공화국 연구소는 '블로그 기사'가 아닌 개인 연구 자료이므로 다른 포스팅에 비해 텍스트량이 매우 많다는 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서태지와 '아이돌'

아이돌의 원류는 언제부터인가의 논쟁은 사실 너무 무의미합니다. 그 형태만 달랐을 뿐 아이돌이라는 존재는 대한민국 음악계에 언제든 있었거든요. 다만 그 형태가 조금씩 달랐고 그 형태에 따라 어떤 그룹은 살아남고, 사라지는 '대중의 선택'에 의한 생존전쟁을 벌였을뿐입니다. 일례로 10대 문화의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거의 90년대 초반을 양분했던 잼이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밀려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체생산'능력이었는데요. 서태지와 아이들은 신아이레코드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기획사 없는 단독활동, 그러니까 음반 찍어내는 것만 대행했을 뿐, 거의 모든 활동 기획이나 전략, 작사 곡 등의 컴포징에 이르기까지 그룹 내에서 자체생산을 해냈습니다. 실질적인 데뷰무대였던 특종 TV연예에서 이들에게 내린 혹평은 어찌보면 당연했는데요. 이들은 이전 잼이나 소방차등이 보여줬던 아이돌의 계보가 아닌 아티스트의 계보를 아이돌과 섞으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다름아닌 서태지가 혼자 다 해먹을 수 있게 만든 시대적 변화, 1인 작곡, 연주가 가능한 시스템 '컴퓨터 음악(MIDI)'가 있었습니다.


작곡의 상징을 콩나물 던지기에서 신디사이저로 바꾼 혁명의 중심, 기존 밴드들이 이에 반발했던 이유는 지금의 기가샘플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형편없는 미디악기 음질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가진 아날로그적 노하우와 향후 밴드없는 하드레코딩 환경 변화에 따른 밥줄의 위협에 대한 럿다이드식 저항이 아니었을까?


예전 음반 녹음은 그야말로 라이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반주를 직접 마스터링 녹음을 처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능한 실제연주를 따오는 게 관례였죠. 언제나 음반사는 실력있는 세션을 보유해야만 했고, 가수들은 그 세션들을 선배로 극진히 모시는 이른바 '딸랑딸랑'을 해야만 녹음하고 음반 낼 수 있는 이른바 '세션의 권력'이 대세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권력을 제대로 보유할 수 없었던 군사정권시절의 핍박에 저항한 저항음악가들의 선택이 바로 '포크송', 즉 1인 연주가 가능한 음악이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합니다. 어쨌든 기타만 칠 줄 알아도 귀하신 몸이었던 시절이라는 겁니다.

서태지의 경우는 이 기타 하나로 먹고 살 수 있는 엘리드 계보를 걸었습니다만, 시나위 출신의 정통파 록 기타리스트가 솔로 데뷰로 꺼내든 게 록이 아닌 빠른 비트의 '컴퓨터 음악'이었다는 점이 기성 가수들에게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한 음악이 록 음악과 거리가 멀기도 했습니다만, 무엇보다 그동안 록 음악계는 물론 전통적으로 가창력을 중시한 음악계에서 '랩'이라는 음표없는 음악을 추구한 점과 그 음악 자체가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나머지 현지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한 마디로 장르불명의 조잡스러움이 묻어났다는 점이 그것이었죠. 아무리 서태지가 천재였다 한들 1인 작곡 체계는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했고, 아무래도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만 하다보니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음악을 들여오면서 벌어진 '표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야 음원들이 웨이브 기반으로 실제 연주와 진배없는 수준으로 높아졌지만 당시의 사운드캔버스로 대표되는 컴퓨터 음악은 시나위 시절부터 아날로그에 익숙해져 있던 서태지의 감성으로서는 창작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죠.

그는 아이돌이 아니었지만, 본의아니게 아이돌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다.


흔히 음악계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뷰가 가져온 센세이션은 생각보다 많은 파생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들의 데뷰, 그리고 그 데뷰에 대한 음악계의 상반된 평가,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끼친 영향은 그들의 은퇴를 전후해 그들이 만들어놓은 밥상을 어떻게 먹는지 혹은 뒤집어 엎는지에 대한 큰 대명제가 갈리게 되는데요. 그가 하는 음악을 인정하고 필요한 일부분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음악에 활용했던 세력과, 그의 음악을 극렬히 비판하며 그가 추구했던 방향성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쪽 그리고 그의 음악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계승하여 발전시킨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당시 추구했던 그들의 방향성을 꾸준히 추구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죠. 오늘 이야기하게 될 SM엔터테인먼트도 그 당시 갈라저나온 커다란 줄기로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축입니다.

