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ushAm 2011. 6. 25. 22:36
상 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 못보신 분들은 클릭

그들이 HOT의 '실패'에서 깨닫게 된 실패 원인은 놀랍게도 '기획의 미숙함'이 아니라 기획은 완벽했으나 그 완벽한 기획을 제대로 소화해주지 못한 유망주들의 실력 부재였습니다. 물론 아무리 지난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 SM의 이같은 판단이 반드시 잘못된 결과론을 도출하기도 애매합니다. 사실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책임이 아닌 SM, 나아가서는 가요 시장 전반에 있었거든요. 아직 대한민국은 아이돌 시장을 어떻게 소비해야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SM은 그런 아이돌 시장이 이미 안정화되었다는 전제 하에 너무 기획을 완벽하게만 짜내려고 했으며 그런 치밀한 기획을 접해보지 않았던 유망주들이 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소화할 리가 없었던거죠. 다시말해 시장, 유망주, 기획사 모두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기때문에 시간을 두고 같이 성장시켜야 했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획은 완벽하다'라는 SM의 편식성 자아도취로 인해 아이돌 시장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난 천재니까...


그 한계를 매우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 바로 HOT의 해체입니다. 얼핏 보면 계약분쟁만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사실 일부 SM맴버들이 '회사에 남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계약분쟁으로 치부하기에 어려운 감이 있는데요. 이들 5명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행보를 보면 각각 롹커(...), 소프트팝가수 (이상 SM에 잔류한 문희준, 강타) 1인 기획사 창업 후 브리티시 팝, 힙합 음악, 댄스 위주 보컬 (이상 잔류하지 않은 토니안, 이재원, 장우혁) 입니다. 눈치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류하지 않은 3인의 음악적 행보가 SM이 지금 현 시점까지 해왔던 음악적 색깔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우선적인 문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단지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게 해준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SM은 HOT의 표면적 성공을 기반으로 꽤 빠른 시점에 주식회사로 전환 코스피에 상장을 하게 되는데요. 이 상장이라는게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공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만, 냉정히 보면 결국 '회사'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아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경영상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업계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애착이 없이도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이 회사를 소유해서 내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경영권 방어'가 안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의 수익을 위해 무조건 생산적인 활동만을 해야하고 지출을 줄여 순익을 높이는 활동을 강요받게 되는데요. 바로 이 점이 SM전체 조직의 분위기를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리더 문희준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사회비판적인 음악 코드와 강한 전사의 이미지라는 HOT의 기획은 문희준의 솔로 데뷰로 이어졌고 HOT의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소프트팝 음악을 추구했던 강타의 잔류는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SM이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과 크게 차이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은 3인은 일단 당시 시점에서 해오던 음악도 아니었고 그들의 음악을 뒷받침할 기획 인력도 없었습니다. 즉 추가 투자가 필요했던 사안이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들이 요구했던 부분은 '가수로서의 재계약'이 아닌 '일정 지위 이상의 승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가수로서 활동은 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추구하는 후배들을 SM 내에서 키워내는 새로운 파트를 맡고 싶다는 것이었죠. 이들의 요구는 기획사에 소속되어 5년 이상 활동한 가수로서는 지극히 당연할수밖에 없는 요구였습니다만, SM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음악을 기획할 자금도 그들을 중역급에 가까운 대우를 해주며 신인을 키우는 역할을 부여해줄 생각도 없거니와 결정적으로 'SM의 기획 가능한 권리'를 독점하고 싶어했던 경영진을 위시한 실무진들의 몽니가 자칫 아이돌들의 은퇴 후 승진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정착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문희준의 솔로 데뷰가 지속적인 안티팬만 양산하자 SM은 아무미련없이 문희준을 포기한다. 그의 군입대는 안티팬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군 제대 후 2008년 싸이더스 소속으로 신보를 냈을 당시...


SM은 돈을 많이 안주거나 노예계약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신인으로 입사해서 열심히 SM이 하라는 대로 기획에 발맞춰 꼭두각시짓 하고 난 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동네 피자집도 3년 이상 배달일 열심히 하면 매니저 승진의 기회가 있기 마련인데, SM은 적어도 가수들에게 있어서 '회사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무진 참여'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기획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프로듀서를 하던 사람들 즉 유영진 라인이 독점할수밖에 없었고 그 아래에서 아무리 강타나 문희준이 선배급 대우를 받으며 승진을 한 들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신인을 기획하거나 키워내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HOT의 해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를 알고서도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쪽이 SM에 남았고 이에 반기를 든 3인이 박차고 나간 것이 되는 셈인데요, 물론 세간에 알려진대로 불공정한 계약 관행 역시 문제가 되었겠습니다만 그 이전에 사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SM 5년차로서 그에 걸맞는 지위 상승과 연봉을 요구했고 승진도 안시켜줄거고 돈도 지금 이상 더 줄 생각이 없다는 SM의 입장이 이들과 대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승자박에 가까웠던 SM의 HOT에 대한 오판은 이후 SM의 행보에 있어 갖은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데요. 우선 4집부터 과감하게 시행한 실력파 아이돌의 육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이는 물론 그렇게 나온 아웃풋이 상품성이 너무 떨어졌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더 큰 문제점은 그렇게 키워놓은 결과 자신들의 능력과 경력을 내세워 '상관 대우'를 요구하는 빌미가 된다는 점이었죠. SM은 이후 5년 주기를 꾸준히 지키는 한편,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티스트형' 유망주를 멀리하는 등 철저하게 아이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유닛형 유망주만을 선발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냥 기획한 대로 잘 소화해주는 유망주가 필요할 뿐 음악적 역량을 키워 새로운 음악 포멧을 추구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을 아티스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죠.