HOT의 위대한 유산

서태지의 음악이 미국, 일본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본다면, SM엔터테인먼트는 그가 추구했던 음악 중 미국적 음악 코드에 한국적 대중화를 위해 입혔던 'JPOP'의 감성코드에 주목합니다. 굉장히 트랜디하면서도 랩과 잘 어울리며 자극적이지 않아 부담없이 귀에 잘 들어오는 음악을 추구하죠. 재미있는 건 이런 JPOP의 감성 자체는 AVEX나 BEING 등 그야말로 90~00년대를 쓸어버리던 기획사에서 나온 코드였지만, 정작 이들이 일본을 통해 들여온 건 그들의 음악적 감성이 아닌 쟈니즈의 아이돌 시스템이었다는 것인데요. 한마디로 음악성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돌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SES가 일본 진출 당시 기술적 자문을 하기도 했던 BEING계열 소속 故 사카이 이즈미


무조건 외모를 중시하던 당시의 아이돌 선발 시스템에서 나름 수준 높은 음악을 추구하고 싶었던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노래실력을 갖춘 유망주는 생각보다 잘 모여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외모와 노래 실력은 상반되는 케이스가 많았고, 좀 실력이 있다 싶은 녀석은 아이돌 그룹에는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을테니까요. 게다가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컨셉이 아이돌스러운 POP음악 이라는 난점이 작용하고 있어 그 음악에 걸맞는 보이스 컬러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주 노래를 잘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지금까지의 '잘 한다'는 기준과 상당히 다른, 그러니까 당시 기준으로 다른 가수들의 창법을 흉내내면서 자라온 가수 지망생들이 아닌 그냥 백지 상태에서 가르칠 수 있는 다이아몬드 원석이 필요했던 것이죠.

사실 예전부터 최근까지 쟈니즈의 보이 그룹에서 '노래 담당'을 따로 두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요. 아이돌이 노래를 반드시 잘해야한다는 고정관념도 없을 뿐더러, 아이돌이 완성도 높은 음악을 할 필요성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입니다) 이유는 물론 노래를 잘하는 아이를 뽑으면 '큰 틀'에서의 기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죠. 원래 아이돌이라는 것은 어떤 컨셉 (미소년 집단, 짐승남, 시크한 도시남자 등) 을 잡게 되면 그 컨셉에 걸맞는 맴버를 모집하고 그 맴버들은 짜여진 컨셉에 걸맞는 활동만 펼쳐주면 그만입니다. 당연하겠지만 이 컨셉의 거의 대부분은 외모와 댄스실력인데요. 그런데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전제조건을 달게 되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냥 외모만 맞춰 오디션보고 캐스팅하는 게 아니라 일단 외모를 맞춘 뒤에 얘가 노래를 잘 못하거나 보컬 색깔이 안맞거나 하면 탈락을 시켜야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뽑았는데 컨셉에 적응을 못하거나 (가창력 좋은데 춤까지 잘추는 애들은 정말 드물죠) 하면 데뷰 스케줄부터 삐걱거리는 등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 자명하니까요.

그런데 SM엔터테인먼트는 이런 잠재적 불안요소를 떠안아가면서까지 음악성을 갖춘 아이돌에 목을 맸던 것일까요? 그것은 SM엔터테인먼트가 한국의 쟈니즈가 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존재 '유영진'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수만 회장과 함께 사내 종신계약 이사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음악최우선주의'라는 방향성을 지금까지의 행보 속에서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었는데요. 본인 스스로가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생활을 시작하기도 했고, 전자음악에 대한 인식이나 수준이 낮을 때부터 꾸준히 밀어봤던 분야일테니, 이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음악만을 중시한 나머지 아이돌이 본연의 색깔을 잃은 보컬그룹이 되지 않도록 음악적 완성도는 높이되 가능한 초창기 기획했던 '컨셉'을 최대한 살리고, 그 방향성을 끝까지 고수하는 음악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초창기 SM의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이 당시에는 '연습생'이라는 개념보다는 직접적인 캐스팅에 의한 속성 데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연습 기간은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었고, 어떤 그룹의 형태를 기획하고 그 그룹의 피스를 몇 개로 나눈 다음 그 조각에 맞는 인재를 찾아나서는 오디션이나 캐스팅 작업을 통해 완성시키는 방식이었죠. 눈치채셨겠지만, 이는 일본의 고전적이고도 정평이 나 있는 아이돌 기획 시스템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초창기 SM은 사실상 일본 아이돌 생산 시스템을 상당 부분 벤치마켕한 흔적을 곳곳에서 조금씩 찾아볼 수 있었죠.