바다 이야기는 좀 하고 넘어가자, SM 소속 가수 중 최초로 유영진 사단에 '개긴'뒤 재계약 불발과 소속사 이적 이후 전설적인 수준의 찌질한 방해공작은 이미 잘 알려져있지만, 그녀가 왜 SM에 개겼는지, 왜 그 개김에 SM이 발끈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위키에도 언급이 안되어있다) 가수였던 아버지에 의해 오랫동안 트레이닝된 그녀만의 독창적인 창법은 흔히 SM창법이라 불리는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이를 유영진 사단이 자신의 기획에 맞게 맞춰나가면서 창법 개조를 거부한 바다측과 트러블이 잦았다고 한다. 자신의 기획과 음악에 대한 프라이드가 하늘을 찔렀던 당시의 유영진 사단에게 있어 이런 행위는 하극상과 다름없게 받아들여졌고, 결국 메인 보컬의 탈퇴라는 흐름을 감수한 채 SES와 바다 모두를 떠나보내는 강수를 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다 한 사람만으로 SM, 특히 유영진 사단의 성향을 적나라하게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보아!

보아는 이런 어수선한 환경 속에서 기획된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연하겠지만 HOT의 사례에서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는 SM의 철학이 모두 집대성된 최초의 작품이자 (좋지 않은 의미에서)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죠. 당연하겠지만, 보아가 일본에 진출한다는 의미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일본 진출과 귀결되어 있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300만장 싱글기록 우타다 히카루의 800만장 앨범신기록 등이 팡팡 터저나오며 음반 시장이 급폭발하던 당시 일본 시장은 SM이 소박만 치더라도 한국의 몇 배 이상의 돈을 벌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요. 특히 아직도 음반협회에서 MP3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내수 음반 시장의 급격한 침체 역시 그들을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계기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보아는 '유영진'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안고 출발할수밖에 없었는데요. 지금으로 치면 중2병이라도 걸린 듯한 유영진의 '사회비판'에 대한 집착은 보아의 데뷰곡 ID PEACE B의 실패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문제는 유영진이 진짜 10대를 제대로 분석하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가사와 곡을 쓸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고, 그런 곡이 10대들에게 음악적으로라도 어필이 되었냐면 그쪽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보아는 데뷰때부터 각종 구설수에 시달리며 기획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집니다. 보아는 후속곡 '사라'로 SM의 거의 사력을 다한 푸쉬를 통해 명예회복에 성공하지만, 예정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일본 진출 준비에 전력을 쏟게 되죠. 준비를 하면서 간간히 국내에서의 신곡 활동을 겸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보아의 멘탈 손상이 극심하다고 판단했을것으로 본 SM은 외부노출을 극도로 꺼린 채 AVEX와 공동으로 제 2의 육성에 돌입합니다.


이 보아의 육성 과정 역시 SM의 아이돌 육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1999년 데뷰 이후 2년 이상의 공백기를 거친 2001년 일본 데뷰까지 2년간의 공백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제 2차 트레이닝이 그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SM의 육성 기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음악적 감각과 댄스 실력, 아이돌 컨셉 소화 능력까지 포함해서 2년을 넘기기 힘들었습니다만, (악명높았던 SES의 트레이닝기간도 2년 전후) 보아의 경우 투자 금액과 트레이닝 기간이 비약적으로 길어져버린 것이죠. 댄스나 음악에 대한 감각 등 기초 트레이닝 과정 2년에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어 능력이나 예능 개그 연습, 간단한 단막극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연기까지 복합적으로 손을 대는 과정 2년이 다시 포함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길어진 트레이닝 기간이 정설이 된 이유는 보아의 기하학적인 성공 사례 때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죠.

여기에 보아가 SM의 육성 과정에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아이돌'의 데뷰기준 연령대를 높인 대신 육성시작연령대를 대폭 낮추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10대 초반부터 육성을 시작하는 조기육성이 향후 재능 계발 측면에서 효과적인 부분이 분명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생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죠. 단체 합숙과 끝없는 연습, 절대적인 서열 체계의 엄격함 속에서 자라나는 유망주들은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서열 체계 속 상하관계에 훨씬 더 익숙해지고 맙니다.

HOT 맴버가 아닌 보아가 서열 1위인 이유...


이는 SM에 있어 두 가지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데요. 우선 육성 과정에서 SM에 절대적인 충성도를 주입시켜 향후 재계약이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데에 드는 장벽을 대폭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첫 번째이고, 잘 알려져있지 않은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생활 통제, 즉 아이돌의 순수무결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이돌 윤리 기준은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과거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나 폭력에 연루된 증거 등 윤리의식에 반하는 과거가 적발될 경우 아이돌로서 살아남기 힘든 풍토가 (당시까지는)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생활 전반을 통제함으로서 데뷰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문제점을 사전 예방하고자 하는 포석이 있었던 것이죠. 일본이야 아이돌이 스캔들을 일으키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시스템입니다만, 에초 계약 자체가 일방적인 육성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국의 계약 조건에서는 그런 조항을 넣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에초 소속 정규직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상품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 쪽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보아'의 성공 전후,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SM의 주식시장상장을 전후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SM의 육성 체계가 급작스럽게 늘어난 시기가 보아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뒤라고 가정한다면 2002년 후반 정도가 되는데요. 문제는 이 때까지 정상적인 흐름으로 국내 시장을 노리던 SM의 보이그룹 걸그룹 라인이 급작스럽게 '해외 경쟁력이 있는' 소수정예 라인으로 수정되면서 국내용 아이돌로 키워지던 아이돌이 떨이처리되듯 쏟아져나오게 되는데요. 보아 라인이었던 다나, SES라인이었던 밀크, HOT-신화 라인이었던 블랙비트가 속속 데뷰를 빙자한 '정리'가 되면서 SM의 유망주라인은 새 판을 짜게 됩니다.

SM의 잃어버린 역사로 남아있는 그들...블랙비트


사실 그냥 키우던 애들을 더 키워서 해외진출시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블랙비트의 경우 이미 5년 이상 육성이 끝난 상태였고 그밖의 그룹 역시 그 시점에서 나이가 20줄을 넘긴 데뷰 시기가 꽉 차버린데다, 그렇게 머리가 굵어진 애들을 추가적인 비용과 시간을 들여 육성시키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해외 진출하는 데에 있어 국내용 이상의 포텐셜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옮은 판단이었던 역사적인 오판이었건 말입니다.

그리고 SM이 가질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고민은 '보아'라는 거대한 떡밥에 비해 SM이 가진 실속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인데요. 사실상 AVEX 산하의 이른바 '아무로 - 하마사키 - 코다'라인을 탔던 보아의 후광 탓에 SM이 보아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이 거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보아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곡들은 대부분 일본 원곡인데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곡 역시 스웨덴 리메이크곡 NO.1 .... 음악 최우선주의를 표방했던 SM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음에 분명했을테죠. 게다가 유영진의 곡 메이킹 능력 역시 이전의 불안한 중2병 때와는 달리 보아의 NO.1앨범을 기준으로 점점 완숙함을 보이고 있는 시점이었기때문에 진정 '지분 100%'를 가지고 '자신들이 만든 곡'을 내세워 일본 시장을 공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 했습니다. 물론 속사정을 살펴보면 보아의 성공에도 이렇다할 저작권료 수익같은 것이 대부분 AVEX좋은 일만 시켜버린 상황에서 SM에 돈이 돌지 않으니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해외진출'을 위시한 투자금 추가 유치를 끌어낼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기존 라인을 다 버리는 모험수를 감행하며 그룹 하나를 데뷰시킵니다. 지금까지 AVEX나 BING을 벤치마킹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쟈니즈 냄새가 풀풀풍기는 5인조 보이그룹이 ....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RushAm 2011. 1. 8. 22:58
동방신기는 데뷰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그룹입니다. 한자 문화권을 의식해 그룹명부터 맴버들 이름까지 4글자로 맞추어져 있었고 사실 전략상에 있어서 그들의 활동은 다분히 일본보다는 중국쪽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들이 왜 첫 방문지로 일본을 택했느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SM의 중국쪽 기반 닦기가 완성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이른바 일본 가요시장의 중화권 영향력 (사카이 노리코 약물시망에 중국이 들썩거렸던 그 내공)을 빌리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사실 중화권에 퍼져있는 JPOP의 영향력은 상당한편이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중국의 '혐한'기류는 동방신기에 있어 이로울게 없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초창기 SM이 기획했던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이미지가 국내에서 제대로 먹히지 않자 급격히 음악의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HOT나 신화 때와는 다른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에 그치고 있었던 점도 이들의 해외 진출을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들이 가지는 이미지는 보아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보아는 단 싱글 없이 정규 1집 달랑 한장만을 내고 일본에 진출한 이른바 '순혈 유망주'였지만 동방신기는 싱글 1집 HUG 부터 정규 2집 '라이징 썬'까지 싱글을 포함 6장 이상의 음반을 내며 2년간 국내에서 활동하면서도 가요계를 '지배한다'싶을만큼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예정된 수순처럼 일본행을 결정합니다. '유망주'가 가지는 기대감보다는 지금의 '카라'가 가진 이미지와 상당히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하시면 쉬우실텐데요. 보아때는 이런 저런 스캔들로 인해 생각보다 해외 진출을 도망치듯 서두른 감도 있었습니다만, 동방신기는 SM이 가장 자신있어하던 보이그룹의 계보를 잇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이들이 어느정도 브레이크를 해주지 못하면 뒤를 잇는 SM표 아이돌들이 고스란히 하향세에 편승하게 되는 아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어떻게든 국내를 평정하고 떠나야만 했던거죠.