하지만 조금 아쉽게도 유영진은 그런 음악적 욕심과 더불어 '아이돌 그룹에 대한 이해'를 양립시켜 '작곡'과 '프로듀싱'을 함께 맡아야만 했던 어려움이 존재했고, 이런 초창기의 열악한 환경은 그의 성향을 매우 고지식하게 만들어놓고 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SM을 있게 한 그룹으로 꼽히는 HOT의 경우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의야해하실줄로 압니다만, 일단 들어보세요

HOT 기획 당시 유영진은 HOT를 기성 세대를 비판하는 개김성 강한 5명의 악동으로 컨셉을 잡고 각종 음악 컨셉 등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컨셉은 데뷰곡 전사의 후예의 예상치못한 초반 대 부진에서 비롯된것처럼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요. 생각했던것만큼 당시의 10대들은 그런 심각한 가사에 공감하거나 열광해주지 않았습니다. 위키에서는 전사의 후예가 표절 시비로 인해 제대로 인기를 얻을 기회가 없었다는 주장도 보입니다만, 이런 문제를 포함한 기획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려진 대로 이들의 학창시절은 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고 한다. 전사의 후예는 타이틀에서 가해자의 이야기를 연상시키지만 내용은 피해자를 시사하고 있다. 만일 이들이 가해자의 악동적 이미지를 그대로 곡에 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말할것도 없이 학교폭력미화라는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을 먹지 않았을까?


이같은 예상치못한 결과에 대해 유영진은 일단 데뷰 앨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일단 후속곡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에 2집을 내놓을 것을 준비하게 되는데요.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아무 전략없이 내놓은 캔디가 대박을 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리더 문희준의 이미지를 보시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거친 느낌의 그룹으로 기획되었던 그들이기에 이런 말랑말랑한 곡이 어울리지도, 시장에 통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인데요.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의 아이돌 시장은 그야말로 '애들다운' 곡이 더 먹히는 시대였고 그들이 내세운 문희준의 거칠고 와일드한 캐릭터보다 부드러운 보컬의 강타를 중심으로 한 캔디가 더 쉽게 받아들여진 당연한 역사가 쓰여져버린 것이죠.

HOT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기획사 SM입장에서는 정말 얻어걸렸다 싶을 만큼 기획 차원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유영진이 내놓은 전사의 후예가 실패하고 SM소속이 아닌 외부 작곡가 장용진에 의해 만들어진 캔디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룹 전체 기획이 대중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음을 반증했던 것이죠. 물룐 표면상의 성공은 기획사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겠습니다만, 장기적으로 실패한 기획 속에 얻어걸림을 바란다는 것은 기획사 입장에서는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시장은 언제나 요행을 바라는 자에게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유영진은 HOT의 1집의 실패 원인을 '시장의 미성숙'과 '컨셉의 난해함이 불러오는 소화력 부족'으로 본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와 SM은 1집의 이같은 빗나간 성공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2집에서는 10대들의 사회적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부각시킨 '늑대와 양'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결과는 방송금지처분 그리고 곡 자체가 가진 난해함 탓에 매우 심각한 수준의 실패를 맛보고 맙니다. 지난 1집의 성공에 의한 엄청난 버프가 있었음에도, 실제 기획 자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냉담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여기에 후속곡으로 나온 '장용진'의 '행복'이 2집의 포텐셜을 모두 가져가버렸다고 평가될 만큼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SM과 유영진은 HOT의 지분을 장용진 한 사람에게 빼앗기다시피할만큼 기획사로서의 두 번째 실패를 맛보고 맙니다, 이후 장용진은 HOT음반에서 그 이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데요. 석연치않은 표절 시비가 있었고 표절 원곡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만큼 모호한 부분으로 봐서 사실상 HOT에서 타의적으로 배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장용진이 직접 보컬로 참가한 듀엣 '동자'