그러나 당시 SM이 몇 가지 오판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이들의 '포텐셜'로서.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너무 조기에 포기해버린 감이 없지 않은데요. 당시에는 SG워너비를 필두로 실력있는 R&B뮤지션들의 대거 히트로 사실상 이들과 실력으로의 맞대결에서 진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시장층인 10대 아이돌로 대상을 급히 선회하여 본전이라도 찾자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이 선택이 SM으로 하여금 '본전'을 찾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른바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에 기대를 걸었던 동방신기의 일부 맴버들에게는 상당한 좌절감을 가져다줍니다. 이들이 목표로 했던 것과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전편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는 생각보다 제법 큰 파장을 불러옵니다.


두 번째로 오판했던 부분은 이들이 '일본'에서 지금만큼 히트를 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SM은 보아 때와는 상당히 다른 전략으로 동방신기 일본 진출을 준비합니다. 다름아닌 '돈으로 밀어부치기' 로서 일본 진출이 본격화될 당시에 시부야 109의 벽면에 동방신기 전면광고가 걸리는(옥외광고로는 천문학적인 광고비가 투입되는 일본의 타임스퀘어급 장소입니다) 등 마케팅을 대단히 공격적으로 진행하는데요. 이는 일본에서 그들이 초반에 강한 인상을 남겨야 그 파도가 계속 이어나간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발상에서 나왔던 전략이었습니다. 일본 시장은 그야말로 '꾸준함'이 핵심인데 이러한 공격적인 마케팅은 아무리 돈줄이 넘치는 SM이라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게 되죠.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초반에 돈을 많이 쏟아붓는다한들 일본 시장의 우직함은 즉결적인 반응을 내지 못했습니다. 지금이야 제 2의 한류라고 해서 한국 그룹들이 데뷰 직후부터 주목받습니다만 당시에는 한류 열풍 사그러드나 뭐 이런 기사가 쏟아져나올 때이니 즉각적인 반응이 있을 리가 없었겠죠. 당연하겠지만 지금의 소녀시대에 거는 기대와 당시 동방신기가 받았던 기대 수준은 많이 다릅니다. 소녀시대는 국내를 완벽하게 평정한 뒤 일본에 진출했지만 동방신기는 그 정도까지는 못 해냈거든요. 그렇기에 국내에서의 기대감이나 관심 역시 지금의 소녀시대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동방신기 해체 후 다시 등장한 전면광고


이런 현실을 SM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만 여기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오판한 부분은 그만큼 돈을 투자했는데 동방신기가 투자한 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하자 너무 쉽게 동방신기의 해외 시장 가능성을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물론 국내 소속은 SM으로 남아있었습니다만, '보아'의 리즈시절 당시 거의 지분을 얻지 못했던 실패를 거울삼아 동방신기만큼은 AVEX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든 스스로 일본 마케팅을 전개해 일본 지분을 확보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SM은 동방신기의 일본 활동에 대한 성공 가능성과 그에 따른 지분을 사실상 투자 실패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쯤을 기준으로 AVEX에게 다시 무게추가 넘어가게 되는데 그들은 '보아' 마케팅의 경험과 이른바 '고무로테츠야'의 노하우를 접목시켜 국내에 거의 그 소식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치밀하게 동방신기의 일본 활동을 '일본식 정석'대로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슈퍼주니어가 데뷰하게 되는데 동방신기의 정식 데뷰 후 채 2년이 지나지 않은데다가 동방신기가 국내 시장에서 정통 아이돌 음악으로 회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른바 '5년 주기'에도 전혀 걸맞지 않은 매우 시급한 조치였는데요. 슈퍼주니어는 우려했던 대로 동방신기로 인해 다소 하락세를 맞은 아이돌 시장의 부담을 그대로 안고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그들의 역할은 특별히 국내 시장 평정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지금 그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한국에서 인지도를 높이는데 (예전 SM에 비하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SM의 돈줄이 말랐을수도 있고 그밖에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슈퍼주니어의 역할은 처음부터 SM의 이른바 '중국공정'이 완료될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공정이 완료된 직후 미련없이 '중국'으로 건너가 그야말로 SM의 중국 간판으로 활약합니다. 동방신기를 위해 닦은 길을 슈퍼주니어가 어부지리로 혜택을 본 셈이 되겠네요.

이렇게 SM이 점점 국내 시장에서도 딱히 대박을 낳지 못하던 와중에도 동방신기는 소리소문없이 일본에서 기반을 닦고 있었습니다. SM도 물론 그쪽을 신경쓰고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뭔지 알 수 없는 믿는 구석이 있는 듯 했죠. 동방신기를 공동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손 안대고 코푸는 입장이었던 SM이 특별히 불만이 있었을 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AVEX와 동방신기 본인들 입장은 상당히 달랐던 것 같은데요. 그도 그럴것이 그들이 전개하는 음악 성향이 한국에서 활동하던 때와 정말 너무 많이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AVEX는 원래 아이돌을 육성하는 기획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동방신기를 택하고 동방신기에 공들이는 과정에서 실력이나 가진 내공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음악을 배정하는 일은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죠. 마케팅은 맞춤으로 하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에 있어서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부심이 과해 미국 진출 후 빚더미에 앉게 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래서인지 동방신기는 하마사키 아유미나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주로 거물급 여성 가수들이 중심이 되고 있는 AVEX본사가 아닌 당시로서는 신인에 가까웠던 EXILE이 소속되어 있는 '리듬존'소속으로 활동하며 지금의 EXILE과 거의 유사한 음악 색깔과 육성, 마케팅 전략을 적용받게 되는데요. 이게 생각보다 조금씩 먹혀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음반 판매에 있어서도 팡 터지다 바로 사라지는 게 아닌 차분히 50위권 내를 오래 지켜나가는 일이 많아지던 것도 이 시기죠.


'하라는 음악'이 아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성공을 하게 되면 앞서 예를 들었던 '원더걸스'의 사례와 정 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는데요. 이른바 '원 소속사에 대한 불신'이 그것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시아준수가 당했던 '아이돌답지 않은 외모'로 인한 무시는 거의 전설적인 수준이었는데요.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맴버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아이돌다운 '유노윤호'를 제치고 톱에 나서는 둥 전세가 역전된 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의 유노윤호는 맴버 전체의 인기에 비해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수준입니다) 게다가 이런 활동의 극단적 변화 속에서도 특별히 한국에서의 위상을 잃지 않으면서 한국에서 발매된 미로틱으로 50만을 돌파하는 등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높아진 위상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점도 큰 영향을 끼쳤을것이라 사료됩니다. 미로틱 이전, 동방신기는 국내에서 거의 마케팅을 전개하지 않았기에 인지도가 많이 낮아진 상태였음에도 결과가 좋았다는 것은 그들의 멘탈 깊숙한 곳에 어떤 완고한 무언가를 만드는데에 부족함이 없었겠지요

아이돌 형태의 그룹도 노래 못하면 쳐주질 않는 AVEX, 사진은 최근 고무로가 밀고 있는 AAA


이런 와중에 일본에서는 동방신기의 영향력이 점차 내실을 갖추고 가속엔진을 달기 시작하는데요. 다년간 다져온 내실에서 커가는 나무는 거침이 없었고 그들은 2008년과 2009년 그룹 결성 이후 최전성기를 맞으며 쾌진격을 계속합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일본은 이 시기부터 음반 시장, 특히 음반 판매율 평균치에 있어 거의 전년도의 반토막 수준으로 급락하게 되는데요. 대형 신인들의 잇따른 실패와, 장기불황으로 인한 음반 시장의 침체, 그리고 자스락이라는 일본 저작권단체의 너무나도 완고한 폐쇄적 정책으로 인해 시장이 빠르게 디지털화하는 변화의 흐름을 더디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국민들이 음악을 접할 기회를 상당 부분 제한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아이팟의 보급이 거의 안정권으로 접어들어 아이팟 음원 다운로드 시장이 순수 음반 시장을 잠식해가는 이른바 '검은 배'효과가 현실화되고 있어서 젊은 층들은 이제 더 이상 음반을 사지 않게 되었죠. 싱글 시장은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만 앨범 시장에서는 정말 가창력이 있는 깊은 인지도의 가수들조차 100만장을 팔기 힘겨워하는 실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 현실화되고 있었습니다.

동방신기는 바로 이 때와 맞물려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즉 '가창력'과 '아이돌'의 중간자적 역할을 하며 20대 이상의 소비 연령층에게 대거 어필하게 되죠. 이같은 음악계의 상대적 고연령층시장은 '아이팟'을 활용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음반을 구매하는 세대가 대부분으로 이들은 아라시 이후에 등장한 쟈니즈표 아이돌들을 동방신기가 가볍게 짓밟는 것을 가능케 한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어줍니다. 아무리 오리콘에서 음원 판매 비중을 반영한다 한들 일본 레코드 대상은 여전히 실 음반 판매 비중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사실 그게 실제 인기와 수익성에 결부되어 있기도 하니까요. 다시 말해 동방신기는 실제 얻는 인기 수준을 가지고 비교해봤을때 거의 동급수준의 아이돌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줄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음반시장뿐만이 아니라 콘서트 등 실질적인 구매력을 가늠하는 부분에 직결되는 것이죠.