이후 HOT는 이 '행복'의 성공이 남긴 후유증을 제대로 치루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는데요. 유영진은 두 번의 기획 실패로 이미 모호해질대로 모호해진 HOT의 기획 컨셉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의미였는지 모를 3집 열맞춰를 내놓았지만 어이없게도 행복에서 이미 한번 데인 '표절' 시비가 본격적으로 붙으며 더 크게 데이고 맙니다. SM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한번 데인 일을 반복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며,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유영진의 곡이 이런 일에 휩싸였다는 점은 많은 부분을 시사합니다. 그만큼 HOT가 처음 가진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기획사 내부에서도 대단히 무리를 했다는 점이 첫번째이고 유영진 본인 역시 세 번째마저 실패했을 경우 자신의 음악 철학과 지금까지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 두번째이죠. 그 역시 3집에 이르러 HOT의 초창기 기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에 대해 '성공에 관한 본격적인 의구심'을 가졌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HOT맴버들의 자작곡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요. 그의 철학 상으로 기획형 아이돌에게 작곡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습니다만, 완고하게 자신의 철학을 밀어붙였던 1,2집이 연속으로 실패하게 되자 립싱크나 악보를 못 읽는 실력없는 아이돌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조금씩 수용하고 기획에 반영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해서 강타가 작곡한 빛은 이전 장용진의 캔디나 행복에 비해 음악적 색깔만 유사할 뿐 완성도면에서는 합창 교향곡 멜로디 샘플링에 대거 의존한 곡이 된 것을 비롯 자작곡이라고 발표된 곡들이 대부분 음악적으로 평가할 가치가 없을 만큼 불안정한 결과가 나오고 맙니다. 당시 이들이 보여준 '오판'은 3집 직전 다소 애매하게 나온 2.5집격에서 발표된 유영진의 'We are the future'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한층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는데요. 이 곡은 열맞춰, 늑대와 양, 전사의 후예와 코드를 공유하면서도 음악 감각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대중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령 실패했더라도 이미 가지고 있는 '컨셉'을 지킨다는 것이 아이돌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백청강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곡으로 꼽았던 'We are the future'


이 곡이 어떻게 보면 HOT가 기존에 가진 기획 컨셉을 유지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 셈이 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SM은 이 당시부터 HOT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접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HOT의 원래 기획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 엄두를 못냈던 것인지, 4집에 이르러서는 앨범 수록곡 전곡과 프로듀싱을 맡겨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고 기획의 주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HOT는 이후 가뜩이나 불안해진 기획 정체성과 함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맴버들의 아무런 철학이 없는 무미건조한 음악 성향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기획 주체가 사라진 아이돌 그룹의 말로는 볼 필요도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죠.

HOT가 SM에 남긴 유산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SM 최초의 성공작'이 아닌 '최초의 실패작'이라는 상징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해서 SM이 정말 오랫동안 벤치마킹했던 일본의 '캐릭터형 아이돌' 시스템이 국내에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점을 HOT의 실패로 인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요. 이후 SM은 선행 기획 후 해당 그룹에 맞춘 퍼즐 맞추기 형태의 일본식 아이돌 기획 시스템 노선을 대폭 수정하기에 이릅니다만, 문제는 HOT의 기획 실패를 통해 그들이 분석한 실패 원인이 한국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기획 차원의 반성이 아닌 완벽한 기획에 대한 유망주들의 소화력 부족으로 기획이 가진 포텐셜이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는 지극히 책임회피적인 결론을 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유영진을 비롯한 SM이 날고 긴다 한들 이제 막 아이돌 시장이 태동하려는 한국 시장에서 당시 그들은 풋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에도 그들이 가진 음악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한국 시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본의 성향과는 상당 부분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만 SM은 자체적인 기획 노선을 한국 성향에 맞게 최적화하기보다는 그들의 기획 성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유망주들의 육성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쪽을 택하게 되죠. 이러한 그들의 이기적인 고집이 향후 SM 그리고 아이돌 시장의 기획 판도를 어떻게 바꾸게 될 지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中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