' 관련글 > 동방신기' 콘서트 보고 싶은 가수 2위 선정 <

사실 음반 시장의 침체는 전통적으로 음악성에 승부를 걸어왔던 AVEX에는 거의 치명타였습니다. 하마사키 아유미나 오오츠카 아이 등 간판 레코드이터들이 국내외적으로 예전만 못한 부진에 휩싸인데다 자금 사정마저 좋지 못해 한때 납세자 3위에 올랐던 고무로테츠야가 사기죄로 구속되는 등 이런저런 내홍으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죠. 이런 와중에 동방신기의 독주는 AVEX를 거의 먹여살리다시피 하던 셈이었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동방신기의 음반 판매량은 줄어들기는 커녕 더 늘어났으며 마치 가뭄이 들어 물이 줄어드는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하는 바위산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죠. 그 페이스는 정말 대단해서 보이그룹의 철옹성이라 불리던 쟈니즈 라인을 그들 아래로 속속 떨구며 정상권을 향해 진입합니다. 이들의 인기는 그들의 이름을 건 방송 하나 없이 순수하게 음악 활동으로 이루어낸 성과이기에 더 대단했고 가치가 있었으며 급기야는 쟈니즈 라인들이 동방신기의 발매 시기를 피해 음반을 발표하는 그야말로 '대놓고 견제'까지 이끌어낼 정도의 존재감을 발휘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데뷰한지 딱 5년째 되는 2009년,
이미 예고되었던 것과 다름없는 사상 초유의 계약 분쟁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본의아니게 단지 SM만의 문제가 아닌 AVEX와 일본 가요계 전반이 직 간접적으로 관여된
생각보다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이 되고 마는데요.
국내에 보도된 단지 소속사와의 계약금 분쟁 이상의 더 큰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4부작 기획 '대한민국 아이돌 산업을 말한다' 목차

제 1부 : 계약
제 2부 : 기획사
제 3부 : 2PM, 동방신기
제 4부 : 쟈니즈, 에이벡스
posted by RushAm 2009. 9. 10. 09:44
일단 사건이 일단락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발언권을 얻기가 참 수월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언제나 손잡이가 뜨거울때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사건의 직접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도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사건이 생각보다 일찌감치 결론이 지어지는 바람에 이 글도 꽤 빨리 쓰여지게 되어 조금 아이러니한 기분이다. 뒤늦은 입장 바꾸기도 동정론도 아닌 그냥 그 당시 상황을 추측해보려는 차원에서 쓰는 글이므로 개인적인 사견일 뿐 진실에 어느 정도 접근했는지에 대해서는 보증할 수 없기에 이를 분명히 해두는 바이다. 또한 지난 성명에서와 같이 사건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범군에 대한 '옹호'나 '비난'처럼 양쪽 차원이 아닌 문제의 근본적인 부분을 짚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아울러 밝혀둔다.

우선 재범군의 전 소속팀 2PM의 소속사 JYP가 가지고 있는 본래 색깔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JYP는 일간에 알려진 것처럼 '미국적'인 선진형 음악을 하는 곳이 아니라 미국에서 벤치마킹한 그룹 혹은 음악 트랜드를 과거 몇십년대에 걸쳐 분석, 샘플링한 뒤 한국의 현 시대 흐름에 걸맞는 기획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기획사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나 영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세계적인 트랜디 세터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적어도 이미 성공한 전례가 있는 음악 트랜드를 다시 가져와서 세련되게 리폼한 다음 한국 시장에 최적화시켜 내놓는데에는 어느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JYP의 히트메이커라는 이름 뒤에는 실제로 '히트'만을 위해 하고 싶은 음악을 포기한 채 기획된 대본대로 움직여야 하는 가수들의 어려움이 있게 되는데 몇 년 전 비가 JYP와 재계약을 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야하게 생각했지만 아마도 비는 JYP의 이러한 부분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반증으로 이후 'JYP'측이 '원더걸스와의 비교'발언을 통해 비를 직설적으로 깎아내린 부분이 이를 증명해준다.



 감이 잘 안오시는 분들을 위해 지금까지의 JYP의 행보를 살펴보도록 하자, 싸이더스와 이름을 공유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JYP가 기획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GOD의 경우 도중 윤계상의 군입대와 박준형의 맴버 배제론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이후 결국 조용히 그 자취를 감추었는데, 물론 제각각 솔로 앨범 활동이나 뮤지컬, 정극 등 맴버들이 제각각 자신의 하고 싶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손호영을 비롯해 JYP가 독립적인 기획사로 만들어진 지금까지도 어느 누구하나 해체 이후 회사로부터 재기를 위한 도움을 받았다는 맴버를 찾을 수가 없다. JYP의 대표적인 실패사례인 '량현량하'의 경우 잘된 기획으로 많은 화제를 뿌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정작 상품성 측면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어 새로 도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방출되었고 그들이 성인이 되어 군대에 갔다는 뉴스만이 신선함을 주었던 사건처럼 JYP는 가지고 있는 상업성을 생각만큼 능숙하게 감추지 못한 채 곳곳에서 드러내왔다.

재범군 사건처럼 너무 과거사만 들먹이는 게 아닌가 싶어 좀 최근 사례를 살펴보자면 JYP소속으로 지난해 많은 주목을 받았던 'JOO'의 경우 데뷰 직후부터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 팬들로부터 적발되어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적이 있는데 이 당시 JYP는 여론의 추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판단하여 JOO의 활동을 강행했지만 결국 잠재되어있는 좋지 않은 이미지까지 파악하지 못한 것이 패안이 되어 실패했고, 결국 그녀는 1년 넘게 새로운 소식을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그녀와 단적으로 비교되는 인물이 SM의 '보아'인데 그녀 역시 데뷰 초 이른바 '보아의 일기'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이쪽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완벽한 루머였음에도 자극적인 소재로 인해 파장이 JOO와는 비교조차 되지 못했다) 1집 활동에 상당힌 위기를 맞게 되지만 SM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1집 후속곡 '사라'로 음악적 존재감을 어필하여 스스로 루머를 이겨내게끔 만들었다. 물론 그 후 그녀의 일본행과 귀국 후의 큰 성공 '움직이는 벤처기업'이라는 유행어의 본고장으로 만들기까지 어떻게 보면 보아 본인의 노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 노력이 꽃피기 전에 단 한순간의 선택으로 그녀를 영원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절대권한을 가진 'SM'의 선택이 없었다면 그녀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기획사의 권한과 그에 따른 역할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JYP는 이처럼 철저한 기획과 그 기획을 소화해줄만한 맞춤형 '유닛'들을 생산해내지 않으면 안되기때문에 유망주를 길러내는 과정에서도 다른 기획사와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인다. JYP가 기획한 아이돌 그룹들을 잘 살펴보면 다른 아이돌 그룹과는 다르게 '맴버별로 제각각의 개성을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그룹 전체가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스크립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비롯한 대부분의 곡들과 2PM의 10점만점에 10점이 대표적) 이런 이유로 인해 JYP에서는 유망주들이 '하고 싶은 음악'이나 '하고 싶은 안무'같은 개인의 욕망은 철저하게 무시된 채 진두지휘하는 기획사에 의해 계산된 유닛들로 구성되어 기계적인 반복이 가능할 만큼 트레이닝을 이룬 후 상품으로 출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나오는 '불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음악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가장 음악성이 뛰어나다는 JYP로 들어왔는데 이건 무슨 SM보다 더 꼭두각시를 만들어대고 있으니 놀랍기도 하고, 그래서 실망을 하고 뛰쳐나가고 싶지만  어렵게 합격한 기획사인데, 도중에 포기하면 인생 망가질것 같고, 이 연습생 생활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건지 알 길이 없고... 아마 다른 기획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JYP의 연습생 시절은 암울함 그 자체일것으로 생각된다. 일례로 YG의 경우 그 목적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연습생들 중 가능성이 보이는 맴버들을 기존에 데뷰한 아이돌 그룹에 옵저버로 잠시 활용하는 (피쳐링이나 백댄서 등으로) 형태로 이들의 막연함을 달래기도 하는데, JYP의 경우 워낙 데뷰 전까지 신비주의 전략을 강하게 고수하는 부분도 있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프로젝트에 '옵저버'가 들어갈 틈바구니란 에초부터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에서 어떤 재능을 보였기에 재범군이 JYP로 발탁되엇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연습생 시절 비교적 자유분방한 의견개진이 가능한 문화권에서 살아온 그가 JYP로부터 받는 충격은 아마 그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기인지 메일인지 모르는 글을 잘 보면 '한국인들은 랩 같지도 않은 랩을 듣고 좋아라 한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당시 그가 어떤 심정으로 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아마 미국의 50센트나 에미넴 같은 래퍼를 꿈꾸었던 것 같지만 한국 시장에서 그 둘의 음반 판매량이 지금의 2PM음반 판매량과 비교가 될 리 없는 게 현실이었을테니까, 에초 레벨 문제를 떠나서 음악을 소비하는 취향적 문제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JYP는 이런 그의 희망을 가볍게 묵살하고 지극히 한국인이 듣기에 무리가 없고 '한국에서 팔릴 수 있는' 음악을 반복적으로 연습을 강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가 다른 연습생이 아닌 미국인 친구와 마이스페이스라는 미국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적어도 JYP의 분위기 상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이미 JYP는 그런 식으로 원더걸스를 범국민적인 아이돌로 만들어낸 '성공전례'가 있기에 그들의 육성 과정은 JYP 내부에서는 법 그 이상으로 치부되지 않았을지 싶은데, 이런 환경에서 JYP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신격모독과 다름없을만큼의 프렛셔를 수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과연 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다시말해 '짐승남'으로 2PM이 원더걸스에 이어 범국민적인 인지도를 얻는 데에 시동을 걸 만큼 위상이 달라진 시점에서까지 마이스페이스에 남긴 생각과 크게 다름없는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인데, 개인적으로는 '아니다'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여기에는 재범군 본인의 사례보다 지금 상황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결과론'이 이미 나와있다. 다름아닌 원더걸스인데, 그녀들이 국민적 걸그룹으로 각광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곡 '텔미'가 전국을 한바탕 강타한 뒤 맴버들에 의해 텔미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속속 알려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알려진 것들 중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맴버들이 텔미 곡을 받고 의상을 받아들고 하기가 싫어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는 부분으로, 이를 통해 원더걸스 역시 아직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JYP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원더걸스가 그때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을까? 대답은 NO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 '성공'했으니까 아무리 기가 센 사람이라도 저절로 입이 닥쳐질만큼 엄청난 '대성공'을 거두었으니까, 결국 JYP의 말대로 됐으니까, 국민들은 JYP가 가르쳐준 대로 하니까 자신들을 국민적인 걸그룹으로 칭송해주고 있으니까, 종교로 보자면 이미 기적을 본 그들에게는  JYP에 대한 불신이 생길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JYP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연습생 시절 제각각 개성적인 음악적 꿈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음악을 버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지만 결국 자신들의 음악으로는 성공할 수 없었고 JYP가 가르쳐준 음악이 '대한민국'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키워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실 맴버들이 거부감을 갖는 걸로 따지면 '텔미'보다 '노바디'가 훨씬 더 했겠지만 (모두 같은 옷에 나오지도 않는 마이크에 정해진 루트에 의한 안무, 빤짝이 의상에 전혀 트랜디하지 않은 음악까지) 맴버들은 이미 텔미의 성공으로 인해 JYP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텔미때보다 훨씬 높은 싱크로를 보여줄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노바디'는 기획 당시의 포텐셜을 모두 폭발시키며 텔미 이상의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된다. 즉 재범군도 2PM이 이미 본 궤도에 올라온 상황에서 그가 방송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반드시 거짓이라고는 보기가 힘들 것이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적어도 그는 TV에서 '지금의 성공'에 취해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그의 표정 어디에서도 예전 음악에 대한 미련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니까. 그의 마이스페이스에 나온 사상대로라면 그들에게 붙여진 '짐승남'이라는 타이틀에 경기를 일으키고도 남았겠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별로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 역시도 JYP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을 버린 채 지금의 인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게 아니었을지 싶다.


다시 본 사건으로 돌아와보자 JYP의 재범군에 대한 조치, 대단히 신속 정확하다. 다른 맴버들의 상품성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2PM의 해체 대신 무려 '리더'인 재범군의 탈퇴를 선언한다. 그것도 사건이 터진지 하루만에 나온 공식 사과문에 이은 3일만에 결정된 조치였다. 정말이지 상업성에 있어서는 미숙함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만일 그들이 언론을 통해 '어떤 입장 표명'을 했거나 그를 위한 변명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재범군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 남은 맴버들 나아가 2PM이 가진 상품적 가치가 훼손이 아닌 송두리째 날아갈수도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그들은 다른 걸 생각하지 않고 신속하게 아무 미련이나 애착, 정 없이 재범군을 퇴장시켰다. 여론은 의도한 대로 재범군에 대한 동정론으로 흐르고 있지만 이는 재범군 본인에게 아닌 '2PM'에게 득이 되어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이를 JYP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재범군은 적어도 JYP소속으로는 두 번 다시 한국에서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지금 심정이 어떤지를 대강 알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로 '상업성'의 극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증명해준 JYP가 받은 타격은 그렇게 크지 않다. 2PM은 건져냈고 여론도 반전됐으니까, 모든 이야기의 핀트를 조금도 남김없이 재범군 한명에게 집중시키는데에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모자라서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타격은 최소화하면서 내치는 그의 등에 '과녁'을 그려넣어 자신들에게 돌아올 화살마저 그에게 모두 향하도록 만드는 극악함을 보여주기까지 하고 있다. 재범군의 잘못은 적어도 '한국 연예계'에서는 절대 통용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지만 문제는 과연 그 하나에게 돌을 던지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었을지, 과연 이같은 사태를 '회사'의 입장이 아닌 '연예인 지망생'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작은 움직임조차 없이 끝나버리는 논란이 자연스러운것인지 생각보다 서둘러 내려진 결론을 보며 한층 씁쓸함이 느껴진다. 결국 언론의 한 방이 이 사건을 천천히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대비책과 예방책을 마련할 수 있는 사회의 자정 능력을 앗아간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더하다. 결국 뭐 하나 변한게 없이 사건이 끝나버린 재범군 사건, 이 사건에서 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다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상업적 본성을 드러낼수밖에 없었던 기획사 JYP와 한국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아버린 재범군, 또 한번 감정의 뇌관에 상처를 입은 한국 연예계의 소비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아 참, 언론은 좀 득을 봤으려나...?